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콘테스트> 제18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월간문학 한국인]이 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고자 분발하는 젊은 영혼들의 순수 문학 창작의욕을 북돋기 위해 기획한 <창작콘테스트>가 제18차 당선자를 맞았다. 이번 제18차 공모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매우 미흡했지만 금상, 은상, 동상을 모두 뽑았다.
[월간문학 한국인]<창작콘테스트>는 작가로서의 무궁한 필력이나 완벽한 전문성을 하나하나 따져 시상하는 그런 대단한 문학상이 아니다. 오로지 전문작가가 되기만을 꿈꾸어온 예비작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다소 흠결이 있더라도 치열한 작가정신과 독특하고도 개성있는 표현,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따져 우열을 가릴 뿐이다. 따라서 설혹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 가능성을 보아 당선작을 뽑을 뿐임으로 문학상으로서의 권위를 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할 것이다.
이번 응모자 또한 모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을 터이고 나름의 재능을 발휘하였다고 보여지지만, 상당수의 작품들은 여전히 진부한 낱말들의 사용과 구태의연한 표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점이 아쉽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그간 겪어온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에 의해 산고를 겪듯, 그 누구도 쓰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문체와 어법, 시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이번 <창작콘테스트> 제18차 공모에 참여해주신 작가 여러분들, 그리고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 창작을 자신의 운명으로 택하려하는 모든 분들께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기원하며 각별한 감사와 격려의 뜻을 전한다.
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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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 가면
- 도브
공허한 메아리다. 뱉어내는 말들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다. 미워할 수도 원망 할 수도 그렇다고 머릿속을 헤집어 끌어내 없앨 수도 없는 것들이다. 후회와 원망이 어느 순간 머릿속을 하얗게 채웠다. 갈수록 그것들은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위태로운 것들이다. 단물 빠진 껌처럼 내뱉어낼 수도 기억이란 매체를 이용해 꽉꽉 눌러 머릿속에 넣을 수도 없는 것들이다. 마주한 시간보다 등을 보인 시간들이 세월의 대다수다. 그는 나와는 다른 세계의 또 다른 사람이다. 시, 공간을 초월해 그 순간은 이미 한 공간을 초월해 다른 세계에 속한 것 들이다. 서로가 내 뱉는 말들은 그렇게 비수가 되어 꽂혔다.
그는 늘 일방적이었고,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군림하고 누르기 위한 존재, 그는 아마도 그런 존재일 것이다. 이미 거스를 수 없는 그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역류하듯 반기를 들었다. 도저히 이겨낼수 없는 버거운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백기를 들기는커녕 오히려 승천하듯 기세를 꺽지 않았다. 결국 닮지 않으리라 했던 고집스러움은 그대로 담습하고 있었다.
그에게 소통과 설득은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굽혀가려는 노력조차 힘에 부치는 것들이다. 그는 그의 세계에 군림하려 했고, 어느 누구도 그의 통치에 반기를 들수는 없는 것들이었다. 그것이 옳고 옳지 않음의 문제가 아니라 그는 그런 세계에 물들었다. 뭔가에 뒤틀리면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것은 이성적이며 합리적인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그것이 곧 법이며 통치이며 합치인 것이다. 독선적이며 직선적인 그의 성정은 곧 불이다. 불같은 성정은 절뚝거리는 그의 다리처럼 균형적이지 않았다. 그는 저돌적이다.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그의 모습은 분명 그랬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은 공간에서 숨쉬고 있지만, 그 공기는 같지 않았다. 서로 다른 공기를 마시고,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세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세계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름의 신념과 나의 고집스러움이 팽팽히 맞섰다. 그는 자신의 일에 거침이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외에는 어디에도 관심이 없었다. 뒤돌아 볼 여유도 그렇다고 주저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그런 그와는 달리 나는 지나치게 소심했다. 다른이의 눈치를 늘 살폈고, 무슨 일이든 자신감이 결여 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세상 혼자사는 당당함이 있었던 반면 나는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그의 고집스러움은 그대로 내게 내리 꽂혔지만, 그외 다른 것들은 거짓말처럼 비켜갔다.
그의 고통과 외로움을 끌어 안기에 나는 그릇이 너무나 작았다. 가시 돋힌 말들은 늘 비수처럼 가슴에 꽂혔다. 그것이 무뎌버린 칼날이라도 칼임에도 불구하고 마구 쏟아내었다. 나는 소통과 대화를 하기 보다는 그를 비난했다. 소통과 대화는 사치스러운 언어일 뿐이었다. 날아드는 화살에 비난의 언어를 방패삼았다. 적어도 그것이 나름의 최선이라 믿었을 것이다.
거침없이 당당히 맞서던 그에게도 시련은 비켜가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만 있으면 세상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런 그도 운명의 덫을 피해가지 못했다. 입원해서 며칠 만에 퇴원 하던 날 뜻하지 않았던 나의 말에 설움에 복받쳐 한없이 울던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누가 질병 앞에 당당하고, 누군들 죽음 앞에 호기를 부릴 수 있겠는가. 그는 이미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그것이 아니었다. 앙상한 뼈마디를 간신히 두루고 있는 가죽들, 다시는 하늘을 머리에 이고 설 수 없는 무용지물의 다리, 거스를 수 없는 얄궂은 운명 앞에 누군들 호사를 부릴 수 있겠는가.
기나긴 항해다. 서로가 지쳐가고, 서로에 대해 무덤덤해져 가는 뜻하지 않은 삶들이 지속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노쇠해져가는 육신과는 달리 그는 시간의 퇴행을 걷는 듯 했다. 어린아이처럼 보채고, 자잘한 일에도 곧잘 화를 내곤 했다. 자그마한 일에도 참지를 못했고, 시간이 거듭될수록 그 횟수가 빈번해졌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군림하고, 호령하던 그는 마치 다른 세상,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갈치처럼 납작해진 맨 다리가 하얀 시트 위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생명에 대한 경외감은 문들어졌다. 거친 물살을 거침없이 치고 올라간 그 끝은 겨우 한 줌의 재였다. 그의 칠십 년 인생이 고스란히 자그마한 항아리에 담겼다. 영원할 것처럼 나날이 계속되었던 삶도 종단에는 모두 끝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만이 고스란히 투영될 뿐이다. ‘그래, 삶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비극적인 것이지도 몰라’ 그런 비극적인 삶을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이어가게 될 것이다.
등을 맞대고 있었던 시간들이 많았다. 귀 기울이기 보다는 두 귀를 막고 살았고, 그의 삶을 들여다 보기보다는 애써 외면한 시간들이었다. 가면을 쓰고 노래를 하는 프로가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닌 오직 목소리로만 누군인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는지 알아맞추는 것이다. 어떤이는 가면을 쓰니 자신의 생각을 좀더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세상 일이 어느것 하나 후회스럽지 않은 일이 없겠지만, 그에게는 가면을 썼었어야 했다. 비록 그것이 나 자신을 속이는 일이지라도 결국은 내 안에 그를 받아들임으로 내 자신이 좀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가면을 쓰는 것은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그것은 나아가 그를 기만하는 행위라 믿었다. 그들이 가면을 썼을 때 자유로움을 느꼈듯이 나 또한 그랬어야 더 자유로울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이라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 그 시간으로 되돌린다고 해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힘겹게 한다. 가슴 한 켠에 자리 잡았고, 늘 등을 맞대던 그 등을 자꾸만 돌아보게 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때는 어렸고, 지금은 나이가 먹었다는 사실뿐이다. 녹록치 않은 세상의 때가 나에게도 켜켜이 쌓였고, 그를 바라보는 시선이 굴절되어 있음을 알게 된 만큼 가까워 지려 했던 그와 더욱 멀어지려 했던 나의 과거가 그렇게 짐이 되어 짓누른다. 그는 일평생 밥벌이에 매달렸고, 한 평생 자식을 위해 부서져라 일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지 않았고,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았다. 그저 숙명처럼받아들였고, 운명이라 여겼다. 손가락 하나 까지도 닮고 싶지 않았던 그의 모습, 온전히 그대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 가고 있는 나를 보는 모습은 아이러니하다. 절대로 닮지 않으려 부인하던 그대의 모습, 그런 그대의 모습이 지금내게 고스란히 이슬처럼 내려 않았다. 어느새 나는 그가 되어 있었고, 겉모습 뿐만아니라 이기적인 성향 그대로를 담습하고 있다.
그는 내 아버지다. 부인해도 절대 변할 수 없는 만고 불변의 진리, 그가 바로 내 아버지다. 내가 그를 선택할 수 없었듯이 그 또한 나를 선택하지 않을 권리가 없었을 것이다. 나의 삶을 온전히 여과시킨다해도 그의 그늘에서 쉬이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삶이 그림자처럼 드리우고, 벗어나려 할수록 그가 다른 사람은 될 수 없는 것이다.
바싹 말라 쩌억 갈라진 메마른 대지에 촉촉이 단비가 내린다. 그 틈 사이로 빗물이 배어 들어가더니 이내 대지는 긴장을 풀어내 듯 스르르 녹아내린다. 그와 나 사이에 벌어진 틈은 끝내 메우지 못했다. 그의 메마른 대지에 단비가 되어 주지 못했고, 더 이상의 균열을 막을 가면을 기어이 쓰지 못했다. 때로는 나 아닌 또 다른 내가 필요하다. 그것이 비록 거추장스럽고,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 될지라도 그를 이해할 수 있다면 내가 아닌 내가 되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성공을 하기 위한 조건으로 사람사이의 관계가 좋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이 말은 여러개의 가면이 필요하다는 말은 아닐까.
고집스럽고 융통성없는 고지식함은 더 큰 균열을 만들어 내었다. 신념 인 양 스스로 내 세운 것들은 결국은 조율되지 못한 쓰잘데기없는 것들의 이상 일뿐이다. 이제 더 이상 가면을 써야할 그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마지막까지도 그대의 눈에 나는 고집스럽고 버거운 존재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나아닌 나로 살아간다는 것에 자신이 없다. 결국 그대가 떠난뒤 뒤 늦은 후회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이미 너무나 늦어버린 공허한 메아리다.
■ 어미라는 이름의 굴레
- 도브
청천벽력이었다.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란 아마도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풍요롭진 않았지만 나름 소박한 삶을 영위해왔다. 등 따시고 배부른 삶은 아니었지만, 소탈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해왔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결코 순탄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학력고사를 며칠 앞둔 동생과 이제 막 스무 살을 갓 넘긴 내게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었다. 간간히 비친 출혈은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겼다. 이따금씩 보인 피의 흔적은 월경 불순이거나 조기 폐경의 징후로만 여긴 듯하다. 멈추지 않은 출혈로 인해 급히 찾은 병원에서 자궁암 3기, 조금만 늦었어도 생명의 큰 위험이 있었을 것이라며 의사는 가뜩이나 놀란 아버지를 크게 꾸짖었다.
지금은 네 명중 한 명이 암으로 치료를 받는 상황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암은 그리 흔한 질환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암에 관한 지식 또한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 모두가 어리둥절 했다. 엄마는 그날로 입원했고, 이런 저런 검사로 몸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여유로운 삶이 아니었으므로, 병원비를 비롯하여 모든 것이 암담하기만 했다. 온갖 검사로 지쳐 갈 쯤 조직 검사 결과가 나왔다. 의사는 생각보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했다. 암 덩어리를 떼어내는 것으로 부족하고, 자궁을 모두 드러내야 한다고 했다. 암세포는 이미 자궁 모두를 덮었고, 더 이상 지체하면 다른 장기로 옮겨갈 가능성이 크다며 병의 심각성에 대해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용어를 써가며 설명했다. 더 이상은 아이를 가질 수도, 여성으로서의 삶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 했다. 하루라도 지체 할 수 없다며 수술을 종용했다. 엄마 나이 이제 막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엄마는 학력고사를 며칠 앞둔 아들 걱정으로 수술을 미루겠다는 통에 곤욕을 치러야만 했다. 가족들의 온갖 설득으로 간신히 수술대 위에 오를 수 있었다. 수술실로 들어서는 엄마의 표정은 자신보다도 아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힘든 내색도 보일 수 없었다. 아무 걱정 말라며 애써 남은 가족을 위로했다. 한 번 닫혀버린 수술실 문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전광판 시간이 열 시간이 넘어 서는데도 불구하고 수술실 문은 좀처럼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신은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신을 알지 못한다. 그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전능한지 전능하지 않은지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다. 예수 재림을 외치며 울부짖던 그들의 모습이 섬뜩한 낯선 풍경이었을 그때, 단단한 바위에 글자를 새겨 넣음으로 불안정한 자아와 불확실한 믿음을 확신해 나가듯이 그 순간 만큼은 전능하다는 신의 존재를 단단한 바위에 새겨 넣듯 가슴 속에 새겨 넣었다. 피가 마르는 고통이란 이런 것일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아무런 도움도, 어떠한 행동도 할 수 없는 온전한 기다림이란…….
생명의 끈을 놓지 말라며 붙여진 이름 붙들 이, 외할머니는 자식이 자꾸만 죽어나가자 엄마에게 동아줄처럼 목숨 줄을 꽉 잡으라는 뜻으로 그런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그럴 것이다. 엄마는 시험을 며칠 앞둔 아들 걱정 때문에 수술도 포기하려 했던 사람이다.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자신으로 인해 힘든 시간을 보낸 것이 안타깝고, 견뎌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미안함은 살아야 한다는 실낱같은 희망, 일어나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일으켜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자궁을 다 드러내고, 여성성을 잃었다는 상황에서도 엄마는 자신보다는 자식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지식하고 완고한 외할아버지는 지나친 유교적인 이념으로 엄마를 억압하였다. 여성의 대해 매우 편향적이었던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교육을 허락하지 않았다. 엄마는 그러한 할아버지 때문에 교육의 문턱도 넘지 못했다. 엄마는 동생을 돌보며, 밭일을 하고, 집안일을 강요당했다. 보자기에 책을 둘둘 말아 허리춤에 끼고는 동네 어귀 글방에 드나드는 또래의 아이들은 엄마에게 선망의 대상 일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생을 들쳐 업고, 문틈으로 들리는 글 읽는 소리에 넋이 나가 한 동안 몸을 웅크린 채 반나절을 글방 어귀에서 서성 거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교육의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엄마의 유년 시절은 동생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더 이상의 어떠한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엄마는 가끔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가슴에 품은 한을 풀어놓기도 했다. 그런 엄마에게 나는 살가운 딸이 되어 드리지 못했다. 여태 글도 모르냐며 핀잔을 주고, 남 앞에 서기 부끄러운 존재로 여겼다. 엄마의 유년시절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할 수 만 있다면 기억 속 에서 영원히 지워버리고 싶은 아픔으로 기억되곤 했다.
꽃다운 나이 열여덟에 중매쟁이 소개로 아버지를 만나 결혼식도 없이 살림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시절 어머니 세대들이 대부분 그렇듯 변변한 결혼식도 없이 세간 살이를 시작했다고 했다. 대다수의 아버지들이 그렇듯 나의 아버지 또한 무심하고, 가부장적인 사람으로 남편으로서 무정하고, 자상함이란 눈 씻고도 찾아보기 힘든 사람이었다. 성정이 불같고, 일방적이며, 타협이란 없는 분이었다. 아버지와 달리 엄마는 온순하기가 양 같았다. 엄마의 목소리가 담 밖을 넘어서는 법이 없었고, 늘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려 애쓰셨다. 친할아버지는 일찍 할머니와 사별했다. 엄마를 대하는 것과는 달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는 둘 도 없는 효자였다고 한다. 아침, 저녁으로 문안을 여쭙고, 홀로 계신 할아버지의 적적함을 위로 하고자 새 어머니를 맞이하기로 했다고 했다. 그렇게 엄마는 서모를 맞이하게 되었고, 생각지도 못한 시어머니를 맞이하게 된다. 서모는 생각보다는 샘이 많고, 변덕스러움이 지나쳤다고 한다. 서모는 애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다. 그래서 일까. 엄마가 나를 낳고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자 그렇게 어머니를 괴롭히고, 돌도 지나지 않은 나를 가끔 화풀이로 툭툭 때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의도하지 않은 시집살이로 엄마는 서모에게 당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저고리의 동정을 달아놓으라 해놓고는 막상 내놓으면 이런 저런 이유로 타박 하기 일쑤고, 아버지가 있을 때는 엄마에게 한 없이 친절하다가도 아버지가 없을 때는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돌변하기도 했다고 한다. 엄마는 성정이 온순한 사람으로 최대한 서모에게 최선을 다하고자 애썼을 것이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나긴 시집살이도 끝이 보이지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서모는 어느 날 갑자기 돌연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고, 몇 년 전 홀로 고독 사 했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는 못내 아쉬워했다. 비록 자신에게 상처와 고통만 안겨준 사람이지만, 그래도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했음을 가슴아파했다.
비가 온 뒤 땅은 더 굳는다고 했던가. 그러나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순조로울 것 같았던 생활이 뜻하지 않은 곳에서 불행의 싹을 틔우고 있었다. 가벼운 접촉사고 임에도 불구하고, 조수석 아버지는 꽤나 큰 충격을 입었다.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과 함께 뼈 중앙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해야만 했다. 수술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고, 빨리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의사는 당분간은 걷지 말고 조심해야 한다고 신신 당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좀처럼 의사 말을 듣지 않았다. 빨리 걷고 싶은 마음에 운동을 하다가 넘어져 그나마 붙어있던 뼈들이 으스러졌고, 더 이상은 걷지 못하게 되었다.
침대는 아버지가 접할 수 있는 세계의 전부였다. 티브이는 그런 아버지의 유일무이한 친구였고, 한 평 남직한 방에서 조차 아버지의 공간은 침대가 유일했다. 설상가상으로 외할머니마저 치매로 앞, 뒤 분간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고, 그 뒤 수습은 온전히 엄마의 몫이었다. 씻는 일 부터, 먹는 것, 입는 것, 대, 소변을 보는 것, 모든 것들이 그녀의 몫이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년이 넘어서 근 십년의 세월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긴병에 효자 없다고들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누구나 그렇듯 한결 같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늘 한결같았다. 불평하거나 불만을 토로한 적 없었다. 까다로운 아버지의 성격 때문에 힘들 법도 한데 그래도 엄마는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척척 해내고 있었다. 아버지는 엄마가 아닌 누구의 간병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엄마의 손길에서만 만족해했고, 흡족해 하셨다. 온전히 얽매인 24시간 모두 아버지와 함께였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제례를 지내고 돌아오던 날, 엄마의 흐느낌은 한 동안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그간 한 번도 보지 못한 엄마의 눈물, 여자이기에 앞서 어머니, 아내로 살아온 삶, 그 기나긴 여정의 길, 회한의 눈물이리라.
엄마, 그녀는 엄마이기 전에 여자이고, 여자 이기 전에 인간이다. 인간은 주체적인 동물이며 무엇보다도 이기적인 사회적 동물이다. 자신은 사회적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욕망을 지닌 주체적인 존재다. 여자라는 이름하에 족쇄를 채우고, 어머니라는 이름의 굴레를 씌워 틀속에 가둬 두려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때때로 자주 그녀를 틀 속에 가둔다. 어미란 이름으로 형틀을 만들고, 희생이란 이름으로 채워 넣으려 한다. 누구나 욕망의 주체가 될 수 있고, 그것이 여자라는 이유로, 어미라는이름으로 가둬 두려 했던 것은 아닐까. 어느덧 황혼기에 이른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 이상 억압적이지 않아야 함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그녀를 어머니란이름으로 희생이란 이름으로 갓근을 매듯 동여 매고 있다.
해질녘 붉은 노을이 처마 밑을 엷게 물들인다. 모성이란 굴레에 갖힌 어미란 이름의 그 빛은 어느 덧 산 중턱을 넘어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 이제 어미란 이름의 굴레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인간으로서 욕망을 가져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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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당선작 심사평
제18차 <창작콘테스트> 금상은 수필부문 도브 씨의「가면」외 한 편의 수필을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수필가 유미숙 / 수필가 정금희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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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부문
■ 해구 밑
- 이소현
해구 밑으로는 오래된 노을이
촘촘하게 가라앉고는 했다
둥근 잎사귀의 그물맥처럼
조각난 시간들은 물고기들처럼 부유한다고 했다
어느 순간 난파된 삶에 대해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했고 남아있던
이백만 원짜리 샤넬 백과 함께 떠났다
배를 타고 일주일을 버티던 아빠는
돌아올 때마다 오징어 두 마리를 매어왔다
비린내가 깊어지던 만큼
질척질척하게 새어나오던 가난은
발밑으로 쌓였다
노을을 가둔 해구 밑은 아빠가
빚어낸 척추만큼 깊게 휘었다
일곱 살 생일선물로 받은 시집은 사치였고
혼자 남은 동생을 위해 대학
합격통지서를 찢어버린 나는
치약 뚜껑의 숫자를 세는 일을 했다
먼지처럼 흩어지던 하늘을 보며
눈으로 가난을 흘리던 동생에게
마지막 웃음을 선물하고 싶은 이유였다
어렸을 때 보던
오래된 노을은 이제 내 허리를 짓눌렀고
나는 해구의 바닥처럼 휘어갔다
오래된 노을이 저무는 날
■ 슬픔의 정의
- 이소현
할머니의 뒷모습에 대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은 하얀 가루로 남았고
하얀 방으로 추억이 갇혔다
마지막으로 남긴 손수건을 나는
가루세제로 빨았다 할머니 향이 나는
슬픔이란 한없이 부드러운 거라서
나는 단단한 추억을 거품으로 터뜨렸다
비눗물은 빠지지 않았고 기억처럼
어색한 웃음으로 웃는 사진을 위해
굳어지는 촛불을 준비했다
진달래꽃을 피우고 싶다는 할머니는
분홍색 가디건과
꽃무늬 한복을 입고 길을 걸었다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는 듯
울던 마지막 순간을 빨지 못한 나는
새하얗지는 못한 손수건을 태웠다
평생의 고단함은 한 줌
빻은 재로 남았고
아직 유무를 알 수 없는 할머니를 위해
나는 자장가를 불렀다
내일은 함께 뒷동산 진달래 축제라도
가시자고 중얼거렸다
내일의 날씨는 맑음이니
■ 추억
- 이소현
읍내에 갈 때마다 엄마는
오래된 구멍가게에 들르곤 했어요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산적을 닮았던
아저씨는 바보 형이 하던 가게를
물려받았다고 했어요
읍내 입수를 지키는 가게는
새로 들어오는 바람을 가장 먼저 맞았고
햇볕을 늦게까지 물고 있어서
사람들은 오래된 구멍가게를 좋아했어요
오백 원 콩나물을 삼백 원에 파는
구멍가게는 이익대신 신뢰를 판다는
어려운 말을 했고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쥐어준 까끌까끌한 눈깔사탕의 수만큼
아저씨가 좋아지고는 했어요
삼십 분을 걸어 간 읍내에서
하루를 책임지는 동안
구멍가게 구석에선 엄마의 손을 놓은
아이들이 오 원짜리 딸기 맛 사탕을 빨았고
백 원 두부 한 모와 오후의 손길을 바꾸던
엄마들은 반찬거리를 해결했다고 말했어요
더 이상 볼 수 없는
오래된 구멍가게는 대형마트의
입간판이 세워질 자리이고
어린 날에 추억에 대해
터로만 남아있는 동안 나는 오래된
눈깔사탕을 천천히 삼켜요
지난날까지도
■ 신화
- 이소현
-에로스를 위하여
늦게야 나는 그대의 자아를 인식하고
타인으로 갈라진 시선에 대해
편지를 써요 황금 양털로 된
양피지 위로
달궈진 촛농은 그림자에 녹아드는 시간을 방해하고
마주친 눈에 대한 배신감으로
떠나간 날개는
남아있지 않아요
지상을 옅은 촛불과 함께 남겨둔
것에 대한 대가로 익지 않은 음식을 먹으며
나는 당신을 기다리고
매일 밤 조금 얼룩진 속옷을 빨아요
잿빛 수면복은 깨끗해질 기미는 보이지 않고
눈물은 태양이 하혈한
자국처럼 번지고 있네요
헤어짐은 어쩌면
나비의 날개를 가지기 위한 관문
지워지지 않는 흔적에 대해 보랏빛 날개를 다는 것은
그대의 미소를 그리워하는 소녀가
드린 기도라는 것을 아나요
세 달 저승으로 가는 심부름과 함께
하얀 날개를 가진 그대는
오래전에 떠나 버렸는데 오롯이
깨끗할 수 없는 나는
거울에 비친 나의 자아를 깨뜨려요
■ 쥐의 거리
- 이소현
낮은 곳을 걷는 걸음은 작고
짧은 보폭을 위한
대답은 소리 없는 아우성
세월을 거부하듯 홀로 뛰쳐나온
뾰족한 앞니는 지나온 길의 흔적을 지워요
나의 긴 꼬리는
지난 시간이 봉분처럼 쌓이는 걸
막기 위해서예요
나를 닮은 인형은 언제나 검정이고
그림자에 숨던 나는
거리를 방황하는 내가 아닌 것들에게
들킬지 몰라 쓰레기통을 뒤지는 날이면
나는 다리 사이를 뛰어다녀요
주어진 자리는 버려진 박스에 뚫린 구멍
또는 버려진 낡은 작업화 한 짝이고
날카롭게 주름진 수염은
내일의 걱정으로 떨리고 있어요
어둠 속에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믿나요
사실 나의 적들은 어둠을
더 잘 바라보고 온전히 쉬지 못하는 나는
주린 배의 여린 털들을 골라내요
아직도 도시의 소음에 익숙해지지 못해서
썩어버린 소음을 듣는 동안
소화될 수 없는 기삿거리를 삼키고
떨어지는 과자 부스러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욕심은 내지 않을 거에요
나는 매일 어둠으로 나를 지우고
나에게 주어진 자리를 아직도 찾을 수 없네요
지친 도시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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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당선작 심사평
제18차 <창작콘테스트> 은상은 시(詩)부문 이소현 씨의「해구 밑」외 네 편의 시를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시인 김호철 / 시인 정은정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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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부문
당신의 계절
- 김구주
춘앵 씨는 가림 막을 친 병상에 앉아 분장을 하고 있었다. 주사관이 박힌 손을 달달 떨며 그녀는 하얗게 분칠을 하고, 콧날에 짙은 음영을 그려 넣었다. 합병증으로 온 수전증이 아니었다면 더 완벽한 분장이 가능했을 거라 생각될 정도로 춘앵 씨의 손놀림은 능숙했다.
이제 나가봐도 좋아요.
분첩으로 콧등을 두들기며 춘앵 씨는 내게 말했다. 공들여 남장을 하는 춘앵 씨, 그러니까 나와 같은 암 병동에서 지내는 할머니를 멀거니 바라보다 나는 가림 막을 열고 병상 밖으로 나갔다. 세 명의 노파들은 병실에 조르르 모여 앉아 춘앵 씨의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춘앵 씨를 ‘장군님’이라고 부르는 그들 옆에 나는 어정쩡하게 앉았다. 비좁은 6인실 병동에서 춘앵 씨는 이젠 다 늙어버린 그들을 앞에 두고 마지막 공연을 준비 중이었다.
춘앵 씨와 나는 지난 봄 이 병실에서 처음 만났다. 그 해 4월은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비참한 달이었다. 번번이 거부당하던 영화의 크랭크업이 또 한 번 수포로 돌아가고, 장편 하나 제작하지 못한 채 스물아홉에 덜컥 암 진단을 받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나마 초기에 발견되었으니 위안을 가지라고 담당의는 말하곤 했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이미 초라해 질대로 초라해진 인생에 누더기 하나를 더 덧대는 것만 같아 더없이 괴로울 뿐이었다.
춘앵 씨는 나보다 먼저 암 센터에 입원한 환자 중 하나였다. 원래 춘앵 씨와 나 말고도 병실엔 두 명의 암환자가 더 있었는데, 벚꽃이 지기도 전에 두 사람이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지고 병실엔 나와 춘앵 씨만이 남았다. 부모님이나 언니, 스텝 일을 같이 하던 동료들이 종종 찾아오는 나와 달리 그녀는 늘 홀로 병상을 지켰다. 춘앵 씨는 일일 드라마를 보며 조금 웃거나, 창밖을 내다보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을 때를 제하고는 거의 무표정으로 누워 있곤 했다. 그녀가 올해 여든을 넘겼고, 이름이 ‘임춘앵’인 것을 알게 된 것도 병상에 붙어 있는 이름표 때문이었지 그녀에게 전해 들어 안 것은 아니었으니까.
나뭇잎이 초록색 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색을 바꿔가던 초여름, 문병 온 이들이 들고 온 오렌지 주스나 호두과자 같은 것을 나누어 먹으며 나는 춘앵 씨와 조금씩 낯을 익혔다. 수액바늘을 꽂은 왼손으로 간식을 내미는 나를 보며 춘앵 씨는 수줍게 물었다.
아가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아, 스물아홉이예요.
스물아홉이라…… 좋은 나이군요.
춘앵 씨의 병상에서 함께 호두과자를 까먹으며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예상 외로 걸걸한 중저음 톤의 목소리였다. 변성기를 지난 소년의 그것과도 비슷해 나는 조금 놀랐다.
할머니, 목소리가 정말 특이하시네요.
젊었을 적부터 목을 이렇게 가꿔서 그렇다우. 앞으로는 할머니 말고 춘앵 씨라고 불러 주세요.
그 말을 하며 춘앵 씨는 내게 윙크를 했는데 아마 그게 그녀의 버릇인 듯 했다. 늘 무표정으로 시간을 보내던 춘앵 씨에게 그런 표정이 있다는 것 또한 놀라웠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눈으로 윙크를 하는 그녀를 보면 묘하게도 기분이 좋아졌다.
저 벽에 붙어 있는 사진은 아가씨 애인인가요? 보아하니 외국인인 것 같은데.
춘앵 씨는 내 병상 벽면에 붙은 자비에 돌란의 사진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나는 그녀에게 저 남자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감독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그러다 이곳에 입원하기 전까지 영화판에서 일했던 내 과거사를 춘앵 씨에게 말하게 되었고, 그럼 영화감독이군요. 라고 말하며 반색하는 춘앵 씨 때문에 나는 잠시 부끄러워졌다.
식당 섭외부터 교통정리, 시나리오 쓰는 일까지 모조리 도맡았지만 영화를 제작한 적은 없으니 나를 감독이라 칭하긴 어려웠다. 춘앵 씨는 호두과자 껍질을 벗기며 자신도 영화는 아니지만, 비슷한 업종에서 일한 적 있다고 말했다.
호시절이었죠. 아마 실없는 소리처럼 들릴 테지만, 나는 감독 양반이 부러워요.
왜요?
얼떨결에 퉁명스러운 대답이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겨울, 세상에 흔하디흔한 암이라는 질병의 고통은 내겐 몹시 버거웠고, 나이가 들수록 누추해지는 삶엔 진력이 났다. 입원 날짜가 길어질수록 퇴원을 하더라도 충무로에는 돌아가지 않기로 다짐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나아질 것 없는 촬영 현장의 처우도, 시나리오가 든 가방을 가지고 다니며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내 시나리오를 설득시키는 일도 더 이상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춘앵 씨는 날선 내 말투에도 아랑곳 않고, 기분 좋은 눈웃음만 지어보였다. 그녀는 부드러운 과자를 오물오물 씹다 이내 말을 이었다.
감독 양반 나이 때는 그렇게까지 아름다운 줄 모르고, 소중한 줄 몰랐던 것들이 어느 날 사라져 버린 것 같아서, 그래서 그런 것 같네요.
나는 한참 시무룩하게 앉아 있다가 호두과자를 삼키며 춘앵 씨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뜨겁고, 무거운 어떤 것이 식도를 타고 서서히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분명 호두과자는 아니었는데, 내 자리로 돌아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무언지 알 순 없었다.
그 후부터 나는 자주 춘앵 씨의 병상으로 가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결말이 가까워질수록 상황이 극으로 치닫는 일일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지만, 가끔은 내 이야기를 춘앵 씨에게 시시콜콜 터놓을 때도 있었다. 이를테면 한때 스물아홉의 나는 <파니 핑크>라는 영화의 주인공처럼 운명적인 사랑을 기다리다 언젠가 그런 남자를 만나 뜨겁게 사랑할 줄만 알았는데, 현실에서 그런 남자는 도통 나타나지 않고 관을 짜서 자신의 방에 두는 주인공처럼 죽음연습만 하며 살고 있다는 울적한 이야기. 춘앵 씨는 그런 투정을 유심히 들어주며 사려 깊은 조언을 덧붙이곤 했다. 낮고 섬세한 춘앵 씨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이상하게 안도가 되었다.
춘앵 씨는 왜 항상 듣기만 하세요.
원래 나이 들면 다 이렇다우. 듣는 게 더 좋아요.
수다스럽게 떠드는 나와 달리 춘앵 씨는 늘 말을 아꼈다. 처음에는 원래 과묵한 편일 거라 가볍게 치부했지만, 항암약물 투여실에 부쩍 자주 들락거리는 그녀를 보며 암이 그녀의 생기를 서서히 사그라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그녀가 난데없는 부탁을 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저기, 감독 양반 부탁이 있는데…… 내 팬들 좀 불러줄 수 있나요?
일 분에 서른두 번 떨어지는 링거액을 말없이 보고 있던 내게 춘앵 씨는 나지막이 말했다. 뜻 모를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 나에게 그녀는 낡은 수첩을 보여주었다. 수첩 두 페이지에 걸쳐 조숙자, 김진진 같은 낯선 이름들과 그 이들 것으로 보이는 전화번호가 커다란 글씨로 적혀 있었다.
이게 내 팬들 번혼데, 이 이들한테 전화 좀 해줘요.
춘앵 씨가 힘겹게 말을 이어갈 때마다 성대에 삽입한 흡입관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 그나저나 팬들이라니. 이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인가. 당황하는 나를 보며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눈을 찡긋해보였다.
춘앵 씨의 말에 따르면 한때 그녀는 국극 배우였다. 그 중에서도 장군이나 왕자 역을 주로 맡던 남장배우. 화장기 없는 춘앵 씨의 멀건 얼굴과, 환자복 위로 여실히 드러나는 앙상한 몸피로는 잘나가는 국극 배우였다던 그녀의 과거를 좀체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여성 국극이 한창 전성기를 누리던 50년대 초 춘앵 씨는 처음 무대에 섰다. 그녀의 데뷔 무대는 <춘향전>을 각색한 창극 <옥중화>였는데, 그 공연에서 그녀는 남자 주인공인 이 도령으로 활약했다.
덩치도 우람하고 목소리도 좋아서 남자 역을 하면 잘 어울리겠다 싶은 배우가 있는데, 그게 나였어요. 처음 <옥중화> 주연을 맡을 때도 그랬죠. 연습생들이 하나씩 불려나가고 단장이 맨 마지막에 나를 호명했는데, 당연하다는 듯 몽룡을 시키더군요. 도포랑 두루마기 걸치고 첫 대사를 치는데,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처럼 익숙했어요. 그 때부터 내내 남자 역할만 맡았죠. 내 목소리가 조금 남성스럽죠? 목소리도 그 때부터 몇십 년간 두껍게 내느라 이렇게 굳어버렸다우.
그 말을 하며 그녀는 자신의 팬들이 그 공연부터 그녀가 은퇴할 때까지 내내 따라다녔던 골수팬들이었다고 덧붙였다.
공연을 마치고 집에 가려고 하면 나랑 옷도 머리 모양도 꼭 비슷한 이들이 떼를 지어서 따라오는데, 그럴 때면 은근 기세등등해지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기묘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일도 많이 겪었어요. 납치라든가. 기습 키스라든가.
남자 분한테요?
아니죠. 내 팬들은 거의 여성이었는데요?
그녀의 팬 중 남자는 거의 없었고 주로 어린 학생들이나 혼례를 치르지 않은 처녀 팬이 많았는데, 병세가 악화되기 전에 그들에게 꼭 전할 말이 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내가 직접 전화를 해야 하는데 지금 내 꼴이 이래서 감독 양반한테 부탁하는 거라우. 오랜만에 거는 전환데 남세스럽기도 하고. 은퇴한지 이십년은 지났으니 그 양반들도 다 어떻게 됐을지 알 수가 없어요. 연락처만 주고받고 그 후로는 나도 그이들도 살기 바뻐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으니 몇 명이나 올지는 모르겠네요.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건네준 춘앵 씨가 병상으로 돌아간 뒤, 나는 구글 검색엔진을 통해 여성 국극에 대해 찾아보았다. 국극에 대한 카테고리는 예상 외로 협소했다. 특히 춘앵 씨에 대한 자료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는데, 오랫동안 검색을 이어가다 다음과 같은 자료를 발견했다.
1958년 5월에 발행된『신태양』단행본 283호 연예 면의 헤드라인은 이러했다. “여성 국극 배우 임춘앵, 여성 팬과 가짜 혼례식 올려”한자와 한글이 혼재된 이 세로쓰기 기사에 의거하면 춘앵 씨는 그 해 여름, 다섯 명의 하객을 데리고 한 여성 팬과 조촐한 결혼식을 치렀다. 주례와 사회까지 둔 채 절차대로 진행된 이 결혼식은 팬의 극진한 요구로 성사되었으며, 혼례가 모두 끝난 뒤 두 사람은 ‘국화도’라는 서해의 작은 섬으로 신혼여행까지 다녀왔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었다. 지면의 밑바닥에는 초점이 흐릿한 흑백사진이 두 장 실려 있었다. 한 장은 결혼 기념사진처럼 보였고, 다른 한 장은 신혼여행을 떠난 두 사람의 사진 같았다. 머리에 포마드를 바르고, 검은 양장을 차려 입은 여자와 그 여자의 팔짱을 낀 또 다른 여자. 지금의 춘앵 씨와는 도무지 매치 되지 않는 남장 배우를 보며 나는 그녀가 말했던 호시절을 조금이나마 가늠해보았다. 그들의 삶을 바탕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했으나 곧 접었다.
그녀들의 호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춘앵 씨가 가짜 혼례를 치룬 그 이듬해부터 여성 국극은 유신체제 아래 사이비 예술로 분류되어 국가적 지원과 보호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춘앵 씨는 그 후로도 꽤 오래 단체에서 공연을 한 것 같지만, 그 이후 행적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일찌감치 은퇴한 뒤 이후로 생업에 종사한 것 같았다.
노트북을 덮고 나는 춘앵 씨의 병상을 넘겨다보았다. 춘앵 씨는 서너 시간동안 병상에 누워 항암제를 투여 받고 있었다. 그녀의 투약 시간은 여름이 깊어질수록 조금씩 늘어났다. 얼핏 주워들은 담당의의 말에 따르면 다음 달에 춘앵 씨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겨질 예정이었다. 항암제가 똑똑 떨어질 때마다 그녀의 얼굴이 웃는 듯 우는 듯 일그러졌다.
춘앵 씨.
윙크를 하며 고통을 감추는 춘앵 씨를 향해 설핏 웃어 보이며 나는 천천히 다이얼을 눌렀다.
춘앵 씨의 마지막 관객으로 온 노파들은 춘앵 씨가 분장을 마칠 때까지 모여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끼리도 오랜만에 만난 모양인지 서로 꼭 부여잡은 손을 놓을 줄 몰랐다. 시답잖은 과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그들은 크게 웃곤 했다. 그런 수런거림이 싫지 않았다. 그들의 높고 낮은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춘앵 씨를 기다렸다.
전화번호부에는 열 명 남짓 되는 팬들의 번호가 적혀 있었지만, 그 중 살아 있는 사람은 단 세 사람뿐이었다. 내 전화를 받은 그들은 전화를 끊지도 않고 한참동안 춘앵 씨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수화기 너머까지 그들의 설렘과 환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오래간 듣고, 행여 빠뜨린 사람이 없는지 꼼꼼히 체크하며 전화를 이어갔다. 전원이 꺼져 있다는 다이얼이 나올 때면 그 번호는 체크해두었다가 후에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었다. 춘앵 씨의 기억을 간직한 오랜 팬들을 전부 불러 모으고 싶었다.
그렇게 모인, 한때 춘앵 씨를 열렬히 사모했다던 그들을 나는 찬찬히 훑어보았다. 중국 청두에서 왔다는 노파도 있었고, 병원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지만 춘앵 씨가 그곳에 입원한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노파도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 오지 못한 다른 이들의 행적을 묻기도 하고, 이제는 세상을 떠난 그 이들의 이야기를 하며 오래간 울기도 했다. 공들여 화장을 했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세월의 고단한 흔적이 녹아 있었다.
영화감독이라고 했나요?
노파들 중 하나가 내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노파는 품 안에서 빛바랜 사진을 꺼냈다. 사진 속 남장 배우를 가리키며 노파는 수줍게 웃었다.
우리 젊었을 땐, 장군님만한 배우는 없었어요.
사진 속 춘앵 씨는 액세서리로 치장한 젊은 여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자료에서 본 여자와 노파가 내민 사진 속 여자는 닮아 있었다.
혹시 이 사진 속 여성분이 할머니세요?
사진 속 여자를 가리기며 가짜 결혼식과 신혼여행에 대해 묻는 내게 노파는 사진 한 장을 더 내밀었다. 자료에서 본 가짜 결혼식 사진이었다.
진짜 여성 국극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미어터져라 왔어요. 표를 못 구할 정도로. 결혼할 때 배우자한테 ‘내가 좋아하는 이런 언니가 있다. 이해를 해줄 수 있느냐’는 말을 하고 결혼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말 복이 많은 여자예요. 장군님하고 혼례까지 치렀으니. 기자는 우리가 국화도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고 적어 놨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어요. 결혼식을 마치고 배를 타려는데 가는 배편이 없었죠. 장군님이 내 손을 꽉 잡고 다음에 다시 오자고 이야기하는데 어찌나 서럽던지. 그 이후로 딱 한 번 국화도에 다녀왔어요. 재작년 생일 때였나 그랬죠. 하루에 고작 서너 번 밖에 배가 운항되지 않는 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데 주변 풍경은 너무 달라져 있더군요. 좋은 펜션도 여럿 생기고. 거기 편백나무가 많은 펜션이 있는데 그곳에서 남편과 묵었어요. 늦여름이었는데 매미가 울고, 그 소리를 들으면서 올해는 이 남자랑 왔지만 다음에는 꼭 장군님이랑 와야지, 여러 번 생각했는데 이젠 그러지도 못하겠네요.
노파는 사진 속 춘앵 씨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인생을 한 번 더 살 수 있다면 그들은 춘앵 씨를 사모하던 그 때처럼 살아가겠지. 흑백으로 된 결혼사진을 보며 나는 노파들이 하는 이야기를 말없이 들었다.
요새 뭐 오빠 부대 그런 건 댈 게 아녀. 팬레터가 전부 혈서야. 장군님한테 결혼해달라고 그런 걸 보내는 거야. 나도 여성 국극이 너무 좋아서 그때 돈으로 2천을 들여서 아예 극단을 만들었어. 다 날렸지만, 그래도 하나도 후회 안 해.
성님들 말 들으니 생각나네. 여자가 남장을 하고, 이가 하얘가지고 우리 고전 춤을 추는데 어찌나 환상적이었는지. 이건 감독 양반이 꼭 영화로 만들어야 돼.
노파들은 저마다 밀어 놓았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깔깔 웃었다. 춘앵 씨에게서 들은 이야기나, 자료를 통해 확인한 이야기들도 들렸지만 그렇지 않은 이야기가 더 많았다. 여성 배우들과 무대 위에서 사랑을 나누던 마성의 남장 배우와 패물을 훔치고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며 공연을 보러 다녔던 팬들. 요즘 극장에서는 좀체 느껴지지 않는다는 공연의 희열을 그들은 곰곰이 되짚어 말했다. 사진 속 하객들의 젊은 얼굴과 노파들을 번갈아보며 나는 숨을 죽였다. 그들의 새된 웃음소리가 포르말린 냄새가 나는 병실 안을 떠돌았다.
가림 막이 드르륵, 거친 소리를 내며 열린 것은 그 때였다. 춘앵 씨가 가림 막을 열고 나오자 노파들은 말을 멈췄다. 하얗게 분칠을 하고, 휑뎅그렁한 흰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긴 춘앵 씨가 병상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짙은 분장으로 병색을 감춘 춘앵 씨를 보며 그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춘앵 씨는 그들을 둘러보며 몇 차례 숨을 골랐다. 춘앵 씨의 표정은 담담했다. 세월을 거슬러 한 자리에 모인 이들을 앞에 두고서도 그저 부드럽게 웃으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그녀는 노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찬찬히 살펴보았다. 변해버린 그들의 얼굴을 새로 익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들의 입가나 눈가에 새겨진 늙음의 결들을 바라보며 추억을 회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소란스럽던 실내는 이미 숙연해져 있었다. 노파들은 춘앵 씨의 몸짓 하나라도 기억할 것처럼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금식 푯말이 달린 병상을 무대 삼아 춘앵 씨는 공연을 시작했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코에 호스를 꽂은 채 춘앵 씨는 늠름하게 사철가의 한 대목을 열창했다. 광도 낮은 백열등이 쉴 새 없이 깜박였고, 그 때마다 춘앵 씨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병실이 어두워질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고수도, 너른 무대도 없는 암 병동에서 그녀는 고독한 광대처럼 보였다.
얼씨구.
가느다란 추임새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춘앵 씨가 창을 할 때마다 노파들은 나지막이 추임새를 넣었다. 얼씨구, 좋다. 그들의 추임새에 맞춰 춘앵 씨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무정세월은 덧없이 흘러가고 이 내 청춘도 한번 늙어지면 다시 올 줄을 모르는구나. 어화 세상 벗님네들 이내 한말 들어보소. 인생이 모도가 팔십을 산다고 해도 병든 날과 잠든 날 걱정근심 다 제하면 단 사십도 못산 인생 아차 한번 죽어지면 북망산천의 흙이로구나.
1절이 끝나고 2절로 넘어가는 부분에서 춘앵 씨는 노래를 멈추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걱정스런 마음에 엉거주춤 일어나는 노파들을 보며 그녀는 윙크를 했다. 웃는 것도,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닌 얼굴로 노래를 부르는 춘앵 씨. 가래와 해수가 뒤섞인 그녀의 목소리 사이사이로 울음 섞인 노파들의 추임새가 들렸다. 높낮이도, 음도 달랐지만 그들의 추임새가 어설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백발 된 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아 앉아서 한 잔 더 먹고 덜 먹게 하면서 거드럭거리고 놀아보자.
노파들의 추임새에 맞춰 나는 입을 벙긋거렸다. 얼씨구, 좋다. 노파들의 추임새를 따라 하기는 했지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그들의 목소리만이 온전히 어우러지기를 나는 바라고 있었다. 돌림노래처럼 춘앵 씨의 노래는 계속 이어졌다.
봄은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노래를 부르는 대신 나는 손가락으로 사각의 틀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그들을 집어 넣어보았다. 노파들과 춘앵 씨의 얼굴에는 지나간 계절들을 추억하는 것 같은 표정이 서려 있었다. 지금처럼 노래하고, 사랑했을 그들의 젊은 날을 상상하며 그들을 오래간 손가락으로 만든 프레임 안에 담아보았다. 아름다운 컷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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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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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영찬 / 소설가 김충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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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당선자들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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