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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와 로



대기업 정유 회사의 파업, 경찰관 총기 연쇄살인 사건 등 내용 일부가 사실에 바탕을 두었으나 인명은 모두 지어낸 것이고 공인과 단체의 실명과 문학작품 제목 등도 소설 내용이나 사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밝혀둔다.

  

루는 여자고 로는 남자다. 이름이 왜 루와 로인지는 알 필요 없다.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거나 해를 끼치지도 않기 때문에 궁금해할 필요도 없다. 국적, 아비 어미가 누구인지도 신경 쓸 것 없다.

, , 준같이 세련된 이름의 유행으로 생각해도 좋고 루 살로메, 루마니아, 로마, 로미오, 가수 태진아 아들, 공자의 제자 자로, 혈의 누, 참 진 이슬 로 등 어떤 연상도 괜찮다. 다만 철수와 영희, 순자, 영자와 함께 같은 시대를 살고 왠지 모르지만 루()와 로()라는 한자가 달렸다는 정도만 알면 그만이다.

눈물이라니 슬픈 연애소설의 주인공감이군, 이라든지 길이라니 그럴 듯한 걸, 하고 생각하는 건 당신의 자유. 그러나 미안하지만 솔직히 아주 천박한 자유이고 당신이 한 20년 남짓 살았다면 모르지만 4, 50년이나 그 이상을 살아 왔다면 진작 태워 없앴어야 할 옛날 그놈이나 그년의 번지고 닳아 흐려진 편지의 겉봉 주소나 알맹이의 서명처럼 덧없고 뜻도 없을 것이다.

루와 로는 서로 사랑했다. 곧 연애 이야기다. 연애담이라고 했지만 신파극이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인지 혓바늘인지 하는 소설보다 훨씬 맛없고 재미없다는 걸 미리 밝혀 두어야겠다. 또 공중화장실에 붙어 있는 삼상사(三上思) 이야기만큼도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삼상사 이야기인즉슨 침상(寢上), 측상(厠上), 마상(馬上)이 굿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좋은 곳이라는 것인데, 말장난을 조금만 하자면 그게 자꾸 삼상사(三上死)로 들린다는 것이다. 뒈지기 좋은 세 장소 중에서 침상이야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말 잔등 역시 본래 위험한데다 옛날에는 말을 타고 전쟁도 했으니 그럴 만하다.

셋 중에 가장 난감한 장소가 측상, 즉 변기 위인데, 차라리 그보다는 복상(腹上)이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한다. 게다가 옛날에 편안한 베개를 베거나 말 좀 타는 자들은 글공부나 무술 공부깨나 하고 전대 두둑하고 관직을 꿰차고 있는 자들이었을 텐데, 혹시 요즘 어떤 기업 총수들이 눈뜨자마자 수첩을 들고 화장실로 달려가는 게 아니라, 무슨 짓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사람 배 위로 기어 올라가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쨌든 그 점에 있어서 고상하든 천박하든 자유롭도록 하시라. 아랫것들은 길 위에서 눈물 젖은 빵, 피땀 어린 급여명세서 위에 좋은 생각 많이 아로새길 테니.

사리 분별을 못 한 채 사람의 배 위에 오르려는 윗사람들 중에는 민주노총 지도부의 인물도 있었다고 한다. 사실 진보 진영이라고 하는 무리에서도 심심찮은 예삿일이다. 남녀상열지사야 백악관, 청와대, 회장실, 사장실, 총학생회와 노동조합, 안가와 은신처, 예배당, 법당, 대통령이나 진보적 사회운동가, 조폭과 동네 양아치, 소설가, 시인, 가수, 화가, 배우, 교사, 교수, 어디든 누구든 가리지 않는다.

아무튼 차라리 변기 위가 낫지, 윗자리가 좋은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명당은 아니다. 위보다는 아래 또는 뒤가 좋다. 루와 로의 사랑도 밑에서, 뒤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루는 원수 집안의 자식을 만나지 말라는 아버지의 금족령을 뚫고 도시가스관을 타고 내려와 로와 만났다.

두 집안의 내력은 대충 이렇다. 루보다 열 살 많은 루의 오빠는 로의 누나와 결혼했다. 로의 아버지는 소도시의 은행 지점장이었고 루의 아버지는 큰 점포를 몇 개씩이나 운영하는 사업가였다. 루의 아버지는 군 출신으로 수완이 뛰어나고 셈이 전광석화와 같았지만 장부 기장이나 은행 일, 세무서 일 등에는 무능해서 명문 P상고 출신의 로 아버지를 보통 사돈 관계로는 지나치리만큼 자주 집에 초대해 조언을 구했다. 마침내 그러한 사적인 컨설팅은 상당한 액수의 대출 청탁으로 진전되었는데, 로 아버지가 그것만은 단칼에 거절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서먹해진 관계는 문제가 아니었다. 일을 터뜨린 것은 바로 루의 오빠였다. 장인을 1인분에 15만 원짜리 한정식 집에 모신 것까지는 좋았는데, 끝까지 완강하게 부탁을 거절하는 장인에게 그만 격분해 상을 엎고 입에 담아서는 안 될 호놈까지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술 한 잔 안 마신 맨 정신으로. 그후 로의 누나는 뺨이 붓거나 눈이 시퍼렇게 멍들어 친정을 찾아오는 일이 잦았다.

듣고 보니 사연도 그저 그렇고 결국은 형제자매가 삼각관계 아니면 교차관계로 꼬여 돌아가는 연속극처럼 그렇고 그런 이야기네, 할 수 있겠다. 딴은 그렇다.

파도가 온다, 고통으로 숙성된 파도가. 뭍에 오르거나 해변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는 물거품을 가졌는데, 밀려와 발을 적신 바닷물이 가시는 모양을 보고 있으려니 만약 그 물이 시퍼런 물감이거나 혹시 테레핀유라도 섞였다면 발등에 푸른 띠 얼룩이 평생 남을지도 모른다고 루는 생각한다.

의외로 그것도 괜찮겠다 싶다. 사춘기 때는 인어가 실제로 있다면 얼마나 징그러울까를 상상했다. 하지만 어느새 새파랗던 두피가 갈색이 되어 가고 살갗에서 풋사과 냄새가 사라지는 서른의 고개를 넘고 보니 인어의 아랫도리가 부럽기도 했다. 아무리 얇고 정교하게 가공한 아름다운 뱀가죽도 흉내낼 수 없는 무늬와 비린내를 갖고 싶었다. 포획되어 물이 말라 비늘이 떨어진다든지 심지어 인어를 먹는 종족이 생선을 토막 내듯 자른다면 끔찍하겠지만 말이다.

내가 사랑하는 포획자, . 루는 로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쓰게 웃는다.

루의 오빠와 로의 누나는 결국 난폭하게 헤어졌다. 두 사람의 이혼은 그 누구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몇 건의 사별로 이어졌는데 그 하나는 어느 해의 무더운 여름날 전국을 발칵 뒤집은 총기 난동으로 루 오빠 부부가 숨진 일이고 또 하나는 로가 누나와 남동생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잃은 일이다.

루의 오빠는 전날 근무지로 찾아온 로 아버지와 남동생에게 경찰 정복 차림으로 멱살잡이를 당했고 그날 만취 상태에서 오후 여섯 시 이십 분에 친정에 있는 아내를 먼저 쏘았다. 그리고 십 분 뒤에 퇴근해 돌아오는 로의 남동생을 쏘았고 일곱 시 오 분에 시내 중심가에 있는 부동산중개사무소를 찾아가 로의 아버지를 쏘고 나서 아홉 시에 자기 머리를 쏘았다.

그날부터 공장 3교대 미드나이트 조로 바뀌어 목숨을 건진 로는 그 미쳐 버린 밤에 감당할 수 없는 운명과 비극의 엇갈림 속에서 광기에 사로잡혀 루를 찾아 헤맸다. 로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절규하며 말리는 부모를 뿌리치고 루 역시 로를 찾았다. 로와 루는 서로 엇갈려서, 루는 줄리엣처럼 로는 로미오처럼 자살해 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연쇄 보복 참사를 우려한 경찰 수색조의 손전등 빛 막대들을 따돌린 채 루와 로는 짐승처럼 야산에 웅크린 채 서로를 지켜주었다.

사랑하는 나의 포획자, . 루는 바닷물에 샌들을 헹궈 모래를 씻어내고는 증류탑들이 솟아 있는 공장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우리가 세상한테 이길 수 있을까?”

로가 남쪽 끝에 있는 어느 도시로 멀리 이사하고 나서 1년쯤 지난 뒤 외곽의 어느 누추한 모텔에서 밤을 보내며 루에게 그렇게 물은 적이 있다.

이길 수 없을지도 몰라.”

루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럼 한번 행복해 보지도 못 하고 죽어야 되는 건가.”

아까 행복하다고 하지 않았어?”

루가 뭐라고 말하기 힘든 답답함이 가슴속에서 밀고 올라오는 것 같아 숨을 몰아쉬듯 어색하게 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두운 얼굴로 루에게 오래 눈길을 주었다. 루가 불안하게 해명했다.

그러니까옛날 말구. 조금 아까는 행복하다구 그랬던 것 같은데.”

로는 피식 웃어야 했지만 그만 눈물이 나고 말았다. 로는 조금 전에 분명히 행복하다고 루의 귀에 대고 말했다. 오랜만에 만난 루는 서럽도록 반가웠고 그만큼 그녀 몸의 느낌도 말할 수 없이 좋았다. 루는 슬퍼하면서도 기뻐했으며 또 흥분했다.

세상이 망해 전부 죽는다 해도절대 못 헤어지게 날 먹어 버리란 말야.”

사랑하는 나의 포식자, . 정유공장의 칼럼이나 저유탱크 같은 것들은 멀리서 보면 뭐랄까,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은빛의 독배랄까, 피학적이고 순응적인 안식마저 준다. 엄청난 강철과 용액에 비한다면 한 사람의 몸에 흐르는 뜨거운 피라는 게 하찮다 못해 먹히거나 녹아들어가 버리는 게 오히려 편안하지 않을까 하는 위로를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큰 산도 알록달록한 개미 같은 인간에게 실핏줄처럼 좁은 길들을 허락했듯 증류탑과 저유고들도 가까이 다가가면 사람이 오를 수 있는 사다리를 갖고 있다. 로와 함께 행복, 아니 행복에 대한 쥐꼬리만큼의 공감을 나눈 때로부터 26개월쯤 지난 지금 루에게는 다가갈수록 뚜렷해지는 그 사다리들이 로와 다름없이 소중한 어떤 외길같이 느껴졌다.

세상엔 어쩔 수 없이 명백한 것들이 있다. 내 침을 묻히지 않은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 따위는 없다는 것, 잉크는 피와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유물론적 존엄이다. 혁명가 트로츠키는 모닝커피보다 조간신문의 잉크 냄새를 좋아했다지만 루가 로와 2년 반 동안 편지로만 주고받은 건 사랑이라기보다는 목마름이었다. 사건의 기억과 악몽, 전직, 부서 이동과 보직 변경, 파업이 2년 반의 공백을 메꾸는 로의 변명이었다. 루는 쇠약해진 아버지 탓이었다.

로가 있다는 사원숙소는 요즘 새로 지은 오피스텔 급이었다. 어쩌면 수도자들만 살 것도 같은 정숙한 복도 분위기를 바꾸는 건 루의 힐 소리만이 아니다. 숙소 너머 운동장에서 들리는 외침, 건물 스스로 내는 것 같은 미약한 메아리 같은 게 낯선 곳에 온 루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루는 근무복 점퍼 차림의 앳된 여자 직원과 마주쳤다. 루는 경비실에서 안내받은 316호의 위치를 물었다.

저기 끝까지 가셔서 코너 돌자마자예요.”

여자 직원이 등을 돌리고 가다가 잠깐 루 쪽을 돌아보는 듯했다.

루는 터미널 부근에서 산 과일 꾸러미 손잡이를 고쳐 쥐고는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로다. 루는 대답하지 않고 혼자 미소 지었다. 문이 열리고 트레이닝복 차림의 로 뒤로 한 여자, 건조대에 널은 천 기저귀, 평화롭게 돌고 있는 모빌, 포대기에 싸인 아기, 베란다 창 너머 증류탑의 사다리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많이 마시고 돌아와 쓰러져 잔 다음날은 반드시 한두 군데 멍을 지니기 마련이다. 흔적은 없어도 예컨대 양쪽 겨드랑이가 뻐근하다거나, 어느 한쪽 팔뚝이나 장딴지에 알이 박혀 쑤시게 되어 있다. 그리고 필름이 끊긴 시간에 대한 공포는 상처보다 더 두렵다.

애써 수습할 필요는 없다. 수습할 수도 없다. 무엇을 찾아 뒤졌는지, 헤집어 놓은 옷장을 다시 정리하면 그만이다. 방바닥에 어질러진 것들 중 빨간 빗금무늬 넥타이가 보인다. 힘이 다한 부적이나 뱀 허물 같다.

돌연한 상처는 육체만의 것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쥐구멍을 찾고 싶어지는 일들이 있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부끄러울 줄 모를 것이고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마음에 새긴 사람은 영원히 부끄럽거나 낙오하거나.

온몸에 힘이 쏙 빠져나간 것 같다. 허나 이야기를 하고 싶다. 대개는 남의 행복이나 행운을 훔친다. 나는 타인의 불행을 하나 훔쳤다.

그 동네에 대해 말하자면, 출근길 좁은 골목에 작가 H가 종종 무슨 영문인지 스포츠카 이클립스를 몰고 쏜살같이 내려와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거나 한여름 밤 길모퉁이에 은색 자리를 펴놓고 수박 쪼개서 동네 술추렴을 하고 있으면 또 무슨 사연이지 꼭대기 사는 중년남자가 낡은 프라이드로 폭주해 올라가는 바람에 술자리에서 비상 대피하고 마는 추억의, 동네다.

구의원 한 사람과 H가 바로 그 동네 아주머니들의 공공의 적 1, 2호였다. H는 아방가르드한 차림새와 내키는 대로 뱉는 것 같은 말투 때문에, 구의원은 대낮에 골목을 한강으로 만드는 구정물의 발원지로 의심되는 집 주인이기 때문에.

책과 TV를 통해 잘 알고 있는 H에 대한 비호감과는 달리 나는 구의원에게는 어느 정도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유는 어느 더운 날 마을버스를 놓쳐 망연자실한 나를 그가 친절하게 태워 주었기 때문이다. 선거가 보름 남짓 남았을 때였다. 그의 그랜저는 시원하고 쾌적했다.

문제는 구의원의 아내, 정밀하게는 젊은 아기엄마들이 몰려가 구정물 일을 따져 묻자 무슨 상관이냐, 억울하면 더 높은 데 살든지, 라고 말한 그녀의 입이었다. 퇴근해서 발을 씻다 그 얘기를 아내에게 전해들은 옆집 B1호 남자는 당장 구의원 집으로 쫓아올라가 한바탕 했었다.

B1호는 이제 백일 지난 아이 하나를 둔 젊은 부부였다. 처음 이사 왔을 때 한눈에 부부가 둘 다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멀리서, 때로는 가까이에서 지켜본 두 사람의 일상은 여느 부부와 다를 바 없었지만 남편 이름이 로인지 뭔지 알파벳 알(R)이 들어간 알쏭달쏭한 외국어 이름으로 불리는 걸로 봐서 어느 유럽 국가에서 유학이라도 했던지 아니면 외국계 한국인인지 긴가민가했다. 두 사람의 미모도 미모지만, 말을 한마디 나누기만 해도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아기엄마의 후덕이 따뜻하기 짝이 없었다. 첫날 돌린 떡, 가끔 돌리는 과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상에, 짜파게티 좀 끓였는데 맛 좀 보시겠어요, 하며 들이미는 그런 이웃집 유부녀는 처음 보았다.

선하고 무애한 탓이지, 하면서도 저 유구한 역사를 가진 (fuck) 아니면 킬(kill)’의 남성 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의 변종답게, 집이라 대충 편하게 입은 그녀의 파진 옷을 떠올리며 잠깐 턱없이 알쏭달쏭해하다가 고개를 도리질하면서 이웃집 유부녀에 대한 포르노그래피란 인간 유()에 대한 얼마나 빌어먹을 모독이란 말인가, 하며 속죄한다.

저녁, 이번에는 남편이 문을 두들기며 맥주 한 잔 하시죠, 하는 초대에 따라 들어가서는 맨발을 양반다리 안쪽으로 애써 감추면서 넙죽 받아 마신다. 혹시 아내와 아이 단둘이 있는 낮에 집을 지키는 옆집 사내의 정체 탐색이나 다소 위선적인 면식을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가 보여주는 그런 됨됨이는 순수한 호의와 안전을 위한 책략, 어느 쪽으로도 훌륭한 것이었다.

그는 구정물 사건 이후, 험한 세상 살아가는 거친 전사의 모습을 한 번 더 보여주었다. 맨 위의 층 세입자는 두 집을 터서 쓰면서 집주인 같은 위풍과 세도를 부리는 사람들이었는데, 하루는 B1호 남자가 자기들 자리에 차를 세운다고 한마디 했다. 역시 입이 문제였다. , , 전을 거친 끝에 결말은 이랬다.

새파란 새끼가 건방지게, 대가리를 수박처럼 쪼개 버릴까부다, 너 몇 살이야?”

? 확 간을 끄집어 안주로 해먹어 버릴라, 나 열일곱이다, 어쩔래?”

한순간 폭발하는 짜릿한 항거, 적에겐 공포와 죽음을, 가족과 동지에겐 무한한 사랑을오랜 옛날 전쟁영웅들의 단순 용감한 카리스마조차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가끔 벌어지는 그런 시비와 험구에도 불구하고 세입자들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2층의 한쪽 집 아이가 마주보는 집 아이를 때리곤 했는데, 문제는 다른 데도 아니고 꼭 얼굴을 할퀸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양쪽 집 부모들이 보여주는 갈등 해소와 화해의 기술은 흐뭇할 뿐만 아니라 감탄할 만한 것이었다.

인류학 공부 하는 후배가 언젠가, 요즘은 문명세계 어디를 가도 아이들이 자라면서 내 꺼, 내 꺼, 하게 되는 걸 보통으로 여기지만, 아프리카 오지의 어느 부족에 대한 르포르타주에 의하면 인간의 본성이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는 그만 솔깃해져 그 이야기를 또렷이 기억했다.

상쟁하는 삶터에서 아이들이 한때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입에 욕을 달고 살 때도 있겠으나 평범하지만 현명한 부모를 닮아 꼭 내 꺼의 질곡을 넘어서리라, 하고 나는 기대했다.

아침나절이었다. 문 앞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옆, 문이 열린 B1호 비좁은 현관에 서서 동네 젊은 아기엄마, 아주머니 몇몇이 혀를 차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어쩌면 좋아, 정말 너무 안 됐다.”

오죽했으면 야반도주 식으로 이렇게…….”

애기엄마, 정말 착했는데그런 줄 누가 알았겠어…….”

나는 어리둥절했다. 지난밤 놀러온 친구 녀석도 무슨 일인지 나와 보았다. 옆집은 큰 살림들이 듬성듬성 빠진 채 버리고 간 살림 쪼가리들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녀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자그마한 종교 단체의 신자라고 했다. 그녀와 몹시 가까웠던 아주머니 말에 의하면 어제 낮에 그녀가 와서, 자기가 아이를 데리고 무슨 철야기도회에 가서 하루 외박을 했는데, 그 동안 아무 말도 안 하던 남편이 갑자기 노발대발해서 괴롭다며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그날 저녁엔 B1호 남자가 찾아와 아내가 아이까지 데리고 편지 한 장 써놓고는 사라졌다고 하소연하더라는 것이었다.

걱정스러워서 아침에 와보았더니 남자도 무슨 그렇게 급한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동네 창피해서인지 밤에 조용히 짐을 빼 사라지고 없더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둘 가고 난 다음 집 안에 들어가 보았다. 가스레인지, 세탁기는 그대로 있었다. 어때요, 술맛이 더 좋겠죠, 하며 남자가 내게 건네곤 하던 벌거벗은 여자 모양 맥주잔, 하도 얻어먹어서 익숙해진 무늬의 싸구려 플라스틱 그릇들도 널브러져 있다. 유모차, 장난감도 버려두고 갔다. 깨진 사진틀 유리 안의 단란한 가족사진은 빼갔는지, 없었다.

아홉 자짜리 장롱 문은 활짝 열어 젖혀져 있었고, 구겨진 셔츠 몇 벌과 넥타이 몇 개도 버려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나는 잠시 참담했다.

넥타이가 모두 멀쩡하고 좋은 것들이었다. 나는 무심히 그 중 하나를 집어 장롱 안에 붙은 금이 간 거울을 보며 목에 대보았다.

뭐하는 거야, 임마. 남 풍비박산 된 집에서…….”

친구가 나무랐다.

아깝잖아.”

술 덜 깼냐? 버려, 자식아재수 없어.”

라면 물 올려놓은 게 생각난 친구가 황급히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는 하얀 바탕에 빨간 빗금무늬 넥타이를 다시 한 번 목에 대고 거울을 보았다. 목 늘어난 티셔츠 위에서 넥타이는 싫은 집에 시집가는 이의 옷고름같이 처연해 보였다.

세 조각으로 금이 간 거울 속에는 잠시 행복했던 사람들이 머물던 공간과 금지 푯말의 사선 같은 넥타이 빗금무늬가 조각조각 어긋나 있었다. 그리고 그걸 들여다보는 한 사내의 눈동자 안에서 냉담한 세계는 만화경 속처럼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 퍼지기 전에 얼른 와, 먹자!”

친구가 소리쳤다. 넥타이를 말아 트레이닝복 바지 주머니에 넣고 그 집을 나왔다. 문을 닫고 식탁에 앉았다. 차려진 건 짜파게티였다. 나는 한 젓가락 집어 삼키다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사랑을 잃은 것 따윈 아무것도 아니다, 아침에 찬물로 세수하면서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지만 루는 사실 지나간 깊은 밤마다 자살에 대해 생각했다. ", 널 어쩌면 좋니, 미안하지만 난 네가 불쌍해, 불쌍하단 말야."

몹시 취해 눈물을 뚝뚝 흘리던 남자는 앉은 채로 루의 양반다리에 얼굴을 묻으며 고꾸라지고 난 다음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루는 모텔 방 콘솔 앞에 앉았다. 스테인리스 컵에 커피믹스가 달랑 두 개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습관적으로 커피 봉지 끝을 잡고 흔들다가 곧 낙담했다. 뜨거운 물이 없었다. 혼자 나서기가 영 내키지 않았지만 방문을 열고 나가 복도 끝에 있는 정수기에서 커피를 탄 다음 뜨거워진 컵을 손을 옮겨가며 조심스럽게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극장에서나 쓰는 것 같은 두텁고 무거운 커튼을 젖히고 쪽창을 열었다. 바깥 공기가 선선하다.

간밤에 남자는 뭐라고 웅얼거리다가 몇 번인가 팔을 루의 가슴께에 올려놓았다 내려놓았다 한 것말고는 잠만 잤다. 새벽에 깜빡 잠들기 전에 루를 맴돌던 생각이 이어진다.

'죽는다는 건 시간문제지. 누구나 결국에는 자기가 죽는 거지 누가 죽여주는 경우는 드문 것 아니겠어. 그건 말이야, 비관도 낙관도 아니야.'

어깻죽지 깊숙한 어딘가가 아파 왔다.

'과연 내가 사랑 때문에 아프긴 아픈 것일까. 죽을 만큼 아픈 사랑이란 게 있기는 있을까. 하지만 로, 너만 생각하면 몸통 안쪽 어딘가가 계속 아프다. 사랑해서 아픈 건 의사들도 아직 해명하지 못한 것 같아. 기억하지 않으려 하고 기록하지 않을 뿐 사랑이란 늘 아픈 거야.'

민망하게도, 아픈 가슴과 슬픈 상념에게는 미안하게도 턱뼈가 빠질 것 같은 큰 하품이 나오면서 눈물이 났다. 하품보다 눈물이 먼저였다고 우기고 싶다. 한껏 벌어져 거침없어진 입안의 작은 허공을 가로질러 침샘이 뿜어낸 실비 같은 타액의 분수가 손등 위로 떨어졌다. 헛웃음이 나왔다.

여행의 첫날밤 저 남자 몸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우리, 서로의 액체 냄새에 익숙해져야 해!”

뒤에서 머리칼을 잡아당기면서, 잡아먹거나 죽이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원시의 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의 야만을 만끽하고 있는 남자를 향해 루는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소리 질렀었다. 자기도 모르게 흘리는 타액을 그가 빼앗아주기를 갈망하면서.

루는 바닥에 커피가 조금 남아 있는 컵에 담뱃재를 털었다. 담배를 입에 문 채 두 손을 뒤로 해서 브래지어 후크를 바로잡다가 어느새 자란 재를 방바닥에 떨구고 말았다. 검지에 침을 묻혀 담뱃재를 가만히 집어낸 다음 컵 가장자리에 조심스럽게 갖다 대고 나서 손가락을 허벅지에다 문지른다. 살갗에 회색 붓 자국 같은 길이 났다.

남자가 뒤척이다가 이내 잠잠해진다.

혼잣술이 너무 지루해진 루가 합석을 허락한 날 처음 만난 뒤로 줄곧 루에게 목을 매고 있는 남자. 한 달에 이백삼십만 원 정도 벌고 자동차는 중고 매그너스 이글, 등산이 취미고 야구를 좋아하고 술 취하면 울다가 얌전하게 고꾸라지고 보수 정당을 지지하며 루를 사랑하고 루를 보살핀다. 루의 과거까지. 진심으로. 하지만 루의 마음속 정글에서는 과거의 남자, 로를 못 이기고 있다. 루는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채 엎드려 자고 있는 남자를 바라본다. 착한 남자.

훗날 몇몇 고향 친구들의 입에서 입으로 흘러 다닌 소식에 따르면 로가 파업 때문에 집에도 못 가고 밤낮으로 공장에 매여 있을 때, 로의 아내는 갓난아기까지 데리고 집을 나갔다고 한다.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성도회라는 종교 단체의 신자였다고 했다. 로는, 아기를 업고 전화 한 통 없이 밤샘 기도를 다녀온 아내에게 불같이 화를 냈는데 그날 이후 아내가 아기와 함께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이다.

상사, 동료, 가족까지 동원한 회사의 설득과 회유, 파괴공작을 피해 파업 가담 조합원들이 일제히 공장을 빠져나가자 로는 비상운영조로 정유5팀 관할 지역에 투입되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공장의 그 지역은 지대가 낮아서 만일 물이 차올라 정전이라도 된다면 심각한 사태가 올 수도 있었다. 갑자기 단번에 전원이 끊기면 복잡하고 거대한 파이프라인의 촉매 따위가 굳어 버려 공장 전체가 마비되고 재시동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게 될 것이다.

걱정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암흑이 닥치고 천둥이 심장을 뒤흔들었다. 짧은 시간 안에 거의 동시에 정상적인 셧다운 절차를 끝내야 한다. 설비 운전원은 로 혼자였다. 다른 사람들은 긴급 차출된 사무직과 영업사원이었다. 여기저기서 아비규환이었다. 로는 손으로 깔대기 모양을 만들어 다급하게 소리쳤다.

"히터 퓨얼오일, 가스 전부 잠그세요!"

"조 팀장님은 차지 펌프 트립!"

급히 히터 핍홀을 열고 상태를 확인하고 있는데 무전기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뭘 해야 돼?"

"스플리터 아이솔레이션, 빨리요!"

기름 범벅에 녹초가 된 로가 집으로 돌아갔을 때 이번에는 집안이 온통 캄캄했다. 정전은 아니었다. 허리띠에 달고 다니던 플래시를 켜고 스위치를 찾아 전등을 켰다. 아내도 아기도 없었다. 뭔가 이상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로는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 쪽으로 몸을 돌렸다. 냉장고 손잡이를 잡으려는데 반으로 접힌 쪽지가 딸기 모양 자석에 눌려 있었다. 로는 쪽지를 펴보았다.

'이로 아빠, 미안해요. 나하고 애기는 하나님의 길 가야 해요.'

로의 아들은 로 2세라는 뜻에서 이로였다. 이름을 처음 지었을 때, 을지로 통일로 같은 길 이름 아니냐며 입을 가리고 다소곳이 웃던 아내의 얼굴이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로의 눈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헤어진 뒤에 로는 딱 한 번 루에게 전화를 한 적이 있다.

"나야. 잘 지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지만 한번 보자."

로는 무엇인가 절박하고 무엇인가 마음을 다 놓아버린 듯한 느낌을 주었다. 루는 대꾸도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강릉, 진부에서 하루씩 묵고 루와 남자는 방아다리 약수터에 들러 백담사로 향했다. 남자는 쇠 냄새 나는 약수를 들이켜면서 술이 깬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속이 안 좋은지 자주 쓴 입맛을 삼켰다. 그러다 루를 보고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눈은 다른 데를 보고 입술만 루 쪽으로 내민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

루는 기꺼이 눈으로 웃으며 입술을 대주었다. 귀여운 남자.

백담사에 처음 가보면 두 번 놀라게 되는데, 첫째는 어렵사리 오르고 헤쳐 나가야 할 것만 같은 산길에 어엿한 찻길이 나 있다는 것이다. 소방이나 구조가 쉽도록 만들었다고도 하고, 한 전직 대통령을 위해 급조했다고도 한다.

둘째는 명당 고찰에 전직 대통령이 머문 방을 그때 그대로 남겨둔 유정(有情), 만해라는 시인과의 인연을 1980년대 풍의 을씨년스러운 치장으로 꾸민 무정(無情)의 극적인 대비다. 한국인은 천생 선방의 스님다운 것이, 고찰에 색계의 조악한 미학이 구현되어 있어도 거기서 즐거움을 찾아내고 심지어 아름다움까지 발견해 낸다.

루는 길도 절도 왠지 불쾌하게' 편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건 사실 예전에 라디오 클래식 음악방송에서 흘러나오는 그레고리안 성가곡을 함께 듣다가 로가 했던 말이다.

"음악이 불쾌하게 아름답지 않니?"

"아름다우면 그냥 아름다운 거지, 불쾌하게 아름다운 건 또 뭐야?"

"뭐랄까, 그런 거 있잖아, 아름답긴 하지만 그게 꼭 나한테 무슨 해코지를 한 것만 같은 찜찜한 느낌말이야."

, 불교 믿어?"

"아니, 나는 별을 믿어."

"무슨 별?"

"너라는 별."

"하하, 어디서 많이 들어본표절에 닭살이다, 정말."

"무슨 생각 해?"

남자가 루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루는 남자에게 어쩐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루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고개를 흔들어 주었다. 남자가 산 쪽을 멀리 보며 말했다.

", 여기 너무 좋다, 아름다워!"

루는 할까 말까 주저하다가 그냥 혀가 내키는 대로 말해 버렸다.

"나보다 더 좋아? 더 예쁘고?"

"그걸 말이라고 해? 당근 루가 더 좋지."

남자가 해맑게 웃는다.

루와 남자는 백담사 진입로 입구로 다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구불구불한 좁은 길에서 마주 오는 버스와 아슬아슬, 그러나 잘도 비켜간다. 루는 절 구경한 보람을 찾으려는 듯 조그만 화두 하나를 마음에 새기려고 애쓴다.

'외길에서 엇갈리는 것도 사랑일까.'

남자는 아무 말 않고 루의 머리칼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계곡 물은 말라 있고 콘크리트 길에는 먼지가 심하지 않았다. 그 모든 풍경은 불쾌하게도 아무 일 없이 평화롭기만 했다.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 루가 또 사랑을 했는지, 결혼이라도 했는지, 혹시 잘못되기라도 했는지 어쩐지는 잘 알 수가 없다. 알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이름은 아무래도 좋은 낯선 사람들의 정류장, 마음속에서 이미 죽은 사람을 가로누인 시간의 상여집이 번갈아 스쳐지나가는 길은 눈물이며 마른기침이라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면 그뿐이다.



홍대욱

전화 010-8690-7384

메일 icefire63@naver.com

주소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969번지 힐링하우스 402


  • profile
    korean 2019.03.02 20:39
    열심히 쓰셨습니다.
    보다 더 열심히 정진하신다면 좋은 작품을 쓰실 수 있을 겁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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