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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콘테스트> 제9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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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 한국인]이 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고자 분발하는 젊은 영혼들의 순수 문학 창작의욕을 북돋기 위해 기획한 <창작콘테스트>가 제9차를 맞았다. 이번 제9차 공모는 출품작이 비교적 저조했던 지난 제7차나 제8차 공모보다 응모편수가 조금 더 많았고, 상대적으로 작품의 수준 또한 기대할만한 수준이라는 평이다. 
  [월간문학 한국인]<창작콘테스트>는 작가로서의 무궁한 필력이나 완벽한 전문성을 하나하나 따져 시상하는 그런 대단한 문학상이 아니다. 오로지 전문작가가 되기만을 꿈꾸어온 예비작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다소 흠결이 있더라도 치열한 작가정신과 독특하고도 개성있는 표현,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따져 우열을 가릴 뿐이다. 따라서 설혹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 가능성을 보아 당선작을 뽑을 뿐임으로 문학상으로서의 권위를 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할 것이다.
  이번 응모자 또한 모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을 터이고 나름의 재능을 발휘하였다고 보여지지만, 상당수의 작품들은 여전히 진부한 낱말들의 사용과 구태의연한 표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점이 아쉽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그간 겪어온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에 의해 산고를 겪듯, 그 누구도 쓰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문체와 어법, 시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이번 <창작콘테스트> 제9차 공모에서는 특별히 시(詩) 부문에서 금상과 동상의 당선작을 선정했다. 참여해주신 작가 여러분들, 그리고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 창작을 자신의 운명으로 택하려하는 모든 분들께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기원하며 각별한 감사와 격려의 뜻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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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

시(詩)부문



■ 하현의 그림자
   - 박봉철 


이팝나무 한 그루가 있네,
밤마다 이밥 향긋한 향취 만발하던
그 달콤한 고봉이 지난 바람을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기나긴 칠흑의 밤을 지새우네.
 
하현달 뜨던 늦가을 밤
어머니의 안색에 달그림자 몰려있네
계절을 놓아버린 무너지는 날들,
저토록 오랫동안 지속하는 것일까
 
가냘픈 속눈썹 틈새로
몇 갈래의 시름과 주름이 도드라지고
어깨가득 이밥의 향기가 밴
저 꽃봉오리에 봇물 터진 하현의 그림자
 
내 살갗 패인 주름진 눈가에
무르익은 짙은 안개,
캄캄한 저편에서 빠져나오고

 

■ 탄광촌
   - 박봉철 
 
 
산길마다 이미 내달리는 곳, 이끼 마냥 쌓인 나무들
울긋불긋한 향내가
맡겨진 계절로부터 반짝이는 마을
 
바람은 더불어 몸 누일 곳을 찾아
붉어지고 싶은지
가난에 취한 광부들,
수줍었고 추슬러 가던 고난의 삶을 캔다.
 
맞물린 산세의 날카로운 부위는
온종일 매몰시키겠지만
뜬구름 많은 마을에 어둑하고 칙칙한 세월은
가장 흐름한 곳을 휘청거리고
캄캄한 시간을 채굴했을까
 
기울어가는 어깨에는 헐어진 상처만 놓이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철새들의 솟대처럼 짜였으리라
 
손금처럼 갈라지는 좁은 길
되짚어 돌아가는 탄환들
주글주글 처진 삶도
음각된 상처마다 괜찮은 듯
와글와글 부대끼는 그 일상, 뜨겁다

     
      
■ 산사山寺
   - 박봉철 
 
 
가파른 길, 마음 좇아 등불 밝히고
그 길 윤회처럼 느릿느릿 돌아가니
가 닿고 싶은지
새벽부터 누군가, 산사 뜰 공양하는 소리
목탁 너머 환하다
 
탑 속에 은밀히 봉양한
노승의 사리처럼
제 몸 불살라야
수백 만 번 고쳐 살아야
법도의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을까
 
자비스런 흰 눈의 보시가
끊어진 세상 밖을 밝히고
파리하게 떨리는, 산사의 뒷모습에
 
따라 나온 염불소리,
적요한 아침을 재촉한다.
 
 
    
■ 초승달
   - 박봉철 
 
    
초야 치른 새색시
부드러운 나뭇가지에 걸린 환한 부끄러움,
 
캄캄한 눈썹 부드럽게 밀어 올려
고개 살짝 기울이는 얼굴
 
어느 초겨울 새벽
펑펑, 터지는 서릿발에
주렁주렁, 불그스레한 새내기 달빛


 
■ 밧줄1
   - 박봉철 
 
 
목이 힘껏 당겨진
밧줄의 내부는 구겨지도록 목을 껴안는다.
 
천장에 굵직한 대못을 감고
못대가리 틈새로 감아올린 통통한
그녀의 가녀린 모가지는 괄약근 같은
힘줄이 움푹 파인, 맨살 사이로 파닥거리고 
 
밧줄을 낚아채며
녹아내리는 슬픔과 고통이
꼬아진 올을 더 옭아매고
대롱대롱 버티는, 허공이 숨 막힐지도 모른다.
 
모가지가 가는 것은 유난히 위험한 일이다.
단단한 밧줄에 가는 목을 뒤척이다가
풀어헤친 응어리가 노출되기라도
비참한 삶의 허점을 보이기라도 한다면,
발버둥치는 그녀의 밧줄은 이미 성공한 셈이다.
 
그녀를 알 수는 없지만 그 끝은 선명하다.
마지막을 버텨야 밧줄 깊숙이 잠겨있는
을 꺼낼 수 있을 것이다.
 
한 뼘의 허공을 받히고 있는 틈새의 저녁,
이편에서 저편의 높이가
서럽고 가슴 아팠던 날들의 잔여분일까
그녀는 최후의 숨을 몰아쉰다.


 


********

금상
당선작 심사평


  제9차 <창작콘테스트> 금상은 시(詩)부문 박봉철 씨의「하현의 그림자」외 네 편의 시를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시인 김호철 / 시인 정은정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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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부문





가방
- 전찬무

 


 “우편물 왔어요.”
 회사 직원이 건네준 것은 청첩장이었다. 신랑측 이름은 내가 모르는 이름이었고, 신부측에 적힌 이름이 낯이 익었다. 대학교 선배였다.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기에 그 선배가 학교를 졸업한 뒤로는 서로 연락하거나 만난 적이 없었다. 대개의 대학 동문이 그렇듯 가끔가다 들리는 소문으로 어떻게 산다더라 하는 이야기만 들을 뿐이었다. 청첩장에 적힌 날짜와 장소를 확인했다. 습관적으로 핸드폰 스케줄러에 저장은 해두었지만 정말로 갈지 안 갈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나와 아무런 얽힘도 없었던 선배의 결혼식이 왜 내 기분을 나쁘게 하는지 모르겠다.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도리질 치며, 업무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 때문이겠거니 했다.
 
 맑은 일요일. 나는 결혼식장에 와 있다. 오랜 만에 보는 대학 동문들과 인사도 하고, 장난도 치고, 서로의 안부도 물었다. 결혼식장에 온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왠 일인지 남자선배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의 신부인 K는 남자 선배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친구와 서로의 근황을 얘기하다 문득 궁금해져 신랑이 뭐 하는 사람인지 물었다.
“명문대 출신에 대기업 연구원이래. 연봉이 몇 억이라더라. 집도 잘 살고.”
“조건 좋네.”
“그거 보고 하는 거겠지. 남자는 능력 아니냐.”
“그래?”
 
신랑, 신부 입장을 알리는 사회자의 멘트가 들려왔다. 일순간 모든 하객들의 시선이 신랑, 신부에게로 쏠렸다. 나도 그들을 보았다. 퉁퉁한 얼굴에 키가 작고 뚱뚱한 신랑 옆에 아름다운 외모의 신부가 서 있었다. 늘씬한 키에 균형 잡힌 몸매가 나란히 선 신랑을 더욱 못나 보이게 했다. 갸름한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전형적인 미인형의 얼굴은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의 시선을 모두 끌어들이는 듯 했다. 그 얼굴을 보니 갑자기 떠올랐다.
 청첩장을 받고 기분이 나빴던 이유와 남자 선배들이 모두 이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
 이제 다 알 것 같다. 그 일 때문이다.
 
 대학교 신입생 시절은 처음 접하는 자유로운 생활에 한창 들떠있던 시기였다. 부모님과 떨어져 내 자취방에 살면서 생활에 대해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았다. 하루의 대부분을 할애하던 입시공부 시간이 없어지자 여유로운 시간이 많아졌다. 대부분의 여유시간은 대학 동기, 선배들과 어울려 다니며 보냈다. 여러 가지의 학과모임도 많았고 모임이 없는 날도 끼리끼리 뭉쳐서 놀기 바빴다. 선배들과의 친분도 깊어졌는데 그 때, 동기들과의 대화에서 늘 언급되는 커플이 있었다. 한 학년 위의 같은 과 선배인 J와 K 커플이었다. 둘 다 잘생기고 예뻤으며 활발한 성격에 후배들도 잘 챙겨서 우리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서로 아껴주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외모도 준수해 한 쌍의 연예인 커플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 동기들과 함께 어울려서 술도 자주 마시고 학과 행사도 함께 참여했던 선배들이었다. 그 때 이런 생각을 했었다. 언젠가 여자친구를 만나 커플이 되면 저 선배들처럼 되고 싶다고.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우리 동기들은 대부분 군대에 갔고 군대에서 2년 동안의 복무를 마친 뒤 학교에 다시 복학했다. 그 때 J는 우리보다 반 년 먼저 군대에 다녀와 복학도 반 년이 빨랐다. 우리 동기들이 복학한 뒤에도 J와 동기들은 예전처럼 함께 어울리며 학교생활을 했다. J의 안색이 어두워지고, 그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지기 시작한 건 우리가 복학하고 두어 달이 지나면서부터였다. J는 학교 수업에 빠지는 날이 많아졌고 간혹 등교한 날에도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수업 중간 쉬는 시간에 함께 담배를 태우며,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만 바라보는 J에게 요즘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면 J는 아무 일도 없다고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지만 분명 뭔가 힘든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이었다. J가 늦은 밤 내게 전화를 걸어 술을 마시자고 했다. 자취방에 있던 나는 그의 위치를 확인한 뒤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우리가 어울려 자주 가던 술집에 도착하니 J가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내게 J가 술을 많이 마셨으니 잘 챙기라고 말했다. 나는 J가 앉은 테이블로 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선배, 저 왔어요.”
 “어~ 왔냐? 한 잔 해.”
 J는 이미 반쯤 취해있었다. J가 눈을 껌뻑거리며 술병을 들어 내게 술을 따라주었다. 술을 따르는 그의 손을 보다가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의 손은 예전과는 많이 달랐다. 손 여기저기 작은 상처들이 있었고 손가락에는 물집과 굳은살이 있었다. 나는 J의 손을 잡으며 요즘 뭘 하길래 손이 이렇게 상했느냐고 물었고, J는 얼른 손을 빼며 공사장에서 일을 좀 하고 있다고 했다. J의 집안사정을 몰랐던 나는 요즘 집안 형편이 좋지 않은지 물었다. J가 그렇지는 않다고 했다.
 “그럼 왜 학교도 빠져가면서 일을 해요?”
 “어…… 그럴 일이 좀 있어. 술이나 마시자.”
 그렇게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무거웠다. 분명 뭔가 하고 싶은 말이나 털어놓고 싶은 비밀이 있는 것 같은데 J가 말을 하지 않으니, 나도 다른 화제를 꺼내기가 힘들었다. 오랜 침묵 끝에 J가 말했다.
 “...야. 내가 사실은…”
 “네?”
 “……아니야. 다음에 얘기할게.”
 “말씀하세요. 요즘 많이 힘드신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어요?”
 “……아니야. 별 일 없어.”
결국 그날 술자리는 별다른 대화 없이 술만 마시다 끝이 났다.
 
 만취한 J는 술집 테이블 위에 골아 떨어졌고 나는 그를 업고 내 자취방으로 데려와 눕혔다. J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을 액정을 보니 K의 전화였다. K가 걱정할 것 같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J 핸드폰 아닌가요?”
 “K선배. J선배 지금 잠들었어요.”
 “걔가 왜 거기 가 있니?”
 “저희 집 근처에서 같이 술 마시다가 J선배가 좀 취해서 이리로 왔어요.”
 “그래? 알았어.”
 “저… 선배.”
 “응?”
 “혹시, J선배 뭐 힘든 일 있어요?”
 “J? 걔가 힘들게 뭐가 있어.”
 “요즘 좀 많이 힘들어 보이던데……”
 “글쎄. 난 잘 모르겠던데.”
 “그래요?... 알았어요.”
 “응. 끊어.”
 
 그 날 밤, 잠결에 나는 J가 하는 잠꼬대를 들었다.
 “미안하다……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누구한테 뭐가 그렇게 미안하다는 걸까? J에게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나 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J는 나가고 없었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문자 메세지가 와 있었다.
-       신세 많이 졌다. 다음에 내가 밥 살게.
 그 날 이후, 나는 J를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그 후, J는 더 이상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친구들 중 누구도 그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어디서 뭘 하고 지내는지 아무도 알 길이 없었다. 처음에는 다들 걱정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존재도 희미해져 갔다. 그렇게 우린 각자의 생활에 충실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대학 동기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 J선배… 죽었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멍해져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진짜? 사고야?”
 “자살이래. 일단 가면서 얘기하자. 너네 집 앞으로 갈 테니까 옷 챙겨 입고 나와.”
 “어…… 응.”
 전화를 끊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반쯤 흐리멍텅한 정신으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머리 속에서 순식간에 여러 가지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J가 해맑게 웃던 모습, 함께 캠퍼스를 거닐거나 술집 골목을 어슬렁거리던 모습, 잔뜩 찡그린 얼굴로 미안하다는 잠꼬대를 하던 모습.
집 밖으로 나와, 친구와 함께 택시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장례식장 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남자 선배들을 만났다. 친구와 나는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고 같이 담배를 태웠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선배들의 낯빛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우리는 조용히 담배를 태우고,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영정사진 속 J는 우리를 바라보며 예전의 그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J에게 두 번 절을 하고 J의 부모님께 한 번 절을 했다. J의 어머니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분향실 밖으로 나왔다. 나는 더 이상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친구에게 소리를 낮춰 물어보았다.
 “J형… 왜 자살했대?”
 “K선배 때문에……”
 “K선배?”
 “응. J선배 부모님이 둘이 만나는 걸 반대했대.”
 “왜?”
 “그게……”
 
 J와 K의 관계는 우리가 표면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평온하지만은 않았다. K는 연인이라는 이유로 J에게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데이트비용을 J가 전담하는 것은 물론이었고 K는 J에게 명품가방, 악세사리, 화장품 등등 많은 것들을 원했다. J는 그것들을 모두 사줄 만큼 여유 있는 집 자식이 아니었다. J가 대학생활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던 이유는 K의 욕심-사치심-을 채워주기 위해서였다.
 둘 모두 같은 학생 신분일 때는, 위태롭지만 그럭저럭 이런 관계를 유지해나갔던 것 같다. 둘 사이에 점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K가 취직을 하면서부터였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K는 보는 눈이 점점 높아졌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학교 친구들에서 직장동료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로 바뀌어갔다. 재력이 있고, 자신을 치장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 여자들과 K의 외모에 현혹돼 선물공세를 하는 남자들. J는 K에게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주위의 여자들이 치장한 어떤 옷이나 가방, 장신구가 예쁘게 보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그것과 비슷한 것 또는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지고자 했다. 대부분 J를 닦달해 얻어냈으며 여의치 않으면 주변 남자들에게 넌지시 말을 던져, 그것을 상납하도록 유도했다. 어쩌면 이 시기에 J가 K의 본성을 –끝없는 욕심을- 알고 깨끗하게 갈라섰다면 둘 사이에 그런 비극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J는 K의 요구를 자제시키기 보단, 들어주기 위해 자신을 더욱 혹사시키기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를 2개로 늘리고 그것도 모자라 쉬는 날은 일용직 아르바이트까지 했다. 이 즈음이 바로 J가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된 시기였을 것이다.
 
 사람의 욕심에 끝이 있을까? 나날이 초췌해져 가는 J와 달리 K는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고 화려해졌으며 부티가 났다. 그도 그럴 것이 K 주변에는 J뿐만 아니라 여러 남자들이 있었고, K는 그들에게서 물질적인 지원을 아낌없이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K는 백화점 명품관에 들렀다가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가방을 발견했다. 명품 중에서도 특히 고가의 브랜드인 이 가방은 한정판으로 출시되어 국내에서도 몇 없는 가방이었고 따라서 그 가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 가방에 마음을 빼앗긴 K는 그날부터 J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K의 요구에 J는 난색을 표했다. 자신의 형편에 그렇게 비싼 가방은 사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K는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백화점에 가 그 가방을 뚫어져라 보았고, 자신이 보지 않는 사이 혹시라도 누군가가 사가지는 않았을까 늘 불안해했다. 다른 남자에게 사달라고 해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 정도 고가의 가방을 선뜻 사줄 수 있을만한 남자는 없었다. K의 머리 속에서 언뜻, 무서운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생각’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아주 무서운 행위다. 어떤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어느 순간, 현실로 구현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정말 갖고 싶단 말이야.”
 “또 그 얘기야?”
 “왜? 지겨워? 그래 지겨울 만도 하지. 너무 오래 만나서 이제 지겹지?”
 “그런 말이 아니야.”
 “그럼 뭐야? 내가 지겨워져서 이제 아무 것도 해주기 싫은 거잖아.”
 “아니야! 아니란 거 알잖아. 나도 사주고 싶어. 니가 그렇게 갖고 싶어 하는데 나라고 안 사주고 싶겠어?”
 “그럼 사주면 되잖아.”
 “한 두 푼 짜리도 아니고, 나한테 그렇게 큰 돈이 어딨어.”
 “너네 집, 그렇게 어려워? 전엔 잘 산다며. 나한테 거짓말 한 거야?”
 “우리 집 그냥 평범해. 나 우리 집 잘 산다고 한 적 없어.”
 “치. 됐어. 나 갈래.”
 “어딜?”
 “집에.”
 “……화났어?”
 “야! 넌 왜 사람을 우습게 만드냐. 내가 그런 걸로 화내고 그럴 사람 같아?”
 “그럼 왜 그래?”
 “너… 좀 변한 것 같아.”
 “내가?”
 “응.”
 “내가 어떻게 변했는데?”
 “내가 전부터 느꼈는데 너, 예전 같지 않아.”
 “그게 무슨 말이야?”
 “예전엔 내가 해달라는 거 다 해줬잖아.”
 “그거야 여유가 되면 해줄 수 있는 거지만 이번엔…”
 “아니야. 확실히 달라. 예전엔 날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을 항상 보여줬었는데…… 이제 그런 모습이 없잖아.”
 “지금도 충분히 애쓰고 있어! 여기서 얼마나 더 노력하라고?”
 “이거 봐. 또 그러지.”
 “뭐가?”
 “내가 해달라는 거 못해주면 예전의 너는 늘 미안해했어. 지금은 봐. 오히려 날 혼내듯이 말하고 있잖아.”
 “야! 진짜 돈이 없는 걸 어쩌라고!”
 “돈이 없으면 장기라도 팔던가! 아니면 그런 시늉이라도 하란 말이야. 성의를 보여달라고! 단칼에 자르는 너 보면… 정말 변한 것 같아서 싫어.”
 “……알았어. 내가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니 마음 못 알아 줘서… 내가 되는 데까지 한 번 노력해볼게.”
 “됐어. 니가 노력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나 먼저 간다.”
 
 돌아서서 가는 K를 J는 붙잡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무서운 ‘생각’은 점점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한참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이 가 닿은 곳은 버스터미널이었다. 버스터미널 화장실로 간 그는 벽에 붙은 장기밀매 전화번호를 보았고, 핸드폰을 꺼내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저기……”
 “일단 만나서 얘기하죠. 노량진역 4번 출구로 와요.”
 “아, 저 그게 아니라”
 “무서워하지 마세요. 좋은 일 하시려는 분이 왜 그래? 1시간 후에 봐요.”
 “아… 네.”
 J는 줄담배를 태우며 생각했다.
 ‘과연 이게 옳은 일일까? 정말 이 방법 밖엔 없는 걸까?’
 어떤 물건에 대한 K의 무서운 집착을 J는 알고 있다. K의 집착은 그 물건을 소유하기 전에는 절대 끝나지 않는다.
 ‘그래. 이 방법밖에 없다. 나는 K가 아니면 안 된다. K가 없는 삶은 상상할 수 조차 없다. K를 절대 놓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겁이 나도 해야 한다. 해야만 한다. 어차피 2개 중에 1개만 있으면 사는 데 지장 없다는데, 까짓 거 눈 딱 감고 한 번 해보자!’
 J는 담배를 끄고 지하철을 타고 노량진 역으로 향했다. 노량진 역에 도착하니 멀끔한 차림의 남자가 다가왔다.
 “전화하신 분이죠?”
 “네…”
 “따라오세요.”
 남자를 따라 차에 탔다. 운전석에는 또 한 사람이 타고 있었고, 남자와 J는 뒷자리에 앉았다.
 “우리 일이 또 보안이 생명이라… 요걸 좀 써주셔야겠어.”
 남자가 J에게 안대를 씌웠다. 1시간쯤 달려 도착한 곳에서 차는 멈춰 섰다.
 “내리세요.”
 남자의 도움을 받아 차에서 내려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J가 따라 들어간 곳은 어느 건물의 지하실 같았다. 그곳에는 수술대 같은 것이 있었고, 안경을 쓴 노인이 J를 바라보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남자가 자신의 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신장 맞죠?”
 “네?”
 “신장 말이예요. 각막, 심장 말고 신장.”
 “네…”
 “대부분 그렇죠. 댁같이 멀쩡하게 생긴 사람들은 더더욱.”
 “……”
 “인생 막장까지 간 놈들은 각막이고 뭐고 다 팔거든. 그건 좀 아니다 싶어. 이 좋은 세상 다 보고 즐기는 맛인데. 눈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야. 신장이 딱 좋지. 생명에 지장 없어, 돈 생겨. 얼마나 좋아? 댁 같은 사람들 신장으로 우리는 또 목숨 하나 살리거든. 이게 바로 상부상조 아냐?”
 “……”
J는 남자가 시키는 대로 윗옷을 벗고, 수술대 위에 누웠다. 두려움에 손발이 떨리고,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남자가 J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한 숨 자고 일어나면 다 끝나.”
 노인이 마른 웃음을 웃으며 J에게 말했다.
 “끌끌끌… 좋은 일 하는 거야. 자네.”
 노인이 J의 팔에 주사를 놓았고, J는 곧 수면마취상태가 되었다.
 
 J가 눈을 뜬 곳은 한강 둔치였다. 누군가 칼로 휘젓는 것처럼 배가 아팠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어 주변을 훑어보고 주머니를 뒤졌다. 안주머니에 흰 봉투가 있었고 그 안에는 이천만 원이 들어있었다. J는 퍼질러 앉아 손에 든 돈봉투를 보았다. 옷을 들춰 올려 배에 난 수술자국을 보았다. 돈봉투와 수술자국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 이걸로 된 거야. K가 그렇게 원하던 걸 내 힘으로 해줄 수 있어.’
 J의 눈에서는 붉은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J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이제는 그저 돈봉투만 바라볼 뿐이었다.
 
 며칠 뒤 K와 J는 함께 백화점 명품관으로 향했고 백화점 밖으로 나오는 K의 손에는 그토록 원했던 명품 가방이 들려있었다. K의 얼굴은 환하게 빛이 났고, J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늘이 있었다.
“자기야. 우리 오늘… 할까?”
 “지금?”
 “응. 나 하고 싶어.”
 “어… 알았어.”
 “왜? 하기 싫어?”
 “아니야.”
 “그럼, 빨리 가자.”
 함께 모텔에 들어간 둘은 섹스를 했고, 평소와 다르게 적극적인 K의 모습에 J는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수술한 상처가 보이지 않도록 불을 모두 끄고 행위에 임했으며, 행위가 끝나고는 바로 욕실에 들어가 씻고 옷을 입었다. 아직 배의 상처가 아물지 않아 고통스러웠고, K의 달라진 모습 또한 J의 가슴을 고통스럽게 했다.
 
 집에서 샤워를 하고 나와 옷을 입는 J를 J의 어머니가 보았다. 정확히는 J의 배에 난 꿰맨 자국을 J의 어머니가 보았다. J의 어머니는 수술 자국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고, J는 적당히 둘러대려 했으나, 집요한 어머니의 질문에 사실을 말 할 수밖에 없었다. J의 어머니는 하늘이 노래지고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자신의 아들이 그까짓 여자애 하나 때문에 이런 무서운 짓까지 저질렀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눌 수 없는 분노가 치솟기 시작했다.
 
 J의 어머니는 K를 만났다.
 “우리 애랑 다신 만나지 말아라.”
 “왜요?”
 “몰라서 묻니?”
 “네. 저희 잘 만나고 있어요. 뭐가 문제죠?”
 “우리 애가… 너 때문에 장기를 팔았다.”
 “네?”
 “정말 몰랐니?”
 K의 머리 속에 자신이 뱉었던 말들과 얼마 전 선물 받은 명품 가방, 그 날 모텔에서 J의 이상했던 행동들이 빠른 슬라이드로 지나갔다.
 “몰랐어요.”
 “애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넌 뭘 한 거냐?”
 “제가 시킨 거 아니에요.”
 “걔가 오죽했으면 그런 일까지 했겠니? 그 돈으로 뭘 했는지도 들었다. 니가 그런 허영만 부리지 않았어도… 우리 애가 그런 끔찍한 일을 하지는 않았을 게다.”
 “갖고 싶은 걸 얘기하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이에요? 돈 없다고 장기를 파는 사람이 정상이에요? 그렇게까지 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너랑은 대화가 안 통하는구나. 어쨌든 앞으로 다신 내 아들 만나지 마라. 연락도 하지 말고. 다시 한 번 내 아들이랑 연락하거나 만나면, 너는 물론 네 가족까지 동네에서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하게 만들 거다.”
 “참나, 어이가 없어서…”
 “그게 어른한테 할 말이니?”
 “알았어요. 안 만나면 되잖아요. 전 아쉬울 거 없어요.”
 “후… 먼저 일어난다.”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돼? 무슨 일 있어?”
 “전화하지 말라니까.”
 “왜 그래? 내가 뭐 잘못했어? 말을 해줘야 알지.”
 “…… 나 너네 어머니 만났어.”
 “…… 미안하다.”
 “됐어. 그냥 끝내자. 나도 이제 너 무서워서 못 만나겠어. 그냥 해본 소리를 그렇게…”
 “우리 일단 만나서 얘기하자. 내가 다 잘못했어.”
 “아니, 우리 그만 만나. 앞으로 전화하지마.”
 
 “문 좀 열어봐! 며칠 째 밥도 안 먹고 너 도대체 왜 이러니!”
 “……”
 “그깟 기집애가 뭐라고 니가 이러니! 휴… 엄마 나갔다 온다. 식탁에 밥 차려놨으니까 나와서 꼭 먹어.”
 J의 어머니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현관문을 나섰다.
 
 외출했다 돌아오는 J의 어머니는 아파트 화단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았다. 경찰차와 구급차도 보였다. 불현듯 불길한 생각이 들어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았다. 그의 아들이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모습을.
 J의 어머니는 폐허처럼 천천히 무너져 내리다 혼절하였다.
 
장례식장에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가보니 K가 서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K의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검은 원피스를 입고 선 그 모습 중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K의 얼굴이었다. K의 얼굴에도 슬픔이 있을까? 울었던 흔적은 없었다. 자세히 보니 얼굴에 화장기가 있었다. 까닭 모를 울화가 치밀었다. 사랑했던 사람의 장례식장에 오면서도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얼굴에 분을 바르는 것이 정상적인 것인가. 거울 앞에 앉아 정성스레 화장하는 K의 모습을 상상하자 소름이 돋으며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내가 이렇게 화가 나는데, 가족들이야 오죽하랴.
수 분 후,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니가 여길 와. 당장 꺼져 이년아.”
 “J한테 인사만 하고 갈게요.”
 “이런 미친년. 우리 애 잘 죽었나 확인하러 왔냐. 니가 죽인 거야. 이년아. 니가 죽인 거라고!”
 “왜 저한테만 그러세요? 우리 헤어지라고 한 건 어머니예요.”
 “뭐? 뭐라고?”
 “그렇잖아요. 어머니가 우리 갈라놓지만 않았어도 쟤 저렇게 안됐어요.”
 J와 친했던 H가 중재를 했다.
 “뭐 하는 짓이야 이게. 따라 나와.”
 H가 K의 팔목을 잡고 장례식장 밖으로 끌고 나가려 했다.
 “놔 봐. 내가 뭘 잘못했냐고.”
 K는 끌려가는 와중에도 입을 닫지 않았다.
 “제발 조용히 좀 해. 이 씨발년아.”
 H가 참다못해 욕을 지껄였다.
 
 신랑과 신부가 퇴장을 한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꽃가루가 날린다. 하객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며 그들을 축하한다. 갑자기 결혼식에 온 것이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K의 행복한 웃음을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결혼식장에서 급히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지 않고 길을 걸었다. K의 웃음은 진심일까? 정말 행복한 걸까? K는 그때의 일을 다 잊은 걸까? 아니, 사람이라면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K도 한동안은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장례식장에서 보였던 K의 태도를 생각하면 K는 그 모든 일이 J의 바보 같은 판단, J어머니의 그릇된 개입, J의 나약한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을 겪고도, 아직 돈에 대한 욕심은 여전한 걸까?
왠지 울적한 기분이 들어 한참 동안 길을 걸었다. 걷는 동안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근처에 버스정류장이 있어, 그곳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한 여자가 내 옆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그 여자의 팔에는 아주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방이 들려져 있었다.
그 때, 술 취한 아저씨가 비틀비틀 소리치며 지나간다.
“내가 뭘 잘못했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한테 그래. 씨발 대한민국이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
왜 J선배는 저렇게 말도 안 되는 푸념조차 말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J선배의 자살에는 내 책임도 있다는 것을.
J선배가 내게 술을 마시자고 했을 때, 뭔가를 얘기하려다 하지 않았을 때, 그때 내게 하려던 말은 아마 저런 말이었을 것이다.
‘K가 나한테 왜 이럴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같은…
결국 선배는 망설이다 내게 말하지 못했고 나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나는 사실 얽히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J의 속마음을 좀 더 캐묻고 그의 진실을, 진심을 알게 되고, 내가 J를 적극적으로 말렸다면 내가 J를 위해서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혐오감이 들었다. 내 자신에게, K에게 그리고 세상에게. 토악질이 올라왔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그때의 장례식과 지금의 결혼식이 머릿속에서 뒤엉키며 지나갔다. 무섭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무서운 생각들이 자리잡기 시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 생각들은 단순한 생각이 아니다. 곧 현실로 튀어나올 땅에 묻힐 작은 씨앗이다. 세상 밖으로 튀어나와 싹을 틔우고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순간부터 무서운 비극은 시작된다. 나는 왠지 사람이 무서워진다. 이제는 아무리 아름다운 곳을 가도,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도 온전히 만끽하거나, 사랑하지 못할 것 같다. 아름다운 날개짓을 하는 나비의 징그러운 눈을 보았기 때문이다.



 


********
은상
당선작 심사평


  제9차 <창작콘테스트> 은상에 이름을 올리게 된 작품은 전찬무 씨의 단편소설「가방」이다. 
  전찬무 씨의 은상 당선을 축하한다.


소설가 김영찬 / 소설가 김충근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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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부문



■ 나락
   - 김주원


난 먹비가 오면 그녀를 삼킨다
지난 해 토해놓은 메아리가 제 길 찾아 돌아왔을지 모르니
다시 잘 타일러 돌려보내야 한다
 
흩어져 버렸다
뿌려 흩어져 하늘이 뿌옇다
 
미녀는 냉담했다
그녀의 블라우스 자락에 키스하고 매끈한 곡선 끝 매달린 여린 손을 잡아 올렸다
녹고 있었다
끓는 반죽 속을 헤집어 가장 얇은 가락을 찾아 새끼에 걸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것을이 있단 말이야
 
오늘처럼 근심이 뜬 밤엔 별을 먹고 싶다
부지런히 먹질을 하여 나만 볼 수 있게 덮어 내야지
 
꾸역꾸역 밀어 넣어둔 조각들이 미어 터져 나왔다
언제쯤이면 그녀를 뱉어낼 수 있을까
 
 
 
■ 봄에게서 소녀에게
   - 김주원

 
봄 친 라일락 방울새가 별을 빨아
단물 빠진 꽃 풍뎅이가 핥는다
 
늦은 밤 달빛이 향기를 삼켜
한 푼 이슬에 가지를 다 내어 바쳐도
자존심은 싫다더라
 
다 벗겨진 살갗 위 동산
몸 찾아 꿈 파는 여인네들
알량한 웃음과 숨을 맞바꿔
그래 그리 산다
 

 
■ 사공
   - 김주원
 
 
하늘을 삼킨 별빛 파도가 뱃바닥 쓸어 훑는다
끝나지 않는 이 장마의 첫 방울이 떨어지던 때 즈음
나룻배 하나 얹어 노를 저었다
 
천일이고 배를 저어도 뱃삯을 받을 수 없다 하였다
기이한 일이였다
 
해 뜨면 배를 띄워야지
결이 짖으면 다시 가라앉히고
물 밖으로 주둥이 내밀어 숨 삼키면
다시 여울 위로 배 띄워 올려야지
 
 

■ 어른들의 사랑은 낡았어
   - 김주원
 
 
텅 빈 눈동자에
사월 바람이 갉아먹은 별 한점 반짝
 
허울적 그래
외진 음지서부터 끌어모아 사랑해
 
스무 개의 언덕을 넘은 날 바라보는 네가
스무 개의 언덕 뒤에 서서 바라보는 네가
 
우울한 사랑을 거스르고 내려온
미치광이 별들과 한 잔 부딪혀 쨍
 
버드늘 살가운 이파리 날려
도스르고 다시 뵌 하늘이 억울해
 
들찬길 벅차 오른 가슴에 그래 사랑해
 
눈을 가리고 별을 스무 개까지 셌어
아직 너의 얼굴은 멀었나
 
 
 
■ 붉은 미소
   - 김주원

 
오늘의 마지막 가닥은 생각보다 길어
질척이는 노을에 푹 담근 꽃잎을 세며 널 기다렸어
몇 송이면 너를 살 수 있을까
 
덜 익은 두 뺨에 불그죽죽한 석양을 칠한 소녀
너를 쫓아 마른 평원을 내달리는 작은 어깨
 
조금 이른 시간 벌써 잠자리야
새벽에 재워 둔 웃음 말곤 아무 것도 덮지 않았어
 
낡은 밤에 잠긴 달 위에 칠해진 우리
꽃물 속에 재워 둔 오늘의 끝자락
나의 몸을 허락해 준다면
너의 그 홍조 띈 미소를 떠먹여 주겠니


 


********

동상
당선작 심사평


  제9차 <창작콘테스트> 동상도 역시 시(詩)부문으로 김주원 씨의「나락」외 네 편의 시를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시인 김호철 / 시인 정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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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당선자들께서는
[월간문학 한국인] <창작콘테스트> 운영자 메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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