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콘테스트

오늘:
29
어제:
25
전체:
305,488

접속자현황

  • 1위. 후리지어
    65572점
  • 2위. 뻘건눈의토끼
    23333점
  • 3위. 靑雲
    18945점
  • 4위. 백암현상엽
    17074점
  • 5위. 농촌시인
    12042점
  • 6위. 결바람78
    11485점
  • 7위. 마사루
    11385점
  • 8위. 엑셀
    10614점
  • 9위. 키다리
    9494점
  • 10위. 오드리
    8414점
  • 11위. 송옥
    7661점
  • 12위. 은유시인
    7601점
  • 13위. 산들
    7490점
  • 14위. 예각
    3459점
  • 15위. 김류하
    3149점
  • 16위. 돌고래
    2741점
  • 17위. 이쁜이
    2237점
  • 18위. 풋사과
    1908점
  • 19위. 유성
    1740점
  • 20위. 상록수
    1289점
조회 수 38 추천 수 1 댓글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가만프라자

 

루가노 호수를 따라 걷는 일은 매일 아침 반복된다. 간드리아 마을의 집들은 언덕부터 지어져 정면으로 호수를 바라본 채 옹기종기 모여있다. 올리브를 따라 이어진 산책로는 어딘가의 미로로 가는 길이다. 오래전에는 여기 살던 사람들이 인근 루가노 마을까지 배를 타고 나가 식량을 구해왔다는 말을 들었다. 헤르만 헤세가 여생을 머물며 수채화를 그리기도 했던 곳이라고, 현지 주민들은 마을을 떠났고 이젠 남은 집들은 별장이나 상가로 이용된다고. 정은 노천카페에 앉아 어제와는 다른 빛의 자취를 쫓는다. 정물처럼 늘어진 과일들, 알맞게 말린 꽃다발들, 정체를 알 수 없는 부티크 상점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중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 비행기 표에 적힌 시간을 찬찬히 살펴보던 정이 커피를 한 번에 들이키고 일어선다. 그림차처럼 옅은 담임 선생님의 손짓이 보인다. 어느새 취리히 공항의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배의 옆에 앉아 정은 반다나를 고쳐맨다. 비행기의 좌석은 비좁고 옆에 앉은 남자는 술 냄새를 지독히 풍긴다. 배는 몽유병에 걸린 사람처럼 걸었고, 낭만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식으로 코를 곤다. 홍콩을 경유하는 이 노선은 무려 19시간이 걸렸지만, 정은 그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잠깐의 소란 끝에 다들 잠들었을 때도 하늘을 멍하니 볼 뿐이었다. 넌 너무 감성적인 게 탈이야. 배는 늘 그런 식으로 정을 조금씩 뭉갰다. 참 쉽죠? 하고 묻는 밥 로스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게. 난기류가 흔들흔들 배의 잠을 조금 휘저었다. 배는 실눈을 뜨고 말했다. 이제 해외는 지긋지긋해. 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우린 고작 보름 머물렀을 뿐이라고. 기재기를 키던 배가 키득키득 웃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쨌든 이 겨울이 지나면 우린 스무 살이라고, 그 말은 자유란 거지,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면서 살 수 있단 얘기고. 정은 초록색 젤네일을 만지작거리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세계에는 이 색처럼 하늘이 물드는 곳이 있대, 그게 오로라라는 거래. 배는 이미 관심 없다는 듯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또 올 수 있겠지? 하고 물으려다 정은 아무도 안 들어도 괜찮다는 듯 고쳐 말했다. 또 올 수 있을 거야.

 

톨케이트를 지나기 전부터 둘은 아무 말도 없었다. 도로 너머로 펼쳐진 건 비닐하우스였다. 누에고치처럼 그 안에서 덜 자란 나방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정은 귀밑에 붙인 멀미약을 꾹꾹 눌렀다. 이 지역으로 들어선다는 게 이제 앞으로 어딜 가도 지난한 멀미를 겪게 된다는 암시 같았다. 커튼을 뚫고 우울한 햇살이 들어오다가 사색이 되어 밖으로 돌아가곤 했다. 정이 살면서 겪어본 적 없는 난폭한 운전이었다. 중간 좌석에서도 기사 아저씨가 내뱉은 욕이 똑똑히 들렸고 급정거나 급발진은 교통비에 포함된 서비스처럼 이뤄졌다. 정은 어느 순간부터 안전벨트를 꽉 쥔 채 지난겨울을 떠올렸다. 별로 춥지 않았던 겨울이었다. 늘 그렇듯 광장에는 트리가 설치됐고, 눈은 거의 오지 않았고, 길의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더라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그런 밤이었다. 배는, 배는 조금 울었던 거 같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잡고 모든 게 다 괜찮다고 말하려다가 정은 입을 다물었다. 배의 손이 스커트 밑으로 쑥 들어올 때도 들어온 다음에 느낀 모든 불안들을 토해내고 싶을 때도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아느냐고 묻고 싶을 때도. 정은 얼음이 녹아 맹탕이 된 커피를 머리에 붓고 싶었다. 감기에 걸린 기분이었지만, 언제 나을지 알 수 없는 기분이기도 했다. 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갔다. 배의 말처럼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다 하는 목록 가운데에 이것도 포함된 건지 묻고 싶었지만, 정은 그럴 때마다 엄마의 말을 떠올렸다. 묻고 싶은 걸 다 묻고 살 순 없다며 서랍에서 발견한 상자를 불태우는 엄마. 정류장에 멈추지도 않고 달리길 한 시간이 지났을까, 정은 수도 외곽에 이런 동네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끝이 없는 밭 너머로 아파트들이 우후죽순 솟아 있었다. 버스에선 군고구마 냄새가 났다. 옆자리에 앉은 배는 까슬한 수염을 정의 어깨에 들이밀었다. 정은 배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잠 귀신이라도 붙은 걸까, 어쩜 저리 무신경할까. 배는 버스가 목적지에 거의 도착할 때까지도 일어나질 않았다. 벨을 누른 뒤에 정이 한 일이라곤 혼자 내릴지 둘이 내릴지 잠깐 고민하는 것뿐이었다.

 

암막 커튼을 걷고 이불에 다시 덮은 뒤에야 정은 모든 불빛이 꺼졌다는 걸 떠올렸다. 일부러 조금 열어둔 방문 너머는 깜깜했다. 아마 뒤척이던 배가 도중에 일어나 전등을 끄고 들어왔을 거란 걸 알면서도 정은 누가 집 안에 또 있을까 무서워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사람이 왜 자꾸만 내 전등을 끄는 걸까. 정은 그런 일로 싸우고 싶지 않았고, 면박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어쨌든 우린 부부고, 앞으로 함께 할 날이 많으니까, 같은 심정으로. 배는 자꾸만 다리를 번쩍 들어 이불을 조금씩 걷어찼고, 이불이 바닥에 떨어지면 눈도 뜨지 못한 채 일어나 어기적거리며 다시 이불을 들어 침대에 올렸다. 그럴 때 정은 늘 깨어있었고 그게 무슨 유명한 희극 장면 같았다. 베개를 비스듬히 베고 눈을 감아도 정이 할 수 있는 건 불도저처럼 다가오는 배를 밀어내는 일뿐이었다. 새벽은 길고 짜증 나는 부리를 가진 두루미라고 정은 종종 그렇게 생각했다. 어릴 때 정은 그런 테이프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아침잠이 없던 아버지는 집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 모두를 깨우고 다녔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동화를 읊는 테이프가 틀어지면 정과 정의 언니는 싫어도 꾸역꾸역 일어나서 이불을 개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잠을 잘 때를 제외하면 집에선 눕는 것도 싫어하는 아버지 덕분이었다. 지독히도 부지런한 사람. 정이 가끔 농담 삼아 유전자 검사를 해야겠다고 말한 것은 지독히도 부지런한 부모를 닮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정은 느렸고 조심스러웠고 늘 말이 없었다. 배를 만나기 전까지 정은 자신이 몹시 따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방음이 되지 않는 탓일까. 정은 침대에 누워 옆집 부부가 출근하는 소리를 유심히 들었다. 물줄기 흐르는 소리 사이로 섞이는 웃음, 가벼운 일상을 소개하는 텔레비전 음성, 과일을 가는 믹서기 소리, 이윽고 문이 열리고 커다란 자전거 바퀴를 끄는 소리. 정은 벌떡 일어나 테라스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바닥이 너무 차가웠다. 희뿌연 창 사이로 자전거를 타고 사라지는 남자가 보였다. 정은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보기 위해 달력을 넘겼다. 그 달력은 정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를 갔다가 받은 물건이었다. 월요일. 정은 월요일을 제일 좋아했다. 옅게 화장을 마치고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밖으로 나오면 분주히 길을 걷는 사람들 사이로 은은한 향이 나는 것만 같았다. 검은 정장을 곱게 차려입은 여자, 길가를 천천히 쓸며 지나가는 환경미화원, 호루라기를 불며 싱긋 웃는 녹색 어머니들, 조폭처럼 모여 다니는 야구부가 유명한 까까머리 공업고등학교 남학생들. 남자가 출근하면 꼭 그다음부터 청소기 소리가 났다. 정은 다시 이불로 돌아와 배를 발로 슬슬 반쯤 밀어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배가 보인 반응은 투정에 가까웠다. 짐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보고 온 배는 근처에 아무것도 없다며 자꾸만 애꿎은 상자를 걷어찼다. 저녁에는 기어이 정의 손을 잡고 동네를 다시 돌았지만, 낮에 보이지 않던 건물이 밤에 갑자기 보일 리가 없었다. 이런 깡촌에서 내 삶을 낭비하라고? 배의 말에 정은 기억을 더듬다가 간신히 말했다. 그래도 가만프라자라고 하나 있던데? 그들이 월요일에 가만프라자를 간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가만프라자에는 딱 봐도 허름한 작은 식당이 몇 개, 당구장과 노래방, 그리고 무려 수영장이 있었다. 그들 부부가 아무 곳도 들르지 않고 수영장으로 먼저 들어간 것도 사실 둘러볼 만한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영장은 정오가 지난 시간인데도 사람이 거의 없었다. 수심은 얕았고, 물은 미지근했고, 탈의실은 좁았다. 나이가 지긋한 여자 몇 명이 강사 앞에서 수영을 배우고 있었다. 배는 옷을 벗지도 않고 물에 뛰어든 뒤에야 큰 소리로 물었다. 수영할 줄 알아? 정은 그런 배가 부끄러웠고 멀리 떨어져서 작게 대답했다. 해 본 적 없어. 배는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데도 손을 젓고 발을 휘둘렀다.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한동안 정은 수영장 복도에 멍하니 서서 물에 빠진 건지 빠져가는 중인지 모를 배의 모습을 바라봤다. 배가 갑자기 물에서 뛰어나와 정을 물 안에 내동댕이치기 전까진. 어쩌면 그녀가 다가온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연한 노란색 수모를 쓴 그녀는 배가 정을 잡고 같이 버둥거릴 무렵에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그녀의 물음은 정이 듣기엔 당신들 정상이에요? 같은 물음이었는데 배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럼요, 지금 몹시 괜찮은 상태인걸요. 그녀는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고 유연하게 물에서 나가 분홍색 킥판 두 개를 가져왔다. 이게 도움이 될 거예요. 그녀는 멀리서 킥판을 물 위로 던졌다. 둥둥 떠내려오는 킥판을 잡아챈 배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다시 종알거렸다. 우린 이곳으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 부부에게 수영을 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정은 그새 물 밖으로 나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마 비쌀 거야. 그녀는 배를 한 번, 정을 한 번 보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숨결이 조금씩 흩어져 물이 흔들렸다. 배는 킥판 두 개에 양팔을 올리고 둥둥 매달린 채로 다시 물었다. 어떻게 안 될까요? 그녀는 배영을 하는 여자들을 한참 보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월요일, 수요일이면 어떻게 해볼게요. 홀딱 젖은 머리카락에 물을 쥐어짜며 물 밖으로 나온 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주 좋아요, 우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몹시 한가하거든요. 사흘 정도 정은 같이 가기 싫다고 우겼다. 하지만 딱히 밖으로 나갈 일도 없었다. 정과 배는 일주일에 이틀을 그녀에게서 수영을 배웠다. 배는 영 소질이 없었지만, 정은 한 달 만에 그녀의 손을 잡지 않고도 혼자서 자유형을 할 수 있었다. 물에 가라앉을 것 같은 느낌 끝자락에서 정은 유연히 미끄러졌다. 우리 집 안에 수영장을 짓고 싶어. 배는 이렇게 근사한 생각을 해 본 적 없다는 듯 종종 말했다. 얼굴은 늘 푸르죽죽하고 부르튼 채로.

 

밤은 산불처럼 찾아왔다. 산 중턱에 커다란 불빛은 뭔지 알 수 없어도 저녁이 되면 빛이 들어왔다가 아침이 될 무렵엔 완전히 꺼졌다. 그건 꼭 배의 시계 같았다. 그 불빛이 켜질 무렵에 배는 서서히 일어났다. 이미 뉘엿뉘엿 해가 진 뒤였다. 노을이 유명하다는 이 동네의 말에 따라 처음 이사 온 날 저녁에만 같이 창문 앞에 앉아 햇볕이 조금씩 물러나는 걸 봤다. 그날에도 배는 계속 자도 피곤하다고 투덜거렸다. 깨어있는 시간이 잠을 자는 시간보다 적은데도. 비틀비틀 일어난 배가 제일 먼저 향하는 곳은 식탁이었다. 배는 냉장고를 열어 반찬을 주섬주섬 꺼내 밥을 먹었다. 냉장고에는 언제나 선택받지 못하는 반찬들이 조금씩 썩어가고 있었다. 푸릇푸릇한 채소들, 각종 견과류, 젓갈들과 몸에 좋다는 해산물들. 정은 그런 음식들을 버리는데 이미 질려 있었지만, 아무리 먹지 않는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가끔 정은 대리모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시내에 있는 병원에 갈 때도 아버지는 늘 차를 몰고 문 앞까지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배는 늘 자고 있었다. 그 자식은? 아버지는 배의 이름조차 부르길 꺼렸고 원수 부르듯 안부를 물었다. 정은 어깨를 으쓱하곤 항상 똑같이 대답했다. 일을 구하는 중이야. 아버지는 그 외의 일들에 대해선 최대한 물으려고 하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정은 배가 일어나기 전까지 수많은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가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건 너희를 위해서야. 엄마는 늘 정오 무렵에 전화를 걸어 그렇게 말했지만, 정이 생각하기에 엄마가 말한 묻고 싶은 걸 다 묻고 살 수 없다는 말은 엄마를 위해서였다. 배의 엄마는 가끔 전화를 걸어 배의 안부를 묻진 않고 자꾸 미안하다고만 말했다. 정은 그 사과에도 좀 질려 있었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예전 친구들에게서도 전화가 왔다. 체육복 바지 위에 치마를 입고 담을 넘어 같이 아이스크림을 사던 중학교 때 친구들, 떡볶이가 먹고 싶어 언덕에 있는 교회에 같이 다녔던 초등학교 때 친구들, 같은 대학에 가자고 약속해놓고선 결국 전부 다른 대학으로 가버린 고등학교 때 친구들까지. 정은 오랫동안 쓴 번호를 바꾸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게 어떤 절차를 거쳐야 하는지도, 혼자서 그런 일을 해본 적도 없었다. 밥을 다 먹은 배는 식탁을 치우는 정의 엉덩이를 두어 번 만지고선 늘 그렇듯 무심하게 물었다. 오늘은 어땠어? 싱크대 앞에 선 채 정은 수세미로 그릇을 문지르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늘 똑같지. 배는 이제 정의 뒤에서 정을 끌어안고선 말했다. 사는 게 뭐 이렇게 따분하고 재미가 없냐. 새벽부터 깬 정은 집을 청소하고, 꿉꿉한 냄새를 환기하고, 빨래도 하고, 그러다 보니 배가 일어난 뒤에야 졸음이 쏟아진다. 정은 먼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눕는다. 하루가 지났는데도, 하루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정은 머리맡에 놓아둔 비타민을 한 알씩 먹는다. 먹어도 먹어도 비타민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이건 꿈일 거야. 잠이 들 무렵에 정은 그게 정말 비타민인지 궁금해진다. 수면제였던가? 아니면 소화제인가? 어떤 소염제일까? 정이 눈을 채 감지도 않았는데 몹시 조심스럽지 않은 태도로 배가 방에 들어와서 옷을 주섬주섬 입는다. 딴에는 조심스럽다고 생각하는 태도로 방을 나가면서 배는 꼬박꼬박 문을 닫는다. 고요한 밤. 코 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잠에서 깬 정이 까치발을 들고 거실로 나와 하는 일은 전등을 켜는 일이다. 어디에도 배는 없다. 배는 이 밤에 어딜 가는 걸까. 정은 배의 밤 외출이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어디로 가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하나도 몰랐다. 하지만 정이 하는 것이라곤 그저 방문을 살포시 열어 침실로 오는 길을 밝혀놓는 것뿐이었다. 벌써 무언가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안 되니까, 오래 같이 살아야 하니까, 같은 심정으로. 불순한 의도는 아니라는 걸 정은 잘 알고 있었다. 정이 아는 배는 그럴 배포도 없는 좀생이 같은 남자니까. 꼬박꼬박 돌아오는 배는 좀처럼 정의 눈에 띄지 않는다. 정이 눈을 떴을 땐 어느새 배가 잠옷을 입은 채 뻗어있다. 밤을 꼬박 지새우고 몰래 따라가면 뭘 보게 될까? 정은 비타민 통 안에 든 알약을 전부 수면제로 바꿔놓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배가 그렇게 어딜 다녀오는지 정은 알 수 없는 일은 알 수 없는 거로 생각하면서도 늘 배의 옷 주머니를 뒤진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정이 밤 외출에 대해 알게 되는 건 어느 주말이었다.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정은 처음에 그 소리가 옆집에서 나는 소리인 줄 알았다. 한낮의 햇볕이 거실 바닥에 일렁거렸다. 그림자가 조금씩 길어졌다. 침대에 누운 정이 보기에 그건 마치 사람 같았다. 문이 열려 있었던가? 불안해진 정이 배를 깨웠지만, 배는 무어라 중얼거릴 뿐 도무지 일어나질 않았다. 그새 다시 벨이 울렸다. 정은 조심스레 거실로 나와 인터폰 너머에 비친 모습을 바라봤다. 짧게 쳐올린 머리칼은 군인 같았는데 흰 피부와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고 몸에 착 달라붙는 연두색 등산복을 위아래로 맞춰 입은 채 웃고 있었다. 누구세요? 정은 당장이라도 경찰을 부를 심정으로 물었다. 영화에서 봤는데 그럴 때 문 열어주면 그냥 죽더라, 그런 생각에 빠진 정은 저녁에 배에게 이 얘길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뒤에야 조금 진정이 됐다. 그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화면 너머에서 꾸벅 인사를 하고 물었다. 남편분 계신가요? 어제 새벽에 오늘 여기 오기로 약속했거든요. 정이 어찌할 줄 몰라 망설이는 사이에 침실에서 배가 슬슬 걸어 나왔다. 누가 왔어? 정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하마터면 인터폰에 쏘아붙일 뻔했다. 누가 오기로 했어? 배는 그 물음에 잠깐 멈춰 서더니 고개를 갸웃거리곤 말했다. 글쎄, 누가 올 수도 있지. 인터폰 너머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정이 직접 문을 열었을 때 그는 손에 든 알로에 주스 상자를 건네고 아주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한 뒤 오도카니 서서 물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그제야 배는 생각났다는 듯 들어오라며 손짓을 건넸다. 한동안 둘은 침실로 들어가 정이 들을 수 없는 얘기를 나눴다. 정은 잠깐 닫힌 방문 앞에 서서 귀를 기울였지만, 그게 헛수고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건조대에 널어둔 빨래를 개면서 정의 기분은 오락가락했다. 누가 온다면 온다고 말을 할 것이지, 아니, 근데 이렇게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상태로 온 사람이 잘못인가, 아니면 같이 밤에 일하는 사람이라 그런가, 아무리 그래도 우리 부부 침실의 침대에 앉아 얘기하는 건 너무한 일인데, 그런데 둘이 한다는 게 대체 뭘까. 정은 양말의 짝을 하나씩 맞추며 애써 시선을 돌렸다. 둘이 침실에서 나온 건 정이 모든 빨래를 다 개고서도 한참 후였다. 배는 싱글싱글 웃으며 그와 악수를 하곤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그럼 언제 한 번 부부 동반 여행이라도 가실래요? 그는 정을 한 번 힐끔 바라봤지만, 이내 호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우리야 좋지. 그날 정이 한마디 하려고 입을 열었을 때, 배는 어설프게 가슴을 만지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우리 부자로 만들어줄게.

공원 입구에서 정은 몇 번이나 가기 싫다고 말했지만, 배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수영도 싫댔잖아, 근데 이젠 어때? 배가 자꾸만 그런 식으로 말을 돌릴 때 정은 어디서 야구 방망이라도 가져와 머리통을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을 참아야만 했다. 봄이어도 밤에는 몹시 추웠다. 얇은 카디건을 걸친 정과 달리 배는 나가기 전 춥다는 정의 말을 아예 무시하고선 가로등의 불빛 밑에 서서 처량하게 떨고 있었다. 정은 하는 수 없이 입고 있던 카디건을 벗어 배의 어깨에 걸쳤다. 나는 그분이 누군지도, 그분 아내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그 말을 끝난 뒤에 정은 반딧불이가 조금 돌아다니는 걸 쫓아다녔다. 그만해, 촌스러워 보여. 배는 그렇게 말하고선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금 덧붙였다. 그분들 좋은 분들이야, 친해지면 좋을 거야. 그의 세단은 약속보다 조금 늦게 나타났다. 배는 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았고 정은 하는 수 없이 뒷자리에 앉았다. 수모도 수영복도 아닌 그녀를 본 정은 데면데면 인사를 건넸다. 아무것도 모른 채 따라왔구나? 샐쭉한 표정을 지은 그녀가 정에게 귓속말로 조용히 말했을 때 정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색한 침묵은 독감처럼 퍼졌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와중에 그가 두어 번 창문을 연 것만 빼면 차 안은 조금 덥고 어지러웠다. 배는 어느새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잠이 들었다. 오늘 어디 가는지는 알고? 정은 그제야 그녀가 반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수영을 배우던 그 시간과는 전혀 다르게. 전혀 몰라요. 눈은 창밖을 향한 채로 그녀는 혀를 차며 큰 소리로 말했다. 거봐, 당신 하는 일이 늘 이 모양이지, 좀 친절하게 설명하면 어디 덧나나? 그는 어딜 한 대 맞은 것처럼 조금 움찔하곤 아주 친절하게 말했다. 우린 일출을 보러 가는 거예요. 정도 그녀도 조금씩 졸았다. 정이 정신을 차렸을 때 세단은 해안 도로를 따라 구불구불한 길을 넘어가고 있었다. 배는 어느새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해안선을 바라보다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말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거 같아요. 모래사장이 보이는 곳에 모두 내렸을 땐 어슴푸레 파도가 보일 정도였다. 그는 가방에서 담요를 꺼내 그녀의 어깨에 살짝 두르곤 먼저 바다로 성큼성큼 걸었다. 배가 그 뒤를 따라갔고 정과 그녀는 아예 해변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해변 바깥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았다. 피곤하지? 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려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견딜만해요. 아무도, 아무도 정에게 그렇게 물어주지 않았다. 처음엔 다 그래, 두렵고 이게 맞는 건지 묻고 싶고 또 그러다가도 전부 포기하고 싶고 그렇게 살다 보면 결국 살아지더라고. 정은 갑자기 집에 두고 온 결혼반지가 떠올랐다. 그걸 오늘 손가락에 끼고 왔어야 우리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말할 수 있을까? 그와 배가 동시에 소리를 지르며 바다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지평선부터 조금씩 해가 떠올랐다. 그녀는 손을 높게 들어 살살 흔들었지만, 정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정이 그리운 건 아주 많은 시간이기도 했지만, 아주 많은 공간이기도 했다. 낯선 도시의 밤을 지나 도착한 낯선 바다의 낯선 의자 말고. 남편을 아직도 많이 사랑하세요? 정의 입에서 불쑥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벌떡 일어서면서 별다른 고민 없이 대답했다. 너는 아직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야, 그건 좀 더 자란 뒤에 생각해보렴. 해안 끝자락에서 누가 불꽃놀이를 했다.

그런 일들은 일주일에 두어 번씩 생겼다. 정상이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을 오를 때 배가 넘어져 무릎을 다친 이후론 몸 쓰는 일은 조금 꺼리게 됐지만, 배와 정 부부가 절대로 둘이 살면 가지 않을 곳도 많이 찾아갔다. 이를테면 미술관이 그랬다. 페루 출신 프랑스 조각가가 만들었다는 파란색 문을 열고 들어가면 풀밭 한가운데에 전시장이 있었다. 뒤편엔 작은 연못과 사찰도 있었지만, 대체로 둘러볼 게 많지는 않았다. 그와 그녀는 팔짱을 끼고 앞장서 걸으며 마음에 드는 작품 앞에선 오랫동안 서서 무언가를 얘기했다. 그에 비하면 배는 한 작품을 채 보기도 전에 눈을 돌리고 빠른 속도로 걸은 뒤에 전시장을 먼저 빠져나갔다. 하는 수 없이 정은 혼자서 그곳을 돌아다녔다. 무수히 겹쳐진 사람 몸들이라던가, 기괴하게 비틀린 몸의 형태라던가, 사람도 곰도 아닌 키메라 같은 형상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그러다가 정은 자기 시선이 자꾸만 그와 그녀의 뒷모습을 쫓는다는 걸 눈치챘다. 아무도 없는데도 두런두런 조용히 나누는 얘기들, 낮고 작은 웃음과 살짝살짝 스치는 살갗들, 서로 잠깐 멀어졌다가도 이내 마음에 드는 작품을 서로에게 보여주는 몸짓들, 그의 어깨에 멘 그녀의 가방과 그녀의 손에 든 작은 손수건. 정은 마치 방해꾼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서둘러 출구로 걸었다. 배는 바깥 어디에도 없었다. 우리도 저렇게 좋은 부부가 될 수 있을까? 뙤약볕을 피해 그늘로 움직인 정은 모르는 번호에서 온 전화를 끊으며 스스로 물었다. 여태까지 살면서 정이 자신 있던 것이라곤 화학 시간에 원소 기호를 외우는 것, 논설문을 어디서 본 기사 내용과 적절히 섞어 쓰는 것,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고양이에게 간식을 주는 것뿐이었다. 출구에서 먼저 나온 그녀는 자연스레 정이 서 있는 그늘로 걸어왔다. 뭐가 좋았어? 정은 그제야 부랴부랴 안에서 뭘 보고 나왔는지 떠올렸지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재빨리 다른 질문을 했다. 어디에서 살다가 왔어? 정은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다시 삼켰다. 당신들이 없는 곳이요. 그가 멀리서 다가오면서 뭘 마실 거냐고 크게 묻지 않았다면 그녀는 또 다른 질문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커피요. 정이 멀뚱멀뚱 아무 얘기도 하지 않자 그녀가 다시 크게 말했다. 두 잔. 배는 연못 뒤편에서 나와 그를 따라갔다. 정은 자꾸만 그에 비해 옹졸한 배의 어깨가 맘에 걸렸지만, 한편으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늙었지만, 배는 아직 젊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기분이 나아져 정은 그녀에게 무언가 물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런 곳에 사는 건 따분하지 않아요? 그녀는 입술에 립글로스를 바르다 말고 얼굴을 돌려 정의 얼굴을 한 번 보곤 살짝 웃으며 말했다. 벌써 그러면 안 되는데, 신혼이니까 뭘 해도 좋을 때잖아? 정이 듣기에 그 말은 마치 그렇게 살고 있지 않으면 지옥에 가야 한다는 말투였다. 정은 순간 조금 약이 올라 다시 물었다. 신혼 때 그러셨어요? 손거울을 접은 그녀는 머리맡에 늘어진 가지를 조금씩 부러뜨리며 대답했다. 그런 걸 묻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야. 무언가 대단한 선심을 쓴다는 듯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누군가에게 뭘 묻고 싶다면 우선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을 하고 나서야. 멀리서 배와 그가 양손에 커피를 두 잔씩 쥔 채 걸어왔다. 정이 유일하게 마실 수 없는 음료인 차가운 커피를. 정은 차가운 커피를 모두의 머리에 붓고 싶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정은 조금도 잘 수 없었다. 그 좆같은 예의 다 집어치우라고 생떼를 쓰고 싶다가도,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늙은 부부가 될 거 같다가도, 그러면 그건 그것 나름 괜찮지 않을까 싶다가도, 울 것 같은데 울음이 나질 않는다고 병원에 가보면 어떨까 싶다가도, 귀신이 정말로 장수한 귀신이 되고 싶었다. 귀신이 되면 온갖 부부의 꿈속에 찾아가 악몽 같은 얘길 계속 들려줘야지, 하는 심정으로.

 

쌀쌀한 거리의 신호등을 건넌 뒤에 정은 주소가 정확한지 한 번 확인했다. 배는 이미 어딘가로 나간 뒤다. 가만프라자 뒤편으로 우뚝 솟은 아파트 건물은 커다란 생태 공원의 입구에 있었다. 발밑으로 청설모가 먼저 경비실 아래로 달려갔다. 정은 꾸벅꾸벅 조는 경비원의 얼굴을 흘깃 쳐다보다가 단지 안으로 걸었다. 늦은 시간인데도 꺼지지 않은 등불 아래서 제법 많은 사람이 정처 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정은 그중에 팔짱을 낀 채 입을 맞추는 젊은 부부를 따라갔다. 비밀번호를 누른 여자는 문이 닫히기 전에 정이 뛰쳐들어가자 묘하게 웃으며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정은 다른 엘리베이터를 기다린 뒤에야 다시 주소를 확인했다. 이 건물 24층의 4번째 집, 2404호였다. 엘리베이터에선 옅은 화약 냄새가 났다. 2404호의 밖으로 난 창문으로 정은 안쪽을 조심스레 살폈다. 인기척은 없었지만, 거실 불은 켜진 채였고 유리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정은 잠깐 망설이다가 초인종을 눌렀다. 안쪽에서 보기에 어떤 모습일까? 정이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볼에 난 여드름을 만지는 동안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음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긴 왜 왔어? 정은 문 앞에 서서 잠깐 고민한 뒤에 말했다. 혼자 있기 싫어서요. 문이 열리는 차가운 소리가 났다.

그녀는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작은 좌식식탁에 안주도 없이 술병 하나, 잔 하나인 걸로 봐서 애초에 혼자 있었다는 걸 정은 진작 눈치챘지만, 달리 말문을 열 수가 없어 물었다. 혼자 계세요? 얇은 검정 슬립 원피스를 걸친 그녀는 별다른 인사도 없이 계속 잔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보면 알잖아. 현관에서 구두를 벗고 들어오자마자 아로마 향이 났다. 향초 두어 개가 타고 있었다. 정이 굳이 동의를 구하지 않고 식탁 앞에 마주 앉았는데도 그녀가 한 일이라곤 코르크 마개를 데굴데굴 굴리는 일뿐이었다. 식탁 끝에서 끝으로 굴러가는 둥근 마개가 떨어질 것 같으면 손바닥을 펼쳐 그 안에 놓고선 다시 반대로 굴리길 반복하던 그녀가 살짝 얼굴을 들었다. 붉어진 얼굴과 입술을 봐서 정은 그녀가 몹시 취한 상태라는 걸 단박에 깨달았다. 갑자기 그녀가 코르크 마개를 정의 얼굴로 던지고선 말했다. 무슨 생각하는지 말해볼까?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된 건지 궁금하지? 겉으로 보기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데 왜 이런 곳에서 사는 건지 묻고 싶잖아. 여긴 마치 유배지 같으니까. 여기가 나쁘단 얘긴 아니야. 하지만 이곳은 그런 곳이지. 도시의 삶이 질려서 이제 조용히 농사나 지으며 살기 좋은 동네, 젊었을 때 잔뜩 벌어서 백화점도 펍도 필요 없을 것 같을 때 고즈넉이 살기 좋은 동네, 시에서 제일 큰 역에 가면 군인이 바글바글하고 도시에서 가깝긴 하지만 누구도 그 이름을 모르는 그런 동네. 네가 도시에 살 때도 여기가 있는 곳이었는데 전혀 몰랐잖아. 그런데 어떻게 이런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는지 말이야. 정은 그녀가 했던 것처럼 코르크 마개를 식탁 끝에서 끝으로 밀었다. 집 안의 모든 창문은 닫혀 있었다. 정이 입을 열기도 전에 코르크 마개는 식탁에서 떨어져 현관까지 주르륵 굴러갔다. 저 마개가 현관을 뚫고 엘리베이터를 탄 뒤 우리 집에 도착해서 저녁을 차려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정은 그 확률이 과거의 정이 여기에서 살게 될 확률보다 높았을 거로 생각하며 말했다. 그런 걸 실수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녀는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뭐가? 정은 최대한 아무도 듣지 않게 얘기하고 싶었다. 어쩌면 자기조차도 별로 듣고 싶지 않은 그런 음성으로. 여기 살게 되고, 여기로 오게 된 일 전부가요. 사실 저도 잘 모르겠거든요. 어른들이 다 그렇게 얘기했어요. 이건 제 인생에 있어서 아주 작은 실수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정말 실수였을까요? 배를 사랑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적어도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다른 결정을 할 자신이 없어요. 그날 배는 아주 슬퍼했고 또 죽으려고 했으니까요. 그것뿐이었다면 돌아섰겠죠. 그건 단순히 연민이니까요. 그런 감정보다 더 옹졸하고 좀스러운 마음이었어요. 여기서 배와 둘이 있으면 다른 건 상관없었으니까. 물론 그 순간은 이성적인 판단을 하진 않았어요. 이를테면 오늘 밤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날의 선택도 바뀔 순 있었겠죠. 하지만 그럼 누구나 실수를 하는 거잖아요? 아무도 앞으로 일어날 일은 모르니까요. 실수투성이인 거죠. 그걸 인생에 있어서 아주 작은 실수에 불과하다고 말해버리면 어쩌죠? 그러니까 적어도 이런 작은 실수가 많이 남았다는 얘기잖아요? 오늘 밤, 내일 밤, 모레 밤일지도 모르죠. 괜찮을까요? 아니, 괜찮았어요? 그녀는 얘기를 차분히 듣는 내내 정을 째려보다가 얼굴을 박박 긁고선 물었다. 나 많이 취한 거 같아? 정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두 다리를 쭉 뻗고 눈두덩이를 손가락으로 꾹 누른 뒤에 다시 물었다. 정말 나 안 취했는데 많이 취한 거 같아? 그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다는 걸 정은 그제야 알았다. 그녀는 병에 붙은 종이를 조금씩 떼면서 말했다. 나 있잖아, 많이 취한 거, 아니, 혹시라도, 혹시라도 말이야, 나 많이 미친 거 같아? 아니지? 그래. , 뭐랬더라? 괜찮았냐고? 그럴 리가 없지. 그럴 수가 없었지. 모두가 우리 결혼을 반대했거든. 내 친한 친구도, 남편의 친한 친구도, 남편의 이모도, 남편 부모님도 그렇고, 나와 가장 비슷한 친언니도. 그건 정말 끔찍했거든. 끔찍하다 못해 우스웠달까. 어차피 우리가 결혼하는 건데 왜 그랬을까. 우리 아버지는 선풍기를 던지면서 미쳤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 차라리 그때 아득바득 악이라고 쓰고 나올 걸 그랬지. 도망치듯 거기서 벗어나 아무도 모르는 이 동네에 와서 결혼했어. 당시만 해도 남편은 보잘것없는 수제 안경을 만드는 사람이었어. 공방은 아주 좁았고 퀴퀴했지. 거기서 나랑 둘이 몇 되지도 않는 손님을 맞았어. 얼굴 너비와 전체적인 조화를 고려해서 초기 디자인을 짜는데 이틀이 넘게 걸렸고, 그걸 또 만들어내는데 하루 이상의 시간이 걸렸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기분이었어. 정작 우리는 안경을 만드는데도 고작 내일 우리가 파산할지조차 알 수 없었어. 그런 날이 계속될 줄 알았는데도, 어느샌가 빛을 보더라고. 은인이 된 사람이 몇 있었고 곧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손님이 많아졌어. 하루에 두 시간도 채 못 자면서도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어. 나도 남편도 잠깐 눈을 붙이며 이런 날이 계속되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지에 대해 얘기했어. 그러지 않을 걸 잘 알았으니까. 우린 가난한 시절을 보냈고 잠깐 풍족해질 순 있어도 부자가 될 순 없었으니까. 돈이 많다고 부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 중요한 건 사람들이 우릴 부자로 보는 시선이니까. 그게 모든 걸 만들어. 마치 영화관에서 아주 우월한 영웅이 나오는 영화를 보는 것처럼 말이야. 어쨌든 남편은 이런저런 방송에 얼굴을 비추고, 사업을 확장하면서 직원도 많이 뽑고, 그러다 보니 연락이 오더라. 안부를 묻는 건 그냥 핑계였어. 너희 부부를 믿었다, 반대한 적이 없다, 꼭 성공할 줄 알았다, 다 잘 될 거라 예상했다는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었지만, 마치 그게 자기들이 이룬 것인 것처럼 말하는 건 좀 역겨웠어. 역겹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역겨웠지. 그거 알아? 우리 부부는 연락하려면 이곳까지 직접 찾아와야 해. 네 남편도 늘 찾아왔어. 왜냐면 우린 전화가 없거든. 전혀 없거든, 진드기 같은 존재가 끼어들 삶의 틈이. 그녀는 말을 마치고 잠깐 정을 위아래로 훑은 뒤 덧붙였다. 동네 주부들한테 네가 뭐라고 불리는지 모르지? 되바라진 년이래. 나는 거기에 대고 딱 잘라 아니라고 할 수 없었어. 그럴리가요. 난 고작 그렇게 말했어. 그게 제일 나쁜 줄 알면서도. 수영을 알려주면서도 꽤 많이 후회했어. 처음 만난 그날 단칼에 거절할 걸, 그냥 근처에 가지 말 걸 하고. 하지만 첫 단추를 잘못 꿰매고 나선 이미 늦어버린 거지. 너나 네 남편도 결국 나를 좋은 사람으로 보게 된 거야. 기대를 가지고 말이야. 그렇게 되면 돌이킬 수가 없어. 그 이미지가 나를 옭아매는 거야.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니까? 혹시 가만프라자가 뭔 뜻인지 알아? 처음 내가 여기 왔을 때 사람들이 알려줬어. 가화만사성 프라자를 줄인 거래. 집안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 그게 정말일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당신들이 나를 회상한다면 젊을 적 가난한 시절에 공짜로 수영을 가르쳐준 사람이 되는 거야, 이 얘길 듣기 전까진. 하지만 어때? 우스운 소문들 앞에선 침묵하고 진짜로 대단한 얘기 앞에선 너스레를 떨며 지나치는 사람은? 이래도 혼자 있기 싫은 날 네가 나를 찾아왔을까? 아닐 거야. 그치? 그녀는 휘청이며 일어나 옷장을 열었다. 정은 그 모습을 앉은 채로 멍하니 쳐다봤다. 봄이 끝나가는데도 옷장에는 겨울옷이 정리도 되지 않은 채 쌓여 있었다. 그중에 가장 얇아 보이는 모직 코트를 꺼내 그녀는 양팔을 넣었다. 누가 봐도 어딘가를 갈 참이었다. 정은 자꾸만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 포도주를 병째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이건 갈증이 아닌데, 술을 마신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가만히 있으면 더욱 나빠질 뿐인데, 그런데도 정이 하는 것이라곤 텅 빈 집에 작은 전등 하나를 켜두는 일뿐이었다. 정은 이제 가방을 챙기는 그녀의 등에 대고 말했다. 그럼 왜 그랬어요? 왜 그렇게 아무 문제 없이 잘 사는 것처럼 그랬어요? 어른이라 그런 거예요? 그 말을 듣자마자 그녀는 깔깔 웃으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초라한 몰골. 정은 자기가 전신거울처럼 느껴졌다. 똑같은 모습, 똑같은 말투, 표정이나 몸짓을 그렇게 바랐던 거 같은데 지금만은 아닌 걸까? 정이 아무 반응도 못 하고 얼어있을 때 그녀는 열쇠를 챙긴 뒤에 손을 내밀었다. 정은 그 손을 엉겁결에 잡았다. 그녀가 왼손 힘만으로 정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게 뭔데? 어른이란 게 뭔데? 그런 건 없어. 우리도 똑같아. 우리도 그다지 잘 살지 않아. 우리도 어른이라고 모든 걸 다 알지 않아. 우리라고 해봤다고 해서 뭐든 다 말해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냥, 그냥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요령을 알 뿐이야. 상자만 보고도 그 안에서 나올 게 뭔지 알 수 있으면 그럼 누구나가 다 잘 살겠지. 그럴 순 없는 거야.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더 나빠지기 전에 끊어내는 일뿐이야. 고독하게 나빠지거나 수많은 관중 앞에서 나빠지거나. 정은 셔츠의 단추를 두 개 더 잠그고서 물었다. 그럼 어디로 가요? 그녀는 끈이 끊어질 듯한 샌들을 신고 말했다. 찾으러 가야지, 이 새벽에 뭘 어쩌겠다고 돌아오지도 않는 한심한 사람들 말이야. 정말 그 사람들 말을 믿어? 그럴 리가 없지. 그런다고 우리 삶이 뭐가 나아지겠어? 그건 다 가짜에 속은 거지. 그러니까 이제 제자리로 데리고 와야지. 더 멀어지기 전에.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어두운 산길을 가로질렀다. 불빛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았지만, 걷다 보니 산 정상 부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정은 자꾸만 가지에 팔이 쓸려 따갑고 아팠는데 그녀는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정이 불안한 건 그녀를 놓쳐 이곳에서 길을 잃는 일도 아니고, 남편이 엄청난 위험을 겪은 일도 아니었다. 정은 그냥 불룩한 배를 조심히 쓸어내렸다. 그녀가 조금의 시간을 두고 계속 뒤를 돌아 정이 제대로 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둘은 얼굴을 자꾸 마주 봐야 했다. 어둠 속에서도 정은 그녀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야위고 가냘픈 얼굴. 수영장에서 처음 봤을 때 그녀의 얼굴을 계속 떠올려보려 했지만, 정은 좀처럼 그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곳에 있는 그녀와 여기 산을 오르는 그녀가 다른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오싹했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일은 아닌 것만 같았다. 마치 매일 새로 그리는 수채화처럼. 그러다가 문득 정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혹시 그거 알아요? 참 쉽죠? 라고 묻는 화가 아저씨. 그녀는 똑바로 들은 듯 대답했다. 그 수염 난 외국인? 정은 보일 리가 없는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그 아저씨. 그 아저씨도 모든 게 쉽진 않겠죠? 그녀는 강물이 조금씩 흐르는 돌다리를 건너며 말했다. 예전에 좋아하는 남자 초상화를 그려줬는데 그 남자가 나보고 이게 에일리언이냐고 묻더라, 그 이후론 그림 안 그려. 정과 그녀가 동시에 웃었다. 숲 사이로 들어간 웃음이 조금씩 작아져 다시 돌아올 동안 불빛은 거의 눈앞에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멈춰서는 바람에 정은 그녀의 등에 부딪혀 뒤로 데굴데굴 구를 뻔했다. 뭘 본 걸까? 정은 잠깐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낸 다음에 물었다. 왜 그러는데요? 그녀는 한쪽 끈이 끊어진 샌들 한 짝을 절벽 쪽으로 던지고선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딱 하나만 이뤄준다면 뭘 하고 싶어? 정은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걸 말하고 싶었다. 스위스에 가고 싶어요. 거기 가서 애를 낳고 싶어요. 그리고 영원히 그곳에서 사는 거예요. 그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은 불빛을 향해 먼저 발을 딛는 그녀에게 물었다. 언니는요? 커다란 구덩이 안쪽으로 두 명의 남자가 열심히 땅을 파고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획 돌리더니 정의 두 눈을 부드럽게 쳐다보며 대답했다. 비밀이야. 정은 커다란 서치라이트를 끄고 그녀는 그걸 묵묵히 지켜봤다. 어떤 새끼야? 배의 목소리가 울렸다. 너랑 결혼한 년이다. 정이 그렇게 말하자 다들 웃음이 터졌다, 배만 빼고. 배는 사다리를 타고 땅굴에서 천천히 올라와 아주 근엄한 표정을 짓고선 말했다. 농담이 아니라 이 산 정상 부근에 삼국시대 유적이 묻혀 있대, 아주 비싼 거래, 그러니까 집에 가서 기다려. 그녀들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 profile
    korean 2019.10.31 22:24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욱 분발하시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늘 건필하세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월간문학 한국인] 창작콘테스트-단편소설 공모게시판 이용안내 16 file korean 2014.07.16 3325
645 제 31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 - 마블 1 아름드리 2019.10.10 67
644 단편소설 부문 _ 바다의 발 1 김day 2019.10.10 33
643 제31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 - 우체국에서 1 비타민씨 2019.10.09 28
642 제 31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 - 왕궁의 불꽃놀이 1 file 신필령 2019.10.08 57
641 자유로운 영혼 2탄 ^_^ 토끼가... 4 뻘건눈의토끼 2019.09.27 67
» 제 31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 - 가만프라자 1 다이무리 2019.09.24 38
639 제 31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 - 가족의 한 때 1 아지모란 2019.09.09 191
638 제 31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부분 - 복실이 1 파랑거북이 2019.09.08 84
637 제 31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부분 [뭉개뭉개 구름] 1 이예니 2019.08.29 39
636 ▬▬▬▬▬ <창작콘테스트> 제30차 공모전을 마감하고, 이후 제31차 공모전을 접수합니다 ▬▬▬▬▬ korean 2019.08.11 48
635 제30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부문 - 핫도그 2 비타민씨 2019.08.10 103
634 1 자룡 2019.08.09 14
633 제30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부문 - 금의야행 1 다이무리 2019.08.07 20
632 제30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부문 - 프리즘 1 한시반 2019.07.27 49
631 30회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공모-측간각시 1 susia1223 2019.07.14 44
630 '수인번호 1004' 1 file 꿈을가진코끼리 2019.07.14 47
629 제30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부문- 맹인과 침입자 1 비타민씨 2019.07.09 50
628 제 30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 - 오늘, 아내는 나를 잃었다. 1 추녀 2019.07.09 33
627 제 30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 - 자기위로 1 렠킵 2019.06.18 32
626 제 30차 창작콘테스트 단편소설 부문 - 신호 1 dlwldms032 2019.06.11 32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5 6 7 8 9 10 ... 37 Next
/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