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콘테스트> 제10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월간문학 한국인]이 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고자 분발하는 젊은 영혼들의 순수 문학 창작의욕을 북돋기 위해 기획한 <창작콘테스트>가 제10차를 맞았다. 이번 제10차 공모는 그만큼 회를 거듭할수록 작품의 수준 또한 눈에 띄게 향상됐다는 평이다.
[월간문학 한국인]<창작콘테스트>는 작가로서의 무궁한 필력이나 완벽한 전문성을 하나하나 따져 시상하는 그런 대단한 문학상이 아니다. 오로지 전문작가가 되기만을 꿈꾸어온 예비작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다소 흠결이 있더라도 치열한 작가정신과 독특하고도 개성있는 표현,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따져 우열을 가릴 뿐이다. 따라서 설혹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 가능성을 보아 당선작을 뽑을 뿐임으로 문학상으로서의 권위를 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할 것이다.
이번 응모자 또한 모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을 터이고 나름의 재능을 발휘하였다고 보여지지만, 상당수의 작품들은 여전히 진부한 낱말들의 사용과 구태의연한 표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점이 아쉽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그간 겪어온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에 의해 산고를 겪듯, 그 누구도 쓰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문체와 어법, 시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이번 <창작콘테스트> 제10차 공모에 참여해주신 작가 여러분들, 그리고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 창작을 자신의 운명으로 택하려하는 모든 분들께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기원하며 각별한 감사와 격려의 뜻을 전한다.
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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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부문
타인의 방식
- 이은정
여자는 머리끝까지 물속에 집어넣는다. 욕조에 잔물결이 일면서 약간의 물이 쏟아진다. 여자는 급히 머리를 들어 올리고 가쁜 숨을 내쉰다. 증기로 가득한 욕조 안에서 여자는 삼십분 째 버티고 있다. 여자가 스크럽을 시작한다. 불어난 살갗에서 각질과 불순물이 엉켜 뜨거운 수면 위로 떨어진다. 불순물들은 여자의 삶처럼 천천히 욕조 아래로 가라앉는다. 여자는 배꼽에 손가락을 집어넣는다. 배꼽의 청결에 신경 써 본 기억이 없다. 누구에게든 한 때 유일한 숨통이었을 배꼽. 여자는 지난 삼 년 동안 이 작은 배꼽만큼 숨통이 조여 있었다.
1
남자가 처음 여자의 집에 들어왔을 때 거실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거실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여자의 사진이었다. 금장 테두리의 액자 속에서 여자는 화려한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불혹을 넘긴 여자의 몸매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탄력 있는 바디라인과 매혹적인 눈빛이 거실을 장악하고 있었다. 사진 속 여자에게 압도당한 채 넋을 잃은 남자에게 문자가 왔다. 샤워 중이야. 왼쪽으로 돌면 내 방이 있어.
남자가 거실 왼쪽으로 돌자 여자의 또 다른 사진들이 벽을 가로지르며 일렬로 서 있었다. 남자의 시선은 내내 그것들과 마주하며 걸었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 사진 속의 여자와 눈이 마주쳤을 때 방문이 나타났다. 남자가 처음 들어선 여자의 방은 뭐랄까, 낯설고 어둡고 스산했다. 제법 넓은 방에 갓을 쓴 네 개의 스탠드 불빛이 해괴한 분위기를 뿜고 있었다. 음울하고 무거운 진혼곡까지 들리자 남자의 동공은 긴장한 듯 팽창했고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고풍스런 앤티크 와이드 서랍장 위에는 액자들이 여럿 있었는데 대부분 반라 상태의 여자 사진이었다. 청바지만 입고 상의를 탈의한 채 양손으로 젖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사진, 수건 한 장을 길게 늘어뜨려 나체를 절묘하게 가리고 있는 사진, 그리고 만삭의 여자가 알몸으로 비스듬히 서서 배를 감싸고 있는 사진이 남자의 눈에 들어왔다. 결혼 전 속옷 모델을 하던 여자에겐 있을 법한 사진들이었다. 남자는 마지막 만삭의 사진을 집어 들었다. 여자의 낯선 모습이다.
뭐해애? 낮고 가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내 방안에는 로즈마리 샤워코롱 향으로 가득 찼다. 여자는 말끝을 늘어뜨리는 버릇이 있었다. 혀가 길면 말끝이 늘어지는가, 남자는 생각했다. 남자가 돌아보자 샤워가운을 걸친 여자는 자연스럽게 화장대로 가 앉았다. 샤워는 왜 한 거야? 어색한 남자가 물었다. 그냥. 더 나쁘기야 하겠어?
남자와는 다르게 여자에게는 긴장감을 느낄 수가 없었다. 남자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여자가 웃으며 다가왔다. 오늘은, 그러니까 사전 답사 정도로 하는 게 어때? 여자는 수건으로 머리를 훔쳐내며 천진하게 말했다. 적어도 우리 집 동선쯤은 파악해 두는 게 좋잖아. 리허설이라고 생각해.
죽음과 리허설이란 단어가 어떻게 만날 수가 있단 말인가. 여자는 어쩌면 죽기 전에 리허설이라는 단어를 한번쯤 써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의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반면 남자는 미간이 살짝 부풀었는데, 그건 짜증나거나 화가 나기 직전에 나타나는 일종의 버릇이었다. 남자의 버릇을 잘 아는 여자는 머리를 말리다 말고 손가락으로 남자의 미간을 꾹 눌렀다. 남자 쪽으로 몸을 숙이던 여자의 젖가슴이 흔들리며 탱탱하게 마주쳤다. 여자의 가슴이 이렇게 풍만하고 자극적이었던가.
답답한 남자가 일어나서 커튼을 걷으려고 하자 여자가 서둘러 남자를 막아섰다. 의미 없는 시간을 끄는 여자가 한심해서 남자는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여자는 영화 관람 할인권을 받기 위해 헌혈의 집에 들어선 여고생처럼 굴었다. 될 수 있는 한 빨리 일을 처리하고 돌아가고 싶은 남자에게 여자의 느긋한 태도는 야살스러워 보이기만 했다.
여자는 머리카락을 드라이하기 시작했다. 그런 여자를 보면서도 남자는 한마디 재촉조차 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준비와 시작은 여자로부터 진행되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오른손 손가락을 갈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젖은 머리카락을 솎아내면 드라이기를 든 왼손은 머리카락에 입김을 뿜었다. 삶은 시래기처럼 축 늘어졌던 여자의 젖은 머리카락이 탐스럽게 부풀어 올랐다.
여자는 입술에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붕어처럼 두어 번 입술을 끔뻑거렸다. 여자의 움직임에 반주라도 하듯 헤믈레 클락이 추를 가지고 논다. 여자는 헤믈레 앞으로 다가가는 거울 속의 남자를 응시했다. 헤믈레 앞에 선 남자는 모델 넘버를 살핀다. 남자의 로망이었던 헤믈레 클락 모델 중 천 만원을 호가하는 놈이다. 남자가 뒤를 돌았을 때 여자는 남자 앞에 바싹 다가와 있었다. 12월 31일이면 좋겠어. 빨간 입술이 숫자를 말하며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그 날이 어떤 의미가 있는데?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라고. 여자는 입 꼬리를 살짝 올리고 눈 밑 애교 살을 부풀리며 마치 교태를 부리는 듯 했다. 죽기 전 발악일지도, 혹은 어떤 다른 계획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왜 이런 생각을 한 거야? 설마 연희한테 미안해서? 여자 집에서 연희 얘기는 하지 말자, 다짐하며 왔는데 남자의 입이 불쑥 뱉어버렸다. 연희 이름이 나오자 여자는 이내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죽기로 작정한 사람의 얼굴을 표현하는 것이 여자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몇 초 만에 여자의 얼굴은 상실감과 무의미함으로 가득했다.
-사는 게 지루해.
-지루하다고 죽는 사람은 없어.
-난 그래. 그러고 싶어.
-만약 내가 거절한다면?
-그럴 수 없을 거야.
-어째서 확신하는 거지?
-날 죽이고 싶을 테니까.
말문이 막힌 남자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여자를 죽이는 상상을 골백번도 넘게 한 건 사실이었다. 차후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하면서까지 여자가 죽어가는 걸 보고 싶기도 했다.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남자의 미간이 힘 있게 부풀어 오르며 눈동자가 흔들렸다. 날 끌어들인 의도가 뭐야? 남자는 손아귀에 힘을 넣었다 뺐다. 오른쪽 주먹이 쥐가 난 듯 저렸다. 긴장을 하면 오른 손이 늘 말썽이었다.
-난 단지 내가 죽어가는 걸 당신이 지켜봐주길 바라는 거야. 죽이고 싶던 내가 죽는 걸 보며 당신,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까? 내가 당신한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야.
-마치 나를 위해 죽는 것 같이 들리는군.
누군가를 ‘위해’ 죽는 것과 누구 ‘때문에’ 죽는 것은 완벽하게 다른 문제다. 자신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여자라고, 잠깐이지만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 남자를 멋쩍게 만들었다. 실소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와인 잔을 내밀었다. 단 한 번의 죄도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의 피처럼 맑고 붉은 와인이 잔의 곡선을 따라 흔들렸다. 잠시 여자의 얼굴을 응시하던 남자가 잔을 받아서 단숨에 들이켰다. 침대에 걸터앉은 여자가 와인 잔을 굴리며 남자를 흥미 있게 쳐다보았다. 씨디 플레이어가 재부팅되는 소리가 들리고 치나리 웅의 still life after death가 흐른다.
-젠장. 이 음악 좀 끌 수 없어?
-난 이 곡이 좋아. 누군 야망과 목적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누군 아무런 준비 없이 가족과 친구를 잃어. 지금의 나와 잘 어울려서 좋아.
-넌 정말이지 사치스러운 여자야.
스피커에서 비명 소리가 연이어 들리자 남자는 참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남자를 향해 여자가 와인 잔을 높이 들어 보인다. 당신의 미래를 위해 축배를 들어야지. 화가 난 남자는 거칠게 방문을 닫았다.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액자에 사진을 넣고 거실 바닥에 반듯하게 세웠다. 여자 집에서 가져온 만삭의 여자사진이다. 남자는 사진을 응시한 채 소주병을 들이켰다. 연희로 족하다고, 더 이상의 아이는 필요 없다던 여자였지만 남자는 여자가 얼마나 아이를 기다렸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여자에게 다가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여자가 처음부터 사치스러웠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처녀가 자신한테 시집을 온 건 그에 상응할만한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남자의 딸은 혈액암을 앓는 네거티브 혈액형이었다. 부모의 작은 혈액 인자만 받아 네거티브로 태어난 딸에게 남자의 피는 아무 쓸모도 없었다. 구하기 힘든 혈액형에 혈액암까지 걸린 딸을 위해 남자는 피가 필요했다. 여자가 연희를 위해 처음으로 채혈을 하던 날, 남자는 여자에게 고급 세단을 선물했다.
여자는 아주 가끔 피를 뽑았지만 남자는 자주 지갑을 열어야 했다. 안정된 상류층은 아니었지만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에 남자는 여자에게 기꺼이 돈을 썼다. 가난했던 여자는 남자에게 피를 팔아 돈을 벌었고, 남자는 여자를 사서 딸을 살게 했다. 두 사람은 갑을이 아닌 동등한 입장이었다.
여자가 남자의 병원으로 불쑥 찾아들었던 건 이혼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술 중 과다출혈로 연희가 떠난 뒤였고 남자는 삶에 속수무책인 상태였다. 남자가 여자에게 밤낮없이 연락을 시도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런 남자에게 여자의 방문은 증오를 찾아들게 했고 어떤 이들에게 증오란 살아갈 이유가 되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이다.
삼 년 만에 마주 앉아 다짜고짜 도와달라고 하는 여자를 보며 남자는 일 분쯤 생각했고, 십 분쯤 망설였다. 죽고 싶은데, 근데 당신이 필요해.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야. 다소 황당했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솔깃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남자는 잔인해지고 싶었다. 이 여자를 얼마나 죽이고 싶었던가. 제 발로 걸어와서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데 거절할 재간이 필요한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해볼게.
의외로 남자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병원에 휴가를 요청했고 CPDA-1 항응고제가 포함된 혈액낭과 다량의 주사기, 여분의 채혈백 등을 챙겼다. 이동식 혈액냉장고를 부탁하면서 쉐이커도 함께 할까 했는데 일부러 제외했다. 그건 수작업으로 해도 관계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채혈을 하는 동안 머쓱한 분위기를 벗으려면 그 편이 나을 듯 했다.
여자가 다녀간 지 보름 만에 남자는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떨어졌을 때 남자는 첫마디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강단 있는 여자가 고작 보름 만에 후회하거나 마음을 바꿨을 리는 없었다. 고마워. 전화를 받자마자 여자가 내뱉은 첫마디는 ‘고마워’였다. 그 한 마디에 남자의 몸은 전율을 타고 손아귀에서 멈췄다. 남자는 오른손을 허공에 털었다.
통화를 하는 내내 남자는 연희의 사진이 든 액자를 넋 놓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진 속 연희는 코스모스 문양이 새겨진 분홍색 털모자를 쓰고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며 웃고 있다. 남자에게 세상 유일한 피붙이는 연희 하나였다. 잘 키우고 싶었다. 무엇보다 의사인 남자가 장담할 수 있었던 것은 연희의 건강이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연희에게 필요했던 건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혈소판 수치가 너무나 낮았던 연희는 수술하면서 혈액이 부족해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혈액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자의 도움만 있었더라면 연희를 위해 조금 더 노력해볼 시간은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결국 모든 게 냉혹한 여자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간 여자를 죽이는 방법을 고민하며 상상하며 보낸 시간들이 떠올랐다. 남자는 설핏 입 꼬리를 올리며 사진을 내려놓았다.
2
현관문이 열리고 남자가 들어선다. 훤칠한 키에 은테 안경을 쓰고 수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는 제 집인 양 슬리퍼를 신고 유유히 거실을 횡단한다. 벽에 걸린 여자의 사진 따위는 이제 남자의 시선을 잡아두지 못한다. 남자는 거칠 것 없이 여자의 방으로 향한다.
남자가 방으로 들어서자 침대 위에서 비스듬히 반만 누워있던 여자가 미소를 짓는다. 그 포즈와 표정 모든 것이 연출된 것이라 믿는 남자는 여자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왔어? 남자는 대답이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는 거리낌 없이 입고 있던 샤워가운을 벗고 알몸으로 반듯하게 몸을 누인다. 알몸인 여자가 거북한 남자는 옷을 다 벗을 필요가 있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여자의 가식은 언제나 상식 밖이었기에 묵인을 택하고 만다.
직사각형인 여자의 방은 방문과 마주하는 건너편 모서리에 침대가 놓여있다. 화려함을 절제하지 못한 고가의 앤티크 침대를 향해 흰색 캐노피가 가르마를 타며 몸을 늘어뜨리고 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차이나 풍의 음침한 조명과 검붉은 색의 벨벳 암막커튼까지 그것들은 마치 어떤 성스러운 의식을 치러야 하는 중압감을 주기에 알맞은 인테리어다.
여자의 방은 처음 왔을 때보다 더 음침해진 분위기다. 모서리의 침대는 헤드 부분을 제외하곤 벽면과 밀착되어 있지 않다. 침대와 벽면을 사이에 둔 빈 공간으로 남자가 들어선다. 남자는 들고 온 가방에서 천천히 물건을 꺼낸다. 혈압계와 주사기, 채혈백 등이 베드테이블로 옮겨진다.
남자는 여자의 왼팔을 들고 압박대를 감은 후 송기구로 열심히 바람을 보낸다. 펌프질을 하는 남자의 오른손이 느려질수록 여자의 왼팔에는 압박이 가해진다. 110에 70. 믿을 수 없을 만큼 여자의 혈압은 정상이다. 남자는 여자의 상완동맥이 바람 빠진 풍선이나 고압에 의해 스파크가 튀는 전선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그것은 걱정이라기보다 차라리 실망에 가까웠다.
남자는 혈압계를 정리해 넣은 후 혈액낭에 연결된 주사기 삽입구를 뽑는다. 짐짓 오랫동안 주머니를 바로 잡는 남자를 보며 여자가 피식 웃는다. 남자가 그런 여자를 본다. 동공이 흔들렸을까. 여자가 말한다. 겁나는 거야? 갑자기 남자는 머리가 복잡해 졌다. 겁나는 건가? 이제 와서 겁이 난다는 건 무슨 뜻일까 생각하자 화가 치밀었다. 겁이 나는 건지 후회를 하는 건지 헤아릴 수 없는 무책임한 심경이 남자의 미간을 어지럽힌다.
남자가 여자의 왼팔을 붙잡고 혈관을 고르자 여자는 반사적으로 왼손에 힘을 준다. 하얗고 투명한 여자의 살갗 아래로 연푸른 혈관이 드러난다. 일급수 강가에서 뛰어노는 플라나리아 같다. 고결한 척 맑은 물을 고집하지만 그들로 인해 결코 투명해보일 수 없는 물처럼 화려한 침대에 누워 남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있는 여자의 태도는 어설프고 가식적이라고 남자는 생각한다.
남자가 혈관에 주사 바늘을 꽂고 혈액낭을 만지작거린다. 천천히. 여자가 말한다. ‘천천히’라고. 연희도 ‘천천히’라는 단어를 곧잘 쓰곤 했다. 아빠, 천천히. 천천히 해. 고통에 느림의 미학 따위는 없다. 남자에게 느림이란 의미는 존재하지 않았다. ‘천천히’라는 말을 즐겨 쓰던 연희는 어디에 있는가. 남자의 동공에 푸른빛이 지나간다.
그 날 들었던 치나리 웅의 해괴한 음악이 방 안을 무겁게 에워싸고 있다. 이런 음악을 왜 듣는 것일까. 남자는 여자의 사치를 진저리치게 잘 알고 있다. 자신의 뼛가루도 도금을 해달라고 할 여자라는 것을. 여자가 제 마지막 날을 숭고하고 고상하게 포장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레퀴엠을 헤매고 다녔을지 남자에겐 뻔한 추측이다. 종교 따위에 관심도 없던 여자는 그저 미사보를 써보고 싶다며 어느 날부턴가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고 아마 레퀴엠에 대해서 알게 된 계기였을 것이다. 가식일지언정 단 한 번이라도 연희를 위해 기도한 적이 있을까.
혈액낭을 든 남자의 양손이 시소를 타듯 번갈아 오르내리며 쉐이커 기능을 대신한다. 붉게 물드는 팩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은 가식적인 여자의 삶을 조명하며 점점 초점을 잃어 가는 듯 보인다. 여자가 그런 남자를 쳐다본다. 침대를 가로지르는 캐노피처럼 눈물이 여자의 얼굴을 가로질러 흘렀다. 왜 눈물이 나는 걸까. 여자는 스스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하면서도 눈물을 닦아내진 않았다. 물어볼 게 있어. 여자가 남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때 어떤 생각으로 부재중이었던 거야? 어쩌면 그렇게 맥없이 잃어버리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꼭 한 번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여자는 대답이 없고 오랜 시간 불편한 침묵만이 흐른다. 여자의 입장에선 그랬다. 다른 누군가도 그날 생사를 넘나들어야 했고, 그 누군가에게도 여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남자처럼 여자에게도 남자가 필요한 날이었다. 여자가 아닌 단지 그녀의 핸드폰이 부재중이었을 뿐인데 여자는 자신을 탓하는 남자가 야속했다. 눈을 감고 숨을 삼키던 여자가 기억을 들여다본다.
당신이 날 처음 만난 날 처음 물어본 말이 뭔지 기억해? 혈액형이었어. 지금 생각하면 기막힌 일이지만 그 땐 먼저 혈액형을 묻는 남자, 뭔가 부드럽고 감성적일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혈액형을 얘기했을 때 그 때 당신 표정을 기억해. 뭐랄까 세상을 얻은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어. 난 연희한테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했어. 당신이 좋은 남편이 되려고 노력했다면 말이야. 그런데 당신은 처음부터 아내가 필요했던 게 아니야. 날 보험으로 들어앉힌 대가로 내게 사치를 선물한 거였어. 그게 얼마나 끔찍했었는지 알아?
끔찍하다고 말하면서 정말 끔찍한 표정을 짓는 여자는 지난 모든 시간이 고통이진 않았다는 걸 안다. 살아보지 않은 인생을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헛헛하고 고된 밤들을 보낸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여자에게 이혼 후 닥친 녹록치 않은 시간들은 남자를 이해하기에 충분했다. 위태로운 병을 가진 자식을 위해 언제든 수혈이 가능한 여자를 아내로 들인 것까지도 지금은 이해한다. 정작 여자를 서글프게 하는 건 그런 남자를 사랑한 자신이다. 여자의 삶에서 가장 진실했던 순간은 남자를 사랑했던 날들이다.
죽은 아내를 보내지 못하던 남자, 죽은 아내와 꼭 닮은 딸을 딸 이상으로 아끼던 남자, 그런 남자에게 곁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쓸모라도 있고 싶었던 여자다. 여자는 쓸모의 대가로 돈을 받았고 사치를 했다. 그 또한 남자가 미안해하거나 자책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시킨 배려였다. 사실, 여자가 사 놓은 명품 백 대부분은 콧바람 한 번 쐬지 못한 채 장롱 속에 쳐 박혔고 명품 화장품들도 튜브 마게 조차 벗지 못한 채 유통기한을 넘기기 일쑤였다. 남자는 그런 여자의 배려 덕분에 보상심리를 두둑이 쌓으며 살 수 있었다.
눈물은 조용히 여자의 볼을 타고 귓불에 와 맺힌다. 눈물은 소리가 없다. 지난 기억이 남긴 통증도 소리가 없다. 소리가 없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태풍의 눈이 잠잠할수록 그 위력은 대단해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소리에 예민하다. 큰소리로 웃어야 호탕하다 말하고 소리 내어 울어야 더욱 서글퍼한다.
얼마 전 여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 여자의 방에 암막 커튼을 달면서였다. 커튼에 달린 핀을 레일에 걸때마다 여자는 심장에 핀을 꽂는 듯 했다. 여자가 커튼을 쳐다보는데 남자의 옆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남자의 눈, 코, 입이 낯설지가 않다. 매일 봐 온 듯 익숙한 남자의 얼굴을 보자 지금 이 상황이 내심 안심이 된다.
-뭐 하는 거야? 기분 나쁘게 그 눈물은 뭐야.
-당신이 왜 기분 나쁜데?
-내가 억지로 뭔가를 하려는 것 같잖아. 뭐야, 무슨 뜻인데.
-누구라도 죽기 전에는 내려놓는 것들에 대해 떠오르는 게 많은 법이야.
-감정은 리허설이 안 되던 모양이지?
남자가 여자를 향해 비아냥댄다. 여자가 말한 보험이라는 단어가 여태 거슬렸던 것이다. 딱히 그렇게 단정 지어서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어느 정도는 그렇다는 걸 부인할 수 없기에 울화가 치밀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가 거저 희생했던 것도 아니고 응당한 보상을 받으며 살아온 주제에 그런 부당한 단어를 쓰다니. 이혼하기 전에도 여자는 종종 이런 과한 표현으로 남자를 화나게 했다.
-잘 들어. 지금부터는 한계치야. 그만하고 싶거든 지금 얘기해. 쇼크가 올 수도 있어. 그 쯤 되면 손 쓸 수가 없어.
-당신은 늘 그렇게 정직했어. 사람 미치게 말이야.
침대에 등을 기대고 혈액낭을 새 걸로 교체하는 남자는 여자를 쳐다보지 않으려 애쓴다. 여자가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것도, 머리가 흔들리면서 흐트러진 눈물 입자가 자신의 머리카락에 내려앉는 것도 남자는 보지 못한다. 남자가 팩을 새로 꽂는다. 투명한 팩이 검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남자는 끝까지 여자를 쳐다보지 않고 그대로 등을 지고 앉아있다. 이번에 교체한 팩이 가득차면 여자를 되돌릴 수 없다.
-당신이 병원에서 전화했던 그 날 나도 당신이 필요했어. 아니, 지난 삼 년 내내 그랬어.
여자의 말이 듣기 거북했는지 뒷목이 경직된 남자가 오른손으로 목 주위를 주무른다. 남자가 기억하는 여자는 항상 그랬다. 미안해할라치면 도를 넘어 남자의 옆구리를 파고들었고, 고마워할라치면 돈을 요구하던 여자였다. 가식과 위선으로 만들어진 여자는 언제나 자기를 봐달라고 징징대기만 했다.
-난 당신이 필요했는데 당신은 내 피가 필요했겠지.
-그만해.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거야? 징징대지 말고 엿 먹기 전에 포기하던지, 젠장.
-당신은 내가 아이라도 가질까봐 늘 초조해하던 비겁한 사람이야. 우리한테 아이가 생겼어도 난 연희에게 내 피를 모두 줄 수 있었어.
순간 남자는 여자가 어쩌면 자신을 붙잡기 위해 쇼를 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가 이혼을 안 해주니 어느 날 갑자기 손목에 칼을 들이대며 이혼해 달라던 여자였다. 여자는 항상 제멋대로고 막무가내였다. 혹시 이 모든 게 남자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계획이 아닌지, 남자는 징징대는 여자가 의심스럽다.
-당신은 단 한 번도 날 말리거나 붙잡지 않는구나.
-결국 그거였어? 그러니까 넌 내가 말려주길 바라면서 여기까지 진행한 거야? 그래?
-난 단지……. 한 번쯤 내 인생도 바라봐 줄줄 알았어.
-내가 여기 왜 왔는지 잊었어? 나한테 어떤 희망도 갖지 마. 난 널 두고 생각 따위 하고 싶지 않으니까.
남자의 모진 말에 여자는 약간 오기가 생긴다. 모든 계획은 철저했지만 남자가 여자를 살린다면, 혹은 그런 의도를 내비친다면 여자는 다시 살아갈 준비도 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것 또한 계획에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 연희를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남자이기에, 히포크라테스선서를 외쳤을 의사이기에 자신이 허무하게 죽어버리도록 내버려 둘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잃어가는 혈액만큼이나 희망을 걷어내야 한다는 걸 깨닫는 중이다.
이혼할 때, 적어도 미안했다거나 고마웠다는 말은 들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구걸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 정도 말은 해줬어야 했다. 그만하자. 그러니까 어차피 이런 선택을 할 거였으면……. 좀 전에 좀 심했다 싶었는지 남자가 먼저 말을 건네지만 여자는 마지막까지 곁을 주지 않는 남자가 원망스럽다. 남자가 생각보다 적극적이라는 것도 마음 아프다. 당신은 끝까지 연희밖에 없구나. 여자의 말에 남자가 한숨을 쉰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연희가 살아있으나 없으나 똑같아. 정말 대단한 남자야. 남자는 연희를 들먹이며 자신을 모욕하는 여자를 증오하는 눈빛으로 바투 쳐다본다.
-너만 있었으면 살릴 수도 있었어! 제 자식도 못 살린 주제에!
-제 자식?
여자가 실소와 함께 내뱉은 말은 남자를 자극했고, 남자의 부릅뜬 눈에 여자는 긴장한다. 여자는 온몸을 떨며 상체를 일으키려 하지만 현기증이 나서 버틸 수가 없다. 이거 멈춰줘. 나 할 말이 있어. 그냥 지금 말해야겠어. 여자는 힘겹게 몸을 지탱하며 말했지만 약이 오른 남자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결국 너 때문에 죽었어. 넌 자식이 죽어가는 것도 외면한 독한 년이야. 알아?
-말은 바로 해. 연희가 내 딸이야? 그리고 우린 이혼했어. 내가 왜 그래야 되는 건데 왜! 막말로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잖아!
흥분한 여자의 말에 울분에 찬 남자의 동공이 흰자위로 덮인다. 여자가 하얀 거품이 이는 남자의 눈을 본다. 흠칫한 여자가 주사기를 뽑으려 몸을 외로 비틀어보지만 흥분한 남자가 먼저 여자 위로 올라 타 버린다. 남자는 여자의 목을 움켜쥐고 손아귀에 힘을 준다. 죽어! 죽어버려! 원하는 대로 죽여줄게! 쓸모없는 년. 죽어! 죽어!
반쯤 찬 채혈낭을 매단 여자가 온 몸을 버둥거린다. 버둥거리는 여자의 팔에서 주사 바늘이 뽑혀 제 멋대로 나부끼다가 주저앉는다. 붉은 피로 뒤엉킨 왼팔과 백짓장처럼 하얀 오른팔이 허공에서 미쳐 날뛴다. 헤믈레 클락의 추는 여자의 왼팔과 오른팔을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는다.
남자는 정신없이 부엌으로 향한다. 비틀거리며 싱크대를 휘젓던 남자가 정수기 코크에 컵을 대고 눌러보지만 컵이 제멋대로 이탈을 한다. 남자는 컵을 던져버리고 정수기 코크를 앞으로 재껴 입을 갖다 댄다. 물이 남자의 입으로 하염없이 쏟아지며 넘쳐흐른다. 남자는 그대로 바닥에 미끄러진다. 남자의 정수리를 향해 정수기 물이 흘러내린다. 하얀 와이셔츠 가슴팍에서 희석된 핏빛의 물이 나선형으로 얼룩진다.
남자가 다시 여자의 방을 향해 움직인다. 방은 여전히 캄캄하다. 여자는 물에 젖은 봉제인형처럼 팔다리를 늘어뜨리고 있다. 남자는 뭘 해야 좋을지 잠시 머뭇하다가 창가로 다가간다. 침묵하던 암막 커튼의 입을 거세게 잡아당긴다. 어둡고 탁한 여자의 방이 처음부터 싫었다. 일이 끝나면 이 커튼부터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커튼이 감추고 있었던 것은 화려한 빛이나 신선한 공기가 아니다. 굳게 닫힌 또 다른 문. 방 속의 방. 여자는 왜 여기에 암막 커튼을 달았을까. 남자는 마치 다른 세상으로 들어서듯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깜깜한 방안에는 침대와 흔들의자가 보인다. 남자가 왼발을 집어넣자 센서로 불이 켜진다. 남자가 멈칫한다. 침대에 누군가 있다. 남자는 홀린 듯 침대로 다가간다. 사내아이가 누워있다. 손과 발이 비정상적으로 꺾이고 한쪽 입 꼬리가 눈과 맞닿을 듯 일그러진 안면이 힘겨워 보인다. 잠을 자는 걸까, 죽은 걸까. 남자가 아이의 어깨를 툭 하고 건드리자 아이가 눈을 뜬다. 살아있다.
어리둥절한 남자의 눈에 흔들의자에 놓인 서류 봉투가 보인다. 남자는 봉투를 들어 속엣 것을 빼낸다. 그것은 유전자 검사 결과 남자의 이름과 손지훈이라는 두 사람이 서로 부자관계임을 증명한다는 서류다. 이게 무슨……. 남자는 사내아이를 돌아다본다. 지, 지훈이? 남자가 이름을 부르자 아이가 입을 쩍 벌리며 과장되게 웃어 보인다. 남자는 소스라치며 서류 봉투를 떨어뜨린다. 바닥에는 다른 서류가 하나 더 떨어진다.
남자의 손에 손지훈이라는 사내아이에 대한 출생증명서가 들려 있다. 서류대로라면 여자가 이혼을 하고 집을 나간 지 7개월 만에 태어난 아이다. 그리고 RH-B라는 낯익은 알파벳이 남자의 눈에 들어온다. 그 때 사내아이가 남자를 보며 소리 내어 웃는다. 조용히 해! 남자는 사내아이를 내려다보며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사내아이는 남자를 보다가 천정을 보다가 또 다시 남자를 보며 웃는 걸 멈추지 않는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정을 올려다본다. 천정에는 남자의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있다. 남자가 뒷걸음을 친다. 오른쪽 주먹이 저려 온다. 남자는 여자의 침대로 돌아와 여자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한다. 일어나. 일어나서 설명 좀 해봐. 일어나! 그러나 창백한 여자의 얼굴은 깨날 조짐이 없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을 꾸민 거야! 일어나! 일어나!
헤믈레가 울린다. 늘어진 여자의 몸을 격렬하게 흔들던 남자가 헤믈레를 쳐다본다. 무언가를 찾아 두리번대던 남자는 의자를 들고 헤믈레 클락을 향해 돌진한다. 시계 앞 유리가 깨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헤믈레는 계속 울린다. 남자가 시계추를 뽑아내려 하다가 가만히 추를 응시한다. 골드컬러의 둥근 추에 남자의 얼굴이 사라졌다가 이내 나타나는데 거기엔 사내아이와 똑같은 남자의 얼굴이 있다. 추는 남자의 얼굴에서 이내 멈춘다. 열두 번쯤 울렸을까. 1월 1일인가. 12월 31일인가. 어쩌면 12월 32일인지도 모르겠다. 여자가 원하던 시간, 남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시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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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당선작 심사평
제10차 <창작콘테스트> 금상에 이름을 올리게 된 작품은 이은정 씨의 단편소설「타인의 방식」이다.
이은정 씨의 은상 당선을 축하한다.
소설가 김영찬 / 소설가 김충근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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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부문
■ 저녁식사
- 황현진
보리밭을 가르고 대문까지 온 바람을 맞이했을 때
가을이 한줌 섞여있다면 이제는 밥을 지을 때에요
마루에 뉘였던 몸을 일으키고 뒤주에서 쌀을 퍼와
한움큼 숨어있던 좁은 생명들을 솎아내고 나면
아버지는 물을 길어오시고 나는 천천히 붓습니다
하나개 해수욕장에 가본 적 있나요
모래사장을 건너면 바위와 자갈과 짠물이 만나
자박거리는 소리가 곧잘 들리곤 하죠
우리가 저녁을 지을 때면 서해에는
달이 끌어당기던 바닷물을 놓아주고
수렁이 되지 못하고 땅이 될 수 없던 대지 위로
다시끔 그들을 떠밀려 보내 식사를 준비하게 하죠
우리의 여섯시는 그래서 짠 반찬이 많습니다
먹고남아서 나문재라던 나문재도 한번 대치고
백중사리 때 선착장 위에서 저 혼자 죽어가던
망둥어도 말려서 김치와 지져놓았어요
목탁 위에 차려진 단촐한 모임에 이제 밥공기만
올려놓으면 또다시 저녁이 지나갑니다
아버지는 왼손잡이였으니 마주한 오른편에 젓가락을 놓아요
주걱으로 밥을 푸다가 설익은 것 같으면 국그릇 하나를 상위에 얹습니다
우리는 그런 밥을 좋아하지 않아요 익지 못한 것
아직 죽지 못한 것 제대로 살아있지 못한 것
밥상에서 마저 우리를 마주하긴 싫어요
그저 생각없이 입속에 우물거리다가 목으로 넘겨버리고
끼니를 때웠다는 소박한 만족감을 느낀 채
라디오를 듣다가 내일 만조시간을 보고 잠에 들고싶어요
■ 向日葵
- 황현진
오늘의 날씨는 몰락이다 너도 떨어지고 나도 떨어지고 우리 모두가 떨어지는 하루에 우산은 필요 없다
우리가 높은 곳에 올랐던 이유는 떨어지기 위해서였으니 우리의 목표는 충당되어 곧 자유로워지지 않겠나 그러나 이 후의 일을 걱정하며 발돋움을 망설이니 사람의 감정이란 이 얼마나 우유부단하고 나약한가, 나는 뇌까리다가 네가 밀친 손에 숨을 들이켜고 아래로, 아래로, 저 밑으로 떨어졌다
내 비명은 네 이름이었으나 너는 제 이름을 모르는 들개였다
타관살이에 새하얗게 질려 내 고향에 돌아왔을 때 나는 염전 밭에 파묻히고 싶었다 땅은 내게 잘 돌아왔다니 살갑게 말해주지 않는다 누군가 사람의 온도로 돌아오라 말하면 나는 그 말 한마디에 귀향하던 마음을 죽이고 다시 마을 길을 벗어난다 그리고 너에게 달려들어 오늘 있었던 일을 고해하고 이 기분이 씻겨가기를 바랐다
그렇게 나의 속죄를 빌던 시간은 하염없는 침묵이었고 어느 방면에서 축제였다 나는 네가 입을 열지 않는 시간을 못 견뎌 하면서도 사랑스러워했다 네가 입을 열지 않는 시간 속 너의 시선은 온전한 나의 것이었고, 내 주절거림은 네 가벼운 무료함이 되었으므로
네가 머무르던 우울함이 가신 자리엔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세상의 산뜻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리고 시렸던 네 봄과 다르게 동해 위로 솟는 해 만큼 따스한 올해의 겨울이란‥ 네게 감사와 투정을 같이 보낸다 이것은 모두 네 부재가 빚어낸 것이므로
어수룩했던 모습을 버리고 이제는 새로이 탈을 쓸 차례이다 일렁이는 사람들 속에 내 모습을 섞어보내고, 모든 일과를 마친 새벽녘에나 비로소 너를 찾았다 우리의 만남에 할애하는 시간이 줄어질수록 내 낮은 너를 그리워하는 시간으로 변모하고 나의 밤은 애타기만 했다 이것이 네가 나에게 저지른 일이다
기다림, 그 부질없는 것
내가 너를 우러러보았던 만큼 너 또한 나의 동경을 안아주어 江上을 지켰다면 쓰라린 청춘의 과정이라며 내게 제대로 답을 내려주었더라면 멀찍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내 과오를 시간을 통해 인정하는 동안 너는 줄곧 휘휘한 눈동자로 나를 관망했다 이것은 무책임에 대한 질타가 아니다 그저 그동안 너를 바라보았던 시간들이 우리의 시간이 아니었기에 이다지도 아픈 것이다 모든 것들은 내 시간이었다 그때의 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 당신의 광휘를 우러러보며 목이 아플 테지만 그래도 그것이 내 선택이었음을 알고 있으므로 지상에 뿌리내린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당신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숙연하게 받아들여야지 당신의 삶 속에 내가 녹을 수는 없으나, 나는 언제나 당신의 외곽을 겉돌며 살 것이다 거기서 나를 발견한다면 부디 손을 흔들어주지 말기를 따스한 말도, 그 품도, 나를 반기는 모든 것들을 거두어주길 바란다 나의 외로움에 못 이겨 당신을 향해 굳어진 발을 내밀 때 나의 줄기는 꺾일 것이므로 당신은 언제나 우상이어야 한다
■ 일과
- 황현진
내 지반이 두 시의 간조였던 만큼
내디디면 짓밟힌 채로 고함치던
하나의 자존심도 시간이 지나면 물에 잠길 것을
초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서광이든 낙조든
그것도 태양의 다른 이름이고
그믐과 보름은
내 위성을 부르는 말이죠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일터에서
나는 또 하루를 數値로 보내고
종후에는 무너져 내리겠지만
이 밤만 안녕히,
나는 다시 살아날 테요
내일 만납시다
■ 나의 방
- 황현진
낙엽도 죽지 않는 밤이다. 해를 더듬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었던 잠자리. 이젠 파편을 딛고 일어나 서리 낀 새벽을 감내해야지
우리가 참고 사는 모든 것들에서 나는 향기는 다시 오지 않을 허비의 냄새. 어제의 미련.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편지는 올 것이고 나는 면회를 기다리지 않아. 휴가를 바라지도 않으니. 찾아줄 이 없고 돌아갈 집 없어도 그늘을 베개 삼아 열을 낮추네. 추레한 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 쌓아놓은 것은 무엇인가. 이기심으로 점철된 몽환과 가난과 표피 혹은 비늘이었지
여기는 숨을 쉬기에 너무 낮은 곳
저기는 움직이기 과히 널따란 방
동화 속엔 있었고 현실에 없는 것은 그녀가 마셨던 물약 하나 그 이상도 아니고 以上도 아니던 理想 작아지는 방법을 몰라 다리를 자르고 손가락을 물어뜯고 지칠 줄 모르는 폭식 언제부터 나는 아귀가 되었을까. 치아의 노래가 끝날 때 즈음 삼켜버린 아내와 아이와 언젠가 내 피부였던 모든 것들이 뒤섞여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건 책망에 가까웠어 무너진 지붕을 타박하는 소리였어
환상 속에서 지냈던 아주 달콤했고 지독했던 시간. 침수되어 손을 내저었지만 구원은 오질 않고 내 마당에 아침 닭은 우는가. 이제 또 무거운 몸을 다독이며 하루만 더. 그 고통스러운 말에 스스로를 던지고 찬 물줄기에 하루를 망각한다.
야멸찼던 내 젊음은 무엇보다 값진 것이었다. 그렇게 죽는 날까지 혼자 살고 싶었다. 내게 타인은 고통이요. 그러자 누군가는 정신과를 찾아보라고 했지만 나는 건네준 손을 삼켜버렸다. 목구멍이 막혀 숨을 쉴 수 없는데 다시 토해내기까지 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나. 다시는 내게 오지 마시오. 나는 상기시켜주었다. 손은 입 밖으로 나와 다섯 里를 걸어가다 나를 돌아보았다. 잘 있게 친구. 당신은 곱게 죽지 못할거야. 모래를 끌어다가 껍질을 덮으며 그 말이 영검하길 바랐다
■ 소나기
- 황현진
한 꺼풀 여름을 죽이고 가을이 가까워져 오나 했더니
속절없이 멎어버린 추위가 어찌나 아쉽던지
갈라진 지상을 잠깐 축일 순 있어도
사계의 끝을 지나오는 봄이 그렇듯
잠깐 오르고 내리는 네가 겨울보다 나쁘다
일주일을 관통하던 기상예보를 꺼버리고
내 하루를 온전히 바깥에 맡기는 이유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나 짧은 재회를 맞이하는
태도에서 자연스러움이 배어 나오길 바랐다
후미진 골목에도 가난한 감정의 잡초에도
얼기설기 얽힌 진부한 생존경쟁에도
아주 잠시 네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가
그래 오늘은 잠들어도 좋다
네 외로움은 내가 보고 있을 테니,
무거운 인사를 건넨 저녁을 우그러트리며
나는 네가 남긴 얕은 웅덩이 속을 유영하고 눈을 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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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당선작 심사평
제10차 <창작콘테스트> 은상은 시(詩)부문 황현진 씨의「저녁식사」외 네 편의 시를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시인 김호철 / 시인 정은정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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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 기억의 편린
- 도브
사랑의 상처는 또 다른 사랑으로 치유된다는 말이 있다. 기억이라는 것도 어쩌면 이와 다르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원할 것만 같던 기억도 어느 순간 누르스름해진 책갈피처럼 그렇게 바래지고 너덜너덜 해지는 것이 또한 기억이라는 것일 테다. 그러한 기억에 스멀스멀 자리를 비집고 들어서는 또 다른 이름의 기억들, 그럼에도 왠지 흐물흐물 해 질 것만 같은 그 기억이라는 것이 화인처럼 새겨져 도무지 다른 이름의 기억들로 채워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 기억은 나로 하여금 그녀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그저 옷깃을 스쳐지나가는 보통의 다른 인연과 다르지 않았을 기억이라는 이름을 또박 또박 새겨 넣었다. 시간이 지날 수 록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또렷해진다.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그녀와 함께 했을까. 그녀는 언제부터 나의 마음 한겻을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의 존재는 언제부터 나의 마음속을 비집고 들어선 것일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녀의 존재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사람에 불과 했을 것이다. 어머니의 어머니, 그녀의 존재는 그저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내 어머니를 세상 밖으로 이끄시고, 어머니란 이름의 타이틀을 거머쥔 그저 그런 존재로만 내게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잃어버린 30년의 세월도 세상 속에 존재하는 그저 그런 사람들의 사연 외에 어떠한 의미를 내게 부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단 한 번 찰나의 순간이 그녀와 나를 매듭으로 엮어내기 전까지는,
그녀가 기억이라는 것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직전까지도 그녀에게 나의 이름 석 자는 주문과 같은 것이었다. 기억의 범위가 줄어들기 전까지도 내 이름 석 자는 그녀의 기억 속에 사라지지 않았다. 내게 그녀의 존재가 희미하듯 그녀에게도 나의 존재는 자신의 딸의 딸, 그저 손녀 정도 외 에는 아무런 의미로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가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기 직전까지도 나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뜻하지 않았던 단 한 번의 그 이유로 말이다.
꽤 오래 전 일이다. 그녀는 뜻하지 않게 뺑소니 차량에 치어 크게 다쳤다. 의사는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라 얘기했다. 엄청난 출혈, 움푹 파인 이마의 함몰, 그런 상흔들이 그녀가 살아있음이 천행임을 얘기해주고 있었다. 운명이란 그런 것일까. 살아있음은 그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 나야 가능한 것이었을까. 살아있음에 감사함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감수해야 했다. 그 이후로 그녀의 기억은 조금씩, 서서히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왜 그날 그 시각에 그 일을 자처했는지를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것이 그녀와 나와의 짧은 운명의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평소 완고하고 고집이 센 노인, 거기다가 사람과의 관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그녀, 측은지심이었을까. 사고로 기억을 잃은 그녀는 종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함몰된 이마, 구부정한 다리는 사람들과 섞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 이었을까 평소 그녀와는 단 한차례의 대화다운 대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이끌림에 그녀와의 조심스러운 접촉을 시도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모험이었을 것이다. 평소 같으면 자처하기는커녕 오히려 모면하려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선뜻 하겠다고 했다.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산발이 된 그녀의 머리를 자르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머리를 깎아 봤던 경험이 있었던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마음 속 자그마한 양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사고 이후 그녀와의 첫 만남을 시도했다. 그녀를 그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아마도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알 수 없는 매캐한 냄새들이 득달같이 내게 달려들었다. 숨쉬기조차 버거움을 느꼈지만, 모든 것을 자처한 이상 더 이상의 후퇴는 있을 수 없었다. ‘어서와, 머리 깎으러 왔어.’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꽤나 차분했다. 그렇다고 그 상황이 마냥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냄새로 인해 매스꺼움을 느꼈고, 가능한 한 그녀와의 마찰을 피하려 애썼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기억은 많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다. 나를 알고 있었고, 내 이름 석 자도 또렷하게 기억했다. 무슨 얘기인가를 꽤나 오랫동안 그녀는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초라하고 남루한 허수아비 같은 영혼 없는 껍데기의 그녀만을 보았을 뿐이다.
그녀는 나에게는 돌부리 같은 존재였으리라. 무심코 걸려 넘어지는 그것의 존재처럼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순간에 파편 조각처럼 내게와 박혔다. 그녀의 삶, 인생, 잃어버린 기억들, 모두가 나의 삶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반 가르마의 곱게 빗어 내린 머리에 은비녀로 쪽 진 그녀의 인상은 단아하고 고왔다. 그러나 그러한 그녀의 모습과 달리 삶은 척박하고 고단함이었다. 그 자그마한 체구에서 열두 명의 자손을 뽑아내었고, 그 중 일부를 가슴에 묻어야 했던 그녀의 인생은 굽이굽이 한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두 번의 교통사고, 고왔던 그녀의 삶은 어쩌면 의도하지 않았던 삶으로 인해 갈기갈기 찢기었다. 누구도 그녀의 삶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고, 섞이지 못했다. 그녀의 삶은 온전히 그녀만의 몫이 되어 겉돌고 있을 뿐이었다.
엉금엉금 기어서 무릎은 헤지고, 흥건히 고인 붉은 혈액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오 분이면 닿을 거리를 삼십분이나 지나서 그렇게 홀로 행군을 하듯 그녀가 내게로 달려왔다. **야 **야, 온 동네가 떠나가듯 그렇게 이름을 불러 되면서 통증도 느끼지 못한 채 헐레벌떡 거친 숨소리를 내며 그렇게 왔다. 그런 그녀를 보자 마음과 달리 화가 났다. ‘여기 뭐 하러 왔어, 아유 피 흐르는 것 좀 봐.’ 천식을 앍고 있던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연신 헉헉거렸다. 잠시 숨을 고르는 듯 하 더니 이내 바지저고리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찾기 시작한다. 그녀가 꺼낸 것은 흰 실타래에 둥둥 매여져 하얀 손수건에 싸매어진 지폐였다. 거기에서 만 원 짜리 지폐 석장을 건네는 것이다.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무슨 까닭으로 그 많은 시간들을 견디어냈을까. 그녀가 늘 즐겨듣던 회심곡, 한 풀이를 한 듯 여기저기 찢어 놓은 휴지 조각들,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 그녀는 와 있었던 것일까. 잃어버린 삼십 년의 기억 속에 그녀는 어느 시점에 살고 있었던 것일까. 대수롭지 않았던 그일, 왠지 모르게 자처하였던 그일, 그것은 그녀로 하여금 나의 존재를 각인시켰고, 그녀는 그 일로 인해 나의 기억 속 어디선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결코 가는 것은 나이순이 아니었다. 훨씬 더 젊은 나의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나서도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다. 무심한 시간 속에 그녀의 기억도 점차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사위 밥은 잘 먹지.’ 세상을 떠난 지도 한 참 되었건만, 그녀의 기억 속에 여전히 당신의 사위는 식성이 까다로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 시점에 머물러 있던 기억은 그나마도 괜찮은 편이었다. 마지막 순간에는 당신의 아들도 기억하지 못했다. ‘엄마 나야 내가 누구야?’ 당신이 그토록 사무치도록 보고파 하던 아들은 멀어져만 가는 기억을 붙잡으려 애를 써보지만, 정작 그녀는 엉뚱한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저씨 누구세요.’ 눈을 감기 전 그녀는 당신의 아들에게 마지막 말로써 이 말을 남겼다. 그녀는 이승에서의 모든 기억들을 잊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행복했던 순간, 자신의 기억이 온전히 살아있었던 그날만을 기억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던 따사로운 사 월, 그렇게 그녀는 세상에 마침표를 찍었다. 모든 기억들을 뒤로 한 채......,.
살아가면서 많은 기억들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새겨 넣는다. 그것들이 마냥 좋은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때때로 잊고 싶어지는 기억들도 있기 마련이다. 나에게 그녀는 때로는 아픔으로 ,때로는 느껴보지 못했던 할머니의 포근함으로 순간순간 돌부리처럼 치인다. 살다 보면 그녀와의 기억들은 어느 순간 점점 멀어져갈 것이다. 그 자리에는 또 다른 기억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잃어버린 삼십 년의 기억과 삶은 그저 그런 그 누군가의 삶이 아니라 나의 삶 속으로 들어와 있다.
새 하얀 눈으로 온통 세상이 뒤집혔다. 절기는 입춘을 지냈건만, 쉬이 봄은 오지 않고 있다. 이제 곧 작년과 다르지 않을 봄이 또 찾아들 것이다. 따스한 햇살에 몸을 내 맡기듯 포근했던 그녀의 품을 기억할 것이다.
나는 살다가 가끔 돌부리에 치이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마다 그녀는 내가 혼자가 아니었음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 그대의 길
- 도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것은 의도하지도, 억지로 하려고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라 짐작만 할뿐이다. 그러나 때로는 왜 그래야만 했는지 묻고 싶을 때가 있다. 삶이라는 것이 주사위를 던져 나올 수 있는 확률적인 게임이 아니듯 그저 살아있으므로 살아야 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음악을 세계의 공통된 언어라고들 한다. 강렬한 사운드의 메탈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도통 알아들을 수 없을뿐더러 난해하기도 하다. 물론 가사를 미리 알고 들으면 그 음악의 깊이를 이해하는 수고로움을 덜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음악을 언어라 표현하는 것에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언어 그 이상의 표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와 음악을 다르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나만의 성급한 오류일지도 모르겠다. 음악이 언어 이상의 그 무엇을 표현해 주듯 아버지가 주는 느낌 또한 일일이 어떠한 단서를 붙이지 않아도 음악의 언어처럼 느껴진다.
클래식을 연주하는 연주자를 보고 있노라면, 마치 상상의 세계를 살고 있는 것 같다. 곡조가 어지럽고 난해할지라도 연주자의 얼굴은 언어 이상의 표현을 가지고 있다. 변주를 심하게 반복하더라도 연주자를 통해 지금의 상태를 읽어 낼 수 있게 된다. 쉼 없이 나아가는 당신의 삶에서 연주자의 마음을 읽듯 당신의 뜻을 이해하고 읽어내려 했지만, 쉬이 읽히지 않았다. 나는 아마도 연주자의 얼굴이 아닌 가사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도통 자신의 지난날을 얘기하는 법이 없었다. 지나간 당신의 삶의 십분의 일이나 알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할아버지를 닮아 잔재주가 많았고, 한때 총명하여 동네 어른들의 유망주로 떠올랐다는 정도일 뿐이다. 간혹 담배를 싸고 있는 은박지로 나팔, 장미 꽃 등을 순식간에 접어내거나, 짚을 엮어 바구니 정도를 만들어 내는 것을 간간히 목격한 적이 있었다.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는지 하얀 도화지에 수양 버드나무를 그려 넣고, 그 위에 새 한 마리를 그려 넣은 것을 본적이 있었다. 그 많은 나무 중 왜 하필 수양 버드나무 일까 궁금하여 물어본 적이 있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위를 향하는데 버드나무는 잎이 아래로 늘어뜨린다. 그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왠지 다른 삶을 사는 당신의 모습처럼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유년시절에는 유쾌하고, 장난기 가득한 아이였다고 했다. 동네에서 담 넘기를 좋아하고, 짓궂을 정도로 개구쟁이였던 아버지가 성장하여 청년에 이르렀을 때 뜻하지 않은 일을 당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야 너 걷는 게 조금 이상하다. 병원에 가봐.’ 친구들의 걱정스러운 근심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고 했다.
눈을 뜨고, 감을 때 까지 집안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그들이 뿜어내는 담배연기, 여기저기 뒹구는 술병들, 오고가는 거친 음성, 시작과 끝은 늘 그것과 함께였다. 패를 돌리는 그들의 빠른 손놀림과 끝없이 이어지는 판은 시간이란 개념을 잊은 듯했다. 그들의 한숨과 환호가 뒤섞여 들숨과 날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그들만의 리그는 그렇게 밤, 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되었다. 글을 읽는 이들이라면 대충 짐작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 그는 노름꾼이었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타짜다. 그것에 입문한 과정이 꽤나 드라마틱하다. 아버지가 장애로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어는 사내가 와서 아버지를 데려간 곳이 지금으로 치면 하우스다. 그곳에서 그나마 간신히 생계를 이어가던 가계를 탕진시킨 이가 바로 그 사내였다. 전 재산과 다름없는 돈을 탕진하자 당신은 할아버지를 뵐 면목이 없었을 것이다. 인명은 제천이라 했던 가. 당신은 살아날 운명이었고, 아직은 세상 속에 섞여 있어야할 사람이었던 것이다. 때마침 우연히 찾아간 곳이 타짜가 있는 곳이었다. 그 사람을 만나고, 복수를 다짐하듯 그렇게 화투에 입문하게 되었다고 했다. 몇 해 전 영화로도 개봉되었지만, 타짜는 절대로 돈을 잃지 않는다. 전 재산을 탕진하고 죽으려 했던 당신은 또 그렇게 그것으로 다시 가계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잃은 돈 되찾기 위해 시작한 그 일이 꽤 오랫동안 당신의 직업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신이 의도한 삶이 든 아니 든 간에,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전혀 의도치 않았던 상황으로 인해 더 이상 그것은 직업이 될 수 없었다. 아이를 들쳐 업은 한 아주머니의 등장은 다른 삶을 살도록 재촉하는 촉발제가 되었다. 그 여인의 대성통곡은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계속되었고, 더 이상은 지속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노름을 끊었고, 의도하지 않은 다른 삶을 살게 되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곤 노름뿐이었고, 그것으로 인해 생계를 꾸려가던 아버지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새로운 결심을 했다. 그것은 아무도 살지 않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그곳에 터전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자그마한 동네가 만들어졌고, 그곳에서 온갖 궂은 동네일을 돌보는 이장이 되었다. 그러던 중 알게 된 사람으로부터 가축을 소개하고 수수료를 받는 중개업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인생 제 2막장의 이륙인 동시에 착륙이었다.
음악 경연 프로그램이 언제부터인가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다. 이것을 굳이 독버섯이라 표현하는 이유는 그것을 설명하고, 해석하고, 감성을 강요당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처절한 경쟁사회는 불필요한 다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굳이 소를 흥분시켜 투우사를 희생시키는 우를 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저 듣고, 느끼고, 원하면 그 뿐인 것이다. 아버지의 삶에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는 전적으로 당신의 몫이다. 원하지 않은 방향으로 살았다 하여 그것을 평가하고, 가치를 훼손 한들 그의 삶이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난해한 헤비메탈이나 록처럼 도무지 이해하려해도 기피하게 되는 존재, 정상에서 내려올 때의 가벼움보다는 오를 때의 고뇌와 수고로움을 더 많이 느끼게 되는 존재, 그것이 아버지라는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신의 생은 남아있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목 중앙을 뚫어 호흡기에 의존해 삶을 연장해야 한다고 의사는 말했다. 지금이라도 호흡기를 떼면 당신은 살 수 없다는 말이었다. 이미 당신의 오른쪽 폐는 폐로써의 기능을 다하고 남아 있는 한쪽 폐는 기존 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했으므로 당신의 호흡은 가빴다. 숨을 턱턱 들이쉬고 내쉬는 것조차 매우 힘들어 보였다. 그렇게 남아 있는 사람들은 당신이라면 원하지 않을 삶이었을 것이라 스스로를 위로하며 당신을 고이 보내드리기로 했다.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 같은 눈물샘의 자극이 많았던 사춘기 시절에는 암초를 만난 조각배처럼 위태로운 것 들이었다. 신념이 아닌 대중성을 쫓는 작가처럼,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살얼음판을 내 딛는 발걸음처럼 아슬아슬한 것들이었다. 현실과 이상, 명분과 실리, 이성과 양심사이에서 기울기가 달랐다. 세월이 흐른다는 것은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이고,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세상 이치에 눈을 뜨게 된다는 것일 것이다. 외다리를 건너듯 아슬아슬함은 잘 다듬어진 교각 위를 건너는 안정감을 세월이 주는 교훈일 것이다. 나이를 먹는 다는 것은 단지 숫자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철학이나 가치 또한 넓어지고 깊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낳았을 쯤의 나이가 나도 되었다. 이제야 나는 정해진 길로만 나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 계절이 뚜렷했던 것이 이제는 점차 계절의 분별이 불분명하게 변해간다. 여름과 겨울만이 뇌리에 박혀 봄과 가을이 언제 지나가는지 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봄과 가을의 향수는 오히려 더 짙어 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당신과의 시간은 봄처럼 가을처럼 짧았다. 어쩌면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지나가게 되는 그 계절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끔 때때로 당신의 삶의 흔적들을 메 만져 본다. 그 흔적들을 쫓아가다 보면 늘 후회와 원망이 새순처럼 돋아나 있다. 가리어진 커튼처럼 눈을 가렸고, 말문이 막힌 것처럼 굳게 입을 닫아 버렸다. 안타까움, 아쉬움 아버지는 내게 있어서 그러한 존재이다. 당신이 떠나간 빈자리, 아버지란 그 자리는 아무런 대가 없이 얻어지는 자리가 아니었음을 새록새록 느낀다.
딸이 어느 덧 장성하여 시집을 가고, 새로운 가족의 일원으로 아무 탈 없이 그저 잘 살기만을 바라는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을 표현한 애비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를 아버지 입장이 아닌 딸의 입장에서 어느 여 가수가 슬픔을 머금고 한 설린 창법으로 구슬프게 불러 댄다. 나의 아버지도 그러 했을 것이고,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그러 했을 것이다. 음악의 언어처럼.....,.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천국에 다다르는 길은 예수라는 터널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나아가는 길, 혹은 가고자 하는 그 길 또한 그대의 길을 지나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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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당선작 심사평
제10차 <창작콘테스트> 수필부문에서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작품은
도브 씨의「기억의 편린」과 「그대의 길」 두 편의 작품이다.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수필가 유미숙 / 수필가 정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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