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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구성이 강한 글로 실제 역사와 배경과는 다른 점이 있음을 미리 앞서 밝힙니다.

*악사는 허구 인물입니다.

 

 

존망지추(存亡之秋), 각골통한(刻骨痛恨), 현문우답(賢問愚答). 대지에 짙게 내려앉은 어둠은 빛을 삼키고, 귀곡성(鬼哭聲)조차 암()에 갇혔던 나날들. 세기의 갈림길에 서서 뼈에 깊이 새겨진 원한을 담아 자신들 위에 합병이란 명분으로 군림한 자들에게 자유의 질문을 던져보나 돌아오는 대답은 얼마나 우망(迂妄)하던지. 그때의 반도의 호랑이는 두 눈이 가려지고 두 귀가 막아져 입에는 재갈이 물렸으니 할 수 있는 발악이라곤 목청에서 울리는 포효 밖에 없더라.」 

 

1

 

-1941831

 추레한 몸을 이끌어 허공을 방랑하다 못내 바닥으로, 땅으로, 심연으로 가라앉는 바람의 생은 얼마나 가련한가. 완전히 가지 않은 여름의 눅눅한 습기가 배어진 바람의 향내는 또 얼마나 지독히 쓰라린가. 가에서 가로, ()에서 지(). 사방을 가득 메우며 바람은, 그 서글픈 부랑자는 그렇게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예로부터 있었으니 현 왕조도 이를 비껴갈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으로 기울어져만 가는 현 시국에 자꾸만 눈길이 가게 되는 건 필히 이유모를 미련이 남아서이다. 오늘도 악사는 제 눈에 닿은 모든 풍경들을 기억할 수 없단 걸 알면서도 어김없이 그것들을 가락으로 꿰어 하늘에 올린다. 그러나 곡조(曲調) 속에서 풀려나오는 감정의 실타래가 얼마 못가 땅으로 추락해 가락가락 끊어지는 건 오늘도 매한가지. 불협화음, 곧 선율은 멈추고 악사가 감았던 눈을 뜬다. 그리곤 저를 구경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말없이 자신이 불던 피리를 가방에 욱여놓고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난다.


미치겠군


 자신답지 않은 투박한 발걸음이 바닥을 치며 불규칙한 박자를 일궈낸다. 그러던 중 그 불규칙한 소리를 듣자니 못내 기분이 나빠져 걸음을 멈추고 푸른 선율을 가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연이 품은 변치 않을 절대적 선율은 아무리 가()에 능소능사(能所能事)한 자신이라도 좌우지할 수 없는 독립적 존재, 그리니 그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고 마는 건 만물의 숙명이라 애써 자신을 위안한다. 그러다 눈동자를 사선방향으로 굴리어 주변부를 살핀다. 눈길이 닿는 끝에 학교 하나가 있다.


연희 전문 학교


 아니, 정확히는 한 청년이 악사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글이 있는 곳 앞에 서서는 망부석(望夫石)처럼 한동안 자리하던 청년이 곧이어 허공에 손을 두어선 무언가를 적는 시늉을 해 보이고 있었다. 사물을 글로, 불어오는 바람을 글로, 묵직하게 가라앉은 공기를 글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게 휘어지는 손목을 이용해 글자에 이들을 담아낸다. 매끄럽게 허공에서 미끄러지는 손목의 박자가, 한 획이 그어질 때마다 걸리는 시간의 틈과 오묘한 조화를 이루던 중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다. 서로의 시선이 엇갈린 탓이다.


...... 신경 쓰지 말거라, 그냥 지나가는 악사이니


 그러나 청년은 악사의 관심이 달갑지 않았음이었는지 허리에 두었던 손을 슬그머니 내리곤 등을 돌리어 교문 안으로 들어선다. 시간이 둘 사이의 공백에 들어서 매 초가 지날수록 그들을 더욱 극으로 갈라지게 만들었다. 악사는 청년이 시야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한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윤동주


 악사는 청년을 알고 있다. 악사가 읊조린 이름은 청년이 공중에서 적고 있던 것이었고, 더욱이 언젠가 윤동주의 소문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보통 시인과 소설가들은 필체에 기교를 넣어 화려한 글을 만들기 마련이나 윤동주란 청년의 시는 그릇됨이 없고 오히려 순박한 것이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는 소문. 단지 잠깐을 보았을 뿐이지만 그 소문이 항설(巷說)이 아니었음을 그는 깨닫는다.

 짧은 시간, 서로 오가는 대화도 없던 첫 만남은 그렇게 종막을 고했다. 하늘은 어느 샌가 어둑어둑해져 세찬 소나기를 퍼붓기 시작했고, 악사는 비를 피하기 위하여 가삐 걸음을 옮겼다.

  

  

2

 계절은 죽지 않는다. 한 계절이 누그러짐은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서이지 순전히 작별을 알리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니 계절이 넘어감은 새로운 악장이 시작됨이 아니라 사계절이란 악()의 기존 가락에 음악적 반전이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봄의 가락을 여름이 받고, 여름의 가락을 가을이 받는 양상(樣相)으로. 이 얼마나 자연스럽고도 생경한 음악적 반전인가. 어느덧 세찬 빗 가락은 오밀조밀한 부스럼 비가 되어 추추히 땅에 떨어지고 있다. 악사는 빗소리를 느낄 심산으로 천막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또옥-또옥-. 마찰과 함께 아주 작디 작은 물방울로 탈바꿈한 비가 새로운 화음 가락을 만들며 손바닥 곳곳에 튀긴다. 그런가 하면 공중에선 동그랗던 빗물은 손바닥 위에서 납작한 물웅덩이가 되어 악사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린다. 불수의적이었던 것이 수의적으로, 독립적인 것이 종속된 무언가로. 마침내 제 손에 고인 빗물과 지금 이 나라의 현황이 같은 처지란 생각까지 들자 악사는 건으로 너털거리며 비를 담았던 손을 쥐었다. 손가락 관절 사이로 차오른 물방울이 손등에 흘러 바닥으로 다시금 떨어진다. 악사는 안다. 나라의 성쇠(盛衰)는 당연한 이치일지언정 그것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따라 순리에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또 악사는 안다. 과거엔 가강했던 반도 호랑이의 기개가 점차 잊히고 있단 것을.


“.......생각이 많아지는군.”


 먼지가 터를 잡았던 거리는 속살거리는 비에 의해 금방 말쑥해졌다. 이제 비가 그쳤나. 비가 시들해지기 시작할 즈음에 구름을 비집고 들어온 빛 응어리 하나가 악사가 있는 거리에 내려 앉았다. 파랗다. 하늘과 바람,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별이 음()이 되어 자신에게 나긋하게 묻는 것 같기도 하다.


-그를 다시 만나볼 꺼야?


 제 아무리 훌륭한 악사가 연주를 하더라도 그 안에 의()가 없다면 그것은 죽은 음악이다. 의지 없는 껍데기가 살 수 없는 법. 지금 악사의 가()는 생과 사를 넘나들고 있어 생기를 잃은 지 오래다. 어디에 두고 온 건지 저 스스로도 모른다.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길이 막히어 있어 걸음을 내딛는 순간순간이 그 존재를 알지 못할 따름이었다. 혹여나 제게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어 곳곳을 살펴보기도 하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허망이다. 근래에 들어 곧은 선율을 뽑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고 있는 데도, 해결책은 그곳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계속해서 음악을 하는 것은 언젠가는 잃어버린 의()를 찾는 까닭이었다.


또 한 번 인연이 있겠지


 음악을 하며 품어왔던 자신의 뜻은 1910년 어느 날을 기점으로 자취를 감추었고, 그것은 오래토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라의 흥망을 당연시 여기며 방관했던 악사는 결국 의()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런고로 윤동주와의 인연을 기대하는 이유는 잃어버린 걸 찾을 수 있을 거란 희망 때문이었다. 그리고 의()에 녹이 슬어 형태를 알아볼 수 없기 전에, 그리고 다시 한 번 대한제국의 개결한 하늘에 가락을 쏘아 올리기 위함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놓친 뜻은 무엇이었고 그 뜻이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알고자 함이었다.

  

  

3

-194111, 경성(현 서울)

    본디 가()는 몸을 전율케 하는 가락과 혼을 뒤흔들 의()의 결합으로, 악사인 자신이 시인, 윤동주를 찾는 건 필연이다. 그러나 저의 이름조차 모르는 그와의 만남을 기대하는 건 금방이라도 으깨어질 성의 마른 가을 나뭇잎을 바라볼 때에 느끼는 아쉬움과 같다. 더군다나 하늘이 그들의 만남을 꼬아놓기라도 했는지 서로의 시간이 늘 엇걸렸기 때문으로 석 달이 흘러서야 조우한 것이었다. 윤동주와 마주한 자리는 학교명 앞, 윤동주는 학교명 패를 사이에 두고 저를 바라보는 악사의 시선에 어벌쩡해진 채로 아연해진 눈을 흘렸다

 가볍게 목례를 하지만 시선은 악사의 곳곳에 처절하게 매달려 그의 동작 하나하나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악사는 그 묘한 기세에 그제야 상대방이 두 팔로 조심스럽게 안고 있는 책 한권과 그 때문인 건지 어딘가 날이 서있음을 알아채고선, 처음부터 그를 보지 않은 척 시선을 거두었다. 시집인가. 잃어버린 자신의 뜻이 저 안에 있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들이 머릿속을 선회하나 이를 밖으로 내뱉는 건 갸(‘교만의 옛말)임을 잘 알고 있어 목 너울 너머로 새어나오려는 질문을 힘겹게 집어 삼키었다.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네


 물론 거짓이다. 매일은 아닐지라도 시간이 나는 때마다 이곳에 찾아와 주위를 기웃거리며 윤동주를 스치고 간 바람의 자취라도 즐거이 좇았던 자신이었다. 그러나 저를 원치 않는 대상에게 억지로 말을 붙여 원하는 바를 갈겨 내는 건 도적들이나 하는 짓임을 알기에 하는 수 없이 이번 만남을 저버리고자 등을 비스듬히 돌리었다. 그러면서도 종내 못 다한 아쉬움이 만조가 되어 넘실거림은 비극적인 희극으로 승화돼 신체의 말단부에서부터 차고 들어와 잔잔한 실의에 드디어 숨이 턱하고 막히었을 때, 기억해낸다. 만고산천의 모든 존재를 키우는 시간 속에 저 자신은 얼마나 교만한 음악을 해 왔었는지, 악사로서 지켜야할 천명을 알면서도 사리(事理)를 분별하지 못하여 얼마나 제 재주를 남발해왔는지. 메마른 감정에 호수를 둬보겠다며 호기스럽게 악기를 켜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이 되어 몰아닥쳐온다. 한 순간에 반만년의 역사가 송두리째 도둑맞았다는 비에 빠져 통한을 하던 사람들 앞에서 곡을 울린 건 진정 누굴 위했던 것인지를 이제와 돌이켜 사색하는 것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데에서 왔던 그의 순수한 한()은 날이 갈수록 제 자신의 만족을 위한 기만으로 변질되어 짓 물려 졌었음을 지금에서야 알아차린다. 천공(天公)에 올린 곡조가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의 처리로 바닥을 향해 하염없이 곤두박질치는 근원적 이유를 찾아내고야 만 것이다. 자신의 놓친 의(), 어딘가에 잃어버렸던 무언가는....


“......애국(愛國:자신의 나라를 사랑함)이었음을.”


 자신의 나라를, 자신의 고향을, 자신의 부모와 친우를 역사 한 장으로만 보고 실재하는 세상에 비춰보지 않았음이 의()를 잃게 한 것이었다. 결국엔 저가 망()으로 기울어가는 현 시국을 보며 느낀 미련이란 건 결국엔 또 다른 가 보내는 저를 향한 신호. 지금 악사의 눈가에 맺히는 눈물은 감정의 응어리이자 짜게 식은 회한의 잔재다. 제 갈 길을 가려던 윤동주는 악사가 내뱉은 말에 족쇄라도 걸린 것 마냥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돌아 살피었다.


()를 좋아하시나요?”


 빳빳한 시집에 흠집이라도 날까 소중히 감싸 안은 팔 하나를 내리어 악사에게 슬그머니 물어왔다. 시인이 악사에게 묻고 글이 음악에게 물어, 음악이 글에게 대답하고 악사가 시인에게 대답한다. 악사는 비로소 자신과 화해의 악수를 하며 미망의 굴레를 벗어 던지운다.


“......저는 뜻()을 잃어버린 악사입니다

  

  

4

 뜻은 의(). 의는 혼()을 전율케 한다. ()은 정신을 정제한다. 그리고 정신은 생각을 표출한다. 생각이 표출될 때에 사용되는 건 언어다. 그러므로 언어는 뜻을 담고, 혼을 전율케 하고, 정신을 정제하고, 생각을 표출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언어다. 뜻이다. 혼이다. 정신이다. 생각이다. 그리고 다시 언어다. 선율은 이를 받아내는 그릇, 언어가 낭송될 때에 기저가 되는 음() 또한 선율의 일부로 가락이라 할 만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노래라고도, ()라고도 불렀었다.

 바람의 서늘한 음색이 머릿결을 간지럽히고 떠나기를 수차례, 자꾸만 달궈지는 뜨거운 숨결이 내부에서 펑-터질 것만 같다고 악사는 생각했다. 눈을 치켜 올려 하늘의 뜻을 감히 가늠하고, 땅으로 시선을 내리꽂으니 이건 인간만이 갖고 있는 기만이란 감정일 터. 그것은 하루의 시간을 축내고 축내어, 남는 것이라곤 감정의 부스럼일 것이었다. 윤동주와 가졌던 짧은 만남 속에 얻은 작은 시집 하나가 악사의 손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창과 방패를 든, 완전무결한 글자들의 고즈넉한 휘황함을 마주하려니 공교롭게도 심장의 박동이 교교하게 흩뜨려진다. 울린다, 심장이. 저와는 대조되는, 하늘의 뜻을 물어 글로 풀어내는 기묘한 언어의 게슈탈트다. 그것을 눈으로 맛볼, 석양의 무르익은 시간의 연속선 상 위에 악사는 덩그러니, 혼자 서 있다. 글자가 저 자신을 어디로 인도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다 중, 갑작스레 미끄덩하고 생각이 목청 너머로 굴러 내려간다. 덩어리가 콱, 목에 걸리어 굼뜬 움직임으로 숨의 행렬을 압박하고, 몸은 그것을 표방이라도 하는지 정체한다. 짐이다. 생각이 짐이 되어, 시에 대한 경외감이 중한 짐이 되어 짓누르는 게 분명했다.


후우......”


 눈을 감으니 성큼 다가온 어둠이 보이고, 비대해진 무의 형상을 모순적이게도 알아차렸다. 오호라, 너는 무지로구나. 내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던 간악한 무지란 뱀이로구나. 악사는 무심코 생각을 이어나간다. 저 뱀은 호시탐탐 제 머리를 노리고 있어왔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의심하고, 조심하고, 의문을 품기를 멈춘 그 즉시, 잔인하게도 뇌간을 뜯어 삼키어 사지를 절단시키기를 기대하며. 만약에 자신이 에 대한 일절의 고민도 하지 않았더라면, 생각하기를 거부했더라면 어찌되었을 지는 물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러다 악사의 헤모글로빈 혈류는 그 생각을 들여다보기라도 했는지 삽시간에 긴장상태로 돌입하여 증기관의 벅찬 움직임을 순차적으로 모방하기 시작한다. 악사는 요동치는 심장의 파도 소리를 잠잠케 할 능력이 없어 단지 손으로 심장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몰아 쉴 뿐이었다. 멈춰라, 그러나 그 무엇도 악사의 말을 듣지 않았다.

 떨리는 손이 다급히 찾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시집이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는 듯이 악사의 손 또한 쉴 곳을 찾아 들고 있던 시집을 펼친 것이다. 감각의 중심을 내부가 아닌 외부에 두어야만 했다. 생함을 알리는 심장의 질척거리는 소리를 다른 감각으로 채워야만 갈급함을 잠깐이나마 쟁여놓을 성이었기 때문이다. 태양은 하늘 산책로를 노니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음을 옮기고, 못내 남은 그 미련함은 대지 위에 내려앉아 검은 눈물을 흘리어 제 흔적을 진득이 남기고 있었다. 오늘따라 악사를 질척거리게도 따라다녔던 햇빛은 걸치지는 곳 없이 아래로 추락하고 있는 모양새다.


어디 아파요?”


 서글퍼지려할 즈음에 한 아이가 악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악사는 하늘에 던져두었던 시선을 대강 갈무리를 지은 후, 몸을 돌려 답했다.


낫는 중이니 괜찮아


 아이는 티끌 없는 웃음을 선물로 건네주고선 총총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고운 아이로구나. 하지만 그 말은 목 언저리에서 소실되어 허상의 무로 돌아가, 있지 아니하다. 자신에게 무슨 영광이 있어, 잘난 게 있어 말을 함부로 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악사는 말을 내뱉는 것이 아닌 휘파람으로 아이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을 대신하는 것으로 만족하곤 마음을 추스르며 시집을 펼쳐들었다. 아이를 이고, 이 나라의 어린 아이들을 짊고 걸어 나갈 것이라. 행복하게 피어, 아무리 힘들지언정 함박웃음을 터뜨리는 무궁화가 되리라, 악사는 또 무심코 생각을 이어나간다.

 자, 광휘를 두른 태양은 악사의 무지를 불사르고 수평선 너머로 저물어가고 있다. 뜨듯한 태양의 혈()이 어두워가는 하늘 아래 흘려지고 있다.

 

5

 흙에 생기를, 육신에 영혼을, 그리고 마침내 가()에 의(). 그러나 무엇인가 허적하다. 글자를 맛보고, 먹어서 포만감이 들었으나 괴이하게도 속이 더부룩하다. 이걸 무엇이라 하더라. , 소화가 되지 않는다고 하는 구나. 어둠이 흘려보내는 침묵 속에서 악사는 갈지자로 거리를 거닐다 인도에 놓인 긴 의자에 드러누웠다. 거리의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고, 악사는 그것을 가만히 구경하다 한숨을 늘어지게 쉬었다. 그토록 바랐던 의()를 찾았으나 자신이 받아들이기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지라 도로 토해내고 만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그리 생각했다. 개념을 단순히 지각하는 것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내재화로 받아들이는 건 다르다. 하물며 글자 한자 한자에도 뜻이 있는데, 시는 오죽하겠는가. 거무스름한 밤하늘을 바라보던 악사는 별을 잡을 심산인 듯 한손을 위로 뻗어 움키어보았다.


“......


 별이 하늘을 헤매는 날인지, 아니면 저 자신이 하늘에 떠있는 별을 헤어보는 날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날이다.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처량 맞기 그지없는 날이다.

 별이 하늘을 헤매는 날이라면 그것은 별이 천로를 잃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저 자신이 하늘에 떠있는 별을 헤어보는 날이라면 그것은 몇몇 별이 천로를 잃은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엔, 덧없는 나그네 세상이라 귀결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으레 그랬듯, 악사 하나가 있다. 알 수 없는 심적 기류에 붕 떠올랐다가 곤두박질치기를 반복하는 악사 하나가.


시가 와 닿지 않으니,


 악사는 건으로 너털거리며 중얼거렸다. 의미는 알았으되,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꽤나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림의 떡, ()를 찾았으나 집을 수 없는 것이 악사의 현 처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밤하늘은 참으로 고요하고, 그 위에 붕붕 떠다니는 별은 참으로 화려하다. 해가 남기고 간 열기를 받아낸 것 마냥 쟁-하고 울리는 시끄러운 울음이다. 그 울음이 너무나도 눈을 어지럽혀서 악사는 눈을 감고 말았다. 이제 무얼 해야 할까. 대답해 줄 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악사는 넌지시 누군가에게 물어보았다. 역시, 대답해 주는 이는 없다.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가요


 대신에 아이의 장난스런 목소리가 귓전을 스치고 지나가 달팽이관을 울리었다. 아까 전에 보았던 그 아이, 제 눈앞에서 손을 휘휘 젓고선 눈이 마주치자 낭창하게 웃기 시작한다. 왜 웃느냐고 묻자 아이는 별 이유 없다고 대답하였고, 이에 악사가 왜 이유가 없느냐고 묻자 아이는 굳이 이유가 있어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떨떠름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던 악사는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머리를 긁적이고는 고개를 한쪽 방향으로 기울였다.


반드시 행동에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엄마가 말씀해주셨어요.”


하지만 행동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니?”


 원인과 결과, 이분법적 사고의 만연함이 징글징글하게도 악사의 안광(眼光)에서 빛을 발한다. 아이는, 그러한 악사를 바라보다 반문하는 것이다.


그럼 우리 부모님이 우릴 사랑하는 것도 이유가 있어서인가요?”


 인세가 백귀에 물들여져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눅눅하기 그지없는, 퇴락한 자긍심은 무언가에 덮이어져 보이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하나, , .

  박의 경쾌한 소리가 뇌리를 치고, 내면 깊숙이 들어와 의()를 헤집는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기를, 그 누가 의()를 찾아야()의 본성을 세울 수 있다 하였는가. 우습게도 저 자신이 만들어낸 구실이 아니었던가. ()가 언어로, ()로 도달하기 위해선 목적 자체에 이유를 둬서는 안 되는 법이다. 목적을 위해 의()를 짜 맞춰서는 안 되는 것일 텐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그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그건 아니야. 그것에는 이유가 없지


 악사는 고개를 들어 검푸른 하늘 위에 오순도순 올려 놓인 별들을 살피었다. 밝게 빛나는 별의 순전함에,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암()에 휩싸이는 건 아닐까 하는 안쓰러움을 느끼며 한 손에 든 시집을 옴키었다. 구겨지는 표지의 간지러운 소리가 귓가 주변을 선회하고 땅바닥에 곧장 추락하여 서릿발처럼 주위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결국 지금까지도 다시 가를 하지 못하는 건, ()를 찾는 것을 가()를 재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인가.

    

 

6

 지난 과거에 대해선 경의를, 다가올 미래에 대해선 예의를 표해야 한다는 건 과연 무얼 의미하는 바인가. 선행된 사건에 신념을 부여하여, 그 의미를 해석하는 결과를 도출하는 인지적 과정은 때로는 그 자체를 이해할 수 없을 성이다. 다만, 악사가 ()를 찾아야 가를 할 수 있다라 정한 가정 속에 그의 정서와 신념은 들어있지 않았다는 걸 은근히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애국(愛國)을 깨달았으나, 내재화되지 못한 건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이르자면, 저 자신이 내면의 중심에 서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이것 참


 지금의 그를 배태한 무기력감이 또 한 번 엄습하고, 날카로운 이명이 들리기 시작한다. 그 속에도 별은 교교하게 흐드러져있고, 그 색은 밤하늘과 대비된다. 어둠에 침전되어 넋이라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찰나에 그의 현실 감각을 일깨운 건 또 한 번, 아이의 목소리다.


밤하늘 좋아해요? 아까 전부터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던데


 어느새 아이는 악사가 앉아있는 기다란 나무 의자에 따라 앉아 두 손을 그 위에 얹어두고 고개를 젖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다보면, 아무리 예쁜 색을 조화롭게 섞는다 해도 색깔을 자꾸만 더할수록 검정색이 된다는 거 아니?”


  뚱딴지같은 소리. 악사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다시 말을 이었다.


음악도 흰 도화지에다 그림을 그려내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가를 하는 사람이 자신의 내면의 색이 검정이라면 음악이란 흰 것과는 너무 상반되어 색이란 보이지 않는 거지


 자꾸만 곁다리로 새어나가는 한숨은 입김으로 변질되어 공중에서 일렁거리다 점차 희끄무레해져서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는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하며 몸을 좌우로 자꾸만 기울였다. 그러기를 몇 차례 반복하더니 시선을 악사에게 두며 말을 걸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냥.. 그냥 말이다. 내가 무슨 색깔인지 모르겠어서 그래. 나는 음악을 하는 사람인 건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인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소시민인 건지. 시간이 지날수록 란 개념은 점차 많아져만 가는데, 이를 합치면 물감 색처럼 검은색 밖에 나오지 않아서 말이다.”


검은색이 싫으세요?”


기왕이면 저기 별처럼 희면 좋겠지. 한 점 부끄럼 없이 말이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만이 뒤이어 찾아온 정적에 샘 길을 틀고, 그 자리에서 환하게 녹는다. 아이는 제 뒷머리를 말없이 문지르는 것으로 일말의 질문을 대신하였고, 악사는 어깨를 작게 으쓱거리며 한 두어 번 웃음소리를 내보였다. 아이는 악사를 또 다시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힘을 준 목소리로 말한다.


색이 모여서 검정색이 되는 건 물감. 도리어 빛은 색깔이 모일수록 희게 된다고 들었어요. 그럼 얼마든지 흰색이 될 수 있지 않나요?”


 놀람과 위로가 내부 어딘가를 비집고 들어와 철렁-, 심장을 내려앉게 만들었다. 교교하게 흐드러진 바람의 비단길이 주변을 스쳐 지나가고 턱을 치켜세워 결국에는 하늘에 시선을 다시 던지게 하고야 만다. 별 하나하나가 희다고 할 수 있는 건, 주위가 어둡기 때문이라. 이는 양면성이었다. 부끄럼은 부끄럽지 않음이 있으므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이 과연 물감들의 혼색일지, 빛들의 혼색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만약 부끄럼이 검은색이라면 그것에 대비되는 당당함이 제 색을 환히 빛날 것이고, 부끄럼이 흰색이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이 값이 있는 것이다. 부끄럼을 통해 무언가를 깨달았을 것이고, 스러지는 주위의 것들을 조심스레 세어나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셈처럼 경쾌하게 떨어지는 해답은 결코 아니었지만 우선은 이것만으로도 족하다. 전체를 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지만 정작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장은 돌아볼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저의 어두운 면이 들킬까 노심초사했었음이 분명하고 그것은 의()와 결합한다.


잃어버려서는 아니 된다.’


 감각을 이해한다. 머리로 이해하고 감각으로 음을 생동케 한다. 악사는 악기에 느릿하게 손을 옮겨두고선 가락을 틀어 올리었다. 간혹 불협화음이 곡을 에두르긴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하늘에 쏘아 올리는 악사의 곡이다. 흔들리고, 떨리고 있음에도 이를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악사는 악사대로 지난 모든 시간에 서글픈 눈물과 굳건함을 지키려 했던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악사가 짓고 있는 표정은 전연 알 수가 없다. 복잡하고 미묘하여 과연 표정이라 할 수 있는지 조차 확신하기가 어려울 성이다. 지금 현 상황을 곡으로 담는 것조차 어찌 보면 하나의 오만함임을 인정하면서도 악사는 멈추지 않는다. 마침내, 곡이 끝나고 하늘 끝에서 반짝이는 별을 보며 조용히 입을 연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내린 총체다.


대한독립 만세


누군가가 별 사이를 헤다, 별을 헤 보는 날이다.

  • profile
    뻘건눈의토끼 2019.03.16 15:50
    끝내줍니다. 화이팅!
  • profile
    korean 2019.04.30 22:01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욱 분발하시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늘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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