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실 문이 열린다. 갇혀 있던 포르말린 냄새가 옅게 흩어진다. 흩어지는 입자들을 밟으며 백여 명의 대학생들이 들어온다. 나는 그들을 한 명 한 명 찬찬히 훑어본다. 낯익은 얼굴들이 많다. 그들은 모두 동일한 감청색 해부복을 입고 있다. 자주 빨지 않는지 해부복 군데군데에 얼룩이 더럽게 져 있다. 그들은 교수의 지시에 따라 좁게 모여든다. 그들이 모여든 곳은 나의 하반신 아래다. 몇 개의 시선들이 나의 음모로 향한다. 후끈거리는 마음이 들지만 얼굴이 발개지지는 않는다. 이미 얼굴은 반쪽이 잘려 있다. 수박처럼 두 동강 난 얼굴의 단면에서는 표정이 사라지고 없다.
날카로운 면도칼이 음모를 스쳐지나간다. 음모가 있던 자리는 서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맨얼굴을 드러낸다. 검은 풀들이 잘려나가며 깊은 동굴 속이 드러나는 과정을 백여 명의 학생들이 조용히 지켜본다. 털을 깎는 과정은 해부의 가장 첫 번째 단계이다. 해부 대상을 더욱 자세히 보기 위해서. 그들 중 하나가 거뭇한 음부 위로 매스를 들이댄다. 음부 속은 지방이 많아 일일이 지방들을 손으로 긁어내야 할 것이다. 피부가 두껍게 벗겨져 나간다. 방부제를 넣은 탓인지 잘려나간 부위에서 피 대신 반투명한 물이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린다. 누런 지방들이 섞여 흘러내린다. 학생들 중 한 명이 붙어있는 남은 지방을 떼어낸다. 지방은 닭고기처럼 결대로 손쉽게 뜯겨져 나간다. 자궁 바로 위까지 도려내진 생식기관은 이제 나의 몸과 별개로 그들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들의 시선이 생식기관 속으로 모여든다. 나도 본 적 없는 가장 깊고 고요한 공간이 그들의 손에 의해 파헤쳐지고 연구된다. 깊은 자궁 속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텅 비었을까. 아니면 탯줄을 통해 양수를 받아먹고 자랐던 나나의 흔적들이 아직도 투명하게 남아있을까.
-이름은 나나로 하자. 예쁘잖아.
폰은 아직 불러오지 않은 나의 배를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스물두 살이라는 나이에 덜컥 생긴 아이였다. 성인이 되고서야 탄탄한 몸매로 아름답게 굴곡지기 시작했는데 벌써부터 임신이 된 것이었다. 이제야 돈을 벌기 시작했는데 임신이라니……. 나는 병원 의자에 앉아 미소 짓는 폰을 외면한 채 애꿎은 바닥만 말없이 바라보았다. 팔이 의자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폰은 늘어진 손가락에 깍지를 끼고 잘 키워보자고 웃었다. 망막에 온전히 내 모습이 비치는 폰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우리의 학생시절을 떠올렸다. 지금보다 훨씬 앳된 얼굴이었던 폰의 손에는 항상 나의 가방이 들려있었다. 폰의 눈동자에는 항상 내가 들어가 있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병원 창문 밖으로 바게트를 파는 라오스 여자들의 높고 청량한 목소리가 진료실 복도까지 새어들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줄줄이 이어진 마사지 샵 간판에 차례로 불이 들어왔다. 젊은 여자들이 가게 앞에 하나 둘 의자를 내어놓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몸매가 드러나는 원피스 차림새였다. 나 또한 검은색 슬립원피스를 입고 출입문에 기대어 서 골목을 지나다니는 여행자들을 바라보았다. 여행객들은 골목을 지나다 걸음을 멈추고 불 켜진 가게 앞으로 다가와 메뉴판을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배낭여행자들의 천국인 라오스는 젊은 여자들이 일하기 좋은 나라였다. 그중에서도 내가 일하는 가게는 루앙프라방 시내의 중심가에 놓여 있었다. 여행자들이 지친 발길을 멈추기에 좋은 위치였다. 폰의 입술에서 나나라는 이름이 처음 호명된 날에도 어김없이 손님들은 찾아왔다.
-허벅지가 탄탄하네.
중년의 백인남자가 햇볕에 옅게 그을린 나의 허벅지를 슬쩍 쓰다듬었다. 마사지를 하기 위해 남자의 어깨 근처에 무릎을 꿇고 앉았을 때였다. 나는 남자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손바닥에 오일을 적당량 덜었다. 주인에 의해 보라색 암막커튼이 느리게 쳐졌다. 남자는 커튼을 조용히 바라보더니 꿇고 있는 무릎 안쪽으로 팔을 뻗었다. 고개를 숙이자 허벅지와 종아리 사이에 십만 낍이 위태롭게 끼어있었다. 나는 속옷 깊숙이 지폐를 집어넣고 남자의 어깨 사이 근육들을 주물렀다. 어깨를 타고 등과 허리로 안마가 진행될 때마다 접혔던 다리를 조금씩 폈다. 그러고 나서 딱 만 낍 정도로만 다리를 벌렸다. 백인남자의 눈길이 다리 사이에 머물렀다.
마사지가 끝나자 백인남자는 여느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흡족한 표정을 지은 채 가게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여기 마사지가 훌륭하네, 라는 말을 주인에게 던지며.
학생들이 조를 지어 생식기 안을 들여다본다. 그들은 말라 비틀어져 썩은 고기처럼 보이는 음부덩어리를 다각도로 관찰한다. 여학생 한 명이 눈을 찌푸리며 바라보더니 기어이 문 앞에 구역질을 한다. 해부실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나와 봐. 이런 걸 가지고 뭘.
남학생 중 한 명이 나의 생식기를 집어 든다. 이런 걸이라니. 한 생명이 자라기도 했던 공간에 이런 걸이라니. 그는 질 속에 손을 집어넣고 힘을 주어 벌린다. 힘없는 자궁이 쉽게 모습을 드러낸다.
-진짜 작다.
남학생이 자랑스럽게 자궁을 손바닥 위에 올려 보여준다. 마치 자신의 전리품인 것처럼 당당하게 미소 짓는다. 그래. 저 작은 자궁 속에서 나나가 나왔지. 그 아이의 눈과 코, 입이 저 속에서 생겨났지. 심장 속에서 또 다른 심장이 뛰었지. 그렇게 작고 위대한 공간을 고작 이런 걸이라니.
마지막 조 해부가 끝나간다. 많은 손을 거쳐서인지 조그마했던 자궁이 더 작아 보인다. 학생들이 장갑을 벗는다. 몸에서 분리되었던 자궁이 다시 하반신 속으로 들어온다. 꿰매지 않은 자궁은 이물질처럼 골반 뼈 안에 자리 잡는다. 지금까지 몸에서 분리된 장기는 자궁을 포함해서 여섯 개다. 그들은 나의 얼굴을 반으로 갈라 눈과 코 입을 보았으며, 창자를 꺼냈고, 피부를 도려냈다. 폰은 알았을까. 학생들이 우루루 몰려와 나의 뇌를 들었다가 놓고, 자궁을 집었다가 다시 집어넣으며 개복된 채로 언제까지 해부되어야 할지 모르는 시간들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 죽어도 해부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적어도 마음은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나간 자리에는 해부복 하나만이 주인을 잃은 채 버려져 있다.
감청색 외투를 입고 가게로 들어온 것은 한국남자였다. 남자는 여느 배낭여행자들과는 달리 깔끔한 차림새였다. 신발에 흙먼지 하나 묻어있지 않았다. 나이는 서른 중반쯤 되어 보였다. 남자는 조용히 들어와 마사지만 받고 가게를 빠져 나갔다. 남자가 다녀간 자리에는 많은 금액의 팁이 놓여있었다. 마사지 이외에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남자가 떠난 자리를 정리하며 어떤 사람일지를 상상했다. 외형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 틀림없었다. 남자를 생각하자 폰의 얼굴이 잇따라 떠올랐다. 남자에 반해 폰은 손이 거칠고 항상 햇볕에 검게 그을린 얼굴이었다. 폰이 웃을 때마다 치료받지 못해 생긴 충치 하나가 검게 빛났다. 그날 이후로 남자는 날마다 밤이 되면 가게를 찾아왔다.
-같이 한국으로 가지 않을래요?
남자가 어깨를 주무르던 나의 손을 잡고 입술을 열었다. 일주일 째, 아무 말 없이 마사지만 받고 가다 처음 내게 뱉은 말이었다. 나는 말없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쌍커풀 없는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남자의 눈은 검고 깊었다. 폰과는 또 다른 눈이었다. 보랏빛 커튼이 조용히 흔들렸다. 커튼 사이로 늙은 부모님과 나보다 어린 여동생 두 명의 웃음소리가 둥그렇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더 이상 누군가의 몸을 만지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그가 마사지를 마치고 나가자마자 짐을 싸 주인에게 몸이 아프다고 말했다. 일찍 퇴근을 하고 그의 숙소로 들어가 그에게만 맞는 마사지를 더 해주었다. 우리는 이제 가게에서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그날부터 내게 ‘우리’라는 존재는 ‘나’와 ‘한국남자’로 바뀌었다. 어느새 ‘우리’라는 단어에 ‘폰’과 ‘나나’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의 방에 가기 전에 전화기 또한 가게에 놓고 나왔다. 언제 폰에게 안부 전화가 올지 몰랐다. 지금 기분은 어떤 지, 태아의 상태는 어떤 것 같은지에 대해.
매일같이 그의 침대에 누워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전해 들었다. 그의 입술에서 그려진 한국은 라오스보다 더욱 아름답고 멋있는 나라였다. 그곳은 종교를 갖는 것도 자유고, 결혼할 상대가 꼭 아니더라도 자유롭게 연애할 수 있다고 했다. 도심 가운데에 인공파도가 치는 수영장이 있다고도 얘기해주었다. 나는 그의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을 때마다 한국을 떠올리며 있는 힘껏 배에 힘을 주었다. 점점 배가 불러오고 있었다. 나나의 정체를 들켜선 안 되었다. 폰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한국이 어떤 모습일지 그의 얼굴을 통해 선명하게 그려질 뿐이었다.
밤이다. 해부실에는 나만이 남아 있다. 이제는 나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실험물이 된 몸체이다. 누군가가 창문을 닫지 않고 나갔는지 몸체 위로 덮인 천 쪼가리가 휘날린다. 개복된 몸체 안으로 바람이 가볍게 드나든다. 과연 라오스 장례풍습인 송사깐대로 화장되었어도 뼛가루 사이로 바람이 가볍게 드나들 수 있었을까. 스님들이 장례행렬에 따라 따뜻하게 유골함을 안아주고 돈과 사탕을 뿌려주었을까. 창문 바깥에서 어렴풋이 찬송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해부실 문이 열린다. 교수가 해부실 안으로 들어온다. 자주 해부실을 왔다 갔다 하며 연구를 하던 노교수이다. 교수가 내게 다가와 잘린 얼굴 단면 사이로 눈알 하나를 꺼낸다. 핏줄을 확인하고, 눈알 뒷면을 더듬으며, 풀린 홍채를 본다. 교수는 밤마다 나를 찾아와 장기 하나씩을 훑는다. 어느 날은 심장을, 또 다른 날에는 구멍 뚫린 식도를. 오늘은 눈이다. 이 눈으로 항상 웃던 폰을 보며 따라 웃었었는데. 나나의 초음파 사진을 폰과 함께 바라 본 적이 있었는데……. 늙은 교수는 정수리가 훤히 보이고, 허리는 구부정하다. 그는 자켓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을 닦아내기 시작한다. 기억들을 지워버리라는 것인가. 그가 뚫어져라 눈알 한쪽을 바라본다. 폰이 수없이 바라봤을 나의 눈이다. 내가 한국남자를 따라 비행기를 타기 전, 폰은 마지막으로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섭다. 사람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다니. 그렇게 빠르게 생명 하나를 손으로 죽일 수 있다니.
한국 남자가 내게 한국행 티켓을 쥐어주었을 때, 나는 산부인과로 향했다.
나나는 너무나도 쉽고 빠르게 세상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스테인레스 쟁반에 담긴 나나는 잘잘하게 분해되어 있었다. 장기가 분리되고, 팔과 다리, 얼굴이 뒤섞여 점토처럼 놓여 있었다. 잘린 나나의 넓적한 뒤통수가 폰을 빼닮아 있었다. 폰의 주먹 정도만큼 자란 나나를 떨리는 손바닥 위로 옮겨 닮았다. 나나의 무게가 생각보다 무거웠다.
노교수는 오늘도 어김없이 무게를 잰다. 나의 심장과 창자 그리고 뇌의 무게를. 오늘은 눈의 무게를. 마음의 무게는 왜 재지 않는 것일까. 내 속에 부장품처럼 놓여 있는 마음의 무게. 왜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가며 해부하지 않는 것일까. 이렇게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데.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공항에 마중 나온 것은 한국남자의 아내였다. 남자에게 아내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한국에 도착하면 강남에 들려 파스타와 피자를 먹자는 남자의 말에 비행하는 다섯 시간 내내 비행기 날개를 힘 있게 바라봤을 뿐이었다. 이혼서류는 아직 법원에 넘어가지 않은 상태였다. 남자는 아내를 보더니 인천공항 근처 모텔에 나를 내려주었다. 어느새 내 손에는 한국 돈 이십만 원이 쥐어져 있었다. 남자는 중화반점에 전화를 걸어 짜장면 하나와 탕수육 하나를 주문하고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모텔 방 안은 붉은 꽃이 새겨진 벽지로 뒤덮여 있었다.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 짜장면과 탕수육이라는 것을 보았다. 검은 음식이라니. 어쩐지 불결한 느낌이었다. 면발을 힘겹게 집어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면발을 후룩 빨아들이자 고춧가루가 뒤섞인 자장소스가 가랑이 근처에 이리저리 검붉게 튀었다. 나는 점토처럼 묻은 자장소스를 내려다보다 바지를 벗어 화장실로 달려갔다. 비누를 물에 풀어 바지를 거칠게 빨았다. 손이 물에 점점 불었다. 지문 사이로 주름이 물렁하게 잡힐 때까지 바지 가랑이를 오랜 시간 벅벅 긁어냈다.
남자가 모텔주인의 계좌로 보내주는 돈의 액수가 점차 줄었다. 일주일에 십만 원에서 오만 원으로, 삼만 원에서 만 오천 원으로. 세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주인은 방을 빼라고 했다.
-남자 분이 번호를 바꾸셨더라고요.
주인이 더듬더듬 하는 영어에 따르면 남자가 법원에 낸 이혼서류를 다시 회수했다고 했다. 나는 얼마 없는 짐을 꾸려 모텔 밖으로 나갔다. 택시를 타고 인천 부둣가에 내렸다. 조금 걷자 방파제가 나왔다. 나는 방파제 위로 올라가 주저앉았다. 짠 소금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언어들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바닷가에서는 파도가 세차게 일렁이고 있었다. 루앙프라방에서는 볼 수 없는 포말이 이는 파도였다. 나는 인천 바다를 바라보며 블루라군을 상상했다. 그곳은 잔잔한 물결이 유영하는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우리, 폰과 나의 놀이터였다. 햇살이 비치면 티셔츠를 벗고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 다이빙을 하고 놀았었는데. 폰은 수영을 굉장히 잘했었는데……. 물결 사이를 헤엄치는 폰의 기다란 팔다리가 인천 바다 속에서 잠시 비쳤다. 그러나 이내 파도와 함께 휩쓸려 사라졌다.
나의 사망 절차는 간단히 이루어졌다. 누군가의 발견으로 인해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선고시간이 정해졌다. 나는 곧바로 병원 근처에 있는 대학 해부실에 옮겨졌다. 연고자가 없는 이유에서였다. 손에는 한국남자에게 받은 한국 돈 삼천 팔백 원이 쥐어져 있었다. 나나를 마지막으로 손에 만졌던 무게 정도였다. 피는 쉽게 빠졌다. 혈관에 넣은 방부제가 몸속을 빠르게 타고 돌았다.
바깥에서 향냄새가 스며든다. 나의 영결식이 있는 날이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영결식이 치러졌다. 고인에게 예를 다해 추모하는 영결식. 자신들이 해부하고 몸 속 곳곳을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았던 시체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추모이다. 예를 갖춘다고 차려입은 양복쟁이 백여 명의 학생들이 해부실 근처로 모여든다. 영결식에 내 사진은 없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들은 나의 영정사진 대신 자신들의 기념사진을 찍는다. 개인 또는 단체로. 양복 입은 자신의 모습을 애인에게 전송하며 자랑스러워하겠지. 폰이 나나의 초음파 사진을 들고 와 아빠가 되었다며 자랑스러워했던 것처럼. 폰이 웃으며 내게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나도 저렇게 사랑스럽게 웃었는데. 그들이 영결식을 하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내일이면 똑같이 새로운 학생들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칼집이 그대로 나 덜렁거리는 뱃가죽과 함께. 또 다시 이국에서의 밤이 찾아온다.
혓바닥이 얼얼해질 때까지 개의 뼈를 핥는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지만 쉴 틈 없이 혀를 놀린다. 모든 감각을 집중하면 어렴풋하게 짠 맛이, 혹은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기도 한다. 얼음으로만 겨우 축인 입안에서는 지독한 구취가 난다. 입김을 뱉을 때마다 풍기는 노린내를 견디며 나는 대원들을 바라본다. 어제까지만 해도 살아 있던 윌슨은 이제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다. 다들 언제 잠든 걸까. 윌슨의 옆 일찌감치 동사한 세 명의 대원들을 훑어보며 나는 살점 없는 뼈다귀를 핥는다.
처음 고립되었을 때만해도 창밖으로 설산이 보였는데, 이제 보이는 건 백태 낀 혀처럼 하얀 어둠뿐이다. 애초 우리가 도달하려 했던 남극점의 중간까지도 가지 못한 채 횡단은 유보되었다. 세종기지가 있는 웨델 해에서 출발해 남극점 도달을 최종 목표로 두고 나와 각국에서 온 다섯 명의 대원들은 원정을 시작했다. 육 개월 동안 이어질 남극의 밤이 시작되기 전에 서둘러 원정을 마쳐야 했다.
화이트 아웃이 일어난 것은 베이스캠프에 갓 도착했을 때였다. 블리자드라 불리는 강풍이 불고, 한 차례 폭설이 지나간 후로 이곳엔 화이트 아웃이 일어났다. 강설로 사방이 온통 하얘 어떤 것도 식별할 수 없었다. 백야로 인해 원정은 점점 더뎌졌다. 혹여 햇빛이라도 섞여들면 눈도 뜨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둠의 농도가 옅어졌다 짙어지는 것으로 낮과 밤을 겨우 구분하며 우리는 원정을 이어갔다.
곧 남극의 밤이 시작될 예정이다. 속히 복귀 하도록.
전기가 끊기기 전, 마지막으로 들은 교신은 이러했다. 거기 있던 누구도 장비를 챙기거나, 짐을 싸지도, 앞으로의 복귀 계획에 대해 섣불리 말하지도 않았다. 되돌아가기엔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화이트 아웃이 일어난 뒤로 기온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베이스캠프의 지붕은 눈 무게로 절반쯤 내려앉아 있고, 얼음이 팽창해 갈라진 창틈으로는 눈이 밀려들어 온다. 그저 䃰’밖에 없는 곳이다. 사람도, 동물도, 언어도 사라지는 곳. 소멸만이 이어지는 불모지에서 나는 머릿속이 하얘질 때까지 뼈다귀를 핥는다. 이곳에선 모든 것이 하얗게 표백된다.
그제는 허스키를 잡아먹었다. 레토르트와 통조림마저 떨어져 남아 있던 소금을 묽게 끓여 나눠 먹은 지 사흘 째 되는 날이었다. 사흘 전, 세 명의 대원이 죽고 나와 부대장인 윌슨만이 살아 있었다. 조국에서 몇 번 개를 먹어본 적 있는 나와 달리 윌슨은 개의 눈을 보며 한참 망설였다. 동조 없이 침묵하면서도 연신 입맛을 다시는 그를 보며 나는 칼을 잡았다.
대장님, 차라리 소금물을 마시는 게 어떨까요. 저는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개의 목에 칼을 가져다 댔을 때, 침묵하고 있던 윌슨이 말했다. 그는 신실한 성도였다. 손목에 찬 묵주를 만지작거리며 그는 잠시 코를 훌쩍였다.
꼬리를 흔드는 허스키의 눈동자를 나는 멀거니 바라보았다. 유일하게 오래 살아남은 개였다. 썰매개로 데려온 다른 허스키들은 일찌감치 얼어 죽었다. 잘 벼린 칼을 들고 나는 잠시 주춤대었다. 개의 푸른 눈동자에 기묘하게 일그러진 인간의 형체가 어른대고 있었다.
어렵지 않은 일이야. 윌슨. 내가 살던 곳에서는 다들 개를 잡아먹었거든. 그래. 다들 점심으로 개를 먹었어. 한국말로 하면 보신탕, 그러니까 스튜 같은 것. 그런 걸 먹었지.
손을 떨며 아무 말이나 중얼대는 나를 보며 윌슨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별 수 없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허기는 개의 그것처럼 날선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개는 짖지도 않고 죽었다. 오랫동안 썰매를 끈 개의 목을 찌르며 나는 잠시 울컥했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이곳에서 죄책감 같은 사사로운 감정은 수신호도 없는 통신장비만큼이나 불필요했다.
허기가 가시자 윌슨의 얼굴에 잠시나마 혈색이 돌았다. 개의 고기는 따뜻하고, 생각 외로 부드러웠다. 미약하게나마 발전기가 돌아가고 있어 우리는 스토브에 고기를 익혔다. 음식을 씹고, 삼키는 소리만이 가득한 베이스캠프 안에 어떤 훈기 같은 것이 감돌아 꽝꽝 얼어 있던 창문에 금세 김이 서렸다.
대장님,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뭡니까?
개의 간을 질겅질겅 씹으며 스캇이 물었다.
저는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습니다. 기왕이면 맥주도 마시고 싶구요.
점퍼 안에 몸을 파묻고 호기롭게 말하는 윌슨을 보며 나는 작게 웃었다. 오랜만에 짓는 웃음이었다. 굳어 있던 안면의 근육이 모아지고, 다시 펴질 때마다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묘한 감정이었다. 대장님은요? 한참 웃던 내게 윌슨이 물었다.
나는…… 개고기가 먹고 싶네. 딱딱하게 굳은 혀를 움직여 아무도 하지 않은 질문의 답을 쏟아낸다. 윌슨도, 허스키도 가물가물 사라진다. 차가운 뼈다귀를 들고 나는 몸을 달달 떤다. 어제부터 윌슨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잠을 자려는 개처럼 몸을 둥글게 만다. 서늘한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온몸을 쿡쿡 찌른다. 몸을 말고, 온 신경을 곤두세우면 얼음의 밑바닥 어디에선가 개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린다. 나는 빳빳해진 귀를 바닥에 바짝 붙인다. 조난 된 지 닷새째 되는 밤에도 비슷한 울음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그 때가지는 네 명의 대원 모두 살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막 취침 준비를 마치고 램프를 껐을 때였다. 처음에는 통신장비에서 나는 잡음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들으니 아니었다. 조그맣게 들리다 서서히 격렬해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몸을 모로 돌렸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이곳저곳에서 들렸을 뿐이다.
눈꺼풀이 무거워질 때마다 환한 밤이 조금씩 희미해진다. 대장님,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게 뭡니까? 눈이 감길 때마다 윌슨이 내 귀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넣는다. 어디선가 퀴퀴한 피비린내가 난다. 끈적한 침이 턱을 타고 흐르는 듯한 환각도 함께 느껴진다. 가장 하고 싶은 것…….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아마 죽는 게 아닐까. 이대로 이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죽는 것.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이대로 죽는 것. 죽기 위해 남극점 횡단에 지원한 것을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거의 이틀간 잠을 자지 않았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제야 졸음이 온다. 마지막일까. 천천히 눈을 감는다.
*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하루 넘게 잔 것 같은데, 시간을 가늠할 수 없어 얼마나 잠들었던 건지 알 수 없다. 마비된 몸속 가득 눈이 쌓여 있는 느낌이 든다. 후우우 하아아. 아랫배를 부풀려 숨 쉬려는 노력을 하고나서야 비로소 등과 가슴이 부드러워진다. 폐를 억지로 부풀리며 천천히 일어나 앉는다. 숨을 들이쉬기가 괴로울 정도로 공기가 싸늘하다. 얼굴을 더듬어본다. 눈썹과 수염은 이미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다. 눈썹에 붙은 얼음 알갱이들을 조심스럽게 떼어낸다. 통증과 함께 감각이 서서히 돌아오면서 불쑥 요의가 느껴진다. 참다 그대로 쏟아낸다. 뜨겁고, 축축한 것이 아랫도리를 적신다. 온기가 거의 사라진 인간의 몸에서 여전히 이렇게 뜨거운 것이 나온다는 사실에 놀란다.
바지에 실례를 한 건 초등학생 이후로 처음인데. 잠시 웃음 비슷한 것을 지어본다. 수치나 모멸은 오래 전 잊어버렸다.
창틀에 쌓인 눈을 긁어모아 갈증을 달랜 뒤, 조심조심 여러 개의 몸을 건너 뛰어 윌슨이 누운 자리로 간다. 가슴 부근부터 천천히 더듬어본다. 예상한대로 윌슨의 몸은 차갑다. 팔뚝과 허벅지는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다. 윌슨을 들어 올리려다 곧 포기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체온이 떨어지는 게 느껴져 윌슨의 점퍼라도 걸치려 했지만 이대로라면 어려울 것 같다. 행여 숨겨놓은 식량이 있을까 싶어 윌슨의 점퍼를 뒤져본다. 점퍼를 뒤져 발견한 건 은으로 만든 묵주뿐이다. 차가운 묵주 알을 하나씩 넘긴다.
윌슨은 작고 말랐고 말이 많은 편이었다. 가끔은 저 작은 몸 어디에서 저런 에너지가 나오는 걸까, 궁금할 정도로 활기찼다.
대장님, 혹시 에우로파를 아십니까.
에우로파?
네, 목성의 위성 말입니다.
죽기 며칠 전, 개의 뼈에 붙은 살을 발라내다 말고 그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입술이 얼어 발음이 자꾸 뭉개져 들렸다.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 있는 위성이라고 합니다. 듣기로는 그 두꺼운 얼음 층 밑에 바다가 있다는데, 그 바다 속에 생명체가 살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만약 그 밑에 생명체가 산다면 우리가 상상하는 생명체는 아닐 겁니다. 왜냐면 거기는 빛이 없는 닫혀 있는 공간이기에.
잠시 말라붙은 입술을 축이다 스캇은 말을 이었다.
저는 그 얼음바다 속에 어쩌면 눈이 없는 고래가 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채 외롭게 섭식만 이어가는 그런 고래 말입니다.
그게 스캇과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유난히 짧은 대화였다. 어쩌면 그 뒤로도 며칠 더 살아 있었으니 그 대화가 마지막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 한 말은 떠오르는 것이 없으므로 그 말이 마지막 대화가 되어버렸다. 에우로파와 눈이 없는 고래. 이제는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이야기.
윌슨의 점퍼 안쪽으로 깊숙이 손을 넣어 몸을 더듬는다. 다행히 복부에서 미세한 온기가 느껴진다. 안도하며 그를 다시 들어올린다. 윌슨은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다. 몸을 굽힐 때마다 윌슨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한다. 그 눈동자에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괴이한 형체가 비친다. 윌슨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숙인 채 점퍼를 벗긴다. 경직된 관절 때문에 한쪽 팔을 빼내는 것도 힘겹다. 숨을 몰아쉬며 팔을 빼낸다. 힘을 줄 때마다 한기가 감돌던 몸에 열이 퍼진다.
겨우 점퍼를 벗겨 낸다. 땀으로 축축했던 등이 다시 서늘해진다. 표면이 얼음조각으로 뒤덮인 점퍼 위에 윌슨의 방한 점퍼를 걸친다. 운신조차 어려울 만큼 갑갑하지만, 이가 딱딱 소리를 내며 저절로 부딪히던 전보다는 한결 낫다. 다시 여러 개의 머리를 건너뛰어 내가 있던 자리로 되돌아간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누군가의 머리가 발등에 부딪힌다. 단단하고 작은 그 머리를 밟고 순식간에 넘어진다.
꿈일까. 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로 나는 유유히 헤엄치는 고래와 마주한다. 에우로파의 두꺼운 얼음 층 밑에 산다는 눈이 없는 고래. 부력도, 중력도 미약한 그곳에서 섭식만을 이어가는 고래의 입 속으로 나는 서서히 들어간다.
환청인 걸까. 하얀 어둠뿐인 고래의 뱃속에서 울음소리를 듣는다.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그 소리를 따라 눈을 돌린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뜨거운 무언가가 맺히는 것만 같다. 이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눈 먼 고래와 비슷한 울음소리를 내며 나는 천천히 운다.
벽 틈으로 파고든 얼음이 팽창해 뻐근하게 갈라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윌슨과 누군지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부패한 대원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드러눕는다. 점퍼에 남아 있는 윌슨의 채취가 코를 후벼 판다. 점퍼 안주머니에 빳빳한 무언가가 짚인다. 손을 깊숙이 집어넣어 꺼내본다. 좀 바래긴 했지만 사진이다. 컬러사진이겠지만, 얼마나 만졌는지 손때가 묻어 바래고 바래 마치 흑백처럼 보이는 사진이다. 테마파크 같은 곳에 윌슨의 가족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일렬로 서 있고, 그 가운데 아이를 든 채 환하게 웃는 윌슨이 있다. 언젠가 윌슨이 자신의 아이의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를 닮아 파란 눈동자를 가진 여자 아이었다.
곧 세 살입니다. 두 달만 있으면 생일인데 이번 생일도 같이 보낼 순 없겠네요.
말하며 그는 설핏 웃었다. 내가 본 그의 얼굴 중 가장 슬픈 얼굴이었다.
고개를 돌려 윌슨을 바라본다. 파란 눈동자는 점점 뿌옇게 흐려지고 있다. 사진을 윌슨의 몸 위에 올려놓는다. 아이의 생일은 지났을까. 손을 꼽아 날짜를 세다 이내 포기한다.
꽤 오래 전 일이지만, 내게도 아이가 있었다. 아내도 있었다. 행복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때때로 드라이브를 했고, 주말마다 함께 교회에 갔다.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아내와 어린 딸을 볼 때면, 이 가지런한 세계가 흩어지지 않고 온전히 유지될 것만 같아 마음이 놓였다.
그날도 그랬다. 천국의 문이 가장 넓게 열린다는 크리스마스, 기상청이 생긴 이래 최대의 폭설이 내린 날이었다. 아이는 성탄 예배가 끝나고 실종되었다. 폭설이 그치고 사흘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는데, 눈이 다 녹고 신축공사 중이던 교회 부지에서 벌거벗은 채 발견되었다. 아이의 몸 곳곳엔 시퍼런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흉부에서 허벅지까지 듬성듬성 찍힌 발자국들을 나는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이의 몸은 냉동육처럼 찼다.
한동안 초등생 실종 살해사건으로 불리며 여기저기서 아이의 죽음에 대해 떠들어대곤 했다. 아내가 자살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괴로워만 하다 범인이 잡혔다. 교회 소년부에서 중창단을 하는 중학생 남자아이였다.
저 이런 말씀 드리긴 뭣 합니다만. 범인이 아직 미성년자고, 그 친구도 많이 반성하고 있답니다. 그러니 합의 생각을 해보시는 게…….
교회의 단상 아래 소년을 세워 둔 채 담당형사는 말했다. 중창단복을 입은 채 손톱을 깨무는 소년과 카메라로 소년을 연신 찍어대는 기자들을 멀거니 바라보다 그대로 그곳을 떠났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도, 그 전엔 생각조차 못했던 극지 횡단을 계획한 것도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눈이 먼 고래처럼 섭식만을 이어가며 극지를 차례차례 횡단할 때마다 나는 가족이라 불렀던 이들의 기억을 조금씩 지워갔다.
여전히 백야뿐이다. 하얗고, 하얗기만 한 세계를 올려다보며 보고 싶다, 중얼거린다. 한동안 발음하지 않아 낯설기만 한 말이다. 이제는 아무에게도 전해질수 없는 견고한 언어들이 입 안에서 둥글려지다 허공으로 서서히 흩어진다.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싶다. 되뇌다 한때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던 사람들이 생각나 울컥한다.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렁거린다. 외로움엔 무뎌질 만큼 단단한 인간이라 생각했는데.
눈이 감긴다. 허스키가 극점을 향해 썰매를 끈다. 대원들이 깃발을 꽂으며 헹가래를 한다. 얼굴이 까맣게 타버린 그들과 함께 환호한다. 성공적으로 횡단을 마치면 늘 그랬다시피 우리는 눈 속으로 머리를 집어넣는다. 눈앞이 하얗게 암전된다. 얼음 속에서 아내와 아이의 뒷모습을 본 건 착각이었을까. 그곳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함께 천천히 녹고 싶다. 눈을 감는다. 이제야 깊게 잠들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