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 - 평범한 사람

by 김day posted Nov 2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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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

 

Written by day

 

나는 어른이 되지 않을 줄 알았다.

 

분명히 그 전에 죽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영웅은 수명이 짧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모험과 도전으로 제 명을 재촉하는 게 바보 같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영웅이 영웅이라 불리는 이유는 수많은 모험과 도전 속에서도 죽지 않고 다음 모험을 하기 때문이란 걸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어른이 되지 않을 줄 알았다. 모험이라 해봤자 모르는 곳에서 길을 잃은 것뿐이고, 도전이라 해봤자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시도뿐인데 그것조차 늘 실패하기 때문이었다. 영웅이라 불리는 것이 힘들다는 걸 알기에 나는 일찍이 영웅이 되기를 포기했다. 그래서 나는 분명 어른이 되기 전에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죽지 않고 어른이 되어가는 나를 바라보는 것은 꽤나 고통스러웠다. 지갑 안에 고스란히 있는 유언장이 쓰일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또한 생각보다 답답했다. 나는 책상 위에 놓여있던 책가방을 메고 집에서 나와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겨울이라 그런지 밖으로 나와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꺼져 있는 가로등은 마치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사람 대신 서있는 것만 같았다. 사람 대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딱 서있는 것만. 가로등은 사람들한테서 서있을 수 있는 허락만 받은 것이었다. 나는 잠시 가로등 옆으로 가서 그 옆에 섰다.

내가 지금 쓰레기로 보일까.

나는 쭈그려 앉았다. 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가로등 옆에 쓰레기를 버리곤 하는데, 이렇게 앉아있으면 나도 쓰레기처럼 보일까 궁금했다. 사람은 분리수거가 되지 않을 텐데, 그렇다면 나는 일반쓰레기가 되는 걸까. 어머니는 쓰레기차가 오는 새벽 3시에 맞춰 밖에 쓰레기를 버리러 가곤 했다. 내가 새벽 3시까지 여기에 있으면 분명 이 앞 주택에 사는 사람이 나를 발견할 것이다. 나를 발견하면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했다. 나를 흔들어 깨워서 집 안으로 데리고 갈까, 아니면 그냥 쓰레기 취급할까. 여기서 앉아 쭉 기다려볼까 하다가 새벽 3시까지 여기서 쭈그려 앉아있는 건 힘들 것 같아, 그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평범함 중에서도 되게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은 처음 인지한 것은 중학교 이학년 때였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첫째도 아니고 둘째로 태어난 여자애. 나는 태어날 때부터 평범한 아이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건 부모님의 태도였다. 세 살 터울의 언니도 여자애지만 첫째라는 이유로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언니는 태어나기도 전에 한 번 죽을 뻔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관심을 받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아무런 장애물과 탈 없이 무사히 태어난 애였다. 손이 많이 가는 언니를 보고 자라, 어렸을 때부터 부모 손을 별로 타지 않게 되던 나는 자연스레 손이 덜 가는 애가 되었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대견하다며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나는 언니처럼 뱃속에서 탯줄이 목에 한 번 감겼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원래라면 내게로 왔어야 할 내 몫의 관심은 몽땅 셋째에게로 쏠렸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셋째는 부모님이 그토록 원하던 남자애였기 때문이었다. 뒤늦게 태어난 남자애를 어머니는 귀하게 여겼다. 그렇다고 오냐오냐하고 키운 것이 아니었다. 다른 애들처럼 자유롭게 풀어 놓되, 다른 애들에 비해 더 챙긴다는 말이었다. 어렸을 때 받은 보이지 않아도 보일 수밖에 없는 차별이 서러웠던 나는 한 번 어머니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왜 걔랑 차별해.

어머니의 대답은 당연하다는 투로 입 밖으로 나왔다.

걔는 남자애잖아.

그 말 한마디로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맞아, 걔는 남자애야. ‘그래서 어쩌라고?’ 같은 말은 구석에 눌러 담을 수밖에 없었다. 보일 듯 말듯하지만 내 눈에는 선명하게 보이는 어머니의 찌푸려진 미간이 더 이상 묻지 말라고 내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자애 둘, 남자애 둘이면 딱 좋겠다 싶어 아이가 많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뛰어내린 절벽에는 또 다시 뱃속에 여자애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나를 가졌을 때와 똑같이 실망했고, 애를 지우려고 하다가 무슨 마음에서인지 그냥 낳았다. 여동생의 성격은 나와 비슷했다. 언니와 남동생한테 치중되어 있는 관심을 여동생도 이른 나이에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래서 여동생은 혼자 알아서 공부를 한다던가, 밥을 챙겨 먹는다던가 했다. 이른 나이에 혼자 하는 여동생이 내 모습과 같아 안쓰러웠다. 그러나 안쓰러워한다는 건 나 혼자만의 안일한 생각이었다. 나와 달리 여동생에게는 막내라는 이유가 항상 뒤따라오고 있던 것이었다.

그 후에 일어나는 일들은 뻔했다. 나는 네 명 중에서 가장 튀어보이려고 많은 것을 배우려 하다가, 결국 제 풀에 지쳐 그만두는 것을 반복했다. 그리고 실패자라고 뒤따라오는 꼬리표로부터 도망쳐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로 들어갔다.

 

구겨져가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고등학교 첫 날 모든 애들이 빳빳하게 펴진 교복을 입고, 주름이 없게끔 손으로 엉덩이를 한 번 쓸고 의자에 앉을 때 나는 혼자서 교복에 주름을 만들었다. 치마가 접혀있는데도 일부러 펴지 않고 앉고, 마이를 아무데나 둔다는 둥 교복은 마치 칼로 긋는 것 마냥 주름이 그어져갔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원래부터 주름져 있게 만들어서 나중에 나도 모르게 생긴 주름에 기분 나빠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더구나 주름져 있는 옷이 더 편했다.

바보라고 불리는 건 옷에 주름을 만드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호구처럼 모든 일에 가만히 있기만 하거나, 웃기만하면 자연스레 사람들은 내게 바보라는 말을 지껄였다. 혼나거나, 싸우거나,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할 때. 나는 항상 바보처럼 가만히 있었다. 한 번은 그런 적이 있었다. 애들끼리 별 거 아닌 일로 싸운 적이 있었는데, 다들 어린애 마냥 팀 가르기를 해서 그 사이에 꼈던 적이 있었다. 나는 또 바보같이 가만히 있었고, 그것이 애들의 신경을 건드렸는지 어느새 서로를 노려보고 있던 두 눈이 나를 향해 있었다. 사태가 악화되는 건 옷에 구김을 만드는 것보다 더 쉬웠다. 장난이라며 뺨을 툭툭 건드린다던가, 머리를 민다던가 하는 일이 점점 늘어가면서 나는 혼자가 되었다. 뺨을 건드릴 때마다, 머리가 밀릴 때마다 순수해서 더 지독한 악의는 마치 주먹으로 나를 강타하는 것만 같았다. 쓰레기 새끼. 어느새 나는 그렇게 불리고 있었다.

기숙사 학교라서 더 이상 도망갈 곳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기엔 차라리 학교가 더 나았다. 자퇴를 해볼까하고 생각을 했어도, 나는 겁쟁이였기에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유언장을 처음 쓴 것은 막 자퇴를 생각하게 된 고등학교 이학년 때였다. 유언장을 쓰고 나서 죽으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태생부터가 바보에다가 겁쟁이였기에 나는 자살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유언장을 쓰는 것은 그저 홀가분해지기 위해서였다. 나는 마치 나에게 편지를 쓰는 것 마냥 유언장을 썼다. 외로워지면 쓰고, 힘들면 쓰고, 어쩔 때는 하루에 다섯 번 씩이나 유언장을 쓸 때도 있었다. 그렇게 점점 많아져가는 유언장을 나는 그냥 버릴 수가 없어, 내 방에 있는 책상 서랍에 차곡차곡 넣었다. 하지만 이년동안 모인 유언장은 더 이상 책상 서랍에 담을 수 없게 되었고, 옷장 안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넘쳐나는 유언장을 나는 버릴 수도 그렇다고 가지고 있을 수도 없었다. 집안에 놓다가 누가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방 안에 유언장을 넣을 수 있을 만큼 넣어 가지고 나왔다.

집에서 30분 정도 떨어져 있는 놀이터가 보였다. 어렸을 때 언니와 동생들과 함께 놀던 놀이터였다. 시간이 많이 흘렀어도 변한 건 없었다. 페인트칠은 늘 벗겨져 있고, 움직이는 그네에서는 삐걱 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무도 민원 같은 건 넣지 않았다. 귀찮을뿐더러, 아이는 꽤 빠르게 어른이 되어간다는 어른들의 생각 때문이었다.

남동생이 아직 유모차를 떼지 못했을 때 일이었다. 언니와 나는 서로 앞 다투며 유모차를 밀려고 했다. 그러다 놀이터 바로 옆에 있는 내리막길에서 그만 유모차를 놓치고 말았다. 유모차는 빠른 속도로 내리막길을 타고 내려갔고, 그대로 앞으로 엎어졌다. 언니와 내가 급하게 유모차를 뒤집어 바로 세웠을 때는 이미 남동생의 이마에 반달 모양의 상처가 생겨있었다. 혼난 건 당연했다. 혼나서 운 것도 당연했다. 어머니는 울고 있는 남동생을 안고 달랬고, 언니는 옆에서 서러움에 울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남동생의 이마에 자리 잡힌 반달 모양의 상처를 바라보며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것조차 특별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놀이터 주변에서 발생했던 추억 같은 사건들은 꽤 많았다. 그 중에 하나가 싱싱카를 도둑맞은 사건이었다. 디즈니 공주 다섯 명이 그려져 있는 분홍색 싱싱카를 나는 놀이터 앞에 세워두고 그네를 탔다. 자전거 같이 자물쇠가 없는 싱싱카를 누군가 가져가는 건 밥 먹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어린이날 선물로 부모님께 받은 싱싱카는 감쪽같이 사라졌고, 그 날 나는 울었다. 선물 받은 것 중 가장 큰 것이라서 더 서러워 했던 나를 보며 결국 부모님은 똑같은 싱싱카를 다시 사줬고, 나는 그것을 타고 또 놀이터로 가 밖에 세워뒀다. 그리고 또 다시 싱싱카를 도둑맞았다. 다시 한 번 부모님한테 사달라고 말하기에는 쪽팔리고 미안해서, 나는 생일 때 똑같은 싱싱카를 사달라고 했다. 부모님은 한숨을 내쉬며 디즈니 공주 다섯 명이 그려져 있는 분홍색 싱싱카를 사줬고, 나는 바보같이 똑같은 일을 세 번이나 저질렀다. 그리고 더 이상 싱싱카를 사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야 내가 왜 그렇게 그것에 집착했는지 알 수가 없지만, 분명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놀이터 그네에 앉아 발을 구르고 있을 때 바지 주머니 속에 넣어놨던 휴대폰이 울렸다. 담임 선생님이었다. 나는 전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댔다.

왜 안 오니?

지금 가고 있어요.

아무리 수능 끝났다지만, 전이랑 후랑 너무 차이나는 거 아니니? 수능 끝나기 전에는 한 번도 지각하지 않았잖아.

지금 가고 있어요.

빨리 오렴.

.

수능이 끝나고 나서 학교에 간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학교의 일은 학생들을 수능 치기 전까지 잡아 놓는 거였고, 이제는 그 할 일이 다 끝났다. 그러나 아직도 학생들을 학교에 잡아놓고 불러들이고 있다. 오지랖인가, 생각해보다가 그네에서 일어나 놀이터를 나왔다. 수능이 끝난 아이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학교에서 나오면 대체 뭐하며 시간을 보낼까. 수능이 끝나면 12년간 세워뒀던 목표가 달성된 것과 동시에 허탈감이 밀려들어온다는 누군가의 말대로 허탈감은 수능이 끝난 직후에 바로 몰려왔다. 위에서부터 대대로 내려온 유서 깊은 허탈감은 꽤나 오래 갔고, 학교를 졸업하면 더 진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언장을 몇 번이나 썼는데도 허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종이에 적혀 형체가 생긴 후로 더 깊어지기만 했다.

 

나는 1학년 2학기 때부터 기숙사에 들어갔다. 1학기는 자리배치 시험을 쳤을 때 성적이 되지 않아 떨어졌다. 기숙사는 21실 이었다. 원거리와 성적순으로 40명 정도의 아이들을 뽑았고, 나는 다행히 성적이 좀 안 되도 거리가 멀어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들어가는 것이 끝이 아니었다. 나는 반년동안 같이 살 룸메이트를 구해야했고, 왕따가 된 이후로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기 때문에 룸메이트를 구하는 건 어려웠다. 다행인지 아닌지 학교에서 낙오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서현은 나와 다른 반의 아이였다. 그녀는 반에서 사이코 취급을 받았다. 가끔씩 혼자 왼팔을 붙잡으며 킬킬대고 웃거나 아무런 이유 없이 필통에서 칼을 꺼내 드르륵 거리며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룸메이트를 정하지 못한 아이들은 자동적으로 같은 방이 된다. 40명 중 룸메이트를 정하지 못한 애는 서현과 나뿐이었고, 우리는 같은 방이 되었다. 아직 3월이라 춘추복을 입어야 했던 나는 방에서 반팔을 입고 있는 서현의 모습을 보고서 그녀가 왜 사이코 취급을 받는지 알게 되었다.

서현의 왼쪽 팔목에는 여러 번 그은 칼자국이 찍혀있었다. 잘 때 반팔을 입고 자는 그녀는 기숙사에서 자는 첫 날에 내게 왼팔을 들이밀며 말했다.

봐봐, 아프겠지.

나는 흰 팔에 여러 번 찍혀있는 주름 같은 칼자국을 유심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한 거야.

자살 시도야?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두어 번 가로 저었다.

아니, 그냥 심심해서. 이 자국을 아무도 모르게 숨긴다는 게 얼마나 재밌는데. 스릴 넘쳐.

그렇구나.

재미없는 학교생활에서는 이게 정말 재밌어.

나는 아까와 똑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현에게 말했다.

그렇구나.

서현은 가끔 방 안에서도 자해를 하곤 했다. 그녀는 필통에서 커터 칼을 꺼낸 다음 자신의 팔을 향해 세 네 번 긋고, 다시 칼을 필통 안에 넣었다. 나는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할 때마다 매번 자살 시도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자살을 하려면 이렇게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그어야 한다며 내 말에 대답하곤 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문방구에서 커터 칼을 샀다. 방에서 칼을 꺼내 드르륵 거리는 나를 보며 그녀는 너도 드디어 나처럼 스릴 넘치는 학교 생활을 보내고 싶냐며 물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멍청하게 계속 칼을 드르륵 거리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나는 자살 시도를 해보는 거야.

그럼 세로로 그어야 겠네.

자살 시도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차가운 감촉이 왼쪽 손목에 닿을 때마다 나는 도로 칼을 집어넣었다 다시 뺐다를 반복했다. 도저히 팔에 주름을 박아 넣을 수 없었던 나는 칼을 기숙사 방 옷 장 안에 넣었다. 결국 칼을 산 돈만 아깝게 되었다.

또 다시 담임 선생님한테서 연락이 왔다. 나는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그냥 받기로 했다. 안 받으면 분명 나중에 더 골치 아파질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30분이 지났는데도 왜 이리 안 오니?

집에 놓고 온 물건이 있어서 다시 돌아갔다 왔어요.

너 이런 식으로 할래?

지금 가고 있…….

선생님은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기분 나쁘다는 표시를 온몸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나는 휴대폰을 도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아까와 같이 여전히 느린 속도로 거리를 걸었다. 한 번은 서현이 나를 향해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넌 입은 웃는데, 눈이 웃지 않더라.

눈웃음을 어떻게 짓는지 궁금했다. 어떻게 하면 눈이 웃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나는 반에서 가장 잘 웃는 아이를 하루 종일 쳐다봤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 후에 왜 쳐다보냐며 그 아이의 친구들한테 돌아가며 뺨을 맞았다. 결국 뺨은 맞았지만 그래도 그 날 알아낸 것은 눈웃음을 지으면 눈 밑에 애교살이 접힌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숙사 방 안 세면대에 있는 거울을 보며 눈웃음을 연습했다. 하다하다 안 돼서 그냥 눈 밑에 애교살을 그릴까도 생각해봤지만, 그러다 혹여 벌점을 받아 기숙사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면 안 되므로 늘 그렇듯이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노력 끝에 눈 밑에 힘을 주면 저절로 애교살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서현과 얘기를 할 때면 항상 눈 밑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서현은 여전히 내게 억지로 웃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 후 나는 그냥 눈웃음 짓는 걸 포기했다. 생각해보니 딱히 누군가한테 눈웃음을 칠 때가 없다는 것도 있었다.

웃는 게 어색하다는 말을 한 건 서현이 처음이 아니었다. 중학교 때에도 집이 가까워 등학교를 같이 하는 친구도 내게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었다. 반이 다르고, 그 친구가 학교에서는 나를 아는 체하고 싶어 하지 않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냥 등하교만 같이 하는 사이였다.

나는 보통의 애들과 달랐다. 더 특별하거나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소위 말하자면 문찐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었다. 집에 컴퓨터와 티브이가 없는 것도 아니고, 휴대폰이 없는 것도 아닌데 나는 요즘 아이들이 접하는 인기 프로나 연예인 같은 걸 접할 기회가 없었다. 기회가 없었다기 보다는 접하고 싶지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얼굴은 잘생겼지만, 그 뿐이었고 간혹 노래가 좋은 것도 있었지만 그것도 딱 그 뿐이었다.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는 몰라도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연예인에 매달리는 애들이 이해가지 않았다. 그래서 몇 없는 친구들과 얘기할 때 혼자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연예인이야기나 인기 프로 이야기에 나도 그거 안다는 듯이 더 크게 웃곤 했다. 어색함을 감추려고 웃음은 자꾸만 커져갔다.

그렇게 계속 웃어서 그런지 어느새 그건 습관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 내가 그렇게 크게 웃는 게 반응이 좋다고 생각한 아이들은 내게로 잘난 체 하려고 모여들거나, 자기만족을 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러나 내 반응이 너무 기계적인 것을 알고는 다 떨어져 나갔다. 심지어는 이제는 웃음소리가 너무 커서 욕먹기 까지 했다. 시시각각 기분이 변하는 아이들을 따라잡기는 힘들었다. 결국 나는 따라잡는 것을 포기했다. 이미 커질 대로 커져버린 웃음소리는 이제 더 이상 내게 반응을 원하는 사람이 없어 입 밖으로 나올 기회가 없어졌다.

학교가 보였다. 나는 11시가 넘었는데도 열려있는 정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후문으로 되돌아갔다. 정문 보다는 후문이 반에 더 가까워서 라는 핑계보다는 그냥 정문으로 가다가는 다른 선생님을 만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3학년 교실 층에 다다르자 1, 2학년 층과는 다르게 소음이 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나는 이제는 필요 없는 실내화를 신지 않고 운동화를 신은 채 반 안으로 들어갔다. 시끄러워서 그런지 아이들은 문 열린 소리에도 소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도 내게 시선을 쏟지 않는 게 좋았다. 나는 창가 쪽 맨 끝자리에서 두 번째인 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은 내 자리를 피해 제각각의 형태로 집단을 그려 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한 번 쓱 훑어보다가 가방에서 유언장을 꺼냈다. 그리고 찢었다.

북북 거리며 거침없이 찢겨져 가는 유언장은 비참해 보인다든가, 불쌍해 보인다든가 하지 않았다. 나는 집에서 될 수 있는 대로 챙겨온 유언장을 하나하나 차례로 꺼내 찢고, 찢고, 또 찢었다. 정신없이 유언장을 찢고 있을 때 문득 주위가 조용하다고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숙인채로 눈동자만 위로 굴려 주변을 살펴봤다. 반 애들이 뭐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곁눈질하고 있었다.

정말 쟤 왜 저러냐.

사이코 같아. 소름끼쳐.

날이 갈수록 점점 미쳐 가는데?

지금 뭐 찢는 거야?

나는 책상에 수북하게 쌓인 찢어진 종이들을 가방 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리고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 유언장을 꺼내지 않고 그대로 가방 안에서 찢었다. 종이 찢기는 소리가 반 안을 가득 메웠다. 그러다 나한테 흥미를 저버린 아이들이 하나 둘 다시 떠들어대기 시작하면서, 종이 찢기는 소리는 점점 묻혀갔다. 다행이었다.

가져온 유언장을 다 찢자 담임 선생님이 들어왔다. 선생님은 내일도 학교 빼먹지 말고 오라는 말만 남기고 종례를 끝냈다. 하나 둘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등에는 가방을 얹고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든 채, 다들 친구와 같이 열려있는 정문을 빠져나갔다. 선생님이 나를 바라봤다. 나도 선생님을 보고 있었다.

내일은 늦지마렴.

.

너 아직 졸업 안 했어.

.

선생님이 교실 밖으로 나갔다. 이제 교실에는 나 혼자만 있게 되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밖을 바라봤다. 서현이 보였다. 무리 지어 가는 틈에 그녀 혼자 껴있었다.

살아있었구나.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서현과 같이 방을 쓸 때, 예의상 저장해 놓은 번호를 누를까 말까 고민했다. 나는 다시 휴대폰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가방에서 종이 한 장과 볼펜 한 자루를 꺼냈다. 유언장을 쓰기 위해서였다.

혼자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이상하다거나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친숙했고, 누군가가 나를 보면 저런 모습이겠구나 했다. 나는 유언장을 천천히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저 습관이 되어서 한 사람의 마지막 말이라던가, 그래서 더 귀중하다던가 하는 뜻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유언장을 썼다. 종이 맨 윗부분에 유언장이라는 말이 없으면 그냥 편지로만 보이는 이것을 나는 그냥 유언장이라고 불렀다.

다 쓴 유언장을 반으로 접어 찢었다. 찢어서 두 개로 나뉜 것을 겹쳐 또 다시 반으로 찢었다. 그렇게 찢는 걸 반복했다. 더 이상 찢을 수 없을 때까지. 나는 찢은 유언장을 가방 안에 넣었다. 가방에 수북이 쌓인 종이들이 꼭 눈 같았다. 나는 종이 한 뭉텅이를 꺼내 들어 창밖으로 던졌다. 허공에 던지는 것이라 그런지 잘 날아가지 않았다. 나는 또 다시 가방 안에서 종이 한 뭉텅이를 꺼내 입으로 후 불었다. 아까보다 고르게 허공에 뿌려진 유언장들이 점점 바닥으로 추락해져갔다. 이제 유언장은 바람을 타고 날아가 세상 곳곳으로 흩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세상 어디에나 있게 되는 것이고, 세상 어디에나 없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마음이 편해졌다.

바지 속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서현이었다. 나는 통화 버튼을 누른 뒤 휴대폰을 귀에 댔다.

뭐하냐.

눈이 내려.

그러다 선생님한테 걸리면 어떡하려고.

안 했다고 해야지.

휴대폰 너머로 서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창밖으로 고개를 살짝 빼서 밑을 바라봤다. 하교 중이던 아이들이 발걸음을 멈춰 허공에 흩뿌려진 종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에는 서현도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나서 가방을 창밖으로 털었다. 남은 종이들이 떨어져 나왔다. 학교 안에 있던 사람들도 지금 상황이 궁금해서 허겁지겁 학교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교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의 교복에는 칼자국처럼 주름이 온몸에 박혀있었다. 나는 왼쪽팔목을 들여다봤다. 아픈 게 싫어서 결국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칼로 긋는 마음으로 옷에 주름을 그었다. 어쩌면 칼로 긋는 것보다 주름을 지우는 것이 더 힘들 거라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복도가 시끄럽게 울렸다. 누군가가 여기로 뛰어오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집에 유언장이 많이 남아있었다. 텅 빈 가방을 매고 나는 반문을 나왔다. 경비 아저씨가 나를 불렀다. 무시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종이쪼가리들을 보며 생각했다. 사람들이 유언장을 쓰는 이유가 곧 죽을 거라서 뭐 하나라도 남기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인지, 아니면 죽기 위해서 쓰는 것인지.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유언장을 쓰는 것인지. 답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답을 내릴만한 질문도 아니었다. 나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휴대폰을 꺼내려고 했는데, 주머니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제야 책상 위에 휴대폰을 놓고 그냥 왔다는 게 생각났다. 어차피 내일도 다시 학교에 올 거니까 딱히 다시 위로 올라가지 않아도 됐다. 나는 정문을 나섰다. 전봇대가 보였다. 전봇대도 가로등과 마찬가지로 사람들한테 서있을 수 있는 허락만 맡은 것이었다. 나는 조용히 전봇대 옆에 섰다. 이제 나는 무엇으로 보일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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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 김승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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