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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31 09:47

조회 수 17 추천 수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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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름(본명)

이기정

주소

경남 거제시 제산로 86 거제더샾 105101

이메일

tesstess37@naver.com

휴대폰 번호

010 5152 5462

 

시간도 치유하지 못했다. 모든 것은 생생이 다시 살아난다.

아이를 데려가겠다니, 그 놈의 당당한 목소리에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간신히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아이를 사랑합니까? 아니 계속 사랑하실 수 있나요?’ 전화기 너머로 그 놈의 뻔뻔한 얼굴로 나불거리는 그 입술을 짓이겨 버리고 목을 졸라버리고 싶었다.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누르느라 피가 머리로 몰려들어 머리가 풍선처럼 팽팽하게 팽창되는 것만 같았다. 그 놈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내 귀로 조금만 더 흘러들어왔다면 정말 머리가 터져 사방으로 핏방울이 튀었을지 모른다. 아이를 사랑 하냐고? 전화기를 던져 버렸다. 그 놈이 지껄이는 소리를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 놈의 질문에 답변할 수 없어서였는지 모른다. 불길하다. 전화기를 타고 그놈이 퍼뜨린 독이 내 귀를 따라 흘러들어와 온몸으로 퍼져나가 서서히 안정을 잃어가는 것만 같다.

내 아이라고 믿고 있던 아이, 내 유전자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지금껏 키워 온 아이. 어쩌면 그 놈 말대로 아이를 보내고 모든 것을 깨끗이 지워버리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행복했던 시간들, 깊은 상흔을 남긴 그 일들을 모조리 지워낼 수 있을까? 삼년 전 아이를 외가에 보내었다. 텅 빈 집으로 불을 켜고 들어올 때마다 방문을 빼꼼히 열고 작은 목소리로 아빠를 부르며 눈치를 살폈다. 매일 아침 얼굴 한번을 들지 않고 씨리얼을 그득 담은 숟가락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가슴이 뻐근해졌다. 수혁인 자신의 표정을 내게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그 아이의 표정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 다 먹은 그릇을 말없이 씻고 축 쳐진 어깨로 집을 나서는 뒷모습이 허락 없이 내게 박혔을 뿐.

 

장모에게 수혁을 두고 온 지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수혁은 돌아왔다. 수혁이 눈앞에 없어진다고 기억과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기억은 더 강렬히 살아났다. 눈을 떠도 감아도 피할 길이 없었다. 결국 상처와 아이를 함께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이 내 운명임을 받아들였다.

삼년의 시간과 함께 표면적으로나마 안정을 찾아갔으며 생활의 리듬이 생겼다. 그런데 그 자식이 이제 와서 수혁을 데려가겠단다. 아주 당당하게 요구한다.

 

아이를 데리러 간 날, 장모는 아이를 두고 가라고 애원했다.

 

제발 자식 잃은 부모 맘 생각해서 손자라도 키우게 해 주게. 자네에게도 저 아이는 짐일 뿐 일 테고.”

 

제가 9년을 키웠습니다. 법적으로도 제 자식입니다.” 강경하게 나갔다.

 

여기 데려오기 전까지 아이가 일주일 동안 먹은 것이라고는 아침에 우유하고 씨리얼이 전부였다고 하던데. 나중엔 우유도 없어서 씨리얼만 먹었다고 하더만. 얘를 그렇게 굶겨놓고선. 여기에 오자마자 얘가 걸신들린 것처럼 먹더라.” 장모도 강경한 내 태도에 이죽거린다.

 

나는 장모의 속내를 알고 있다. 장모가 그 자식의 경제적 원조가 없이 수혁이를 키우겠다고 저토록 강경하게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수혁이를 맡지 않으려 했었다. 소현의 장례가 끝나고 열흘 쯤 지났을 때 수혁이를 장모에게 데려갔다. 장모는 수혁이를 맡기로 온 것이라 미리 지레짐작으로 내가 무슨 힘이 있어 이 나이에 얘를 키워. 왜 우리 소현인 자네 등살에 죽고, 이제 수혁이 하나만 치워버리면 되겠다 싶어 온 건가? 하긴 장례식에도 안 나타난 인간이, 얘 앞세우고 온 것 보면 뻔하지. 말하면 뭐할까. 여기로 오지 말고 고아원에 데려다 줘.” 장모의 태도가 바뀐 것은 그 자식이 상당한 재력이 있다는 것과 수혁의 양육을 온전히 책임지겠다고 나섰을 것이다. 이미 상당한 돈이 장모에게 흘러간 것이 분명하다.

 

그 땐 소현이 죽고 얼마 안 돼서 정신을 못 차릴 때였어요. 지금은 일하는 아줌마도 있고.”

변명하듯 말이 나온다. 움츠러드는 나 자신에게 짜증나 얼굴이 일그러진다.

 

자네가 내 딸에 대한 악감정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수혁이를 예전처럼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지금이야 키운 정 때문에 데려가고 싶을지도 모르겠지. 그런데 집에 가서 데려다 키워보면 미운 생각이 불쑥불쑥 들 텐데 그 땐 어쩔 텐가? 다시 이리로 데려올 텐가? ... 그리고 수혁이 자네한테 가지 않으려고 할 거야.” 장모는 가늘게 찢어진 눈을 더 얄팍하게 만들어 나를 바라본다. 장모의 말에 흠칫 놀랐다. 수혁이 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왜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수혁이 결정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다. 장모는 흔들리는 내 모습에 눈을 반짝였다.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정서방, 자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거 알고 있네. 자네도 자네 인생을 살아야지. 소현이도 수혁이도 이제 다 털어버리고 이쪽으로는 돌아보지도 말고 살게. 소현이 대신 내가 자네한테 백번이라도 빌라면 빌겠네. 아이한테 복수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면, 그리고 키운 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자네 일시적인 맘으로 아이를 데려가서 서로 힘들게 하지 말게. 수혁이는 학교생활도 잘 적응하고 전학 온지 얼마 지나지도 않는데 벌써 친구도 많이 사귄 모양이야. 친구 얘기를 곧잘 하는 거 보면 말이야. ”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60대 중반을 넘긴 나이지만 아직 젊음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그 얼굴은 팽팽하고 번들거린다. 장모라는 여자의 얼굴에 욕망이 살아 꿈틀대고 있었다. 그녀의 입 속에서 그녀의 욕망을 위해 충실히 움직이는 그 혓바닥이 상상되어 징그럽다 . 나에게 욕설을 퍼부을 때보다 달래어 보려는, 욕망을 감춘 그 눈과 미끌미끌한 그 말이 뱀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여태까지 내 아이로 키운 아들이 생물학적 내 아이가 아니라고 해서 장모의 말처럼 내가 학대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학대? 틀린 생각도 아니지. 정말 수혁이 원치 않는다면 장모의 말대로 해야 할 지도 모른다.

 

삐걱거리며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수혁이었다.

수혁은 다려진 하얀색 티셔츠에 멋스럽게 물이 빠진 진에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장모의 말대로,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수혁의 표정이 밝았다.

나를 발견한 수혁의 눈에 반가운 기색이 스치듯 비치긴 했으나 곧바로 무표정해졌다. 수혁은 눈으로 어색한 인사를 하곤 곧바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으로 들어가는 수혁의 뒷모습을 자석에 끌리듯 방문이 닫힐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부자지간으로 지낸 10년의 세월이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피붙이와의 두 달의 시간을 넘지 못하는 구나갑자기 서러움이 밀려왔다. 소현이 죽고 수혁을 냉담히 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저를 키우며 쏟은 정성과 애정의 무게가 그 두 달간의 소원함만큼 무겁지 않은 것은 아닐 터인데 어려서 돌아가는 사정을 아무리 모른다고 해도 아픈 마음의 바탕은 비슷한 빛깔일 터인데 어떻게 눈도 한번 마주치 않고 외면해 버린단 말인가. 아 어쩌면 잘 된 일인지도 모르지 내가 끊지 못하는 정, 저 자식이 끊어주는 구나! 이제 진정 자유로운 몸이다. 정에 묶일 부모도 아내도 자식도 없다. 어디 하나 묶인 끈 없는 완전한 자유의 몸이구나!

 

섭섭해 말게.” 장모는 내 얼굴에 찰나에 스쳐간 절망감을 놓치지 않고 잡아챈다. 숨겨지지 않은 승리감을 애써 숨기며 담담한 말투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러나 장모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수혁은 캐리어를 끌고 방에서 나왔다.

 

짐 다 쌌어.”

 

수혁의 말에 나도 장모도 놀랐다.

 

둘이서 살게 된 지금도 여전히 수혁의 동그란 이마나 해사한 얼굴을 볼 때면 불쑥불쑥 그 놈 얼굴과 소현의 얼굴이 함께 떠올라 적개심이 불쑥 솟아오르기도 한다. 수혁의 얼굴은 그 놈과 소현을 꼭 반반 섞어놓은 얼굴이다. 수혁이 장모가 아니라 나를 선택했던 순간 희미하게나마 승리감을 주었고 그 순간만은 내 인생이 헛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때의 승리감은 지금까지도 과거의 망령에 빨려들어 허우적대며 나가려고 애쓰지만 자꾸 미끄러질 때 마지막 순간에 내가 잡는 동아줄이 되었다.

 

수혁의 갸름한 얼굴, 새끼손톱을 엄지손톱으로 비비는 습관 그리고 엷은 미소는 아주 갑자기,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지점에서 나를 과거로 끌고 들어가 우울의 감옥으로 밀어 쳐 박아 버린다. 빠져들지 않으려 항상 주의를 기울이지만 빠져드는 순간은 찰나이고 한참 허우적댄 뒤에야 겨우 나오곤 한다. 지금은 그것이 삶의 리듬이다. 그 리듬에서 벗어나려는 헛된 노력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다만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

 

그 놈 자식임을 알지 못했을 때 나는 수혁의 얼굴이 나를 닮지 않고 재 어미를 닮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수혁의 얼굴은 빚어놓은 듯 아름다웠다. 주변 사람들에게 공공연히 나를 닮지 않아 다행이라 했었다. 조금도 섭섭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축복이라 여겼다. 남들은 듣기 좋은 소리로 남성다움이라 표현해주지만 면도를 해도 푸르스름하게 드러나는, 넓적한 하관을 다 덮은 수염하며 거무튀튀한 얼굴빛, 굵은 종아리 우락부락한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생김새와는 반대로 내 속은 마치 여자의 결처럼 섬세하고 예민했다. 감정에 따라 달라지는 사람들의 표정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남들은 쉬이 넘겨버릴 작은 말에도 전전긍긍했고, 다른 사람이 나를 싫어하거나 상처받은 것 같은 모습이 보이면 극도로 민감해진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본다. 거울 속에 나와 눈을 마주쳐 본다. 거울 속의 눈이 내게 말하는 것 같다.

 

분명 조물주의 실수임에 틀림없어. 영혼에 맞지 않는 얼굴.’

수혁의 얼굴은 내가 동경해 마지않던 꼭 그런 얼굴이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만 나를 닮았더라면 수혁이 뻐꾸기 새끼인 것을 덜 의식하지 않았을까, 가끔은 아니 자주 수혁의 얼굴이 저주인 것만 같다.

 

죽음 앞에서도 소현이 용서되지 않았다. 그렇게 죽어버려서 더 용서할 수 없었다. 그녀의 죽음 앞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장모는 차가운 나의 반응에 죽음 앞에서는 살인도 용서한다는데 그래도 10년을 함께 살비비고 산 아내가 죽었는데 어떻게 장례식장에 얼굴도 비치지 않는지 독사보다 독한 놈이라며 내 새끼를 피 말려 죽였을 거라 짐승처럼 울었다. 장모에 대한 원망은 없다. 딸의 죽음 앞에 원망할 곳 잃은 어미가 내지르는 고통이 느껴져 애잔할 뿐이다. 그녀의 슬픔 앞에 내 안의 소용돌이치는 것들도 조금 가라앉았다.

나의 땅은 사라졌고 내 삶은 뿌리를 내릴 곳이 없어졌다. 무채색으로 변해버린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것 같았다.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나는 저 대지에 뿌리를 내린 작은 풀만한 가치도 없으며 발에 치이는 돌부리 같은 존재.

 

허우적대었다. 결코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내가 어떻게 죽음을 슬퍼하고 아내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소현과 함께여서 행복했다고 여겼던 무수한 순간들은 바스라진다. 기억은 과거의 망령 속 세상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 그녀는 죽음으로 도망쳐버렸다. 죽음이 그녀에게 닿을 수 있는 길이라면 죽어서라도 찾아가 나를 괴롭히는 도저히 소화시킬 수 없는 내 안의 것들을 그녀에게 모두 쏟아버리고 싶다.

 

너는 왜 그 놈의 씨를 품고 내게로 왔어야 했는지 도대체 난 너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단지 생활을 위한 편리한 도구였는지? 나한테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묻고 싶다.

무슨 소용이람? 내가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가 지금 와서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세상이 무섭도록 낯설고 어색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지만 손을 뻗어도 내가 결코 만질 수 없는 것 만 같았다. 나를 스치고 지나는 사람들, 자동차, 아파트 나와는 다른 세상에 속해 있다. 언젠가 보았던 영화 제목이.. 매트릭스였나? 거기서 주인공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가짜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가 느낀 기분이 나의 이것과 비슷했을까? 자신과 얘기를 나누고 눈을 마주치던 사람이 사실이 가짜였다는 사실. 무서운 공허와 외로움.

 

차라리 몰랐다면.

달그락거리며 저녁을 만들던 소현의 모습이 떠오른다. 놀이터에서 달큰한 땀 냄새를 풍기며 들어온 수혁의 보드라운 맨살을 비누거품으로 문지르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수혁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나 역시 거짓이었을까? 소현이 내 사람이라고 믿었을 때만 수혁을 사랑했던 것일까? 나 역시 거짓투성이 삶을 살았던 것일까? 수혁은 그대로 내 옆에 있지만 수혁을 향한 내 마음은 갈 곳을 잃어버렸다. 죽는 순간까지 아무 것도 몰랐다면 내 삶은 괜찮았을까, 지금 나는 그것을 원하는 걸까, 아무것도 몰랐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거짓이라도 행복했던 그 시간으로. 매트릭스의 공간으로.

 

소현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그녀는 더 이상 내가 알던 그녀가 아니었다. 나를 사로잡은 이 감정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하지 나는 이제 어떡해야할까를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마음은 꽁꽁 얼어붙어 아무 것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나는 정말 무표정하게 얼어붙었다. 그 놈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내 아내였던 여자는 이미 낯선 여자, 내가 모르는 타인되어 내 앞에 서 있었다.

 

여보 나 왔어. 수혁이는? 학원에서 아직 안 왔어요?”

 

그래도 뭔가를 얘기해야만 하는데 어떤 말도 내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처음에 의아해하던 소현의 표정도 나의 얼어붙은 무표정에 반사되어 서서히 얼어붙고 그녀와 나 사이에 차가운 긴장감만 흘렀다. 뭐라고 해야 할 것은 내 속의 말들은 나를 뚫고 나오지 못했다.

 

당신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디 아픈 거에요?”

 

그녀는 어깨에 매고 있던 가방을 떨어뜨리고는 손을 뻗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휴대전화에 문자메시지가 들어온다.

 

꼭 만나 뵙고 싶습니다. 연락 부탁드립니다.’

*

약속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했다. 그 놈이 먼저 와서 내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게 하고 싶지 않다. 무방비 상태에서 스미어 나올지 모르는 축축하고 어두운 감정을 그 놈이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놈의 얼굴에 비치는 우월감을 나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그 깐 놈은 실바람만큼도 내게 영향을 줄 수 없지. 가방에서 책을 꺼내들었지만 한 장도 넘기지 못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내 정신은 책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자꾸 튕겨져 나와 해사한 그 놈의 얼굴, 경멸어린 나의 시선을 받아내며 동요되지 않던 그 얼굴로 당돌하게 내뱉던 말이 귓전을 윙윙거렸다.

 

소현일 사랑합니다.”

내 아내야. 너는 지나간 과거일 뿐.”

수혁인 선생님 아이가 아닙니다. 소현이와 제 아입니다. 소현이도 절 사랑합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소현인 어쩔 수 없이 선생님 곁에 머문다고 했습니다. 자기한테 길이 없다고.”

소현이 그렇게 말했을 리 없어. 네놈이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여. 너는 결코 나와 함께 였던 소현이의 10년을 알지 못해. 그 세월 모두를 부정하는 네 놈은 어리석다고 밖에. 네놈이 과거에 소현과 깊은 관계였는지 모르겠지만 네놈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녀와 함께 했어. 매일 저녁을 함께 먹었고 여름과 겨울 방학이면 함께 여행을 했어. 그녀와 사랑을 나눈 횟수도 1000번은 되겠지. 그 모든 시간들을 네놈이.”

 

이 일기장이 답변이 되셨으면 합니다. 소현의 영혼은 저와 함께 묶여 있습니다. 언제나.”

 

그는 손에서 만지작거리고 있던 가장자리가 많이 낡은 빨간색 일기장을 테이블 내 앞으로 밀어 주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무수한 불륜 이야기를 볼 때마다 사랑하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감쪽같이 모를 수 있을까?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향해 있는 것을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속에서 그리고 미소, 표정 그리고 행동들 이 모든 것이 말을 했을 텐데 어떻게 몇 년씩 모른다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저럴 수 있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결혼이라는 제도에서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키며 자신의 필요를 챙기는 관계. 서로의 영혼으로 묶인 관계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소현은 영원히 함께할 사람이었다. 뿌리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순전히 나 혼자 생각이었을지도. 내가 그러한 마음이니 상대도 그럴 것이라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은 것이다. 한인간의 세계를 너무 우습게 본 것이다. 소현을 안다고 여겼으며 그녀의 마음속에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자리하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그녀의 영혼 저 밑에서 어떤 것이 흐르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녀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을까? 그녀의 외형, 취미, 만나는 친구, 좋아하는 음식. 그녀를 떠올려 봐도 그녀가 어떤 사람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다. 그녀의 삶에서 나라는 존재는 큰 의미가 아니었을지 모른다. 아마도 그녀의 세계에 들어 있는 수많은 것들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이미 죽어 없어진 그녀를 두고 집착하고 헤어 나오지 못한 나는 아마 미쳐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녀에 관한 것은 나의 착각이거나 나의 망상 일지 모른다.

 

언제까지 숨기려 했어?”

숨긴 적 없어. 임신했다고 했고 당신은 결혼하자고 했어. 당신 아이라고 말한 적도 없어.”

뭐라고? 나를 만나면서 그 자식도 함께 만났다는 얘기네.”

그리고 정말 누구 아인지 정말 몰랐다고.”

사랑하니?”

사랑해. 달라질 것 없어. 수혁인 당신 아이야. 유전자가 뭐가 그렇게 중요해. 우리 아이야. 당신 나 사랑한다면서. 당신 정말 실망스러워.”

 

당당하다고 해야 할까 뻔뻔하다고 해야 할까 두려움 없는 모습이 두렵다. 죄지은 자의 얼굴이 아니다.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는 당당함.

 

그럼 왜 계속 만났어?”

 

그냥 궁금했어. 별 뜻 없었어. 그리고 굳이 피해야 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 놈 말처럼 그놈을 사랑하는 건 아니고? 그것도 아니면 몸이 기억하고 있던? 그래서 미친 듯이 당겼나? 젊은 육체에 니 살이라도 섞어보고 미칠 것 같던? ”

 

그만 그만해. 제발 당신답지 않게 그렇게 저속한 말 하지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라 당신이야 제발 내 말을 들어. 그 일기장도 10년도 전에 준거야. 내가 썼지만 쓴 사실조차 잊어버렸어. 그냥 그때 감정이 그랬겠지.”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녀석의 얼굴은 구릿빛으로 변해있었다. 삼년이라는 시간이 그에게도 흔적을 남긴 모양이다. 세상을 몰랐을 때나 나올법한 세상을 가벼이 여기는 것 같은 오만하면서 자신감 넘치는 그 눈빛도 제법 깊어져 있다.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번 전화에서는 많이 무례했습니다. 선생님을 화나게 할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저.. 사실은.... 감사하다고 아니 부탁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 저는... 어렸습니다.”

 

예상했던 모습과 전혀 다르게 녀석은 순하게 나왔다. 나는 공격적 방어 태세가 조금 누그러지는 듯 했지만 여지없이 그놈을 향해 올라오는 적개심이 다 눌러지지는 않았다. 소현에게 따져 묻지도 다 돌려주지도 못했던 온 몸이 찢기어 피가 흐르는 고통을 그 놈에게 모두 되돌려 주고 싶다.

 

그 때나 지금이나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건 여전하군. 자네가 준비가 되었으니 다른 사람이야 어떻든 상관없단 말인가? 자네가 감당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도 다 감당해야하고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그 때도 그랬지. 불쑥 나타나 다른 사람이야 어찌되든 자신의 감정만 중요하다는 막무가내 어린애 같은 태도 그게 딱 자네 수준이야.”

 

소현일 사랑했습니다. 소현인 선생님이 상처받게 될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땐 정말 그렇게 믿었습니다. 소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장은 아프더라도 저의 선택이 모두에게 옳은 선택이라 믿었습니다. 인정하겠습니다. 그 때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선생님에게도 기회는 있었습니다. 끝끝내 소현을 저버린 것은 선생님이셨습니다. 정말 사랑했다면 그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선생님이야 말로 자신의 감정대로만 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선생님이야말로 소현이한테 그랬던 것처럼 수혁이에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할 자신도 없는 아이를 끌어안지도 내치지도 못하고 자신과 아이를 괴롭히고 있는 건 아닙니까? 수혁이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이 수혁이 그 아이에게도 선생님 자신에게도 올바른 선택이라 생각하는지요? 수혁일 키우겠다는 이유가 그 아일 위해서 만일까요? 소현이나 저에 대한 복수심 때문.”

 

감사어쩌구 저쩌구 하는 말에 곤두섰던 신경이 수그러졌다가 다시 저놈의 오만함에 내 몸 구석구석에서 칼날이 돋아나 한껏 놈을 향해 날을 세운다. 저 새끼가 수혁이와 나에 대해서 나불거리고 지껄이는 입을 당장 찢어 놓고 싶다. 한때의 정사. 그 결과 만들어진 아이. 그게 그렇게 당당할 이유인가? 그것이 수혁일 더 사랑할 수 있는 증거란 말인가. 내 유전자를 가진 아이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그 아이를 잘 키우지 못할 이유가 된단 말인가. 어떻게 이렇게 단순하게 나와 수혁일 정의할 수 있단 말인가. 내 성을 가진 아이. 그 아이의 손에 내 손가락을 쥐어주며 눈을 처음 맞춘 것도 나였고 처음으로 자전거를 태운 것도 나였다. 그 아이의 수많은 처음에 내가 있다. 니놈이 아니라.

 

건방진 놈! 여유를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분노 때문인지 귀가 후끈해졌다. 제발 실제로 귀가 빨개지지 않았기를 바랄 뿐.

 

죄송.. 죄송합니다.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셨을 거라는 건 압니다. 믿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수혁이를 데려가고 싶은 이유 중엔 소현이 부탁 말고도 선생님의 행복도 있습니다.”

 

그 놈이 내 행복까지는 운운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 대목에서 내 인내심은 끝이 났다.

 

주제넘고 건방진 놈! 선생하고 붙어먹는 추잡하고 더러운 놈! 쓰레기 같은 새끼. 너만 아는 그 오만한 태도가 한 가정을 파탄내고 결국 소현일 죽음으로 몰고 갔어. 수혁이에게 지금까지 준 상처도 모자라 또 새로운 상처를 주리라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지? 이 모든 불행은 너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어떻게 너 같은 새끼가 감히 행복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려.”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햇살이 좋다. 누가 누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너 자신이나 죽는 순간까지 행복해라. 그것이 가능하다면. 건방진 새끼. 다른 사람의 행복조차도 자신이 어쩔 수 있다고 믿는 미친 놈. 소현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 얼굴에는 노란 민들레처럼 소박한 웃음이 떠나지 않게 할 것이라 다짐했던 나날들. 그리고 그렇게 믿었던 날들. 그녀의 행복한 웃음이 나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녀의 결정 안에서 피고 지는 꽃이었다. 내 존재가 그녀의 행복에 지나가는 산들바람 정도의 영향력이 있었을까? 그녀의 행복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그놈과 수혁이었을까? 단지 수혁의 친아버지라는 이유에서 수혁일 그 놈에게 부탁한 것일까? 나는. 그럼 나는.

가게들 마다 경쟁적으로 일렬로 진열해 놓은 노란 들국화와 얼굴에 닿는 바람이 생동하는 봄기운이 내 심장으로 흘러들어왔다. 모든 생명탄생에는 불안을 갖고 있다. 그래서일까? 생명이 약동하는 봄은 미친 듯이 내 신경을 자극하고 충동질하여 잠시도 나를 편하게 두질 않는다. 바야흐로 봄은 시작되었다. 산천이 초록과 울긋불긋 꽃들이 미쳐 산과 들을 덮을 때 나도 미쳐 널뛴다. 봄은 내게 지옥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봄꽃은 피었고 파란 하늘에 구름은 잔잔하게 흘러간다. 사람들은 각자의 일을 하고 있어. 불안은 그저 습관일 뿐이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제발 미친 나의 심장아! 제발 멈춰!’

 

나의 고질병! 진저리치게 지긋지긋한 친구! 세상에 태어나 야심차고 큰 뜻을 품고 뭔가를 이뤄내야겠다는 야무진 의지나 의욕은 애초에 내 안에서 자라지 못했다.

불안은 늘 나와 함께였다. 진달래와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걸어가는 길옆에는 핀 노랗고 작은 민들레 위로 노랗고 작은 나비가 나풀거린다. 손을 뻗어 잡아보려 하지만 잡히지 않는다. 그만둔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푹신하다. 따사롭다. 멀리서 걸어오는 엄마가 보인다. 하얀색 블라우스에 노란색 꽃무늬 치마를 입은 엄마가 길을 따라 걸어오고 있다. 나풀거리는 치마가 조금 전 본 꽃 같다. 달린다. 엄마에게로.

 

집에 가거라.” 치맛자락을 잡는 내 손을 잡아 던지듯 뿌리친다. 고개를 젖혀 엄마를 올려다본다. 엄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공기에 나는 움츠려든다.

엄마.” 기어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불러본다.

이제부터 엄마는 없을 거야. 아버지하고 새엄마하고 살아야해

나두 갈래.”

집에 가.” 세차게 밀치고 내 달린다.

나풀거리는 치마를 잡으려 쫒았다. 잡았는가 싶으면 저만치 가 있다. 다시 쫒아가 이제 잡았는가 싶으면 다시 저만치 가 있다. 손으로 잡을 수 없다면 소리로라도 잡아야 한다. 엄마를 잡아야 한다. 온 힘을 다해 울어보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소리를 내보려하지만 목구멍 안으로 소리가 말려들어가 공포와 서러움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사지가 떨려왔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고 숨만 꺽꺽 겨우 넘긴다. 다가오는 버스 속으로 엄마가 빨려 들어간다. 그제야 꺼이꺼이 소리가 나온다.

 

진달래와 개나리가 산을 덮을 때 즈음 내 심장도은 미쳤다. 사람의 몸에도 식물이 자란다면 봄마다 내 심장을 뚫고 진달래 개나리가 뚫고 나왔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내 불안은 잠들었을지도.

 

괜찮다 다 괜찮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나는 편안하다. 나는 편안하다.

매일 아침마다 주문처럼 읊조리는 말을 중얼거렸지만 가라앉지 않았다. 방법이 없으니 불안을 미친 짐승처럼 내 안에 담고 살기로 마음먹었다. 짐승을 가두려면 단단한 우리가 필요했다. 무표정한 얼굴과 철저한 자기검열로 필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불안을 안으로 밀어 넣어 내 속에서만 요동치게 했다. 조금이라도 말랑해진다면 우리 속에 짐승이 나를 뚫고 밖으로 튀어나와 울부짖거나 아무나 잡고 살을 섞고 싶은 충동에 휩쓸린다.

 

마치 야수처럼 날뛰던 불안증은 소현의 품에서만 순한 양이 되어 온전히 잠들었다.

 

소현의 첫인상은 예쁘다였다. 작은 얼굴을 거의 가리는 굵은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피부에는 화장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를 만난 것은 봄이었다. 거리에 여자들의 옷은 봄이라 화사하고 밝았다. 처음 만난 날 소현의 옷차림은 회색의 니트 스웨터에 검정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마치 B 사감과 러브레터의 주인공을 일부러 코스프레 하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마치 자신의 아름다움을 일부러 감추려고 모든 을 빼버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무채색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봄 빛깔로 치장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그 어떤 여자보다 봄에 어울렸다. ‘이라는 단어와 소현이라는 이름이 동의어처럼 보일만큼. 두껍고 무거워 보이는 뿔테 안경 뒤에 하얗고 작은 얼굴과 눈에 띄지 않으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도톰한 분홍빛을 띤 입술은 이제 막 피어난 핑크빛 꽃봉오리보도 싱그러웠고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긴 회색 스웨터 위에 볼록 솟은 탄탄한 젖가슴은 이제 막 돋아난 새순처럼 싱싱하고 생명력이 넘쳤다. 무표정했지만 의지에 찬, 생동감 있게 반짝이는 눈빛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소현은 그 존재만으로 나를 압도했다. 이런 여자가 내 짝이 될 수 있을 거라 상상하지 않았다. 감히 그녀가 나를 다시 만나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다음을 기약하는 어떤 언행도 하지 않았으며 의례적으로 전화번호를 교환하긴 했지만 전화를 할 생각도 해 보지 않았다. 거절을 견딜 만큼 강하지 않다는 정도로 나 자신을 알고 있었던 탓도 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났을 때 그녀에게서 먼저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선 일 씨 폰 맞나요?”

. 그런데 누구신가요?”

- 죄송-해요. 일전에 소개팅 했던 이소현입니다.”

 

-

죄송해요. 선일씨가 저한테 분명 호감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전화가 없으셔서 제가 전화번호를 잘못 적어드렸나 생각했어요. 그래서 전화를 드린 건데.”

 

소현은 내가 자신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전화를 하는 내내 미안하고 민망해했다. 그녀가 적어준 전화번호를 손에 쥐고 펴보지도 않았다. 펼쳐본다면 뇌리에 새겨져 잊어버릴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혹시나 와 역시나 사이에서 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이며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 빤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내 몫이 아닌 것에 대해 일찌감치 기대의 싹을 잘라버리려던 습관대로.

 

아니요. ... 연락을 하려고.. 아니 연락 주셔서... 오늘 저녁에 볼 수 있을까요?”

*

 

그녀를 만나고 감옥 같은 어두운 동굴에서 걸어 나왔다. 그리고 잠시 기웃거리기만 하던 밝은 바깥으로 나왔다. 시간을 견디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즐길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 저를 만나십니까? 소현씨 주변에 잘생기고 좋은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그 말씀은 선일씨가 못생기고 나쁜 사람이라는 뜻인가요? 호호호 질문이 좀 그런데요. 저도 제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잘 모르겠는데 선일씨가 좋은지 나쁜지는 잘 모르겠고 그냥 마음이 가서요.’

 

학교 수학여행 따라 갔을 때 알게 된 장소라며 소현이 이끄는 대로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그녀는 사춘기 소녀처럼 까르르 잘 웃었다.

거제도에 도착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의 고향인 거 마냥 능숙하게 길을 찾아 다녔다. 바람의 언덕이라는 곳에 도착해서 그녀는 이곳이 가장 아름다운 거 같다며 드라마 촬영 장소였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과연 엽서 속에 나오는 그림 마냥 예쁜 풍경이었다. 20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었지만 천천히 걸었으며 4시간이 넘는 시간을 걷고 잠시 앉기를 반복하며 보냈다.

사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곳에 있었다.

소현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 시선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소현은 얌전한 고양이마냥 가만히 있었다. 소현의 머리를 당겨 입술을 갖다 대었다. 소현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둔다. 그녀의 셔츠 속으로 떨리는 손으로 밀어 넣었다.

나의 처음들은 소현이 모두 가졌다. 그리고 내 불안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회색빛의 우울했던 구름이 걷혀 눈부신 태양이 등장한 것 마냥 세상의 모든 것이 환하고 반짝 거렸으며 만물이 새 생명을 얻은 것 같이 보였다. 거짓말같이 모든 것이 달라보였다. 여전히 불안은 규칙적으로 일어났지만 그녀의 따듯하고 부드러운 살결 속에서 안정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내 심장은 그녀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 있다. 아니 그 때보다 더 사나워진 야수는 더 미쳐 으르렁거린다. 기회만 포착하면 모든 것을 다 찢어버리겠다는 듯 으르렁대며 숨을 고른다.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미치듯이 뛰는 심장을 틀어쥐고 가라앉기를 기다려 겨우 하루를 시작한다. 가슴을 열어 심장을 꺼내 볼 수 있다면 아마 내 심장은 벌겋게 부어올라 조금만 건드려도 고통으로 찌그러들 것이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눈을 감고 침대에 가만히 누우면 이 우주에 사람은 나 혼자인 것만 같다. 내 몸의 존재를 느낄 수 없다. 모든 것이 텅 비어버렸다.

*

수혁에게 만원을 건네며 단골집인 용문각에서 짜장면을 주문하라고 시킨다.

순종의 의미를 짙게 담은 뉘앙스로 라는 짧은 말로 답한다. 불쌍한 놈.

15분이 되지 않았는데 벌써 벨 소리가 울린다. 배달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짜장면을 만드는 데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은 것이다. 미리 만들어놓은 게 틀림없다. 면발이 불어서 맛이 없을지 모른다. 불은면을 가져온다면 다시는 배달을 시키지 않을 것이다.

 

짜장면을 감싸고 있는 랩을 떼어내어 젓가락으로 비벼 한 입 문다. 예상했던 맛보다 훨씬 맛있다.

입안에 든 면을 다 삼키기 전에 두 번째 젓가락을 집어 들어 후루룩 소리를 내며 입으로 면발을 끌어당겼다. 면발을 싸고 있던 검은 색들이 파편처럼 튀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마주 앉은 수혁을 바라보았다. 수혁은 말없이 일어나 물티슈를 가져와 식탁과 자신의 손등에 묻은 검은 색 파편을 닦아내고는 조용히 앉았다. 소현은 짜장면을 먹을 때도 스파게티를 먹을 때처럼 숟가락 위에 짜장면 면발을 서너 가닥 올려서 돌돌 말아 입에 묻히지 않게 먹었다. 수혁이 쟤 어미를 보고 자란 것인지 아님 깔끔한 성격 때문인지 짜장면을 입에 묻히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다. 젓가락이 아니라 숟가락으로 짜장면을 먹고 있는 수혁에게 갑자기 제어할 수 없을 것만 같은 화가 치밀었다.

 

남자 새끼가 먹는 꼬락서니하고는 젓가락으로 쳐 먹어

내 속에서 지껄이고 있는 말이 밖으로 새어나오지 못하게 면을 입으로 계속 밀어 넣는다.

어느새 그릇의 바닥이 보인다. 그러나 수혁은 반도 먹지 못하고 있다. 수혁이 물티슈를 꺼내 입을 닦는다.

 

 

수혁이 입을 다 닦기도 전에 나는 벌떡 일어서 수혁의 머리통을 짜장면 그릇 안으로 쳐 박는다.

 

쳐 먹는 꼬락서니하고는. 그냥 쳐 먹어

 

입으로 말을 내 뱉고서야 후회의 탄식이 나왔다.

쳐 먹는 꼬락서니아버지가 내게 심어준 말이라는 것을. 심겨진 말은 조금만 방심하면 그냥 반사적으로 툭 터져 나온다. 나는 과거로부터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이다. 아버지로 부터도 엄마로 부터도.

빠져나오려 발버둥치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늪, 빠져나온 줄 알았는데 더 깊은 늪에 빠진 날들. 오늘 최악에 이르렀으며 가장 깊은 늪에 빠졌다. 아무래도 이번 늪은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다.

소현은 내 삶을 구원해 줄 희망이었지만 이젠 또 하나의 늪이 되었다.

동물에게만 각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소현이 내 가슴에 깊이 박혀버린 날로부터 나는 새끼오리마냥 소현을 벗어날 수 없다. 나오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빠져버린다. 수많은 내 처음들을 가져갔으며 내게 빛의 눈부심과 어둠의 공포를 동시에 알려준 그녀는 천국이며 지옥의 늪이다. 아버진 여자를 좋아했다. 한 여자가 떠나면 다른 여자가 왔다. ‘남자새끼가 좀 대범해야지. 남자가 꽃을 보고 지나치는 건 예의가 아니야.’ 마지막 순간에도 몇 번 보지 못한 여자의 품에서 죽었다. ‘까르페디엠현재에 충실했으며 오로지 자신만을 사랑한 아버진 행복했을까? 아버진 과거에 허우적대지 않았을까? 이제 막 중학교에 입학한 아들을 그저 매달 받는 돈에만 관심을 두던 친구 집에 맡겨두고 그 집 아들에게 두들겨 맞는지 학교는 제대로 가는지에 관심한번 두지 않았다. 어쩌다 오는 날에도 손에 용돈을 쥐어주고는 10분도 머물지 않고 떠났다.

그가 찾는 것이 내게는 없었던 것이겠지. 아버지가 일생 쫒아 다닌 행복은 무엇이었을까? ‘까르페디엠아버지도 과거 속으로 빨려들어 가지 않으려 현재를 붙잡기 위해 그토록 새로운 여자를 찾아다닌 것일까?

수혁이는 두려워 움츠려 들지도 화가 나 보이지도 않았다. 왜 그러냐고 묻지도 않았다. 무표정으로 무장한 채 물티슈를 뽑아 자신의 얼굴을 말없이 닦았다. 너무도 태연하게. 오만함이 묻어나는 무표정. ‘내가 너보단 나으니 널 이해해주지날 조롱하고 동정하거나 아니면 저항할 수 없는 약한 존재가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는 위장술일 수도. 내가 아이를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미친 놈 미친 놈 나는 미친놈이다.

 

 

  • profile
    korean 2019.03.02 14:05
    열심히 쓰셨습니다.
    보다 더 열심히 정진하신다면 좋은 작품을 쓰실 수 있을 겁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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