마주하는 시간
버스는 가파른 언덕들을 한참을 올라가고 서야 멈춰 섰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택들 사이에 그것들만큼이나 붙어 있는 골목길들이 보였다. 처음 그릴 때는 꽤나 다채로운 색을 지녔을 것 같은 낙서들이 세월을 여러 해 맞은 것처럼 친근하게 벽에 스며들어 있었다. 성난 강아지, 막대기를 든 골목대장, 해, 달, 그 밖에 여러 가지 것들이 골목길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이런 골목들이 끝나는 곳에 병원으로 통하는 작은 길이 나 있었다. 길은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은 지 잘 닦여있는 길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병원은 여느 병원들과 같이 전체적으로 하얀 색을 띄고 있었다. 색은 조금 바래있었지만 칠이 벗겨진 곳이나 무성한 잡초들은 보이지 않아서 잘 정돈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단정한 베이지색 간호사복을 입은 백발의 간호사가 나를 맞이해 주었다. 내가 아버지 성함을 말하자 간호사는 잠시 무언가를 찾는듯하더니 복도 끝에 엘리베이터를 가리키며 504호로 가라고 했다.
병원은 생각했었던 것보다 시설은 좋아보였다. 방은 너무 촘촘한 느낌을 주지 않고 적당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었고, 커다란 창들이 병원의 분위기를 밝혀 주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로 가는 복도 모퉁이에는 파란색 글씨로 커다랗게 휴게실이라고 붙어 있었다. 휴게실에는 환자복을 입은 할아버지 두 분이 바둑에 열중하고 있었다. 휴게실 곳곳에는 관목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관목들은 적당히 구부러지고 주름져 있어서 여유로운 노년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나는 휴게실을 빠져 나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504호는 엘리베이터 바로 옆에 있었다. 방 앞에는 방금 식사를 하셨는지 반찬들이 조금씩 남아 있는 식판들이 올려 져 있었다. 방 안에는 네 개의 침대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고 커튼이 둘러진 제일 오른쪽 침대에서는 가족들의 말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침대 옆에는 5년 만에 본 아버지가 많이 달라진 채로 앉아 있었다.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높이 높이 날아라 우리 비행기.”
하늘에 비행기가 지나간 자리를 볼 때면 나는 항상 노래를 부르며 집에 갔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 노래를 부르면 나도 비행기처럼 조금이라도 빨리 집에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노래를 부를 때마다 나는 커서 꼭 비행기를 타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그래서 내가 타는 비행기가 저렇게 하늘에 길을 내고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우리 집은 커다란 하천다리를 건너 하천을 따라 쭉 늘어서 있는 갈대들을 따라가면 나왔다. 나는 하늘에 길을 못내는 대신 갈대들을 꺾어서 길을 만들었다. 그 무수한 갈대들을 보고 있으면 약간은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그런 건지도 몰랐다.그래서 나는 갈대 길을 만든 뒤에 꼭 뒤를 돌아서 그 길을 확인하곤 했다. 헨젤과 그레텔처럼 누가 나를 잡아가 버리면 이렇게 꺾어둔 갈대 길을 보고 누군가 나를 다시 찾아줄 같았다. 그리고 그때마다 내가 떠올린 사람은 아버지였다.
개나리가 가득한 버스정류장에서 304번 버스를 기다고 있었다. 하늘은 어두웠고 비가 조금씩 흩뿌리고 있었다. 나는 주머니를 뒤적여 오 백원짜리 동전 두 개와 백원짜리 동전 세 개 손에 쥐었다. 갑자기 커다란 소리가 났고 비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정류장 뒤편의 슈퍼의 입간판이 비바람에 덜그럭 거리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점점 비바람이 거세져 눈을 뜨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저 멀리 304번 버스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내 옆에는 어느새 와 있었는지 검은 후드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비에 반쯤 젖은 천 원짜리 한 장이 위태롭게 들려 있었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남자의 천원은 반으로 찢어진 채 물웅덩이로 떨어졌다. 나는 서둘러 버스에 올라타려 했지만 손에 쥐고 있던 동전들을 놓치고 말았다. 버스는 그대로 떠나갔고 나는 웅덩이 속에서 동전들을 건져냈다. 나는 얼른 동전들을 찾아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싶었지만 웅덩이 속 반쪽짜리 천원이 웅덩이 위에 떠서 나를 자꾸 방해했다. 천원을 치워 냈을 때 나는 웅덩이 위에 비친 검은 후드를 입은 남자를 보았다. 나는 얼른 동전들을 쥐고 빗속을 뛰어갔다.
“나쁜 꿈이라도 꾼 거니?”
신문을 네 번 접어서 보고 계시던 아버지가 나를 깨우며 물으셨다. 나는 손에 흥건한 땀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는 무릎이 볼록하게 튀어나온 츄리닝을 입고 소파의 가장자리에 파묻혀 계셨다. 정확히 무릎을 표시하고 있는 츄리닝이 튀어나온 만큼 아버지는 신문과 함께 소파에 묻혀 계셨다. 아버지는 신문을 읽을 수 있을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신문을 읽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지만, 아버지는 그런 시간조차 부족한 그렇게 바쁜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우리 집은 다양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MADE IN CHINA’를 달고 있는 고려청자가 가득할 때도 있었다. 사실 그것이 조선청자건 고려백자건 상관이 없었다. 우리 집엔 항상 ‘물건’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항상 그것들을 팔러 다니셨고 나는 아버지 대신 아버지가 팔지 못해 남기고 간 아버지의 흔적들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았다. 다만 조금의 차이가 있다면 그 흔적들을 종류에 따라 우리 가족들의 일상도 달라진다는 점이었다.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은 단연 어머니였다.어머니의 직업은 아버지가 몸이 불편하시기 전까지 계속해서 바꿨다. 정확하게 나눌 수는 없었지만 보통 파는 쪽은 아버지였고 만드는 쪽은 어머니였다. 자연스럽게 어머니는 다양한 종류의 음식, 오만가지의 물건들, 의학상식, 법률정보, 부동산 등등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것들을 섭렵한 만물박사쯤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바라본 어머니는 그랬다. 아버지가 물건들을 바꾸실 때마다 우리의 어머니는 점점 더 그 영역을 넓혀 가셨다.
아버지가 한창 떡 장사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떡 역시도 어머니가 만드셨는데, 확실한 건 그렇게 뛰어난 어머니도 처음에는 그렇게 뛰어나시지 않다는 것이었다. 장사 초반에 만드신 대부분의 떡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팔리지 않았고 우리 가족에게 팔렸다. 별로 말수가 없고 조용하던 우리 누나와 매일 매일이 도전의 연속이던 여동생은 반응은 달랐지만 해야 할 일은 똑같았다. 그것은 남은 떡을 먹는 일이었다. 누나는 책을 항상 옆에 끼고 떡을 먹었다.
누나가 읽는 책은 보통 일본소설 이었다. 나는 종종 그 책들을 읽어보려 했지만 그 시절의 나는 이해하지 못한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여기저기 깔려 있는 그런류의 소설들이라 나에게는 큰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누나는 그런 소설들을 방에 쌓아두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자연스럽게 책을 집었다. 나에게는 집에 쌓여있는 잡동사니들과 책 읽는 누나가 어우러져 하나의 자연스러운 장면으로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누나는 그렇게 떡과 함께 책을 읽었다.
누나가 집과 같았다면 여동생은 고양이 같았다. 집에 들어온 것 같다가도 어느새 인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동생은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나 하천의 풀을 만지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조금 먼 곳을 가고 싶으면 항상 나에게 같이 가 달라고 조르곤 했다. 나는 집에 거의 들어오지 않는 부모님을 대신해 어느 정도의 책임감을 가지고 동생과 함께 떠나기도 했다. 거창하게 떠난다고 했지만 우리가 떠났던 곳은 대부분은 옆 동네의 어느 골목이나 작은 산을 넘어가면 나오는 바닷가 같은 곳들이었다. 동생은 그곳 하나하나를 몸에 새기는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그곳, 그 장소를 몸에 새기듯 도전적이지만 차분하고 천천히 관찰했다. 눈, 코, 손 자기가 가진 모든 장비를 이용해 향기, 풍경, 느낌, 분위기 등을 담아내는 듯 했다. 나는 그런 동생이 이상하면서도 가슴 한쪽이 아련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오래 바라보지 못했다.
그렇게 여행을 떠날 때에도 우리 손에는 떡이 들려 있었다. 떡의 종류는 팥떡, 인절미, 가래떡 등등 다양했지만 이상하게도 맛은 거의 다 비슷했다. 우리가 허기에 지쳐 떡들을 먹으며 집으로 돌아올 때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하천을 따라 갈대가 반짝였다. 집으로 돌아가면 누나는 항상 일찍 다니라는 말만 남기고 다시 책 속으로 돌아갔다. 동생을 씻기고 남아 있는 떡들을 집어 들면서 우리는 잠이 들었다. 떡집을 할 때는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 얼굴을 보기가 무척 힘들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들어오셨고 아침 일찍 나가시는 것 같았다. 집에 남겨진 떡들을 보고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가 들어왔다 가셨다는 것만을 추측할 뿐이었다.
“아드님 되시나요?”
이제 갓 이십대 중반정도로 되어 보이는 앳된 간호사가 병실에 들어오며 말을 걸었다.
“요즘은 많이 나아지시긴 하셨지만 가족 분들을 많이 찾으셨어요. 그동안 바쁘셨나보네요?”
앳된 외모와는 달리 힐난하는 투로 말하는 간호사의 말에 나는 할 말이 없어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댁은 누구요?”
아버지는 또렷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치매로 5년 전에 이 병원에 들어오셨다.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하면 나아진다는 당시 담담의사의 추천으로 들어온 곳이 이곳이었다. 물론 공기가 좋다고 나아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이곳으로 아버지를 모시고 왔다. 어머니가 계셨다면 분명히 반대하셨겠지만 반대할 어머니도 없었고 우리들은 너무 바빴다.
우리는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대게를 먹고 아버지를 모시고 이곳으로 왔다. 대게를 먹으며 대화는 거의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식사를 제대로 한 것이 언제인지도 몰랐지만 우리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대게를 앞에 놓고 대화 없이 각자의 대게에 집중했다. 잘 잘라져 나온 대게는 조금만 포크로 건드려도 살이 쭉 나왔다. 나는 너무나도 쉽게 빠져나오는 살이 서글펐다. 내가 그렇게 기다리던 아버지와 함께하는 시간이 이렇게 쉽게 빠져나가는 것 같아서 나는 더욱더 대게 살을 빼는 일에 집중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병원으로 들어가셨다.
“아버지, 저 재형이에요.”
“나 아들 없어. 딸만 둘인데 외국 나가 있어. 큰 애는 캐나다서 큰 회사하는 외국 놈이랑 사는데…….”
간호사는 나를 잠시 불러내었다.
“매번 이야기가 바뀌긴 하세요. 누나분이랑 동생 분은 같이 안 오셨나 봐요?”
“네. 바빠서.”
“정말 외국에 계시거나 그러신 건 아니죠?”
“가끔 나가 있을 때도 있죠. 항상 바빠서 그렇죠 뭐.”
나는 간호사에게 간단히 목례를 하고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는 언제 했는지도 모르는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야. 나 요즘 마감시즌 이잖아.”
“아버지 만나러 왔어.”
“얘기라도 하고 가지. 근데 나 지금 원고가 들어와서 바쁘다. 나중에 통화하자.”
그리고 동생에게도 전화했다. 국제전화는 돈이 많이 든다는 안내음성이 나왔다.
“오빠, 어쩐 일이야. 나 이탈리아야. 이제 곧 출발해야 되는데.”
“아버지 보러 왔어. 지금 병원이야.”
“아버지 병원? 아 나 일단 나가야 되거든 귀국하면 통화해.”
개나리꽃이 잔득 늘어선 놀이터엔 아무도 없었다. 놀이터에는 단출하게 딱 필요한 놀이기구들만 있었다. 미끄럼틀, 그네, 모래사장, 나는 모래사장 색 교복을 입고 미끄럼틀로 뛰어올라갔다. 두세 걸음 만에 미끄럼틀에 다 올라가 다리를 미끄럼틀에 늘어뜨리고 앉았다. 하늘에 구름이 가득했지만 햇빛이 어떻게든 그 사이를 뚫고 비집고 나와 있었다.
그네에는 어느새 왔는지 검은 후드를 입은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그네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는 한참을 남자를 바라보다가 문득 수학학원 시간이 생각났다. 손목시계를 보니 이미 시간은 다섯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몸을 밀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려고 했다. 분명 올라 올 때에는 짧은 미끄럼틀이었는데 계속 미끄러져 내려가도 놀이터 땅이 밟아지질 않았다. 나는 손목시계를 보며 수학학원에 늦을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을 미끄럼을 타고 내려갔다. 그네에는 아직도 검은 후드를 입은 남자가 있었고 나는 계속해서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남자가 그네에서 일어섰을 때 나는 비로소 땅으로 내려왔다. 나는 수학학원으로 빨리 달려가려 했다. 그러다 그네에서 일어난 남자와 부딪혔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보니 남자는 없었고 나는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오랜만에 맞는 가족 전부가 있는 주말 아침이었다. 그 당시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지만, 우리 집에는 봉고차가 한대 있었다. 아버지는 그 봉고차로 여러 사람을 태우고 다녔다. 학원 아이들을 태우기도 했고 언제는 공사장 인부들을 태우기도 했다. 그리고 그때는 가족들을 태우기로 결정하신 것 같았다.
“아빠 나는 놀이공원가고 싶어요.”
“무슨 놀이공원이야. 온천에 가면 안돼요?”
“여보 거 놀러 가는데 김밥이라도 좀 싸지?”
“그렇지 않아도 싸고 있어요. 당신은 나가서 사이다나 좀 사와요.”
“사이다야 가면서 사면되지. 시원하게.”
가족들은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며 들떠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가족들의 목소리였다. 아버지는 방에 가셔서 무엇인가를 한참 찾으셨다. 그리고는 꼬깃꼬깃한 지도를 들고 나오셨다. 아버지는 마치 구겨진 고려청자라도 피시는 것처럼 구겨져있는 지도를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펼치셨다. 가족들은 아무 말 없이 그 숭고한 작업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지도의 주름이 펼쳐질 때마다, 지명이 등장하고 바다와 산이 표시될 때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그때의 나는 집과 하천밖에는 몰랐다. 엄청난 여행이라고 해봐야 동생과 함께 두 시간 정도를 걸어서 떠나는 수준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지도를 펼치는 것만으로도 내가 여행을 떠나는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리고 내 눈에는 바다가 들어왔다. 일본과 맞닿아 있는 그 바다에 나는 빠져들었다.
“다들 가고 싶은 곳 있으면 한 번 찍어봐.”
“온천에 가자니까요.”
“아니 놀이공원 가자고.”
“재형이는 어디가고 싶어?”
“7번국도요.”
나는 그때도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해바다를 가로지르는 곳에 7번 국도라고 쓰인 도로가 보였다. 나는 그때 그 도로가 가고 싶었다. 왠지 바다라고 얘기하면 바다에 가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바다로 가는 길로 가면 결국에는 바다가 나올 것이라는 아주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낡은 노란색 봉고를 몰아 7번국도로 향했다. 나는 파도가 만드는 하얀 물거품들을 보며 사이다를 마셨다. 가족들은 너무 들뜨지도, 그렇다고 너무 우울하지도 않은 기분으로 보였다. 어머니가 싸준 김밥은 짭조름했지만 달콤한 사이다와 잘 어울렸다. 바다는 넓었고 파도는 계속해서 밀려왔다가 밀려갔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와는 조금 떨어져 무슨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파도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가끔씩 언성이 높아질 때도 있었다. 여동생은 바위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고 누나는 모래사장 위에 앉아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때 바다보다 지도 위의7번국도가 훨씬 더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병원을 나서니 봄바람이 따스하게 불고 있었다. 병원 뒤편에는 넓은 휴식공간이 꾸며져 있었는데 그곳에는 철쭉꽃이 쭉 늘어서 있었다. 벤치들이 여기저기 조성되어 있어서 환자가족들은 환자들을 데리고 많이 나와 있었다.
철쭉이 많이 피어있는 곳에 꼬마여자아이 하나가 철쭉을 꺾다가 아이의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한테 혼이 나고 있었다. 남자는 아이와 시선을 맞추고 열심히 자상한 얼굴로 설명을 하고 있었다. 아이의 손에 든 철쭉꽃들은 남자의 충분한 설명이 끝나고 나서야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아이는 철쭉꽃을 잔뜩 들고 휠체어를 타고 있는 할머니에게로 뛰어갔다. 할머니는 정말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는 철쭉꽃들을 들고 할머니의 품에 안겼다. 나는 갑자기 그곳에 있기가 불편했다. 교과서에서나 볼법한 행복한 장면이 나에게는 불편하고 역겨웠다. 문득 어머니의 생일이 이맘 때 쯤 이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나는 철쭉을 꺾었다. 가방에는 책 대신 철쭉이 들어 있었고 내 양 손에도 가득 철쭉이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누나는 책 대신 국자를 들고 있었다. 냄비 안에서는 미역국이 끓고 있었다. 누나는 나를 부르고는 국자에 국물을 조금 떠서 먹여줬다. 미역국은 그냥 뜨거운 물에 미역을 넣은 맛이었다. 한마디로 맛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고 누나는 다시 미역국에 몰입했다. 여동생은 한창 미술에 빠져 있었다. 아마 어머니 아버지를 그리고 있는 듯 했다. 그림에는 화목한 가족들이 들어 있었다. 그날은 어머니의 생일이었다.
우리 남매는 그렇게 모든 준비를 갖춰놓고 어머니를 기다렸다. 언제나 그랬듯 어머니는 늦으셨다. 우리는 마당에서 하나 둘 잠이 들었다. 잠결이라 잘 생각은 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굉장히 기뻐하셨던 것 같다. 아마 아버지가 우리들을 안아 방안으로 옮겨 놓았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잠결에도 이런 상황들을 기억할 수 있었던 건 잠이 들기 직전 어머니의 뒷모습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많이 얇아 지셨던 것 같다. 내가 두꺼워 진 것인지 아니면 어머니가 왜소해 지신 것인지 그때는 몰랐다. 그 후로 어머니는 내가 그때 꺾어 온 철쭉들을 방 한 쪽에 두고 치우지 않으셨다.그건 어머니가 그 철쭉을 너무 소중히 여기신 것도 있었지만 그 후로 내가 철쭉을 꺾어올 일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벤치에 앉아 환자 가족들을 보고 있으니 다시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햇살은 따스했고 나는 벤치에 팔을 베고 누웠다.
“여기서 주무시면 안돼요”
깜빡 잠이든 것 같다. 밖은 이미 어둑해지고 있었다. 아까 아버지 병실에 있었던 간호사였다.
“아이고 깜빡 잠이 들었네요. 퇴근하시나 봐요?”
“그럼요. 지금 시간이 몇 신데. 환자 늘리고 싶지 않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주무세요.”
간호사복을 벗고 있으니 대학생 티가 확 났다. 오월 이였지만 밤은 좀 쌀쌀했다. 몸을 조금 떨고 있으니 간호사는 잠시 따라오라는 듯 병원으로 나를 데려갔다.
“근무 시간은 끝났지만 특별히 드리는 거예요.”
간호사는 따뜻한 쌍화차를 한 병 건넸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쌍화차를 넘겼다. 몸이 따뜻해지면서 긴장이 풀려 노곤함이 느껴졌다.
“치매병동이라 힘드시죠.”
“아니요. 딱히 그런 건 없어요. 그냥 기억을 잃는 건 슬픈 거잖아요. 내가 자주 가던 맛집을 다시는 못 찾아간다는 거니까.”
“맛집이야 다른데 찾으면 되죠.”
“거기 갔다는 것도 기억 못하실 껄요.”
무엇인가를 잊는 다는 것은 아마 슬픈 일일 것이다. 더 이상 누군가를 추억할 수 없고 떠올릴 수 없고 찾아갈 수 없으니까.하지만 치매에 걸린다면 아마 그런 것조차 다 잊어버려서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치매에 걸린 본인은 오히려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버지의 경우에는 오히려 치매에 걸린 지금이 더 행복할 것이다. 잊어버리는 것이 더 나은 경우도 있다.
우리 집 마당에는 온갖 동물들이 드나들었다. 동네 개들은 물론이고 가끔 하천에서 길을 잃은 오리들이나 겨울잠을 자다 깬 두꺼비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했던 것은 한 마리의 고양이였다. 많은 고양이들이 마당을 드나들었지만 그 녀석은 좀 특이했다. 갈대 속에 숨으면 거의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그 녀석은 완전한 ‘갈대’색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고양이를 갈대라고 불렀다.
우리 집 마당이 익숙해진 고양이들은 식구들만 보면 밥을 달라고 울어대면서 머리를 비볐지만 갈대만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우리 집 앞을 지나다녔다. “밥이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다.” 라는 식의 마인드를 가지고 갈대는 우리 집을 찾았다. 이렇게 쿨한 녀석은 신기하게도 매일 해질녘쯤이면 우리 집에 왔다.
우리 집 식구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갈대를 반겼는데, 보통 누나는 무심한 듯 마당에서 책을 보다가 고구마줄기 같은 먹을 것들을 던져주었다. 동생은 좀 더 적극적으로 갈대를 쫒아 다녔다. 털실 같은 것을 굴려 관심을 끌려고도 하고 나뭇가지에 종이를 달아 여기저기 흔들어 보기도 하였다. 갈대는 처음에는 관심을 보이는 듯 했으나 얼마가지 않아 동생과의 놀이는 거의 하지 않게 되었다. 나와 갈대는 서로에게 대하는 태도가 비슷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꾸준히 서로에게 관심을 보이는 관계라고나 할까? 나는 갈대에게 밥을 줄때도 있었고 장난감을 던져주기도 했지만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갈대 역시 나에게 호감을 보이는 듯 했지만 그 이상 다가오거나 멀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이런 갈대의 모습이 좋았다.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지만 항상 우리 곁에 머무는 이런 점이 좋았다.
“혹시 고양이랑 개 중에 뭐가 좋아요?”
“고양이요.”
“그럴 줄 알았어요.”
“어떻게 알았어요?”
“그냥 느낌이에요.”
“그쪽은 뭐가 좋은데요?”
“저는 무조건 개요.”
“음 뭐 특별한 이유라도?”
“개는 명확하잖아요. 좋아하거나, 경계하거나. 얼굴에 다 써 있어요. 나는 네가 좋다고. 아 그리고 꼬리에도 써 있어요. 아무튼 누군가를 그렇게 열렬히, 전적으로, 온몸으로 좋아해주는 게 저는 좋아요.”
간호사와 얘기하면서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고양이었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면 개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항상 우리 곁에 거리를 두고 우리를 바라보고 계셨다. 물론 이것을 느끼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리는 아버지를 거의 보지 못했고 당연히 대화도 없었다. 병원에서 나오는 지금에야 어렴풋이 우리를 마주보시지 않는 아버지가 보인다. 아버지는 등을 돌린 채 우리를 바라보고 계셨던 것 같다. 그리고 문득 어머니는 개, 고양이 어느 종류로 딱 분류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 골목길 아마도 5시가 넘어가는 시각인 것 같았다. tv에서는 한창 밀림에 홀로 떨어진 소년이 늑대들과 함께 살아가는 내용의 만화영화가 유행하고 있었다. 나는 밀림에 홀로 떨어진 소년처럼 골목에 떨어진 것 같았다. 그 소년과 다른 점은 나에게는 같이 있어줄 늑대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걸어가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모퉁이를 돌고 또 돌다가 문득 검은 후드를 입은 남자와 마주쳤다. 나는 갑자기 무서워져서 재빨리 모퉁이를 다시 빠져나갔다. 남자를 만나고 도망가기를 반복했다. 이제는 내가 남자를 쫒는지 남자로부터 도망가는 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리고 문득 내가 왜 남자를 피해 도망가는 지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내가 왜 남자를 무서워하고 보고 싶지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다시 모퉁이를 돌아 들어가니 남자가 보였다. 나는 조금씩 남자에게 다가갔다. 찬찬히 얼굴을 보니 남자는 나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검은 후드를 쓴 내가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술을 잔득 드시고 웬일인지 집에 일찍 오셨다. 아버지의 손에는 두툼한 돼지고기봉지와 소주가 들려있었다. 어머니는 얼굴만 빨개지신 채로 봉지들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날 저녁은 우리 집에서 처음 고기를 굽는 날이자, 어머니가 취하신 걸 본 처음이자 마지막 날이었다. 우리는 어머니와 함께 마당에 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저 멀리서 담배만 피우고 계셨다. 누나는 파 조리개를 만들고 나와 동생은 열심히 엄마 뒤를 쫓아 다녔다. 그날의 고기냄새는 정말 좋았다. 상추들이 놓이고 아버지는 말없이 상에 앉아계셨다. 나는 바삭하게 구워진 고기를 보고 있었다.
“나는 예전에 오드리햅번처럼 살고 싶었어. 예쁘고 주목받고 누군가의 로망이기도 한 그런 사람.”
어머니는 분명 취해계셨고 저런 말씀을 하시는 건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애먼 파 조리개만을 뒤적이며 계셨고, 누나는 가만히 있으라는 듯 우리를 몇 번 두드렸다. 어머니는 이런 파격적인 이야기를 마치 “오늘 저녁은 계란후라이다.” 라고 말하시는 듯 일상적으로 이야기 하셨다.
“엄마는 지금이라도 오리드햅번처럼 살기로 했어. 젋은 햅번은 아니지만 나이든 햅번처럼 아프리카로 가기로 했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맛있던 고기냄새도 더 이상 나지 않는 듯 했다. 어머니는 아주 담담한 표정으로 우리를 한명씩 안았다. 하지만 우리는 알았다. 엄마는 속으로 울고 있었다. 우리를 안아주던 손길은 하나도 담담하지 않았다.
“나는 내 인생을 찾고 싶어. 나중에 미친년이라고 하고 엄마를 원망해도 좋아. 여기 더 있다가는 영영 인간 김현미를 못 찾을 것 같아.”
아버지는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하셨고 동생은 엄마한테 매달려 울었다. 누나는 덤덤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슬펐지만 그렇다고 매달려 울고 싶지는 않았다. 때마침 갈대가 근처에 왔다. 나는 처음으로 집에서 구워 먹는 고기를 갈대에게 줬다. 그리고 갈대가 고기를 먹는 것을 지켜보았다. 왠지 이렇게 먹이를 주고 있으면 이 시간을 조금이라도 붙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단 세 마디를 남기고 방문 안으로 사라지셨다. 내가 그날 고기를 마저 먹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그날 밤 우리 가족은 다 함께 잠을 잤고, 자고 일어나 보니 어머니는 계시지 않았다. 내 등에는 어머니의 감촉과 축축하게 젖은 런닝이 느껴졌다. 나는 이상하게도 아무렇지 않았다. 눈에서 흘러야할 눈물이 등에서 흐르는 듯 했다.
새벽녘에 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 같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떠나는 엄마의 뒷모습은 가벼웠다. 그때 내가 바란 것은 단 하나였다. 눈물을 다두고 가신 어머니가 우리를 짐이었다고만 생각하지 않아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설령 짐이었다 하더라도 이제는 내려놓고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에는 다 시들어버린 철쭉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엄마가 떠나고 나신 뒤 아버지는 여전하셨다. 조금 달라진 점이라면 더욱 더 얼굴보기가 힘들어 지셨다는 거다. 아버지의 노란봉고는 어느새 트럭으로 바뀌었고 트럭에 실리는 물건들은 매번 바뀌었다. 가족 구성원도 바뀌고 집에 놓아지는 물건들도 바뀌었지만 바뀌지 않은 건 아버지 뿐 인 것 같았다. 누나는 여전히 책 속에 살았고 동생은 싸돌아 다녔지만, 누나는 학교를 벗어났고 동생은 싸돌아다니는 범위가 늘어났다.
아버지를 볼 기회는 별로 없었지만 아버지는 우리를 보면 항상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바쁘게 살지 마라.”
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하천 옆 옛날 집에는 아버지와 아버지가 남겨두신 물건들만 남았다. 책만 잡고 있던 누나는 더 많은 책들 속으로 들어갔다. 종로에 있는 꽤나 이름 있는 출판사에 들어간 누나는 바빠 보였지만 즐거워하는 듯 했다. 자주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집으로 가끔 배달되는 책들 때문에 누나가 어떤 책들을 만들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동생은 끊임없는 도전 끝에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하천을 뛰어 다니던 애가 어떻게 실기를 봤는지를 모르겠지만 꽤나 우수한 성적으로 유명한 대학교에 입학을 했다. 동생 역시 연락이 자주 되지는 않았다. 가끔 술에 잔뜩 취해서 갈대가 보고 싶다는 소리를 하고 끊는 것이 다였다.
나는 운이 좋게도 졸업과 동시에 돈을 다루는 회사에 들어갔다. ‘돈’이라는 것은 만만한 놈이 아니었고, 그것을 다루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 또한 쉽지 않았다. 생택쥐베리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고 했지만 그곳에서는 보이는 것이 더 중요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그 세계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재형아 아버지한테 한 번 가야봐야 될 것 같아.”
누나와의 통화였다. 아버지가 종종 이상해지셨다는 이야기는 종종 들었다. 누나는 동사무소에서 계속 연락이 온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가 집을 기억을 못하셔서 동사무소를 찾으셨다는 이야기, 다른 동네에서 겨우 집을 찾으셨다는 이야기,등등 확실한 것은 아버지가 이상해지셨다는 거다. 그때에 우리에게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많이 희미해져 있었다. 우리 주위에는 아버지 생각을 하지 못할 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다. 우리는 ‘바빴다.’ 고 할 수 있었다.
“아버지 요즘 괜찮으세요?”
아버지의 소식도 우리 가족을 불러 모으지 못했다. 누나와 동생은 오지 못하고 나는 혼자 내려왔다. 오랜만에 찾아 뵌 아버지는 똑같으셨다. 집은 물건들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지만 내가 떠나던 그날과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봉고차는 마당 한 편에 서 있었다. 그것은 아직도 아버지가 일을 하고 계신다고 나에게 증언을 하는 듯 했다. 동물들이 더 이상 찾지 않는 다는 점을 빼면 집은 비슷해 보였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괜찮다. 나이가 들어서 깜빡깜빡하는 것뿐이야.”
동사무소 직원의 말로는 치매검사를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는 병원에 가시는 것을 한사코 거절하셨지만 건강검진이라는 구실로 나는 어떻게든 아버지를 모시고 갔다. 의사는 망설이고 의심의 여지를 남겨 두면서도 명확하게 아버지의 치매가 진행되고 있다고 이야기 했다.
병원비는 얼마 들지 않았다. 아버지의 ‘치매’라는 병 덕분에 시에서 지원하는 괜찮은 병원에 저렴하게 들어와 지낼 수 있었다. 우리는 처음에 아버지를 누가 모셔야 할지에 대한 토의를 계속했다. 토의라기보다는 아버지라는 짐을 누구에게 떠넘길 것인지에 대한 논쟁에 가까웠다.
우리는 결국 이 짐을 다른 곳에 내려놓기로 결정했다. 누나는 자신이 좀 더 많은 금액을 내겠다고 했고 동생은 울먹이며 아버지를 꼭 자주 보러가지고 했다. 나는 이렇게 아버지라는 짐을 덜어냈다. 하지만 그 대신 마음속에 무엇인가 새로운 짐이 생겨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를 치매병원으로 모시고 가는 날, 누나와 동생을 옛날 집에서 만났다. 아버지는 이 집을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지만, 우리의 계속적인 권유로 결국에는 병원에 가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집을 떠나는 날, 아버지는 잡동사니들 사이에서 무언가를 계속 찾으시는 것 같았다.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작업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나는 그 쓸쓸하고 슬픈 장면을 지켜보기가 힘들었다. 무엇을 찾으려 하시는지는 몰랐지만 아마 그것을 찾으실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누나는 책들을 잔뜩 들고 차로 옮기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고 동생은 하천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 장면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담았다. 가족들은 말이 없었다. 그것이 오히려 우리들을 더 편안하게 했다.
“아버지는 또 언제 보러 오세요?”
“다음엔 같이 와야죠. 다같이.”
“그러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거야 모르죠. 그래도 간호사님 덕에 좀 알 것 같네요.”
“뭘요?”
“저는 좀 개처럼 살아야겠다는 걸요.”
간호사는 병원 근처에 산다면서 밝은 얼굴로 골목을 내려갔다. 달은 구름에 반쯤 가려져 달빛이 약했다. 약해진 달빛만큼 밝아진 가로등 사이로 간호사의 뒷모습이 보였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래프와 수치들이 보였다. 또다시 나는 바쁨으로 돌아왔다. 서류를 찾기 위해 책상 서랍을 열었을 때, 서류들이 너무나도 빽빽하게 꼽혀 있었다. 그 사이에는 어떤 유연한 것도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서류들은 너무도 바빠 보였다. 나는 천천히 갈대를 꺾으며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다시 찾은 집은 그대로였다. 아버지의 뜻대로 집은 팔지 않았다. 먼지 쌓인 방에 짐을 던져 놓고 나는 하천으로 나갔다. 하천 주위는 이제 개발이 진행되어 깔끔한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다리는 크고 튼튼해져 있었고 주위에는 높은 집들이 많이 보였다. 하지만 갈대는 여전히 산책길을 따라 솟아있었다. 나는 산책길을 따라 걸으며 갈대를 꺾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이제야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나는 뒤를 돌아 꺾어둔 갈대 길을 봤다. 헨젤과 그레텔도 다시 찾아올 만큼 잘 만든 갈대 길 이었다. 천천히 집으로 돌아와 핸드폰을 보니 부재중 전화가 세건 떠 있었다.
누나, 동생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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