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콘테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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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콘테스트> 제22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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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 한국인]이 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고자 분발하는 젊은 영혼들의 순수 문학 창작의욕을 북돋기 위해 기획한 <창작콘테스트>가 제22차 당선자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월간문학 한국인]<창작콘테스트>는 작가로서의 무궁한 필력이나 완벽한 전문성을 하나하나 따져 시상하는 그런 대단한 문학상이 아니다. 오로지 전문작가가 되기만을 꿈꾸어온 예비작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다소 흠결이 있더라도 치열한 작가정신과 독특하고도 개성있는 표현,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따져 우열을 가릴 뿐이다. 따라서 설혹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 가능성을 보아 당선작을 뽑을 뿐임으로 문학상으로서의 권위를 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할 것이다.
  이번 응모자 또한 모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을 터이고 나름의 재능을 발휘하였다고 보여지지만, 상당수의 작품들은 여전히 진부한 낱말들의 사용과 구태의연한 표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점이 아쉽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그간 겪어온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에 의해 산고를 겪듯, 그 누구도 쓰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문체와 어법, 시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이번 <창작콘테스트> 제22차 공모에 참여해주신 작가 여러분들, 그리고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 창작을 자신의 운명으로 택하려하는 모든 분들께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기원하며 각별한 감사와 격려의 뜻을 전한다.








금상
*******************************************************************

소설부문



튼튼요양원 살인사건
유다은


  01

 

  식사시간 마다 네 명 몫의 식판을 챙기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힘이 부치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무엇보다 성가셨다. 살아가야 하는 시간이 지나온 세월에 덮여 겨우 발끝만 보이고 있었다. 이런 늙은이의 하루에서 가장 괴로운 일은 체념으로 무장한 마음을 깨우는 일이었다. 충청남도 어디쯤 위치해 있다는 이 요양원을 나는 쓰레기장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재활용은 꿈 꿀 수 없는,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버려지기 전 쌓였던 것들을 모두 태워버리고 까만 재가 되기를 기다리는 일 밖에 할 수 없는 공간 말이다. 그리고 딱히, 그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불평하지 말자. 묵묵히 내게 주어진 길을 걷자. 국자를 들고 국을 푸자!

  팔뚝만한 국자를 들어 건더기가 없는 멀건 국을 젓는다. 손톱만한 고기 한 조각이 쏙 국자 안으로 들어온다. 김여사의 식판에 국을 담을 차례였지만 나는 내 쪽으로 고기를 퐁당 빠뜨린다. 고개를 돌려 식탁에 앉아 있는 우리 조 사람들의 눈치를 살핀다. 김여사는 여느 날처럼 연신 조잘거리고 있었고 박노인은 흰 빨대를 들고 비눗방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담배 대신이었다. 자식 놈이 그나마도 가끔씩 보내오던 돈마저 끊으면서 그가 고안해 낸 방법이었다. 언젠가 연기 대신 허공에 솟아오르는 투명한 빛깔의 비눗방울을 보며 그가 말했었다. 그래도 그 녀석이 효자야. 50년간 핀 담배를 단숨에 끊게 했단 말이지. 식당 허공을 향해 뿜어낸 비눗방울이 톡 하고 벽에 몸을 부딪치며 터지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 흠칫, 놀라고 만다. 불쑥 머리를 내미는 이런 종류의 욕망이 찾아 올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꼭 식욕이 아닐지라도, 무언가를 하고 싶다다는 소망하는 마음이 들 때나 혹은 여자의 몸 같은 것이 그리워지거나 할 때 나는 내 늙어버린 몸이 떠올라 패배감에 시달려야 했다. 이제는 이런 것들을 조용히 내려놓아야 할 때다. 고민을 하다 내 국속에 담긴 고기 조각을 슬그머니 ‘잠자는 젊은이’ 쪽으로 담는다. 그래. 이런 단백질은 젊은이에게 어울리지.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

 

  식판 두 개를 들고 위태롭게 몸을 움직이는데도 김여사는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울컥한 마음이 들었지만 괜히 말씨름을 하는 것이 더 피곤한 일이었다. 김 여사 옆에 앉아 있던 박노인이 물고 있던 빨대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켜 식탁에 손을 얹어 시동을 걸 준비를 한다.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젓는다. 박노인은 걷기 위해서 자동차처럼 시동을 거는 시간을 필요로 했다. 팔로 다른 이의 손을 잡거나 그것도 아니면 벽 같은 것을 잡고 한 곳에 서서 몇 번의 제자리걸음을 해야 그 반동으로 겨우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저 이의 도움을 받느니 그냥 내가 한 번 더 몸을 움직이는 것이 간편했다. 탁. 신경질적으로 김여사 앞에 식판을 내려놓는다.

 

  아이고. 형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젊은이 밥은 내가 먹이겠습니다. 시장하실 텐데 형님은 어서 식사하세요.

 

  박노인이 휴지로 싸 놓은 틀니를 끼며 말했다. 그가 살아온 시간들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이의 몸에는 비굴함이 묻어있었다. 평생 남을 부려 보지 못한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기운이었다. 그는 궁중의 암살을 모의하는 궁녀처럼 낮은 목소리로 모든 말을 비밀스럽게 내뱉곤 했다. 안부 따위를 묻는 간단한 대화도 그랬다. 튼튼 요양원에서는 서로 살아온 세월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냥 막연히 가끔씩 튀어 나오는 몇 마디 말에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당신의 삶도 나만큼 고단 했겠구나…유감이다. 그렇게 힘든 길을 걸어왔는데 삶의 종착지가 이 곳 이라니 …그런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곤 했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제 쪽으로 식판을 끌어당겨 국에 밥을 말아 넣는 김여사의 모습이 보인다. 무릎이 아파 걸을 수 없다는 핑계로 내게 밥을 나르는 것을 미루곤 했지만, 산책 시간이면 누구보다 사뿐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가는 그녀의 모습은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은 알고 있었다. 대궐 같은 집에서 고생 없이 자랐고, 여고시절에는 공부도 잘했으며 학우들과의 사이도 좋아서 반장을 도맡아 했다는, 남편과 사별하기 전 가정부까지 두고 살았다는 그녀의 레퍼토리는 지금 식당 곳곳에 울리고 있는 핑크의 노래처럼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유복하게 살았다면 왜 지금 이 식탁에 앉아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수저를 들고 있는 저 손은, 고생의 흔적이 문신처럼 새겨진 저 거친 손은 어떻게 설명할 거란 말인가. 밥 한술을 크게 푼 그녀가 입 안 가득 그것을 쳐 넣는다. 미처 입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밥 풀 하나가 그녀의 입꼬리에 붙어 실룩인다. 올해 66세라고 했던가. 아직은. 좋을 때군.

박노인에게 수저를 건네받는다. 젊은이는 오늘도 쉽게 밥을 먹으려 들지 않았다. 이십대 후반쯤 되었을까. 이 요양원의 유일한 젊은이였지만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허공을 보는데 썼다. 그래서 그를 지칭할 때, 이 곳의 노인들은 잠자는 젊은이나 꿈꾸는 젊은이 혹은 늙은 젊은이라고 불렀다. 밥을 먹이기 위해 부드럽게 그의 입을 벌리자 붉은 혀가 내 손에 닿는다. 멈칫. 그의 혀가 잠시 멈칫거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늙은이의 맛을 느꼈을 것이다. 떫고 시큼한. 죽음에 가까워진 소멸의 맛 말이다. 황급히 손을 떼고 국속에서 고기 조각을 찾아내어 그의 입에 넣어준다. 그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고기 조각을 보며 잠시 박노인의 눈빛이 빛나는 것이 보였다. 아까 내가 품었던 욕망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천천히 젊은이의 이 사이에서 고기가 씹혀 사라진다.

 

  식사를 마치고 중앙홀로 자리를 옮긴다. TV에서는 핑크라는 여자애가 방정맞게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뉴스라도 보면 좋겠지만 채널을 마음대로 돌렸다가 원장에게 어떤 경을 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우리는 핑크를 본다. 구애를 하는 짐승처럼 열렬하게 몸 이곳저곳을 더듬으며 춤을 추는 그녀를 본다. 이 사람아. 미안하지만 나는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네. 그러니 그렇게 열심히…그렇게 엉덩이를…얼굴이 붉어진다.

 

천박해. 요즘 애들은 영 고상한 것을 모른단 말이지.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던지고 브라도 없이 메리야스만 걸친 김여사가 말했다. 탄력 없이 축 늘어진 그녀의 팔뚝 살과 옷 사이로 보이는 쳐진 젖가슴이 대비되어 핑크의 젊음이 더욱 빛나 보인다. 이마의 땀이 뚝 무릎에 떨어진다. 응접실에는 낡은 선풍기 하나만이 사력을 다해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이 곳 노인들은 켤 수 없는 에어컨 한 대가 굳건하게 서 있었다. 가족이 면회를 오거나 할 경우만 가끔 작동이 되는 에어컨이었다. 세수라도 할까 엉덩이를 들썩이다 다시 자리를 잡고 앉는다. 핑크가 TV에 나오는 시간에는 꼼짝하지 않고 그녀를 봐야 하는 것은 튼튼 요양원의 규칙이었다. 핑크는 원장의 딸이었다. 가끔씩 걸려오는 아들 녀석이 영 이름을 모르는 것을 보면 유명한 가수는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핑크가 원장의 딸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오늘밤 당신을 유혹하겠다는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잠을 깨야 했고 청소를 해야 했고 또 가끔은 위문공연이랍시고 이곳을 방문해서 노래를 부르는 그녀를 향해 박수를 쳐야했다. 들리는 소문으로 꽤 많은 출연료가 요양원 이름으로 그녀에게 지급된다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곳에서 죽음을 기다린다. 원장이 우리들에게 보이는 많은 행동들은 부당했지만 반박하지 않기로 한다. 혁명 같은 것은 노인과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깜박. 형광등이 깜빡인다. 숨이 끊기기 직전의 생명처럼 그 모습이 위태롭게 느껴진다. 몇 몇 늙은이들이 불안하게 불빛을 바라본다. 지치지도 않는지 핑크의 노래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다시 땀이 뚝 하고 흘러 이번에는 발끝에 떨어진다. 그것을 신호로 하늘을 두드려 대는 것 같은 천둥소리가 시작 되었다. 장마였다.

 

02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천둥은 밤 새 계속되었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들리지 않는 주제에 이상하게 감각은 예민해 지고 있었다. 죽음이 보내는 신호를 그냥 지나치지 말라는 신의 은총인 걸까. 그 덕분에 자주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눈을 감고 잠이 오기를 기다리다 우리조가 내일 아침당번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튼튼 요양원에 입소한 사람들의 보호자들은 당연히 고용된 식당 직원들이 우리들에게 밥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알고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주방을 관리하는 관리자가 상주해 있었다. 다만 정작 일들은 아직 몸이 성한 나 같은 노인들이 해야 했다. 보통 순서는 조별로 돌아갔고, 우리 조는 그래도 잠자는 젊은이를 빼면 세 명이 일을 할 수 있으니 양호한 편이었다.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잠이 밀려온다. 그냥 잘까. 시계를 본다. 새벽 세시였다. 아침 기상까지 네 시간이 남아있었고 내일은, 아니 12시가 넘었으니 오늘은 요양원 대청소를 한다고 했다. 생각만으로 피곤함이 밀려왔다. 정말이지 고요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 올려 덮는다. 조치를 취해 놓았으니 어쩌면 조용히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좀 자자. 그리고 바로 잠이 들었다. 이대로 잠들이 죽는다면 호상이겠지…그런데 남의 죽음보고 호상이라는 건, 좀 나쁜 것 같다.

 

  누구의 장례식인지 모르고 영정사진을 향해 절을 한다. 두 번 한다. 원래 그렇게 하는 것이 예법에 맞는 일이니 의심도 없이 몸을 두 번 굽힌다. 지끈. 통증이 허리를 칼날 같이 쑤셔댄다. 비가 오려나…하다가 피식 웃음이 나온다. 아주 오랜 만에 할머니 생각이 났다. 내가 아직 머리에 피딱지도 마르기 전 어린 시절에 나를 앞에 두고 할머니가 자주 하는 말이었다. 내 나이 무렵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무럭무럭 자라서 나는 결국 이생에서 할머니와 동무가 되었구나.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문득 죽은 이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나는 이렇게 오랜 시간 살아서 아직 세상의 끝에 끈덕지게 매달려 있는데 누군가는 미련 없이 저승으로 떠나는 구나 싶었다. 고개를 들어 그 누구의 얼굴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핑크가 영정사진을 가로막고 내 앞에 섰다. 하얀 상복을 입은 채였다. 그리고 이내…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언제 봐도 방정맞은 춤이다. 육개장 냄새가 코끝에 스친다. 나이가 들면서 육개장 냄새를 맡으면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리곤 했다. 핑크의 춤이 계속 된다. 그제야 나는 곧 지금 내가 있는 이 공간이 꿈속이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닫는다. 기다리면 잠에서 깨어나게 되겠지, 기다리다 결국 이렇게 노년의 시간으로 흘러 들어온 것처럼.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슬그머니 눈을 떠본다. 선뜻 지금 내가 몸을 누이고 있는 이 공간이 현실이라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똑똑똑. 내가 반응 하지 않자 노크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박노인인가 싶어 그대로 문을 열어준다. 그러니까 팬티바람이었다. 노크의 주인공이 박노인이었다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복장이었다. 그러나 문을 열자 서 있는 것은 잠자는 젊은이와 김여사였다. 차마 가릴 생각도 못하고 왈칵 얼굴이 붉어졌다. 이런 나와 달리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툭 하니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뱉어내더니 돌아서 가버린다.

 

  나와요. 아침 준비하게.

 

  몸에 옷을 껴 넣으며 그녀의 시선이 내 아랫도리에 잠시 머물렀던 것을 떠올린다. 잠잠 했을 것이다. 내 몸이 아직 젊었던 시절 그랬던 것처럼 불쑥 튀어 나와 그녀를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팬티바람인 채로 그녀를 맞이했던 순간과 다른 수치심이 슬그머니 밀려왔다.

 

  식당에 도착하니 박노인은 이미 와 있었다. 그는 밀방망이를 들고 반죽을 밀고 있었다. 그 옆에서 김여사는 열심히 무언가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떨어지는 침방울이 가끔씩 흰 반죽 위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괜스레 큰 소리로 기침을 해본다. 그러자 내가 식당으로 온 것을 눈치 챈 김여사가 말을 멈춘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내 아랫도리에 관한 이야기일 테지. 유치하기는. 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근데 박영감은 물건이 설까. 하긴 나보다 십년이 젊으니 혹시 모르지. 바닥에서는 잠자는 젊은이가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 우리에게서 몸을 돌린 채였다.

 

  젊은이여. 눈을 뜨시게.

 

  김여사가 안수를 하는 목사처럼 잠자는 젊은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장난스럽게 말한다. 저 놈의 여편네는 여전히 일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가 좋은지 속없이 히죽히죽 박노인은 그녀를 보며 웃어댄다. 원체 잘 웃는 그였지만 유독 그는 김여사에게 웃음이 후했다. 여자 보는 눈 하고는. 된장 한 한 스푼을 크게 퍼서 수돗물을 담아 놓은 들통에 넣고 휘휘 젓는다. 유통기간이 지난 것을 이미 확인 했지만 개의치 않기로 한다. 된장은…오래 될수록 좋은 거니까. 원래 묵히고 묵혀서 먹는 음식이니까 숫자 몇 개로 박혀있는 지나 버린 날짜쯤은 그냥 모른 척 하기로 한다. 죽음에 임박한 유통기간을 달고 모른 척 살아가는 이 곳 사람들처럼 말이다.

 

03

 

  원장이 부엌에 들어선 것은 들통의 뚜껑이 들썩이며 물이 팔팔 끓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에게서는 진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어쩌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몸을 비틀 거리며 그가 우리에게, 정확히 말하면 김여사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포식자 앞에 선 초식동물처럼 그녀의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김원장은 자주 우리를 때렸다. 특히 오늘 같이 술을 마신 날은 더 가차 없었다. 싱크대 쪽에서 밀방망이를 씻고 있던 박노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와 원장을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뭔가 결심한 듯 몸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추진력을 얻은 그가 출입문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내빼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손에는 차마 놓지 못한 밀방망이가 들려 있었다. 오늘의 목표는 김여사로 잡혔으니 괜히 끼어봤자 매만 한 대 얻을 뿐이었다. 박노인을 따라 몸을 돌려 부엌 밖으로 나가려는데 원장의 손이 김여사의 셔츠 속으로 쑥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가슴을 힘차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아 어머니 같아서 그래요. 어머니. 다 늙어서 누가 만져주면 고마운 일이지 안 그래요?

 

  김여사가 몸을 틀어 그의 손을 빼내려 하자 저 놈의 입에서 튀어 나온 말이었다. 그래도 저러면 안 되는데…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비틀. 그의 몸이 옆으로 흔들렸다. 혹시 행운의 여신이 내 쪽으로 돌아 선 건 아닐까. 잠시 작은 기대감 한 줄기가 내 옆을 스쳐갔다.

  어제 그의 방을 청소하면서 책상에 놓인 양주를 봤다. 하필 그 때 내 손에는 제초제가 들려 있었다. 무엇을 하려고 들고 간 것은 아니었다. 그냥 정원에서 제초 작업을 하다가 손님이 오실지 모르니 제 방을 청소에 놓으라는 원장의 성화에 이 곳에 급하게 들어 온 것 뿐. 에어컨에서 나오는 차가운 공기가 팔에 닿았다. 상쾌했다. 반쯤 비워진 양주병 옆에 제초제를 올려둔다. 생각을 좀 하기로 한다. 청소기 전원을 켜고 괜스레 원장의 방을 한 바퀴 돈다. 노인의 가래 끓는 소리 같은 듣기 싫은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린다. 내가 저 제초제의 뚜껑을 열고 양주병에 내용물을 넣는다면, 그리고 술과 함께 독극물이 그의 몸속에 들어가 장기 이 곳 저곳을 파괴하고 마침내 원장의 숨통을 끊어 놓는다면…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청소기 뒤를 따라 오고 있었다. 들고 있던 청소기를 내려놓고 뒤통수를 어루만져 본다. 김원장은 꼭 노인들을 부를 때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곤 했다. 노인들 중 유독 내 머리를 치는 일이 많았다. 튼튼 요양원에서 그나마 몸이 성한 내게 시킬 일이 많은 탓이었다.

 

  영감님. 영감님 머리는 꼭 잘 익은 수박 같단 말이야. 그 소리가 경쾌해!!

 

  원장이 내 머리통을 후려치는 순간이 못 견디게 싫었지만 그 말을 들으며 나는 웃고 있었다.아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새끼. 내가 퇴직하고 수박밭 하다가 망한 것을 알고 저러는 건가. 마른 걸레를 들고 그의 이름이 박힌 상장의 먼지들을 털어낸다. 내 노년의 평화를 담보 삼아 받아 낸 것들 이었다. 위 사람은 투철한 봉사정신과 희생정신으로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 공헌한 바 봉사정신이 투철하여 솔선수범 하였기에 이 상장을 수여함. 괘씸한 놈. 그로 인해 편안하지 못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무슨 일을 저질로도 괜찮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살아가면서 어떤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길 때 나를 끌어들이는 어떤 힘 같은 것이 함께 하곤 했었다. 그 일이 비록 옳지 못하거나 가까운 미래에 나를 불행하게 할지라도 영화 속 주인공이 결말을 향해 가기 위해 겪어내야 했던 씬들처럼, 정신을 차려 보면 그것들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아들 녀석이 사업 자금으로 내 남은 퇴직금을 야금야금 발라 먹을 때에도, 대학 동창이랍시고 찾아와 엄청난 수익금을 말하며 동업을 제안할 때에도, 그리고 병원에 함께 가달라는 아내의 청을 물리치고 회사야유회를 가버렸던 날도 그런 순간들이었다. 매일 밤 태우고 태워도 까만 재가 되지 않아 선명하게 머릿속에서 동동 떠올라 나를 괴롭히는 일들이었다. 걸레를 내려놓고 빨간색 병의 제초제 뚜껑을 연다. 한 모금 분량의 내용물을 양주병에 따라 넣는다. 완벽했다. 이걸 그가 마신다고 장담할 수 없었고 내가 섞은 독극물의 양이 치사량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죽어 버린다고 해도 그게 내 탓일지는 확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튼튼요양원에는 말이야.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지. 하나는 멀쩡한 인간이 없고 다른 하나는 cctv가 없어. 그러니까 괜히 억울하다고 떠들어봤자 증거가 없으니 헛고생들 말라고.

 

  노인들이 그에게 매를 맞고 억울한 표정을 지을 때 김원장이 했던 말이었다. 어차피 인생은 돌고 도는 것이니 그가 나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다 해도 김원장이 억울해 하지 않기를 바라본다.

 

 

04

 

  원장이 쓰러졌다. 그러나 그가 쓰러진 이유는 내가 섞은 독극물 때문이 아니었다. 아주 잠시 그의 몸이 흔들린다고 느끼는 순간, 김여사가 원장의 몸을 힘껏 밀었다. 꽤 큰 소리로 그의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그는 선뜻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의식을 잃었나 싶어 살피려고 그에게 다가가는데, 나 보다 박노인이 빨랐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밀방망이로 그의 머리와 몸들을 꽤 여러 차례 내리쳤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내 신발에 닿았다. 한동안 내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어리둥절해 하던 나는 그제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발을…발을 빼야했다.

 

  죽었나 봐요. 어쩌죠. 박노인이 사람을 죽였어요. 저 피 좀 봐요. 끔찍해라.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김여사가 말했다. 뻔뻔하기는. 정말 끔찍한 것은 그녀의 저런 태도였다. 오늘만은,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행동에 맞춰주고 싶지 않았다.

 

  그건 모르는 거지. 김여사가 밀어서 쓰러졌을 때 이미 죽었을지도.

 

  어쩌면 내가 섞은 제초제가 그의 죽음에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신발에 묻은 피를 바닥에 문질러 닦는다. 박노인이 물끄러미 제 발 밑에 있는 원장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는 쉽게 닦아지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살짝 밀었을 뿐인데. 어디 사람이 그렇게 쉽게 죽나요.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김여사가 말했다. 아니다. 사람은 쉽게 죽는다. 특히 이곳은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이 모인 곳이었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었다. 튼튼 요양원에 온 이후로 몇 차례의 죽음을 목격했다. 사람의 몸에서 생명이 빠져나가는 순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은 여기서 유일하게 얻은 진리였다. 죽어버린 김원장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걸음을 옮겨 박노인과 김여사에게서 멀찍이 떨어진다. 이번 일은. 김원장의 죽음에는 상관없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다. 허물어지듯 김여사가 주저앉는다. 아이고 아이고. 주먹으로 바닥을 두드리며 그녀가 운다.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박노인이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타닥타닥 제자리걸음을 하는 그의 모습이 비장하게 느껴진다. 그 동안 봐왔던 것 중, 가장 빠른 걸음으로 그가 내게 걸어온다.

 

  형님. 내가 죽인 거요. 그렇게 아시오.

 

  내 어깨를 잡고 박노인이 말했다. 그의 말을 들은 김여사의 표정이 일순간 환해진다. 진정한 구원을 만난 사람만이 질 수 있는 표정이었다. 구원자를 만난 앉은뱅이 신자처럼 빛나는 눈으로 김여사가 박노인을 본다. 그녀의 표정에 한껏 취한 그가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외친다.

 

  내가 죽인거야. 김원장은 내가 죽인거야!

 

  그의 결정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은 내게 남은 생의 평화, 그것이었다. 다른 것은 의미가 없었다. 발을 빼고자 마음을 먹었지만 박노인의 결심이 그렇다면 조금의 도움을 주기로 한다. 적어도 그의 죽음의 원인 중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여전히 잠자는 젊은이는 일어나지 않았다.

 

05

 

  김여사가 몸을 바쁘게 움직여 바닥에 쏟아진 피를 닦아낸다. 평소 때 같으면 저런 일은 박노인의 몫이었겠지만 모든 희생을 짊어지기로 한 그에게서 이 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표정을 담지 않은 얼굴로 그가 몸을 기댄 채 식탁 정중앙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었다. 원장만 앉을 수 있는 폭신한 의자였다. 당연히 노인들은 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원장은 지금 죽었고 살아있는 자는 박노인었다. 김여사의 지시에 따라 그의 겨드랑에 팔을 끼고 죽어 있는 몸을 끌어낸다. 쉽게 그의 몸이 끌려오지 않는다. 김여사가 붙어 원장을 함께 옮긴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그의 몸을 굴리기로 한다. 덜커덩 거리며 김원장의 몸이 굴러간다. 그의 머리가 몇 범 식당의 의자에 부딪쳤다. 꽤 경쾌한 소리가 났다. 그렇게 노인들의 머리를 때리더니 결국, 죽어서 다 돌려받는군. 나는 일부러 그의 머리를 의자 쪽에 가깝게 굴렸다. 이제 곧 아침이 올 것이다. 아침을 먹으러 사람이 모이면 일이 복잡해진다. 서둘러야 했다. 공범, 그녀와 그와 나 셋은 공범 아닌 공범이 되어 시체를 숨긴다.

  박노인이 비눗물과 빨대를 찾아 비눗방울을 만들어 낸다. 자잘한 방울이 그의 주변에 피어오른다. 부엌에 딸린 작은 방에 김원장을 겨우 밀어 넣고 박노인의 오른쪽 자리에 앉는다. 군소리도 없이 김여사가 요조숙녀처럼 암전하게 왼쪽 편 자리에 앉는다. 원장의 주머니에서 찾아 온 담배와 라이터를 그의 앞에 놓는다. 진상을 받은 강대국 나라의 왕처럼 근엄하게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들인다. 그가 뱉어낸 담배 연기가 얼굴에 닿는다. 독백하듯 그가 말한다. 그에게서 처음 듣는 반말이었다.

 

  내 아버지는 이름 없는 독립 운동가였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지. 나라를 위해 아버지는 가정에 소홀 했지만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어. 이곳에 온 뒤 나는 매일 생각했지. 나는 왜 아버지처럼 살지 못했을까. 한 끼의 밥을 위해서 그게 뭐라고 그렇게 목숨을 걸고 살았나… 그러나 오늘 알았다. 이 몸에는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었어. 이 몸에는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 할 수 있는 독립운동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거야.

 

  자서전이라도 읽는 듯 감격에 젖은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기가 찼지만 참아 주기로 한다. 그가 모든 것을 안고 간다면, 이제 평화로운 밤이 내게 찾아 올 것이다. 나는 온전히 내 생을 태우며 죽음을 기다 릴 수 있을 것이다.

 

  형님. 그리고 김여사. 죽기 전에 내가 꼭 해보 싶은 것이 있소. 내 마지막 청을 들어 줄 수 있겠소.

 

  죽는다니…자수를 한다고 해도 아직 재판이 열리지 않았고 사실상 우리나라에 사형제도가 쉽게 시행되지 않고 있다는 말이 목구멍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참아주기로 했다. 어쩌면 원장의 사망 원인이 제초제에 있을지도 몰랐다. 행여나…그것이 밝혀지면 나는 죽음을 교도소 안에서 맞이할지도 몰랐다. 여기나 감옥이나 사실 별 차이는 없었지만 어쩐지 살인자라는 단어는 명예롭지 않았다.

 

  뭐든 말해 봐요. 내가 다 들어줄 테니.

 

  당장 심장이라도 떼어 줄 것처럼 김여사가 말했다.

 

  내 마지막 청은…다름이 아니라 …

 

  지금까지와 달리 주눅 든 목소리로 그의 말이 이어진다.

 

  소고기가 먹고 싶어…겉만 살짝만 익힌 핏빛이 도는 그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그 육즙을 느끼고 싶어…

 

  그것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의 마지막 청이었다. 우리의 죄를 뒤집어쓰고 간다는 명분 아래 근엄하게 굴고 있었지만 결국 그는 그런 순간조차 입속에 들어가는 먹을 것을 떠올리는 미물일 뿐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 이었다.

 

06

 

  핑크의 음악이 기상송으로 울린다. 제 아비가 죽은 것도 모르고 그녀는 오늘도 오늘 밤 너를 유혹하겠다고 노래를 불러댄다. 비상금을 모았다. 그녀와 나. 그리고 박노인이 가지고 있는 돈을 모으자 십이만 이천 팔백원이라는 돈이 모아졌다. 지폐는 모두 구겨져 있었고 동전은 반짝였다. 소고기를 구해 오는 것은 김여사가 맡기로 했다. 아주 잠시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의심이 들었지만 이내 그러지는 않을 거라는 결론에 이른다. 우리가 모은 전 재산은 밖의 세상에서 살아 갈만한 돈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튼튼 요양원으로 돌아 올 것이다.

  박노인이 만들어 칼국수를 국속에 넣는다. 구수한 된장 냄새를 맡자 군침이 돌았다. 시계를 본다. 식사 시간까지 삼십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김노인이 식탁 위에 놓아 둔 비눗방울 통이 보인다. 숨을 불어 넣어 비눗방울을 만들어 본다. 여러 개의 비눗방울이 둥둥 허공에 떠다니다 유독 찌그러진 타원형의 방울 하나가 원장을 집어넣은 창고 쪽으로 흘러간다. 무심코 방울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놀랍게도 방울의 끝에는 김원장이 있었다.

  그는 죽지 않았다. 김여사의 말이 맞았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는 것이 아니었다. 죽음이 쉬운 것은 나 같은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었다. 어느 새 김원장의 손에는 자신의 피가 묻은 밀방망이가 들려있었다. 그의 매가 가장 먼저 찾아 간 곳은 박노인이었다. 꽤 오랫동안 매질이 이어졌다. 박노인의 비명소리가 부엌 가득 울렸다. 그러자 하나 둘 밀려오던 노인들이 다시 걸음을 돌려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나도 그들의 틈에 껴서 내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내가 위치한 곳은 문 쪽이 아니었다. 밖으로 나가려면 매를 맞고 있는 박노인을 지나야 했다. 김원장의 시체를 창고까지 옮긴 것은 나였다. 김원장이 만일 그 일을 기억한다면 지금 저 매를 맞고 있는 것은 내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섣불리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 미친 늙은이가. 나를 때려? 이 새끼들아 니들 다 죽었어. 경찰 불렀으니까 평생 감옥에서 썩다 죽을 줄 알아!!

 

  새끼들이라 했다. 새끼가 아니라 새끼들이었다. 김원장이 지목하는 사람 중에는 내가 껴 있다는 말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살인은…아니 살인미수는 얼마나 감옥에 있어야 될까…아니 그 보다 자식놈 볼 면목이 없었다. 신발의 튄 핏자국이 유독 선명하게 보인다. 죽음이 찾아온다면 지금이 좋지 않을까. 그럼 호상이라고 인정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젊은 시절 잠시 나갔던 교회의 예배시간이 떠올랐다. 목사라는 사람이 말했다. 신은 절대자이고 간절히 기도하면 그 소망을 이루어 준다고 했다. 절대자여. 신이시여. 만일 당신이 존재한다면…지금 내게 당신의 존재를 보여주소서. 지금 내 목숨을 가져가도 좋고, 그것도 아니면 이 상황을 해결해 주소서. 잠시 시간이 흘렀다. 원장의 매질은 계속되고 있었다. 비명 지를 힘조차 없어졌는지 박노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거친 김원장의 숨소리만 들릴 뿐. 박노인의 몸이 축 늘어지자 타겟을 바꾸려는 듯 원장이 내게로 다가왔다. 다리가 저절로 떨려왔다. 눈을 질끈 감는다. 나는 그의 매질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신은 없었다. 원장의 매질이 이어졌다. 아니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프지 않았다.

 

  뭐야? 이 새끼야. 이거 안 봐. 씨발 너 뭐야?

 

  질끈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잠자는 젊은이가 원장이 움직이지 못 하게 꼭 잡고 있었다. 이제는 깨어난 그가 말했다.

 

  김원장님. 시민일보의 이민호기자입니다. 폭력은 그만 쓰시고 저랑 이야기 하시죠. 하실 이야기 참 많을 것 같습니다만.

 

  밀방망이가 김원장의 손을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그 소리를 신호로 운동시간을 알리는 핑크의 노래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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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당선작 심사평


  제22차 <창작콘테스트> 금상은 소설부문 유다은 씨의 「튼튼요양원 살인사건을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소설가 김영찬 / 소설가 김충근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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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부문



■ 영안실
   - 원이슬

고작 열 살에서 겨우 한 살을 넘긴 아이는
희미하게 그녀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한다.

혼자 겨우 누울 수 있는 비좁고 차가운 침대 위
곱게 수의를 차려입고
‘아,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라며
하늘을 향해 있었다.

참을 수 없는 비통함에
평소 투정도 부리지 못했던 소심한 아이가
악을 질러가며 그녀에게 소리를 쳐보지만
그녀에겐 세상에 외침의 전달이 끊긴지 오래
귀가 먹먹해지며 주저앉아 일어날 줄 모르고
온기 하나 없는 그녀는 작은 동산이 되었고

빛줄기 하나 들어오지 않는
암담한 방 안에 아이는 갇혀
두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크게 벌리고
귀를 열어도
거대한 어둠이 아이를 막고 있어
차가운 공기만 응답할 뿐

홀연히 방안에 갇힌 아이는
어둠으로부터 익숙해질 수도
벽을 짚고 일어설 수도
바닥을 기어 주변을 살필 수도
문을 열고 나갈 수도
없이

아이는 그녀의 나이가 되어서야
태연한척 꽃을 피우고 노래를 부르며 엄마를 그려본다.


■ 향기
   - 원이슬

봄에 피어나는 꽃의 향기보다
겨울에 그리움으로 피어나는 꽃이 더 짙은 향기를 낼 수 있다.

그러니 지금 아름답다 호들갑 떨지 말고

꽃이 진 후
꽃을 잊지 말아다오

사람도 사랑도
한 때가 아닌

한 때를 지난
내일이 더 아름다워야

향기가 될 수 있다.


■ 이별
   - 원이슬

한 걸음만
한 걸음만

온 몸이 찢어질 것 같은 추위 속에서
입김은 점점 거칠어지고
너는 내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채우고

각자의 손을 주머니에 찔러놓고
빙판길을 걷기 시작한 건
겨울이 오기 전부터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는
진부한 계절의 진리에 대해 의심을 품고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바람이 되어 나를 앞질러 가버리는

걸음의 내딛음이 두려울 만큼
발목에 피어난 보랏빛의 꽃


■ 오지 않을 봄
   - 원이슬

이미 저 먼발치 한참을 멀어져 가버린 당신이지만
여전히 아련한 꽃망울과 같아

수 없이
새로운 봄이 찾아와
수려하게 꽃들이 피어나도
한 쪽에 피지 못한 꽃망울이 마음에 쓰여

몇 해의 봄이 지나도
아련한 당신으로 남을 우리의 봄


■ 이별2
   - 원이슬

다리가 부러진 사람처럼
무릎으로도 서지 못한 채
너부러져 있는 내 모습이 어찌나 초라하던지.

맨 손으로 그릇을 씻기다
날카로운 가위에 손을 베이고 나서야
아프구나, 내가 지금 아파

고통을 망각하고 싶은 내 모습을 잊고 나를 잃어가고

혼돈의 시간 속에서 파괴된 내 모습에 실망 할 줄 모르고

걸음을 멈추어야 하는지
걸음을 빠르게 재촉여야 하는지
걸음을 되돌려야하는지
알 길이 없어

그대로 주저앉은 채
쪼그린 나를 안아주는 방법도 모르는 나를 두고
지나간 너를 바라보기만 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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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당선작 심사평


  제22차 <창작콘테스트> 은상은 시(詩)부문 원이슬 씨의「영안실외 네 편의 시를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시인 김호철 / 시인 정은정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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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 말없는 노인
   - 김인현

시골의 풍경은 선량하기 이를 데 없다. 몰려드는 빛과 바람이 시시각각 풍경을 변화시켜도 그 기품은 한결 변함없다. 계절에 따라 겪는 삶의 풍파에도 마찬가지다. 차디찬 입맞춤에도 사랑의 혼을 품고, 뜨거운 입맞춤에도 사랑의 혼을 품은 채 잔잔한 미소를 잃는 법이 없다.

허름한 집을 나와 들길로 접어드는 주름지고, 구부러지고, 거칠어진 노인의 발걸음 속에는 어김없이 느긋한 여유가 묻어있다. 답답한 듯 빨리 지나쳐 가기를 초조히 기다릴 필요가 없다. 길옆에 비켜서서 그냥 해바라기 같은 미소만을 짓고 있는 편이 옳다.

 하지만, 낯익게 지내왔으며, 서로의 생활을 다소 아는 사이로서는 최소한의 인사 정도는 필요한 법. “안녕하십니까, 밭에 나가십니까?”라고 인사했다. “응!”이라는 답변만이 들려왔다. 더 이상의 말은 사치이다. 이 시골 노인의 평생은 발길, 손길에 의해 유지되었지 유창한 대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말없는 자연의 소유물이다. 그래서 말없이 성장해 왔고, 말없이 전답을 일구며, 말없이 삶의 경과를 거쳐 가고 있을 뿐이다. 도시의 위락에 몸을 담근 자는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살아가는 것일까?”라고 애잔한 눈빛을 띄우겠지만, 그것은 마치 “도대체 왜 평화가 필요할까?”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도시를 떠나 고요한 시골풍경을 바라볼 때 어김없이 빛나는 갈망의 눈빛. 눈물로 혼을 적시며 평화를 갈망하는 저 자신의 애잔한 눈빛을 깜빡 잊은 것이다.

 하긴 고도의 기억력을 요구하는 도시의 생활 속에서는 그만큼 기억력을 잃기도 쉽다. 청명한 의식이 생겨난 때가 아득하리라 여겨진다. 정제된 언어가 있을 리가 없다. 쉬 싸움판이다. 싸움의 백미는 역시 언어이다. 자동차와 자동차가 부딪쳐도 언어가 먼저 나서며, 국가 간의 충돌이 일어나도 언어가 먼저 나선다. 싸움뿐만이 아니다. 그 싸움을 말리고 경계하는 도덕의 백미도 역시 언어이다. 사랑엔 간섭이 없으랴. 토라질 때나 달콤한 밀어를 나눌 때나 언어는 어김없이 나타나 서로의 심기를 대변한다.

 언어처럼 부지런한 것도 없으며, 언어처럼 피곤한 것도 없다. 문명의 어머니인 언어로서는 당연할 수밖에 없다.


 노인이 찾아가는 들길 위를 가로질러가는 전선에도 언어는 흘러가고 있다. 아득히 먼 곳의 음성들이 다양한 옷을 걸치고 마구잡이로 종횡하고 있다. 슬프고, 아름답고, 정다운 음성들도 있겠으나, 그러나 웬일인지 도시의 번잡스러움이 먼저 느껴진다. 그런 까닭에 슬며시 뚝 자르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전선의 이편저편에서 당황과 의심의 혼들이 갑자기 물 끓듯 보글거릴 것이다. 언어가 사라지는 것은 이렇게 혼란한 재앙이 된다. 전선 아래를 지나 들길로 가는 말없는 노인 역시 재앙이 된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언어를 숨기거나 나타내는 일에도 지혜가 따른다. 근엄하게 보이고자 침묵을 지키는 사람 앞에 서면, 나도 몰래 침을 꿀꺽 삼킨다. 긴장되고 불안해서다. 당연히 그가 불편하다. 그 사람의 그런 태도는 마치 상호 간의 화합을 원치 않은 처사와도 같다.

 물론 자기 자신을 간추리는 일은 필요하다. 하지만 간추린 자아를 안으로 갈무리하느냐 밖으로 표출하느냐에 따라 상호관계의 곡조는 달라진다. 나는 안으로 갈무리하는 편을 옳게 여긴다. 마음 편하면서도 겸허한 까닭이다. 하지만, 밖으로 표출되는 자아는 대체로 사나운 개를 만난 것처럼 경계심을 품게 한다. 종속적인 계층이냐, 영원한 남남이냐의 갈림길에서 서성이다가 그냥 되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그런 자는 당연히 그의 지혜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성격에 의한 침묵은 그나마 낳다. 내성적인 사람은 대체로 군중 앞에서 자기표현을 꺼린다. 그러면서도 누구 못지않은 수다를 가슴에 담고 있다. 만약 군중이 아닌 친구와 단둘이서라면, 그의 수다는 해안의 파도처럼 끊임없이 철석이게 된다. 어쨌든 그는 많은 시간을 침묵하고 있지만,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물론 사악한 음모는 없다.


 「침묵은 금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절반만 맞는 말이다. 사랑하는 연인이 그 말을 교훈으로 삼고 진종일 말 한마디 없다면, 산더미 같은 금을 준다 한들 좋아 할 리 없다. 봄의 훈향과도 같은 달콤한 입김을 풍기며 종달새처럼 명랑한 언어들로써 맛보아야 할 사랑의 진미. 그것이 사라지다니, 참으로 안 될 말이다. 연인의 침묵은 누구라도 달갑지 않은 일임이 분명하다. 그러니 바꾸어야 한다. 「가려서 하는 침묵만이 금이다.」라고. 그렇게 되면 사소한 일로 토라진 채 잠시 입을 굳게 다물어버린 연인의 태도는 매우 성공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 누구라도 안절부절 못할 테니. 그리고 그 결과는 더욱 밀착된 애정이다.

 정신과 의사도 그 효능을 알고 있다. 그들이 가장 요구하는 일은 정신질환자의 입술을 벌리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십 분이건 한 시간이건 귀만을 열어놓고 있다. 그 묵묵한 침묵으로 말미암아 거의 대체로 질환의 원인을 알아내고야 만다. 이 침묵이야말로 틀림없이 금이다.

 간혹 거의 완전한 침묵에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느낌을 나타내는 사람이 있다. 그는 어떤 경지에 오른 달관의 소유자다. 하지만 「경지에 오르다」라는 표현을 얻기까지는 그만큼의 어떤 심층적인 경과가 있어야만 한다. 대표되는 것은 역시 장인(匠人)의 연륜이요, 인생의 연륜이다.

 말없이 지나가는 80대 노인의 가슴 속에서도 그러한 연륜이 있다. 그리고 달관의 경지가 자연의 섭리처럼 펼쳐져 있다.


묵묵히 멀어져가는 그의 조그만 등판은 조그만 들판처럼 평화롭다. 물론 평생의 희로애락을 통하여 만들어 온 언어도 그 속에 있다. 이웃과 가축에게, 자연과 곡식에 던지는 말이 있고, 추억과 그리움, 회한과 희망, 그리고 하늘에 던지는 말이 있다. 타인이기에 들을 수 없는 언어들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바람에 씻기고 물결에 씻긴 청결한 감회처럼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그러니 말없는 노인을 스쳐 지나는 것은 늘 영광스러운 일이다.


■ 고가의 뜰에서
   - 김인현

 소리 낮게 대문을 닫는다. 대문은 정적과 잘 어울리는 소리를 내며, 진종일 떠다닌 행적을 소멸시킨다. 이른 아침 신선한 안개 속에서 어떤 제전을 준비하듯 정성스럽게 쓸어 놓은 뜰에는, 그 누구의 흔적도 없이 오직 대빗자루의 흔적과 내 발자국만이 그대로 남아 있다. 다만, 그 위에 참나무 잎이며, 오랜 무궁화나무 잎 등이 떨어져 있어 하루의 고적한 경과를 말해 줄뿐이다.

 그리하여 나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던 생각이 들고, 오늘 하루 무슨 일이 있었는지조차도 상상할 수 없다. 오직 뜰을 쓸 때와 쓸고 난 그 자리에 여전히 서 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아침녘에 이 뜰을 쓸고 있을 때, 사방은 안개로 자욱했다. 한순간이나마 무엇인지 모를 초월적 신비감에 휩싸였고, 알 수 없는 이념의 환영에 사로잡혔으며, 세상의 모든 소요로부터 일시에 벗어나 초연한 심적 상태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심적 상태야말로 우리네 가슴의 유일무이한 영원의 안식처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에는 내가 만약 저급하고 비천한 하인이었을지라도 하루의 고매한 일과를 예감했을 것이며, 신앙만큼이나 거룩한 이성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 느낌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내일 아침, 또는 어느 때 다시금 재현될지라도 매양 한순간에 머물고 말뿐이다. 영영 깃들지 않은 아쉬움은 있지만, 태양이 밤낮을 비추지 않는 것처럼 오히려 적절한 배려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느낌은 사랑이 갖는 의미만큼이나 무게 있는 영혼의 형질인 것만은 분명하다.

 

외출하고 돌아올 때면, 나는 이렇게 어김없이 마당을 잠시 바라보고, 그리고 서쪽 마당가에 다가선다. 담은 없다. 남쪽 담 귀퉁이에 흔적만을 남겨 놓은 채 오래전에 허물어져 버렸다. 그 자리에 아카시아 나무들이 자라 그 기세 좋은 성장력과 유월의 짙은 향기로써 한때를 풍미했지만, 넓은 들녘을 향한 시야를 죄다 가리는 통에 나날이 가지를 뚝뚝 꺾이는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더니, 어느 날 기어코 베이고 쪼개어져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오래된 그때는 낙엽에 묻히고 잡초에 가려져 이제는 기억 속에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어쨌든 원하는 대로 들녘의 지상은 기분 좋게 활짝 열려 눈부신 은빛 개울을 건너고, 넓디넓은 전답을 가로질러 아담한 소도시에 다다른다, 부족하다면 더 멀리 내달려 그윽이 늘어진 산맥을 더듬다가 구름 위로 뜀박질할 수도 있고, 하늘 위로 훨훨 날아갈 수도 있다.



 발아래에서 밑으로 가파르게 곤두박질치는 산비탈은 참나무 숲이 남북으로 좁다랗게 펼쳐져 있다. 나무들 사이로는 숲 가장자리를 따라 마을을 휘둘러 다니는 자갈길이 뽀얗게 들여다보이는 데, 들녘을 산책하러 나갈 때면 맨 먼저 걷게 되는 친숙한 길이다. 그러나 눈여겨보는 일은 없다. 그 누군가가 내 마음의 애정을 가져간 이가 있다면 진종일이라도 바라보았을 테지만, 기다림은 아직 내게 다가온 적이 없다.

 지금도 시선은 들녘으로만 향한다. 이곳으로 온 날부터 수백 번은 이렇게 해 온 것이다. 간혹 딴전을 피울 때가 있다면 그것은 필경 지천으로 늘려있는 들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노려 볼 때이거나, 다람쥐가 나를 무시할 때이거나, 커다란 왕도토리가 투두둑 떨어질 때임이 틀림없다. 그리하여 그들과 나 사이에 눈싸움이나 돌팔매질, 숨바꼭질 같은 놀이가 시작되는데, 나의 일방적인 그 놀이가 오래갈 턱이 없다. 한 호흡을 내쉬면 이내 모두 제 취향으로 돌아가 그들은 그들대로 나는 나대로 무심한 행적을 이끌어 갈 뿐이다.



 마냥 들녘을 바라본다. 해맑은 공기가 정겨운 인사처럼 여겨지나, 실제로 누구를 향해 인사하는지는 모르겠다. 풍부한 상상력이 미치는 바도 없고, 그것에 애태울 마음도 없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만 내 의식의 것인지 아닌지조차도 불분명하다. 심지어는 내 육신조차도 사라지고 없다. 무엇인가 거대한 동공만이 지상의 풍경을 감싸고 있다. 분명한 이유도 없이 그저 그런 느낌이 든다. 만약 시선의 움직임만 없다면, 나는 필경 이 지상의 그 무엇도 아니리라! 도와 같은 것, 천체와 같은 것. 뭐, 그런 것일 수도.

 나는 휴식을 마친 농부처럼 들판에 입성한다. 들판은 푸른 이불을 덮고 고요히 잠들어 있다. 그러나 저 들판은 조만간 다시 한 번 황금빛 머리를 출렁이며 일어나 분주한 소요를 일으킬 것이다. 그 이후에는 마치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듯 또다시 깊은 적막에 잠길 테지. 그때 들길을 걷는 자라면, 어떤 연민을 품고 온 그의 마음만큼이나 쓸쓸해하고 깊은 공허에 침식당하리라!

 하지만, 들판으로서는 아무래도 천혜의 휴식이 아니겠는가! 물론 인생에 연루된 들판이고 보면, 당연히 계절 따라 웃음 짓고 울음 짓는 법. 거기서 나는 오히려 지고한 생명의 애정을 느낀다.

 들판과 계절, 그 무궁한 미학을 노래하지 않는 자에게도 뛰는 맥박이 있을까? 이처럼 언제나 한자리에 서서 들판을 쓰다듬고 가는 계절의 미모를 죄다 바라볼 수 있는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가!



 멀리서 기적소리가 들려온다. 오늘따라 갈대숲의 휘파람 소리처럼 청아한 기적소리는 언제부터인지 나를 기상학자로 만들어 놓고 있다. 가까이서 아주 크게 울리면 대기는 저기압 상태이며, 바람은 대체로 남동풍이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북서풍이 분다면 기적소리는 더욱 멀어져 가고, 제대로 된 고기압이라면 아예 산화되어 버리는 것인지 행적조차 묘연해진다. 지금은 저 맑은소리로 보아 약간의 서풍이 불 테고, 기압은 고저 없이 균등하리라! 물론 유추이지만, 나는 그렇게 믿는다.

 들판을 빙 둘러 가로지르는 철둑을 바라본다. 조금 있으면 기차는 어김없이 소도시 변두리의 우중충한 풍경 사이로 불쑥 나타날 테지. 그리고 철길을 따라 빙 돌아서면 객차의 차창은 죄다 조그만 액자가 되어 아련한 무채색 흉상의 회화를 담고 있으리라. 나는 그 회화를 바라보며 어떤 숙명도 지니지 않은 영원의 여정을 느끼게 될 테지. 이런 생각에 도달할 때쯤이면 기차는 다시 한 번 맵시 좋은 기적소리를 울리게 된다. 숲과 산기슭에 가려 보이지는 않지만 이 마을 어귀쯤에 「양자동역」이라는 간이역이 있고, 그곳에 서겠다는 신호인 것이다. 결국, 누군가는 도착하고, 누군가는 또 떠나겠지만, 그때는 이미 그들만의 일이 된다. 나는 어느새 들녘의 지상으로 돌아가 또 다른 그 무엇을 기웃거리고 있을 테니. 저편 개울 건너 제방 위로 흐느적흐느적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있으매, "저분이 누구신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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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당선작 심사평


  제22차 <창작콘테스트> 동상은 수필부문 김인현 씨의 「말없는 노인외 한 편의 수필을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수필가 유미숙 / 수필가 정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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