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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nA

 


Q.1 인류는 언제 멸망하는가?

앞에 펼쳐진 스크린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정지되어 있었다. 그걸 보는 우리들 또한 액화질소에 담갔다가 막 빼낸 금붕어마냥 굳어있었다. 얇게 언 침묵은 호수가 그렇듯 약간의 충격만으로도 거미줄 무늬로 산산이 깨졌다. 그 중심에는 검은 구멍이 있었고 원인은 내 동기인 상혁이 던진 돌멩이였다.

누구 맘대로!”

상혁은 기분 좋게 구입한 책을 펼치자마자 손을 베인 것처럼 화를 냈다. 어디의 누군가에게도 풀 수 없는 분노를 침묵하고 있는 이 공간에게나마 표출한 것이었다. 상혁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 돌멩이는 사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입에서 뱉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모두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결국 혼자서만 삼켰다. 이미 냉기라곤 찾아볼 수 있는 정도로 달아올라 있는 공간에 뒤늦게 돌을 던지는 건 숨바꼭질을 하다 혼자 버려진 소년의 머쓱함과 같았다. 그런 도중에도 쭉 얼어있던 스크린은 자리 앞에서 멋대로 끓어오르는 사람들을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눈은 스크린만이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눈치 챘다. 스크린의 우측 하단. 꽤나 넓은 이 대강당에서 유일하게 사람들보다 높은 곳에 한 남자가 서있었다. 우리를 향해 떨어지는 그의 시선은 뒤에서 비춰지고 있는 스크린의 빛이 더해지면서 묘하게 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양식장의 빈 공간이 부족해 서로 엉켜있는 생선들을 보는 업자의 눈길이 바로 이런 느낌일까.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가 입은 옷이 새하얀 가운이었기에 오히려 실험체를 보는 과학자에 가깝다는 점이었다. 그런 그가 손에 쥔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이게 전부가 아니지.”

사람들은 그 말에 홀린 듯 시선을 그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 시선들에 답하는 건 스크린이었다. 그것이 자신을 빛내가며 보여주던 장면을 바꾸자 사람들은 새로운 반응을 보였다. 분명 충격의 종류가 같았기에 처음과 같은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대신 다시금 잔잔해진 호수에 파문을 일으킬 수는 있었다.

수많은 숫자들. 그 숫자들이 뜻하는 건 모두 하나의 끝이었다. 인류의 끝. 하지만 영화마다 상영시간이 다르듯, 사람들의 수명이 제각각이듯, 숫자들이 말하는 끝의 순간은 모두 달랐다. 파리가 보는 세상처럼 스크린은 작은 도형들로 나뉘어 각기 다른 끝의 순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네 자리의 연도와 두 자리의 월, 일을 보며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인류의 끝은 언제이며 이 많은 숫자 중 무엇이 정답인가. 그런 의문이 들 무렵 하얀 가운의 남자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현존하는 고성능 컴퓨터를 모두 모아 단 하나의 질문을 던졌을 때 나온 답들이다. 그리고 이 결과들을 바탕으로 시작되는 것이 우리의 프로젝트다.”

그가 호흡을 위해 말을 멈추는 순간 스크린은 다시 화면을 바꿨다.

[D-DAY Project]

인류에게 다가올 그 날을 예측하고 그에 걸맞은 대비책을 강구한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 자네들이 모인 것이다.”

검은 바탕에 녹색 글씨로 새겨진 그 글은 뒤따라 들려온 목소리에 약간의 품게 되었다. 인류가 멸망하는 날을 피하기 위한 프로젝트라면서 막상 이름은 그 날이 오길 손꼽아 기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굳이 내 감상을 표하진 않았다. 저렇게 나름대로의 긍지와 자신감에 찬 사람의 머리에 찬 물을 끼얹는 건 내 취향이 아니다. 거기에 일단은 프로젝트의 이름이 주는 묘한 위압감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내 신경은 방금 전 수많이 떠올랐던 인류의 끝 중 가장 먼 곳에 자리 잡은 녀석에게 치우쳐 있었다.

A. 2594.07.29.

 


Q.2 너의 예측은 옳은가?

많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준 그 모임이 끝나고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나와 내 동기 상혁은 같은 부서에 배치 받았다. 멸망을 예측하고 그게 현실과 틀렸을 때 그 컴퓨터를 폐기 처분하는 것이 우리의 주 업무였다. 간단하게 보면 폐차장이나 쓰레기 처리장에서 하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입은 옷에 따라 사람의 마음가짐이 바뀐다고 했던가. 모임의 그 남자와 같이 우린 하얀 가운을 걸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괜히 청결하고 고귀한 지식의 보고가 된 것 같았다.

아마 이런 생각이 드는 건 그 남자의 정체가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 아닐까.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담당자이며 주최자인 그는 각 공학과를 섭렵한 희대의 천재, 백철준 교수였다. 뛰어난 능력과 쌓은 업적에 비해 매스컴은 그를 화두에 올린 적이 드물었다. 그만큼 그는 스스로의 정보를 숨겼고 그 결과가 그에 대해 존경심마저 가지고 있는 나도 못 알아보는 사태였다. 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찾아온 충격에 허겁지겁 사인이라도 받으려 했지만 인파에 밀려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 나에게 상혁은 쯧쯧 하며 혀를 찼다. 녀석도 나도 공학도로서 이런 가운을 걸치고 대형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나에 비해 녀석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확실히 옷을 이렇게 입는다고 해서 컴퓨터를 고철로 만드는 이 업무까지 새롭게 보이는 건 아니었다.

이것 좀 봐.”

상혁이 갑작스레 날 불렀다. 녀석은 이미 폐기 처분이 확정된 컴퓨터 앞에 개구리처럼 쪼그려 앉아있었다. 녀석은 그 자세에서 손을 뻗어 컴퓨터를 이리저리 만져댔다. 몇 번의 손길이 닿자 아무런 빛이 없던 컴퓨터의 화면에 생기가 돌아왔다. 예비 동력만으로 가동된 컴퓨터의 빛은 죽어가는 노인의 눈빛에서나 보이는 마지막 생명을 떠올리게 했다. 내가 그것에 잠시 한눈이 팔린 사이 상혁은 너무나 자연스레 질문을 던졌다.

네 이름이 QT-1이 맞아?”

나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당황한 나머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뭐하는 짓이야!”

그 반응은 당연했다. 우리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조건은 단순했지만 절대적인 규칙에 따르는 것이었다. 우선 예측된 결과를 프로젝트와 관련 없는 이에게 말해선 안 된다. 인류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혼란을 불러오기 좋은 소재다. 그 다음은 폐기 처분 결정이 내려지지 않은 컴퓨터는 절대 손상시켜선 안 된다. 컴퓨터 하나당 가격이 하늘을 찌르는 것도 이유에 속하긴 하지만 그 이전에 폐기 처분이 내려지지 않았다는 건 아직 그 결과의 답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인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진실일 경우에도 문제가 되긴 하지만 프로젝트를 위해 약간의 개조가 된 컴퓨터는 그 답이 틀렸을 시 폐기한다는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컴퓨터에게 프로젝트와 관련되지 않은 질문을 해선 안 된다는 규칙이 있다. 그리고 지금 상혁은 마지막 규칙을 어긴 것이다. 만약 다른 이의 눈이나 귀에 이 사실이 포착될 경우 힘겹게 구한 일자리를 잃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히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막상 그 장본인은 태연하게 질문의 답을 확인하고 있었다.

[YES]

성능의 향상을 위해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곤 숫자와 긍정의 YES, 부정의 NO로 제한되게 개조된 컴퓨터의 답에 상혁은 이렇게 외쳤다.

, 진짜 제조된 일련번호를 자기 이름이라고 하네.”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그 태도는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고 있는 아이에게 그런 걸 믿느냐고 비웃으며 놀리는 어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고작 기계의 기계적인 답변에 저렇게 생동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은 상당히 익숙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별거 아닌 일에 크게 반응하고 막상 내가 신나는 일에 대해선 시큰둥한 녀석은 언제나 활력이 넘쳤다. 대학에서 만난 여자 친구와 연애할 때는 정말 뒤통수라도 쳐주고 싶을 정도로 행복함을 표현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춤추며 돌아다니는 녀석의 모습은 가끔 정말 짜증이 치밀어오를 정도였다. 그 반대로 그 여자 친구와 이별했을 때는 그야말로 지구가 멸망하기라도 한 것처럼 일주일을 내리 울었다. 그 당시 집에 처박혀서 화석이 되려던 녀석을 밖으로 끌고 나온 사람이 나였기에 녀석의 그런 모습을 보고 상대하는 건 이미 내 일상 중 하나였다. 그 외에도 길에서 우연히 누군가 녀석의 발을 밟고 갔을 때는 발등에 말뚝이라도 박힌 것처럼 바닥을 구르며 고통을 호소했었다. 심지어 그러다가 상대의 멱살을 잡으며 사과하라고 따지듯 말했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는데 또한 가관이었다. 고작 그 정도의 일로 무슨 역적이라도 된 것처럼 졸졸 쫓아다니며 계속 사죄하는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조울증 환자 같기도 하고 하얀 집에 집어 넣어야할 것만 같은 녀석의 이런 모습은 어이없게도 내 자신에게 나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아마 녀석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주변 환경에 대한 반응이 미지근한 자신에게 없는 면이기에 그렇지 않았을까. 심지어는 만약 생명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같은 생각까지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녀석은 사고 또한 많이 일으켰다. 특히 지금 같이 자기가 하고 싶은 걸 그대로 해버리는 경우가 그 원인인 때가 많았고 그로인해 나는 항상 자식이 벌인 일을 정리하는 부모처럼 행동했다.

제발 생각 좀 하고 움직이면 안 되겠어?”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주위를 둘러봤다.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은 자신이 미워졌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방관한 나까지 잘릴 수도 있었다. 온 신경을 곤두세워 이 공간을 탐색했다. 대부분 자동화가 적용되어 실질적인 일이라고는 컴퓨터를 옮기고 분쇄기의 버튼을 누르는 것뿐인 이 공간에 나와 상혁 이외의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문제는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고 외눈을 번뜩이고 있을 감시카메라였다. 혹시라도 이 광경을 목격 당했다면 그냥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 주변을 둘러보고 깨달은 건 다행스럽게도 이 구역에 존재하는 건 때마침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외눈박이 감시자들과 실패자들의 시체, 숨 쉬는 두 영장류뿐이라는 사실이었다. 하나 아쉽다면 두 영장류 중 하나는 더 이상 살고 싶어 하지 않아하는 것 같다는 정도였다. 내가 대신 불안해하는 사이 녀석은 충분히 자신의 재미를 충족시키고 있었다.

넌 왜 틀렸을까?”

컴퓨터가 답하지 못하는 질문을 서슴없이 던지고 돌아오는 침묵에 히죽거리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악취미를 지닌 변태에 불과했다.

이 놈이 예측한 때가 언제였지?”

그러면서 스스로 생각하거나 기억하기 귀찮은 건 모두 나에게 미룬다. 녀석의 유아독존 인생에 익숙한 나도 가끔씩 그 잔잔하던 인내심의 호수를 뒤엎고 싶을 때가 있다. 결국에는 거기에 친절히 답해주는 스스로에 대한 책망으로 무마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난 이번에도 보통의 선을 넘지 못했다.

어제.”

그에 돌아오는 건.

, 맞아.”

같은 영혼 없는 공기의 진동뿐이었다. 젠장. 속으로라도 욕을 아끼는 나에게 결국엔 그 자물쇠를 풀어버리게 하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다. 이렇게 사람을 열 받게 할 줄 아는 녀석은 굳이 이런 부류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생산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다. 같은 공학도긴 하지만 내가 단순히 성능의 향상에 관심이 있는 것과는 달리 녀석은 지극히 사람 중심의 정신을 지향하고 있다. 쓰는 사람이 더 편한, 더 좋은 방향의 기술이 아닌 이상 녀석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런 차이 때문에 나와 의견 마찰이 몇 번, 수없이 많이 있었지만 대부분 내가 고개를 숙였었다. 이렇게 생각이 다르면서도 함께 프로젝트에 남은 이유는 그 성향만큼이나 다르지만 단순하다. 나는 세계에서 모은 각 컴퓨터들이 서로 자신의 성능이 더 뛰어나다며 경쟁하는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상혁은 멋대로 인간의 끝을 예측하려하는 기계들을 직접 처단하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 결국 나는 목적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도 언젠가 부서를 옮길 수 있을 거란 희망으로 여기에 남아있는 반면 상혁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즐기고만 있다.

너의 예측은 옳았어?”

심지어 지금 이 순간까지도 곧 파괴될 운명의 컴퓨터에게 잔인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컴퓨터는 이번에도 담담히 자신의 실패를 읊었다.

[NO]

내 시선은 상혁과 컴퓨터의 너머로 향했다. 흠잡을 곳 하나 없이 정확한 정육면체의 실패자들이 쌓여있는 모습은 마치 전염병이 지나간 마을의 일면을 보는 것 같았다. 주변에 즐비한 시체들은 아무런 비명도 유언도 없이 죽어간 컴퓨터들이다. 이렇게까지 그들의 시체가 쌓인 건 신에게 도전했다가 사라져간 인간들의 피조물이기 때문일까. 본래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는 말이 있긴 해도 이렇게 그 결과까지 닮아가는 건 어느 부모도 바라지 않는 일이다. 상혁도 그런 내 생각에는 동의하는 바가 있는지 자식을 타이르는 목소리로 컴퓨터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실험은 사람을 따라가려던 기계들의 코미디야. 결과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상혁의 마대로 이 프로젝트의 참여한 대부분의 컴퓨터는 나름대로의 인공지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기계와 인간의 자율적인 소통을 꿈꾸는 몇몇 몽상가들은 우리들의 현 상황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기술의 발전은 아직까지도 보다 정확한 성능을 향했다. 그 결과는 현재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판을 듣고 있는 컴퓨터조차도 인간의 사고와는 영 거리가 있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현재 그 컴퓨터는 과거 모임에서 가장 큰 수를 불렀고 그에 따라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컴퓨터라는 별명도 등에 업고 있었다.

결국엔 그 TOP-1도 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겠지.”

별명의 주인인인 컴퓨터의 형식번호를 말하는 상혁의 눈은 그 말대로 컴퓨터들의 단두대를 보고 있었다. 본래 단두대가 머리와 몸을 나눈다면 이 물건은 오히려 머리카락 하나 남기지 않고 한 곳으로 모아 압축한다. 단두대라는 별명이 붙은 건 아무래도 처형의 대표적인 형태여서가 아닐까. 다만 그 사용은 단두대와 흡사하다. 사형수를 단두대의 중심에 두고 버튼이라는 이름의 줄을 끊는다. 고작 그것만으로 나는 사형집행인이 된다. 단두대는 각 면에서 동시에 압축하여 정확한 정육면체의 관에 시체를 구겨 넣는다. 정말 가끔 실수로 손을 뒤늦게 빼서 손가락까지 날아가는 경우가 있다. 물론 내가 본 건 아니고 그럴 수도 있으니까 주의하라는 경고문 수준에서였다. 만약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면 우리들의 정신과 손가락을 먹은 시체는 좀비로 되살아날까 같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다가 문득 뭔가 떠올랐다. 내 눈은 어느새 손목에서 달리는 시곗바늘을 보고 있었다. 시곗바늘은 왜 이제야 자길 보냐며 지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임무에는 충실하게 이곳에서 있을 시간은 이미 지나갔음을 말해줬다. 그 사실을 그대로 전하려 상혁을 봤다.

……재빠르긴.”

이미 녀석은 단두대에 사형수를 옮겨두고 있었다. 더 이상의 지체 없이 녀석은 내 옆으로 다가와 버튼을 눌렀다. 빈속을 울리는 무거운 소리가 단두대의 가동을 알렸고 연이어 들려오는 가느다란 소리가 귀를 긁으며 그 끝을 알렸다. 압축으로 발생하는 가스가 배출되며 나는 소리는 사형수의 마지막 비명 같았다. 거기에 더해지는 가스의 하얀 연막은 승천하는 영혼으로도 보였다.

만들어진 지능에도 영혼이 있을까?”

별 생각 없이 떠오른 대로 뱉은 말이었기에 답은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외로 상혁이 입을 열었다.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해. 어떻게 보면 사람도 그 지능과 지식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게 아니잖아? 성장의 과정을 생성, 즉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얼추 그럴듯하지. 하지만 적어도 이런 녀석들은 글러먹었어.”

말의 시작에서 나온 가능성에 비해 끝이 생각 이상으로 단호하여 다시 물었다.

어째서?”

상혁은 입 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 얼굴은 단순히 웃는다고 보기엔 너무 일그러져 있었다. 만들어진 지능에 대한 상혁의 시선처럼 비뚤어진 그 입은 마치 어긋난 철문을 억지로 열 듯 무겁게 답을 뱉었다.

녀석들의 답이 그 해답이지. 고민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도 않아. 생명의 증거가 없어. 모든 질문에 긍정과 부정으로만 답한다고? , 아니요 라고만 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도 그 내용에 따라 답하지 못할 수도, 안할 수도 있잖아. 그런데도 녀석들은 그 어떤 질문이라도 YESNO로 말할 수만 있으면 냅다 던지지. 그 잘난 TOP-1도 자기 예측이 맞는지 되물음 받았을 때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어.”

상혁의 말에는 알 수 없는 무게감이 있었다. 평소에도 충분히 감정적이지만 유독 지금 녀석의 말과 표정에는 감정이 한 번 더 오른 것 같았다. 대부분의 컴퓨터가 강제로라도 답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째서인지 모르게 녀석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다. 그래서 직접 듣고 싶었다.

“TOP-1이 뭐라고 했는데?”

답을 모르는 것도 아닌 내가 던진 질문에 상혁은 답했다.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말투는 상식이 없는 사람을 놀리듯 경박했고 또 진지했다.

A. YES

 


Q.3 예측은 바뀔 수 있는가?

숙소로 돌아와 들어온 내 방은 여전히 하얀 차가움으로 가득했다. 얼핏 보면 정신병원으로 착각할 법한 새하얀 벽지와 바닥이 그 원인이기도 했지만 보다 본질적인 것은 가구의 유무라고 생각된다. 사람의 손길이 없을 때 느껴지는 음산함에 비하면 낫다고 생각하지만 반대로 말해서 그 정도로 사람이 사는 느낌이 없었다. 침대와 컴퓨터의 위에 먼지까지 쌓여있었다면 폐가나 다름없었을 거란 생각을 하며 컴퓨터 앞에 주저앉았다. 별다른 가구를 들이지 않은 이유는 단순하다. 쓸데없는 낭비를 피하기 위해서. 애초에 이곳에 연구 이외의 뭔가를 할 생각이 없기도 했고 따로 몰두하는 취미도 없다. 일이 끝나면 혼자 침대에 누워서 생각으로 시간을 때우거나 미처 챙기지 못했던 식사를 하는 것이 이 방에서 하는 일의 전부다. 한다는 식사도 연구소 내부에 있는 편의점에서 파는 샌드위치와 음료수로 때우는 정도다. 건강에 대해 걱정도 했었지만 설마 이정도로 죽지는 않을 거란 생각만 들었다. 상황의 개선에 대한 의지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고 내 손에 들린 샌드위치가 그 증거였다.

샌드위치의 겉을 싸고 있던 비닐 포장을 뜯으니 나름대로 먹음직스러운 빛깔이었다. 항상 먹기에 질리기도 했지만 배를 조여 오는 허기는 무엇이든 만찬으로 보이게 했다. 입을 크게 벌려 한 입 가득 머금자 목구멍 아래 절벽으로 떨어지는 덩어리가 느껴졌다. 고유한 제조법에 나름의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을 음식은 침과 뒤섞여 본연의 모습을 잊은 채 산의 호수에 빠졌다. 호수에 가라앉은 종이배마냥 샌드위치는 덧없이 사라졌다. 마무리로 함께 사왔던 음료수로 급한 식사에 따라온 답답함을 잠재웠다. 보기에는 조촐해도 배는 만족스럽게 채운 식사를 끝내니 나와 비슷한 행동을 하고 있을 상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함께 먹거리를 사 숙소로 돌아오긴 했지만 같이 먹진 않았다. 별다른 사정이 있냐고 물으면 달리 할 말이 없다. 방도 바로 옆방이라 멀다는 변명은 의미가 없었다. 예전부터 밖에서 같이 뭔가 먹은 적은 있어도 누군가의 개인적 공간에서 배를 채운 적은 없었다. 이런 점도 결국 녀석과 내가 가진 성향의 차이에서 발생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서로의 취향을 눈곱만큼도 존중해주지 않아서다.

내 방이 간결하고 절제된 지성의 표상이라면 녀석의 방은 매 순간이 혁명과 도전인 광기로 칠해진 공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막상 방의 주인은 사람에게 적합한 기술이 아니면 눈길도 주지 않지만 그 안에는 온갖 의미 불명의 물건들이 즐비하고 있다. 어린이와 함께 놀며 학습하는 강아지 모양의 로봇이나 어느 흑백 영화에서 전설의 코미디언이 사용했던 밥을 대신 먹여주는 기계 같이 필요성이 의심되는 물건들이 있는가 하면, 조금이라도 보관을 잘못했다가는 피폭될 것만 같은 녹색의 물건이나 모니터 속에서 깜박이는 바이러스 배포 프로그램 같은 필요성은 둘째 치고 당장이라도 방에서 뛰쳐나와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물건들도 있었다. 뭐하나 공통점이라고는 보이지 않아 혼돈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혼돈 속에도 규칙과 법칙이 있다는 말이 있었던가. 상혁의 기준으로 볼 때만큼은 그 공간에 하나의 거대한 의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모든 과학기술은 인류를 보다 나아가게 할 것이다. 누군가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과학계의 위인이 던진 말인 줄 알겠지만 내가 녀석의 방에 들어가서 혼돈을 목격했을 때 본인이 직접 던진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나에게는 돼지우리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반대로 녀석이 내 방을 보면 이곳이야말로 현 인류의 시발점이라고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컴퓨터의 발명이 현 인류라는 종을 만든 과정에 들어간다고 말할 수도 있으니 충분히 그럴 듯하다. 하지만 녀석은 분명 한껏 깔보면서 말할 테니 혹시라도 이 방에 초대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혼자만의 확신을 할 무렵 내 머릿속과는 반대로 정적뿐이던 공간에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연구소에서 날 먼저 찾아올 사람은 상혁 말고는 없었다. 하루 일과가 끝났으니 취미가 없는 내가 아니고서야 각자 방에서 여가시간을 즐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을 포기하고 나한테 올 정도로 한가한 사람은 녀석뿐이다. 그런 생각에 한 번 정도는 무시하기로 했다. 녀석이라면 성격대로 문이라도 힘껏 발로 찰 것이다. 문에 구멍이 날 정도로의 소리를 기대했던 내 귀에 들려온 소리는 방금과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번만 더 기다리려 했지만 그 사이에 초인종은 몇 번씩이나 추가로 울렸다. 이쯤 되니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상혁이 아니라면 누굴까. 길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직접 움직여 확인하면 되는 일이었기에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그리고 난 마치 검은 선글라스만이 막을 수 있는 기억을 지우는 빛을 본 것처럼 멍하니 서있었다. 문 너머에 서있는 인물은 바로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이자 내 동경의 대상이기도한 박철준 교수였다. 꿈이 현실에 실현되면 이런 기분일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뇌의 다른 부분은 냉각수의 역할을 위해 최대한 냉정한 사고를 했다. 그 사고의 이름은 상황판단. 갑작스럽게 이곳으로 온 그에게는 분명 목적이 있을 것이다. 과연 그 목적은 무엇일까. 어째서 나를 직접 찾아왔을까. 상황에 대한 판단은 점차 의문으로 발전했고 그의 뒤에 서있는 또 다른 인물을 봤을 때 발전의 속도는 빛의 그것을 뛰어넘었다.

왜 이렇게 늦어?”

너무도 태연하게 녀석이 물었다. 내 꿈의 풍경에 운석이라도 떨굴 것 같은 상혁은 내가 노려보자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다시 내 시선은 교수에게로 향했다. 이렇게까지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중년이라고 할 만한 나이에 이른 사실은 얼굴에 깊게 패인 시간의 골로 알 수 있었다. 그저 대면했을 뿐인데도 느껴지는 위압감에 장기들이 비틀리는 것만 같았다. 고통으로 나타난 긴장감에 위축되긴 했지만 억지로 없는 용기를 쥐어짜내서 교수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말했지만 너무 멍청하고 창의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저급의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 질문을 음미하듯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만 봤다. 그의 시선을 받는 동안 부끄러움에 도망치고 싶었지만 상혁의 앞에서 그랬다간 평생 놀림거리로 남아버릴 것이다. 막상 녀석은 관심 없다는 듯 먼 곳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기에 거의 근성으로 참고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교수는 주름을 이리저리 휘며 천천히 말했다.

당황스럽고 놀라운 상황에서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언제나 탐구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소리지. 보기 좋아.”

의외의 성공인지 그의 넓은 이해인지 모르겠지만 결과가 좋다는 사실에 속으로 안도했다. 교수는 상혁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친구와 자네에게 몇 가지 문답을 하러 왔는데, 혹시 바쁘다면 이 친구부터 하면 되니까 기다리겠어?”

바쁜 일이 없기도 했지만 녀석의 뒤에 있기는 싫다는 거대한 이유로 그 순간 답했다.

아뇨, 들어오세요.”

교수는 내 안내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뒤따라 들어오는 상혁이 밉살스러웠지만 내쫓기에는 그림이 이상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억지로 못 부는 휘파람까지 불며 들어오는 녀석의 뒤통수는 특히나 밉상이었다. 결국 내 손은 방문을 닫자마자 앞에서 건들거리는 검은 대가리를 후려쳤다. 마음 같아서는 유명인사의 손도장처럼 영원히 자국이 남게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했다. 역시 교수와 같은 공간에 있기 때문일까. 내 인정과 자비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죽일 듯 노려보는 상혁을 가볍게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서는 교수가 바닥에 앉아 방의 풍경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딱히 보여줄 것도 숨기고 싶은 것도 없었지만 괜히 긴장되었다. 속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기분이었다. 억지로 긴장을 숨긴 채 교수의 대각선상에 앉았다. 상혁은 뒤통수를 어루만지면서 뒤따라 앉으니 어설프게나마 삼각형을 이루게 되었다. 서로의 시선과 마주한 이상 이제는 대화를 시작해야했다. 누가 방아쇠를 당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상혁이었다.

여긴 뭐 이리 휑한 거야? 태초의 우주라도 되냐?”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녀석의 발상과 입방정에 순간 이성의 끈을 놓을 뻔했지만 멀어지는 이성을 억지로 붙잡아 버텼다. 애초에 태초의 우주라고해서 그리 휑했던 건 아니다. 내 방도 충분히 살만하다.

하실 문답이라는 게 뭡니까?”

상혁의 말을 무시하고 교수에게 묻자 그는 그제야 주변에서 시선을 거뒀다.

내가 총괄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해주는 이들을 더 알고 싶어서. 단순한 약력은 알고 있지만 사람이라는 게 텍스트로는 와 닿지 않은 점도 있으니까.”

교수의 말에 상혁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인간은 통계로 판단할 수 없다는 지론을 지니고 있는 녀석에게는 마음에 쏙 드는 말일 것이다. 나는 그 내용에 앞서 교수의 말투가 나이나 분위기에 비해 젊다는 것이 놀랐다. 소소한 놀라움 뒤에는 교수의 말에 대한 긍정이 따라왔다. 당장 옆의 녀석만 봐도 설명하라고 하면 막막함이 앞선다. 그렇다고 정리되어있는 서류로 끝내기에는 이미 정상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욕구의 덩어리 자체다. 그 무지막지함을 느끼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직접 만나서 확인하는 것이 제일 확실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이 실험의 바탕이나 진의도 직접 듣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교수가 말하는 서로 주고받을 문답도 그런 점을 해소시키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혁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는지 다짜고짜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이런 실험에서 뭘 얻으려는 겁니까?”

참여 당시에도 프로젝트의 의도에 의문과 불만을 가졌던 녀석이 궁금할 법한 내용이었다. 녀석의 말에는 바탕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교수에게 직접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여러모로 위험하지 않은가 하는 근심을 담아 상혁을 봤다. 녀석의 눈은 창처럼 교수에게 꽂혀있었기에 머쓱해지는 건 별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교수는 시원하게 웃음으로 답했다. 만약 상혁이 질문에 조금이라도 비꼬려는 의도를 심었다면 정말 큰일이 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웃음은 호탕했다. 교수는 그렇게 한참을 웃은 후에야 제대로 된 말을 했다.

뭘 얻을 수 있을지는 몰라. 단순히 내가 원하는 건 몰라도.”

꽤나 큰 규모의 행사를 열어놓고 정작 진행자를 부르지 않았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나와 상혁이 당황하고 있을 때 교수는 말을 이었다.

일단 인류의 멸종을 막는다는 게 목적이긴 하지. 실제로 컴퓨터들이 말한 때를 대비해서 온갖 준비를 했었고 원인을 추측해서 인류를 구한다는 명목의 단체를 만들기도 했어. , 그 영화중에 지구로 날아오는 거대한 돌덩어리를 박살내는 게 있었지? 대충 그런 느낌이야.”

분명 대머리로 유명한 배우가 나오던 해외영화였다. 아니, 그 당시에는 대머리가 아니었던가. 뭐 아무렴 어떤가. 그것보다는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컴퓨터들의 관 짝이나 짜고 있었던 동안에 다른 곳에서는 영화에서나 나오는 일이 펼쳐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내심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내비추고 싶었다. 상혁도 마찬가지로 관심을 담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먼저 말을 꺼내지 않은 이유는 교수의 말이 시작부터 흔들던 일단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우선 의미부터 물어보려고 말을 고르던 중 교수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하지만 내가 정말 관심이 있는 건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들의 삼리, 항상 시작보다 끝에 매달리고 휘둘리는 사람들의 습성이야. 사람들은 언제나 끝을 더 중요시 해. 생일? 그 날에 태어났다는 의미뿐이야. 언제 죽을지 알아? 아니, 모르지. 그렇기에 사람은 죽음에 신경 쓸 수밖에 없어. 언제 찾아올지 모르니까. 물론 때가 정해진 끝은 있지. 학생들은 시험이 끝나길 기다리고 직장인들은 퇴근시간이 다가올수록 발을 구르고 있지. 군인들은 전역만 바라보고 살아. 그 뒤에 찾아오는 정체불명의 시작이 주는 불안은 지금이 끝나는 것에서 오는 달성감과 달콤함으로 퇴색해버려. 그렇다면 인류의 종말이라는 거대하고 절망뿐인 끝에서 오는 불안감은 어느 정도일까. 인류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줄까. 그 과정을 실시간으로 관찰해서 내 욕구를 충족시키는 게 바로 내 목적이라고 할 수 있지. 어때, 답이 좀 됐나?”

교수가 말하는 동안 우리는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다. 의문형으로 끝난 교수의 말이 귀에 닿은 후에야 숨통이 트인 듯 신성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심호흡을 하고나니 돌아온 정상적인 내 사고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간단했다. 이 사람은 탐구욕의 화신이다. 천재는 일반인과 사고가 다르다고 하지만 이건 다르기에 생기는 차이가 아니라 그냥 높디높은 벽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교수의 연설 같은 말은 어느 정도 이해됐지만 그 이해를 위해 소모되는 자원과 순수한 탐구욕이 부른 일그러짐은 도무지 따라갈 수 없었다. 내 눈에 보이는 건 꿈꾸는 어린이의 욕심이었고 내 귀로 들리는 건 몽상가의 헛소리였다. 설마 나만 그렇게 생각할까싶어 상혁을 봤지만 오히려 고독함이 쓰리게 다가왔다. 녀석은 최근 내가 본 표정 중 가장 해맑은 미소로 교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이 듣기에 교수의 말은 인간 찬송가의 한 구절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묵시록 후에 찾아온 구원까지 연상된다면 과장일까. 인간의 수명이 100년은 가볍게 넘기기 시작하고 사고가 아니면 흔히 말하는 질릴 때까지의 삶을 살 수 있는 현재다.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흩어지는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 전 인류의 끝을 한 손에 쥐고 관찰하려는 사고는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거기에 내 앞의 둘은 정상이 아득히 보일 정도의 대표적 비정상이었다. 여기까지 사고가 진행되자 교수에 대한 동경은 이해하지 못함으로서 비롯되는 거리감과 혐오감으로 변질되었다. 눈까지 빛내며 관심을 보이는 상혁과 점점 질색하는 나의 상반된 반응을 본 교수는 어째서인지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마치 만족스러운 크기의 월척을 건진 낚시꾼처럼 그 표정은 해맑았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이토록 진심으로 공감하고 가식 없이 질색하는 사람은 자네들이 처음이야. 적어도 이 연구소 안에선. 덕분에 이곳에 온 이유를 얻었어.”

교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겨우 이런 짧은 문답으로 자신이 판단된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애초에 교수가 우리에게 질문한 적도 없고 우리 쪽에서도 상혁만 고작 하나 던졌을 뿐이다. 나는 그저 눈앞에 펼쳐지는 토크쇼에 반응을 보이는 관객이었다.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아 말했다.

설마 끝입니까?”

교수는 태연하게 답했다.

말하지 않았던가? 자네들을 알기 위해 왔다고. , 정 아쉽다면 따라와.”

고작 반응으로 얻고자하는 정보를 얻어갔다는 말에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이대로 끝내는 것도 개운하지 않았다. 거기에 대한 해결책은 교수를 뒤따라가는 것 이외에는 없었다.

그렇게 교수의 꼬리가 되어 향한 곳은 예상외의 장소였다. 프로젝트의 중심지. 일명 VIP룸이라고 불리는 방의 풍경은 꽤나 장관이었다. 응급실의 환자들처럼 수많은 전선에 연결된 채 줄줄이 나열되어 있는 모습은 신기한 것을 넘어 기괴했다. 컴퓨터마다 하얀 가운을 걸친 사람들이 여럿 붙어있는 모습이 그런 느낌을 받게 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마치 사람이 기계의 수발을 드는 것 같은 모습은 상혁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일에는 넘친다고 할 정도로 충분했다. 나름 주변 풍경에 감탄이 섞인 시선을 보내던 나와는 달리 녀석의 반응은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최대한 주변에 눈길을 주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은 애처로워 보였다. 시야에서 뭔가 움직일 때마다 저절로 반응하는 동공은 억지로 제자리에 돌려놓으려는 본인의 의지와 부딪쳐서 작은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얼핏 보면 범죄자나 정신이상자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녀석과 한 발자국 떨어져서 걸었다. 우리가 뒤에서 그러는 동안 교수는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계속 걷다가 다다른 곳은 이 넓은 방에서 문과 가장 떨어진 장소였다. VIP룸에서도 최심부에 자리 잡아 VVIP의 대우를 받고 있는 그것. 새하얀 정육면체의 몸체를 가진 TOP-1이 그곳에 있었다. 다른 어떤 컴퓨터와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것은 대접을 받고 있었다. 초 단위로 상태가 확인되고 작은 이상도 용납되지 않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관리되는 것을 보니 기분이 묘해졌다. 최고의 성능을 지니고 인공지능까지 겸비한 이상 당연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컴퓨터팔자가 사람팔자보다 좋아 보이는 게 기분을 좋게 하지는 않았다. 물론 끊임없이 질문을 받고 거기에 답하는 컴퓨터가 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 상혁은 불쾌함을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이게 다 무슨 꼴이야.”

녀석의 그 말이 나온 뒤에야 교수는 몸을 돌려 우리와 마주섰다. 그의 표정은 생각 이상으로 엄숙했고 거기서 나온 말 또한 상상 이상이었다.

TOP-1에게 딱 하나,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각각 하나씩이고 규칙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걸 잊지 마라.”

교수는 마치 아무런 대가 없는 기회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내 귀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또한 우리를 알아보기 위한 테스트이자 문답이었다. 이미 엄청난 질문공세에 시달리는 컴퓨터에게 고작 2개의 질문을 더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단지 그 수많은 질문 하나하나가 실험과 연관되고 보다 나은 방향의 발전에 기여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여기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영양가 없는 질문을 한다면 거기서 모든 것이 끝날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니 머리만 아파왔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이었다. 이게 전부 상혁 때문이라고 속으로 불평했다. 터진 튜브의 구멍을 막는 테이프처럼 임시방편으로나마 할 수 있는 질문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런 나를 이해해 준 것인지 교수는 상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때, 먼저 해보겠어?”

상혁은 교수의 말에 한동안 TOP-1을 바라보고 답했다.

아뇨, 궁금한 것도 별로 없고 괜히 했다가 지금 일자리에서 잘릴 게 분명하니까 지금은 관두죠.”

쓸데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한 녀석은 자연스럽게 나에게 깃발을 넘겼다. 짧게나마 생긴 틈을 이용해서 뱉어낼 문장을 쥐어짜내려 애썼다. 내 노력에 반응한 것인지 두개골 속 연분홍 덩어리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열린 문은 창의력보다는 기억력에 가까웠다. 펼쳐지고 흘러가는 이미지 중에서 포착된 것은 단두대 앞에서 상혁과 나눈 대화였다. 아무리 뛰어난 성능과 지능을 지니고 있어도 영혼만큼은 가지지 못한다고 했던 녀석의 근거. 그 어떤 질문에도 고민 따위 하지 않고 답하는 그 모습은 곧 결여된 영혼을 말한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거기에 약간이나마 생각의 여지를 남길 수 있다면 어떨까. 내 입은 그런 생각을 곱게 벼려서 하나의 질문으로 내보냈다.

예측은 바뀔 수 있는가?”

내 질문을 들은 교수의 얼굴에는 미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나는 그 의도를 알지 못하고 그저 정면의 하얀 정육면체만 바라봤다. 새하얀 바탕 위에 떠오른 초록색 빛만이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밝히고 있었다.

A. YES

 


Q.4 나는 언제 죽는가?

내가 상혁이 당한 사고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최근이었다.

TOP-1에게 질문을 던진 뒤에 홀로 부서를 옮기게 된 나는 녀석과 떨어진다는 것이 조금 걱정되었다. 실상은 방도 바로 옆이기도 하고 일이 끝날 때마다 같이 식사는 안할지언정 먹거리를 함께 사는 상황이었기에 서먹해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귀찮을 정도로 사사건건 자신의 하루 일과를 보고하는 탓에 제발 자제해달라고 부탁까지 했었다. 심지어 그 일과의 대부분이 자신이 처형시킨 컴퓨터들에게 던졌던 질문들과 그에 대한 답들이었기에 스트레스에 의한 두통과 복통까지 느낄 정도였다. 얼마나 심했으면 TOP-1 앞에서 질문을 던지던 그때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 걸 그랬다는 생각까지 했을까. 그런데 그렇게까지 했던 녀석이 아무 말 없이 일주일씩이나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니 걱정이 안 되는 것이 더 이상했다. 그다지 좋지 않은 생각이 거뭇거뭇 피어올랐다. 그래도 어련히 알아서 연락하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생각이 든 것은 평소 녀석의 모습이 머릿속에 각인된 탓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녀석은 이미 완성된 선입견과 편견의 조각상이었다. 그런 조각상에 새겨진 각인을 지우는 방법은 딱히 없다. 통째로 박살내버리는 것이 가장 간단하고 확실하다. 심지어 모델이 직접 나타나서 자신의 모습을 망치로 깨부순다면 효과는 말이 필요 없다.

그 사실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언제나 기운 넘치고 생동감 있었던 녀석이 오랜만에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녀석은 내가 알던 본래의 모습을 모두 집어던진 후였다.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게 변했던 표정은 더 이상 어두움 이외의 것을 담고 있지 않았다. 항상 활기차던 움직임은 축 처진 어깨를 필두로 굼벵이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여름날의 빛나는 나뭇잎이 순식간에 한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로 변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녀석의 오른손, 손가락에 있었다. 본래라면 있어야할 게 없었다. 손바닥에서 뻗어나가는 다섯 개의 줄기 중 검지로 향하는 길이 붕대에 가로막혀 있었다. 각자의 방 앞에서 나와 마주친 상혁은 놀란 나를 보자 고개를 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달라진 친구의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는 것은 아무리 수동적인 나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렵게 조사할 필요 없이 교수의 도움을 받아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단두대를 사용하던 중 손을 미처 다 빼지 못했다. 그게 다였다. 나와 함께 있었을 때는 시끄럽고 어수선하기는 했어도 실수는 하지 않던 녀석이었기에 그 사실은 큰 충격이었다. 평소의 녀석을 알던 나였기에 직접 찾아가서 몇 번씩 방문을 두드렸다. 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녀석에게 역으로 기분이 상했다. 그 뒤로 어지간하면 녀석에게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꼭두새벽부터 갑자기 내 방에 찾아오기 전까지는.

지낼 만 하냐?”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을 하는 상혁은 저번보다 더하면 더했지 나아진 모습은 아니었다. 새벽이라 그런 것인지 목소리까지 잠겨있어서 음울한 분위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저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운동이라도 하고 온 것인지 온몸이 땀에 젖어있다는 정도였다. 평소였다면 넘치는 힘을 해소하고 왔다는 정도로 이해했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물귀신이 밖으로 나온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위태로운 녀석을 바닥에 앉히며 말했다.

나야 똑같지. 허구한 날 기계랑 놀고 있는데.”

녀석은 내 말에 허탈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지만 일단 대화를 이어갔다.

넌 어때? 좀 괜찮아?”

저번에 내가 그 컴퓨터에게 물어보고 싶었던 게 뭔지 알아?”

내 말이 자연스럽게 허공을 맴돌았지만 신경 쓰지 않고 녀석의 말에 답했다.

아니, 그 뒤에도 말 안 해줬잖아.”

가끔씩 나오는 주제였다. 녀석은 항상 내가 했던 질문으로는 절대 인간성의 유무를 가릴 수 없다고 반박만 할 뿐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조금 불만이 있었지만 본인이 꺼내지 않는 이야기를 하라고 강요할 필요는 없었다. 반대로 말하겠다는 걸 막을 필요도 없었다. 적어도 녀석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언제 죽을까.”

차라리 나한테 물어본 거라면 웃으며 답해주지 않았을까. 녀석이라면 충분히 할 만한 질문이었다고 했다면 여기 없었을 것도 당연한 말이었다. 인류 멸망의 때를 물어보려했고 실제로 그렇게 한 교수도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자기 자신의 끝을 확인하려했던 녀석도 정상은 아니었다. 녀석이 하려고 했던 질문을 듣고 보니 이 프로젝트의 규칙이 어째서 존재하는지 이해됐다. 과연 사람은 컴퓨터가 예측한 자신의 죽음 앞에서 냉정하게 있을 수 있을까. 해가 진 순간 엄습하는 어둠처럼 밀려오는 두려움과 분노, 허탈함을 고작 개인이 버텨낼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당시 상혁의 판단이 백번 옳았다는 걸 알았다.

그랬으면 정말 큰일 났었겠네.”

애써 태연하게 말했지만 녀석은 아슬아슬하게 무너지지 않던 모래성을 묵게는 파도처럼 내 평정심을 박살냈다.

그래서 방금 하고 왔어.”

순간 뭐라고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한 다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다.

하는 김에 옆에 있는 놈들한테도 해봤어. 아주 가관이야. 하나같이 똑같이 말해. TOP-1만 빼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서슴없이 연달아 내뱉는 녀석의 입은 조금씩 위쪽으로 휘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봐오던 웃음과 달랐다.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붉게 물들어 나타난 것처럼 그 웃음은 불길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TOP-1은 그래도 양심적으로 말했어.”

상혁은 검지를 잃은 오른손을 부들부들 떨며 내 앞에 내밀었다. 그제야 난 녀석이 흘리고 있는 땀의 원인이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런데 다른 녀석들은 내가 한 달 이내에 죽는데. 말이나 되는 소리야? 말도 안 되지. 고작 기계주제에 인간인 나를 놀리는 거야. 그래서 다 폐기 처분했어. 녀석들이 내 손가락을 가져갔듯, 나는 전부 박살냈어.”

녀석의 말을 끝까지 듣고 한참을 바라보기만 했다. 과연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은 내가 알던 그 상혁이 맞는가 하는 의심만 커져갔다. 이미 속으로는 부정만 가득했다. 녀석의 넘치던 활력은 쏟아진 물 컵처럼 바닥만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잘린 검지의 단면으로 내가 알던 상혁이 모두 빠져나간 것 같았다. 아무리 밝은 희극이라도 때때로 비극적인 설정을 숨기고 있듯 언제나 활기로 포장되어있던 녀석의 바닥이 있을 뿐이다. 부정적인 감정의 덩어리로 변한 녀석은 어느새 그렇게 혐오하던 기계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동정심이 들기도 했지만 그만큼 실망감도 컸다. 변한 모습보다는 실체와 직면했다는 느낌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내 감정의 온도를 알아챈 것인지 상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나는 녀석이 방에서 나갈 때까지 그대로 앉아있었다. 거센 폭풍이 휘몰아친 뒤 폐허가 된 집터에서 느껴지는 허무함만이 맴돌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끝나는 순간 찾아오는 충격을 직접 체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전까지 몰랐던 이별의 대가는 시간과 동반하는 망각으로만 지워지는 고통이었다.

머리를 비우고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원래부터 상혁이라는 인간이 없었다는 듯 생활했다. 녀석이 저지른 사건과 사고를 감당하던 일을 잊었다. 녀석이 던지는 폭언에 하나하나 답하던 일도 기억 속에 묻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 뒤로 녀석을 볼 수 없었기에 내 일상은 새롭게 구성되었다. 덕분에 난 업무에 몰두할 수 있었고 그럴수록 내 위치는 높아졌다. 한없이 상승하는 고도에서 정신을 차릴 무렵에는 이미 VIP룸을 집처럼 드나들고 있었다. TOP-1을 제외한 컴퓨터들이 모두 박살났었지만 진작 보충된 지 오래였다. 오히려 이전보다 뛰어난 성능이 보장됐고 TOP-1의 경우에는 스스로 진화했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이런 변화는 자연스럽게 프로젝트의 열기로 이어졌다. 멸망에 대한 두려움을 숨기려고 하는 것처럼 프로젝트의 열기는 점차 과열의 단계로 넘어갔다. 생존을 위한 인류의 발버둥은 하나의 흐름으로 변해서 나를 집어삼켰다.

숨 한번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잠수를 강요당하는 나를 건져 올린 것은 상상도 못한 소식이었다. 과거에도 반복되는 일상에 변화를 주던 녀석은 흐름에 섞여 자신을 잃어가던 나에게 언제나처럼 충격요법을 가했다. 그것도 자신의 사망 소식으로. 프로젝트에 쫓겨난 뒤에 어떤 생활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대학 동기들에게 사실만 전해 들었다. 녀석이 준 충격은 내 사고를 얼려버렸다. 단순히 슬퍼서는 아니었다. 절친했던 친구의 죽음은 분명 가슴을 죄어오는 슬픔을 줬다. 하지만 그 슬픔에는 새로운 발상이 담겨있었다. 사고는 얼어붙어 정체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새로운 영향으로 길을 틀어 순식간에 속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나는 TOP-1의 앞에 서있었다. 아직까지도 가장 뛰어난 성능을 자랑하는 이 컴퓨터는 지금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이 느낌의 원인은 분명 상혁의 죽음이었다. 녀석과의 마지막 기억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기억이 녀석의 재능과 나에게 준 영향을 가리진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내가 이런 생각을 할 리 없었다. 상혁은 자신이 언제 죽는지에 대한 질문에 TOP-1만이 다른 대답을 했다고 말했다. 과연 이 하얀 기계는 어떤 대답을 했을까. 나는 이 의문에서 시작된 거대한 의심을 가지고 TOP-1의 과거 기록을 확인했다. 갑자기 와서 자료를 뒤적이는 내 모습은 다른 사람들에게 역으로 의심받을 만 했다. 그런 눈초리를 무시하고 찾아낸 자료에는 한 달 전 상혁이 한 질문에 대한 답이 적혀있었다. 그 여덟 자리 숫자는 2564.07.29. 인류가 멸망하는 날로 예측된 숫자였다. 충분히 가능한 답이었다. 이 시대에서 저 숫자가 문제가 될 이유는 없었다. 녀석이 죽지만 않았다면. 앞의 하얀 기계는 내 안에서 더 이상 뛰어난 성능의 컴퓨터가 아니었다. 이 실험에서 가장 큰 숫자를 부른 덕분에 이 기계는 아직까지 파기되지 않았다. 상혁의 질문에 그렇게 답했기 때문에 이 기계는 박살나지 않았다. 여기까지 쌓인 확신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상혁 또한 느꼈을 고양감이 내 안을 가득 채웠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 눈은 예전처럼 하얀 바탕 위에 떠오른 초록색 빛만을 주시할 뿐이었다. 거기에 호응하듯 그것은 말했다.

A. 2564.07.29.

 


Q.5 너는 거짓말을 했어?

녀석에게 물었다.

녀석은 대답했다.

A. NO

  • profile
    은유시인 2015.12.20 23:31
    인류의 멸망 시각을 컴퓨터에게 집요하게 물어가는 프로젝트인가요?
    결국 간교한 인간의 지능을 닮았기에 TOP-1은 살아남을 수 있었군요.
    저도 공상과학소설을 즐겨 쓰는지라 더욱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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