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콘테스트> 제31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by korean posted Oct 3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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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콘테스트> 제31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월간문학 한국인]이 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고자 분발하는 젊은 영혼들의 순수 문학 창작의욕을 북돋기 위해 기획한 <창작콘테스트>가 제31차 당선자를 발표한다. 
  [월간문학 한국인]<창작콘테스트>는 작가로서의 무궁한 필력이나 완벽한 전문성을 하나하나 따져 시상하는 그런 대단한 문학상이 아니다. 오로지 전문작가가 되기만을 꿈꾸어온 예비작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다소 흠결이 있더라도 치열한 작가정신과 독특하고도 개성있는 표현,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따져 우열을 가릴 뿐이다. 따라서 설혹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 가능성을 보아 당선작을 뽑을 뿐임으로 문학상으로서의 권위를 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할 것이다.
  이번 공모 역시 응모편수가 역대 최저임에도 공모형식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응모한 작품이 상당수였으며 당선작으로 선정하기엔 작품성을 갖춘 작품이 없었다. 그렇다고 단 한 편의 당선작도 선정하지 않는다면 본래의 취지에 어긋날 듯하여 동상만 세 편을 뽑을 수밖에 없었음을 양해 바란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그간 겪어온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에 의해 산고를 겪듯, 그 누구도 쓰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문체와 어법, 시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이번 <창작콘테스트> 제31차 공모에 참여해주신 작가 여러분들, 그리고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 창작을 자신의 운명으로 택하려하는 모든 분들께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기원하며 각별한 감사와 격려의 뜻을 전한다.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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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부문



■ 지우개
   - 최병규


망각의 강물에 떠내려 가는 기억
어머니가 조금씩 떠내려 가시네 
커다란 멍에를 걸머지고 고난의 물결에 하나둘
기억을 떠내려 보내고 계시네
살아온 세월을 조금씩 떼어내고 계시네
밭을 떼어 내시더니 이내 부엌을 떼어 내시네
그리고는 금새 자식들을 떼어내시네
물결은 무심히 흐르는데 기억을 차츰 지우고 계시네
다 지우고 난 물결이 어머니 자신의
호흡마저 지우려 하시네
어머니는 거침 없이 호흡을 지우고 계시네
강물이 점점 빨라지네 어머니를
휘감고 떠나시네 아무도 그걸 막지 못하네
처다보고 눈물만 짓다가 돌아오네
내 손에 한움큼 지우개의 물결이 흐르네



■ 망모(亡母)
   - 최병규


가문비나무의 눈시울이 젖어있어요
눈물샘에 크나큰 배가 정박해 있네요
조금 지나면 저 커다란 어창에서 하역작업이 시작 되려나봅니다
어머니의 영정 사진이 웃고있어요
눈물이 하역을 하염없이 이루어지고있었죠
들판으로 나갔다가 갑자기 쏟아진 소낙비를
맞으며 돌아 오는 여름날의 오후처럼
눈물의 샘터는 줄줄줄 망자의 관을 떠 돕니다
어머니가 떠난 후 빈 배의 정박은 파도에
맡겨진 채 방파제의 옆구리를 쿵쾅거리겠죠
하역을 마친 연락선은 연락도 없이 떠나고
또 어디론가 선적의 길을 떠나 슬픔을 싣고 또
한 탱크의 눈물을 길어 오느라 분주해 지겠죠
경칩이 우수를 밀어냅니다 망종을 지나
입하의 문턱으로 들어 서는 날 지칫하다가
들판에서 뜻하지 않을 소낙비를 맞게 될지 몰라요
나는 소매에 쏟아질 눈물의 흉터를 봅니다
슬픔만 잠겼던 소매에 어머니의 얼굴이 달려있군요
미소를 지으며 지긋하신 음성이 실오라기에서
꾸물꾸물 애벌레처럼 눈시울로 기어 나오는군요



■ 새조개
   - 최병규


참새 한마리 바다로 갔다
바람이 갯벌의 조가비에 참새를 싣고
둥지를 날아 새알을 품고 살았다
새알은 갯지렁이를 먹고
바다는 새알을 먹고
파도는 갯벌을 마시고 살았다
참새는 조가비 속에서 오래오래 살았다
부리를 감추고 죽은 듯이 살았다
바다에도 참새가 산다
부리를 감추고 산다
조가비에 둥지를 짓고 바다를 먹고산다



■ 퉁퉁 베이커리
   - 최병규


길 모퉁이에 아내는 빵집을 열었다
해외 유명 빵집과 경쟁 하려면 이름부터
남달라야 한다고 난데없이 퉁퉁 베이커리
빵이 부풀어 오르 듯 꿈이 부풀어 올랐다
자신의 넉넉한 인정을 믿었던건 아닌지
공갈빵처럼 툭 꺼지면 한 입밖에 안되는
퉁퉁 부풀어 오른 빵은 푸짐한 인상을 켠다
빵같이 부푼 미래를 입식한 통통 베이커리
손님들의 색다른 각도의 입맛을 찾아서
독특한 상호의 호기심도 생기기 시작했다
쉴틈없어서 빵보다 더 부풀어 오른 다리
저 퉁퉁 부은 다리에 알맞는 퉁퉁 베이커리
때론 넉넉한 인정미 넘치는 이름같지만
고된 하루가 노릇하게 익어가는 격무로
일상의 행복을 부풀게 하는 가상한 노동이다
베이커리의 독특한 상호처럼 이왕이면
아내의 주머니가 퉁퉁 부풀어 오르기를



■ 만세에 관한 고찰
   - 최병규


음지에 남아있는 냉기는 아직 월동의 상처다
그리 어렵게 찾아 나선 사막같은 독립의 길
밤 사이에 사라지는 모랫길은 산을 만들고
끈질기게 수만년의 나이테를 그려 넣는 낙타가 된다

그 무릎의 각도에서 애국을 발견하는 일이다

봄을 알리는 꽃눈의 가지에서 물소리가 들리고
새들의 포란이 체온을 높이는 일이라면 동토에 결빙된 만세를
녹이는 일이란 쉽게 세상도 바꾸어 가게 되는 것일까

봄꽃들이 일제히 만세의 세상을 부르짓던 날
우리는 어느 강변에서 꽃잎을 따서 탄압의 소굴에 지우던 일을
무심히 바라보는 날이 아려온다

귓전에 가득 봄 바람이 함성의 끝자락을 맞잡으면
오래된 기억을 좇아 가는 애국은 사막에 쏟아낸 빗방울 같다
머나먼 시간의 뒤편으로 영혼의 이름으로 부르던 함성이다
그 쓰라린 탄압의 상처를 어루고 응시하는 계절

작은 손아귀에 만세를 불렀던 들판이 파릇파릇하게 눈을 뜬다
물소리의 계곡이 가파른 벼랑에 치켜든 손이 푸르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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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당선작 심사평


  제31차 <창작콘테스트> 동상은 시(詩)부문 최병규 씨의「지우개외 네 편의 시를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시인 김호철 / 시인 정은정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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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 고양이의 보은
   - 예정옥


  경력 단절 16년 만에 웹디자이너로 취업을 했다.
  시간도 보수도 좋으니 좀 더 안정적인 환경 속에서 하고 싶은 일인 글쓰기에 더 매진하자는 취지였다.
 디자이너의 페르조나에 걸맞게 화려한 패턴과 과감한 스타일의 옷을 장만하면서 뉴요커라도 된 듯이 즐거웠다.
12층 빌딩을 올려다보면서 화려한 미래를 꿈꾸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내 모니터보다 네 배나 큰 곡선형 얇은 모니터와 인체공학적 디자인이 적용된 듯한 의자가 있었다.
설명을 듣고 일을 시작하려는 찰나, 노란색 점박이 흰 고양이가 마치 모니터에서 튀어 나온 듯 모니터 뒤에서 유유히 걸어 나와 마우스를 잡은 내 오른손 위에 안착했다. 그러고는 심하게 반짝이는 동그란 눈으로 내 얼굴을 응시했다.
고양이가 말했다.
"너 여기 왜 왔냐?"
  갑자기 심한 갈등이 몰아쳤다. 고양이가 아닌건지, 내 선택이 아닌건지 여하튼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깟 고양이 한 마리의 출현에 마음이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마음을 다잡고 일에 집중했다.
고양이는 책상 위를 종횡무진 넘나들고 다리 사이를 오가고 급기야 예의 그 '우다다' 까지 선보이며 나보고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16년 만에 첫 출근한지 30분 만에 이곳은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고 판단하고는 때려치우고 나왔다. 그리고 열 평 내 사무실로 복귀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도 깜짝하지 않고 이 자리를 지키겠다고 말은 백번도 더 넘게 하면서 살짝 바람만 불어도 눈을 백번도 넘게 깜빡인다.
  경력 단절 16년 만에 출근한지 30분 만에 도망치듯이 허겁지겁 나오면서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고양이 때문이 아니었지만 고양이 때문에 알게 된 것이었다.

  한 직업을 가지고 마음에 동요 없이 꾸준히 한 길을 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성실하게 일을 하면서도 ‘이 일이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이 맞나?’, ‘나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은 무엇인가?’ 우왕좌왕하고 오랫동안 고민하는 이들도 있다. 청년 실업 문제가 커지고, 생업을 위한 아르바이트와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이 다른데서 오는 삶의 이중구조, 거기서 오는 에너지의 분열, 양가감정 등으로 힘들어 하는 젊은이들도 많이 본다.
  이제 중년이 된 나도 내가 진짜 원하는 일을 찾아, 내가 누구인가를 찾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찾아 오랫동안 방황했다. 때로는 긴 방황이 부끄럽고 절망적일 때도 있었지만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이게 내가 진짜 원하던 거야.“ 하고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좌충우돌, 갈팡질팡, 우왕좌왕, 갈지자로 종황무진 했던 삶의 여정은 나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아픈 사랑 끝에 배운 것이 무지 많다. 우왕좌왕의 실체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의 부족이었다. 정말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온전히 전력투구하지 못하면서 ‘내가 할 수 있을까?’,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많은데 내가 과연 될까?’ 그런 의심과 불안이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현실적으로 될 것 같은 보다 쉽고 안전한 길로 들어섰다. 쉽고 안전한 길은 내면에서 원하는 길이 아니니 조금 가다가 금방 내 길이 아닌 것을 느끼고 지루해졌다.
  헤아릴 수 없는 시도와 좌절 끝에 알게 된 것은 애초에 실패란 없다는 것이다.
  실패라고 생각하는 어두운 마음이 있을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걸리든 진정으로 순수하게 즐거운 일을 찾는 것, 그리고, 얼마나 오래 걸리든 꾸준히 그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럴 뱃심만 있다면 다른 것은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왜성해바라기가 자라고 있어요.’
파종시기 : 2019. 6. 10
개화시기 : 7~8월

  7월 19일 아침 산책길에 찍은 초록색 식물은 나선형으로 올라가면서 방사형의 잎이 나 있다. 한 달 뒤 8월 21일 오전에 찍은 사진에는 노란 해바라기 꽃이 피어나 있다. 거의 한 달 만에 생성 변형된 형태를 드러낸 것이다. 팻말이 붙어있는 같은 자리인 줄 몰랐다면, 관심이 없었다면 같은 개체인지도 모를 뻔 했다.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을 모르는 것이다.
 자신을 모르기에 남과 비교하고 부러워하거나 우월하게 여기며 스스로 갈등을 만들고 고통을 키우며 환상 속을 헤맨다.
  자신의 씨앗, 자신의 뿌리를 알게 되면 거기서 난 에너지로 살면 되는 줄 알기 때문에 초조해지지 않는다. 모든 초조함의 근원에는 먹고사는 문제, 생존 본능이 있다.
  초조함으로 성급하게 판단하고 행동하는 모든 행위를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자.

  6월에 파종한 해바라기는 7월이 되어 방사형의 초록 잎을 솟아내고 8월이 되어 해를 닮은 노란 꽃을 피워낸다.
  뜨거운 햇살과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도 타고난 자신의 본성대로 꿋꿋하게 피어난 해바라기는 자신의 근본을 아는 것, 근원적인 힘을 믿고 차분하게 살아가면 된다고 조용히 말하고 있다. 초조해 하지 말고 초연하라고. 



■ 신묘한 일
   - 예정옥


  한 인터넷 방송 플랫폼 BJ에게 시청료 개념인 별 풍선을 수 천 만원 지불하고 식사 요청을 거절당한 한 남성이 한강에 투신하여 구조대에 의해 구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멀쩡하게 구조된 남성은 매체를 통해
"열혈 팬은 전통적으로 소원권(소원을 들어주는 권리로 추정된다) 을 받는다.
별 풍선을 쏘고 BJ에게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면서
"금전적 피해보다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배신감과 상실감이 크다."
는 말을 남겼고, 이에 해당 BJ는 '식사를 하자는 말을 들은 적도, 들어줄 이유도 없다.'는 입장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많은 시민들은 사행심을 조장해서 힘들게 번 돈을 매수하는 BJ를 매도하거나 또는 그런 협박성 행동에 겁먹지 말고 하던 대로 밀고나가라는 격려, 또는 각종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건전하지 못한 플랫폼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 그깟 BJ에게 힘들게 번 돈을 갖다 바치고 하나뿐인 목숨을 버리려한 남성에 대한 지탄이 쏟아졌다.
여기서 주목되는 문장은 투신한 남성이 사용한 '전통적으로' 와 BJ의 '들은 적도 없다'는 대목이다. 이 문장들로 짐작하건데 모든 것이 환상 속에서 키워진 일들이란 것이다.
  문제가 키워지는 것은 실체가 없는 환상계의 영역이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제어하지 못하면 물질계의 고통으로 변환된다. 없지만 있게 되는 신묘한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사회면에 실리는 대부분의 흉악 범죄나 사건. 사고들의 배후를 따라가 보면 사건 자체는 각각 다르지만 이면에 얽혀 있는 감정 문제의 양상들이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헤어지자는 여자 친구의 말에 사형 선고라도 받은 듯이 격분해서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폭행을 저지르는 데이트 폭력이라든가, 헤어진 옛 연인의 SNS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면서 새로운 사람을 사귀며 행복해하는 모습에 분노하고 자기비하에 빠진다든가,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고 온 힘을 다해 준비해왔는데 번번히 취업에 실패하여 삶의 희망을 잃은 젊은이들의 이야기라든가, 더 나아가 그런 부정적인 감정의 불씨를 조절하지 못해 상실감과 좌절이 우울증으로 번지고, 심지어 목숨을 버리는 안타까운 사고로 까지 이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수많은 감정의 혼돈과 관계의 불협화음에 대해 심리학자들은 어릴 때 부모의 양육 태도에서 온 문제라고 말한다. 무당이나 점성술가들은 조상이나 우주의 어떤 힘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을 경제 탓으로 또는 정치 탓으로 돌리는 사람은 항상 거기에서 불행의 원인을 찾는다. 하지만 근원적인 문제는 그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을 접촉하는 나, 내 생각, 감정, 감각, 의지… 내 마음이다.

  어떤 현상을 접촉할 때 기분이 좋기만 하지는 않는다. 불쾌하거나 화가 나거나 슬프거나 우울한 부정적인 감정이 들기도 한다. 이 때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으로서 많은 불행한 일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이 마음의 힘이다.
  심한 압력의 경쟁 구도 속에서 공부를 하고, 직장을 찾고,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정주행만 해오면서 좁아진 시야와 약해진 몸과 마음이 여유를 잃고 나 아닌 누군가를 이해해줄 수 없는 각박한 마음들을 양산해 낸다.
  유럽의 나라들은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면 1년을 자유롭게 지내면서 앞으로의 진로를 탐색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한다. 또, 라오스는 우리나라 남자들이 의무적으로 군대에 가듯이 일생에 한번 반드시 스님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도 그처럼 각자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가는 방향을 정할 수 있는 시간이 의무와 권리로 모든 국민에게 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피아노 학원을 다녔을 때의 일이다. 피아노 선생님 아이가 네 살이었다. 엄마가 자기하고만 있어주면 좋겠는데 마음대로 안 되니까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는 이렇게 소리쳤다.
  “엄마, 안 좋아. 엄마, 안 좋아.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그러다 아이가 좋아하는 과자와 장난감을 주자 언제 울었냐는 듯이 뚝 그치고 미소를 띤 채 과자를 먹고 있었다. 아이니까 그런 모습도 귀여웠다. 그런데, 어른이라면 자신의 좋지 않은 기분에 대해 스스로 알아차리는 힘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른이라도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거나 수용할 수 없는 미숙한 사람일수록 남 탓, 사회 탓, 세상 탓을 많이 한다. 이러한 탓을 심리학 용어로 투사라고 한다. 자신의 생각이나 욕구, 감정 등을 다른 사람의 것으로 지각하는 것, 자신의 부정적인 욕구나 감정에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다른 사람의 것으로 돌림으로써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려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힘이 있다. 무조건 내 탓으로 돌리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맑고 투명한 힘 말이다.

  사람이 배우고 공부하고 돈을 벌고 더 나아지려는 것은 생존 본능이다. 내가 생존에 위협을 느끼면서 타인을 배려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가난한 이웃들은 오히려 없어도 다 살아진다며 맘 편히 사는 사람들이 많은 반면, 학력과 재력이 높고 많은 것을 가진 사람들이 더 불안해하고 더 서로를 공격하고 끌어내리고 더 가지려 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러한 블랙 코미디와도 같은 현상을 일상다반사로 보게 된다.
  행복은 소유하는 것, 완전해지는 것과는 다르다. 팍팍한 우리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실 수 있는 사랑을 이끌어내는 것은 불완전하고 부족한 채로 존재하는 것, 그 불완전하고 부족한 자신과 이웃에 대한 연민을 느낄 때이다. 나의 박탈과 결여를 채우려 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면 나의 고통은 남 탓이 된다. 비판과 분열을 낳는다. 다 같이 불행해진다.
  부족한 자신의 조건을 향유함 속에서 느끼는 자기만족, 자신의 욕구와 수준에서 시작하고, 오직 자신의 성장을 향하는 기쁨을 누리자. 그런 작은 기쁨들만이 진정으로 서로를 연결시킬 수 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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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당선작 심사평


  제31차 <창작콘테스트> 동상은 수필부문 예정옥 씨의 「고양이의 보은외 한 편의 수필을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수필가 유미숙 / 수필가 정금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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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부문



마블
김은혜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은 매끄럽고 광택이 났다. 나는 매니큐어를 매일 매일 새로 바르고 지워냈다. 그러다 다시 새로운 색상을 골라 손톱정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매니큐어를 바르고 나서부터 손톱이 자주 부러졌다. 그럴수록 매니큐어를 더욱 두껍게 덧발랐다. 손톱을 덧바르면 덧바를수록 얇아지고 약해져갔다. 손톱강화제를 바르고 영양제를 매일 꼬박꼬박 발랐다. 하지만 매니큐어를 바를수록 손톱은 점점 물렁물렁해졌다. 급기야 손톱이 빠지기까지 했다. 그래도 손톱에 색을 칠하는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손톱은 이제 상상할 수 없었다.

커튼 밖에서 조잡하게 섞여진 웅성거리는 소리가 집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가 허공 사이로 간간이 들려왔다. 나는 창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서 하나의 조각처럼 보였다. 낡고 오래되어 재개발을 앞두고 있는 이 아파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니 나는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을 떼지 못했다. 아니 그보다도 이 사람들이 모두 이 시간에 이렇게 나와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구급차가 지나가고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뭔가를 물어보는 형사도 보였다. 사람들은 어느새 절반정도 줄어있었다. 더 이상의 새로운 것이 없자 모두들 다시 낡은 아파트 어디론가 들어가 버린 것 같았다. 아파트 아래 화단에서 핏자국이 보였다. 나는 하나의 무늬 같은 핏자국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언니는 첫 번째 용의자였다. 그리고 가장 유력한 용의자였다. 형사는 나에게 몽타주를 넘겨주며 말했다. 나는 언니의 몽타주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몽타주 속의 언니는 조금 멍청해보였다. 흐릿한 눈썹과 동근 얼굴과 죽쳐진 입매. 몽타주는 실제 언니보다도 더 언니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형사는 나에게 언니에 대해 여러 가지를 캐묻기 시작했다. 형사는 언니에 대한 모든 것들을 알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언니의 직업, 언니의 취미, 언니의 친구, 언니의 부모, 언니의 관계, 언니의 일상, 언니의 성격, 언니의 태몽까지 물을 기세로 형사는 찬물을 들이켜며 수첩에 계속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나는 사실 언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언니가 ‘언니’라는 사실. 나보다 나이가 다섯 살 많으며 어렸을 때 한집에 살았던 적이 있다는 정도 였다. 사실 나는 형사가 알고 있는 언니보다 더 언니를 몰랐다. 언니는 안다는 것이 언니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라면 나는 언니에 대해 완전히 무결했다. 만약 형사가 원하는 정보가 언니의 과거라면 약간은 알고 있지만. 그 외에 것들을 알기에는 언니는 말수가 너무 적었다.

형사는 이정수라는 남자가 오늘 아침 이 아파트에 팔층에서 추락사했다고 했다. 이정수. 나는 그 이름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형사는 나에게 이 사람을 본 적이 있냐고 물어왔다. 나는 가만히 그 사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이정수는 이곳에 주소지가 있는 인물이 아니라고 했다. 친인척도 주소지도 이곳이 아닌 남자가 아파트 팔층에서 떨어졌다는 사실 만으로 형사는 팔층에 있는 모든 주민들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언니를 용의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형사는 실망한 기색으로 피해자와 언니에 대해서 아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을 달라고 말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목인사를 했다. 현관문으로 형사가 나가고 나서 나는 도어 아이로 형사를 한참 바라보았다. 형사는 문 앞에서도 여전히 무언가를 적더니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뭔가를 물어보았다. 형사는 수첩에 계속 뭔가를 흘려 적고 있었다. 나는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문 앞에 눈을 가져다 대고 형사를 바라보았다. 형사가 난간에서 담배를 잠깐 태우다 시야에서 사라졌다. 형사가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도어아이를 바라보았다. 어디에도 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언니가 남자를 죽인 용의자라고 했을 때 나는 놀라기 보다는 약간 의아했다. 언니는 언제 어디서든 채도가 없는 사람이었다. 언니가 누구인지, 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언니는 언제나 사람들 옆에 존재했으나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언니는 아무 자리에도 없었던 것처럼 언제나 유령처럼 존재했다. 언니는 어디서건 선명하지 않았고 흐릿하게 구석을 맴돌았다. 나는 언니처럼 채도가 약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언니가 어떤 것의 용의자라는 것은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어디서건 눈에 띄는 것을 두려워하는 언니가 사람을 살해한 용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보였다. 언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을 알려고 드는 것이었다. 그 것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 심지어 형사가 자신의 뒤를 캐고 다니는 것을 언니가 안다면. 그 뒤는 상상하기 조차 힘든 상황이 벌어질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어쩌다가 언니는 그런 누명을 쓰게 된 것일까. 그보다도 언니는 지금 어디 있는 것일까. 나는 어서 집으로 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니에게 자초지종을 들어봐야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베란다에 나가 형사가 아파트 입구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형사는 이쪽을 흘깃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멀찍이서 형사가 완전히 이곳으로부터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언니가 보기 전에. 언니가 보기라도 한다면 자신이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언니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 것이다. 형사가 아파트 건물 끝 담벼락에서부터 멀어졌다. 나는 그제야 난간에 기대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손톱에 칠이 벗겨진 것을 보았다. 불과 한시간만에 손톱들은 불균형한 열 개의 모양으로 벗겨져있었다. 손톱 끝이 지저분하게 깎이고 군데군데 긁힌 자국들이 보였다. 매끄러운 손톱이 균일하게 못하고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당장 손톱 정리를 해야 했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안경을 꺼내어 썼다.

나는 네일아트 박스를 서랍에서 꺼냈다. 박스를 펼치자 네일 도구들과 손톱강화제, 영양제, 탑코트, 색깔별로 늘어선 매니큐어들이 보였다. 다양한 색상의 매니큐어들을 보니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졌다. 나는 네일 전용 가위로 손톱 손질을 시작했다. 정확하고 일정한 모양으로 다듬었다. 데칼코마니처럼 양손이 같아야했다. 한쪽에 온 신경을 주력할 수는 없었다. 손톱을 혼자 다듬을 때는 양손을 모두 사용해야 했다. 오른손으로 가위질을 하는 것은 익숙했지만 왼손은 언제나 어눌하고 움직임이 더뎠다. 나는 천천히 손톱의 튀어나온 부분들을 고르게 정리했다. 왼손을 다듬을 때는 오로지 손톱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숨도 잠시 멈추었다. 양 손의 모양이 어느 정도 비슷해졌다. 나는 기존에 있던 네일을 지우기 시작했다. 리무버를 덜어 화장 솜에 묻히고 손톱 한 개 한 개를 지워나갔다. 깨끗이 지워진 손톱 위로 손톱강화제를 바르고 잠시 입바람을 불었다. 나는 그동안 매니큐어의 색상을 골랐다. 장밋빛레드. 오십 개가 넘는 빨간색상의 네일 중에서 나는 가장 맑고 투명해 보이는 붉은 매니큐어를 붓으로 발랐다. 손톱에 붉은 매니큐어를 칠하자 투박한 손이 조금은 연약해보여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정수를 알고 있었다. 비록 너무 오래되어 기억조차 흐릿했지만, 나는 분명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형사가 보여준 사진 속 인물인지는 정확히 알수는 없었다. 나는 그 때 사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낮잠을 자고 있다 형사가 갑작스럽게 방문을 한 탓이었다. 나는 잠을 자다 일어나서는 안경도 쓰지 않은 채로 형사와 장시간 이야기를 했다. 사실 나는 그가 형사라고 보여준 명함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방에 들어가 안경을 가져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형사가 보여준 사진 속 인물이 정확히 누구였는지도 자세히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흐릿한 초점으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형사가 보여준 남자는 비록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내가 아는 이정수와는 좀 달랐다. 그래서 나는 섣불리 이정수를 안다고 할 수 없었다. 사진 속의 남자는 결정적으로 이정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보였다. 남자는 늙어보였고 몹시 피로해보였다. 형사가 보여준 사진을 기억해보니 그 남자는 내가 알던 이정수와는 좀 다르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정수는 엄마의 세 번째 남자였다. 고작 두 달을 살았던 엄마의 세 번째 파트너. 엄마는 미혼이었다. 언니를 낳고서도 나를 낳고 나서도 계속 미혼으로 살았다. 엄마는 평생 동안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다. 엄마는 처음부터 결혼 같은 것은 할 생각이 없었다고 술에 취한 날이면 우리를 앉혀놓고 말들을 늘어놓았다. 그런 날이면 언니와 나는 엄마에게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무릎을 꿇은 채로 엄마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엄마는 너희들만 아니었으면, 이라고 웅얼대다가 술 냄새를 풍기며 고꾸라졌다. 엄마에게 언니는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아 생긴 무지의 실수이었고, 나는 정말 아닌 줄 알았는데 정말 그런 줄 알았는데 생긴 어이없는 실수였다. 엄마는 남자를 잘못 만나 인생인 꼬인 자신의 젊은 날의 실수를 생각하며 우리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엄마의 과거완료형이자 현재진행형이었다.

엄마는 자신이 언제나 실수를 연발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래서 언제나 실수에 민감했다. 엄마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결혼하지 않았다. 젊은 채로 싱싱한 채로 미혼의 삶을 즐기고 싶어 했다. 매일매일 엄마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취해있었다. 우리를 집 안에 가두고 자주 외출을 했다. 엄마는 아름다운 채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동경하고 있었다. 엄마는 우리만 옆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미혼의 여자였다. 그래서 외출을 할 때면 엄마는 완벽한 미혼 여자가 되기 위해 우리를 절대 데리고 나가지 않았다. 언니와 나는 엄마가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리고 새 옷을 입고 외출을 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잠시 굳은 듯 멈추어 있다가 벌떡 일어나 현관문 앞으로 달려갔다. 정오를 지나는 시간, 집을 찾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도어아이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여자가 문 앞에서 초조하게 왔다갔다 상체를 움직였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도어록을 잠근 채로 문을 열었다. 내가 문을 열자 여자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린 것처럼 당황했다. 나는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세요? 여자는 자신을 아래층에 사는 여자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 여자가 자신이 아래층에 산다고 했을 때 약간 불안해졌다. 대개 아래층에 사는 사람이 위층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경우는 층간 소음이 발생하거나 하수구가 막혔거나 물이 새거나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종류의 방문이 대다수였다. 나는 하루 종일 소파에 앉아 네일아트를 하거나 낮잠을 자거나 퀼트를 하기 때문에 소음이 발생할 일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하수구가 막혔거나 물이 새는 일도 지금은 불가능했다. 나는 매번 욕조에 물을 받아 사용하기 때문에 지금 당장 물이 새도록 수도를 사용한 적도 없다. 나는 아무것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평화로운 얼굴로 여자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자는 자신이 오늘 이사 온 여자라고 했다. 나는 그제야 모든 의심을 풀며 낮고 작은 목소리로 아, 라고 웅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래층에서 뭔가 묵직한 것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집에 아무도 안계신줄 알았어요. 여자는 작은 박스에서 떡을 담은 일회용 접시를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엉거주춤 그 것을 받아들려다 문틈이 작은 것을 알고는 다시 도어 록을 열은 후 접시를 받아들었다. 여자는 자신에 대한 경계심이 풀린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최대한 인심 좋은 미소를 보이며 친하게 지내요, 라고 말했다. 나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네, 라고 말하고 여자의 시선을 피해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자신이 오전에도 집에 찾아와서 초인종을 여러 번 눌렀다고 했다. 나는 여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가고 나서 나는 원래 앉아있었던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무엇을 하고 있었더라. 그래. 손톱을 모두 정리하고 매니큐어 바르는 일을 모두 마쳤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서 잠시 멍하게 생각에 잠겨있었다. 언니 생각을 했고 엄마도 생각했고 오랫동안 기억조차 하지 못했던 이정수도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지도 않게 여자가 찾아온 것만 해도 그랬다. 거기다 좀 아까는 형사까지 찾아왔었다.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정오의 시간. 나는 너무 많은 일을 한 것처럼 조금 피로해지기 시작했다.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하얀 벽을 바라보았다. 햇볕이 커튼 사이로 들어와서 벽에 일렁였다. 벽이 꿈틀대는 것처럼 보였다. 안 돼. 오래 생각하면 안 돼. 나는 고개를 저었다. 혼자서 오래 있다 보면 자꾸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남들이 보면 정말 쓸데없다고 느끼는 그런 것들을 무척 신경을 쓰는 것은 정말이지 엄마와 꼭 닮았다고 언니가 말한 적이 있었다. 길을 걸어가다가 그림자가 두 겹이 되는 순간이라던가, 개미들이 구멍 속으로 줄지어 기어간다던가, 사람의 얼굴 길이라던가, 형광등 스위치의 소리라던가 하는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의 특징은 매번 볼 때마다 달라 보이고 움틀 거리고 나를 화나게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이런 것들에게서 화가 났다. 균일하지 못한 모양들. 일정하지 않은 소리 같은 것들. 내가 바꾸고 교정하고 조작할 수 없는 이런 것들은 정말이지 나를 분출시켰다. 그 것들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난잡스러운 결정체였다. 아무도 이런 것들에 화내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오직 언니만은 나를 알아주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언니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발버둥치는 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언니는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잘 알아챘다. 나만이 분노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언니는 곧잘 이해했고 유일하게 나를 받아주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였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부터 시작해야했다. 맞다. 언니를 떠올리고 있었다. 나는 자주 기억을 되새겼다. 방금 생각했던 것들이나 하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자주 잊어버렸다. 이것이 정확히 기억력이 없어서인지 일정한 병명이 있는 것인지는 알수 없었다. 중요한 사실은 어릴 때부터 줄곧 그래왔다는 것이었다. 방금 전의 것들에 대해서 자주 잊어버리곤 하는 버릇, 일종의 습관.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들을 뇌에서 이미 습득한 것처럼 나는 아직도 기억을 서툴러했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은 오히려 더욱 생생했고 정확했다. 어제의 기억보다 십 년 전의 기억이 나에게는 더 균일하게 느껴졌다. 그 것은 오래전부터 내 안에서 그 것을 좀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 되새김질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몰랐다. 과거를 좀 더 차곡차곡 균형 잡히게 정리하기 위해 현재의 기억은 조금 미뤄두는 것뿐이었다. 무엇이든 처음부터 착착 정리해야 뒤섞이지 않고 똑바로 유지될 수 있었다. 기억은 떠올리면 언제든지 생각날 수 있는 것이었다. 단지 조금 둔화된 것처럼 약간의 시간이 걸릴 뿐 일상생활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엄마의 세 번째 남자는 몹시 나이가 많았다. 엄마보다는 열 살은 족히 많아보였다. 남자는 언제나 몹시 피로하고 지쳐보였다. 하지만 엄마는 세 번째 남자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껏 보았던 첫 번째와 두 번째 하고는 달랐다. 엄마는 세 번째 남자를 자주 집으로 데려왔다. 여태껏 남자를 집으로 데려온 것은 세 번째가 유일했다. 엄마는 자신이 미혼모라는 사실을 첫 번째, 두 번째가 아닌 세 번째 남자에게 알렸다. 그 것은 남자가 아이들을 유독 좋아한다는 소리를 듣고 부터였다. 엄마는 그 때부터 세 번째 남자를 집으로 데려오기 시작했다. 엄마는 세 번째 남자에게만은 평범한 결혼생활을 즐기는 사람처럼 직접 식사를 차려주기도 하고 와이셔츠를 다림질하고 언니와 나를 극진히 보살피는 엄마처럼 굴었다. 세 번째 남자 앞에 잘 보이기 위해서 엄마는 우리에게 새 옷을 사주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가끔씩은 같이 외출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엄마가 남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장식’이라는 것을 알았다. 엄마는 장신구처럼 우리들을 달고 다녔다. 남자가 아이들을 좋아한다는 소리를 듣고 나서부터였다. 엄마는 남자를 만날 때면 언니와 나를 자주 데리고 나갔다. 엄마는 술에 취하면 이제 너희들이 있어서 다행이야, 라고 말하고 고꾸라졌다.

엄마는 더 이상 첫 번째와 두 번째 실수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실수가 옆에 있어서 세 번째가 가능해졌다고 엄마는 생각하는 듯 했다. 이제 드디어 엄마는 미혼의 생활을 마치고 진짜 결혼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엄마는 그 후에도 결혼을 하지 못했다. 남자는 엄마와 함께 자주 집에 드나들었지만 한 번도 엄마에게 청혼하지 않았다. 엄마는 매일매일 초조해했다. 남자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엄마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사실은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을지도 몰라, 내 요리솜씨가 부족해서일수도 있어. 엄마는 더욱더 아름답게 자신을 치장하고 꾸며야 했다. 자신의 아름다움에 티끌이라도 묻어서는 안 되다. 엄마는 자신이 늙어가는 것을 자꾸 두려워했다. 아이 둘을 낳고서도 언제나 아름다웠던 엄마는 남자에게 매달리면서부터 자신이 늙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남자에게 매달릴수록 남자는 점점 엄마에게 멀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백조처럼 고고했던 엄마는 점점 더 깊은 물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갑자기 집 안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들렸다. 나는 방으로 달려가서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모르는 숫자들. 나는 모르는 번호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언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여보세요? 나는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상대를 기다렸다. 무언가 부스럭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고 그릇끼리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했다. 전화는 뜻밖에도 중년의 사내의 목소리였다. 사내는 택배가 곧 도착할 것인데 집에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무슨 택배냐고 물어보려다가 통화가 길어질 것 같아서 묻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내가 택배를 시켰던가. 우리 집은 유일하게 한 달에 세 번 택배가 왔다. 모두 내가 주문한 물품들이었다. 나는 네일아트를 하기 위한 도구를 한꺼번에 매월 초에 주문했고 집안에서 필요한 물품들이나 식료품을 중순에 주문했다. 매월 말일에는 퀼트 재료들을 인터넷쇼핑몰에서 구입해서 택배로 받아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초순도 중순도 말일도 아닌 어중간한 오늘은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자주 기억을 잊고 되새김질 하지만 적어도 주문한 물건을 까먹고 잃어버리는 경우는 없었다. 택배를 받기로 한 날은 아침부터 일어나서 하루 종일 현관문 앞에 촉수를 세운 채 기다렸다. 그 하루는 택배를 받기 위해 밖에서 나는 인기척에 언제나 곤두서있었다. 나는 택배를 받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준비는 복잡하지 않았다. 나는 방에 가서 언니의 옷장을 뒤져 바지와 면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언니와 꼭 닮은 것을 알았다. 나는 언니의 옷으로 갈아입은 채 현관문 앞에서 초인종이 울리기를 기다렸다. 조금 있다가 벨이 울렸다. 나는 도어 록을 잠근 채로 반쯤 문을 열었다. 택배 왔습니다. 사내가 택배상자를 내게 내밀었다. 상자는 묵직하고 크기가 커보였다. 나는 도어 록을 풀고 다시 문을 열었다. 상자를 받고 피디에이에 싸인을 했다. 나는 상자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먼저 상자에 적힌 주소와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정말 여기로 온 것이 맞는지. 괜히 잘못 온 물건을 뜯어보고 번거로운 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주소는 물론 이름도 내 것이 맞았다. 보낸 사람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고 보낸 주소는 이 곳이었다. 보낸 주소가 여기이고 받는 주소도 여기라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뭔가 착오가 있거나 실수로 보낸 주소를 제대로 적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언니가 나에게 보낸 택배일지도 몰랐다. 자신의 소식을 전해주거나, 여기 상황을 물어오거나, 나의 안부를 묻는 장문의 편지가 들어있을지도 몰랐다. 상자는 무척 가벼웠고 충분히 가능성은 있는 일이었다. 나는 일단 상자를 열어보기 위해서 칼로 상자의 테두리를 균일하게 갈랐다. 그리고 조금은 겁먹은 채로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상자에는 매니큐어들이 깨진 채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빨간색, 검은색, 노란색, 파란색들이 한데 뒤섞여 알수 없는 색깔들로 덩어리가 되어 되어있었다. 나는 그 덩어리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나는 매니큐어를 주문한 적이 없고 지금은 매월 초순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결론 내렸다. 이것은 누군가의 장난이거나 언니가 나에게 주는 암호일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애초에 이것은 언니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언니가 나에게 도움을 청하려 보낸 구호일 것이었다. 언니는 쓸데없는 짓을 싱겁게 할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언니는 남자를 살해한 첫 번째 용의자였다. 언니는 지금 오히려 위험에 쳐해 있을지도 몰랐다. 어딘가에 감금되어서 누명을 쓰거나 이용당하고 있을 여지도 충분히 있었다. 언니는 다른 사람을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남자를 죽이라는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거절을 하기가 어려워 결국 실행에 옮기고 어딘가로 숨어버렸을 수도 있다. 언니는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언니가 나에게 보낸 이 종이부터 일단 이해해야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언니도, 언니를 이용하는 그 사람도 모두 영원히 찾아낼 수 없을 것이었다. 지금은, 이해하는 게 우선이었다.

근데 도대체 오늘 몇 명이 이 집을 방문한 거지? 나는 갑자기 많은 일을 겪은 사람처럼 혼란스러워졌다. 시계는 이제 세시를 지나고 있었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복잡한 일들이 자꾸 일어나고 있었다. 내가 예상하지 않은 일들이, 시시각각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만 같다. 조금씩 정리하기가 버거워진다. 차례를 지키고 기억을 파일에 넣듯이 차곡차곡 정리하는 일이 갑자기 불어 닥친 여러 가지들로 인해서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순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당장 오늘 내가 무엇을 했는지도 기억할 수 없어. 나는 하얀 벽을 보며 중얼거렸다. 벽이 다시 꿈틀거렸다. 나는 벽에서 고개를 돌리고 몇 가지 사물들에서부터 습관처럼 기억을 더듬었다. 수첩, 떡접시, 핸드폰, 택배상자, 하얀 종이, 글자, 그리고 언니의 옷. 그러고 보니 아직 언니의 옷을 입고 있었다. 이런 실수는 하지 않았는데. 언니의 옷을 아직도 입고 있었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했다. 언니 옷을 입고 있으니 꼭 언니가 되어 소파에 앉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거울을 나를 비춰보았다. 언니가 내 앞에 서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일단 언니가 돌아올 때까지 언니의 옷을 입고 있기로 했다.

나는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넘쳐나는 날이면 언제나 퀼트를 했다. 조각보를 만들고 앞치마를 만들고 식탁보를 만들었다. 집에는 식탁이 없었고 앞치마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퀼트로 만들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만들기 시작했다. 조각나고 잘라진 헝겊들을 기우고 이어붙이는 작업을 모두 마치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서로 다른 색깔과 모양의 천조 각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기어져있는 것은 진정한 아름다움처럼 보였다. 작은 조각들이 하나의 조각으로 만들어졌을 때 그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작은 조각들은 무늬처럼 보였다.

퀼트에 첫바늘을 끼웠다. 바늘이 한 땀을 끼우고 그대로 시침질 했다. 모양을 잡기 위해서 조각들을 이어붙이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온종일 집 안에서 퀼트를 하고 있을 때면 모든 것이 조각 안에서 꿰매어 져서 고정되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고정된 것들은 갑자기 나를 놀래지 않았다. 그 자리에 머물러 정지되어있을 뿐 새롭게 튀어나오거나 또 다른 결말을 보여주지 않아서 나는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매듭을 지으려 마지막 바늘땀을 올리는 순간 헝겊을 붙들고 있던 검지가 찔렸다. 핏방울이 구슬처럼 동그랗게 맺혔다. 나는 그 붉은색방울을 보고 있다가 문득 손톱을 장밋빛레드로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손가락에서 장미꽃이 새어나왔다. 붉은색 장미꽃물을 퀼트조각 구석에 닦았다. 시침질이 완료된 퀼트가 한 덩어리의 조각이 되어있었다.

엄마는 장미를 좋아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장미는 식물이 아니었다. 엄마는 식물은 질색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유는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살아있기 때문에 물을 줘야 했고 햇볕을 쬐어야 했고 냄새도 났다. 엄마는 꽃이 살아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움직이지도 말할 수도 없는 것들이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이 엄마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것들이 점점 죽어가면서 벌레가 끼고 말라가고 색을 바래가는 것은 엄마는 도저히 눈뜨고 보지 못했다. 처음부터 살아있지 않았다면 그렇게 추하게 늙지는 않았을 텐데. 엄마는 추하게 죽어가는 것들에 경악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것은 장미꽃이 아니라 장미 문양이었다. 장미 무늬가 들어간 스웨터, 장미 모양이 들어간 컵, 장미 그릇들, 모형 장미꽃다발 같은 것들이 방 한구석을 채웠다. 엄마는 요리를 잘 하지 않았지만 장미 그릇들을 쌓아두었고 스웨터를 입지 않았지만 장미가 들어간 옷들을 모조리 사다 모았다. 엄마는 방 안의 도배지들까지 장미 무늬로 바꾸었다. 엄마의 방 안에 장미들이 쌓일 때마다 나는 알수 없는 불안감이 밀어닥쳤다. 그토록 방 안을 장미로 채우다가는 언젠가는 엄마마저 장미가 되고 말 것이었다. 방 안의 공간이 점점 줄어들어가고 있었다. 방이 점점 작아질수록 나는 엄마가 점점 작아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 번째 남자에게서 버림받은 엄마의 마지막 발악처럼 보였다.

세 번째 남자가 집으로 찾아온 것은 얼마 후였다. 엄마가 장미들을 사다 모으기 시작한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엄마는 여전히 남자를 찾기 위해 매일 어디론가 외출을 했다. 언제나처럼 집에는 언니와 나 외에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초인종이 울린 문 밖으로 달려갔다. 그는 문 밖에서 초조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언니는 도어아이로 밖을 확인하고 나서 조금 망설이며 나에게 물어왔다. 어떡하지? 세 번째 남자를 찾았다고 엄마에게 얼른 알려주고 싶었다. 엄마가 뛸 듯이 기뻐할 것이 눈에 보였다. 남자가 멀리 도망가기 전에 잡아두어야 했다. 얼른. 나는 문을 열고 남자를 들려주었다. 남자는 반가운 얼굴로 우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남자에게서 바람 냄새가 났다. 남자는 집으로 들어와서 엄마가 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남자에게 할 말이 없어져서 엄마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 해줄까 했지만 별로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남자는 베란다를 내려다보면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남자는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엄마의 방에 멈춰 섰다. 한 평 공간도 안남은 비좁은 엄마의 방. 남자가 수많은 장미 무늬들 속에 파묻여있었다. 엄마는 밤에 와요. 나는 지루하게 보이는 남자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남자가 나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남자의 머리는 예전에 보던 것보다도 더욱 하얗게 보였다. 그러다 남자가 갑자기 언니를 방 안으로 끌어당겼다. 놀란 언니의 흰자가 동그랗게 튀어나왔다. 남자는 언니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의 얼굴이 방문 사이로 찌그러진 채 휙 사라졌다.

퀼트를 모두 마치고 나자 밖은 어둑어둑한 어둠이 몰려들어 왔다. 낮이 채 가시지 않은 저녁의 어둠은 축축하고 습했다. 나는 어둠에 잠겨 침침한 눈으로 완성된 퀼트를 바라보았다. 수십 개의 조각들이 기워진 채로 하나의 무늬처럼 보였다. 나는 그 것을 언니에게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언니는 추위를 잘 타기 때문에 언제나 담요 같은 것이 필요했다. 내 손가락에서 나온 장미 무늬를 수놓은 퀼트를 나는 언니 방에 놓아두었다. 언니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일단 밤이 될 때까지 언니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언니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 사람이 없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니까. 어두운 소파에 멍하니 앉아있으려니 윗집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나는 최대한 숨소리마저 감춘 채로 윗집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일정하지 않은 간격과 박자로 내는 그 소리는 둔탁하게 움직였다. 머릿속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면 방에서 소리가 났고 부엌으로 가면 부엌으로 따라 움직였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더욱 소리가 울렸다. 도대체 윗집에서 무엇을 하는 것일까. 망원경으로 나를 엿보는 것만 같아서 수치스러움마저 느껴졌다. 낡고 오래된 재개발 아파트 안에서 저렇게 망치질을 하다가는 언젠가는 모든 것이 폭삭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엄습했다. 여전히 불균형적인 소리들이 집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오늘따라 너무 많은 것들이 나를 피로하게 만들고 있었다. 늘 일정한 간격과 움직임으로 이동하고 있는 하루하루가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늘 하루 동안에 이렇게나 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는 없었다. 아침에 형사가 찾아와서 이정수라는 사람에 대해 물어온 것도 그랬다. 나는 오늘 태어나서 형사를 처음 만나보았다. 형사가 처음 보는 남자를 왜 나에게 물어보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실 안경을 쓰고 있지 않아서 형사의 얼굴도 자세히 보지 못했다. 아랫집 여자가 갑자기 떡을 들어온 것도 나에게는 일종의 사건이었다. 처음 보는 여자가 내 집을 방문한 것도 그렇지만 그 여자가 아침부터 우리 집 초인종을 계속 눌렀다는 사실이 내 하루를 균일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여자는 왜 그렇게 집요하게 내 집 초인종을 눌러대는 것일까. 택배기사의 방문도 나는 오늘 예상치 못했다. 심지어 더 예상할 수 없는 사실은 그 택배에 내용물이 단지 종이 한 장이라는 것이었다. 거기다 보낸 곳도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오늘따라 왜 내가 예상할 수 없는 것들이 자꾸 나를 찾아오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세 번째 남자가 돌아가고 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언니의 얼굴이 퉁퉁 부은 것을 보았다. 언니의 충혈된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니의 손톱 몇 개가 빠져있는 것이 보였다. 언니의 손톱에서 빨갛게 핏방울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 세 번째 남자의 방문을 알려주지 않았다. 엄마는 여전히 세 번째 남자를 찾으러 매일 외출을 했다. 그런 엄마에게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나는 왠지 언니에게 죄를 짓고 있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언니도 원하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언니를 도와주는 일이라고 여겼다. 나는 조용히 언니 옆에 웅크려 앉았다. 모든 일들은 순조롭게 지나가고 있었다. 엄마가 술에 취한 채로 횡당보도에서 고꾸라지기 전까지는 모든 것은 순조로운 형태로 만들어져가고 있었다. 엄마와 언니와 나의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 엄마는 점점 늙어갔고 더 자주 버려졌다. 엄마는 이제는 아름다움 보다는 술에 취한 나날들이 더 많았다. 술에 취하면 엄마는 자신이 더욱 아름다워보인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엄마는 언니가 매일매일 울고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내가 매일매일 언니 옆에서 불안한 눈으로 엄마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길바닥에서 죽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었던 것은, 그래 생각이었다. 생각의 생각. 생각 안의 생각들. 머릿속에서 생각들을 끄집어내서 굴리고 털어내고 담그고 삼켜내야 했다. 하루하루 생각을 되새김질 하지 않으면 내가 당장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바로 떠올릴 수 없으니까. 과거를 생각하지 않으면 현재가 떠오르지 않았다. 과거를 생각하는 작업에 몰두하다보면 현재가 조금 서툴러지기 마련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정리하지 않는 과거는 정리되지 않는 현재를 만든다. 나는 그래서 여전히 생각해야 하고 생각을 마무리해야 했다. 윗집에서 아직도 무언가가 불규칙하게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들은 여전히 일정하지 못했다. 나는 오늘이 정말 이상하다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소리들이 참기 힘들게 여전히 툭탁툭탁 거렸다. 하지만 참아야했다. 균일한 하루는 일정한 습관과 버릇들로 이루어져야 했다. 처음 보는 윗집에 찾아가서 항의를 하는 것은 새로운 예상을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 예상들은 변수가 많고 내가 예기치 않은 또 다른 예상 다발들을 만들어내게 할지도 몰랐다. 나는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예상하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해서 예상하지 않아야 했다. 예상할 일을 만들어내면 안되었다. 그 것이 비록 참기 힘든 고통이라고 하더라도 예상할 여지를 만들 일들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그 예상이 정확하게 일치 했을 때의 충격을 평생 동안 짊어지고 싶지 않다면, 예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지금 당장을 예상하며 간추리는 것보다는 과거를 되새기는 작업을 몰두해야 했다. 그러면 예상하지 않고도 하루를 넘길 수 있다. 나는 그래야 했다. 생각을 하는, 생각 속으로 몰두하는.

오늘 아침의 일부터 생각해봐야 했다. 형사가 찾아왔고 형사가 언니를 찾았고 형사는 왜 언니를 찾은 것일까. 아니 형사는 형사가 맞는 것일까. 내가 형사를 본 것은 생각인가. 생각이 아니면 형사는 현재인가 과거인가. 아침이면 과거일 것이고 형사는 단지 내 생각일까. 아래층 여자가 나를 정말 찾아온 것일까. 아래층여자가 주고간 떡접시가 어디로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떡을 먹었던가. 먹지 않았다. 그럼 그 접시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인가, 아닌가. 아랫집 여자가 정말 오늘 이사를 왔을까. 내 집의 초인종을 누른 것은 정오였다. 그 것은 생각이 아니겠지. 아니 아래층에서 나는 소리 때문에 내가 너무 오래 생각했을까. 택배 기사가 택배를 주고 간 것은 과거이자 현재였다. 매니큐어가 어디 있더라. 분명히, 분명했다. 방바닥에 검은색 매니큐어가 굳어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생각만은 아닌었던 것일까. 오늘 아침에 정말 남자가 죽었는가, 아닌가. 오늘 아침에 내가 보았단 그 광경은 진실인가. 내 생각이 정말 맞는가. 언니가 정말 남자를 죽었다면 언니는 지금쯤 어디 있을까. 언니는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언니는, 아니 나는 왜 지금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왜 지금 몰두하고 있는 것일까. 몰두하면 안 되다. 생각을 하면, 생각 속에 빠지면 나를 나올 수 없다. 생각을 하면 나는 내가 나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생각을 그만 해야 했다.

나는 손톱을 내려다보았다. 하루 사이에 손톱이 손톱만큼 자라있었다. 퀼트를 하느라 손톱의 겉모양에 다시 긁힌 자국들이 생겼다. 손톱을 또다시 다듬어야 했다. 다듬지 않으면 손가락이 마음대로 움직일 것이 뻔했다.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손가락이 또다시 제멋대로 굴 것이 분명했다. 나는 손톱을 다듬으며 내 몸을 정돈해야 했다. 나는 또다시 손톱을 잘라냈다. 잘라낸 손톱에 살점이 같이 잘라졌다. 개의치 않고 두 번째, 세 번째 손톱을 잘라냈다. 살점들이 함께 잘린 손톱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아직 언니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언니를 기다리며 베란다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멀리서 언니가 보였다. 나는 언니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언니는 아래에서 납작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좀 더 크게 손을 흔들었다. 언니가 아파트 화단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언니에게 손짓했다. 언니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둠 속에서 화단에 머리를 베고 누워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흔들던 손을 내리고 언니에게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난간 위로 올라갔다. 화단 아래로 붉은 언니 가 납작하게 누웠다. 장미 같은 언니 자국들이 화단에 물들었다. 나는 오래 생각하지 말아야 했다. 나는, 나는 예상하지 말아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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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당선작 심사평


  제31차 <창작콘테스트> 동상은 소설부문 김은혜 씨의 「마블」을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소설가 김영찬 / 소설가 김충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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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당선자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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