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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8 17:20

인생희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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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희망서

 

 

  깜빡 잠이 들 뻔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글을 남깁니다. 당신께 드릴 글을 말이지요. 당신께서 저를 용서치 않으신다면 이 편지는 유서가 되겠지요. 혹 너그럽게 저를 용서해주신다면 이 글은 오늘의 일기가 되겠군요. 예, 소설이 아닌 일기 말이지요. 저는 무릎을 꿇고 깨끗한 종이에 한 글자씩 글을 쓰고 있습니다. 너무 느릿느릿해서 쓰다, 라기 보단 그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네요. 당신께 보여드릴 글씨를 그리다가 문득 정우를 쳐다봤어요. 그 애에게 감히 눈길조차 주지 못하고 있었는데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아주 찰나의 시간동안 정우를 쳐다봤지요. 실수였습니다. 그 순간 헛구역질이 나왔거든요. 저는 펜을 내려놓고 화장실로 달려갔어요. 변기에 신물을 토해내고 수돗물을 마셨지요. 꼭 며칠 굶은 사람처럼요. 저는 마시던 물로 세수를 한 다음, 부은 눈을 비비고 다시 정우에게 걸어갔어요. 참,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네발로 기어서 다가갔으니 걸어갔다, 라기 보단 기어갔다는 표현이 옳겠군요. 저는 정우에게 기어갔습니다. 아주 천천히 다가갔습니다. 정우를 보니 소름끼치고 무서웠지만, 그래도 정우가 보고 싶었거든요.

  정우는 침대에 아무렇게나 누워있습니다. 누구 남자친구인지 참 잘생겼어요. 과연 당신이 질투하실 만합니다. 당신은 정우를 만들어내시곤 그를 질투하여 데려가신 건가요? 그렇다면 부디 정우를 살려주세요. 정우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제가 이렇게 뼈저리게 슬퍼하고 있으니까요.

 

  저는 제자리로 돌아와서 다시 펜을 잡고 글을 씁니다. 저는 미쳤습니다. 이 문장이 지금 제게 가장 어울리는군요. 제가 미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환상을 보는 거지요. 예, 제가 미친 거지요. 저는 정신병원에 가야합니다. “의사선생님 제가 지금 미쳤어요. 미쳐서 환상을 봅니다. 어떡하지요?” 라고 묻는다면 의사는 제게 무어라도 답해줄까요? 의사가 제 환상을 없애줄까요? 아뇨. 그 어떤 의사도 저를 치료해줄 수 없어요. 저는 미쳐서 정우의 환상을 보는 게 아니라, 정우가 죽은 뒤에 미친 걸요.

  제가 지금 당신께 올릴 글을 쓰다말고 고개 들어 입을 쩍 벌린 채 웃고 있나요? 아까 정우가 저를 보며 웃은 것과 똑같은 표정이겠군요. 아까 당신도 보셨어야해요. 그 애는 정말 미친 사람처럼 웃었거든요. 아니, 미친 사람도 그렇게 웃진 않겠지요. 제가 한 말이 정우를 미친 사람보다 더 미치게 만들었나 봅니다. 제가 그 애에게 “이제 그만 헤어져 버리자.” 라고 말한 게 이토록 큰 벌이 될 줄은 감히 상상도 못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이런 상황을 상상했겠나요? 그런 상상을 하는 게 정상입니까? 제가 과대망상 환자도 아니고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제가 이 새끼더러 죽으라고 했나요? 혼자 제 분에 못 이겨 자살한 걸 저더러 어쩌라는 거죠? 헤어지자고 했다고 자기 배에 스스로 칼을 꽂고 자살하는 게 정상인가요? 헤어지자는 말이 그렇게 자존심 상할 말이던가요? 돌은 건 이 새끼 아닙니까?

 

  용서하세요. 제가 잠시 흥분을 했군요. 당신은 사랑으로써 너그러이 제 무례를 용서해주시겠지요. 제가 흥분을 하는 바람에 글씨가 마구 흩날리고 있네요. 당신께서 알아보실 수 있을지 우려됩니다. 다시 차근차근 설명해드려도 될는지요.

 

  저는 오늘 정우를 제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정우에게 맛있는 음식을 듬뿍 만들어주고, 다운받아 놓은 영화를 함께 볼 생각이었어요. 문제는 여기서 부터였습니다. 제가 다운받은 영화를 컴퓨터로 틀었더니 정우가 그 영화는 이미 극장에서 본 영화라고 말했어요. 제가 정우에게 극장에서 혼자 보았냐고 물었더니 그 녀석이 글쎄 미애와 함께 보았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더군요. 개새끼, 거짓말로라도 혼자 봤다고 하지 여자랑 영화를 봤다니요. 평소에도 정우는 여자애들과 곧잘 어울려 놀곤 했습니다. 저는 그게 불안하고 질투가 났습니다. 이번에도 당연히 화가 나고 질투가 났지요. 그래서 정우와 또 싸웠어요. 어제도 싸웠는데 오늘도 또 싸웠습니다. 서로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싸웠지요. 싸울 때 저는 정우의 찌푸린 눈썹이 아주 잘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각상처럼 생겨서는 소리 지르는 입술은 어쩜 그리 앵두 같은지요. 이 문장을 당신이 아닌 어느 시인이 읽으면 조각이니 앵두니 정말 진부해서 못 봐주겠다며 글 같은 건 쓰지 말라고 저를 나무라겠지요. 하지만 사실인걸요? 그 애는 정말 조각상 같고 앵두 같습니다. 제가 콩깍지가 단단히 씐 게지요.

  저는 정우를 정말 사랑했습니다. 지금도 사랑하고요. 저는 아직 어려서 사랑이란 감정을 제대로 모르지만, 글쎄요 보면 설레고, 자꾸 웃음만 나오고 이것도 사랑이 아닌가요? 당신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요? 부모자식간의 사랑과 같은 건가요? 당신께서 베푸시는 사랑은 제 어린 감정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이겠지요. 저는 그렇게 믿고 당신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저는 화를 내는 정우를 보며 자꾸만 웃음이 나왔습니다. 저도 참 이상하지요. 그냥 못 이기는 척 뽀뽀 한 번 받고 용서해줄까,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마음을 고쳤습니다. 이번만큼은 절대 녀석에서 휘둘려선 안 되겠다고요. 그래서 말해버렸습니다. 이제 그만 헤어져 버리자고요. 물론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분명 홧김에 한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헤어지자고 말하면 정우가 미안하다고 울면서 매달릴 줄 알았어요. 그러길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과는 달리 정우는 화내던 얼굴을 느슨하게 풀고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오열하듯 웃었습니다. 입을 크게 벌리고 규칙적인 소리로 크게 웃었지요. 그 바람에 치아 스물여덟 개가 죄다 보였습니다.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 우는 것 같기도 하고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더군요. 사람이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나요? 정우는 미친 것처럼 웃었어요. 아니, 제가 말씀드렸지요? 미친 사람도 그렇게 웃진 않겠다고요. 그때 저는 소름이 돋았고 그만 울 뻔 했습니다. 저는 눈물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정우가 웃는 게 너무 무서웠기에 그만 울 뻔 했어요. 한때는 그 웃음이 귀엽게 보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린이 만화에서 본 듯한 아기 오리 같은 웃음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허나 그 무서운 웃음을 보고 콩깍지가 얇게 한 겹 벗겨지니, 이토준지 공포 만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그런 기이한 웃음으로 보였습니다. 저는 그런 정우가 무서웠습니다. 녀석은 한참을 이상하게 웃더니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습니다.

  “네가 뭔데 감히 날 차니? 기껏 만나줬더니 그딴 소리나 해? 내가 너 죽여 버릴 거야. 널 못 죽이면 내가 죽을 거야. 그래 여기 네 침대에서 배 찌르고 죽을 거야. 그럼 넌 자려고 침대에 누울 때마다 내가 생각나서 평생 괴롭겠지? 밤마다 내 환영이 보일 테고, 잠도 못자고, 밤새 죄책감에 시달리고 내 생각이 나서 슬프고 괴롭겠지? 아니 오히려 좋아하려나? 죽이고 싶었는데 제 손으로 직접 죽어줘서 기쁘고 행복하겠네? 응? 아무 말이나 좀 해봐.” 라고 말이지요.

  저는 그때 한숨을 짧게 쉬고 담배를 피우러 밖에 나갔습니다. 워낙 자존심이 센 녀석이라 제 말에 충격을 많이 받았겠지요. 그때까지 저는 ‘얘가 못하는 말이 없어’ 라고 생각했지 녀석이 죽어버릴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담배 세 대를 피우고 다시 들어와보니 글쎄 정우가 부엌에서 가져왔는지 칼로 제 배를 찌른 채 침대에 누워있더군요.

  저는 상황파악이 되자마자 놀라서 허둥지둥 휴대전화를 들고 구급차를 부르려고 했습니다. 온몸에 축축하게 땀이 차고 추운 것도 아닌데 입술이 파래졌습니다. 거울을 본 건 아니지만 본능으로 느낄 수 있었지요. 아 지금 내가 새파래졌겠구나, 하고요. 식은 손으로 일일구 버튼을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살을 하려거든 손목을 긋거나 목을 매달지 제 배를 직접 찌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요. 고로 구급차 아저씨들은 저를 수상하게 여길 테고, 경찰 아저씨들도 저를 수상하게 여기겠지요. 항상 집에만 계시는 옆집 할머니는 저희 쪽에서 크게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며 진술하겠지요. 경찰아저씨들은 정우의 친구들에게 저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겠지요. 그러면 정우의 친구들은 저 못된 계집애가 평소에도 정우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고, 죽이네 살리네 그러면서 싸우더니 결국 우리 정우를, 이러면서 말끝을 흐리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기나 하겠지요. 정우의 친구들은 평소 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학교에는 금방 소문이 날겁니다. 학교는 워낙 말이 많고 소문이 빠른 곳이거든요. 저는 순식간에 남자친구를 죽인 년이 될 테지요. 정우가 자기 혼자 죽었다는 제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테지요. 저는 안 그래도 정우가 죽어 괴로운데 사랑하는 사람을 죽였다는 오해까지 받아 억울할 겁니다. 그럼 저는 자퇴를 하겠지요. 정우의 배를 찌른 칼에서는 제 지문은 물론이고, 정우의 지문도 묻었겠지만 그래도 저는 의심을 받겠지요. 정우의 지문은 칼을 든 저를 제지하려고 그 애가 칼을 잡는 바람에 묻은 거라고 경찰들이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그렇게 사람들의 온갖 욕설과 눈총에 시달리면서 우울한 삶을 살겠지요. 아니 그전에 저는 감옥에 들어갈까요?

  저는요, 공부를 잘하던 아이였습니다. 착한 아이는 아니었지만, 공부를 잘하고 똑똑해서 어른들의 기대를 받는 그런 아이였어요. 저는 아주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간 후 대기업에 취직하는 게 가장 성공한 인생이겠구나, 하고 말이지요. 언제나 그런 삶을 꿈꾸었고 친구들이 잘 때 공부를 하고, 걸으면서도 영어단어를 외우던 그런 아이였습니다. 제 노력에 당신이 감동을 받으셨나요? 당신의 보살핌 덕에 저는 아주 좋은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엘리트들만 모이는 대학교 말이지요. 생각해보면 당신의 도움이 아닌 제 노력의 결실이지만, 당신을 믿고 있는 지금 그 모든 영광을 당신 덕으로 돌려야겠지요. 아무튼 저는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더욱 노력했어요. 학점관리며, 봉사활동이며, 토익준비며 고등학생 때보다 열심히 스펙이란 걸 쌓아올렸지요. 저는요, 참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면 앞길이 아주 창창할 줄만 알았어요. 그런데 황당하게도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요. 제 인생은 이대로 끝난 걸까요? 코미디 같습니다.

  저는 일단 침착하게 숨을 쉰 뒤 정우의 목덜미에 제 검지와 중지를 갖다 댔습니다. 정우는 죽은 게 아니라 그저 잠이 들거나 기절을 한 것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맥박이 뛰지 않더군요. 심장이 멎어있습니다. 심장이 멎어 있어도 살 수 있나요? 아뇨. 정우는 죽은 겁니다. 녀석은 이미 죽었습니다. 병원에 가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걸 깨닫곤 주저앉아 오열했습니다. 정우가 죽었습니다. 나쁜 새끼.

 

 침착해야겠지요. 그렇게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일단 바닥에 흐른 피를 닦았습니다. 수건으로 닦을까 생각했지만, 저는 자취중인 학생이라 수건이 몇 개 없습니다. 게다가 수건으로 닦으면 빨아도 잘 안 지워지니까 집들이 때 받은 두루마리 휴지로 정성껏 피를 닦았습니다. 피 묻은 침대커버는 내다 버려야겠지요. 정우는 한강에 빠뜨려야 할까요? 아니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인데 어디에 잘 묻어주어야겠지요. 조촐하게 장례도 지내야지요. 정우를 옮길 때 어디에 넣어서 옮기지요? 여행용 가방을 사와야 할까요? 사람들에겐 정우가 실종된 것 같다고 말해야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지요? 정우의 배에 꽂힌 칼은 뽑아야할까요? 저걸로 배를 찌르다니 우리 정우 얼마나 아팠을까요? 저는 울었습니다. 정우가 얼마나 아팠을지 생각하니 가여워서 울었습니다. 아니, 오열했습니다. 아니, 오열보다 더 강한 감정으로 울부짖었습니다.

  정우의 부모님과 정우의 친구들에겐 뭐라고 설명하지요? 정우가 제 분에 못 이겨 스스로 배를 찔렀다는 말을 과연 누가 믿어줄까요? 만에 하나 믿어준다고 해도 왜 그걸 말리지 못했냐고 제게 따지겠지요. 그럼 저는 사실대로 말해야지요. 제가 담배를 피우러 나간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고요. 그러면 담배를 피우는 저를 평소 못마땅해 하셨던 정우의 부모님은 여자가 담배를 피우니까 이렇게 된 거라며 저를 두들겨 때리시곤 통곡하시겠지요. 정우의 부모님이 우실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지만, 사실 제 잘못은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정우 잘못이지요.

  그렇지요. 정우 잘못이지 제 잘못은 아닙니다. 저는 단지 녀석에서 헤어지자는 말만 던진걸요. 그리고 제가 헤어지자고 말하면 정우가 깜짝 놀라 제게 사과하고, 매달리고, 애원하고, 울 것이라 생각했지요. 설마 녀석이 미친 듯이 웃더니 제 손으로 죽을 줄 알았겠나요. 저는 정우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건 제 잘못이 아니겠지요.

  예. 오해받을 게 두려워 정우가 죽었다는 걸 숨기려하다니 저란 사람도 참 이기적이네요. 겁 많고 나약합니다. 이런 제가 싫습니다. 가슴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정우가 찌른 게 자신의 배가 아니라 제 가슴인가요? 대체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당신이 만드신 세상엔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군요.

 

  이제 이 이상한 놀이는 끝내고 싶습니다. 누가 시작한 장난인진 몰라도 장난이 너무 지나치네요. 재미없군요. 이건 현실이 아니겠지요. 이건 분명 꿈입니다. 그렇지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은 꿈이었다더라. 혹은 누군가의 상상이었다더라 하는 이야기 많잖아요. 그래요 이건 영화입니다. 저는 연기자고요 정우 역시 연기자예요. 정우는 얼굴도 영화배우처럼 생겼잖아요. 그렇지요 감독님? 이제 다음 씬은 뭐죠? 그런데 어디 계신거에요 감독님. 감독님, 정우 좀 살려주세요. 시나리오 좀 수정해주세요. 제발 주인공을 살려주세요.

  아무 대답이 없군요. 사실 알고 있었어요. 이건 영화가 아니라 홈쇼핑 아이디어 상품이란 걸요. 누워있는 남자는 정우를 연기하는 모델일 뿐이지요. 그렇지요? 저는 애인이 눈앞에서 죽는 걸 체험함으로써 사랑을 더욱 불태울 수 있다는 신개념 아이디어 상품을 구매했고 이 남자는 단지 홈쇼핑 모델일 뿐인 거죠. 저 죽음은 연기겠지요. 어떤가요? 저 연기. 과연 완벽한 연기입니다. 과연. 아뇨 연기가 아닙니다. 맥박이 뛰지 않는걸요. 남자는 모델이 아닌 정우가 확실합니다.

  아하, 이건 소설의 한 장면이군요. 영화도 있지 않은가요? 어떤 남자가 잘 살고 있었는데 실은 그 남자는 살아있는 존재가 아닌 한 소설가가 창작해낸 인물이었다는 영화. 그 영화처럼 지금 이 부분은 소설의 한 문단이에요. 두 문단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어떤 소설가가 창작해낸 인물입니다. 그 삼류 작가가 이런 소설을 썼고 안타깝게도 제가 그 소설 속 주인공이 돼버린거지요.

 

  저는 지금 펑펑 울고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아니군요. 이게 현실이지요. 정우가 제 앞에서 죽어있는 것. 이게 실제상황이겠지요. 저는 다시 한 번 정우와 소리 지르며 싸우고 싶어요. 그럼 정말 행복할 텐데요. 행복한 마음으로 싸울 텐데요. 눈물에 흠뻑 젖는 바람에 당신께 드릴 편지가 엉망이 되었군요. 용서하세요.

  하느님, 보이시나요? 저는 지금 울고 있습니다. 한 번만 저를 내려봐주세요. 당신은 존재하시지요. 하느님이든 다른 어떤 신이든 상관없습니다. 사실 저는 신을 믿지 않았어요. 당신을 불신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세요. 저를 용서하신다면 부디 정우를 살려주세요. 저흰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정우는 당신께서 낳으셨지요. 정우를 낳으신 부모님을, 그 부모님의 부모님을, 그 부모님의 부모님의 부모님을, 더 거슬러 올라가 만물을 낳으신 게 당신이 아니시던가요? 당신은 분명 존재하시겠지요? 그렇다면 부디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겁 많고 작고 나약한 당신의 딸의 기도를 들어주세요. 정우가 살아있던 2시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주셔도 좋고, 이 모든 일을 하룻밤의 나쁜 꿈으로 만들어주셔도 좋아요. 그러면 저는 매일 식사 전 기도를 드리고, 매일 식사 후 기도를 드리고, 매일 무릎을 꿇고 묵주기도를 하며, 경건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있는 모든 것에 사랑과 존경을 베풀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꺼이 봉사를 하며,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자신이 있습니다.

  당신은 대체 어디에 계신 거죠? 목소리만이라도 들려주세요. 제발 제 앞에 나타나 주세요. 당신의 독실한 신자가 이렇게 고통 받고 있으니 제발 도와주세요. 그러면 매일 당신을 위해 기도를 드릴게요. 착하게 살게요. 그러니 제발 정우를 살려주세요. 이건 시험이지요? 이름 모를 나의 신이, 당신께서 만드신 일종의 테스트인가요? 이런 식으로 신자를 늘리시는 거군요. 사람은 극한의 상황에 빠지면 종교를 믿게 되니까요.

  용서해주십시오. 부디 모든 걸 용서해주세요. 제가 잘못했던 모든 것을요. 혹 제가 전생에 지은 죄가 있다면 너그러이 용서해주세요. 제게 사랑을 베풀어 주세요. 당신은 분명 존재하시겠지요. 저는 느낄 수 있어요. 만약 당신이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으신다면 세상은 너무나 외로울 것만 같아요. 그럼 세상은 무척 춥고 외로운 곳이겠지요. 당신이 계시기에 세상에 빛이 있는 게 아닌가요?

  온몸이 떨려옵니다. 저는 너무 무섭고 두렵습니다. 아니 무섭고 두렵다는 단어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무섭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설렘 따위의 감정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사랑인 것처럼. 제가 지금 느끼는 두려움 역시 두려움이란 감정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감정이지요. 당신은 제 감정을 이해하시지요? 제 감정이 당신께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글씨체가 지렁이처럼 변한 건 용서해주세요. 눈물에 번진 글씨도 용서해주세요. 저는 정우를 죽이지 않았지만, 정우가 죽은 게 저의 죄라면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드리겠습니다. 제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정우를 살려주실 수 없다면, 저를 살려주세요. 당신의 딸이 이렇게 고통 받고 있습니다. 아, 졸음이 쏟아지네요. 이런 상황에서도 제가 졸 수 있다니. 잠을 잘 수 있다니. 이것 또한 당신의 뜻이겠지요. 그럼 저는 펜을 내려놓고 기꺼이 당신의 뜻에 따라야겠지요.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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