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 -출발-

by 단단 posted Dec 0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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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안전벨트가 그려진 등에 불이 켜지고 인천국제공항으로의 도착을 알리는 기내 방송이 나왔다. 비행기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창 밖은 하얀색으로 가득찼다. 구름이 걷히고 창 아래로 커다란 붓으로 뚝뚝 점을 찍은 듯 무심하게 펼쳐진 섬들이 보였다. 여러 번 본 풍경이었지만 지훈은 여전히 하늘에서 보는 지상의 모습이 감탄스러웠다. 멀리 공항의 모습이 보이자 지훈은 공중의 시간이 끝나가는 것이 아쉬웠다.

“속은 어떠세요?”

비행기 출구에서 승무원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지훈은 싱가폴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랫 배가 심하게 쑤시는 것을 느꼈다. 몰디브 말레에서 비행기를 타기 전 라씨를 마셨는데 이전에 마신 것보다 맛이 더 시큼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화장실을 몇 번 들락거렸고 승무원이 건넨 지사제를 먹고 나서야 상태가 조금 진정이 되었다.

입국 절차를 마친 지훈은 출국장이 있는 3층으로 갔다. 캐리어를 끌고 출국장을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공항에서 홍연종 기자와 다음주에 있을 사진전에 대한 인터뷰를 하기로 했다. 벌써 연종과 네 번째로 하는 인터뷰였다. 지훈은 항공사진을 찍는 사진작가다. 일반적인 항공사진들은 보도용이나 측량용 등 실용적인 목적으로 찍지만 지훈은 항공 사진을 작품사진으로 찍었다. 지훈의 사진에는 다른 항공사진과는 달리 비행기의 창틀이 한 쪽 구석에 찍혀있었다. 거리가 현저히 다른 두 피사체가 동시에 찍히기 때문에 초점이 조금만 엇나가도 지상의 모습은 흐리거나 흔들리게 나왔다. 하지만 지훈은 이 촬영 방식을 고집했다. 덕분에 지훈의 사진을 보면 비행기를 타고 창 밖을 바라보는 듯한 생생함이 느껴졌다.

 

“이번 촬영에서는 첫 사랑과 눈이 마주친 듯 숨이 막히는 장면을 몇 번이나 만났어요?”

전화를 받은 연종이 물었다. 연종은 촬영 후에 항상 같은 질문을 했다.

“그 멘트는 잊어버리지도 않으시네요.”

“그럼요. 얼마나 인상 깊은 말이었는데요.”

지훈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지훈이 사진을 올린 블로그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을 때 연종은 지훈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인터뷰 하루 전 메일로 받은 인터뷰 질문을 보며 지훈은 밤잠을 설치며 답변을 고민했다. 사진을 찍을 때의 흥분과 설렘을 전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의 선택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연종은 지훈에게 사진을 찍으며 가장 기쁜 순간이 언제냐고 물어봤다. 지훈은 침을 한 번 삼키고 차분하게 준비한 대답을 했다.

“비행기를 타고 지상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숨이 턱 막히는 장면을 발견할 때가 있거든요. 마치 첫 사랑과 눈이 마주쳤을 때처럼 말이죠. 그 순간을 포착할 때가 가장 기쁩니다.”

“의외의 대답이군요. 훌륭한 사진을 찍었을 때 가장 기쁠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연종은 턱을 살짝 들며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물론 제가 본 모습과 느낌이 그대로 사진에 나타났을 때 굉장히 기쁘지요. 하지만 어떤 울림을 주는 장면을 보기 전에는 셔터를 누르지 않습니다.”

“그 순간을 간직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 이 말씀인가요?”

연종은 고개를 살짝 까딱거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정확합니다. 절정의 순간을 그대로 담아놓는 것이죠.”

지훈이 처음 감탄스러운 장면을 본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제주도 수학여행을 가던 비행기에서였다. 파란 바다 위 보석처럼 박혀있던 초록 섬들.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끊임 없이 다가오던 파도. 섬과 바다 위 떠 있는 하얀 구름의 검은 그림자들. 50분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지훈은 마음이 답답할 때마다 인터넷으로 항공사진들을 검색해보았다. 사진을 보다 보니 직접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비행기를 탈 일이 없었다. 지훈은 남산에 올라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땅을 디디고 선 곳에선 비행기에서 지상을 볼 때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직접 찍은 사진들을 보다가 지훈은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어설프게 비행기 창틀을 합성하자 마치 비행기를 타고 사진을 찍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의자에 앉아 연종을 기다리며 지훈은 이번 촬영에서 찍은 사진과 필름들을 넣은 봉지를 캐리어에서 꺼내 사진 한 장을 집어들었다. 에메랄드 빛 바다 위로 석양의 붉은 색이 섞여들었고 그 위로 열대의 소나기 스콜이 퍼붓고 있었다. 푸른 빛과 붉은 빛, 태양과 구름 그리고 스콜. 이 대조되는 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자신들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에서 지훈은 강한 생명력을 느꼈다. 그 때 사진 위로 연한 그림자가 생겼다. 지훈은 뒤를 돌아보았다. 앉아있는 지훈과 같은 눈 높이에 동그랗게 뜬 아이의 눈이 있었다.

“아저씨 이거 비행기 타고 찍은 거에요?”

아이의 목소리는 몰디브의 바다처럼 맑았다. 아이는 포장을 뜯지 않은 비행기 모형과 스케치북을 들고 있었다.

“응. 맞어.”

“아저씨가 직접 찍은 거에요?”

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봤다. 아이가 입을 살짝 벌린 채 사진을 보고 있었다.

“응. 비행기를 타면 땅의 모습이 이렇게 보여. 멋지지?”

아이는 휴대폰을 꺼내더니 사진 앞에 내밀었다. 지훈은 순간 손으로 사진을 가렸다. 사진전에서 처음 공개할 사진이었다. 찰칵 사진 찍는 소리가 났다.

“미안 사진은 찍으면 안 돼.”

아이는 입을 샐쭉거리더니 앞에 있는 여행사 부스로 달려 갔다. 지훈은 어린 아이한테 너무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휴대폰으로 아직 공개되지 않은 사진을 찍게 하는 것은 찝찝했다. 멀리서 아이를 본 여행사 직원이 손을 흔들었다. 아이는 부스에 두 손을 얹고 까치발을 든 채 여행사 직원과 이야기를 나눴다. 갑자기 지훈의 배에서 꿀렁거리는 소리가 나며 아랫배가 다시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지훈은 아랫배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배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점점 통증이 심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캐리어를 끌고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에 갔다. 공항의 화장실은 캐리어를 들고 들어갈 수 있도록 칸이 넓었다. 화장실에서 돌아오자 의자에 앉아있던 연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했다.

“지금 오시는 거에요? 제가 먼저 온 거 맞죠?”

연종이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계속 말을 했다.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대신 제가 작가님이 좋아할 만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연종은 지훈을 4층으로 데리고 갔다. 북적대는 출국장에 비해 4층은 한산했다. 면세점이 내려다 보이는 곳엔 폭신하고 큰 의자들도 놓여 있어 몇몇 사람들은 편안한 자세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잠시 뒤 도착한 카페에는 사람들이 모두 창가에 앉아 있었다. 연종과 지훈도 창가에 가서 앉자 천천히 움직이고 있는 비행기가 보였다.

“어때요? 마음에 들죠?”

“눈 앞에 비행기를 보니 다시 하늘 위에서 셔터를 누르고 싶어지는데요?”

“처음 작가님이 블로그에 사진을 올릴 때는 저런 일반 비행기를 타고 사진을 찍으셨죠?”

지훈은 처음 사진을 찍던 시절이 떠올랐다.

 

산이나 전망대에서 사진을 찍던 지훈은 곧 한계를 느꼈다. 높은 곳에서 사진을 찍어 비행기 창틀을 합성한다고 해도 실제 비행기를 탔을 때의 장면만큼 감탄이 나오는 장면은 찍히지 않았다. 지훈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돈이 모이자 국내선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를 타는 내내 지훈은 쉴 새 없이 사진을 찍어댔다. 하지만 막상 찍은 사진을 확대해보니 흐리거나 흔들리게 찍힌 것이 대부분이었다. 지훈은 아르바이트를 더 해서 좋은 카메라를 샀고 인터넷으로 사진 공부를 하다가 고등학교 졸업 후 사진학과로 진학을 했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 즈음에 지훈은 사진을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다. 멋진 장면을 공유하고 싶어 시작한 블로그는 점점 방문자가 늘었다. 여행을 막 떠난 듯한 설렘이 느껴진다고 많은 방문자들이 댓글을 달았다. 지훈은 파워블로거가 되었고 연종과의 인터뷰를 본 한 여행사에서 협찬 제의가 들어왔다. 지훈은 여객기와 같은 모양의 창문을 설치한 경비행기를 빌려 타며 마음껏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본 여행사는 지훈의 사진을 홍보용으로 쓰기로 했고 기념으로 사진집을 내주었다. 사진집은 꾸준하게 팔리더니 1년 만에 1만부의 판매고를 올렸고 여행사는 사진전을 열어주기로 했다.

 

비행기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연종은 녹음기를 켜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이번 전시회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한 설문 조사에서 여행 중 가장 설레는 순간이 비행기가 출발했을 때라고 하는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런 설렘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사진전을 열 예정입니다.”

지훈은 조금 흥분한 듯 말이 빨라졌다.

“사진전의 이름은 정하셨나요?

“사실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남은 기간 동안 더 고민해보고 정하겠습니다.”

“얼마 전 촬영을 다녀오셨는데요, 전시될 작품들은 다 정하셨나요?

“조금 더 봐야합니다. 아직 작게 인화된 모습밖에 보지 못했거든요. 필름스캔을 해서 꼼꼼히 살펴본 뒤 정할 것입니다.”

“사진은 전시회 전까지 비공개겠죠?”

지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연종은 녹음기를 껐다.

“오프 더 레코드로 저만이라도 보여줄 수 있어요? 제가 작가님 팬인 거 아시죠? 전시회까지 기다리기가 힘드네요.”

“알겠어요. 대신 전시회 전까지는 비밀입니다.”

지훈은 캐리어를 열었다. 연종과 눈이 마주친 지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캐리어도 놔둔 채 빠른 속도로 카페를 달려 나갔다. 창밖을 보던 사람들이 지훈을 쳐다봤다. 연종이 지훈을 불렀지만 지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연종은 카페 직원에게 지훈의 캐리어을 맡아달라 부탁한 뒤 지훈을 쫒아갔다. 지훈이 출국장에 도착했지만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는 아무 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연종이 도착했을 때 지훈은 손을 덜덜 떨며 의자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경찰이 CCTV를 확인하는 동안 지훈은 시설관리실 앞에서 기다렸다. 같이 있던 연종은 어느 순간 사라졌다. 지훈은 다시 배가 아파오자 화장실에 갔다. 시도 때도 없이 아픈 아랫배가 원망스러웠다.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 한참 뒤 경찰이 관리실 안으로 지훈을 불렀다. 탁자엔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이게 선생님 물건 맞으세요?”

경찰은 노트북 화면에 보이는 두 가지 파일 중 하나를 열었다. 첫 번째 영상에는 지훈이 허겁지겁 짐을 챙겨 캐리어를 끌고 사라지는 모습이 나왔다. 지훈이 앉았던 의자의 옆에는 두꺼운 검은 봉지가 놓여 있었다. 저 묵직한 것을 어떻게 보지 못했을까. 지훈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리고 이건 약 5분 뒤 모습입니다.”

두 번째 영상을 열자 자신과 이야기를 나눈 아이가 비행기 모형과 스케치북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의자 앞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아이는 봉지를 보더니 안에서 사진을 꺼내 얼굴 가까이로 들어 올려 유심히 관찰했다. 그리고 꺼낸 사진과 비행기 모형 스케치북을 봉지에 넣은 뒤 두 손으로 봉지를 안아들고 밝게 웃으며 종종 걸음으로 카메라 밖으로 사라졌다.

“아이 사진을 어디에 게시라도 할 수는 없나요? 이게 정말 중요한 사진이라서 그렇습니다.”

“죄송합니다.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일단 인천에 있는 학교에 긴급 공문을 보내놓겠습니다.”

경찰관은 힘 빠진 목소리로 바지 재봉선을 만지작거렸다. 시설관리실을 나오자 연종에게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힘이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았다. 전화가 한 번 더 왔고 그것도 받지 않자 연종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혹시 남자 애가 가져가지 않았어요?”

지훈은 정신이 확 들었고 바로 연종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자 애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주위에 조사 좀 해봤어요. 아까 있었던 곳 앞에 있는 여행사 카운터로 오시겠어요?”

연종의 차분한 목소리에 지훈은 조금 힘이 나는 것 같았다.

 

“눈이 동그랗고 볼살이 통통하고 키는 요 정도고.”

여행사 직원은 명치 정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네 그 아이에요. 제 사진을 가져간 게.”

지훈의 관자놀이가 두근거렸다. 여행사 직원이 연종을 한 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여행 사진을 분실했다는 말을 듣고 왠지 그 아이가 떠올랐어요.”

여행사 직원은 숨을 길게 내쉬고는 말을 이어갔다.

“어린 애에요. 9살이라 그랬던가? 여기에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온 지 두세 달 정도 된 것 같아요. 처음엔 엄마랑 같이 왔어요. 엄마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 보였어요. 하지만 아이가 뒤돌아 엄마를 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게 웃더라고요.”

연종은 수첩에 간단히 메모를 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나중에 가족이 여행을 가기로 했대요. 특이하다고 생각했어요. 여기는 보통 비행기 티켓 받으러 오는 곳이지 여행을 알아보는 곳은 아니거든요. 아이 엄마가 혹시 해외여행 홍보 책자같은 거 있냐고 물어보길래 여행 팸플릿을 주니까 영상통화를 걸더라고요. 일주일쯤 지난 후에 애가 혼자 오더라고요. 기차 타고 왔다고 하더라고요.”

“기차요?”

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마 공항 철도를 말하는 거겠죠? 여기서 몇 정거장만 가면 아파트촌이 나오잖아요.”

“아이는 와서 무엇을 하고 갔나요?”

그때 단체 여행객들이 표를 받기 위해 몰려왔고 직원은 여행객들을 슬쩍 본 뒤 조금 빠른 속도로 대답했다.

“엄마랑 왔을 때처럼 여행 팸플릿이나 항공사의 홍보 책자 같은 것들을 받아가곤 했어요. 그러고는 아이 엄마처럼 영상 통화를 걸더라고요. 누구한테 거냐니까 동생이라고 하더라고요. 혹시 애가 다시 오면 연락 드릴게요.”

 

공항을 나온 지훈과 연종은 공항철도를 탔다. 연종은 지훈과 함께 공항 동 쪽의 학원들과 도서관 서점 공원 등 아이가 있을 만한 곳을 돌아다녔다. 지훈은 괜찮다고 했지만 연종은 늦게까지 지훈을 도왔다. 지훈은 약국에서 산 지사제를 투약량보다 훨씬 많이 먹으며 한 번 더 아이의 그림자가 자신을 덮쳐주길 기다렸지만 아이는 없었다. 지훈은 집에도 가지 않고 영종도에 있는 모텔에 들어가 누웠지만 깊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침이 되자 지훈은 영종도의 초등학교들을 하나씩 방문했다. 경찰의 말처럼 공문은 긴급하게 인천에 있는 학교들로 보내졌지만 교무실에 가면 아직 확인중이라고 했다. 첫 번째 방문한 학교에서 직접 교실을 돌아볼 수는 없냐고 했지만 개인정보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두 번째 학교에선 교무실을 나간 뒤 몰래 교실 쪽으로 가서 복도 창문으로 교실을 훔쳐봤지만 자신을 따라온 교사에 의해 쫓겨나다시피 학교 밖으로 내보내졌다. 세 번째 학교부터는 교무실을 들르지 않고 바로 교실로 향했다.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1학년 교실부터 살피던 중 한 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가 손가락질을 하며 뭐라고 말하는 것이 보였고 아이들은 하나둘씩 창문을 쳐다봤다. 수업을 하던 교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지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2학년 교실을 가기도 전에 갑자기 나타난 교감에 의해 교무실로 갔지만 이 학교에서도 아직 확인중이라는 말만 들었다. 지훈은 점점 사진을 가져간 아이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해서 복수를 한 것은 아닐까? 지훈은 아이를 만나면 부모에게 호되게 항의하리라 결심을 하다가도 사진만, 아니 필름만 말짱하다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종도 동쪽에 있는 초등학교를 모두 돌아본 지훈은 택시를 잡아 공항으로 향했다. 남은 학교는 단 한 군데였다.

 

자기부상열차의 마지막 역인 용유역까지 가는 데는 15분 정도가 걸렸다. 지훈은 혹시라도 아이를 마주칠까 2량의 열차를 돌아다니며 주위를 살펴봤지만 학교가 끝나기 전이라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는 없었다. 용유역에 내려 택시를 타고 A초등학교로 가고 있는데 연종에게 전화가 왔다.

“김 작가님. 아이 찾았어요. A초등학교로 오세요. 영종도 서쪽에 있는 학교에요.”

연종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지훈은 가슴에 대고 바람을 불어 넣은 것처럼 가슴이 벅차 올랐다.

“그런데 홍 기자님이 왜 A학교에 계신가요?”

“집에 갔는데 마음이 답답했어요. 작가님의 소중한 순간들이 사라진다는 것이 너무 마음 아팠어요. 왠지 작가님이 공항철도역 주변 학교부터 돌고 있을 것 같아서 오전 일정을 마치고 반대쪽에 있는 학교를 와봤는데 학교에서 공문을 보고 애를 찾았더라고요. 그런데 부탁이 있어요.”

“이렇게까지 도와주시다니 너무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한데 어떤 부탁이든 들어드려야죠.”

“애한테 너무 화내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어요.”

홍 기자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지훈이 학교 교문에 들어가자 연종과 아이 그리고 안경을 쓴 여자가 나란히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아이의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지훈은 아이를 보자 얼굴에 확 열이 올랐다. 연종이 여자와 아이를 보며 뭐라 말하자 아이는 고개를 들어 지훈을 보고는 머리를 허리까지 숙여 인사를 했다.

“잘못했습니다.”

“작가님이 버리고 간 건 줄 알았대요.”

아이의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연종이 빠르게 말을 했다. 지훈은 화를 내고 싶었지만 연종의 부탁을 생각하며 안경을 쓴 여자에게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긴말 안 하겠습니다. 아들이 가져간 사진 어서 돌려주시죠.”

지훈은 안경을 쓴 여자를 노려봤다.

“잠깐만요 김 작가님. 저 분은 이 아이 담임 선생님이세요.”

“선생님이라고요?”

지훈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아이는 거의 울 듯한 표정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아이 엄마랑 아빠가 많이 바쁘세요. 사진 가지러 아이 집으로 가는 중인데 같이 가요. 인호야 다음부턴 어디 놓여진 거 함부로 가져가면 안 된다. 알겠지?”

선생님은 단호한 말투로 아이를 꾸짖었다. 그 때 머리 위로 비행기의 소리가 났고 하늘을 올려다 보니 낮게 날고 있는 비행기의 그림자가 얼굴을 스쳤다. 아이는 고개를 들어 비행기를 멍한 눈으로 쳐다봤다. 연종이 지훈에게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동생이 아파서 엄마는 병원에 있대요.”

홍 기자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잠시 뒤 선생님 휴대폰으로 아이의 엄마와 아빠로부터 번갈아가며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이 건네주는 전화를 받으니 부모님은 폐를 끼쳐서 너무 죄송하고 직접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하다며 연거푸 사과를 했다.

 

아이는 방에 들어가더니 커다란 종이 박스를 들고 나왔다. 상자 안에는 공항에서 들고 있던 비행기 장난감과 스케치북 그리고 가위로 자른 흔적들이 남은 여행 팸플릿이 들어있었다. 아이는 상자를 뒤적거리더니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지훈은 상자 속 스케치북을 열어보았다. 연종과 선생님도 스케치북을 같이 봤다. 첫 장엔 비행기가 그려져 있었고 크게 그린 창문에는 어른으로 보이는 여자와 남자, 그리고 둘 사이에 남자 아이 두 명이 그려져 있었다. 뒤로 넘기니 오른쪽 상단에 맞춤법이 틀리게 ‘첫짼날’이라는 글씨가 삐뚤삐뚤하게 쓰여 있었고 여행 팸플릿에서 오린 듯한 디즈니랜드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둘짼날’이라 적힌 곳엔 하와이의 해변 사진이 붙어있었다. 계속 장을 넘기니 지훈이 찍은 사진이 붙어있었고 오른쪽 상단엔 ‘여행에 출발’이라 쓰여 있었고 아래 공간엔 첫 장에서 본 가족들이 웃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스케치북 위로 형광등을 가려 생긴 그림자가 생겼다. 지훈이 고개를 들어보니 방에서 나온 아이가 검은 봉지를 들고 서 있었다. 지훈은 얼른 봉지를 받아 안을 살폈다. 순간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몸이 굳었다. 봉지 안에는 사진만 들어있고 필름이 없었다.

“얘야. 필름. 어디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지훈의 손과 발이 덜덜 떨렸다. 아이는 금방이라도 울 듯 표정이 일그러졌다. 선생님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지훈과 아이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니까. 그 동그란 거.”

홍 기자가 손가락으로 허공의 원통을 그리며 다급하게 말했고 아이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빠른 걸음으로 쓰레기통으로 가서 손을 집어 넣고 뒤적거렸다. 아이가 필름통을 하나 꺼내 바닥에 내려놓자 지훈은 쓰레기통을 뒤집어 내용물을 바닥에 쏟았다. 구겨진 휴지와 과자봉지 사이에서 필름 통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필름을 확인한 지훈은 가슴에 손을 얹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필름이 다 있으세요?”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묻자 지훈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연종은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내 지훈에게 따라줬다. 지훈은 물을 마시며 오른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이 스케치북엔 뭘 그린 거야?”

연종이 아이에게 묻자 아이는 쭈뼛거리며 대답했다.

“인용이 보여줄 여행 계획이에요.”

“인용이?”

“동생을 말하는 걸 거에요. 맞지?”

선생님의 말에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미세하게 끄덕거렸다. 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훈이 아이에게 다가가자 선생님과 연종은 불안한 눈빛으로 지훈을 쳐다봤다.

“동생이 많이 아프니?”

지훈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묻자 아이의 등이 들썩거렸고 바닥으로 눈물 두 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지훈이 집에서 들고 나온 봉지는 가벼웠다. 봉지엔 사진은 없고 필름만 들어있었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사진이었지만 지훈은 신경쓰지 않았다. 지훈이 봉지에서 사진을 꺼내 아이에게 내밀자 아이는 눈물 맻힌 눈을 반짝거리며 울음을 그치고 여러 번 지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와 정말 비행기를 탄 것 같은데요?”

연종이 사진전를 하루 앞둔 전시장을 들어서며 말했다. 직사각형의 공간에 임시로 벽을 설치해 얇고 긴 여러 개의 복도로 나눈 전시장 벽엔 실제 비행기에서 봤음직한 크기로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사진 앞에는 비행기 좌석이 놓여 있었다.

“자 인터뷰 시작하죠.”

연종은 녹음기를 켰다.

“마치 비행기를 탑승한 듯한 느낌이 드는 전시장이네요. 내일 여기서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다면서요?”

“네. 승무원복을 입은 사람들이 실제로 카트를 밀고 다니며 음료수를 서빙해주고 1등석을 체험해볼 수 있는 전시관도 있어요.”

“당장 저부터 오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요. 이번 전시회의 이름이 ‘출발’이라면서요?”

연종이 비행기 좌석에 앉아 오른쪽에 전시된 사진을 보며 물었다. 앉은 눈높이에 사진이 전시되어 비행기에서 창밖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몰디브의 파란 바다 위로 수상스키가 지나갔고 하얀 포말이 생생하게 튀고 있는 사진이었다.

“네. 원래는 다른 이름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느끼는 감정들을 표현할 적절한 단어를 찾고 있었죠.”

“그런데 간단한 제목을 정하셨네요.”

연종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작은 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사실 출발, 이거 표절이잖아요? 지금 제 말은 오프 더 레코드.”

“얼마 전 한 아이가 제 사진을 보고 쓴 문구가 여행의 출발이었어요.”

인터뷰 중이라 지훈은 연종이 모르는 일을 말하는 듯이 이야기를 꺼냈다.

“맞춤법도 틀리면서 쓴 데다 굉장히 단순한 문구였지만 그 말은 전시회를 준비하는 내내 저의 가슴을 울렸어요. 아이의 동생이 많이 아프대요. 아이에게 동생과 함께 떠나는 여행은 건강해진 동생과 함께하는 새로운 출발이겠죠.”

지훈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다.

“비행이라는 건 그 아이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출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행의 출발, 새로운 인생의 출발, 결혼 생활의 출발 등 다양한 출발이 비행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저의 사진가로서의 삶도 비행기를 탔을 때 시작됐으니까요. 그런 새로운 출발의 설렘을 전시회를 통해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천장을 보는 지훈의 촉촉한 눈동자에 형광등빛이 비췄다.

 

“오늘 인터뷰 감사했습니다. 분명 관객들에게 작가님이 말씀하신 느낌이 잘 전달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작가님께 전해드릴 것이 있어요.”

연종은 스케치북을 뜯어 반으로 접은 종이를 건넸다. 종이를 펴보자 삐뚤삐뚤한 글씨로 편지가 쓰여 있었다.

-아저씨 사진 주서서 정말 고맙습니다. 전시해 잘 하새요.

“아이를 또 만났어요?”

“제가 기자잖아요. 취재를 좀 했죠. 사실 벌써 기사도 나오긴 했는데 아직 못 보셨나 봐요.”

연종은 포털을 열어 자신이 쓴 기사를 보여줬다. 기사를 다 읽은 지훈의 눈 시울이 붉었다.

 

7살의 인용은 어렸을 때부터 비행기를 좋아했다. 소아암 치료 중에도 병원 창문 밖으로 비행기가 지나가면 시야 밖으로 비행기가 사라질 때까지 창문을 바라봤다. 엄마와 인용의 형 인호는 공항에 가서 비행기 출발 장면을 영상통화로 보여줬다. 여행사 카운터 앞에서는 퇴원하고 갈 가족 여행을 예약했다는 거짓말도 했다. 인호는 엄마와 자기부상열차를 탄 기억을 더듬어 혼자 공항을 가기 시작했다. 엄마와 같이 왔을 때처럼 인호는 인용에게 비행기의 모습과 여행사 카운터를 보여주며 얼른 퇴원해서 함께 여행을 가자고 말했다. 병원을 방문할 때마다 스케치북을 건네며 여행계획을 알려줬다. 용돈을 모아 구입한 비행기 모형도 선물해 줬다. 인용은 힘든 항암치료 중에도 스케치북과 비행기를 보며 행복해 했다.

 

사진전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많은 사람들이 왔고 전시장이 작은 탓에 입장하려면 30분 정도 기다려야 했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은 막 여행을 앞둔 사람들처럼 들떠있었다. 사진전이 끝나고 지훈은 비행기카트와 사진 네 점을 봉고차에 실었다. 봉고차엔 승무원복을 입은 여자와 홍 기자도 타고 있었다.

“마지막 전시회로 출발합시다.”

지훈은 시동을 걸며 말했다. 병원 앞에 도착하자 인호의 선생님과 여행사 직원이 마중 나와 있었다. 병실 문을 열자 6인 병실 창가 쪽 침대에 머리카락이 없는 인용이가 형이 사준 비행기를 손으로 날리며 입으로 비행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벽에는 지훈이 인호에게 준 사진들이 붙어있었다. 몇 시간 전부터 동생 옆에서 병실 문이 열릴 때마다 쳐다보던 인호는 승무원복의 여자를 보자 앞으로 달려 나왔다. 여자가 카트를 밀어 인용의 침대 앞에 서자 인용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카트를 봤다. 뒤이어 지훈, 연종, 선생님, 여행사 직원이 전시장에서 가져온 사진을 들고 인용의 침대 양 옆에 섰다. 인호가 항공사의 홍보 책자 속 승무원을 보여주며 말했다.

“인용아. 비행기 누나야.”

인호의 말을 들은 인용은 팸플릿과 여자를 번갈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승객 여러분께 안내말씀 드립니다. 지금 타신 비행기는 인용이와 가족의 여행을 위한 특별한 비행기입니다. 감사합니다.”

여자의 말을 들은 인용은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아이의 표정을 살피던 엄마와 아빠도 아이의 밝은 표정에 미소를 지었다.

“어디로 가는 거에요?”

“어디로 가고 싶니?”

아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침대 옆에 쌓여있는 스케치북 중 하나를 꺼내들었다.

“여기로 가주세요.”

인용은 첫 장에 있는 디즈니랜드 사진을 가리켰다. 미리 소식을 들었던 같은 병실의 환자들이 인용의 옆으로 다가와 한 마디씩 말을 건넸다.

“인용아. 처음 비행기를 탄 기분이 어때?”

“창 밖을 봐봐. 멋지지?”

인용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크게 웃었다. 승무원복의 여자가 카트를 열어 기내식 용기에 담긴 병원밥을 건넸다.

“아들. 다음엔 진짜 비행기 타러 가자.”

아빠는 인용의 맨질맨질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는 고개를 여러번 끄덕거리며 밥을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창 밖으로 비행기 한 대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름 : 정제천

연락처 : 010-2330-7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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