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콘테스트> 제27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by korean posted Mar 0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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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콘테스트> 제27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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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 한국인]이 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고자 분발하는 젊은 영혼들의 순수 문학 창작의욕을 북돋기 위해 기획한 <창작콘테스트>가 제27차 당선자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월간문학 한국인]<창작콘테스트>는 작가로서의 무궁한 필력이나 완벽한 전문성을 하나하나 따져 시상하는 그런 대단한 문학상이 아니다. 오로지 전문작가가 되기만을 꿈꾸어온 예비작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다소 흠결이 있더라도 치열한 작가정신과 독특하고도 개성있는 표현,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따져 우열을 가릴 뿐이다. 따라서 설혹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 가능성을 보아 당선작을 뽑을 뿐임으로 문학상으로서의 권위를 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할 것이다.
  이번 공모에서는 응모작품수가 지난 공모에 비해 늘었다지만 형식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응모한 작품이 상당수였다. 또한 모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을 터이고 나름의 재능을 발휘하였다고 보여지지만, 상당수의 작품들은 여전히 진부한 낱말들의 사용과 구태의연한 표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점이 아쉽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그간 겪어온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에 의해 산고를 겪듯, 그 누구도 쓰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문체와 어법, 시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이번 <창작콘테스트> 제27차 공모에 참여해주신 작가 여러분들, 그리고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 창작을 자신의 운명으로 택하려하는 모든 분들께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기원하며 각별한 감사와 격려의 뜻을 전한다.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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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부문



■ 중원시장 11호 장판가게의 여백
   - 최정연


두어달 전부터 주인이 보이지 않는다
소문에는 몸져 누워 못나온다 하고
도회지 큰 병원 어디에 입원했다는 사람도 있다
말들은 많아도 본 사람은 없었다

촌스런 장판 한아름에 몇십단씩 쌓여
가게안은 족히 열평도 넘었으나
매번 가게는 자꾸만 좁아졌다
하루가 멀다하고 용역들은 으름장을 놓고
하나있던 아들은 젊은날 노름빚을 피해 숨어버렸다
내 품같이 피붙이들 키워낸 중원시장 삼십여년
장판가게 불이 꺼져야 같이 문 닫고
단골 대포집에서 탁주를 기울이던
한복가게 김씨 할아버지도
이제 모르는 집을 들여다보듯
주름진 눈가위에 손바닥을 얹는다



■ 내가 아는 김석구 씨
   - 최정연


별일없이 채널을 돌리다
뉴스에 나온다 내가 아는
김석구씨는

열다섯에 서울로 와
손톱밑 물 마를 날 없이
북경반점 뒷켠 방 한칸에서
단무지 김치 반찬삼아
통장에 꼬박꼬박 숫자를 늘렸다
가난이 습관처럼 다시 올까봐
악착같이 서른이 되었다
어엿하게 제법 요리도 하고
짜장 짬뽕 가방을 가득 채워 배달도 한다
인생의 반을 가난하지 않기 위해 살아서
남은 인생 자기보다 없는 사람들 돌본다고
여기저기 보육원에 고아원에
가난이 병이 되어 모인 사람들 곁으로 간다
때로는 의지가 그를 만들고
존경의 카메라와 인터뷰가 그를 따랐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는 뉴스에 나왔다
처음 북경반점 뒷편에서
매운 눈물 흘리며 양파까던 두 손은
이제 무거운 수갑에 눌려있다
가진 것이 없어 괴물이 됐다고
그가 말한다
그가 말하는 수많은 괴물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모습으로
뉴스를 지켜보고 있다



■ 개포 2단지 경비실에서
   - 최정연


개포 2단지 경비실에 앉아있다
방문객은 손님 혹은 택배기사
가족이 아니면 절차가 복잡하다
내 집은
지하철 두번을 갈아타서
열 여덟 정거장
내리면 다시 마을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
초등학교 건물을 돌아
시장 골목을 지나면
목마디 길다란 이 아파트보다
본디 낮고 자그마한 늙은 전세방
굽 낮은 구두를 신고 여기까지 왔건만
나는 경비실 네모진 방 안에서
조서처럼 신상명세 빼곡히 적고
경비아저씨가 내미는
상장같은 방문증을 가슴에 달고서야
이 번쩍이는 금빛 숲을 지날 수 있단다



■ 별자리
   - 최정연


별과 별 사이를 이어 만든 별자리처럼
지나간 나의 조각들을 이어 붙여도
이리 아름다울 수 있을까
어두운 밤하늘 누구의 가슴에
첨벙거리며 물수제비 띄워 놓을 수 있을까
새벽녘 별똥별 하나 떨어지면
어딘가 묻어놓았던 아픈 추억
피딱지 떨어지듯 가슴 한 켠이 저릿한데
그맘때면 누구의 빈 가슴
띄엄띄엄 점 찍어 퐁당거리며
그리운 별자리 하나 남길 수 있을까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밤하늘 수천의 별들을 헤아리는 것
가보지 못한 저편을 더듬거리듯
피곤한 항해를 계속하는 것
아침에도 말갛게 피어오르는
새 별빛 같은 누군가의 가슴을 찾아
징검다리 건너 건너 별자리를 옮겨가는 것



■ 동정의 경제학
   - 최정연


그는 오늘도 지하철 역에 나와
벤치 손잡이에 머리를 베고 돌아누웠다
굳은 머리카락, 계절 없이 입고 나온 옷 한벌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그에게서 입을 닫는다
덮고 있던 신문지가 바람에 날리면
당장은 먹고사는 문제가 그와 함께 나뒹굴었다

그도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다면
솜털 날리는 자식들 하나 둘 크는 맛에
야근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을 재촉했을텐데
허울좋은 GNP 몇만 불에 수출강국 대한민국
솟구치는 그래프에 어느새 우리는
먹고 살기 좋은 나라 동방의 경제대국
이제 어느 누구도 고개를 돌려
옆을 보지 못한다
꿈 많던 청년들은 노량진 고시촌으로
혹은 멋들어진 이력서를 채우기 위해
밤잠을 설치고
대학은 이제 아무 고민도 투쟁도 없이
대기업의 발 밑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입맛에 맞는 학생들을 골라 줄을 세운다

누군가 높으신 분이 하신 말씀에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각자의 필요한 자리에서
더욱 발전하는 그런 나라 만들어 보자 하시던데
설마 그가 필요한 그 자리가
사람들 지나다니는 지하철 역 계단 아래
페인트 빛 바랜 늘어진 벤치였을까





********
은상
당선작 심사평


  제27차 <창작콘테스트> 은상은 시(詩)부문 최정연 씨의「중원시장 11호 장판가게의 여백외 네 편의 시를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시인 김호철 / 시인 정은정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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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 입양
   - 박선영


아기가 칭얼대더니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아기는 좀체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공항에서 잠자고 있던 아기는 입양 관계자의 확인 절차를 거쳐 위탁모의 품에서 내 품으로 왔다. 얼마나 운 것일까. 아기를 건네받을 때 위탁모의 눈은 발갛게 충혈돼 있었다. 눈을 보고 그녀가 위탁모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아기를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위탁모의 울음이 따라왔는지, 아기는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입술을 삐죽거리며 손을 휘저었다. 다리를 곧추세우고 우는 아기를 달래느라 나는 진땀을 뺐다.
아기는 특별한 인연을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나는 교육 받은 대로 기저귀를 갈아주고 우유를 타서 입에 물렸다. 우유를 먹지 않아 과자를 주었다. 평소 좋아한다며 위탁모가 건네준 과자였다. 하지만 아기는 우유도 과자도 먹기를 거부했다. 오직 강아지 인형만 꼭 끌어안고 있었다. 스튜어디스가 와서 달래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미국 9.11 테러 직후여서 한국에서 뉴욕까지 논스톱으로 가는 건 불가능했다. 비행기를 여러 번 갈아타야 해서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그 와중에 나도 눈물이 났다. 아기의 울음이 내 감정을 건든 탓이었다. 불안하고 서러운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아기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기에게 닥쳐올 운명은 뻔했다. 좋은 양부모를 만나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아기가 겪어야 할 삶은 절대 쉽지 않을 테니 말이다. 아기의 운명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한국에서 뉴욕까지 직항은 12시간에서 13시간 정도 걸리지만, 돌아서 가는 길은 멀었다. 일본 하네다 공항과 워싱턴 공항을 거친 뒤 또 비행기를 갈아타고 뉴욕으로 가야 하는 힘든 여정이었다. 몸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이 천근만근이었다. 급기야 후회가 밀려왔다.
한국에서 뉴욕까지 가는 비행기 푯값은 100여만 원 정도라 했다. 그런데 입양 가는 아기를 데려다주면 43만 원에 왕복 비행기 표를 살 수 있단다. 그 조건에 나는 선뜻 응했다. 교육을 받을 때는 설레기까지 했다. 내가 굳이 이 일을 하겠다고 나선 건, 입양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아기를 못 낳는다는 선고를 받은 뒤 아동복지 센터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거기서 이 일을 제안 받았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슬픔이 차오를 줄은 몰랐다.
아기가 쉴 새 없이 울자 급기야 승객들이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다. 스튜어디스가 마이크를 잡고 양해를 구했다. 이런 일이 종종 있는데, 갓난아기는 잘 몰라서 잠을 자기도 하지만, 좀 큰 아이는 입양 가는 걸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자 승객들이 오히려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아기는 울다 지쳤는지 잠이 들었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다. 혹시 양부모의 생활이 여의치 않아 파양 당하지는 않을지 안심할 수도 없었다. 어떤 통계에는 입양아의 자살이 높다고 나와 있었다. 자살 예방 상담사 일을 할 때 공부한 내용 중에 본 수치였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걱정한다고 능사가 아니다. 차라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더 옳을지도 몰랐다. 입양 성공 사례도 많기 때문이다. 입양아들은 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기 때문에 공부도 마음껏 할 수 있고, 좋은 일을 하는 사람도 더 많다고 한다. 친부모에 버금가는 양부모를 만난 이들도 많단다. 스티브 잡스와 플뢰르 펠르랭이 그런 인물이었다. 대성이도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나는 속으로 축복해주었다.
드디어 뉴욕 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하자 신기하게도 아이는 울음을 뚝 그치고 조용해졌다. 아이를 안고 밖으로 나오자 양부모 가족들과 입양에 관련된 단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진심을 다해 환영해 주었다. 플래카드에 “김대성 환영합니다.”라고 한글과 영어로 쓰여 있었다. 소중한 한 생명을 품에 안기 위해, 인종과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기는 양부모의 품에 안겼다.
입양아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집착이 많다고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 친부모를 찾는 경우가 흔하단다. 그 때문에 입양아들을 위해 친 가족 찾기 프로그램과 단체가 있다고 했다. 나는 대성이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었다. 올 때는 한국말을 조금이라도 배워서, 자기 뿌리가 대한민국이라는 것도 잊지 않았으면 했다. 가끔 TV에서 보면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입양아들도 많았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했다.
대성이를 보내고 난 뒤 한 번 더 제안이 들어왔지만 하지 않았다. 대성이가 이미 내 마음을 다 차지해버린 탓이었다. 대성이 만으로도 나는 벅찼다. 그렇게 세월은 훌쩍 흘렀고 나는 대성이를 조금씩 잊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 좋은 소식을 접했다. 대성이 소식을 들은 것이다. 대성이는 위탁모와 연락을 하고 있었단다. 훌쩍 커버린 대성이가 자기 뿌리를 찾겠다고 국제 법률가의 꿈을 키우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대성의 다부진 모습을 생각하며 나는 그제야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 친구야 그대로만 있어줘
   - 박선영


며칠 전이었다. 오후에 전화가 와서 받으니 친구였다. 친구는 느닷없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시간을 보니 4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좀 일찍 전화하지 그랬어. 거기까지 갔다가 영화보고 집에 오려면 난 한밤중인데….”
그러자 친구는 “오기 싫으면 오지 마.” 하면서 전화를 끊어버렸다. 순간, 나는 당황했다. 시간이 늦지 않으면 얼마든지 갈수 있는데 내가 사는 곳하고 친구 집은 왕복 4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예정에 없던 일이라 선뜻 대답을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친구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 나는 다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갈 테니까 같이 영화보자. 그런데 무슨 일 있어?”
친구는 그때서야 한숨을 푹 쉬더니 우울해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치과치료를 받았는데 치료를 마치고 집에 와서 쓰러졌단다. 일어나보니 다음날이었다고, 꼬박 하루를 누워있었다고 했다. 혼자인 것도 서러운데 몸까지 마음대로 할 수 없어 갑자기 허무가 밀려온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그래도 가장 생각나는 사람이 나였다며 친구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대충 머리를 매만졌다. 화장도 하지 않은 채 마스크를 쓰고 집을 나섰다. 집에 아들이 있는 게 다행이었다. 애를 볼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마음이 간다한들 외출을 할 수 없어서다. 아들내외가 직장에 다니고 있어 내가 손자를 돌보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를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발길을 재촉했다. 예전 같으면 밤낮없이 찾던 친구 집이지만 내가 경기도로 이사를 한 뒤로 서울은 먼 곳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마음이 있어도 거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마음까지 멀어진 건 아니었다.
친구와는 육십 대 후반에 늦깎이 대학공부를 하다 만난 사이다. 공부에 대한 열정과 한이 많았던 우리는 서로를 거울처럼 바라보며 정이 들었다. 진심을 나누다보니 이제는 흉허물 없는 사이가 되었다. 친구는 여장부처럼 씩씩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상처가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평탄치 못했던 가정생활과 오십대에 얻은 병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런데도 친구는 공부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고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요양보호사 자격증까지 땄다. 병 후유증으로 늘 피곤해하면서도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을 돌보러 다니는 강한 친구였다. 그런 친구여서 내가 의지하고 살았는데 친구도 많이 힘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친구나 나나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라 건망증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다. 치매라는 단어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OECD 국가 중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이고 그중 노인 자살률이 2위라는 뉴스를 접하면 우울해졌다. 그 모든 것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걸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전에 봤던 뉴스가 생각났다. 어느 대학교수가 친구에게 열 두 시경 전화를 걸어 “친구야! 내가 지금 힘든데 와줄 수 없겠니?” 했다고 한다. 하지만 친구는 당장 갈수가 없어 세시까지 가기로 약속했다. 약속이 무색하게 그는 한 시간 뒤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그는 왜 죽음을 앞두고 친구에게 전화를 했을까. 누군가 자신을 붙잡아주길 바란 것이었을까. 아니면 죽음을 결심하고 친구에게 사후처리를 부탁할 셈이었을까. 죽음을 결심한 사람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하기에 추측만 할 뿐이다.
친구란 힘들 때 의지하고 싶은 사람이다. 자식에게 하지 못한 속마음을 나누는 사람이기도 하다. 맘이 맞는 친구라면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밤새 함께 있어도 좋은 게 친구다. 나이가 들수록 내게 친구란 그런 것이었다.
서울까지 가는 내내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전화를 했더니 친구 목소리가 훨씬 밝았다. 밥 먹었냐고 묻자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영화관 앞에서 만나기로 한 뒤에야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친구는 여느 때처럼 웃으며 날 반겨줬다. 우리는 손을 맞잡고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영화가 끝나고 난 뒤 같이 밥을 먹으며 나는 친구에게 말했다.
“친구야! 그냥 그대로만 그 자리에 있어줘.”
그러자 친구가 내 손을 꽉 잡았다. 남은 날들을 최고로 값지게 살기로 약속하자며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친구와 헤어지고 난 뒤 집에 오니 시계바늘이 막 열두시를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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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당선작 심사평


  제27차 <창작콘테스트> 은상은 수필부문 박선영 씨의 「입양외 한 편의 수필을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수필가 유미숙 / 수필가 정금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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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부문



1950년, 철원
박영옥



곧게 뻗은 소나무가 촘촘히 박힌 장방산자락 어느 한적한 마을. 켜켜이 쌓아 올린 돌담들은 보통 어른 키보다 훨씬 낮았다.
장로 박씨가 마을 나지막한 언덕 위, 작은 교회로 목사를 안내했다. 목사는 늙은이를 어쩌기야 하겠냐며 빗장 쳐진 문을 부수고 거침없이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희끗희끗한 긴 수염에 다부진 체구에선 이내 당당함이 풍겼다.

먼지 자욱한 예배당 맨 앞자리에 앉은 목사가 두 손을 모았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 인도하시는 이는 오직 주 하나님이라 믿습니다. 아멘.’
목사는 폐쇄된 지 한해가 다 되어 가는 이 교회가 마지막 사역지가 될지도 모를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때, 종이 울렸다.
목사를 보고 꾸벅 인사하는 종지기 덕팔의 얼굴은 온통 멍 자국이다.
“덕팔이 쟈가 그런거이 아이래요.”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그 사건의 밀고자로 덕팔을 지목하고 있었다.
 
두 해전, 세계전쟁의 종식과 함께 일본군이 제 나라로 돌아갔다.
하지만 철원 장방산골엔 해방의 기쁨은 오지 않았다.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북에 위치한 이곳은 곧바로 북조선노동당(당시 공산당명)이 장악했고, 그들은 인민공화국 건설에 방해가 되는 자들을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기독교 교인들을 반동세력으로 몰아 대대적으로 숙청할 기회를 노리던 차에, 철원 지역을 대표하는 철원제일교회 바로 그 뒤편에 교회보다 더 크고 웅장한 콘크리트 건물의 ‘조선노동당사’건립을 착수하고, 교회로 들이닥쳐 교인들을 내몰고는 교회를 임시 조선노동당사로 둔갑시켰다.

철원제일교회에는 젊은 부목사가 부임해 와 있었다. 그는 남측에서 조직된 ‘38선 이북 관리국’의 철원 조직책으로 파견된 자였다.
젊은 목사는 노동당의 감시를 피해 인근 장방산골로 찾아와 청년들을 모았다.
그리고 얼마 후, ‘비밀결사대’가 조직 되었다.

덕팔은 몰랐다.
팔삭둥이로 태어난 덕팔은 지적발달장애인이다.
덕팔은 자신을 낳다가 죽은 어머니 대신 평양댁을 ‘어머이’라 부르며 같은 젖을 먹고 자란 평양댁의 딸 옥희를 좋아했다.
하지만 옥희는 덕팔의 형, 덕구를 따랐다.
덕팔은 옥희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것이 형 때문이라 생각했다.

형이 자꾸만 사라졌다.
아무래도 옥희를 몰래 만나는 것 같은 낌새로 형의 뒤를 쫓았다.
“우테 팔푼이를 달고 왔드래?”
“아이래, 아이래.”
“쟈가 떠벌리믄 우짤라 그러나?”
청년들은 덕팔을 그냥 돌려보내는 덕구가 못마땅했다.
결사대는 노동당과 인민군의 집결지가 될 당사의 완공식에 맞춰 폭파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벌써 수차례 마을을 돌고 있던 옥희와 덕팔이 마주쳤다.
“덕팔이 니, 진짜루 모르나?”
“모른데니!”
크게 고갯짓 하는 폼이 의심스럽지만 쉬이 알려줄 기색이 아니었다.
“읍내 부목사님이 내더러 오라바이랑 같이 오랬는데…….”
젊은 목사가 감시망이 좁혀오자, 연락부장 덕구를 부르기로 하고 위장을 위해 옥희도 함께 오라 했던 것이다.

“보소, 이기 강가에서 주왔는데… 함 삶아 보드래요.”
평양댁은 덕팔의 아버지 최씨가 슬쩍 내민 붕어를 빼앗듯 받아들곤 낮은 담장 너머를 휘이 둘러봤다.
“이 간나는 또 오디메로 쏘댕기는 기야.”
옥희가 젖먹이 시절, 대장장이 지아비가 왜놈에게 끌려갈 때 간신히 도망쳐 장방산골로 들어온 평양댁은 덕팔의 젖동냥을 구하던 최씨와의 첫 만남부터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거 내랑 읍내 구경 안 갈래요?”
“고저 어방 없는 소리 말고, 날래 국밥이나 드시라요.”
쏘아붙이듯 대꾸했지만, 평양댁은 곧 최씨 뒤를 따라나섰다.

마을을 벗어나, 뒤서거니 앞서거니 걷던 둘이 저수지 삼거리 채 못 미친 곳에 다다를 때였다.
“저, 저거이 옥희 신 아이래요?”
얼마 전, 최씨가 옥희의 생일선물로 사다준 꽃신이 분명했다.
물살에 휩쓸려갈 어린애도 아니고, 신 한 짝 벗어놓고 뛰 다닐 엉성한 가시내도 아니다.
더구나 아끼고 아껴 매일 닦아놓기만 했던 꽃신. 그것도 한 짝만 덩그러니 뉘어져 있다니…….
저문 해를 뒤로하고 돌아온 평양댁은 밤이 새도록 마을 길목에서 서성였다.
평양댁이 애가 타들어가는 동안 옥희는 생사의 길목에 놓여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르고 맑았다.
내린 팔 길이만큼 자라 활짝 핀 달맞이 꽃잎이 손끝에 닿았다. 개천을 따라 장방산골로 돌아오는 옥희의 다른 한 손엔 소매 끝자락 안으로 숨긴 지령 쪽지를 쥐고 있었다.
덕구에게 꼭 전해주라는 젊은 목사의 당부를 되뇌며, 마치 큰 선물이라도 받은 양 옥희는 노래가 절로 나왔다.

찬송가였다.
인민군을 가득 태운 트럭이 옆으로 무심히 지나치는가 싶더니,
“저 간나 수상하지 않네?”
“반동찬양소리 같습네다.”
“잡으라우!”
쇠 갈리는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트럭에서 인민군들이 펄쩍펄쩍 뛰어내렸다.
옥희는 순간 숨이 멈췄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떨어졌다. 개천의 물소리가 멈췄다.
도망쳐 달리는 옥희의 두 팔이 번쩍 들어 올려졌다.

철원 땅 가장 높은 곳에 십자가를 세운 큰 교회로 옥희가 끌려왔다.
이곳을 점령한 인민군과 노동당원들은 지하 예배실을 취조실과 고문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거사 취소, 대기하시오!’
지령 쪽지에 적힌 글귀는 명백한 증거였다.
옥희는 직감했다. 덕구도, 젊은 목사도, 그 누구의 이름도 대면 안 된다는 것을.
손가락이 차례로 부러졌다. 고문관은 손톱 속을 찌르고 사정없이 짓이겼다.
고문관들은 당사의 완공식을 앞두고 큰 공을 세우겠다며 서로 자청하고 나서 열여덟 어린 소녀에게 갖은 고문을 자행했다.
기절하기를 수십 번, 옥희는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옥희의 오라비, 동희가 잡혀 왔다.
예배실, 아니 고문실 문이 열렸다. 한낮이었으나 고문실 안은 컴컴했다.
시뻘건 핏물이 밴 꽃신 한 짝이 발끝에 걸려 있었다.
두 손은 의자에 묶인 채 피로 문드러져 있고, 저고리는 풀어 헤쳐져 젖가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초점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는 허공 위를 가리켰다.
두려움과 공포에 온몸이 바스러지듯 떨던 동희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사라졌던 옥희가 꼬박 나흘 만에 반송장이 되어 업혀오자 평양댁은 넋이 나갔다.
“울음소리 낮추래요…….”
동희는 입단속을 단단히 시키고 밖으로 나갔다.

덕구에게 지령 쪽지를 내밀었다.
이방인 출신인 동희를 결사대 조직에 동참시키지 않은 것에 덕구는 반대했었다.
동생 덕팔과 옥희는 같은 젖을 먹고 자란 친남매나 다름없고, 살림을 도맡아 해주는 평양댁을 덕구 또한 어머니로 생각하고 있었다.
덕구에게 동희는 벗이자, 형제였다.
덕구는 동희를 의심하지 않았다.

청년들이 야밤을 틈타 조직부장 순이 집으로 모였다.
동희는 덕팔에게 이담에 옥희를 각시로 맺어주겠다 약속하며 덕구 뒤를 밟아 사람들이 모인 장소를 알려 달라 부탁해 놨던 터였다. 
온달 빛에 빨간 완장들이 반짝였다.
“샅샅이 수색하라우!”
마을은 몇 날 며칠에 걸쳐 쑥대밭이 되었다.
툇마루 틈과 기둥 속, 다락 안, 처마 밑 등 곳곳을 파헤쳐 총기와 폭탄, 각종 증거품이 속속들이 끄집어졌다.
발견된 문서에는 결사대 조직도와 거사에 대한 계획이 쓰여 있었다. 
청년들이 줄줄이 포승줄에 묶였다. 그리고 읍내 젊은 목사의 은신처가 발각되었다.
불과 일주일, 노동당사 폭파 거사를 코앞에 남겨놓은 때였다.

인민군 앞잡이로 몰린 덕팔은 수시로 주민들에게 매를 맞았다.
매를 맞고 또 매일 인민군에게 찾아갔다.
“우리 성, 언제 돌아온대요?”
“거, 옥에서 뒤지지 않았음, 아오지로 보내졌을 끼야. 기다리지 말라우.”
인민군 군영에서 온갖 잡심부름을 하며 덕팔은 형의 안부를 물었었다.

덕팔이 세차게 종을 쳤다. 종소리를 듣고 형이 돌아올까 싶어서다.
“저, 저 팔푼이 놈이 찌른 거예요.”
빨랫감을 머리에 인 아낙이 핏대를 세우며 손가락질을 하고 침을 뱉었다.
동네 꼬맹이들이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저리 못 꺼지나!”
달려온 옥희가 윽박질렀다.
“다 큰 머스마가 어째 맨날 맞고 다니네.”
덕팔은 옥희를 보고 히죽거렸다.
다 헤진 천 조각으로 칭칭 감은 손이 보였다.
목사가 살피려하자, 옥희가 두 손을 뒤로 숨겼다.
“예배당 집회 다시 열리믄 제가 찬양 반주 칠거래요.”
목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매일 이른 아침 종이 울렸고, 옥희의 손톱도 새로이 자라났다.
이듬해 늦여름, 남측 대한민국과 북측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또 해가 두 번 바뀌었다.

인민군들이 다시 마을로 들이닥쳤다.
“당의 징집 명령이야. 용감한 의용군들 날래 나서라우!”
인민군이 덕팔의 뒷덜미를 잡아채듯 끌었다.
“이놈은 모지라요. 내, 내가 대신 갑니다.”
덕팔을 뒤로 젖히고 최씨가 앞으로 나서자, 동희가 덩달아 옆에 붙어 섰다.
“덕팔아, 느그아부진 걱정말더래, 내 지켜드릴 테니.”
동희는 죗값을 치르기라도 할 양, 최씨 팔에 힘주어 팔짱을 꼈다.
“오라바이 어데 가는데…….”
옥희가 동희에게 매달렸다.
“종간나, 비키라우!”
인민군이 총기로 등을 찍어 눌렀다.
끌려 나오는 장정들의 옷자락을 잡은 아낙들도 총기에 눌려 쓰러졌다.
쌀독을 털다시피 포대에 담고 나오는 인민군의 멱살이 잡혔다. 박씨였다.
“이, 이 날강도래….”
인민군이 박씨의 아구창을 후려쳤다.
뒤에 섰던 박씨 처가 낫을 들었다.
“지금 뭣들 하는 기야!”
인민군 소좌가 허공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위대하신 김일성 장군님께서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시고 인민들을 위해 조국 통일을 하시 갔다는데 이렇게밖에 동참 못 하갔어?”
“다들 총살당하고 싶어 환장했나!”
이때, 총을 든 소좌 앞으로 목사가 나섰다.
“이보게, 잠시만 시간을 좀 주시게. 이들을 위해 잠시만 기도하게 해주시게.”
“단 몇 분 준다고 조국 통일이 늦춰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목사는 끌려가는 이들의 손을 잡았다.
“주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아멘.”
“주께서 함께하실 걸세.”
인민군 소좌는 목사를 향해 협박조로 소리쳤다.
“목사 양반, 두고 보기요. 곧 당에서 공개 처형하라는 명이 떨어질 테니.”

한여름의 기승에 매미들이 밤새 울어댔다.
6월 25일 이른 새벽, 교회 종이 울렸다.
요란한 소리가 상공을 휘갈겼다. 전투기들이 벌떼같이 하늘을 뒤덮었다.
마을 사람들이 언덕 위 교회 앞으로 모여들었다.
드넓은 벌판엔 시꺼먼 탱크들이 남쪽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인공기래요!”
“인공기를 흔들어요!”
사방에 붉은 기가 휘날렸다.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주민들은 일제히 장방산 숲속 방공호로 들어가고, 다시 교회 종이 울리면 마을로 돌아왔다.
그러기를 석 달 조금 지났을 무렵, 전투기들의 비행방향이 뒤바뀌었다. 남쪽이 아닌 북쪽이었다.
연방 울려대는 공습경보 사이렌이 집중 폭격을 알렸다.
미군 전투기 한 대가 마을 위로 낮게 날아와 찰나에 지나갔다. 폭격이 조준된 곳은 바로 조선노동당사 건물. 두꺼운 콘크리트 벽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굉음이 철원 땅을 뒤흔들었다. 철원제일교회 십자가도 날아갔다. 건물의 형태도 남기지 않았다. 장맛비처럼 쏟아지는 폭탄에 곳곳에서 화염 불이 타올랐다.

장방산 숲속 바위 굴 안은 폭탄이 터질 때마다 천장이 흔들렸고, 공포에 떠는 아이들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잔잔한 찬송가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싸인 날 돌아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목사의 찬송에 의지했다.
어느새 아이들은 울음을 그치고, 찬송가는 자장가가 되었다.

수일간의 렛소리가 멈추고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돌아온 마을은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다행히 폭격을 맞지 않은 교회를 피신처로 삼았다.
해가 저물자, 패잔병 인민군들이 스멀스멀 마을로 들어왔다. 교회 안은 인민군, 아니 부상병들로 가득 찼다.
몇몇 주민들은 부상병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며 인민의용군으로 끌려간 가족을 물었다. 하지만 그들의 소식을 아는 이는 없었다.

동희와 닮은 부상병을 부축하던 평양댁이 멀뚱 서있는 박씨 처에게 소리를 높였다.
“날래 돕지 않고 뭐 합네까?”
“시방 누기를 도우라는 건데요? 우테 그래요, 그리 못해요!”
“인민군이 사람이가? 저것들은 사람이 아이래.”
박씨가 한소리를 보탰다.
“다시 말해 보기요, 고저 인민군으로 끌려간 우리 동희 두고 한 말입네까?”
평양댁이 옆에 선 박씨 처의 머리채를 잡았다.
싸움을 말리는 주민들이 두 패로 갈리어 서로 몸을 튕기기 시작했다.
“진정들 하세요. 이럴 때일수록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방치하는 것 또한 살인입니다! 살인자가 되시겠습니까?”
백발이 성성한 목사의 만류에 가까스로 싸움은 멈추었으나, 좀처럼 설득되지 않은 주민들은 결국 교회를 떠나 방공호로 거처를 옮겼다.

때마침, 비밀결사대 체포사건 당시 극적으로 도망쳤던 석배가 돌아왔다.
석배가 이끄는 남한군 일개 소대는 방공호로 들어가 주민들과 치안대를 결성하여 퇴진하는 인민군과 전투를 이어갔다.
한동안 총성은 끊이지 않았다….
포로로 잡은 인민군 수가 늘어날 때마다 치안대는 태극기를 흔들며 승리를 자축했다.
간혹 보급품을 구하러 마을로 들어온 대원들은 가족의 생사만 확인하고 곧바로 숲으로 돌아가곤 했다.
문제는 교회 안에 주둔하고 있는 인민군 부상병들이었다. 이들이 교회 밖, 마을 밖으로 나가면 치안대에게 떼죽음을 당할 것이 자명했다. 주민들도 밥 먹듯 굶는 판에 이들을 언제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덕팔이 종탑 앞에 섰다.
짙은 새벽안개가 자욱했다. 시야는 한 치 앞이 안 보였다.
인기척이 났다.
“옥희나?”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에, 뒤에서 누군가 덕팔을 버럭 끌어안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덕팔이 종 줄을 사정없이 당겼다.
‘뎅뎅뎅뎅-!’
“인민군이다!”, “인민군이다!”
덕팔의 입을 틀어막은 인민군은 바로, 덕팔의 아버지 최씨였다.
“아부지!”, “덕팔아!”
덕팔과 최씨가 얼굴을 비비며 오열할 때, 치안대들이 교회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교회 안에서 옥희가 나왔다.
“뭐이가? 무신 일이래니?”
총구들이 그림자를 따라 움직였다.
대장 석배가 방아쇠를 당기자, 기다렸다는 듯이 총알이 빗발쳤다.
교회당 안의 인민군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그때,
“멈추시오!”, “멈추시오!”
교회에서 목사가 뛰쳐나왔다. 목사는 양팔을 높이 쳐들고 포화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순간, 목사의 다리가 그대로 꿇렸다. 총알이 관통한 다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멈추시오!”
목사 뒤로 금빛 동이 터 올랐다.
“사격 중지!”
석배의 신호에 드디어 총성이 멈췄다.
고꾸라진 최씨와 옥희를 온몸으로 감싸 안은 덕팔은 벌집이 된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옥희가 일어나 덕팔을 끌어안았다. 평양댁이 혼비백산되어 달려 나왔다.
“살인을 멈추시오!”
목사가 위엄 있는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양팔은 십자 모양으로 벌린 채였고, 꿇린 다리엔 피가 흥건했다.
대장 석배는 목사를 부축하며 인민군들에게 도망 길을 허락했다.

인민군도 치안대도 물러간 마을엔 상처만 남은 주민들뿐이었다.
얼마 후, 방공호에서 치안대가 철수 준비를 서둘렀다.
석배는 마을로 내려와 목사에게 피난 갈 것을 권고하고, 백골부대로 합류하기 위해 급히 돌아갔다.
“우테 여적이래요. 목사님요, 떠나셔야 해요.”
떠나는 주민들의 설득에 목사는 마을에 남는 이들과 함께 있겠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인민군이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에 옥희와 평양댁은 동희의 귀환을 기대하며 되레 들 떠있었다.
“형제자매님들, 곧 다시 만납시다.”
목사는 떠나는 이들에게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었다.

석배의 말대로, 개미떼 같은 중공군이 밀려와 벌판을 밟고 지나갔다.
그리고 마을로 인민군들이 들어왔다.
1950년 12월 마지막 날. 교회 종은 울리지 않았다.
종지기 덕팔이 죽고 난 후로 목사가 매일 종을 울렸었다.
인민군들은 치안대가 교회 소속이었다며 목사를 주동자로 몰았다.


어렵사리 면회가 허락되어 박씨가 목사를 찾았다.
목사는 곧 처형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총상 입은 다리가 채 아물기도 전에 더해진 모진 고문으로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몸이 된 목사는 처형장으로 끌려갈 때 직접 두 발로 걸어가고 싶다며 지팡이를 부탁했다.
수없이 밟혔던 벌판이 새하얀 눈으로 덮였다.
처형장, 새문안 골짜기로 지팡이와 두 발자국이 새겨졌다.

동희는 남으로 다시 북으로 또다시 남으로… 끊임없이 전장에 끌려 다녔다.
중공군의 합세에 사기가 오른 인민군들은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남하하던 도중, 혹한 추위와 보급품의 부족으로 점차 다시 북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전쟁 발발 1여 년 만에 다시 원점이었다. 북위 38선을 놓고 휴전회담이 오갔다.
하지만 전투는 더욱 치열했다.
백마고지의 탈환을 두고 뺏고 뺏기는 피의 전장은 숨을 고르지 않았다.

“뒤지고 싶지 않으믄 날래날래 움직이라우!”
동희 옆에서 소리치던 소좌가 쓰러졌다. 소좌는 구멍 난 배에서 쏟아지는 장기를 받쳐 들고 껄떡껄떡 숨을 몇 번 몰아쉬더니 뜬 눈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보리주먹밥 한 덩이를 받아들었다. 사흘 만이었다.
빈 물통을 차고 다닌 지 벌써 여러 날, 물소리를 따라갔다.
개울가는 시뻘겋게 물들었고, 꺾여 뉘어진 갈대숲 위로 인산을 이룬 시체들에서 썩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목구멍에서 피 냄새가 올라와 참을 수가 없었다. 겨우 삼켜 넘긴 까슬까슬한 밥알이 그대로 역류해 올라온 것을 손으로 받아, 다시 목구멍으로 쑤셔 넣었다.

쓰러지듯 누우면 죄책감에 눈이 감기지 않았다.
깜깜한 밤하늘엔 쉼 없이 불꽃이 터졌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수많은 병사들이 사라졌다.
“고저 우리 마누래, 막둥이는 잘 낳았는지 모르겠고만….”
“이래하다 다 죽는거이 아이래요?”
“간나 새끼, 그리 나약해 빠진 생각하다 죽는 거이야. 정신 줄 꽉 잡으라우.”
밤새 가족 걱정을 하던 인민군도, 의용군으로 끌려온 까까머리 녀석도 다음날은 보이지 않았다.
아군, 적군의 경계조차 알 수 없는, 허공을 떠도는 비명이 총성보다 무서웠다.

퀭해진 눈가에는 독기가 가득차고 총을 든 손에선 살기가 흘렀다.
‘인간이 인간에게 이토록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형제와도 같은 이들을 잡아 죽이고, 어린 누이에게 갖은 고문을 자행한 자들을 위해 살인 병기가 된 자신을 생각하면 죽도록 괴로웠다.
‘하지만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방아쇠를 당겨야 한다.’
‘죽여야 한다. 나는 살아야 한다.’
움직이는 모든 것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밟고 지나가는 시체더미에서 움직임이 느껴졌다. 바로 총부리를 갖다 댔다.
솜털이 보송한 앳된 병사였다.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 살려주세요. 어머니가 보고 싶습니다. 집으로 보내주세요…."
바들바들 떨고 있는 어린 병사의 눈에선 피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동희는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그 순간, 총알이 동희의 팔을 스쳤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총성이 울린 쪽을 향해 사격을 가했다.

그리고 잠시 후……
동희의 이름을 부르는, 희미하지만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남한군 탱크부대가 밀려왔다.
“퇴각, 퇴각하라우!”
하지만 동희가 향한 곳은 반대방향, 남쪽이었다.
동희는 석배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꼭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라는 석배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1953년 7월, 판문점에서 협정이 맺어지고 휴전이 선언되었다.
장방산골엔 태극기가 꽂혔다.
뎅 뎅 뎅…….
동희가 활짝 열린 교회당 문 앞에 섰다.
풍금 앞에 앉은 옥희와 동희의 눈이 마주쳤다.


<에필로그>

그로부터 16년 후, 장방산골 작은 교회 뜨락에 목사님의 순교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교회 뒤편 동산에 공산당 활동에 앞장섰던 이들의 후손들이 사죄의 뜻으로 세운 충혼탑이 있다.

- 고 서기훈 목사님의 이야기를 소재로 창작하였으며, 한국전쟁으로 희생되신 모든 분께 이 글을 바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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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당선작 심사평


  제27차 <창작콘테스트> 동상은 소설부문 박영옥 씨의 「1950년, 철원」을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소설가 김영찬 / 소설가 김충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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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당선자들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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