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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 사냥



나도 두더지 잡으러 갈래.”

새해가 되어 삼촌에게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초소로 가는 내내 삼촌의 눈치를 살피느라 입도 뻥긋하지 않고 있었다. 참으로 말이란 건 과녁 정중앙에 팍 꽂아야 한다고, 삼촌 본인이 가르쳐준 거였다. 영점도 안 잡힌 소총처럼 백날 떠들어봤자 씨알도 안 먹힌다고.

안 돼.”

삼촌은 항상 이런 식이다. 넌 아직 어리고 밖은 위험해서 함부로 나대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고. 별 대단한 이유도 아니면서 그냥 안 된다고만 하는 삼촌이 나는 몹시 미웠다. 쏘지도 못할 소총이나 만지작거리면서 인생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총기수입도 안 했는지 총구가 붉게 녹슬어 있었다. 쏘면 제대로 나가기나 할는지.

차라리 농장 일을 거두는 건 어떠냐?”

싫어.”

내가 대꾸하자 삼촌이 눈을 부라렸다.

그게…… 언제까지고 삼촌에게 붙어있을 수만은 없잖아. 나도 법적으로는 성인이라고.”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하여간 고집은 알아줘야 했다. 그렇다고 내가 삼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나랑 삼촌은 유일한 핏줄인 데다 내가 아니면 삼촌을 보살펴 줄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도 남자라면 두더지 사냥에 나서는 것이 마을의 유구한 전통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삼촌을 병신이라 욕해도 나만큼은, 나만큼은 남자 구실을 제대로 해야 하지 않은가. 나는 녹슨 총구를 매만지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우리 마을이 안전한 건 전부 방벽 덕분이다.”

삼촌은 자기가 불리해지면 느닷없이 방벽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방벽이 무너지면 마을이 무너진다. 마을을 지키는 게 우리의 역할인 거고.”

삼촌의 말마따나 방벽은 마을의 구심점이었다. 한 짝에 십 톤이 넘는 강철 재질의 개폐식 방벽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마을을 지킬 뿐만 아니라 사람들 마음에 안정을 심어줬다. 방벽을 감시하는 게 초병의 임무였고, 그래서 나랑 삼촌도 밤을 꼬박 새워가며 근무를 섰다. 초병 근무는 21조의 로테이션제다. 하루에 다섯 시간씩 할당량을 채우고 후번 근무자에게 총기를 인수인계하는 식으로 하루가 돌아갔다.

사실 재래식 무기로 강철 방벽을 부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설 속의 전차대포를 빵빵 쏴대는 전차란 게 옛날에 존재했다고 하는데수십 대를 몰고 와도 끄떡없을 것이다. 우리야 말이 좋아 초병이지 문을 여닫는 문지기에 불가한 것이다.

그런데 이곳을 지키는 게 초병의 역할이라고? 삼촌은 순 엉터리다. 단단한 방벽이 있는데 일개 초병인 우리가 굳이 나서지 않아도 마을을 안전할 거다. 두더지 사냥에도 못 나가는 우리는 기껏해야 밤잠 설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오래된 소총만큼이나 쓸모없다. 삼촌이랑 나는.

 

*

 

유리 돔으로 둘러싸인 농장은 마을의 기술력이 집약된 장소다. 거름이 부패하면 공기가 오염되기 때문에 천장에 커다란 통풍구가 설치되어 있다. 우리가 먹는 식량의 절반은 이곳에서 길러졌다고 보면 된다.

새로 들어온 거름은 총 스물한 피스였다. 사람들은 시체를 거름이라고 불렀다. 거름은 운반하기 쉽게 검은 가방에 담겨있었다. 일할 때마다 이런 건 어디서 조달하는지 궁금했다. 삼촌에게 물어봤자우린 농사꾼이지 장의사가 아니란 말이다퉁명스럽게 대꾸할 것이 뻔했다. 우리는 가방 안에 담긴 거름시체 토막은 방부제 성분이 있는 녹색 천으로 밀봉한다을 몇 개씩 꺼내 플라스틱 관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여섯 개의 관을 전부 채우곤 목을 축이기 위해 버섯차를 마셨다. 거름을 자르고 그 안에 구더기를 넣는 사전 작업은 삼촌의 몫이었다. 끔찍한 일이지만 먹고 살려면 어떠한 고통도 감수해야 한다고, 삼촌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삼촌 몰래 관에서 구더기 한 마리를 꺼냈다. 엄지만큼 살이 올라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웠다. 구더기를 입에 넣고 한참을 오물거렸다. 침에 누그러진 껍질이 톡 터지면서 달콤한 내장이 입안에 퍼졌다. 삼촌이 마무리 작업을 하는 사이 세 마리를 더 꺼내 호주머니에 넣었다. 농장일은 좀 어떠냐고 삼촌이 물었지만 못 들은 척했다. 구더기를 씹는 게 들킬까 봐 초조했다.

버섯차로 입가심까지 하고 나니 이번에는 오줌이 마려웠다. 삼촌에게 양해를 구하고 유리 돔을 빠져나왔다. ‘농장이라고 써진 초석 밑에 오줌을 누고 바지를 추켜올렸다. 다시 농장으로 돌아가자니 역겨운 방부제 냄새가 떠올랐다. 아무리 그래도 시체인지라 거부감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구더기를 만졌다. 뜨뜻하고 물렁물렁한 감촉이 기분 좋았다. 퍼뜩 땡땡이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삼촌에게는 머리가 아파 의무실에 갔다고 둘러댈 참이었다.

 

*

 

상업지구는 농장에서 십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다. 마을 전체가 원통형 방공호를 개조한 것이라 비좁았다. 사람들은 상업지구를 파도촌이라고 불렀다. 천막들의 파도 같은 행렬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잡화라고 써진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는 두더지 사냥으로 얻은 전리품을 싼값에 팔았다. 진열장을 살펴보니 허름한 만화잡지 한 권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붉은 머리칼에 폼나는 일본도를 든 소년이 표지를 장식했다. 나는 얼른 페이지를 펼쳤다.

소년의 이름은 레드다. 그는 검술의 달인이자 황야를 내달리는 폭주족이다. 핵전쟁으로 지상은 쑥대밭이 되었고, 레드는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검술을 단련했다. 레드의 검이 춤을 추듯 지나가면 밴디츠생존자들 대부분이 강도나 살인마였다의 머리통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레드가 사는 세계는 좁고 어두운 방공호와 다르게 모래로 가득한 황무지였다. 녹색의 땅을 찾기 위해 모험을 나선 레드는 험난한 여정 속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 역시 강도나 살인마였다.

레드에게는 친형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블루. 둘은 철천지원수였다. 레드는 밴디츠를 통솔하는 블루에게 칼을 겨눴다. 결전의 순간, 두 사람의 검이 서로 맞닿았고 사방으로 불꽃이 튀었다. 레드가 빈틈을 노려 블루의 옆구리를 베는 데 성공했다. 블루가 항복하는 척하더니 레드의 눈에 모래를 뿌렸다. 치사한 새끼! 야속하게도 블루의 검이 레드의 복부를 관통했다. 입에서 피를 뿜으며 레드는 쓰러졌다. 그의 얼굴 위로 붉은 태양이 활활 타올랐다. 인쇄 하단부에 지금까지 <Son of Red>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뭐야, 씨발. 나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녹색의 땅에 닿기도 전에 형제에게 죽임을 당하고 끝이라니. 옛날 만화라지만 너무 한심한 결말이었다.

나는 화를 참으며 다른 진열장을 살폈다. 구석진 곳에 알약이 담긴 상자가 있었다. 장사꾼 아저씨가 다가와서는 어렵게 구한 상품이라고 말했다. 나는 만화잡지 대신에 알약 한 알을 사기로 했다. 아저씨 손에 구더기 세 마리를 쥐여 주고 천막을 떠났다.

 

*

 

나는 정화조로 향했다.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해도 인적이 드물어 마음에 들었다. 알약을 삼등분으로 쪼개고, 가장 작은 조각을 꿀꺽 삼켰다. 몇 분 지나고 눈앞이 핑 돌기 시작했다. 천장에 달린 형광등이 무지갯빛으로 점멸하며 방공호 외벽에 수채화를 그렸다. 어디선가 갑자기 사람들의 비명과 이름 모를언제 한번 라디오에서 들었을 법한클래식 음악이 이중주가 되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형광등이 이글거리는 불덩이로 변하면서 시멘트 외벽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구조물 사이로 모래바람이 들이닥쳤다.

정신을 차려보니 사방에 온통 모래뿐인 황무지에 나 홀로 서 있었다. 태양은 작열했고, 나는 눈이 멀지 않기 위해 선글라스를 꼈다. 내 손에는 시커먼 일본도가 들려있다. 손에 감기는 느낌이 아주 묵직했다. 용 문양이 그려진 바이크가 그르렁거리며 내 옆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검을 칼집에 넣고 바이크에 몸을 실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시동을 걸고 핸들을 당겼다. 모래 위에서도 마음껏 달릴 수 있게끔 바퀴를 캐터필러로 개조한 바이크였다. 고속 주행이 가능하도록 부스터강판 벨트가 벗겨져 차체가 고꾸라질지라도 목숨을 거는 게 폭주족의 미덕이다까지 달았다.

정신없이 한참을 내달리느라 잊고 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일단 바이크를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계속 달려서 놈들의 서식지를 벗어나는 방법도 있지만 자칫하면 기름이 동날 위험이 있었다. 나는 방공호 학교에서 배운 대로 사주경계를 취했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몰라 경계를 늦출 수 없다. 칼집에서 검을 꺼내 언제라도 휘두를 준비를 했다. 사방에서 모래를 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하나, , , ……. 긴장된 순간, 뜻밖의 고요가 찾아왔다. 놈들은 기를 숨긴 채 때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일곱, 여덟, 아홉, . 이제 누가 사냥꾼인지 판가름할 때가 왔다.

힘차게 검을 휘두르는 동시에 거대한 구더기 한 마리가 모래 속에서 튀어 올랐다. 빠른 건 내 쪽이었다. 놈은 가로로 쪼개지며 사방에 녹색 체액을 흩뿌렸다. 그것을 신호로 구더기 무리가 나를 덮쳐왔다. 춤을 추듯 검을 휘둘러 놈들을 베어 넘겼다. 도합 일곱 마리를 베고도 놈들의 수는 전혀 줄지 않았다. 괴물들도 긴장했는지 섣불리 다가오지 않았다. 검을 든 손이 시큰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대로 구더기의 먹잇감이 될 수는 없다. 나는 태양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칼날에 불꽃이 휘감겼다. 위기를 감지한 괴물들이 일제히 덤벼들었다. 나는 침착하게 검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버섯 형상의 화염이 순식간에 퍼져나가며 그 일대를 모조리 불태웠다. 구더기들도, 나도.

 

*

 

시멘트 바닥에서 냉기가 올라왔다. 나는 물에 빠졌다 나온 사람처럼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추위 때문인지 몸이 바르르 떨렸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사이렌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허겁지겁 초소로 달려갔다. 방벽 주위에는 구경꾼들로 복작거렸다. 강철 방벽이 열리자 소총으로 무장한 열 명의 전사들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마을에 입성했다. 그들은 저마다 전리품을 한 보따리씩 지고 있었다. 새해맞이 두더지 사냥은 대성공이라고,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구경꾼들을 따라 전리품을 구경하는데 누군가가 내 귀를 확 잡아당겼다. 나는 욕을 하며 뒤를 돌아봤다. 삼촌이었다. 사람들이 삼촌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여긴 너 같은 절름발이가 올 곳이 아니야! 삼촌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귀를 잡아당겼다.

어디 갔었냐?”

골목으로 들어서자 삼촌이 물었다.

어디 갔었냐고 묻고 있잖아!”

입을 꾹 다물고 삼촌을 바라봤다. 삼촌의 눈에 핏대가 섰다.

말 안 해?”

나는 마지못해 상업지구에 갔다고 대답했다. 삼촌에게 거짓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전사다. 전사는 언제 어디서나 당당해야 한다. 솔직하게 말한 덕분일까. 삼촌도 더이상 묻지 않았다. 이상했다. 평소라면 손부터 나갔을 텐데. 삼촌의 몸이 휘청거렸다. 아침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이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삼촌, 괜찮아?”

내가 묻자 삼촌은 손사래를 쳤다. 컨디션이 나빠서 그렇지 좀만 쉬면 나아질 거라는 삼촌의 말에 나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

 

요즈음 삼촌의 말 수가 부쩍 줄었다. 평소에도 수다스러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기 할 말은 다 하는 스타일이었다. 함께 초병 근무를 서다 보면 시시한 농담 정도는 주고받았다. 그때 땡땡이친 일 때문에 화나서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지병이 도진 게 확실했다. 말로는 괜찮다고 하지만 전혀 괜찮은 얼굴이 아니었으니까.

삼촌의 병은 외국말로 타페툼 거시기도감에서 본 형광버섯의 이름이기도 했는데 까먹어버렸다였다. 나 정도의 나이 때 독성 있는 형광버섯을 잘못 주워 먹고 그렇게 됐다고 한다. 전쟁 이후 마을이 안정되기 전에는 하도 먹을 게 없어서 아무거나 식량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삼촌의 병은 말 그대로 무지의 병이었다. 구더기를 양식하거나 하다못해 식용 버섯이라도 가려냈다면. 우리도 분명 두더지 사냥에 나섰을 거고, 근무 중에 어색한 침묵을 견뎌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늘도 삼촌은 조용했다. 나는 어떻게든 분위기라도 살려보려고 이런저런 농담을 했다. 이웃의 누가 구더기를 삼키다 목에 걸려 죽을 뻔했다든가, 사내 둘이 초소에서 끌어안고 있다가 후번 근무자에게 들켰다는 등. 삼촌은 그저 응, 그래. 맞아, 라고만 할 뿐 반응은 시원찮았다. 무슨 얘기를 꺼내도 건성으로 대답하는 삼촌이 야속했다. 몸이 아프면 차라리 근무를 빼면 되는데 그건 또 싫다고 박박 우기는 삼촌이었다.

이번에 전리품으로 약을 열 박스 넘게 구했대. 먹으면 별이 보이고 사막도 보이는 그걸 대장이 전부 압수했대.”

심술이 난 나머지 나도 모르게 삼촌이 싫어할 법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삼촌의 낯빛이 빠르게 어두워졌다. 나는 그 기세를 놓치지 않고 삼촌을 몰아세우기로 했다.

대장은 멋진 사람이긴 한데 그런 면에서 은근 보수적이야. 삼촌도 그렇게 생각하지?”

삼촌은 등을 돌렸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삼촌을 자극하려면 두더지 사냥과 대장 이야기가 제격이었다.

그래도 그분이 없으면 우리는 진작 무너졌을 거야. 우리 마을에는 두 개의 방벽이 있다잖아. 여기 강철 방벽이랑 대장.”

나는 계속해서 삼촌의 신경을 박박 긁었다. 산송장처럼 가만히 있는 것보다 차라리 예전처럼 화내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런데 삼촌은 더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원래라면 화를 내거나내 앞에서 그 자식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라. 그 인간이 그렇게 좋으면 가서 조카 하던가빈정거려야 정상이었다. 물기 어린 목소리로 너도 그 인간처럼 되고 싶은가 보구나, 라고 말할 때는 아차 싶었다.

 

*

 

초병 근무가 끝나고 나는 정화조로 향했다. 혼자 있고 싶을 때면 정화조의 모터 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곤 했다. 너도 그 인간처럼 되고 싶은가 보구나. 삼촌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우울했다. 차라리 대판 싸우는 편이 훨씬 후련할 것을. 삼촌에게 따귀를 맞고, 나는 악에 받쳐 욕을 하고. 그랬다면 내 쪽에서 먼저 사과했을 텐데.

나는 가슴팍에 숨겨둔 낡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안에는 금낭화 씨앗이 몇 개 들어있다. 작년 생일, 삼촌에게 받은 선물이었다. 삼촌이 아주 어렸을 때는 금낭화에 달린 하얀 꽃잎을 따서 그 안에 든 꿀을 쪽 빨아 먹었다고 했다. 그게 어떤 맛인지 나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지만, 금낭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입안에 침이 고이곤 했다. 도감에서 본 금낭화는 담홍색에 하트 모양의 작은 꽃이었다. 양 갈래로 머리를 땋은 소녀가 연상되기도 하여 볼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햇빛이 들지 않는 방공호 안에서는 어떤 꽃도 피지 못했다. 꽃과 나무, 그리고 풀은 전설 속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삼촌은 바깥세상을 그리워했다. 바깥세상을 모르는 나조차 바깥세상이 그리웠다. 그나마 알갱이로 존재하는 금낭화 씨앗만이 나를 미지의 세계로 연결해줬다. 검은 씨앗을 손가락으로 굴리며 자연의 숨결을 느껴본다. 사무라이 레드조차 닿지 못했던 녹색의 땅. 내 손 위에 그런 거대한 존재가 태동을 위해 몸을 웅크리고 있다니. 절로 소름이 돋았다.

나는 씨앗을 도로 집어넣고 주머니에서 알약 조각을 꺼냈다. 먹으면 꽃이 보이고 태양이 보이는 알약이다. 대장의 지시로 알약 유통이 금지됐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철렁했지만, 지금은 왜 그런 거로 호들갑을 떠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금낭화 씨앗에 비하면 알약 따위야. 씨앗은 실재하지만, 알약은 허상에 불가했다. 나는 알약 조각을 입에 넣었다. 머리가 핑 돌았다.

눈앞에 웅숭그리고 있는 검은 형상이 보였다. 나는 놈에게 소총을 겨누고 암구호를 요구했다. 놈은 두더지였다. 두더지는 잡아 죽여야 마땅하다. 자세히 보니 어린 새끼가 아비 뒤에 숨어 검은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리고 있었다. 아빠 두더지는 세 번이나 암구호를 대지 못했다. 나는 놈에게 총알을 휘갈겼다. 놈의 몸통이 풀썩 내려앉았다. 새끼는 아비의 죽음을 직접 보고도 매가리가 없는지 도망치지 못했다. 나는 총알이 아까워 개머리판으로 새끼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분홍색 뇌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두더지 사냥은 생각보다 시시했다.

누군가가 내 귀를 잡아당겼다. 감히 전사의 몸을 만지다니. 나는 반사적으로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녀석은 내 공격을 간신히 막아냈다. 두더지 주제 제법이군. 소총을 내던지고 녀석을 덮쳐 넘어뜨렸다. 주먹을 들어 놈의 얼굴을 가격할 때마다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나는 천부적이었다. 폭력이야말로 나의 살과 피를 이루는

그만!”

사방이 고요했다. 약 기운 때문인지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렸다. 내 주먹은 찢어졌고, 바닥에는 금낭화 씨앗이 어지러이 흩어져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전사가 아니라 그저 나약한 약쟁이에 불가했다. 남자가 다가왔다.

방부제 냄새.”

나는 중얼거렸다. 그리고 남자의 품에 안겨 더운 입김을 훅훅 불었다.

 

*

 

언제부터인가 삼촌 몸에서는 방부제 비슷한 냄새가 났다. 거름을 봉할 때 쓰는 녹색 천의 냄새였다. 사람들은 삼촌이 죽어가는 거라고 했다. 몸이 썩는 걸 숨기기 위해 방부제를 뿌린다고.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소리다. 삼촌은 지병 때문에 약을 먹었다. 그 부작용 때문인지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삼촌은 무심한 표정으로 입영통지서를 내밀었다. 속으로는 기뻤지만, 삼촌의 얼굴을 보고 차마 티를 낼 수 없었다. 삼촌의 얼굴은 퉁퉁 부어있었다. 대장을 만나러 갔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다. 속에서 분노가 치밀었다. 기쁨과 분노가 한 사람 안에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대장은 삼촌을 린치한 자들을 색출하여 태형을 선고했다. 그들의 볼기짝이 붉게 터지는 걸 봐도 내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삼촌이 받아온 입영통지서만이 나를 웃게 했다.

나는 초소 대신 훈련소로 향했다. 삼촌은 여전히 초병 근무와 농장 일을 번갈아 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열심히 일하는 삼촌을 보면 왠지 화가 났다. 아무리 몸을 불살라봤자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았다. 오직 두더지 사냥만이 명예로운 일이었다.

나를 포함한 여섯 명의 신병들은 소총의 영점을 맞추느라 분주했다. 탄착군이 표적 중앙에 모일 때까지 쏘고, 또 쐈다. 그토록 쏘고 싶은 소총이었지만 멈춰 있는 표적을 노리는 건 정말이지 지루했다. 이들 중에 가장 우수한 건 당연히 나였다. 나는 삼촌의 불명예까지 감수하느라 남들보다 배는 열심히 했다.

훈련 교관은 나이 지긋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소싯적에 이름 날린 여장교라고 했다. 그녀는 휴식 시간마다 넋두리를 했다.

징글징글한 땅굴에서 벗어나 햇볕을 마음껏 쬐고 싶구나.”

우리 마을에서 방공호를 땅굴이라 부르는 사람은 교관이 유일했다. 금낭화를 그리워하는 삼촌조차 마을을 징그럽다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4년간 방공호 학교기본적인 군사 훈련뿐만 아니라 전쟁 이전의 역사를 배웠다를 다니면서도 바깥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했다. 전쟁 이전을 기억하던 사람들은 바깥세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건 삼촌도 마찬가지였다. 방사능으로 인해 생지옥이 된 지상보다 금낭화 따위를 떠올리는 게 정신적으로 훨씬 이롭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교관의 생각은 좀 달랐다.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땅굴을 벗어나 바깥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며 땅굴 안에서는 모두 갓난아이에 불가하다고, 그녀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땅굴에서 태어난 우리가 바깥세상에 대한 갈증을 이해할 리 만무했다. 훈련병들은 교관을 괴짜라 여겼고, 오직 나만이 바깥세상을 그리워했다. 나는 사무라이 레드처럼 황무지를 내달리고 싶은 환상에 사로잡혔다. 삼키면 별이 보이고 사막이 보인다는 약이 당겼다. 환상이 고플 때마다 금낭화 씨앗을 꺼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씨앗의 질감이 나를 바깥세상으로 이끌었다. 그건 알약보다 훨씬 달콤하고 짜릿했다.

 

*

 

두더지 사냥은 선발대와 후발대로 나뉜다. 선발대가 길을 터놓으면 후발대가 지원하는 식이지. 각 분대는 열 명씩 배치된다. 너희는 처음이기 때문에 후발대에 배치될 것이다. 물론 훈련을 통과해야지만 후발대가 되어 명예를 드높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내 말 이해되나?”

!”

지루한 영점사격이 끝나고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됐다. 훈련은 표적사격레일을 따라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표적을 쏘면 된다. 그것마저 금방 지루해졌지만과 체력단련을 위주로 진행됐다. 일과가 끝나고 집에 가면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훈련이 없는 날에는 농장을 찾아가 삼촌을 놀라게 했다. 삼촌은 그때마다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예전에는 일손이 부족하다고 성화였는데. 나는 아쉬운 대로 상업지구로 발을 돌렸다. 그렇게 만화책을 훔쳐 읽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삼촌과는 늦게 저녁을 먹었다. 부대에서 보급된 닭가슴살 통조림을 뜯으며 만찬을 즐기기도 했다. 나는 훈련하면서 겪었던 일은 삼촌에게 전부 털어놨다. 표적사격 훈련을 만발로 통과한 병사는 나밖에 없다고 자랑했다. 나는 사격에 소질이 있었다. 평소에 침착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총만 잡으면 잡생각이 모두 날아가고 레일을 따라 이동하는 표적만이 보였다. 잔뼈가 굵은 교관도 내 집중력에 감탄할 정도였으니까. 삼촌은 내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는 통조림을 싹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훈련은 할 만하니?”

뜻밖에도 삼촌이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어. 매일 총 쏘고. 오늘은 칼 잡는 법도 배웠어.”

다행이구나.”

분위기가 이상했다. 삼촌의 표정이 너무 어두웠다.

사람 죽이는 방법을 배우는 게 재밌니?”

나는 깜짝 놀랐다. 삼촌이 그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말을 왜 그렇게 해? 난 마을을 지키기 위해 훈련받는 거야. 사람을 죽이려고 그런 걸 배우는 게 아니라고.”

그 자식이 그러냐? 두더지 사냥이 명예로운 일이라고?”

나는 화를 억누른 채 최대한 고분고분하게 말했다.

삼촌은 왜 대장님을 싫어해? 삼촌 주라고 통조림 몇 개 더 얹어주시는 분이라고.”

삼촌은 다시 입을 닫았다. 자기가 불리해지면 항상 이런 식이다. 나는 참지 못하고 삼촌에게 톡 쏘아붙였다.

난 삼촌처럼 살기 싫어. 병신이라 욕먹고 린치당하고. 그렇게 남들한테 얕보이면서 살기 싫다고!”

그동안 노력했던 것들이 전부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삼촌의 불명예를 대신 씻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또 병자의 조카란 이유만으로 내가 어떤 수모를 겪어 왔는지. 삼촌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의 무지몽매함을 더이상 견딜 수 없어 문을 박차고 나갔다. 정화조의 모터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한결 나아질 줄 알았지만 오산이었다.

이봐, 낙하산.”

그곳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훈련소 동기 셋이 거드름을 피우며 내게 시비를 걸어왔다.

네 삼촌, 대장한테 무릎 꿇었다며? 제발 자기 조카 좀 부대에 넣어달라고 말이야.”

나는 낙하산이라고 불린 것보다 내 아지트를 남에게 뺏겼다는 사실에 더 화가 났다. 놈 중 하나가 내 어깨에 손을 짚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말았다. 도감에서 본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바짝 세우고 경계태세를 취했다. 놈의 작은 덩치와 부리부리한 눈매가 두더지를 똑 닮아 우스웠다.

어쭈, 이놈 봐라. 눈 안 깔아?”

그대로 놈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주먹이 시큰거렸다.

이 새끼가!”

나자빠진 두더지 대신에 두 놈이 덤벼들었다. 나는 침착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구더기를 썰어 넘기던 사무라이 레드처럼 혼신을 다해 싸웠다. 때리고 얻어맞고. 깨물고 소리 지르고. 결국 마지막에 쓰러진 사람은 나였다. 세 놈은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며 떠났다. 눈앞에 형광등 빛이 아른거렸다. 형제에게 칼을 맞은 레드의 심정이 이런 것이려나. 분통이 터졌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

 

5주간의 훈련이 끝나고 드디어 결과가 나왔다. 우수한 성적으로 훈련을 수료한 나는 후발대에 들 수 있었다. 심지어 상반기 두더지 사냥에 참여할 기회를 얻은 신병은 오직 나뿐이었다. 나를 무시했던 사람들알약을 복용한 걸 들킨 얼뜨기 삼인방은 현장에서 바로 탈락했다조차 내 능력을 인정해주고 진심 어린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삼촌과의 사이는 여전히 소원했지만 그래도 다 잘 될 거라는, 조금 막연한 기대감이 생겼다.

두더지 사냥 당일, 열 명으로 구성된 선발대는 사람들의 부푼 기대감을 안고 마을을 나섰다. 대장과 교관, 그리고 후발대는 방벽 초소에 남아 선발대의 무전을 기다렸다. 선발대가 먼저 길을 터놓으면 대장의 지휘하에 본격적인 진격이 시작된다. 두더지의 소굴을 털어 값진 전리품을 가져오는 것이다.

선발대로부터 세 번의 무전을 받기까지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하지만 마지막 무전 이후 삼십 분 동안이나 어떠한 신호도 오지 않았다. 대장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선발대는 전투를 최대한 피했기 때문에 적에게 습격을 받지 않는 이상 무전이 지체될 이유가 없었다. 대장은 교관과 의견을 주고받았다. 십 분을 더 기다렸다가 무전이 오지 않으면 선발대가 실패한 것으로 간주하고 구조대를 꾸리기로 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분대의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모두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지만 엄습해오는 불안감을 어쩌지 못했다. 승리에 익숙할수록 작은 패배에도 쉽게 무너지는 법이었다.

약속된 시간이 지나고, 대장은 후발대를 호출해 작전을 브리핑했다. 바깥 지형과 이동 루트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데 교관이랑 눈이 딱 마주쳤다. 잠깐 나 좀 보자는 신호였다. 나는 얼떨결에 초소 밖으로 나와 교관을 만났다.

넌 구조대에서 열외다.”

제가 열외라뇨? 그게 무슨…….”

상황이 그렇게 됐어. 대장님의 지시니까 잔말 말고 따라.”

억울했다. 삼촌과 같은 길을 가지 않으려고 그동안 얼마나 애써왔는데. 나는 이유만이라도 알려달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이병은 분위기를 못 읽나? 너 같은 애송이가 함부로 끼어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말이야.”

교관님이 그러셨죠? 어른으로 성장하려면 땅굴을 벗어나야 한다고. 땅굴 안에서는 모두 갓난아이라고. 저도 가겠습니다.”

땅굴 밖에 뭐가 있는지 아나? 더 깊은 땅굴밖에 없어. 그만 포기해라, 이병.”

땅굴 밖이 또 땅꿀이라고?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그토록 설파하던 그녀가 이제는 삼촌처럼 말하고 있었다. 난 어리고 밖은 위험해서 함부로 나댔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고. 화가 치밀었다.

이제 가보겠습니다.”

가긴 어딜 가. 나랑 남아서 대장의 지시를 기다려.”

죄송합니다.”

나는 뒤돌아섰다. 교관은 무서운 얼굴로 더 움직였다가는 가만 안 두겠다고 말했다. 나는 교관의 협박을 무시하곤 초소로 향했다.

출격 준비를 마친 대장이 나를 발견하자마자 소리쳤다.

대기하라는 명령 못 들었나?”

저도 끼워주세요.”

대장은 명령 불복종으로 당장 구속하겠다며 멱살을 잡았다. 나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초소에서 기다릴 바에 감옥에 가겠다고. 삼촌처럼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대장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겠다고, 그러니 제발 끼워달라고 애원했다.

고집불통인 건 네 삼촌을 빼다 박았구나.”

그 순간 대장의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힌 것처럼 보였다. 대장의 태도도 그렇고 분명 착각이겠지만, 그 일련의 환상대장이 날 위해 울어줄 리 없으므로을 겪은 덕분에 대장의 얼굴이 삼촌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 왜 어른들은 아이에게 욕망을 심어주곤 그걸 이루려는 순간에 위험한 짓은 하지 말라고 말리는 걸까. 내 마음은 이미 땅굴을 벗어나 지상으로 갔는데.

나는 군장과 총을 메고 대장을 따라나섰다. 사이렌 경보와 함께 강철 방벽의 육중함 몸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닥 긁히는 소리가 덩치 큰 아이의 울음소리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방벽이 열렸고 나는 난생처음으로 마을 밖을 나선다. 무섭기보다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땅꿀 밖이 땅꿀이라도 상관없다. 지금 나는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낀다.

 

*

 

구조대는 일렬종대로 움직였다. 카메라가 설치된 무인 감시 초소를 지나 레일 정류장에 도착했다. 우리는 네 명씩 인원을 나눠 카트에 올라탔다. 첫 번째 카트가 출발하고 몇 분 뒤에 두 번째 카트가 출발했다. 나는 대장과 함께 마지막 카트에 탑승했다. 카트는 레일을 따라 빠르게 질주했다. 방벽 바깥도 우리 마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외벽은 똑같은 시멘트였고 천장에 달린 형광등도 평범했다. 지상을 제외한 나머지 세상은 전부 방공호로만 이어져 있지 않을까. 만화책에서 본 드넓은 사막과 청량한 하늘, 그리고 붉게 타오르는 태양은 어디에 있는 걸까.

이때 엉뚱하게도 삼촌의 얼굴이 떠올랐다. 금낭화의 밑을 따서 꿀을 빨아 먹던 소년. 병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밝고 건강한 소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대장도 그 시절의 삼촌을 알고 있지 않을까,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대장은 삼촌이랑 어떤 관계예요?”

그는 임무에만 집중하라고 말했다. 나는 대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일부러 눈을 맞추지 않는 걸 보니 역시 뭔가 알고 있었다. 삼촌이 린치당했던 날, 대장은 누구보다 열을 내며 범인을 색출하려고 했다. 그때는 단순히 마을 치안 때문인 줄 알았는데. 대장을 싫어하는 삼촌과 달리 대장은 삼촌에게 호의적이었다.

카트가 목적지에 닿기 직전, 대장이 입을 열었다.

네 삼촌과 두더지 사냥에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난 선발대 분대장이었고 네 삼촌은 부분대장이었지. 우린 친했음에도 사소한 곳에서부터 시비가 붙곤 했다. 갈림길에서였지. 양쪽을 두고 어디로 갈지 결정하려다 싸움이 났다. 한참을 실랑이한 끝에 나는 왼쪽 길로 네 삼촌은 오른쪽 길로 향했다. 야전 수칙상 분대원끼리 떨어지면 안 되는 데도 말이다. 결국 네 삼촌은 틀린 길로 갔다. 그는 낙오됐고, 난 영웅이 됐지.”

삼촌도 두더지 사냥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그러면 형광버섯을 주워 먹고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는 뭐지. 전쟁 이전에 금낭화를 봤다는 것도 전부. 전부 거짓말?

카트가 도착하고, 우리는 다시 일렬종대로 모여 움직였다. 마을 영역을 완전히 벗어나니까 시멘트 대신에 흙으로 된 벽이 나타났다. 형광등도 없어 사방이 어둠에 휩싸였다. 우리는 손전등에 의지해 길을 밝혔다. 나는 분대 중앙에 배치돼 사주경계를 취했다. 손전등이 비추는 곳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형광등 없는 세상이 이렇게 어두울 줄이야. 암흑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했음에도 쉽게 두려움을 떨칠 수 없었다. 주변에 분대원이 없었다면 아마 공포로 미쳐버렸을 것이다. 벌써 마을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이동하니까 시멘트 외벽과 불빛이 보였다. 방공호의 불빛이 이렇게 고마울 줄이야. 대장은 이제부터가 두더지 소굴이라며 경계를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우리는 손전등을 끄고 야간투시 안경을 꼈다. 목표지점에 가까워지자 또다시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다. 그래도 투시경을 장착한 덕분에 사물의 외관을 구별할 수 있었다. 방공호 곳곳에 타이어로 쌓은 바리케이드가 보였다. 격전지로서 전략적인 가치가 없는 곳이라고 했지만, 시멘트 외벽에 무수한 총알 자국이 나 있었다.

우리는 열 발에 한 번씩 멈춰 서서 선발대의 흔적을 추적했다. 통신병이 방해전파 때문에 본부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장은 선발대가 이 근처에 있다며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현재 위치를 중점으로 주변을 수색하기로 했다. 먼저 임시 진지를 정한 뒤 대장과 통신병은 남고 나머지는 조를 편성해 움직였다.

나는 A우리 팀은 41, B팀은 31조였다에 붙어 가장 뒤에서 움직였다. 내 앞에 두 사람은 잔뼈가 굵은 베테랑이었다. 나는 후방을 경계하며 지향사격 자세를 취했다. 명중률은 조금 떨어지는 대신에 대응 속도가 빠른 자세였다. 선두에 선 선임이 수신호를 취했다. 정지! 우리는 즉시 자리에 멈춰 섰다. 선임이 가리킨 곳에 형광버섯이 자라있었다. 누군가가 이곳을 지나며 버섯을 밟았는지 형광 포자가 발자국 모양으로 찍혀있었다. 발자국의 수나 간격을 봤을 때 우리처럼 일렬종대로 움직인 모양이었다. 선임이 무전기를 꺼내 대장과 연락을 취했다. 전파가 흘러도 가까운 거리에서는 통신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동해도 좋다는 무전을 받고 천천히 전진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발자국이 끊겨버렸다. 여기에서 더 전진하기에는 리스크가 컸다. 일단 임시 진지로 돌아가 다른 분대원과 합류하기로 했다.

B팀은 이미 진지로 돌아와 있었다. 특별히 발견한 것은 으깨진 형광버섯과 발자국이 전부였다. 분대원 모두 A팀이 갔던 루트를 그대로 따라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번에는 대장까지 합세해 발자국이 끊긴 장소로 되돌아갔다. 고요한 어둠 속에 오로지 동료의 발소리만을 의지하며 걸었다. 임무의 장기화를 염려해 투시경 전력을 최저로 낮춘 상태였다. 그렇게 쉬지 않고 어둠 속을 걸으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체감상 하루 반나절은 걸은 것 같은데 작전이 시작된 지 두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은 사람의 공간각을 빼앗아 버렸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건지 누운 건지 헷갈릴 정도로 정신이 위태로웠다. 의식의 흐름이 그대로 멈춰버려 주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함부로 행동했다고 선임에게 잔소리를 듣겠지, 하며 허리를 폈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묘하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하고 야간투시경의 전력을 최고로 높였다.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오줌을 지릴 정도의 미친 공포감이 엄습했다. 턱이 덜덜 떨려 제대로 말조차 할 수 없었다.

, 대장님?”

분명 내 입으로 말을 했는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귀에서 무언가가 주르륵 흘렀다. 손으로 만져보니 끈적했다. 이런 기분을 언제 한번 느꼈었는데.

첫 번째 영점사격 날, 나는 귀마개를 하지 않고 총을 쐈다. 귀가 물에 잠긴 것처럼 멍하게 들렸고 통증까지 있었다. 흥분과 고통. 실전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그때의 안일함.

그래, 이 감정은 내가 잘 아는 종류의 것이었다. 나는 총을 가슴팍에 바짝 댔다. 누가 와도 바로 쏠 수 있게 지향사격 자세로. 사방에서 화약 냄새가 났다. 아까까지만 해도 일렬종대로 움직였던 내 동료들은 한낱 주검이 되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누군가가 내게 다가왔다. 나는 바로 쐈다. 그는 피를 내뿜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어둠 속임에도 총알이 제대로 박혔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놈을 잡아!”

나는 쏘고 또 쐈다. 그리고 도망쳤다.

 

*

 

형광버섯. 도감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분명 타페툼 루시둠이었다. 근데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람.

무릎이 계속 바닥에 쓸려 아팠다. 누군가가 날 둘러업은 모양이었다. 그에게서 익숙한 냄새가 났다. 시큼한 방부제 냄새였다. 삼촌이 구하러 온 걸까? 눈꺼풀이 방벽처럼 무거웠다.

눈을 떴을 때 사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야간투시경은 도중에 벗겨졌는지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만져봤다. 물렁물렁하고 축축한 감촉이 느껴졌다. 나는 한참을 더듬거리며 사물의 형체를 가늠했다. 시체였다. 누군지는 몰라도 안타깝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도 안 갈뿐더러 나는 지금 최고로 침착한 상태였다.

이번에는 다른 물건이 손에 잡혔다. 원통형의 딱딱한 물체였다. 중앙에는 플라스틱 버튼이 있었다. 버튼을 누르자 작은 불빛이 생겼다. 배터리가 부족한지 계속 깜빡거렸다. 나는 손전등 밑 부분에 예비용 건전지가 보관돼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배터리를 갈아 끼우자 빛 알갱이가 동심원을 그리며 완전한 형상으로 거듭났다. 손전등의 빛이 돌아왔다. 나는 그걸로 아까 만졌던 시체를 찬찬히 비춰봤다.

그는 대장이었다.

대장은 죽어있었다. 나는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들고 있던 걸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손전등이 바닥에 떨어져 굴러갔다. 원형의 빛이 주변을 한 바퀴 훑고 지났다. 적인지 아군인지 여전히 분간할 수 없는 시체들이 사방에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대장의 품에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 . 들리십니까?”

신호는 갔지만, 대답은 오지 않았다. 대장이 죽었다면 다른 분대원도 마찬가지일 터. 나는 일단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시체들 틈바구니에 있는 게 더 안전할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동료의 복수를 하고 싶을 뿐이었다.

나는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분노는 빠르게 식어갔고 그 틈을 두려움이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얼마 못 가 털썩 주저앉았다. 아까 업혀 가는 동안에는 몰랐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남자, 아니 대장은 정신없는 내게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이봐, 정신 차려! 정신 차리라고, 신병!”

대장은 아마 피를 잔뜩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대량의 출혈. 대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안전한 곳까지 끌고 왔다.

제발 죽지 마. 그가 널 살리라고 부탁했단 말이다!”

삼촌은

대장에게 날 부탁했다. 그래서 대장이 날 받아들여 준 것이다. 삼촌은 병 때문에 죽어가고 있었다. 삼촌이 세상을 떠나면 나는 혼자가 되니까. 그래서 린치를 당했던 그날, 남몰래 대장을 찾아가 입영통지서를 받아왔을 것이다.

너한테는 늘 미안했다. 네 삼촌이 그렇게 된 건 전적으로 내 탓이니까. 내가 그를 잘 이끌었더라면.”

대장은 입에서 피를 뿜었다.

네 삼촌을 이끌고 왼쪽 길로 갔다면!”

그 말을 끝으로 대장은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나는. 나를 살린 남자의 시체를 버리고 여기까지 왔다. 왠지 익숙한 냄새가 나는 이곳. 무슨 냄새인가 곰곰이 돌이켜보니 삼촌의 몸에서 풍기는 것과 비슷했다. 타페툼 루시둠. 형광버섯의 냄새였다. 나는 그 냄새를 향해 달려갔다. 어둠 속에서 몇 번이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코가 깨지고 입술이 터졌다. 그렇게 열 번은 다시 일어났을 때 눈앞에 형광빛이 보였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두더지 사냥에 갔다가 길을 잃은 삼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독버섯을 주워 먹었고, 결국 마을로 돌아왔다.

참 웃기는 일이다. 그날, 삼촌은 살아 돌아왔고. 오늘, 대장이 죽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씨앗을 꺼냈다. 그리고 알약 조각도 함께 꺼냈다. 오른손에 씨앗, 왼손에 알약. 무얼 삼킬지 고민하다가 왼쪽을 골랐다. 나는 알약을 삼키곤 바닥에 씨앗을 뿌렸다. 삼촌이 꿀을 빨았다는 금낭화의 씨앗이었다. 씨앗이 바닥에 닿자마자 잎이 싹 트고 꽃봉오리가 피어올랐다.

어서, 어서!”

금낭화가 꿈틀거리며 기지개를 켰다. 하트 모양 금낭화 꽃은 얼핏 보면 양 갈래 머리의 소녀 같기도 했다. 녀석이 하품하자 시멘트 외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앙상한 구조물 틈새로 모래바람이 들이닥쳤다. 나는 일본도를 뽑아 들고 힘겹게 일어섰다.

사방에서 두더지 떼가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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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 2019.04.30 22:40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욱 분발하시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늘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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