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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28 14:39

찰나의 모든,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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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모든, 그 순간


  푸른곰팡이가 벽을 타고 올랐지만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개처럼 혀를 내밀고 케케묵은 반 지하 방 한 칸에 퍼질러 누워 있는 것뿐이었다. 쪽창을 찌르는 날카로운 햇볕. 아스팔트에서나 피어오를 법한 아지랑이가 주인의 허락 없이 배 위에 올라탔다. 하루 종일 틀어 놓은 선풍기 뒤통수에도 후끈한 열기가 늘러 붙었다. 그래도 나는 선풍기를 죽이지 않았다. 죽여 버리면 줄줄 흐르는 땀과 함께 나도 주르륵 흘러버릴 것 같았다.

  토악질 하듯 질러대는 매미소리를 묻을 만한 소나기가 간절했다. 하루 일당 벌어먹을 수 없다고 해도 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은, 나도 사람이었으니까 그랬다. 지하를 가득 메울 정도로, 삼 층 복합 주택을 삼켜버릴 정도로, 해저 도시가 될 만큼 잠겨버릴 정도로 비가 쏟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때. 옷을 발가벗고 자유롭게 헤엄치고 다녔으면, 하고 간절히 기도했던 때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 날, 비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간절히 바랐건만 나는 비를 맞이하는 대신 벽돌을 짊어지고 흉물스런 건물을 올라야 했다. 벽돌을 날라야 그날 저녁은 배가 고프지 않았다. 이런 날은 아주 오래 전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벽돌더미를 나르는 일은 힘줄이 끊어질 것만 같은 많은 힘을 요구했지만 그 끝엔 끊을 수 없는 달큼한 맛이 있었다. 단순히 건물을 짓는다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건물은 나완 전혀 상관이 없었다. 달콤 씁쓸한 달고나 같은, 그래. 벽돌만한 돈뭉치가 전부였다.

오늘도 그런 여러 날과 똑같을 줄 알았다. 여느 때처럼 너무 뜨거워서 눈을 뜰 수 없었던 날의 연속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오늘은 여러 날과는 조금 달랐다. 그건, 한 마리의 생선이 된 것 마냥 공중에서 팔딱이는 나의 몸뚱이가 말해줬다.

  “엇.”

  순식간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밀쳤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를 잡아볼 시간도 없이 내 외마디 소리와 함께 떨어져버렸다.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발뒤축에 벽돌만 없었다면 다시 일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곧 일말의 후회는 증발하는 수증기처럼 훅 달아나버렸다. 이미 몸은 기울고 있었다. 후회를 하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몸의 각도가 틀어질수록 시간은 슬로우비디오처럼 느려졌다. 이정도로 느리게 흐르는 시간이라면, 누가 날 밀었는지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보지 않았다. 누군지 대충은 알 것 같았기에,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나의 시간은 점점 더 느려졌다. 위에 뭐가 떨어지는지 알길 없는 아저씨들이 어깨에 나무를 이고 걷고 있었다. 층 사이사이 나처럼 벽돌을 이고 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돈을 모아 사업을 하겠다던 절친한 인부 A 아저씨가 나를 발견했는지 눈이 점점 커졌다.

  ‘비가 왔으면 좋겠다.’

  나는 그 찰나마저 비를 바랐다. 내가 그토록 바랐을 때 하늘이 비를 쏟지 않은 이유는 이 순간을 위해 아껴뒀던 거라고. 퐁당 다이빙하듯, 홍수같이 불어난 빗물 속에 나를 품기 위해 내리지 않았던 거라고. 마치 마지막 한 방을 위해 필살기를 남겨둔 것처럼 지켜봐왔던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비.’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내 인생의 여남은 1초에 소원을 덧댔다.


  뒤통수가 볼록 튀어나온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치지직 거릴 때나 나오던, 그런 화면이 보인다. 아무 소리도 없이, 흔들림도 없이 고요하기만한 화면. 죽은 건가, 싶지만 계속 화면을 본다. 다시 살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한줌 쥔다. 볼수록 눈은 뻐근해졌지만 멈출 순 없다. 눈에 초점을 잃을 때 즈음, 갑자기 흑백 화면에 동그란 풍선 같은 게 비춰졌다.

  내가 아주 아주 어릴 적, 그러니까 저건, 내가 코딱지만큼 작은 콩알에서 겨우 눈 코 입이 생겨났을 때였다. 나는 동그란 집에서 보푸라기를 덮고 웅크리고 있었다. 따로 밥을 챙겨먹지도, 심심해하지도 않았다. 다만 궁금해 했다. 바깥세상은 어떤 곳일까? 손과 발은 없었는데도 나는 연신 몸을 비틀댔다.

  콩알에서 자라 내게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이 생겨났을 때, 나는 내 집을 미적미적 밀쳐내기 시작했다. 몸을 꿈틀대기 시작한 건, 아무도 내게 세상의 얘기를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순전히 순수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몸부림이었다. 집 밖에서 들리는 엄마의 비명은 그 궁금증을 더욱 더 키웠다.

  하지만 궁금증은 얼마 가지 않았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어쩌다 한 번씩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집에 지진이 났다. 그럴 때면 벽에 붙은 살점들이 먼지처럼 퍼져 시야를 가렸다. 그때부터였다. 나의 움직임은 생명에 위협을 느낀 처절한 발길질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만 좀 하란 말이야! 집이 무너지겠어! 내가 괜히 무서워 벽을 꼬집으면 밖에서 엄마의 신음이 희미하게 들렸다. 그러고 나면 주변이 잠잠해졌다. 그때서야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그렇게 엄마를 밟고 차내 미끄러지듯 나온 세상에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빛’이라는 것과 마주했다. 그때서야 나는 엄마가 왜 그토록 비명을 질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몹시 짜증이 났다. 나는 북받쳐 오르는 설움과 화를 토했다.

  내가 정신없이 울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나를 엄마의 곁에 뉘였다. 엄마의 빠른 심장소리가 귓가에 전해져 불안한 마음이 조금은 진정이 됐지만 역시 빛줄기에 대한 짜증까지는 덮어버릴 수가 없었나보다. 나는 여전히 목청껏 울어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 환한 빛이 있었지만 그건 어두웠던 때보다 더 무서웠다. 고막에 물이 차 주변의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도 답답하기만 했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예고도 없이 누군가는 내 배 언저리를 가위로 잘랐다.

  “산모 맥박이…….”

  어떤 가시 같은 목소리가 내 귓구멍을 찔렀다. 엄마의 심장소리가 점점 희미해지고 약해져 가는 것 같았다. 나는 따뜻한 엄마의 품에서 떼어졌다. 그것이 엄마와의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 나는 어떤 낯선 집에 들어가 살게 됐다. 그곳에 지내는 사이 어느덧 나는 눈도 뜰 수 있게 됐고, 몸을 움직일 힘도 생겼다. 눈가가 자글자글한 사람에게서 길러졌는데, 그녀는 나의 할머니라고 했다. 할머니는 날 보며 ‘태풍이’라고 불렀다. 태풍처럼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던가? 아무튼 그렇게 내 이름은 태풍이 됐다.

  새로운 집은 곧 익숙해졌다. 누군가에게 의존해야만 했던 나는 이제 도움 없이도 혼자 일어나는 법을 터득했다. 처음 일어났을 때,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고 싶었다. 빨간 밥통을 짚고 일어나서였을까. 밥통만이 내게 축하한다며 연신 통통거릴 뿐이었다. 밥솥은 흥분한 나머지 곧바로 기쁨의 콧김을 뿜을 것만 같았다. 그런 밥통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밥통보다 할머니에게 잘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밥통을 짚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할머니 대신 대청마루 건넛방에 아빠라는 남자가 있기는 했다. 아빠는 초록색 병을 들이켰다. 마른 오징어를 뜯어 입에 잘강잘강 씹으면서.

  “뭘 봐, 개새끼야.”

  아빠는 나를 개새끼라고 불렀다. 그렇게 보면 내 이름이 꼭 태풍인 것만은 아닌 듯했다. 때맞춰 할머니가 소쿠리를 이고 방 안으로 들어오셨다.

  “에구마니!”

  할머니는 뛰어와 끓는 소리가 나는 밥통에게서 나를 떼어냈다.

  “이눔아, 니 새끼 안보이냐? 허구헌 날 술 쳐 묵지 말구 니 새끼줌 챙겨라, 이눔어!”

  아빠는 할머니의 호통에도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아빠의 눈빛에는 그 어떤 온도도 담겨있지 않았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저 반쯤 풀린 눈으로 나를 게슴츠레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내가 어설프게 스스로 젓가락질을 할 수 있게 될 즈음, 누군가에게 또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야, 깜둥!”

  다른 애들에 비해 키도 짜리몽땅했고, 몸집도 왜소했기 때문일까? 초등학교란 곳은 서열이 매겨져 있었다. 피부가 희고 예쁜 친구들일수록 더 잘난 체하고 큰소리쳤다. 예쁘다기보다, 멋지게 겉치레한 애들이라고 말하는 게 맞겠다. 난 깔끔한 새 옷을 입은 것도, 체격이 큰 편도 아니었다. 애들의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난 애들과 달리 눈썹도 진하고, 속눈썹도 길고, 쌍꺼풀도 있고, 눈도 컸다. 하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피부는 새까맣기만 했고, 머리는 곱실거리기만 했다.

  나는 실내화가방을 튕기며 깜둥이 소리를 처음 들었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부터 집에까지 걸어왔다. 깜둥이라는 이름이 은근히 거슬렸다.

  “할무니, 깜둥이가 무슨 뜻인겨?”

  내 물음에 할머니의 미간에 주름이 진하게 들어갔다. 눈썹 끝은 아래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멀뚱멀뚱 서있는 나를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안았다. 내 좁은 등을 쓸어내리면서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 날 이후부터 할머니는 폐지를 주우러 나갔다오면 학용품을 들고 오셨다. 새것은 아니었지만 할머니는 그것으로라도 열심히 공부하라고 했다. 변호사나 판사가 되면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지 못할 거라고 했다.

  “태풍이가 이번에 우리 반에서 1등을 했어요.”

  결국 악착같이 공부해 반에서 1등을 했다. 담임선생님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셨지만 주변 애들의 반응은 심심했다. 난 그저 1등한 깜둥이였다. 공부는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 놀림은 계속됐고, 그 수법은 날이 갈수록 악랄해졌다. 복도를 걷다 넘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급기야는 걸렛물까지 뒤집어썼다.

  “넌 맨날 똥물로 씻지?”

  애들은 낄낄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손가락질 하는 대신 눈을 굴리며 서로 귓속말을 해댔다. 머리카락 끝에 뚝뚝 떨어지는 오물을 보면서도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화를 내지도 울지도 않았다. 나는 깜둥이니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 즈음부터였다. 축축한 흙과 시원한 풀냄새를 좋아했지만 밖에 나다니지 않게 된 때가. 책이 좋다는 명분으로 밥풀처럼 교실에만 눌러 붙게 된 때가. 해가 찌는 날 조금이라도 돌아다녔다간 더 새까만 깜둥이가 될 것 같았으므로. 나는 책을 사랑했다. 아니, 사랑해야만 했다.


  또다시 화면이 치지직 거린다. 아무 소리도 없는 고요함이 흐른다. 나는 멍청하게 앉아서 화면을 바라보다 바뀐 화면에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주변은 시꺼멓고,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저 치지직 거리는 텔레비전 화면만 있을 뿐. 나는 무릎을 모았다. 그리고 생각한다. 방금 전 나왔던 건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이었다. 다시는 꺼내보고 싶지 않았던 과거. 덮어버리고 싶었던 기억. 이렇게 다시 내 앞에 나타난 이유가 뭔지 궁금해졌다.

  ‘죽을 때 생전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더니, 이건가? 그럼 난 죽은 건가?’

  깊은 생각에 빠질 즈음, 화면에 또 한 번 불빛이 들어왔다. 이번엔 흑백 화면과 다른 무지갯빛이었다. 무지갯빛 화면이 지나가자 붉은 지붕으로 떨어지는 소나기가 화면에 비췄다.


  기억난다. 나의 열다섯 번째의 생일날이자 아빠에게 처음 맞았던 날. 그날은 비가 왔었다. 아빠는 내가 비를 맞건 말건 상관없이 그날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늘 앉던 그 자리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쥐포를 잘근잘근 씹으면서.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뭐라고 씨부렁씨부렁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씨부럴 할망구! 만날 뭐 이런 걸 주 담어 와!”

  지붕을 뚫을 듯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 사이로 소쿠리가 엎어지는 소리가 얕게 들려왔다. 방문을 열자 바닥에 나뒹구는 알밤을 주워 담는 할머니가 보였다. 아빠는 비틀거리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 할머니께 절벅절벅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맨발로 뛰어가 할머니를 감쌌다. 아빠는 삽등으로 내 등을 때렸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할머니를 감싸 안았다.

  “아이구우, 아부지야. 태풍이 죽는다, 태풍이이!”

  할머니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아빠는 들고 있던 삽을 내팽겨 버리고 술을 들이켰다. 술병의 술을 전부 들이켜자 아빠는 비틀거리며 집을 나갔다. 술을 사러 나간 것이다. 할머니는 아빠가 나가는 것을 보고는 조심스럽게 나를 일으켰다. 동네 형한테서 받아온 교복이 찢어졌다.

  “교복 어떡혀?”

  “지금 교복이 문제냐? 언능 위로 올라와봐라. 약을 발러야 흉이 안 져.”

  할머니는 내 티셔츠를 돌돌 말아 올리더니 우짤끄나, 하셨다. 나는 말없이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교에서 친구들은 제 생일이라고 케이크도 나눠먹고 선물도 받고 그러던데. 반면 나는 집에 와서 이유 없이 맞기나 했다. 괜히 서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할머니를 등지고 방에 들어갔다. 문을 걸어 잠그고 발갛게 달아오른 등을 둥그렇게 말았다.

  할머니는 방문 앞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셨다.

  “아가, 태풍아 밥 묵어야제.”

  “안 먹어요. 밥맛없어요.”

  “아가, 태풍아. 그려도 니 생일인디…….”

  할머니의 얕은 목소리가 가시처럼 등을 파고들었다. 등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이런 내게도 잡고 싶은 희망은 있었다. 열일곱 살이 되던 해였다. 그날은 고등학교 입학식을 치르고 난 다음날이었다. 삼월의 추운 바람을 맞으며 교실에 도착했다. 눈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그날은 진눈깨비가 쏟아졌었다. 교실에서는 난로에 부은 석유냄새가 진동했고, 입학식 이후 첫 등교라는 설렘에 다들 긴장하고 있었던 시간이었다.

  “임의배정이다. 짝꿍에 불만가지지 말고 한 학기동안 잘 지내라.”

  선생님의 무뚝뚝한 말투에 긴장을 바짝 한 채로 쭈뼛쭈뼛 옆을 보았다. 무슨 우연인지, 내 옆에 앉은 짝꿍은 정말 예뻤다.

  “눈이 안 올 거라더니, 텔레비전은 뻥쟁이다. 그렇지?”

  그 애는 흰 이를 드러내며 빙긋 웃어보였다. 웃을 때 눈이 초승달처럼 움푹 들어갔다. 그 애가 말할 때, 입에서 딸기향이 났다. 새로 맞춘 빡빡한 교복 와이셔츠 사이로 그 애의 새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버리고 말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네 형이 준 헐렁한 교복 와이셔츠 소매를 괜히 한 번 만졌다.

  이름은 숙희였다. 숙희는 내 첫 짝꿍이었지만 제대로 말을 걸어본 적은 없었다. 숙희는 친절했다. 나를 깜둥이라고 놀리는 애들과 달리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나를 더럽다 놀리지 않은 애였다. 그 착한 마음씨 덕분인지 숙희는 반에서 인기가 많았다. 특히 남자애들에게 고백도 많이 받았다. 반면 나는 심부름이나 했고 까딱 잘못하면 두들겨 맞기도 했다. 옆 반에 내 중학교 동창이 있었고, 틈 만나면 난 옆 반으로 불려갔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었다.

  하얘지고 싶었다. 그럼 나도 숙희처럼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애들도 더는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내가 하야면 숙희가 나를 좋아해 줄 것 같았다. 숙희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나른한 주말. 둥그런 고무대야에 비누와 때밀이를 잡아넣었다. 붉은 벽돌이 무너져 콘크리트가 그대로 드러난 동네 목욕탕엘 들어갔다. 웃통을 벗고 큰 거울을 쳐다보았다. 목욕탕 내 이리저리 지나다니는 아저씨들보다도 더 까매 보였다. 뜨거운 욕탕에 풍풍 몸을 담가 오랜 시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쯤, 밖으로 물을 쏟아내며 천천히 일어섰다. 살짝 현기증이 났지만, 하얘질 수 있다는 기대에 긴 콧바람을 내뿜었다. 목욕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 때만 밀었다. 아마도 세 시간은 훌쩍 넘었을 것이다. 얼마나 벗겨냈던지, 살갗이 새빨개졌다. 나는 때밀이 질을 계속했다.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올 만큼. 팔뚝이, 손목이 욱신거려서 더 이상 때를 밀지 못할 때까지. 아저씨들을 보았다가 다시 내 살을 봤다. 그렇게 벗겨냈건만, 피부는 여전히 시꺼멨다. 결국 난 하얘지지 않았다.

  목욕탕이 문 닫을 때 쯤, 나는 고무대야를 품에 안고 밖으로 나왔다. 손바닥이 짜글짜글해져 있었다. 그것은 발바닥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축 늘어진 물오징어처럼 흐물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삼선 슬리퍼를 찍찍 끌고 동네 어귀로 나가자 푸른 논두렁이 펼쳐졌다. 나는 괜히 즐거운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논둑 위를 비틀비틀 걸어갔다. 굳이 두 팔을 벌리지 않아도 중심은 잘 잡았지만 괜히 똥 폼 잡고 팔을 좌우로 벌렸다. 흥얼거리던 콧노래가 흔들렸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다시 머리에 올려둔 고무대야를 잡았다.

  다음 날, 나는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 머리맡에 둔 거울을 찾았다. 이마며 콧등이며 기름이 짜르르 흐르는 것이 산유국이 따로 없었다. 나는 바로 수건과 손거울을 챙겨들고 마당으로 뛰쳐나왔다. 대야에 수돗물을 틀어 놓고, 물도 묻히지 않은 손으로 뻑뻑하게 비누칠을 했다. 온 얼굴에 하얗게 비누칠을 하고, 거울을 한 번 보곤 얼굴에 다시 비누를 문댔다. 얼굴 구석구석 박박 문댄 뒤 물로 비누가 묻은 얼굴을 닦아냈다. 볼에서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났다. 나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수건으로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거울을 보니 왠지 얼굴이 좀 더 뽀얘진 느낌이 들었다. 나는 살짝 이를 드러내며 웃는 연습을 했다. 오늘따라 이도 반짝반짝 하얘 보였다. 왠지 오늘은 예감이 좋았다.

  하지만 그 예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숙희에게 잘 보일 수 있다는 자신감은 옆 반의 동창 애들이 들이닥치면서부터 말끔하게 사라져버렸다. 애들은 내 머리에 우유를 부었고, 우유갑을 내게 집어 던졌다. 동그랗게 눈을 뜬 숙희는 그저 말없이 내 옆자리를 나왔다. 우유가 튀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야, 우유로 세수허면 얼굴이 하얘진다는디?”

  나는 옆 반 애를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나를 에워싼 우리 반 애들이 보였다. 모두 날 보며 깔깔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날 보며 비웃고 있는 숙희가 보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흰 우유가 뚝뚝 떨어졌다. 분명 오늘은 예감이 좋았는데. 숙희가 내게 조금은 관심을 가져줄 것 같은 날이었는데. 나는 우유에 푹 젖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들이 우유 비린내가 난다고 코를 틀어막았다.

  운동장 개수대에서 머리를 씻었다. 분명 아침에 비누냄새가 진하게 났었다. 숙희의 입술에서 딸기향기가 났던 것처럼, 내 피부에도 오이비누 향기가 풍겼었다. 하지만 이제 내 몸엔 찐득한 우유비린내만 남았다. 그 사이 교정에 댕댕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낄낄거리며 웃는 숙희의 웃음소리가 종소리 사이로 야트막히 들리는 것 같았다.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한 방울이 흐르자 두 방울은 쉬워졌다.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마치 예정에도 없던 진눈깨비가 쏟아진 첫 등교, 그 날처럼.

  숙희가 미웠지만 그래도 이해했다. 나같이 시꺼멓고 못생긴 애를 도왔다간 숙희도 왕따를 당했을 테니까. 날 돕지 않은 것은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똑같이 왕따를 당할까봐 무서워서 그런 거라고. 그래도 날 조금은 걱정할거라고. 그런 생각들이 깊어질수록 숙희가 간절했다. 하지만 숙희는 그러지 않았다. 학기가 지나고, 자리가 바뀌자 숙희는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예 처음부터 몰랐던 사이인 듯이.

  그렇게 잠시나마 꿈꿨던 봄날도 스치듯 지나갔다. 봄이 짧은 것처럼 아픈 열일곱에게 잠깐의 볕은 허락되지 않았다.

엉성했던 젓가락질이 익숙해지고, 나는 또 키가 컸다. 백 육십에서 백 칠십이 되고, 깡말랐던 몸집에 살도 조금 붙었다. 할머니의 소쿠리를 들 만한 힘도 생겼고, 할머니보다 글자도 빠르게 읽었다. 하지만 내게 찜찜한 구석이 하나 있었다. 자랄수록 나는 달라졌다. 할머니도 아빠도 그 누구도 닮지 않은. 오히려 날이 갈수록 새까매질 뿐이었다.

  "니가 왜 시꺼먼지 아냐?"

  여전히 술에 빠진 아빠는 눈을 부라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내가 시꺼먼 이유를 그래도 대충은 알 것 같았으니까.

  "주둥이가 있으면 지껄여봐! 니는 그 나이 쳐묵도록 그것도 모르긋냐? 엉?"

  마당에 술병이 깨지고, 아빠는 또 그대로 나를 밀쳤다. 나는 바닥에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순간 심장이 덜컥 무너졌다. 엉덩이를 찧을 때 바닥을 짚은 손바닥이 따끔했지만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알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토종 한국인은 아니었다. 그래서 였을까. 거지같은 아빠라도 제발 "내 아들"이라는 소릴 해줬으면 했다.

  "지 집에 돈두 많이 주구 결혼혔더니, 으디서 애를 배와? 니 아부지는 내가 아닝께, 느그 죽은 엄마한테나 물어봐라!"

  하지만 아빠는 그러지 않았다. 아빠는 자궁 밖에서 들리던 악에 받친 목소리를, 뱃속에서 공포감에 떨게 했던 거대한 진동을 내가 태어나서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 엄마가 열 달을 빡빡하게 채우지 않고 나를 낳았다는 이유가 죽어서도 엄마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엄마의 고향은 인도였다. 아빠와 엄마는 국제결혼회사의 주선으로 만났다. 그런데 아빠는 국제결혼을 해서 엄마네 집에 돈을 조금 부친 것이 그렇게 아까우셨던 걸까. 회사에 낸 돈을 다시 돌려받고 싶었던 걸까. 엄마는 그저 돈을 다시 받기 위한 예금저축이었을까. 아빠는 계속 돈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더 이상 이 남자를 아빠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다.

  “태풍아!”

  할머니가 소쿠리를 이고 집 대문을 들어섰다. 평소 같으면 소쿠리를 들었을 텐데, 할머니의 소쿠리조차도 들고 싶지 않았다. 아빠는 할머니가 들어오시자 비틀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태풍아, 괜찮냐?”

  할머니가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왼손이 얼얼했다. 손바닥에 조그만 유리조각이 박혔지만 피가 많이 나지는 않았다. 나는 할머니에게 보이지 않게 왼손을 뒤로 감췄다.

  “니, 니 손 왜 그려? 엉?”

  할머니는 놓치지 않고 내 손을 따라 눈을 돌렸다. 손바닥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걸 보자 할머니의 미간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태풍아!”

  고함을 치는 할머니를 뿌리치고 집을 뛰쳐나왔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는지 모른다. 숨이 찰 만큼 계속 달리기만 했다. 왼손 바닥이 욱신거렸지만 달리지 않으면 내 자신이 너무 싫을 것 같았다. 얼굴도 모르는 엄마가 너무 미웠다. 이렇게 끔찍한 곳에서 살게 할 거였으면 차라리 나를 낳지 말지. 엄마를 찾아가 묻고 싶었다. 왜 날 낳았냐고. 그리고 내 진짜 아빠는 누구냐고. 눈물이 앞을 가려 달리기가 어려웠는데도 계속 달렸다. 숨이 막힐 정도로 뛰고 나서야 달리기를 멈췄다.

  저수지가 있었다. 밤이면 시꺼먼 속내를 비추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저수지가. 두 고개를 넘어야 보이는 푸른 산의 검은 심장. 나는 저수지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등이 없으면 가기가 어려운 산길이었지만 계속해서 수풀 길을 헤쳐 갔다.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조차도 없었다. 그저 발은 저수지로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수지에 다다랐을 때, 문득 집에 홀로 놓고 온 할머니가 생각났다.

  나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할무니! 할무니!”

  할머니 방 문을 열었다. 곱게 이불이 개어져 있고 할머니는 없었다. 늘 방구석에 처박혀 술이나 마셔대던 아빠도 보이지 않았다. 부엌이며 화장실이며 다 들어가봤는데도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어얼 씨구씨구 들어간다, 저얼 씨구씨구 들어간다!”

  그때 대문을 넘는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아빠의 술주정이 들렸다. 아빠가 할머니와 같이 들어왔을까 싶어 대문으로 나가봤지만 할머니는 없었다.

  밤이 깊었다. 소쿠리를 들고 집에 들어오셨다면 나가실 일이 없는데.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할무니는?”

  아빠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빠의 한 손에 술과 안주거리가 한 봉지 째 잔뜩 들려있었다. 술을 마시며 연신 낄낄거리는 모습에 마음은 더 조급해져왔지만 아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술과 고기를 씹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릴 뿐이었다.

  “귓구녕이 쳐 썩었냐? 할무니 어딨냐고!”

  소리를 지르며 아빠의 어깨를 밀쳤다. 비틀거리며 서있던 아빠가 제 발에 걸려 뒤로 넘어졌다. 아이구우, 나 죽네. 아빠는 눈을 질끈 감고, 엉덩이를 문질렀다. 아빠가 들고 있던 봉지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생전 오징어만 뜯던 아빠의 안주가, 오늘은 머릿고기에 통닭으로 가득 담겨있었다.

  “배은망덕한 새끼. 아부지를? 잉? 아부지를! 니두 니 애미 닮아서 이렇게 싸가지가 없냐? 니두 똑같다, 그래!”

  평소 같으면 일어나 내 멱살을 잡았을 아빠가 오늘은 기분 좋게 술을 마시며 낄낄거렸다. 나는 넘어진 아빠의 멱살을 잡았다. 유리가 박힌 왼손이 얼얼해, 오른손에 더욱 힘을 줬다.

  “이상한 소리 허지 말고, 할무니 어딨는지나 말혀.”

  “그 애미에 그 자식새끼. 개애 같은 새끼. 뱃속에 애 배놓고. 처녀도 아닌 게. 어디서 내 애라 거짓말을 혀? 죽으면 다여? 씨불. 중매쟁이, 내 언젠간 돈 도로 뱉게 할 거여, 씨불.”

  “똑바루 말 못해?”

  나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흐흐거리던 아빠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 내 눈을 쳐다보았다.

  “할매? 나가봐라, 씨불. 오도바이에 치이 뒤져뿟다.”

  아빠는 또 낄낄거리며 술을 들이켰다.

  “농담이라두 그런말 허는거 아니여…….”

  “농담 아니랑께? 저그 나가봐.”

  고개를 흔드는 내게 아빠는 손가락으로 대문을 가리키고는 또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마을 근처 큰 도로가로 달려갔다.

  평소 같으면 조용했을 밤중의 도로. 하지만 오늘따라 그 주변이 시끌시끌했다.

  “아이구, 안타깝게 됐제. 그 폐지 돈 몇 푼이나 헌다구, 그 돈 다 모아서 손주 손목시계 해줄 수 있다구 그렇게 자랑허더니만…….”

  설마, 아니겠지,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뒤엉켜 다녔다.

  시멘트바닥에 나뒹구는 중국집 철가방과 엎어진 자장면 그릇. 라이트를 켠 낡은 스쿠터 한대가 발발거리며 엎어져있었고, 거기서 꽤 떨어진 곳에 웬 나이 든 작은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입에서 갑자기 딸꾹질이 나왔다.

마을사람들이 아무리 우리 할머니라고 말해도, 난 저 길바닥에 쓰러진 노인이 우리 할머니가 아니기를 바랐다. 그게 맞았고, 그래야만했다. 할머니 호강시켜드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가시면 안 되는데. 나는 그 작은 노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곤 오토바이 라이트불에 비친 노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작은 노인은 우리 할머니가 맞았다.

  “할무니, 일어나. 할무이, 집에 가자, 응?”

  나는 할머니를 흔들었다. 시멘트바닥에 쟁그랑 쟁그랑 쇳소리가 들려 할머니의 손을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오른손에 망가진 손목시계가 쥐어져있었다.

  나중에 마을 아주머니께 들은 얘기로는, 도로가에서 아빠와 할머니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고 했다. 손목시계를 팔아 술을 사자는 아빠를 뿌리치고 도로를 뛰쳐나가다 자장면 배달집 오토바이와 부딪혔다고. 말릴 수도 없이 너무도 한순간이 벌어진 일이었다. 아빠는 망가지는 시계를 가져가는 대신 할머니의 목숨값을 배달원에게 받아갔다. 그 값은 겨우 삼만 원이었다.

  그 길로 나는 짐을 싸들고 도시에 나왔다. 처음에는 악착같이 돈을 벌어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환상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중졸인 나를 받아주는 곳은 아무 곳도 없었다. 나는 도시에 올라온 첫날부터 배고픔에 시달렸다. 길바닥에 나앉은 노숙자처럼 얇은 담요에 체온을 담보로 맡겨두고 위험한 잠자리에 들었다. 배가 고플 땐 화장실 세면대 물로 배를 채우고. 노숙자 중에는 나처럼 젊은 사람은 찾아보기 드물었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공사장을 찾았다.

  “거기! 와서 벽돌 좀 날라!”

  아파트를 짓는 공사장에선 젊은 인부들이 꽤 있었다. 그들은 나만큼이나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녔다. 이질감이라곤 눈곱만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인부들은 팔뚝에 굵은 땀방울을 맺힌 채 시원하게 웃어보였다. 흙집을 짓는 작은 개미들처럼 인부들은 한낱 일꾼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는 다부진 포부와 꿈이 있었다. 가수가 되겠다는 친구도 있었고, 사업을 하겠다는 아저씨도 있었다. 짧은 점심시간에 피우는 이야기꽃은 일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나도 어쩌면 그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들도 나처럼 까무잡잡했고, 나만큼 눈썹이 진하기도 했다. 나보다 몸이 왜소한 사람이 있었고, 깡마른 사람도 있었다. 공사장에서는 그 모든 사람들이 똑같았다. 피부가 흰 사람은 없었고, 누구 하나 자신이 잘났다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공사장에만 가면 마음이 불편했다. 그들은 내게 일이 끝나면 무엇을 할 거냐고 물었지만 그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꿈이 없었다. 이 일은 그저 단순히 배고픈 배를 불리게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랬기에 그곳은 그간 어린 시절을 통해 괴롭힘을 당해왔던 것보다 더 괴로웠다. 그들과 함께 있자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사람으로 돼 있었다.

좌절하는 내게 그들은 천천히 찾아가면 된다고 했다. 나이가 많이 차도 아직까지도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던 사람도 있었고, 나와 비슷한 이유로 일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내게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내 인생은 대체 뭐였던 걸까. 화장실에 가서 엉덩이를 닦다 만 느낌이었다, 딱. 내 인생은, 삶은 그렇게 찝찝했다.


  치지직. 또 한 번 화면이 바뀐다.

  다시, 내가 떨어지던 그 찰나의 순간으로 돌아왔다. 내 머리와 땅까지의 거리는 딱 내 신발사이즈만큼. 텔레비전 같은 과거를 돌아보고 오자 슬로우비디오같던 나의 시간은 이제 내 신발사이즈만큼 남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뭘까. 그래, 죽기 전에 기도나 하자. 두 손을 모았다.

  ‘비를 내려주세요.’

  하늘은 정말 비를 아껴뒀던 걸까. 그 소원과 함께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신발사이즈 만큼도 안 남은 거리임에도 빗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은 거의 멈춰있다시피 했지만, 비는 힘차게 쏟아졌다. 빗물은 금세 불어났다. 머리, 어깨, 가슴, 무릎. 깨끗한 빗물이 출렁이며 점점 쌓이기 시작했다. 바닷물처럼 깨끗하고 맑은 물이.

  두 팔을 벌렸다. 숨 쉬는 것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시간은 느렸지만 나는 자유롭게 헤엄을 칠 수 있었다. 나는 계속, 계속 위로 헤엄쳐 올라갔다. 구름을 녹여 버릴 만큼, 태양을 삼켜 버릴 만큼. 높게, 기운차게.


  “아, 씨발. 이게 무슨 일이야? 너 얘랑 같은 층에 있었잖아?”

  “아저씨, 그게 아니고 7층에서…….”

  “뭐해! 빨리 구급차 불러!”

  인부B가 다급하게 핸드폰을 든다. 그 사이 태풍이 쿨럭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한다. 인부A의 눈에는 그것이 바다에 빠진 사람이 물을 토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자 태풍이 죽지 않고 살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생겼다.

  “태풍. 괜찮아? 강태풍! 괜찮냐고!”

  그러나 태풍은 인부A의 소리에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인부A가 전화를 하고 있는 인부B에게 물었다.

  “저는 그냥 시멘트만 바르고 있었어요. 태풍이가 발을 헛디뎠던지 갑자기 뒤로 쓰러져 버렸다고요!”

  인부B는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짓는다. 그 모습을 본 인부A의 얼굴에도 안타까움이 묻는다. 인부A는 태풍의 뜬 눈을 손으로 감긴다.

  “태풍아, 조금만 더 버텨! 구급차 불렀으니까!”

  인부A가 태풍에게 말한다. 태풍은 그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표정이 여느 때보다도 평온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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