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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1 00:00

회전목마 클리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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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팔각형 미제 과자 상자 같은 모양의 방에 나는 가지런히 담겨 있다. 이런 나는 중심점에 고요히 자신을 정돈한다. 하지만 내 몸통에 들러붙은 코르셋은 나에게 불편함을 안겨준다. 얼기설기 엉킨 사람의 몸뚱어리처럼 코르셋 끈은 나를 압박한다. 나는 미로에 헤매는 인간 뭉치에게 폭력당한 미로와 같다. 익숙한 불편함의 고통은 만성적인 소화불량처럼 언제나 함께 한다. 그 익숙함과 함께 나는 스스로를 무미건조하게 정돈한다. 그리고 나에게 쥐어진 시간과 공간을 상기시킨다.


 이 공간은 8면 중에 4면에 문이 존재한다. 감시자처럼 신랄하게 나를 바라보는 문도 있고, 가해자만큼 못됐다는 소리를 들은, 운이 안 좋은 관망자처럼 존재하는 문도 있다. 문은 띄엄띄엄 존재했고 남은 4개의 벽에는 침대, 옷장, 책상, 책꽂이가 자리해 있다. 복층이라 기다란 벽과 천장이 만나기 직전인 지점에 창이 하나 있다. 침대와 책상은 서로 마주 보고 있다. 남겨진 옷장과 책꽂이도 마주하고 있다. 근데 우리는 마주하지 못한다. 4개의 문은 내가 열 수 없다. 내가 열려고 하면 문고리는 돌려지다가 만다. 하지만 저 문 밖에 둘은 자유롭게 이곳을 출입한다.


 우리는 셋이다. 나까지 포함해서 셋이다. 한 명은 무자비한 녀석이고 다른 한 명은 나긋한 존재다. 그리고 어그러진 틈새로 끼어든 내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짝이 맞지 않아 셋이 모두 존재한다. 나랑 무자비한 녀석만 남을 때면 무자비한 녀석은 나에게 폭력을 가한다. 나의 목숨만큼 소중한 타자기에 내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다. 내 손을 유리처럼 바스러지게 만들고 싶어 한다. 녀석이 내 코르셋의 끈을 무자비하게 당기면서, 숨통이 조여 내가 죽기 직전일 때, 나긋한 존재가 나타나 우리 사이를 떨어트려 놓는다. 그때 무자비한 녀석의 눈의 표면에 서리는 것은 끈끈한 분노와 투명한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랑 나긋한 존재 둘이만 있을 때, 나는 무자비한 녀석을 제거하려고 한다. 간단하다. 타자기에 정갈히 앉아 손가락을 나의 의사대로 놀리면 된다. 근데 제거하지 못한다. 제거하려고하면 나긋한 존재는 협박이 아닌 척을 하며 협박을 한다. 인간의 생명을 손쉽게 거두는 신처럼 무자비한 녀석을 삭제하려고 하면 나긋한 존재는 비겁한 협박을 한다. 자신도 내 옆을 떠날 거라는, 비겁한 요구에, 마찬가지로 비겁한 나는 무자비한 녀석을 제거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와 무자비한 녀석은 살아있다.




2.


 내가 잠들 때 나긋한 존재와 무자비한 녀석은 무언가를 속닥거린다. 그 밀회는 자장가처럼 평화로워서 내게 잔잔한 포근함을 쥐여 준다. 그래서 눈을 살포시 감게 된다. 잠과 의식이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시간에 무자비한 녀석은 내 코르셋의 끈을 가위로 자른다. 나긋한 녀석이 익숙하고 유려한 손놀림으로 새 코르셋 끈을 매듭짓는다. 항상 이 시간, 이 존재였다. 저 둘의 역할은 변함없었다. 이 둘은 내가 스스로 코르셋을 풀지 못하게 한다. 정반대인 둘은 의외로 죽이 잘 맞았고 공통분모도 존재했다. 내가 그 사실을 자각하기까지의 시간은 인간이 후회를 할 때처럼 늦은 편이다. 둘은 다른 듯 같았다. 둘은 서로를 해하지 않았다. 내가 작란을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희미하다. 하얀 도화지에 뭉뚱그려진 파스텔처럼 명확한데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곳에 있으면서 나는 저 둘과 공존을 했다. 나긋한 존재는 별로 나에게 겁을 내지 않는다. 그래서 살갑게 굴며 나와 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무자비한 녀석은 나를 겁낸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이 건들지 못하는 타자기 앞에 선 나를 무서워한다. 시간의 흐름에 맞춰, 본질적 나약함만 바닥에 깔려있는 나 자체를 무서워하지는 않는다. 나 자체를 바라보는 시선은 거짓으로 곱게 치장한 나를 바라볼 때와 다르다. 그래서 거짓이란 자원의 시작점인, 일그러진 자존감의 시작인 타자기를 녀석은 싫어한다. 그 타자기를 녀석은 부실 수 없다. 그러니 타자기를 내가 놀리지 못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 녀석의 염원이다. 내 손목을 아예 쓰지 못하게 만들고 싶어 한다. 그 이유를 알지만 아는 척하지 않는다.


 아무튼 내가 책상에 앉아 타자기를 가벼운 손놀림으로 두드릴 때면 무자비하 녀석은 긴 천으로 내 손목과 자신의 손목을 연결한다. 자신이 불편해할 문장을 적으면 바로바로 손을 당긴다. 심한 경우에는 내 코르셋의 끈을 엉망으로 만들며 나를 이리저리 내팽개친다. 내던진다. 그 순간은 성인이 되어버린 주인에 의해 엉망으로 구석에 처박힌 인형이 된 기분이다. 그러면 무자비한 녀석의 호응에 적당히 응해주기 위해, 내 왼쪽 손목에 달린 천을 대충 쥐고 있던 나긋한 존재가 나를 고쳐 안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오르골을 틀고는 나에게 잠을 선사한다. 보통, 나긋한 존재는 내가 정신을 차릴 때 오르골과 함께 옆에 있고 무자비한 녀석은 없다.


 최근에도 이런 이유 있는 손찌검이 발생했다. 새벽의 안개처럼 흐릿한 정신 사이로 눈을 뜨니 당연하게 나긋한 존재가 있었다. 검푸른 시야의 초점이 내 손 끝에 걸려 잡히기 전에 내 귀는 예민하게 오르골 소리를 우선적으로 잡는다. 초점이 돌아오고 검푸른 어둠의 바다에서 벗어나 나는 시선을 돌렸다. 근데 특별하게도 무자비한 녀석도 있었다. 그리고 그 녀석과 나 사이에는 긴 천이 이어져 있었다. 내가 발버둥 치면 칠수록 매듭은 아프게 손목을 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과거의 경험은 학습이 되어 고통을 무서워하게 한다. 그 고통이 공포까지는 아니지만 애써 고통에 다가가고 싶어 하지 않게 만든다. 그래서 난 억지로 내 손에 묶인 긴 천을 풀려 하지 않고 무자비한 녀석을 조용히 관찰했다.


 무자비한 녀석은 침대에 등을 기댄 불편한 자세로 곤히 자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무자비한 녀석에게 평화라는 심성이 소담히 깃들어 있는 것만 같다. 내 왼손에 쉬이 잡히는 담요를 집어 펼쳤다. 무자비한 녀석에게 덮어주자 옆에서 오르골에만 시선을 두던 나긋한 존재는 무자비한 녀석에게 시선을 뒀다. 나긋한 존재는 나에게 오르골을 내밀며 무자비한 녀석을 옹호했다.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면 책임을 지라는 따분하고 뻔한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던졌다.

 

 "저 녀석이 그러면 내 아들인 거야?"

 

 홍차를 마시는 사람처럼 여유롭게 나긋한 존재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래서 나는 또 질문을 했다.

 

 "그러면 데미안 너도 내 아들인가?"

 

 나긋한 존재의 눈이 창공처럼 허해서 의중을 알 수 없었다. 시신경은 선단처럼 날카롭게 무자비한 녀석에게 시선을 둔 나긋한 존재에게 던져졌다. 파열음, 상처 그 무엇도 현실로 일어나지 않지만 나의 시선은 진실로 날카롭게 녀석의 정서에 박혀 상처를 내고 있다. 시선과 달리 청각은 담요에 덮인 무자비한 녀석에게 가 있었다. 하지만 귀는 움직이지 않아서 내가 어디에 청각을 곤두세우는지 나긋한 존재는 눈으로 볼 수가 없다. 명확히 알 수 없다. 나의 청각은 기어이 담요에 덮인 영혼을 엿본다. 담요를 덮은 녀석의 숨이 부정맥처럼 불규칙한 흐름을 구현했다.


 자는 척이 어설픈 이유는 녀석이 어리기 때문인 걸까, 녀석이 내가 만든 존재라서 그런 걸까.




3.


 나긋한 존재의 이름은 데미안이다. 데미안의 이름은 묵직한 기름 맛이 있는 고기가 입에 들어 온 거 같은 기분을 나에게 건네주곤 한다. 데미안은 애증과 같은 관계다. 애증과 ‘같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완전한 애증이라기에는 이 감성은 다 익지 않았다. 설익은 애증은 완벽한 애증이 아니다. 무자비한 존재와의 관계는 정의 내리기 어렵다. 아, 무자비한 존재에게도 이름이 있다. 싱클레어라는 불완전하고 민감성을 속성으로 지닌 이름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로 구현한 존재기도 했다. 불완전하고 민감하며 어그러지는 게 싱클레어였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잘 따른다. 하지만 둘이 몸싸움을 할 때도 있다. 데미안은 가만히 있는데 싱클레어가 목을 조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싸움을 말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나와 항시 함께 하는 코르셋의 끈을 나 스스로 가위로 잘라버리면 된다. 그리고 문을 열고 도망치려는 시도를 하면 된다. 싸움을 말리기 위한 의도만으로 그럴 경우에는 둘은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항상 내가 그리 행동하면 이 둘은 초식동물을 잡으려는 맹수마냥 나를 붙잡는다. 내가 그 행위를 할 때마다 싸움을 말리기 위함이 아니라, 진심으로 도망친다는 걸 그 둘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매번 이 포획의 순간에 싱클레어의 눈은 습하다. 데미안의 눈은 모래처럼 꺼칫거린다.


 내가 그들의 흐름을 역행하는 일이 없다면 그들은 서로 싸우지 않는다. 아까 말했던 사건-내가 소나기 같은, 정신없는 폭력을 싱클레어에게 당하고 정신을 잃었던 사건- 이후에도 둘은 싸웠다. 둘이 싸우는 이유는 나와 나의 타자기 때문뿐이다. 다른 이유로 싸울 때는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둘이 싸울 때의 말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건 하나의 진리, 순리인가보다. 개인적 공간이 없는 이 팔각형의 세상에 우리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독립적 차원인 거 같다. 내가 한 말을 싱클레어와 데미안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기억을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마치 나처럼.


 둘이 싸우는 동안 입을 통해 토해낸 단어의 나열을 난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저 그들이 싸울 때마다 나는 이 공간을 탈출하려고 시도하고 그 시도는 매번 실패한다는 것뿐이다. 최근에 평소처럼 붙잡혔을 때 평소와 다른 생각을 했다. 당연한 것인데 너무 당연해서 보지 못 했던 것, 맹점을 자각했다. 나의 코르셋 끈을 자르는 건 싱클레어다. 나의 코르셋 끈을 매듭짓는 건 데미안이다. 데미안은 나를 붙잡을 때 무덤덤한 표정이다. 싱클레어는 날 붙잡을 때 눈이 노을처럼 붉어진다. 하나의 물음이 불길과 항상 함께하는 연기처럼 생각에 피어오른다.


 나를 여기에 못 벗어나게 하는 건 과연 싱클레어였을까?




4.


 하나의 자각은 많은 것을 바꾼다. 그것은 이 한 줌의 공간의 공기를 바꾼다. 그리고 내가 아무렇지 않게 대하던 생명 같은 존재 둘에 대한 인식도 바꾼다. 평소와 다름없는 공간은 그대로이면서 많은 것이 바뀌어 있다.


 나긋한 데미안은 나를 다루는 법을 안다. 그의 궁극적 목표는 내가 스스로 타자기를 망가뜨리는 것이었을 거다. 내가 이리 추측을 하려면 정당한 근거가 다수의 사람이 인정할 만큼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되어보지 못한 타자는 나의 근거를 보며 심증뿐이라고 단정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되어본다면 이 심증이 신뢰도가 높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데미안의 목적은 타자기를 삭제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데미안이 안 보였다. 아직 문 밖에서 이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전히 무자비한 싱클레어는 내 옆에 붙어있다. 코르셋 끈은 답답하게 나를 조이고 있지만 엉망이지는 않다. 내 신체의 일부처럼 밀착해서 감싸져 있다. 몸통은 코르셋과 섞여 있다면, 오른손은 탯줄처럼 무자비한 녀석과 연결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녀석의 오른손에 앙증맞게 묶여 있다. 원래는 타자기 앞에 앉아 있을 때만 매던 줄이었는데 요즘 들어 자주 사용한다. 그게 불편하면서도 편안하다. 몸은 불편하고 마음은 안정감이 생긴다. 몸은 아픈데 녀석에게 내가 절대적이라는 점이 확실하게 보이기 때문에 정서는 안온한 리듬이 된다.

 녀석은 답지 않게 나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 내가 방 한가운데에 자신을 정돈하고 책상에 앉아 남은 기억들을 갈무리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내가 모든 정돈을 마치고 몸을 의자에 깊게 기대고 피아노를 치듯 타자기에 손을 올리자 녀석은 나의 움직임에 맞춰 행동한다. 연결된 기나긴 천이 팽팽해지지 않기 위해서 녀석은 나를 따라온다. 그리고 타자기에 올린 나의 손에 시선을 두고 말한다.

 

"너는 왜 나를 죽이고 싶어 해?"

 

 패기 있게 말했지만, 저 말을 뱉은 후에 싱클레어는 몸을 떤다. 추위를 타는 사람처럼 떤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싱클레어를 올려다보며 녀석의 팔목을 잡았다. 안심한 표정이 싱클레어의 얼굴에 덧그려진다. 손에 힘을 주어 녀석의 팔목을 당겼다. 팔목에 전해지는 고통에 얼굴에 비친 안심은 당혹감에 침식당한다. 나는 의자에 일어서서 힘을 주어 앞으로 걸었다. 나의 발걸음에 꼭 맞는 걸음으로 녀석은 나와 마주보며 뒷걸음질 친다. 결국 녀석의 정강이가 침대에 다다랐다. 오감을 모두 정성스레 가다듬어 싱클레어를 향해 곤두세운다. 그리고 부탁을 방자한 명령으로 녀석을 내 침대에 앉게 했다. 녀석은 눈치를 보며 침대에 누웠다. 녀석 답지 않은 행동에 나도 나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 자식을 쓰다듬는 어미처럼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녀석의 눈이 커지다가 손길을 거부한다. 펼쳐져 있던 이불을 헤집어 얼굴을 덮고 나와의 시선을 차단한다.


 그래도 피할 수 없을 텐데. 왜냐면 이건 내가 만든 것이니까. 이 생명은 내가 창조한 것이니까. 싱클레어는 내가 만들었으니까.


 일부러 이불을 거두지 않는다. 스스로 이불을 내리고 나와 시선을 나눌 것이 클리셰 범벅의 이야기처럼 지겨운 전개니까. 예지몽을 꾼 것처럼 나의 예측에 꼭 들어맞는 행동을 하는 녀석이다. 이 순간만큼은 내가 녀석의 기질을 무자비한 것으로 설정한 의미가 없다는 걸 인지한다. 설정이 어떻든 간에 창조주인 나에게 완벽히 독립할 순 없다. 결국 열심히 움직이는 회전목마는 제자리에 돌아온다.

 

 내려진 이불 사이로 물기가 반짝거리는 싱클레어의 눈이 보인다. 눈으로 말하는 녀석의 언어를 난 해석할 수 없다. 그것이 분노, 원망, 아쉬움이나 희망 같은 것이라 예측만 해본다. 그런데 그 예측에 자신감은 없다. 나는 그만큼 녀석을 모른다. 녀석의 몸에 손을 대지는 않고 침대 밑에 드리워진 이불을 쥐어 당겼다. 녀석의 얼굴이 잘 보이도록 만든다. 시선은 계속 맞춘다. 그건 짐승을 다루는 사육사 같은 흐름이다. 심통 난 어린아이를 달레는 것처럼 답지 않게 나긋하게 녀석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낸다. 말간 눈동자와 초점이 맞추면서 나는 가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가증스러운 친절 범벅의 표정과 어울리는, 상대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을 한다.

 

“내가 널 만들었어. 그러면 너는 내 아들일까?”

"……."

"그리고 데미안도 내가 만들었으니까, 너랑 데미안은 형제일까?"

"아니야."

 

 싱클레어가 가만히 있다가 대꾸를 한다. 불쾌감이 가득한 얼굴은 울분과 함께 알록달록 꾸며진다. 무자비한 녀석은 나긋한 존재가 형제가 아니라 단정한 걸까, 내 아들이 아님을 부정한 걸까. 그 단정과 부정이 단정치 못하고 부정해서 실소를 한 조각 흘리고 싶지만 참는다. 막힘없이 더 비참한 이야기를 만들어서 들려준다.

 

"너랑 데미안은 형제일 수도 있어."

"아니야, 아니라고."

"내가 만든 존재니까."

"그럴 리가 없어."

"어째서? 내가 만들었어. 저 종이 뭉텅이에 명확히 써져있어. 너도 데미안도."

 

 녀석은 억울함을 볼에 한 아름 물고 있는 어린아이의 표정을 짓고 있다. 그 표정이 나와의 거리를 좁혀온다. 침대에 뉘어있던 상체를 일으킨 녀석은 나에게 얼굴을 가까이하며 쉬어버린 목소리로 말한다. 울음 때문에 철분기가 서린 목소리로 녀석은 아니라고 도리질을 친다.


 그게 답지 않은 행동이라 누군가에게는 귀여울 수 있는데 그 누군가가 나는 아니다. 원치 않는 순간에 받아들인 직설적인 존재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그게 설사 자식이라도. 내 배에 품은 적이 없는 내 손으로 만든 자식. 그게 내 눈 앞에 숨을 쉬고 생명을 영위하고 있다. 싱클레어는 손을 뻗어 내 목을 감쌌다. 비명 같은 어조로 말을 토해낸다.

 

"아니야, 네가 아니라 내가 만들었어. 데미안은 내가 만든 거야."

"무언가를 만든다는 건 필요가 있기 때문에 만드는 거야. 싱클레어, 사실대로 말해봐. 너한테 데미안이 필요했어? 처음에 데미안이 필요했던 건 네가 아니라 나였잖아."

"나도 그걸 너한테 묻고 싶었어. 왜? 대체 왜 데미안이 필요했던 거야? 그건 필수적으로 필요한 순간이 아니었잖아. 데미안이 굳이 필요한 건 아니잖아. 내가 있었잖아. 이미 내가 있는데, 왜 데미안이 필요했던 거야? 그리고 왜 그런 애를 내가 만들게 만들었어? 난 그때만 해도 데미안이 필요하지 않았어. 근데 네가 나한테 걔가 필요하다고 부여해버렸어. 날 그렇게 만들었어. 내가 데미안의 역할을 하면 됐잖아. 꼭 나를 쓸모없는 존재로 만들면서까지 한 명이 더 필요한 건 아니잖아."

"결국 지금 넌 인정하거네. 내가 데미안을 만들었고 너한테 데미안이 필요 없다는 거 방금 다 말했잖아."

"그래, 그렇지. 하지만 너의 꼭두각시가 되어 만들긴 했어도, 결국 싱클레어는 내가 만들었어. 네 의도로 탄생되었더라도 싱클레어는 내가 창조했다고. 그러니 순수하게 네 손으로만 만든 건 나뿐이야. 결국 너에게 진실로 소속된 진짜는 나야. 난 그렇게 믿을래."

 

 뜨끈한 물에 의해 퍼져버린 휴지 같은 축축한 소리를, 제가 원할 때까지 뽑던 녀석은 내 목을 감싸던 손을 거둔다. 두 눈은 꼭 감아 혼돈의 검은색으로 덮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아 고요를 귓구멍에 우겨 넣는다. 두 손으로 귀를 막으면서 녀석의 손목은 높은 위치로 갔고, 녀석의 손목과 이어진 나의 오른 손목이 당겨진다. 녀석의 몸짓에 따라간 내 오른팔 덕분에 나의 모습은 애매해졌다. 마치 내가 녀석에게 무언가를 받고 싶어 손길을 뻗은 것처럼 보이는 자세다. 그 애매한 자세처럼 어중간한 대화만 이어질 것 같아 나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포기했다. 꼼지락 거리며 면사포를 쓰듯 이불을 머리 위에 덮은 싱클레어는 여전히 두 눈과 귀를 닫고 몸을 웅크리려 했다. 녀석이 웅크릴수록 녀석과 이어진 내 손목은 아프다. 탯줄처럼 이어진 생명의 맥박이 손목에 매달린 것에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나는 손을 뻗었다. 면사포처럼 녀석을 치장하는 이불을 얼굴이 보일 수 있게 여며줬다. 이불로 포장된 녀석을 이불 포장 채로 곱게 안았다. 품어진 것에게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애정 어릴 수 있는 동작에 애정은 남기지 않은 채 영혼 없이 말을 했다.

 

 "네가 데미안을 만든 게 맞는 거라 해도, 근본이라는 것을 바라보면, 데미안은 온전히 너 혼자 만든 건 아니야. 네가 만들었다는 건 내가 만들었다는 거니까. 근데 넌 내 아들이야. 그리고 아들인 너와 내가 데미안을 만들었어. 그러면 데미안은 내 아들이면서 너의 아들인 걸 거야."

 "......."

 "그러면 데미안은 나의 손자일까, 아들일까"

 

 품에 담긴 육신이 흔들린다. 하지만 이불을 흐트러뜨리기도 전에 녀석을 옭아맨 나의 팔에 힘을 줬다. 포장은 아직도 유효했다.

 

 "우린 지금 몸을 하나도 섞지 않고 혐오스러운 근친을 행하는 걸까?"

 "......."

 "넌 이 질문들의 답을 알고 싶어?"

 "..."

 "난 알고 싶지 않아서 다 삭제하고 싶은데."

 

 두 귀에 고요만은 담아내지 못하고 나의 말소리도 담아내 버린 가냘픈 정신의 주인이 혼미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몸은 떨리지 않지만 정신은 엉망진창이 되어 품에 담긴 육체의 맥박이 가팔라진다. 그 난잡한 정신의 주인을 품에 안은 나는 오히려 차분함이 감정의 밑바닥에서 차오른다. 품을 통해 온전히 전해지는 상대의 감성에 나는 충만해진다. 이곳을 탈출하려는 나에게는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던 맹수는 지금 여린 초식동물처럼 떨고 있다. 이 순간만큼은 초식동물의 목덜미를 물어버린 맹수의 희열을 느낀다.


 이런, 너는 여전히 불완전해서 이리도 숨기는 게 불가능 하구나. 너도 알고 있구나. 알고 싶지 않은데 알고 있구나, 우리가 꿈같은 곳에 갇혀 진흙탕을 헤엄치고 있는 것을. 그 질 낮은 물에서 뻐끔거리는 썩은 물고기라는 걸. 근데 그거 알아? 우리가 이렇게 더럽고 폐쇄적이어도 사람들은 우리를 욕할 자격이 없어. 그들도 우리랑 별반 다를 게 없거든. 인간은 다 똑같아.


 그리고 인간이 만든 인간도 똑같아.




5.


 갑작스럽지만 쓸데없는 친절이 필요한 순간, 그게 나에게 주어진 현재의 화제다. 그 친절의 방향성은 나를 위한 것이다. 나는 나라는 사람의 주변뿐만 아니라 나 자체를 정돈할 필요가 있다. 나라는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밝혀야 한다. 켜켜이 쌓인 먼지를 여러 번의 손짓으로 털어내는 것처럼 나 자신을 어루만지는 시간이 왔다. 나를 어루만지기 위해 나를 분해한다. 나라는 사람을 서술한다. 그러면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친절하게 설명한다. 나를 정의한다.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시작해야 하는 것은 내가 글이란 걸 쓰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내가 의식이라는 것을 손에 쥐기 시작한 나이부터 종이는 항상 내 옆에 있었다. 종이는 연필과 마찰할수록 서걱거리는 소리를 내고 그 소리는 일종의 나무의 비명같이 들렸다. 대부분의 사람은 비명을 싫어한다. 하지만 비명을 부정적으로만 정의 내릴 수 없다. 그래서 그 비명은 오히려 나에게 긍정적인 정서를 안겨줬고, 글을 쓰고 또 쓰는 작업에 열중하게 하는 방아쇠다. 격렬하게 연필을 뭉갤수록 나무는 처연하게 비명을 지른다. 비명에 열중하는 법에 접촉한 이후로 글쓰기를 하나의 업으로 삼았다. 글을 쓰고 지우고 삭제하고 다시 탄생하는 과정을 내 손으로 만드는 것에 내가 생존함을 증명했다. 결국 글이란 걸 써야지만 자신의 존재 이유를 규명할 수 있는 가여운 것이 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 즐겁고, 숙명적이며 유일한 존재의 이유인 나의 업은 거대한 책임감의 해류에 휩쓸리고 오염돼버렸다. 원치 않는 순간 앞을 가로막은, 자연적 흐름 같은 장애물은 쓸데없게 큰 부피감을 나에게 밀어 넣으며 숨을 쉬기 어렵게 했다. 어쩌면 하나의 업보일 수도 있었다. 무미건조하고 죄책감 없이 삭제했던 존재들이 나에게 가했던 복수, 칼부림일 수도 있다.


 내 말을 듣거나 보는 사람들은 고개가 톱니바퀴가 어그러지듯 슬며시 틀어질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그렇다. 나는 미친 걸지도 모른다. 나는 미쳐서 나 혼자 착각하고 환각에 취해 있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난해한 이 환상이 최소한 나에게는 진실이다. 난 나의 진실을 마주하고 여며 쥘 의사와 권리가 있다.

이 팔각형의 미제 과자 상자 같은 공간에 갇히게 된 건 내가 휘두른 죄책감 없는 난도질이 되돌아온 것이다. 이 미제 과자 상자 같은 희한한 공간에 나 자신이 제약된 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 공간은 항시 지나치게 깔끔히 정돈되어 있고, 내가 항상 옆에 두던 타자기가 공손히 존재하며, 내가 쓰던 문자의 나열 속 존재들이 내 옆에 구현되어 살아 숨 쉰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래,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원래 내가 만든 소설 속 존재로만 존재해야 했다. 근데 주제넘게도 그들은 내 옆에서 살아 숨 쉰다. 나에게 손을 뻗고, 나에게 화를 내고, 나에게 부탁한다. 그리고 나에게 빈다.


 나는 결국 내가 만든 소설 속, 세계에 들어와 내가 만든 존재들과 부대끼는 것이다. 가엽게도 말이다. 나도, 그들도.

 

 이 공간 속의 흐름은 기묘해서 싸움이란 것이 빈번했다. 나 자신도 나를 제어하지 못 해서 이리저리 손톱을 세우며 달려든다. 나는 주로 싱클레어와 싸웠고, 나와 싸우지 않는 데미안은 가끔 싱클레어와 싸웠다. 이 방의 분위기와 맞지 않는 싸움들이었다. 그래서 햇빛만큼은 화창하게 들어오는 말쑥한 공간은 어색하게 더렵혀진다. 우리의 싸움의 결과물이다. 주로 서로의 목에 애달프게 손길을 뻗어 망설임과 죄책감 없이 움켜쥐는 것이 익숙한 싸움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목은 파스텔을 덧바른 것처럼 항상 보랏빛이 돌았다. 하지만 가끔은 데미안이 내 목을 잡을 때도 있다. 항상 나는 그 순간에 자는 척을 했다. 나는 숨이 막히게 되어 지면서 희미하게 안개가 서리는 시선 사이로 분노에 가득 찬 유리알 같은 눈을 보고도 기억하지 못하는 척을 했다. 어쩌면 그건 싸움이 아닐 수도 있다. 내가 대항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 원망을 보듬어 살피고 싶은 마음 따위가 없었으니까.


 이 싸움의 근원이 무엇이냐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비명을 미친 듯이 지르며 발작을 일으키다가 지친 몸으로 답을 하고 싶다. 그래야지 이 싸움의 근원에 대해 밀착도가 높게 묘사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다. 저 존재 둘은 내가 만든 것들이다. 연필을 쥐느라 생긴 굳은살만 있는 내 손으로 타자기를 놀려 만든 존재들이다. 저 둘은 나를 엄마라고 생각한다. 이전에 묘사했던 밀회 같은 둘의 속삭임에서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나를 엄마라고 지칭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엄마 따위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에게 그 둘은 내가 만들려는 종이 속의 흥미로운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엄마 노릇을 할 준비 따위 없던 내게 크나큰 짐 덩어리가 그들이다.


 이런 내가 그 둘은 그리도 싫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미라고 맹신하는 내가 둘을 부정한다는 게 맘에 안 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다, 둘은 내 태도가 맘에 안 들었을 수도 있다가 아니라 마음에 안 들었다. 근데 애석하게도 내가 어미라 맹신해서 나를 싫어하지는 못했다. 애증 같은 관계였다, 결국 우리 모두는. 그러니 친절한 척하거나 위협을 가하며 나를 벼랑 끝에 내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라고 그 둘이 달가웠을까?


 나는 처음에는 데미안이 좋았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책상에 곱게 쌓여있는 저 종이 뭉텅이를 들이밀고 싶다. 거기에 묘사된 데미안이 내 옆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설명하겠다. 내가 손을 놀려 탄생시킨 데미안은 결국 내가 원하는 하나의 이상이었으니, 그 이상이 내 눈앞에 존재한다면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마치 예수를 맞이한 모세같이 되지 않겠는가. 심지어 내가 만든 존재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데미안에 대한 설정은 신이 아닌 인간이었다. 인간은 결국 완전하지 못하다. 불완전의 조각들이 맞춰가 균형이라는 완전을 만드는 것이 이 세상의 인간이다. 결국 데미안은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이었다. 인간은 아무리 열심히 손을 놀려도 인간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이 최선이다. 나란 인간은 이상적 존재를 만들려 노력했지만, 결국 데미안은 인간 비슷한 무언가 이었다.


 나는 싱클레어는 싫었다. 과거형이라는 거를 잊지 않기를 바란다. 나랑 똑같은 존재라서 가감 없이 감정을 드러내 버리니까. 굳이 내가 나랑 똑같은 존재를 좋아하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인간은 원래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싫어하는 법. 그래서 저 둘이 나오는 책을 출판하려 할 때도 내 본명이 아닌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출판하려 했다. 이 거북한 세계에 발을 들인 이상 출판은 불가능해 보인다만. 부족하고 서툴고 현실적인 나랑 똑같은 존재. 그런 존재가 더욱 거슬리는 게 이기적이게도 사실이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나쁘다 볼 것이다. 그러면 나는 하나의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만약 나와 똑같은 기질을 갖고 태어나 나와 똑같은 환경을 살아갔다고 했을 때 나의 선택, 생각과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있겠는가? 이 질문이 이해가 어렵다면 질문을 간단하게 만들어 보겠다.


 너라고 내가 됐을 때, 다를 것 같아?


 아무튼, 나는 저 둘이 싫고 싫었다. 누군가를 책임지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순간에 책임을 지려 하면 모든 게 싫은 법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거북스러운 공간에 타자기가 온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불행한 것은 데미안의 오르골을 부수고 싶어 던졌는데 여전히 오르골의 회전목마는 잘 돌아간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점은 결국 내가 둘을 창조한 존재라 내가 손을 어찌 놀리느냐에 따라 둘의 결말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즉 절대적인 존재는 물고기의 아가미를 앗아갈 수 있다. 그리고 둘의 절대적 존재는 나다.

 



6.


 나는 지금 이런 생각을 대양 한가운데 휘몰아치는 태풍처럼 어지럽게 생각하고 있다. 품에는 싱클레어가 가엽게 몸을 떨고 있다. 영혼 없는 손길을 보낸다. 마치 자식을 품에 안은 부모처럼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이불 채로 등을 쓰다듬는다. 문자 자체로는 따스하나 어투 자체에는 영혼이 없다. 그렇다고 해도 싱클레어는 다가오는 파도에 먹힌 육신이 절여지듯 감동한다. 그래서 그 감동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그 주문 같은 문장에 녀석은 바다에 삼켜진 인간처럼 간절함을 내비친다. 문장을 되풀이 하면서 나는 이 문장이 완벽하지 않다는 걸 상기한다. 그리고 목소리로는 구현하지 않고 속으로만 완벽한 문장을 만든다.


 너는 괜찮을 거야. 데미안은 모르겠지만.


 몸을 떠는 싱클레어를 그리도 안고 달랜지가 어느 정도 됐는지 모른다. 그저 초록색의 문의 마찰음을 최소화 하면서 조심스레 데미안이 들어올 때까지 안고 있었다. 데미안과 눈이 마주쳤고 데미안은 펜촉이 없는 만년필 같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짓는다. 이불 포장 채 옭아매던 싱클레어를 내 두 팔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들었다. 팔을 풂과 동시에 싱클레어는 간절히 손을 뻗는다. 그 간절함이 엉망진창으로 크레파스를 덧칠한 것처럼 격렬해서 붙잡힌 팔에 피가 통하기가 어렵다. 그 저릿한 고통에도 나는 데미안을 향한 시선을 거두어 싱클레어를 바라보지는 않았다. 다가오는 데미안도 내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이런 나와 데미안의 중간에 싱클레어는 불안함을 온 몸으로 표출하며 내 팔을 흔들었다. 자신을 바라봐 달라는 몸짓. 그 애처로운 몸짓을 멈추게 한 것은 내가 아닌 나긋한 데미안 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 옆에 앉아 싱클레어가 나에게 뻗은 팔을 잡는다. 그리고 간결한 한 호흡의 한 마디로 모든 걸 갈무리한다.

 

“괜찮아. 곧 다 끝날 거야.”

 

 싱클레어를 바라보며 말하던 데미안은 동공을 굴려 나를 스치듯 바라본다. 데미안의 문장을 머릿속으로 이해하면서, 네가 생각한 끝은 뭐냐고 묻고 싶다. 하지만 물어봤자 나의 결정이 바뀌는 건 아니라서 묻지 않았다. 나는 그저, 졸림에 잠식된 눈을 반만 뜨고 오늘은 다 같이 밤에 이 방에 존재하자는 말만 했다. 오늘은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한, 나만을 위한, 나의 이기심을 위한 약속이다. 그 약속을 지킬 것인가를 물어보자 싱클레어는 몸을 웅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안은 답을 하지 않는다. 답을 하지 않았어도 데미안은 남을 것이라고 본다. 절대자의 명령에 반하는 인간은 없다. 부모에게 미움 받고 싶은 자식은 없다.

 



7.


 결국 밤이란 게 찾아왔다. 누군가가 이 공간의 천장 부분에 천을 하나 덮어 빛을 막은 것처럼 밤이 마중을 왔다. 싱클레어는 내 침대에 담백하고 고요하게 잠을 잔다. 내가 그에게 나의 침대에 자도 된다고 했기 때문에 침대에 몸을 웅크리고 잠에 취해 있다. 항상 느끼지만 잠결의 순간에는 싱클레어는 깨끗해 보인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경계의 저편에 있는 생명 같았다. 정말 저것이 생명인지도 명확하게 정의 내리지 못하는 존재면서.


 데미안은 주인을 지키는 충성스러운 개처럼 침대 옆에 앉아 눈을 감고 있다. 눈을 감고 있다 표현하는 이유는 정신은 또렷한 상태에서 눈만 감은 것인지, 꿈의 세계에 정신을 가라앉히고 잠이든 건지 내가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근데 데미안이 꿈의 세계를 유영하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나의 결정을 바꿀 수 없는 요소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저 둘을 명화를 감상하는 고객처럼 바라본다. 싱클레어와 이어져 있던 천은 풀어져 침대 옆에 하늘거림을 적나라하게 보이며 뒹굴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감상하는 자세 그대로 소리를 만들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내며, 서서히 뒷걸음질 쳐서 반대편 책상으로 다가갔다.


 지금 이 현재의 순간에도 타자기는 말끔하게 책상 위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 옆에 고장 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 했던 오르골이 자리하고 있다. 오르골의 태엽을 한 바퀴 돌리자 음악이 파동에 따라 소리를 흘리고 오르골의 회전목마가 돈다. 소리를 죽이며 의자를 끌었고, 그 의자에 앉아 자세를 정돈한 후에 타자기를 나에게 밀착시킨다. 양손을 곱게 올리고 매끄럽게 종이를 끼운다. 결말에 다다른 글의 마지막을 써야하는 순간은 이리도 은밀하고 사근 거린다. 글을 하나 끝마친 다는 것은 그들을 내 손에서 떠나보낸다는 의미다. 그래서 섭섭한 마음도 들지만 매혹적인 순간이 다가옴에 쾌락도 느낀다. 허무함과 쾌락의 조화는 생각보다 몽롱하다.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을 움직인다. 그 움직임은 온몸을 씻은 후, 서늘한 바람에 몸을 말리는 청량함을 움직임으로 구현한 것 같아서 좋다. 오르골 소리에 맞춰 능숙하게 손가락은 타자기 위를 춤춘다. 다만 이 손가락 춤을 방해하는 불청객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잠에 취한 것이라서 그런 건지, 오랜 시간의 침묵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잠긴 목소리는 묵직하게 깔려 내 손목을 감싸서 굳게 만든다. 그래서 다급하게 글을 썼다. 맞춤법은 틀리지 않는다. 맞춤법이 틀리면 다시 처음부터 써야 하니까.


 나의 다급함을 보고도 데미안은 화를 내거나 격렬한 반항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천천히 다가올 뿐이다. 그 느릿함에 안심이 되면서 상대가 나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뒤에 일렁거리는 인기척을 무시하고 마지막 문장을 머릿속에 정돈한다. 정돈하기 위해 고민을 하자 뒤에 선 상대는 나의 긴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


 내 고개는 뒤로 젖혀졌고 두 눈에 데미안의 모습이 차오른다. 머리카락을 잡은 녀석의 손아귀 힘이 강해지지만 나의 머리를 쥐어뜯지는 않는다. 눈으로 대화를 나누려는 존재와 마주하며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차피 해석하지 못할 눈의 언어를 해석하려 시도하지 않는다. 절대 다가가지 못하는 영역도 존재한다. 그게 바로 나한테는 데미안과 싱클레어다. 내가 만들고 내가 알지 못하는 영역.


 천장이 배경인 시야 속에서 데미안이 보여도 눈앞의 데미안을 생각 하지 않는다. 내가 쓴 글 속의 데미안을 생각하며 문장을 다듬을 뿐이다.

 

“안녕, 엄마”

“굉장히 불쾌한 문장이네.”

“불쾌하라고 하는 말이야.”

“그러면 나도 너에게 얼마든지 불쾌한 말을 해도 되려나?”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할 거 아니잖아.”

“응”

“...”

“잘 가, 데미안.”

 

 잘 가라는 말을 하고 웃음이 나온다. 나의 웃음을 그대로 보고 있는 데미안은 파동이 하나도 없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고개를 꺾고 데미안의 눈을 피하지 않은 상태로 손을 뻗는다. 데미안은 이미 알았던 듯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나의 얼굴과 가까워진다. 손에 데미안의 머리가 닿는다.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어 줬다. 뼈대의 느낌과 머리카락의 건조함이 같이 느껴진다. 마지막에 이 정도의 선물 정도는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서 한 행동이다. 천천히 결 좋은, 마른 낙엽 같은 촉감의 머리를 쓰다듬고 팔을 내려 문장을 마저 썼다. 마지막까지 데미안의 눈을 바라봤다. 녀석의 입에 어떤 유언이 나올까 궁금했다. 나긋한 존재는 나의 궁금증에 부흥 하듯 천천히 입을 땠다.

 

“싱클레어는 어떻게 돼?”

 

 마지막까지 데미안은 데미안다웠다. 끝까지 싱클레어를 챙기니.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쓰려던 순간을 정지시키고 말이란 걸 했다. 그 말을 하고 녀석의 답을 듣기도 전에 문장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렇게 데미안은 삭제돼버렸다. 살해됐다.

 

 “나도 잘 모르겠어. 근데 너처럼 될 수도.”


 난 끝까지 무책임한 문장을 뱉는 것 밖에 못했다. 녀석을 죽이면서도.




8.


 그 이후로 내가 무엇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기억이 몽롱하다. 미친 사람처럼 웃었던 거 같기도 하고 울었던 거 같기도 하다. 그래도 기억에 없다. 기억을 데미안과 함께 삭제했던 걸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방 한가운데에 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주변으로 나의 정신이 부서져 있다. 낯선 무언가를 바라볼 때처럼 호기심과 공포를 모두 느끼며 싱클레어는 나를 바라보고 있다. 표정에 답지 않은 청순함이 스며있어 웃음이 나왔다. 근데 목이 쉬어 웃음이 나오지 않고 기괴한 소리만 나온다. 이런 내 상태를 보고 놀라, 침대에 내려와 주인을 기다리는 애달픈 것 마냥 낑낑거린다. 손을 뻗어 녀석의 마른 어깨를 잡고 바닥에 붙어 있던 몸을 일으키려 노력한다. 몸은 중력의 힘에 극심한 영향을 받아 휘청거리면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길을 잃었지만 계속 발걸음을 재촉하는 미아 같은 행태의 내가 이 팔각형의 미제 과자 상자 같은 공간에 분해되어 있다. 불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녀석은 나를 본다. 그 표정이 계기가 되어 토기가 올라와서 입을 막고 헛구역질을 한다. 싱클레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더니 어색하게 나에게 팔을 뻗는다. 처음에는 내 어깨에 불안정하게 자신의 두 손을 올렸다. 그 후에 나의 등으로 손을 흐르게 두고, 내 어깨에 제 이마를 대고는 등 가운데에 손을 두고는 규칙적으로 토닥인다. 녀석은 나를 안고 달랜다. 내가 하던 행동을 똑같이 구현한다. 나와 달리 영혼이 충만하게 넘치는 행동이다. 진심이 구현된 행동의 언어다.


“그러지 마. 그럴수록 내가 더러운 게 너무 명백해지잖아.”


 내 말에도 녀석은 계속 나를 안고 있다. 사실 이 행동의 의도가 나를 위로하는 것뿐인지 잘 모르겠다. 녀석은 내 어깨에 기대에 제 머리를 비비면서 위로 받고 싶어 하는 행위를 했으니까. 마치 어린 생명이 몸을 웅크리고 품을 파고드는 것처럼 녀석은 점점 세게 나를 안는다. 그런 녀석을 보며 눈에 무언가 나올 것 같은데 나오지 않는다. 눈물조차 주어지기 아까운 나에게 나 스스로 내리는 일말의 양심인가 싶어서 자신이 간사하다 생각한다. 그렇게 유화 물감과 수채화 물감이 섞인 듯 매스껍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불안정함과 함께 안정도 찾아온다. 그 이유가 적음의 힘으로만 볼 수 있는지, 어색하게 감싸는 마른 팔 때문인 건지 모른다. 그냥 다 모르고 싶다.


 나는 결국 내 품에 파고드는 것의 등에 내 팔을 얹어 상대를 받아들인다.




9.


 싱클레어는 나를 부축하고 싶어 했지만 그 손길을 물렸다. 녀석과 더 이상 몸을 부둥켜안지 않는다. 녀석을 내 몸에서 분리시키고 타자기가 있는 책상에 다가갔다. 다시 앉은 의자에는 타자기가 여전히 곱게 존재한다. 타자기에 붙어 있는 종이를 바라봤다. 싱클레어에게 답을 바라지는 않지만 물었다.

 

“다시 글을 쓸까? 저 종이를 내가 먹어버리고 다시 데미안을 살릴까?”

“....”

“새로운 글을 써서 데미안을 살리면 우리는 행복할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다시 살린 데미안이 우리가 알던 데미안일까?”

“...난 잘 몰라.”

“내가 데미안을 살리면 나는 너를 죽이지 않을까?”

“괜찮아.”

“....뭐?”

“내가 죽어도 괜찮아.”

 

 고개를 돌려 싱클레어를 바라봤다. 가만히 있는 줄 알았던 녀석은 침대로 비척비척 걸어가고 있다. 다시 두 눈에 어둠을 담고, 정신을 꿈의 바다에 부유하기 위해, 잠을 청하려는 모습이다.

 

“엄마 편할 대로 해. 죽어도 원망 안 해. 엄마가 우리를 만들었잖아.”

 

 싱클레어는 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저 말을 한다. 그리고 침대에 몸을 깊게 파고들며 등을 보이며 자려 한다. 그게 답지 않게 안쓰러워서 울음이 터질 거 같다. 답지 않은 껍데기는 그 껍데기를 입은 사람을 더 초라하게 만들고 그걸 목격한 사람에게 극한의 감성을 선사한다.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다가간다. 침대에 누워 있는 여린 것과 그 여린 것의 발악의 산물인 기다란 천을 봤다. 비척거리는 빗물 같은 발걸음으로 침대에 다가가 천을 줍고 뒷모습에 대고 소리친다.

 

“우리 내일 다시 생각해보자.”

“.....”

“안 죽일게.”

 

 이미 다 소모되어 껍데기만 남아버린 지친 몸으로 같은 침대에 몸을 구겨 넣어 본다. 싱클레어의 손목에 천을 감았다. 내 손목도 감았다. 우리는 다시 연결되었다. 연결된 상태에서 싱클레어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녀석의 애처로운 형상이 보였고, 상대의 감겨진 눈꺼풀에 축축한 감정이 비집고 나오고 있었다. 천이 연결된 손으로 녀석의 머리로 손을 뻗는다.

 

“미안해”

“미안하면.”

“...”

“버리지 말아줘.”

“....”

“지금 이렇게 태연한척해도.”

“...”

“사실, 무섭단 말이야.”

“...”

“죽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버려지는 게 무서워.”

 

 감겨진 녀석의 눈이 결국에 뜨지 않는다. 한참을 그 얼굴을 바라보다 나도 눈을 감아버린다. 손의 감각에 신경을 쏟는다. 누군가와 비슷한 마른 낙엽 같은 촉감의 싱클레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몇 번을 쓰다듬고 엉킨 천을 따라가 녀석의 손을 쥐어본다. 손에는 바스락 거리는 감정도 같이 잡힌다. 잠결에 무언가를 읊듯 마지막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싱클레어는 몸을 웅크리고 나에게 밀착해왔다. 나는 내 품에 녀석을 안았다.

 

“비극적이게도 내가 너희의 어미였어.”





노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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