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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7 23:33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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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

밤이 깊어지면서 구름 속에 가려진 보름달은 싸늘한 빛을 세상에 비추었다. 그 빛은 이제 달을 떠나 궁궐 안 조그만 사당 앞에 내려앉았다. 사당 앞에는 왕이 흰옷을 입은 내시와 궁녀들을 거느린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왕은 누런 상복을 입고 있었다. 사당을 바라보는 늙은 왕의 표정은 바위처럼 굳어있었고 눈은 깊은 상념에 잠겨있었다. 그런 왕의 뒤에 서있던 궁녀들과 내시들은 자정이 될수록 차가워지는 밤공기에 왕이 혹여 고뿔이라도 들까 노심초사하며 있었다. 결국 걱정에 못이긴 내시 한명이 왕 옆으로 다가서던 순간, 왕의 목소리가 한발 먼저 그를 불렀다.

상선.”

상선이 급히 왕 옆으로 달려가 답했다.

, 전하. 하명하시옵소서.”

왕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건조하게 말했다.

사당 안으로 아무도 들이지 마라. 너희도 과인이 나오기 전까지 얼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상선은 뜻밖의 하명에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하오나, 전하...”

왕은 상선의 말을 듣지 않은 채 그대로 사당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상선과 시종들은 어쩔 줄 모르고 그대로 우두커니 석상처럼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둠속에 잠긴 사당 안은 누가 켜 놓았는지 모를 당불 두 개만이 조용히 신주를 밝히고 있었다. 작은 불빛이 비추는 신위를 왕은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 때 그토록 사랑했던, 하지만 이제 그토록 증오하게 된 이의 신위였지만 이제 그 신위의 주인은 왕에게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자에 불과했다. 왕은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다시 굳게 닫고는 신위 앞으로 다가가 조용히 앉았다. 왕의 눈은 여전히 신위를 향하고 있었다.

치칙.

조금씩 타들어가는 향초를 향로에 담으며 왕은 옷매무세를 단정히 했다. 하지만 향초의 향내음은 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기만 할 뿐이었다. 왕은 신위에 적힌 시호를 바라보았다. 왕의 눈에 들어온 신위는 밤 그림자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했다.

자신이 내린 시호였지만 왕은 시호조차 너무 과분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무덤조차 만들어주고 싶지 않았던 자였다. 그러나 장차 조선을 이끌 적통의 하나뿐인 아비였기에 어쩔 수 없이 후한 장례를 치러주고 사당까지 지은 것이었다.

세손을 위한 것이니라.”

왕은 누가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왕에 눈은 여전히 싸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세손이 왕이 된다 한들 너의 자리는 여기에 머물 것이다. 이 나라가 천하에서 사라지는 그날까지...”

말을 마친 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미련 없이 뒤돌아 문가로 향했다. 차가운 마음으로 떠나는 왕에게 더 이상 남길 말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왕은 손은 어느새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그때, 자그마한 소리가 들리며 바람이 촛불을 흔들었다, 왕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싸늘한 한기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밖에서도 느끼진 못한 갑작스러운 한기에 왕은 자신도 모르게 문고리에서 손을 떼어 기침을 하는 입을 막았다. 차오르는 기침을 멈춘 왕은 늙은 몸을 추스르고 다시 문고리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아들의 마지막 가는 길에 남길 말이 그리도 없소이까?”

갑자기 낯설고 차가운 목소리가 왕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놀란 왕이 고개를 돌렸을 때, 신위 앞에는 웬 낯선 사내가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의 검은 갓 아래 창백한 얼굴은 검은 수염을 돋보이게 했고, 검은 도포는 사당이 굳게 닫혀있음에도 방금 도착한 것처럼 바람을 타고 있었다. 사내의 주변공기는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주변에서 느껴지는 한기에도 왕의 놀람은 잠시뿐이었다. 이제 왕은 아무런 추위도 느끼지 않는 듯 미동조차 않은 채 말없이 사내를 응시하고 있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소이다.”

왕의 낮은 목소리가 사당을 울렸다.

먼 길 인줄 아시면서도 그 길을 떠날 아들에게 주상은 왜 그리 모진지 모르겠소.”

사내가 비꼬듯이 대답했다.

저승으로 떠나는 자들을 데리러 오는 저승사자라는 자가 이리 한가로운 줄을 몰랐소. 참으로 편해 보이는 구료.”

왕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자는 이미 저승길로 떠난 지 오래라오. 사흘 동안이나 이곳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지 않소? 안 그래도 사는 게 괴로웠던 이승, 더구나 모진 아비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훨훨 날듯이 떠나지 않겠소?”

사자 또한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왕은 말보다 미소가 더 불쾌하게 느껴졌다.

제 아무리 사자라 하나 한 나라의 군왕에게 예를 갖추어야 마땅할 것 이니라!”

왕의 외침이 사당을 뒤흔들었다. 왕의 눈빛은 이제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제 아무리 군왕이라 하나, 죽으면 위대한 염라대왕의 백성 일뿐, 예를 갖추어야 할 것은 내가 아니라 주상이외다!”

사자의 외침이 뒤를 이어 다시 사당을 흔들었다. 왕은 그 순간, 저승사자의 모습에 먼 기억 속 어떤 익숙한 모습이 겹쳐졌다. 왕과 사자는 이제 정적 속에서 싸늘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데려갈 이도 없는데 어찌 이곳에 온 것이오?”

정적을 깬 왕의 목소리가 다소 누그러졌다. 하지만 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묻겠소. 왜 온 것이오?”

왕이 다시 물었다. 그때서야 사자는 입을 열었다.

듣고 싶은 것이 있어 왔소이다.”

대답을 하는 사자의 눈빛도 왕의 목소리처럼 누그러졌다.

듣고 싶은 것이 있다 하셨소이까? 그것이 무엇이오?”

왕이 되물었다.

주상이 살아왔던 삶을 듣고 싶어 왔소이다.”

사자가 대답했다.

과인의 삶?”

왕의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자는 이제 말없이 주상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자의 대답에 왕은 당혹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이 상황이 자신의 알 수없는 무언가를 결정할만한 중요한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상한 요구였지만 자신도 모르게 들려줘도 괜찮을 거라 왕은 생각했다.

이상한 자로다. 허나 저승사자와 담소를 나눌 날이 사는 동안 또 있을까?’

생각을 마친 왕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앉으시오. 좀 긴 이야기가 될 터이니...”

왕은 사자에게 앉기를 권유하며 서 있던 자리에 편한 자세로 앉았다. 그러자 사자도 서있던 자리에 앉았다. 사자의 등 뒤로 가려졌던 신위가 이제 보일 듯 말듯 했다. 왕은 눈을 감으며 자신의 삶을 어느 먼 곳에서 가져오고 있었다. 잠시 동안의 준비가 끝나자, 왕은 다시 눈을 떴다. 왕이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습관적인 헛기침을 하자 사자는 익숙한 모습을 보는 듯 몰래 엷은 미소를 지었다.


과인이 태어났을 때, 부왕께서는...”

왕은 곧 사자에게 사신의 삶을 조금씩 풀어놓으며 되새기기 시작했다. 사자또한 주의 깊게 왕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가 달랐지만 자신에게 자상했던 형과 우애를 다지던 이야기에서 왕의 얼굴은 잠시 밝아졌다. 그러나 형의 어머니가 비명에 떠난 뒤, 선왕의 사랑이 자신에게만 향하면서 갈라지기 시작한 형과의 사이를 말하며 왕의 얼굴은 전보다 더 굳어졌다.

황형께서 보위에 오르신 뒤, 신료들은...”

형이 보위에 오른 뒤, 두 형제를 각기 다른 목적으로 지지하던 무리들의 치열한 암투 속에서 역모에 휘말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 같았던 나날들, 형과 갈등하며 차라리 죽고만 싶었던 순간들을 들려주며 왕은 때때로 한숨을 쉬었다. 왕은 이야기를 들려주느라 미처 눈치체지 못했지만, 그런 왕을 바라보는 사자의 표정은 사뭇 슬퍼보였다.

그 날 이후로 황형의 웃음을 보지 못했소. 황형께서 돌아가시던 날까지...”

이야기를 잠시 멈춘 뒤, 왕은 잠시 선왕이 자신을 꾸짖을 때 항상 하던 손짓을 따라해 보았다. 잠시 감상을 젖었던 왕은 무심코 바라본 사자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뒤늦게 눈치 채었다. 사자의 눈은 여전히 왕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생각은 어딘가의 먼 곳을 바라보는 듯 했다. 왕이 일부러 헛기침을 하자 사자의 생각은 다시 왕을 향했다. 왕은 내색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상을 치르는 동안 과인은 한 가지만을 생각했소.”

왕이 말했다.

무엇을 말이오?”

사자가 물었다.

탕평.”

짤막한 단어였지만 그 단어 안에 왕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담는 것 같았다. 왕은 이제 자신에 찬 목소리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이제 왕은 자신의 당당했던 나날들을 힘차게 들려주고 있었다. 사자또한 가만히 듣고만 있지 않고 의문스러운 점은 묻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과 함께 흐르던 왕의 삶도 달이 기울어갈 무렵 어느새 말미에 다다르고 있었다.


내가 그 계집을 내치지만 않았어도, 아니면 다시 들이지만 않았어도, 그 아이는 무사했을 것이라 보시오?”

삶을 다 누리지도 못하고 떠난 효장세자의 이야기를 마치며 왕은 다시 이야기를 멈추었다. 어느새 왕의 눈은 눈물이 조금씩 고이고 있었다. 왕은 고개를 숙이며 소매로 눈 주위를 닦아내었다.

그 아이는 상투조차 틀지 못했소.”

소매로 애써 닦아냈건만, 왕의 눈은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고 있었다. 왕은 애써 웃으며 다시 눈물을 닦아내었다. 사자는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이가 드니 쓸데없는 것만 느는구려.”

왕은 애써 슬픔을 털어내며 말했다.

운명이란 죽은 자도 모르는 것이라오.”

사자는 담담히 말했다. 왕은 잠시 눈을 감으며 이제 희미해져버린 어린 아들의 얼굴을 흐릿한 기억 속에서 더듬었다. 사자는 왕이 그런 왕을 조용히 기다렸다.

그 후 수년 동안 세자의 자리는 비어있었소. 참 긴 세월이었지.”

왕은 이제 그 후의 일을 들려주는 것을 망설이는 듯 말을 잠시 멈추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원자를 얻은 날은 어땠소이까?”

사자는 마치 가장 기다리는 부분이 나올 것처럼 왕을 재촉했다. 왕은 그런 사자의 재촉이 내심 불쾌했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그 날, 과인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실실 웃으며 궁궐을 거닐고 하늘에 대고 소리를 질러대며 날뛰었소.”

왕은 그날을 회상하며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원자가 태어난 지 얼마 후에 바로 세자로 책봉했소. 그리고 하루 종일 원자를 안고 어르며 하루하루를 옥황상제께 감사하며 보냈소.”

왕은 이야기와는 달리 매우 무미건조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자는 아무런 내색 없이 듣고만 있었다.

세자는 무럭무럭 자랐소. 글 읽는 소리가 어느 새소리보다 맑고 고았고, 세자가 나날이 장성하는 모습을 보면서 장차 조선의 새로운 군왕이 내 앞에 있는 것 같았지.”

왕은 다시 말을 멈추었다. 왕은 더 이상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사자는 이제 왕이 다시 말을 잇게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내가 왜 주상의 삶을 궁금해 하는지 궁금하지 않으시오?”

사자가 왕에게 물었다.

모르겠소.”

왕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사자는 염라대왕께 심판을 받기 전, 삼도천을 건넌다오. 죄 많은 자는 그 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삼도천 깊이 가라앉아 영원히 고통 받고, 죄 없는 자는 이승에서 겪은 한 많은 기억들을 삼도천에서 씻어내고 혼을 깨끗하게 한 후 염라대왕의 백성이 된다오. 그 전에 자신을 데리고 온 저승사자에게 자신의 삶을 들려준다오. 그런데...”

사자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런데?”

왕은 자신도 모르게 사자에게 되물었다.

주상의 아들, 세자는 아무런 사연도 들려주지 않았소. 망자는 이승에서 겪었던 기억들을 버리는 게 무서워 한명이라도 자신을 기억하게 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삼도천을 건넌 다음에도 자신이 누구였는지 묻고 또 묻는데, 세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보다 먼저 삼도천을 건넜소. 그리고 자신이 누구였는지 묻지도 않으니, 그 삶이 어찌 궁금치 않겠소? 그래서 세자와 가장 가까웠으리라 생각한 주상께 그 사연을 듣고자 온 것이라오.”

대답을 들은 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자 역시 말을 잇지 않은 채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은 그 눈빛이 자신이 알던, 무언가 가까웠던 사람의 눈빛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자의 삶을 듣고 싶다면, 진작 말하지 그러셨소. 과인이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아 시간을 버렸소이다.”

왕이 말을 꺼내며 별것 아니라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왕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복잡해지고 있었다. 왕은 잠시 세자의 신위를 바라보았다. 신위에 있는 시호, 저승사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넉 글자를 바라보던 왕은 헛기침을 몇 번 하며 다시 자신의 삶의 가장 오점이라 여기는 부분, 세자의 이야기를 들려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자가 열 살을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을까? 과인이 세자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세자에게 글 읽는 것을 좋아하는지를 물었다오. 세자는 이에 좋아 한다 답하였으나 얼굴에 당황한 빛을 숨기지는 못했고. 그래서 과인이 다시 공부를 좋아하는지를 묻자, 한참을 고민하던 세자는 공부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다 답하였다오. 나는 솔직하게 답하여 기쁘다하였으나 실망감을 감추기는 어려웠다오. 아마 세자도 그것을 느꼈을 테지.”

왕은 다시 세자의 신위를 바라보며 말을 멈추었다.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는 드문 법이오. 더욱이 그 나이 때는 아이들은 방에 박혀 글 읽는 것보다 밖을 쏘다니며 세상을 아는 것을 좋아하지 않소이까?”

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 어찌 그것을 모르겠소이까? 과인 또한 어린애였을 때가 없었겠소? 공부를 제쳐두고 황형과 놀러 다니기 바빴으니... 허나 세자는 달라야 했다오. 모름지기 과인의 뒤를 이어 나라를 짊어지고 갈 재목이라면 마땅히 그런 것들을 포기해야지. 나는 뒤늦게 그것을 깨닫고 그것들을 버리려 갖은 애를 썼다오.”

왕은 그 인내했던 세월을 생각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사자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 끄덕임은 마지못한 끄덕임이었다. 왕은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다행히 세자는 그 후 공부하는 것에 뜻을 두고 노력하였소. 하루 종일 자기 방에 틀어박힌 채 논어를 수십 번 읽었고 무예도 게을리 하지 않았소. 특히 무예가 뛰어나 청룡언월도를 휘두를 때는 촉나라의 관운장이 되살아난 듯 했다오.”

왕이 들려주는 세자의 이야기는 사자에게 흥미롭게 들렸다. 반면 왕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 듯 표정이 어두웠다. 왕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허나, 세자의 나이 열넷이 되자 세자는 다시 공부와 담을 쌓기 시작했소. 눈감고도 화살을 정확히 원하는 데에 맞출 만큼 무예에 도통했으나 학문은 그에 비하면 일천했지. 반드시 알아야할 주자의 학문이 아닌 쓸데없는 잡학에 뜻을 두기 시작했으니 내 마음을 불쾌하기 그지없었다오. 그래서 과인은 세자의 비행을 바로잡을 필요를 느꼈소이다. 어느 날, 과인이 한 고조와 무제 중 누가 출중한지에 대해 묻자 세자는 고조의 기상이 더 훌륭하다 했지. 과인이 둘 중에 누가 더 낫냐 물으니 세자는 머뭇거리다 문제라 답했소. 이에 과인을 거짓으로 우롱한다 생각해 호통을 치며 질책하자 세자는 어물어물 변명했지. 이에 과인은 세자가 과거에 지었던 시를 예로 들어 세자의 기질을 꾸짖었다오. 그날 세자는 온종일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안했다지. ”

왕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나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주상이 좀 과했던 듯하오.”

사자가 말했다.

어찌 그리 생각하시오?”

왕은 불쾌함을 애써 숨기지 않은 채 사자에게 물었다.

비록 무예를 공부보다 더 좋아한다 하나, 그것을 못마땅해 하고 기를 누르려했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구실을 찾는 것으로 보인다오.”

사자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말조심하시오. 어찌 그런 망발을...”

왕의 얼굴에서 불쾌한 빛이 한층 더 두터워졌다. 하지만 사자는 그것이 모욕을 당한자의 표정보다는 정곡을 찔린 자의 표정과 같다고 여겨졌다.


과했다면 사과하겠소.”

사자는 일단 한발 물러섰다. 왕은 여전히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사자의 사과를 받아들인 듯 입을 열었다.

비록 고개를 숙이고 있을지 모르나 언제 임금을 꼭두각시로 삼아 조선을 쥐고 흔들지 모를 저 여우같은 권신들을 상대하려면 학문과 지혜가 필요한 법이라오. 공부를 멀리하고 혈기만을 믿고 날뛴다면 권신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어 과인이 애써 이룬 탕평을 무너뜨릴 위험이 있어 그리한 것이외다.”

왕의 불쾌한 낯이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사자는 그것이 자신이 떳떳하다 여기는 생각 때문이라 짐작했다. 문득 사자는 왕이 말했던 세자의 시가 궁금해졌다.

세자가 지었다던 시를 혹시 기억하시오?”

사자가 물었다.

또 이상한 것을 물어보시는 구료.”

왕이 대답했다. 왕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핑계를 대려 했지만 어찌된 것인지 그 오래된 시가 왕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왕은 마지못해 시를 읊었다.

호랑이가 깊은 산속에서 울부짖으니 큰바람이 분다... 라는 글귀로 기억하오.”

왕은 시를 읊은 뒤 신위를 바라보았다. 그 넉 글자는 여전히 왕의 마음을 알게 모르게 불편하게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마저 해주시겠소이까?”

사자의 말에 왕은 신주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다시 사자를 바라본 왕은 사자의 얼굴에 아직 의문이 가시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 다음 해, 과인은 선위를 발표했소. 신료들은 급히 달려와 과인을 말렸고, 세자도 비 오는 날 주위를 모두 물린 채 비를 맞으며 선위를 거두어줄 것을 과인에게 청했소. 그리하여 과인은 한발 물러서 대리청정을 선포했고, 결국 세자와 신료들은 마지못해 그것을 따랐다오.”

왕은 잠시 말을 멈추고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중병에 걸려 양위한다는 것도 아닌데, 별것도 아닌 일에 왜 그리 난리를 피웠는지 지금도 모를 따름이오.”

왕의 말이 사자는 조금 고깝게 느껴졌다.

선위는 중차대한 일임이 분명한데, 주상이야말로 너무 무심한 것이 아니요? 내가 보기에 별것도 아닌 일이라 함은 앞서 주상이 이야기한 주상의 과거에서 무언가를 부정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구려.”

사자의 물음이 화살처럼 날아와 왕의 심장에 꽂혔다. 왕은 애써 웃었지만 깊어진 주름주위로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왕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오. 괜한 것을 말했구려.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해주시구려.”

더 추궁할 수도 있었지만 사자는 이야기가 더 듣고 싶었던지 먼저 물러섰다. 그러자 왕은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소매로 닦은 뒤 말을 이어나갔다.

그 후 세자는 대리청정을 시작했소. 처음 대리청정을 시작했을 때 과인은 세자에게 과인의 눈치를 보지 말고 세자의 뜻대로 해보라 하였소. 하지만 세자는 모든 것이 긴장되었던지 크고 작은일 모두를 과인에게 물어 해결하려 했소. 이에 과인에 세자에게 네게 대리를 명한 것은 내 노고를 나누고자 함인데 모든 것을 내게 묻느냐?’ 하며 가볍게 질책하자 그때서야 세자는 정사에 자신의 뜻을 펼치기 시작했소.”

왕의 표정에서 잠시 사라졌던 불쾌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세자는 점차 정사를 펼치는데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소. 옥좌에 올라 중신들 앞에 앉았을 때 기품 있는 모습과 당당한 눈빛으로 중신들이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게 했소. 얼마 지나지 않아 신료들은 과인이 아니라 세자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소이다.”

왕의 표정에 새겨진 불쾌감은 저보다 더 깊어졌다. 사자는 이제 세자의 이야기를 시작할 때부터 줄곧 떠나지 않는 그 불쾌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사자는 왕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

그것이 도를 넘자 과인은 세자에게, 신료들에게 경고를 하고자 했소. 대리청정을 한다 하난 이 나라의 임금은 과인이지, 세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오. 과인이 친견할 때, 어떤 상소가 올라오자 신료들은 세자에게 상소에 적힌 문제를 의논코자 했소. 자신감이 붙은 세자는 평상시처럼 스스로 처리하려했지. 과인은 그것이 불쾌했고 중신들이 보는 앞에서 세자를 크게 야단쳤소. 세자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약삭빠른 중신들은 그때서야 자신들이 뭘 잘못했는지 알고 고개를 거북이마냥 쑥 처박아 놓았지. 얼마 뒤 과인은 대리청정을 거두었소.”

왕은 다시 이야기를 멈추었다. 사자는 호통을 치던 대목에서 왕이 이상하게 힘을 주며 말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사자는 이제 안개 속에 숨겨진 무언가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제 사자는 왕의 말을 반쯤 뒷등으로 듣고 있었다. 왕의 말이 허공으로 퍼져나갔다.

세자는 점차 정사에 뜻을 두지 않게 되었고, 과인을 피해 진헌도 하지 않은 채 주색잡기에만 연연했소. 과인은 세자를 어르며 다시 되돌리려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는 일이었소. 끝이 없이 변해버리던 세자는 나중에는 광인이 되어 과인까지 해치려했다는 상소를 받게 되었고, 과인을 해치겠다고 날뛴다는 말을 듣자 종사를 지키기 위해 세자를 사사할 수밖에 없었소. 그래서 과인은 이렇게 장례를 치르고 시호를 내려 뒤늦게나마 세자를 추모하고자 했소. 이게 모든 이야기의 끝이오.”

사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왕은 서둘러 이야기를 끝냈다. 왕은 이제 모든 것을 끝냈다는 듯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자는 많은 것이 생략되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종사를 위한 결단이었소. 다른 방도는 더 이상 없었소이다.”

왕이 다시 말했다. 하지만 사자의 표정은 굳어졌다. 자식을 죽인 비정한 자신을 정당화시키는 왕의 태도에 사자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종사를 위한 결단이라 하셨소? 종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런 천인공노할 일을 행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지모르겠소! 세자의 존재가 걸림돌이 된다면 폐서인을 시켜 절도로 귀양을 보낸 뒤 세손에게 보위를 잇게 하면 될 것이오, 그래도 세자의 존재가 조정과 종사에 위협이 된다하면 사약을 내렸으면 되었을 것이외다! 내가 주상이 세자를 어찌했는지 모를 줄 아시오? 세자를 데리러 온 사자가 나임을 잊으셨소? 그 좁디좁은 곳에서 죽기 전까지 얼마나 괴로웠을까! 사람을 살리는 쌀을 넣는 뒤주를 어찌 사람을 죽이는 도구로 쓸 수가 있단 말이오? 인륜을 저버린 왕과 조정을 믿을 백성이 이 천하에 어디 있겠소! 하늘이 무섭지도 않소이까, 주상!”

분노한 사자의 일갈에도 왕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이제 과인의 뒤를 이어 세손이 보위를 이어 이 조선을 평안케 한다면 백성들은 세자를 잊을 것이오. 세손이 정사를 잘 이끌수록 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은 광인이 아닌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한 성군의 아비로 기억될 것 이오. 그 악업을 과인이 모두 짊어지고 갈 것이오. 더 이상 언급하지 마셨으면 좋겠소이다.”

왕은 모든 것을 감내할 듯 눈을 감았다. 하지만 사자는 그 모습에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사자의 분노가 한층 더 커졌다. 사자는 왕의 눈에 익숙한 손짓을 하며 왕을 다시 꾸짖었다.

광인? 영민한 세자를 광인으로 만든 자가 누구인데 그런 헛소리를 하는 것이오? 좋소, 원하는 대로 세자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드리겠소. 허나 이것은 그냥 넘어가지 못하겠소. 주상이 들려준 삶에서 그토록 숨기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도 모르는 것이오,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이오? 내가보기에 주상은 중차대한 일이 분명한 대리청정을 반복하여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별것이 아니다.’ 라고 강조하려는 같구려. 마치 그래야 주상이 마음깊이 담아둔 무엇인가를 덜어내려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신 것이오? 그게 무엇 이길래? ! 이제 알겠소이다!”

별안간 사자가 무릎을 탁 치며 소름끼치는 웃음을 터트렸다. 왕이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지만, 사자의 말이 더 빨랐다.

정통성 없는 왕, 선왕을 시해했다는 누명. 이 모든 것을 벗어내기 위한 신원. 그 신원 때문에 제 자식까지 망친 것이오?”

사자의 추궁이 왕의 정곡을 찔렀다. 심장에 비수를 찔린 것처럼 왕은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굳어버렸다. 사자의 불타는 눈빛은 그 심장 속에서 흘러나오는 왕의 응어리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왕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왕은 갑자기 크게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그 웃음은 겉보기에 호탕한 웃음 같았으나 그 웃음 속에는 마음속 깊이 담아두었던 울분이 섞여있음을 사자는 알 수 있었다. 차가운 웃음이 멈출 무렵, 왕의 눈빛이 별안간 매섭게 변했다.

감히 임금에게 대리청정을 청한 신료들은 역적이오, 그 신료들이 받드는 세제 또한 역적이다! 세제가 모르는 사이 왕을 독살하려 한 역적들이 받드는 자 또한 세제이니 이 또한 역모의 죄다! 선왕이 병들어 눕자 잘 알지도 못하는 잡학을 들이대며 어의를 닦달해 약을 처방한 세제는 역적이나 다름없다! 그런 역적이 보위에 올라 정사를 농단하니 반정을 일으켜 역적을 처단해야 종사를 바로 세울 수 있다!”

왕은 마음속에 눌려있던 모든 것을 토해내듯 고래고래 외쳐대었다. 말이 끝난 뒤에도 역적이라는 말을 수없이 외쳐대었다.

아무리 탕평책을 펼쳐 백성을 구제하고자 하면 무엇 하겠나? 조선을 위해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며 자신들의 파벌을 위해 싸우는 중신들의 하나로 모으고자 하면 무엇 하겠나? 그 백성들이, 그 중신들이 과인을! 이 나를! 조선의 군왕으로 인정치 않았노라! 천한 무수리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한평생 출생을 의심받고, 왕을 자신들 당의 허수아비로 아는 자들에 의해 어릴 적부터 형과 정적이 되어야만 했고, 혹시라도 형님께 누를 끼칠까 쥐 죽은 듯이 숨으려 해도 나를 내세운 역모가 끊이질 않았다! 내가 그토록 탕평을 위해 노력해도 내 적이라 하는 자들은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고, 내편이라 자부하는 자들은 나를 이용해 자신들의 복수를 하며 자신들의 천하를 만들려했노라! 신원이 무엇이냐 했느냐? 신원이라는 것은 그런 내 자신을 인정받기위한 것이었노라! 정당하게 왕위에 올라 조선을 당당히 세운 왕. 그것이 바로 과인, 바로 나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왕의 거친 숨소리가 사자의 귓가에까지 들려왔다. 하지만 사자는 전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이었소? 그 옛날 순수하게 백성과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던 그 젊은 왕은 어디로 갔소? 정당한 왕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하시었소? 자고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누가 뭐라 하던지 자신이 당당하고 그 신념을 위해 헌신하여 단 한명이라도 그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이 바로 자기신원이오! 자기 자식마저 비정하게 내쳐버리고 오직 자신의 말을 듣는 척신들을 키워내며 명목상의 자기신원을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어찌 그것을 모르고 이토록 변해버린 것이요, 주상!”

사자의 매서운 외침이 왕을 거세게 할퀴었다. 그 모습은 이제 점점 왕이 가장 괴로워하던 기억 속 누군가의 얼굴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왕은 절규하듯이 외쳤다.

그 입 다물라! 네놈이 대체 뭐기에, 대관절 누구이기에 과인을 이토록 괴롭히는 것이냐? 네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을 모두 듣지 않았느냐! 이제 썩 꺼져라! 더 이상 과인을 괴롭히지 말거라!”

왕의 거친 호통에도 사자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이제 사자는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주상의 말이 옳소. 나는 이미 죽은 자가 되어 이승에 남겨두고 온 것이 없지. 허나 내가 보존시킨 종사요, 내 뒤를 이은, 나의 하나뿐인 동생이 너무나도 흉하게 변했기에 이렇게 남아있는 것이외다! , 보시오! 주상. 나를, 이 형을 알아보시겠소?

사자의 외침과 동시에 안을 밝히던 불이 갑자기 빛을 잃으며 사당 안은 어둠에 잠겼다. 왕이 당황해 주위를 급히 살피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불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본연의 빛을 찾았다. 정신을 차린 왕이 사자가 있던 자리를 본 순간, 왕은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사자가 있던 자리에는 도포를 입은 남자대신 검은 용포를 입은 당당한 군왕이 앉아있었다. 익선관아래 가는 얼굴은 언뜻 보기에 병약해보였으나, 강하고 매서운 눈길은 군왕다운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늙은 왕의 얼굴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왕은 얼어붙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왕은 이제 어째서 사자가 자신의 본래목적을 밝히지 않은 채 자신의 젊을 적 기억을 일부러 들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제 여전히 검게 젊은 형과 하얗게 늙어버린 동생은 서로를 바라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하나도 변치 않으셨습니다.”

떨리는 목소리가 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자, 선왕, 이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이금은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치 못한 채 다시 말을 꺼냈다.

어찌 진작 본모습을 보이시지 않은 것입니까? 이 아우의 시시비비를 가리시려 오신 것입니까?”

이금의 말에 이윤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주상을 찾아온 것은 세자의 삶이 궁금해 찾아온 것이 맞소. 그 눈물 흘리며 말없이 걷는 세자의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허나 주상을 보니 내가 안쓰러워해야 할 사람이 한명 더 늘었구려.”

이윤의 말에 이금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윤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잘못이 있었지. 그때 내가 노론을 숙청하는 동안 세제였던 아우는 안중에도 없었지. 나도 그때는 오랜 세월동안 묵혀져왔던 증오가 터져 나와 복수에 미쳐있었다오. 그래서 아우가 날 찾아와 도움을 요청 할 때도 매정하게 내쳤고,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울 하교를 아무렇지도 않게 했지. 나중에는 병 때문에 정신까지 흐려져 아우에 대해 아무런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 이렇게 한으로 남았소. 그래서 이렇게 저승사자가 되어 내 기억을 그대로 가진 채 이렇게 다시 만날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오.”

이윤은 말을 마치고 이금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제 자신보다 더 늙어버린 아우의 모습, 붕당의 비극 속에 이렇게 망가져버린 아우의 모습은 이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고 있었다. 이금은 그런 형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주상, 왜 그리 고개를 숙이고 있소? 수십 년 만에 만난 이 형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이오?”

이윤의 말에 이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까 전까지 힘 있던 눈은 이제 풀려있었고 몸은 조금씩 떨고 있었다. 이금의 입은 무엇인가를 말하려했지만 목구멍에서 넘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윤은 이미 이금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제 아우의 마음속 짐을 가져갈 때라고 이윤은 생각했다.

주상이 잘못한 것이 아닌 것을 주상이 더 잘 알고 있지 않소? 이 형은 이미 그때 갈 때가 된 것이었소이다. 주상은 내 뒤를 이은 조선의 훌륭한 군왕이오. 유일무이한 적통이외다. 그 오랜 세월동안 시정잡배들의 모함과 권신들의 농단을 이겨내고 왕실을 바로 세우고 조선을 이렇게 당당한 나라로 만들었으니 나는 주상이 너무도 자랑스럽소이다. 주상은 부왕의 아들이자, 내 믿음직한 동생이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삶 동안 그것을 잊지 마시오. 아시겠소이까?”

이윤이 말을 하는 동안 밖에서는 새벽을 알리는 수탉의 울음이 사당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이윤의 몸은 이제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두 형제는 이제 헤어짐의 순간이 다가옴을 알았다. 형을 보는 아우의 눈에는 눈물이 조금씩 고이기 시작했다.

후일, 이 아우를 데리러 올 것입니까?”

이금의 말은 가늘게 떨렸다. 이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지요. 그때 다시 만나 밀린 회포를 풀도록 하십시다. 다만...”

사당 안으로 햇빛이 비쳐오며 이윤의 몸도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이윤의 몸이 점차 사라지며 이윤의 등 뒤로 어렴풋이 보이던 신위가 다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 글씨가 다시 한 번 이금의 눈에 들어왔다.

사도세자.

사도(思悼).

슬픔을 잊지 못하고 늘 생각에 잠긴다.

왕이 스스로 지어놓고도 그 의미대로 행하지 않고 있던 시호였다.

세자를 시호처럼 가끔씩이라도 생각하고 슬퍼해주면 좋겠소이다. 아무리 미워도 한때 사랑하던 아들이지 않소? 아무쪼록 세자의 마지막 가는 길의 명복을 빌어주시구려.”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 이윤은 새벽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조금씩 밝아지는 사당 안에는 이제 왕만 홀로 남겨져있었다. 왕은 넋을 놓은 듯 멍하니 사도세자의 신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늦은 후회와 고통이 마음을 떠나 눈에 맺힌 눈물이 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왕은 누가 보기라도 하는 듯 눈물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리고 입에서는 스스로 막지 못하는 흐느낌이 흘러 나왔다.

늙은 왕의 삶의 회고는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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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지 83장정도분량의 소설입니다. 허술한게 많지만 이대로 컴퓨터속에 파묻히기에는 영 아쉬워 이렇게 공모전에 도전해봅니다.


  • profile
    korean 2014.11.03 12:03
    잘 하셨습니다.
    글이란 모름지기 남들한테 널리 읽히는게 제 사명입니다.
    좋은 결과가 있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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