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 - 항상 얘기하고 있었는 걸

by leeSU posted Feb 0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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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얘기하고 있었는 걸 -



-1-


자물쇠가 풀리고 문이 열렸다. 지수는 빛이 닿지 않는 곳에 누워 있었다.

“나왔어.”

그가 말했다.

“자는 거야?”

그가 다가오자 지수는 반대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당황한 듯, 잠시 멍하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뭔가를 인정해버리곤 옆자리로 와 앉았다. 지수는 몸을 꿈틀거리며 조금 물러났다.

“오늘 편집장님이 네 얘길 하더라.” 헛기침을 하더니 그가 말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는 넥타이를 풀고 두리번거리다 지수의 발치에 툭 던져놓았다.

“준비가 된다면 언제든 돌아와도 좋데. 뭐, 그냥 한 소리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랬어.”

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글은 좀 썼어?” 그는 지수의 어깨가 있을법한 곳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지수는 그 손이 가볍다 생각했다. 분명 닿아있었건만 전해지는 것이 없었다. 그는 꼭 다른 일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다.

“하나도 쓰지 못했어.” 지수가 웅얼거렸다.

“괜찮아. 조금씩 하자 조금씩. 일단은 밝은 얘기를 쓰는 것만 집중해.” 그는 샤워를 하려는 듯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목에는 흉터가 보였다. 지수가 말했다.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 그는 이도 저도 못한 채 지수를, 정확히는 지수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내가 뭘 쓰려는 건지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는 숨을 내쉬었다.

“내가 상관하지 않았으면 하는 거야?”

지수는 고개를 틀어 그를 보았다. 그는 셔츠를 반쯤 풀어헤치고 아랫도리라도 만져달라는 양 애처롭게 지수를 내려다보았다. 지수가 말했다.

“아마 그런 것 같아. 당분간은 오지 않았으면 해.”

“그러지 말고, 응?” 그가 애교를 떨며 지수를 끌어안았다. 지수는 벌레가 몸을 기어오르기라도 하듯 몸서리를 쳤다.

“제발.” 지수가 말했다.

“이럴 거야?” 그의 목소리가 무거워졌다.

“정말 이렇게 굴 거야? 언제까지 이따위로 행동할 거냐고. 이만하면 됐잖아.” 지수가 몸을 일으켜 피하려 하자 그가 명령하듯 말했다.

“앉아.”

지수는 그를 등지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냥 시간이 필요하단 말이야. 그 모든 것들…. 넌 아무렇지 않은 거야? 그런 것들을 기사로 쓰면서도 아무렇지 않으냐고.”

“그만해.”

지수가 울먹이며 소리쳤다. 그는 질릴 대로 질렸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너나 그만해. 그렇게 심판한다는 투로 말하지 말라고.”

지수가 말했다.

“넌 위선자야. 무언가 느끼는 척 하지만 아무것도 느끼질 못하지. 기자 짓 말고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게 어때? 공장에나 들어가서 기계나 만지라고.”

그가 불쑥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들이박을 수 있다는 듯 얼굴이 가까웠다.

“계속 그래 보라고, 응?” 그가 손을 올렸다. 손끝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손은 다시 느리게 내려와 지수의 어깨를 붙잡았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난 정말….” 그는 짜증스럽게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물러섰다. 그러다 다시 다가와 지수의 허리에 손을 댔다.

“들어봐 자기야, 내 말 좀 들어보라고.” 그가 바짝 다가왔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 일이 자기 어머니 일이랑 비슷하다는 건 알겠어. 그게 무슨 트라우마로 돌아왔다는 것도 알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 이야기잖아. 응? 자기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이래서는…. 그래, 의사 선생님 말 기억나? 의사도 나랑 같은 얘길 했잖아. 널 도울 수 있는 게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가능성을 포기하지 말라고, 스스로를 도울 사람처럼 대하라고 말이야. 항우울제도 챙겨 먹고, 짧은 계획도 세우고. 나가서 친구도 만들고, 동물을 만나거든 쓰다듬어주라고. 응? 원하던 원하지 않던, 직장도 구하라고.”

지수는 듣기 싫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얼굴을 붙잡았다.

“그런 것들이 모여서 삶에 기둥을 만들어 준다고. 자기야.” 그는 지수를 바라보더니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단추를 마저 풀고 욕실에 들어갔다.

지수는 그가 나올 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지수는 머뭇거리다 그의 옆에 조금 떨어져 누웠다. 그는 자리를 만들어주려 몸을 꿈틀대더니 지수를 끌어당겼다. 그가 어깨에 팔을 두르고 다독였다.

“사랑해.” 그가 말했다. 그는 그 외에도 잠결에 여러 말을 건넸다. 지수는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다 말했다.

“난 멀쩡해.”


-2-



지수는 방바닥에 얼굴을 붙이고 누워 있었다. 먼지 엉킨 머리카락 뭉치와 가득 찬 쓰레기통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고개를 들자 너저분한 집안이, 다시는 작동하지 못할 것 같은 가전제품들이 보였다. 그는 출근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지수는 몸을 일으켰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베란다에 발을 딛자 몸이 움츠러들었다. 지수는 팔로 몸을 감쌌다. 베란다 구석엔 이동식 히터가 있었는데 먼지가 쌓여 있었다. 지수는 끙끙대며 그것을 옮겼다. 안에 들여놓고 나니 거실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지수는 히터 플러그를 꽂았다. 전원이 들어오고 웅 하는 소리가 났다. 이내 붉은빛이 켜지더니 점점 밝아졌다. 그러나 생각처럼 열기를 뿜어내진 못했다. 지수는 멍하니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건너편 아파트로 고개를 돌렸다. 한 노파가 보였다.

노파는 말라붙은 화분을 살피고 있었다. 거실을 오가던 남자는, 얼굴로 보건대 그녀의 손자인 듯했다, 뭔가 생각나기라도 한 것처럼 걸음을 멈췄다. 그는 노파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매만졌다. 노파는 그의 손을 한 차례 꼭 붙잡고 어깨에서 때어냈다. 남자는 뭐라 말을 건네더니 다시 손을 내밀었다. 노파는 그 손이 자신을 해치기라도 할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지수의 시선이 창문으로부터 멀어졌다. 시선은 하늘로 향했다. 구름이 보였다. 시선은 더 높아졌다. 뒤통수가 쿵 부딪혔다. 지수는 다시 방바닥에 누었다. 천장은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낮았다. 고개를 틀자 머리카락이 코에 닿았다. 냄새가 났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엔 노트북이 보였다.

그 사건 이후, 지수는 자취방에 틀어박혀 한동안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잠에 들지 못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하루 종일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어쩌다 글을 쓸라치면 그녀를 둘러싼 사물들에서 어두운 의미가 솟아올랐다. 깨지지 않은 온전한 유리창을 떠올릴 수가 없었고 즐겨 입던 와인색 외투에선 피비린내가 풍기는듯했다. 지수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다. 상황이 좋지 않을 때면 그저 운이 좋아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 지수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것은, 날이 저물며 상상력이 한없이 가지를 뻗어나갈 때쯤 그가 돌아온다는 것은 다행이었고 불행이었다. 그에게선 뭐랄까, 지수를 딱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풍겼고 함께 보내는 밤은 조용했다. 동정을 바라거나 위안을 얻고 싶어 그에게 말을 꺼내려다가도 항상 하고픈 말을 잊어버리고 입을 다물었다.

어느 밤, 지수는 견디지 못하고 잠든 그를 할퀴었다. 그때 지수는 정말로 이성을 잃었었고 그는 지수의 앞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지수를 떠나지 않았다. 지수가 적어두었던 끔찍한 계획이 적힌 노트를 발견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물론 지수도 그걸 알았고, 어찌 됐든 그는 떠나지 않았다. 지수는 그것이 마냥 고맙지는 않았다. 한 편으론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확신에 가깝게 들어찼다.

지수는 그의 옷을 꺼내 입었다. 담배냄새가 났다. 지수는 숨을 들이마시고 현관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단번에 폐까지 닿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지수는 계단 난간에 의지하다 그마저도 얼어붙은 것을 보고는 손을 때 버렸다. 계단에 쌓인 눈은 발자국 모양으로 굳어 있었다. 지수는 그것을 발판 삼아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 아래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누군가 먹이를 챙겨주는 모양인지 항상 그곳에 있었다.

“너 그러다 얼어 죽는다.”

지수는 손을 내밀었다. 고양이는 슬리퍼로 얻어맞은 것을 기억하는지 활처럼 등을 구부렸다. 지수가 다가가자 고양이는 수풀로 모습을 감추었다. 지수는 옷깃을 세워 최대한 몸을 감쌌다. 의사의 말마따나 방을 떠나 어디든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지수는 걸음을 돌렸다. 다시 계단을 오르며 생각했다.

‘돌아오거든 그에게 사과해야겠어.’



-3-



“보통은 부엌에 식탁이 있잖아, 거실엔 텔레비전이나 소파가 있고 말이야. 다른 집들을 봐도 그래. 거실에 식탁이 있는 집은 아파트에서 저 집 하나뿐이야.” 지수가 말했다.

“남의 집을 그렇게 쳐다보고 그래.”

그가 타이르듯 말하더니 시선을 건넸다.

“그런데 정작 저 식탁에서 밥을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신기하잖아. 안 그래?”

“그러다 신고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가 그런 방식으로 말할 때면 지수는 무언가 어긋난, 무언가 꼬이고 비뚤어진 느낌을 받았다.

“오늘 자고 갈 거야?”

지수가 말했다.

“자고 갔으면 좋겠는데.”

“내가 있으면 잠들기 더 어려울 거야. 늦게 까지 깨어 있잖아, 항상.”

그는 스스럼없이 말하는 법을 몰랐다. 문제는 그 의도까지 숨기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지수는 자신에게서 냄새가 나느냐고 묻거나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시 입을 연 쪽은 지수였다.

“소파를 하나 살 생각이야.” 지수가 말했다.

“글 쓰느라 하루 종일 앉아있으니까 허리가 아파서 말이야. 의자도 새로 살까 했는데, 소파가 좋겠더라고. 작은 소파가 좋을 것 같아. 별로 공간도 차지하지 않고, 사람 서넛이 겨우 앉을만한.”

그는 불쑥 일어나 방 안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꼿꼿한 자세로 한 곳에 멈춰 섰다. 머릿속에 들어차는 생각을 입 밖에 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음,” 지수는 뭔가를 설명하려 했다.

“그러니까,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닌데. 그만 입 다무는 편이 낫겠다.”

그가 말했다.

“네가 뭔가를 해냈으면 해. 내 마음 알지? 응? 나도 많이 도와줄 테니까.”

지수는 약해진 목소리로 답했다.

“고마워.”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양복 차림이었다. 넥타이만을 풀어헤치고 있었는데, 목에 자리 잡은 피딱지가 간지러운지 연신 긁어댔다.

“약은 먹고 있는 거야?” 그가 말했다.

지수는 고개를 저었다.

“먹으면 정신이 나른해져. 많이 나아지기도 했고.”

지수는 그 약이 눈을 흐리게 한다며 의사의 권유도 무시해버렸다. 애초에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조차 믿지 않았다. 지수가 생각하기에 이 모든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굳이 원인을 따져보자면 어디까지나 민감한 성격, 동조성이 높은 자신의 성격 탓이었고 그것이 자신을 이 지경으로 몰았을 뿐,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머니께 가보는 건 어때, 내가 연락드릴까?”

“글쎄,”

“그러지 말고 어머니께 다녀와. 당분간만이라도. 분명 도움이 될 거라니까. 네가 아무리 어머니와 담을 쌓고 지낸다지만 난 어머니만큼 널 알지 못해. 그건 인정하자고.”

그는 습관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그 또한 그녀 본인만큼이나 그녀에게 지쳐 있었고 그것이 점점 드러났다. 그는 잠깐 지수를 보더니 더 말하지 않았다. 시작한 이야기를 끝내고 싶어 했지만 지수가 입을 열지 않으리란 것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러자 지수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 얘길 해줄까?”

“드디어. 그것 참 고맙네.”

그는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다.

“얘기해봐.”

“듣고 싶지 않다면 말하지 않을게.”

“무슨 일이 있었든 얘기해 보라고. 난 들을 준비됐어.”

“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동안은 왜 얘기하지 않은 거야?”

“그랬었나? 모르겠어. 몇 번 말했던 것 같았는데.”

“잠깐만,”

그는 기다리라며 손짓하더니 금방 부엌에서 인스턴트커피를 만들어 왔다.

“그래, 어떤 분이신데?” 그는 잔을 한 모금 들이키고 지수에게도 잔을 건넸다.

“좋은 분이셔. 만날 기회가 있다면 좋을 거야. 엄마는, 음, 그러니까 잘 웃는 사람이야. 별 일 아닌데도 한 번 웃음을 터트리면 눈물을 흘리면서 한참을 웃어. 웃을 때는 이가 전부 드러나. 가끔 씩 입에 비해 크다고 느낄 만큼. 그러다 아빠 얘길 할 때면 많이 슬퍼해. 그때도 이가 드러나. 그래서 가끔은 구분이 안 갈 때도 있어.”

“아버지는 잘 지내시고?”

“몇 번 편지를 주고받긴 했어. 잘 지내시는 것 같아. 여전히 술은 못 끊은 것 같지만.”

지수는 양손으로 컵을 쥐고 홀짝였다.

“뭐라도 먹겠어?” 그가 돌연 물었다.

“따뜻한 음식이라면.”

“좋아, 뭐라도 먹자고. 너도 뭘 먹어야 하고, 나도 배가 고프니까. 먹을 만한 게 있나 볼게.”

그는 커피 잔을 내려놓고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지수는 고개를 돌려 건너편 아파트를 보았다. 노파는 식탁에 앉아 있었는데, 식탁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노파는 의자에 반쯤 걸터앉아 고개를 숙인 채 머리칼에 손가락을 파묻고 있었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던 노파는 얼굴을 감싸더니 빠진 머리칼을 세어보려는 듯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노파는 손을 툭 떨어트렸다. 노파는 베란다로 걸어 나왔다. 베란다엔 말라붙은 화분이 있었다. 노파는 화분을 보고 있는 듯했으나 초점이 뚜렷하지 않았다. 무언가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낯빛이었다. 지수는 행여나 눈이 마주칠까, 그러기엔 먼 거리였지만, 고개를 돌렸다.

“또 훔쳐보고 있는 거야?”

그가 상을 든 채 다가왔다. 지수는 노파를 그토록 오래 보고 있었나 생각했다.

“많이 먹어. 최대한 먹을 수 있을 만큼.” 그가 말했다.

작은 탁상엔 쌀밥과 김치, 햄 몇 조각과 계란이 올랐다. 따뜻한 김이 올랐다. 그는 정말로 배가 고팠는지 입 안 가득 흰쌀밥을 쑤셔 넣었다. 그가 우물거리며 다시 재촉했다.

“어서 먹어. 넌 정말 뭐라도 먹어야 해. 그게 좋아.”

지수는 겨우 젓가락을 들었다. 앙상한 손가락은 젓가락만큼이나 얇았다. 그는 음식을 쑤셔 넣으면서도 지수가 젓가락을 놓치지는 않을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지수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그를 쳐다봤다. 그럴 때마다 그가 물었다.

“더 줄까? 더 먹고 싶으면 말해.” 그가 말했다. 지수가 햄을 한 조각 집어먹자 그는 기뻐했다. 지수는 실로 오랜만에 그가 웃었다 생각했다.

“어머니 얘기 더 해주지 않겠어?”

“더 듣고 싶어?” 지수가 물었다.

“별로 들은 것도 없는 걸. 다 먹고 얘기해 주겠어? 일단 먹어, 넌 먹어야 해.”

“먹으란 말 좀 그만해. 꼭 우리 엄마 같아.”

“좋은 어머니셨네.” 그가 씩 웃었다.

“글쎄. 엄만 음식을 남기면 매질을 했어. 뭔가 잘못을 저지르면 항상 매를 들었지.”

그는 잠깐 고민하다 덤덤하게 말했다.

“정말이야? 사진으로 밖에 못 봤지만 그렇게 보이 시진 않던데.”

“엄마는…. 꼭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기복이 심했어. 어렸을 때라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버지와 이혼한 뒤로 그렇게 되어버린 것 같아. 아까 말한 것처럼 구분이 안 갈 때도 있었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울고 웃었어. 뭔가에 실망해버리면 오랫동안 그게 지속됐지. 지속 지금 나처럼. 이런 것도 유전일까?”

“유전이라기 보단, 상황 탓이겠지. 지난 일 년 동안 정말 힘들었잖아. 네가 고양이를 때리고 있을 땐, 뭐 지금이야 말하지만, 정말 놀랐어. 그건 왜 그런 거야?” 그가 물었다.

“손을 내밀었는데 도망갔어. 그래서 기분이 안 좋았어. 가끔 그래. 뜬금없이 슬프고 화가 나.” 지수는 그가 목을 매만지는 것을 보고 재빨리 덧붙였다.

“지금은 괜찮아. 그 일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는 어쩌겠냐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그래서 소설은 잘 쓰고 있어? 무슨 내용인지 궁금한데.”

“이렇게 마주 보고 얘기하는 게 얼마만이지?” 지수가 문득 물었다.

“자기야, 우린 항상 얘기하고 있었는걸.”

그는 몸을 일으켰다. 손에는 빈 밥그릇을 든 채였다.

“더 먹을래? 남긴다고 회초리를 들거나 하진 않을게.” 그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농담을 건넸다.

“아직 남았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람들 이야기를 쓰는 거야?” 그가 부엌에서 물었다.

지수는 듣지 못한 듯했다. 가득 퍼온 밥그릇을 내려놓고 그가 다시 물었다.

“저 사람들 얘길 쓰는 거지? 항상 관찰하고 있었잖아. 난 개인적으로 반대지만.”

그는 지수의 표정을 살피더니 말했다.

“뭐, 네게 도움이 된다면야. 좋아, 당분간은 좋은 얘기만 쓰라고. 좀 나아지면 예전처럼 함께 취재하러 다니자.”

“기삿거리가 뭐야?” 지수가 물었다.

“응?”

“요즘 취재하고 있는 거 말이야. 좋은 기삿거리가 있다고 했잖아.”

“말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들으면 우울해질 거야.” 그가 만류했다.

“오, 그러지 말고. 소재가 필요해. 게다가 나 정말 괜찮아졌어. 봐,” 지수는 앙상한 몰골로 최대한 웃어 보였다. 그는 탁상에 팔꿈치를 기대고 중요한 거래라도 하는 사람처럼 지수의 얼굴을 관찰했다.

“좋아, 말해줄게. 하지만 조금이라도 우울해진다 싶으면 바로 관둘 거야. 알겠지?”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서부터 말을 할까…. 되도록 짧게 말해볼게.” 그는 방바닥을 응시했다. 고개가 조금 흔들리는 듯싶었다.

“가까운 곳에 교회가 하나 있잖아, 기억나? 거기 목사가 소문이 좋질 않았는데, 결국 일이 벌어졌어. 근처에 살던 할아버지를 폭행한 모양인데, 아직까지 혼수상태야. 간호사에게 슬쩍 물어보니까, 원체 나이가 있는 탓에 다시 일어나긴 어려울 것 같다더라고. 여기까진 흔히 벌어지는 사건인데 정말 이상한 건, 들어봐, 노인의 가족들의 태도야. 남을 대하는 것 만 못하게 군다니깐. 마치 이런 일이 벌어지길 기다렸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그는 특종을 확신한다는 양, 정말로 남에게 벌어진 일이라는 양 웃었다.

눈 안쪽이 지끈거렸다. 지수는 제 딴엔 들키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는 곧장 지수의 옆자리로 와 어깨를 감싸 안고 법석을 떨었다.

“오, 자기야. 내가 우울해질 거라고 했잖아. 이 얘긴 그만 하자. 좋은 얘기만 하자고.”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지수를 일으켜 세웠다.

“바람 좀 쐐. 응?” 그가 말했다. 그는 커튼을 완전히 걷어 젖히고 창문을 열었다. 이마에 키스를 퍼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가 말했다.

“어머니를 만나고 와. 며칠 동안만이라도 좋으니까 다녀오라고. 그간 밀렸던 얘기도 하고. 못 본지가 한참이잖아.”

지수는 맞은편 아파트를 응시했다. 노파는 여전히 베란다에 앉아 있었다. 노파의 손자는 조용히, 거실 소파에 앉아 무언가를 기다리기라도 하듯 그녀를 응시했다.

“생각처럼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연락만 해 보자고. 그래도 자기 어머니잖아.” 그가 말했다.

“부모가 반드시 제 자식을 사랑하리란 법은 없어. 네가 방금 말한 것처럼.”

이렇게 하면 무언가를 전할 수 있다는 듯, 무언가 도움이 될 거라는 듯, 그는 지수의 등을 위아래로 쓰다듬었다. 그는 지수를 바짝 끌어안고 고양이처럼 얼굴을 비볐다. 수염이 따가웠다. 지수는 눈을 감았다. 더 깨어있고 싶지 않았다.

“오, 자기야 제발.” 그가 말했다.

“뭐라도 얘기해봐. 응? 그러고 있으니까 나까지 불안해지잖아.”

그는 지수의 손을 붙잡았다. 지수가 꿈쩍하지 않자 손목을 붙잡아 방으로 끌어당겼다. 고개를 저었지만 끝내 침대까지 끌려갔다. 그가 목 뒤로 팔을 밀어 넣으며 말했다.

“말해봐. 응? 내가 어떻게 도와줄까?” 반대쪽 손이 윗옷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나도 모르겠어.” 지수가 힘겹게 대답했다.

목을 두르고 있던 팔이 빠져나오더니 조명등을 껐다. 그가 말했다.

“그러지 말고 자, 오늘은 그만하고 자는 거야. 내일 얘기하자. 언제고 들어줄 테니까.”

그는 한동안이나 맨살을 쓰다듬었다. 조금씩 손이 느려지더니 호흡이 일정해졌다. 그가 잠꼬대처럼 웅얼거렸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

지수는 어둠 속에서 눈을 껌뻑였다. 그러다 충동에 휩쓸려 그의 목을 할퀴고, 정신을 완전히 놓아버린 채 소리쳤다.

“내가 얘기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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