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콘테스트> 제20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월간문학 한국인]이 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고자 분발하는 젊은 영혼들의 순수 문학 창작의욕을 북돋기 위해 기획한 <창작콘테스트>가 제20차 당선자를 맞았다. 이번 제20차 공모는 이전 공모에 비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매우 미흡했지만 그래도 격려 차원에서 금상, 은상 외에 동상을 2명 뽑았다.
[월간문학 한국인]<창작콘테스트>는 작가로서의 무궁한 필력이나 완벽한 전문성을 하나하나 따져 시상하는 그런 대단한 문학상이 아니다. 오로지 전문작가가 되기만을 꿈꾸어온 예비작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다소 흠결이 있더라도 치열한 작가정신과 독특하고도 개성있는 표현,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따져 우열을 가릴 뿐이다. 따라서 설혹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 가능성을 보아 당선작을 뽑을 뿐임으로 문학상으로서의 권위를 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할 것이다.
이번 응모자 또한 모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을 터이고 나름의 재능을 발휘하였다고 보여지지만, 상당수의 작품들은 여전히 진부한 낱말들의 사용과 구태의연한 표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점이 아쉽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그간 겪어온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에 의해 산고를 겪듯, 그 누구도 쓰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문체와 어법, 시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이번 <창작콘테스트> 제20차 공모에 참여해주신 작가 여러분들, 그리고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 창작을 자신의 운명으로 택하려하는 모든 분들께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기원하며 각별한 감사와 격려의 뜻을 전한다.
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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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부문
미래에서 온 전화
- 이정희
우리는 모두 예비 도둑이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욕심낸다. 오지 않은 시간을 훔치고 싶어 돈을 내고 훔치고는 한다. 오지 않은 시간은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과 같아서 살랑바람이 불 때는 느슨하게, 과격한 바람이 불 때는 쨍쨍한 소리를 낸다. 때로는 평화로울 만치 소리 없는 시간을 보낸다. 우리는 소리 나지 않는 고요함을 좇으며 오지 않은 시간을 훔쳐보고 싶어 한다.
시간은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관측할 수 있습니다. 로비에 들어서자 대형스크린에서 광고 문구가 흘러나온다. 금색으로 네모나게 빛나는 고층 빌딩은 여의도로 들어서기 전 다리 건너에서도 선명했다. 그 모습이 즐겨 먹는 양갱의 금박 포장지를 떠올리게 했는지 희명은 달콤한 침을 삼켰다.
“오지 않은 시간을 알 수는 없죠. 하지만 날씨처럼 관측은 가능하다는 겁니다. 세계의 증시나 금리의 유동성, 유행의 흐름, 고객님의 바이오리듬, 심지어 기상관측을 통한 자연의 예후까지.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127가지 요소들을 분석해 고객님의 미래를 예측해 드리는 거죠. 뭘 모르는 사람들은 비싸다, 비싸다 항의하지만 이 정도 돈으로 5년 뒤, 10년 뒤를 엿볼 수 있다면 거저 아니겠어요? 5년, 10년의 시간을 돈으로 환산한다면 이 정도는 너무 싼 거 아닐까요? 비싸다고 불평하는 건 내 시간을 무가치하게 생각한다는 거 아닐까요.”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여자는 쉴 새 없는 언어로 말랑해진 마음을 툭툭 건드린다. 살짝만 당겨도 딸려 갈 정도로 미리 마음을 먹고 온 희명이지만 쉽게 결정하는 '호구 고객'처럼 보이기 싫었다. 그러면 미래 관측도 띄엄띄엄 해 줄 것 같은 불안함에 희명은 짐짓 고민하는 척, 책상 위에 팸플릿을 분석하는 척 턱을 괴며 '끄응' 소리를 냈다. '끄응'에 담긴 의미를 알아챘는지 어쨌는지 여자는 옥타브를 차분하게 유지한 채 컴퓨터의 '연구진 소개' 폴더를 열었다. 뉴스에서 보았음직한 얼굴들이 네모나게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저희 미래비전에는 세계 최고의 우수 연구진들이 대거 포진돼 있습니다. 돈의 움직임이라면 이 분 따라갈 사람 없잖아요. 금융 전문가 왕치산 씨. 평화상을 제외하고 최연소 노벨상을 받으신 물리학자 노벨로프 씨. 게다가 중력이동설을 발표했던 NASA의 쿠퍼 놀란 씨. 이런 연구진들이 고객님의 성향, 건강, 재정 상태 같은 기본정보부터 사회적, 환경적인 요소 등을 분석합니다. 97%의 정확성을 자랑하는 미래비전의 미래 관측 시스템, 믿고 한 번 맡겨 보세요.”
뉴스를 챙겨 보지 않는 사람이라도 알 수 있는 학자, 전문가들이 물렁한 마음에 하나씩 꽂힌다. 재작년이었던가? 중력은 시간이나 차원까지 이동한다는 중력이동설을 발표하면서 우주와 관련된 영화의 자양분이 됐다던 쿠퍼 놀란이라면 희명도 얼굴을 알 정도다. 뒤편 블라인드 사이로 고개를 내민 오전의 햇살이 코팅된 팸플릿 위를 돌아다녔다. 햇살 알갱이들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처럼 종알 거렸다.
“금액이 부담되신다면 상대적으로 가벼운 문제에 직면한 고객님들이 사용하시는 단기 미래 예측 보고서 상품도 있습니다. 짧게는 3시간 길게는 48시간 안에 가까운 미래를 분석해 드리는 상품인데요. 어느 브랜드 노트북을 사야 할 지 선택을 부탁하시기도 해요. 아, 로또 번호나 국회의원 선거 등 국가 재정이나 안보에 영향을 끼치는 사안은 불법으로 취급하고 있으니 참고해 주세요.”
희명은 이쯤에서 '끄응'을 끝내야할지 말아야할지를 고민했다. 눈치 빠른 여자는 '결정은 다음 방문 때 하셔도 된다. 오늘은 무료로 진행되는 기본 정보 검사를 받고 가라.'며 문을 열었다. 문 밖의 기다란 의자에는 '네가 아니더라도 할 사람은 수두룩하다.'를 증명하는 대기자들이 온통 휴대폰에 빠져 있었다. 희명이 힐을 또각이며 상담실을 나오자 대기자들은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박환진 고객님.”
직원이 옥타브를 높여 이름을 부르자 한 사람이 재빠르게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휴대폰을 향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희명이 나오자마자 기계적으로 바통 터치하듯 다가온 또 다른 여자가 기본정보 기록실 앞으로 안내한 뒤 대기번호를 뽑아 넘겨준다. ‘65번 : 대기자 12명 ’이라고 적힌 명함만한 종이를 들고 기다란 의자에 앉아 희명도 대기자가 된다. 딩동. 딩동. 53번에서 54번으로 넘어가는 전광판의 숫자를 바라보다가 가방 속의 휴대폰을 꺼낸다.
딩동. 딩동. 알람소리가 들리면 화면과 똑같은 번호의 종이를 든 사람들이 어두침침한 얼굴을 하고는 데스크로 향한다. 여기서는 빌릴 수 있을까. 얼마나 빌릴 수 있을까. 반이라도 빌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불안한 고뇌를 하면서. 딩동. 124번이 화면에 뜨자 앞자리에서 복권을 구깃거리던 지긋한 남자 하나가 일어났다. 남자의 뒤로, 희명의 옆에 앉아 미지근한 커피에 물렁해진 종이컵을 쥔 아빠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시간의 중력에 짓눌렸다. 가만히 있어도 머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건 그저 시간에 짓눌렸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희명은 늘 모른 척 하고 싶어졌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볼 때도, 식탁에 나란히 앉아 밥을 먹을 때도 아빠의 머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못 본 척 했다. TV 속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척 정면을 바라보며 아빠를 덮친 시간을 모른 척 하고 싶었다.
“니 이거를 꼭 해야 되겠나? 어문 데다 돈 쓰지 말고 빌릴 수 있는 만큼 빌려서 고마 전부 회사 차리는 데 쓰면 되지.”
딸의 대답이 늦어지자 짐짓 민망해진 아빠는 호로록, 몇 방울 남지 않은 커피를 마시는 척 한다. 손 안의 종이에는 130번. 늦둥이 외동딸과 제가 불리기 여섯 발자국 전이다.
“엄마한텐 말하지 마라. 생돈 쓴다고 난리난다.”
“고마 하고 싶은 대로 하라니까 그라노. 서울 갈 때는 편지 한 장 써놓고 야반도주 하듯 잘도 가드만 뭐가 무서워서 그런 거를 한다고.”
얕은 잔소리를 하면서도 신분증과 통장을 주머니에 고이 넣어 온 아빠는 안다.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르는 척 할 뿐이다. 하루에 7번 다니는 1000번 버스의 시간표에 내 삶까지 맞춰 살아야 하는 고향이 싫어 매번 서울로 도주하는 꿈을 꾸던 딸을. 바득 바득 공부해 들어간 대학교에서 장학금을 놓치지 않아야 했음에도 밤늦게까지 도서관에 있을 수 없었던 건 1000번 버스 때문이었다. 졸업만 하면 1000번 버스와는 다른 시간을 살겠다고 스스로를 도닥였다.
하지만 막상 졸업을 하고 떠나려 하니 예순이 넘은 아빠와 엄마가 눈에 밟혔다. 1000번 버스와 평생 함께 살아 온, 그 시간표 위의 삶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늙은 아빠와 엄마가 가슴에서 자꾸 바스락 거렸다. 초등학교 시절, 밥솥 위에 올려 둔 우유값을 제가 깜박한 돈인 줄 알고 다시 가져가는 바람에 돈을 찾다 포기한 희명이 울면서 등교한 건 1교시가 시작되고 나서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미 늙어가던 아빠와 엄마가 무거운 추처럼 목구멍에 걸렸다. 서울 친구가 알아봐 준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는 바로 전날 밤까지도 늦둥이 외동딸은 입을 떼지 못했다. 불면의 밤을 지새우고 나서야 뚱뚱한 백팩 하나와 그보다 덜 살찐 크로스백을 매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예순이 넘은 아빠가 외동딸의 흔적을 발견한 것은 아침밥을 뜨기 전, 밥솥 위에서였다. 서울에서 취업이 되면 인사하러 오겠다는 짤막한 편지를 아빠는 묵묵하게 서서 읽고 또 읽었다.
아빠는 안다.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르는 척 할 뿐이다. 어렵게 얻은 늦둥이 외동딸은 단 한 번도 하고 싶은 대로 한 적이 없다는 것을. 1000번 버스의 스케줄에서 일탈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안다.
“이희명 님? 고객님? 고객님?”
일주일 전의 기억에서 제 머리채를 끄집어내는 목소리가 카랑하다. 희명은 그런 적 없다는 증거로 말끔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치켜떴다. 신분증을 복사하고 온 여자는 이내 온갖 동의서와 검진표를 책상에 나열하더니 빨간 동그라미를 여기저기 그려댔다. 솔직하게 말해서 희명이 알아듣는 건 그 중에 반 정도였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설명하면서도 이번 주 안에 결재하지 않으면 보통 한 달 걸리는 미래보고서가 두 달 이상 걸린단다. 그 정도로 고객이 밀려 있다는 소식도 살짝 흘려주는 거다. 그녀가 흘린 비보를 듣고 희명은 ‘끄응’ 소리를 냈다. 그녀는 매번 그래왔다는 듯 미소 짓고는 희명 쪽으로 어깨를 붙이고 톤을 낮춘 채 입술 속 비밀의 방을 열었다.
“이건 비밀인데 저도 오래 만나던 남자랑 결혼 얘기가 나와서 미래관측을 해봤거든요. 제가 여기 직원인 걸 떠나서 관측에 '측'자는 추측의 '측'이잖아요. 즉 반신반의라는 거지. 근데 세상에! 10년 뒤 관측 보고서에서 그 사람, 주식 때문에 폭삭 망해서 제가 밤낮으로 이 회사에서 야근하고 있더라니깐요! 그래서 당장에 헤어지고는 죽어라 소개팅을 해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어요. 이제 결혼 4년찬데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그녀의 책상에는 해외여행 중 찍은 가족사진이 증거품처럼 놓여 있다. 여자가 잠시 열어 준 비밀의 방에는 몇 명이 왔다 갔을까. 희명은 책상 위에 턱을 괴며 온갖 동의를 구하는 종이에 여러 번의 사인을 했다. 머리카락 마냥 엉킨 희명의 이름이 젖과 꿀이 흐르는 섬을 찾아 하얀 종이 위를 표류한다. 바람, 구름, 비……. 그들이 계산하는 길로 가면 달게 영근 기적의 섬에 도착할 수 있을까.
프리랜서로 일하는 방송 작가 친구 민정이는 6개월 간 다녀 온 중국 출장에서 인생의 깨달음을 얻었다며 한국에 오자마자 희명을 불러냈다. 4대 보험도, 국민연금도 보장해 주지 않는 프리랜서 생활이 고단해 늦은 나이에 이직을 고민하던 민정이가 빛이 보이는 길을 찾았다며 기뻐했다. 목구멍을 열고 맥주 한 잔을 원샷하더니 다짜고짜 중국에 가서 사업을 하잖다. 한국 예능 프로그램을 내비게이션처럼 신봉하는 중국 방송국에서 마련해 준 숙소에서 기름기 우글우글한 삼시세끼를 먹고 있자면 한국 야식이 애달팠단다. 늦은 밤에는 외출을 삼가라던 충고를 한 귀로 흘리고 시내로 나섰을 때 민정이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 강남역에 새로 오픈한 햄버거 가게 줄만큼 길게 늘어선 희망의 줄을 목격했다. 의아한 마음에 퍼뜩 올려다 본 가게의 간판에는 익숙한 치킨 브랜드가 의기양양한 어깨를 빛내고 있었다.
“야, 생각해 봐. 방송 작가라고 하는 거 오래 일 해봤자 앞으로 10년이야. 난 결혼 생각도 없는데 10년 지나면 누가 나를 먹여 살려 주냐고. 나한텐 나밖에 없잖아. 다 늙어서 부모님 집에 얹혀 살 수도 없고. 얹혀 살아봐. 아침 먹을 때, 점심 먹을 때, 저녁 먹을 때 한 번씩 잔소리겠지. 남편 만들라, 애 만들라는 말은 명절에 듣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야. 남편이랑 애 없어도 돈이라도 있으면 당당해질 거 아냐.”
재빠르게 위 아래로 움직이는 입술에서 흥겨움이 흘러나온다. 딱 10년 전, 방송 작가를 하겠다며 유명한 작가가 되는 게 꿈이라고 방송 아카데미에 다니던 그 입술과 닮았다.
“그래서 말인데. 너 모아 놓은 돈 있으면 나랑 같이 중국 가볼래? 나 내일 컨설팅 전문가 만나러 갈 거거든. 중국 방송국 PD한테 유명한 부동산 업자도 소개해 달라고 얘기 해뒀어.”
맥주를 한 모금 삼킨 희명이 턱을 괴고 ‘끄응’거리자 TV에 자주 나오는 래퍼처럼 손짓 발짓을 동원한다.
“내가 점도 봤다니까? 나도 이걸 해야 할지 말지 결정하기가 어려워서 용하다는 점집을 세 군데나 갔어! 근데 셋 다 똑~같이 하는 말이 뭔지 알아? 내년에 나한테 금전운이 엄청 들어와 있대. 내 손금이 막금, 사장님 손금이라잖냐. 아휴, 내가 왜 미리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지금 이 머리 그대로 10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대출 좀 받아서 중국에 치킨 가게나 미리 차릴 걸.”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친구의 꿈도 변했다.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겁게 내려앉은 어둠 사이사이에서 갓 스물을 넘긴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우리도 저런 초록의 시간들이 있었지, 라며 혀 위의 쓴맛에 나지막하게 웃기엔 우린 아직 젊을까. 괜찮은 미래가 있을까. 갓 스물의 학생들은 10년 후의 내가 궁금하지 않을까. 서른이 되면 집도 있고, 차도 있고, 남편도 있고, 애도 있을 줄 알았지만 스물에 상상한 10년 후의 미래와 지금의 희명은 꽤나 많이 달랐다. 희명의 풍경은 강학고 약한 바람에 시끄러운 소리만 낼 뿐 고요한 적이 없었다. 앞으로의 10년 후에는 평화로울 수 있을까. 서른넷이 짊어질 책임은 생각보다 무거워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자꾸만 방황한다. 10년 후의 나에게 찾아가 1분만 충고를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 후로 희명은 아주 바빴다. 아니, 희명이 바빴다기보다는 희명의 친구들이 바빴다고 해야겠다. 서울에서 친해진 친구 4명이 발 담그고 있는 단체 채팅창과 고향 절친 3명이 있는 단체 채팅창은 한동안 하라 VS 마라로 뜨거웠다. 남부럽지 않은 회사 다니면서 결혼 준비하라는 유부남녀들과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하고 싶은 거 하라는 미혼남녀의 설전이 끊기기 전의 줄보다 팽팽했다. 잘 모르겠다며 한 발 물러선 친구들은 서울서 유명한 신점 카페를 알려 주는가 하면 친한 창업전문가를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결정하기 힘들면 미래비전에 맡겨 보는 건 어때?]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줄다리기로 휴대폰이 뜨거워질 무렵, 중립을 지키던 친구가 말했다. 그러자 너무 비싸네, 좋은 생각이네 하는 설전이 이어졌다. 희명이 인터넷에서 '미래비전'을 검색해 보는 동안 대화창에선 '우리 둘째 이름을 유진으로 할까, 유빈으로 할까?'라는 주제로 또 다른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단체 채팅방에서 희명의 이야기가 희미해질 때쯤 희명은 미래보고서가 완성됐다는 말을 듣고 네모난 금색 건물로 달려갔다. 형형색색의 그래프와 몇 장의 흰 종이에 적힌 글씨가 훔쳐다 준 10년 뒤 미래를 읽고 또 읽었다. 차를 운전해 집으로 가면서 바라본 다리너머에서 금색 건물이 빛났다. 일렁이는 한강이 금빛으로 보였다.
직장인이면 누구나 사표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사는 거 아닙니까. TV에서 자주 듣던 시시콜콜한 농담이 제 이야기가 될 줄은 - 물론 희명은 사직서는 핸드백에서 나왔지만 – 몰랐다. 가슴에 품고 있던 무형의 반항심과 자존심을 네모난 종이 위에 옮기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사직사유 하나, ‘서른넷이면 결혼 생각은 안 하냐. 내년 지나면 노산인데 여유 부릴 시간 있냐.’ 남 걱정을 사서 해주시는 부장님. 사직사유 둘, 같이 들어 온 동기 오빠는 벌써 재작년에 차장으로 승진했는데 나는 왜 아직 과장이냐고요. 은근히 비하하는 뜻을 담은 고유명사가 돼버린 ‘만년 과장’이 이제 남의 얘기가 아니니까. 사직사유 셋, 공짜로 일하는 것도 아니면서 일시키면 입을 댓 발 내미는 버르장머리 분실한 후배들. 몸이 안 좋아서 지각했다면서 얼굴은 왜 풀 메이크업이냐. 회사 생활 9년 동안 쌓이고 쌓인 사직사유를 먼지처럼 후우 불어버리고 깨끗해진 종이 위에 네이버 블로그에서 검색한 ‘꿈을 이루기 위한 발판’어쩌고 하는 동화 같은 사직사유를 새겨 넣었다. 그래야만 제대로 된 시간에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는 흉흉한 소문 때문에.
♬어디시냐고 어디냐고 여쭤보면 아버지는 항상 양화대교, 양화대교 이제 나는 서 있네. 그 다리 위에♬ 가슴에 품었던 사직서를 내밀자 부장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내년쯤 결혼할 만한 남자 친구도 없었고, 그렇다고 평소에 불평불만이 많았던 편도 아니었던 세상에 둘도 없는 ‘착한 사원’이 갑자기 사직서를 내미니 그럴 만도 했다. ‘말이 착한 거지, 그거 호구 아냐?’ 탕비실에서 어린 직원들이 부장님을 은밀하게 어루만질 때 희명은 괜히 뜨끔했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그래♪ 양화대교 위에서 양화대교를 흥얼거리며 퇴근길 정체 스트레스를 털어낸다. 합정역이라고 적힌 표지판을 눈으로 한 번 훑고 가을이 가져 온 한강의 선선한 야경을 훑어본다.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봤던 한강은 설렘이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수백 장의 이력서를 가슴에 품고 다니던 시절.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졌을 때 봤던 한강은 불공평했다. 야경 속에서 행복하게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컬러였지만 희명은 음침한 흑백이었다. 그렇게 반 년 뒤 남부럽지 않은 기업에서 합격 문자를 받고나서 친구와 함께 온 한강에서는 희명도 컬러였다. 그것도 여러 가지 색으로 빛나는. 하지만 회사 생활 10년이 지나니 그 다채로운 빛에 익숙해졌는지 퇴근길의 한강은 그냥 한강이었다. 지하철 창밖으로 보이는 한강의 야경에 색을 입히기도 전에 피곤이 눈을 짓무르게 했다.
사직서를 내고 집으로 가는 길에 희명은 오랜만에 한강을 마주했다. 오늘은 설렘도, 흑백도, 컬러도 아니다. 불안하게 일렁이는 밤의 물결만 가득하다. '행복하자'는 말로 가득한 노래를 연속 재생 시켜놓고 한강을 지나는데 문득 휴대폰이 울렸다. 회사에 같은 해에 입사했다가 3년도 못 채우고 사내연애로 결혼한 지숙이다. 노래의 볼륨을 줄이고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건 '여보세요. 나야. 거기 잘 지내니.' 라는 인사말이 아니라 아기 옹알이 소리였다.
"너 회사 그만 뒀다면서?"
모전자전인가. 지숙이 역시 '여보세요. 나야. 거기 잘 지내니.' 인삿말 대신 황당함 섞인 걱정을 쏟아냈다. 뭐, 그렇게 됐어. 둘째는 잘 커? 큰 애는 유치원 다닌댔나? 화제를 전환하려 했지만 그것 또한 쉽지 않았다.
“다들 들어가고 싶어 하는 회산데 돈 모으면서 안정적으로 다니다 시집이나 가지 그랬어. 너무 불안한 선택 아냐? 우리가 무슨 20대 청춘도 아니고.”
지숙이가 퇴사와 함께 결혼을 하고나서부터 둘 사이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 순으로 그녀의 생활 주기에 따라 주제만 살짝 바뀌었을 뿐이다. 언제나 공통적으로 오르내리는 주제는 지숙의 시어머니와 지숙의 외로움과 희명의 '결혼 할' 남자친구 유무였다. 딱지마냥 속에 붙은 불만을 희명이 토해낼 수 없었던 이유는 다른 얘길 해봤자 돌아오는 건 '자유로운 솔로인 네가 부러워. 히스테릭한 시어머니 밑에서 애 키우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어.'라는 대답뿐이어서였다.
“들어봐. 환철이가 추천해 준 미래비전 알지? 내가 미래비전에서 보고서까지 받아 봤다니까? 나랑 민정이랑 다른 나라로 체인점 확장할 정도로 성공한대. 97프로래 97프로! 그래서 사직서 낸 거라니까?”
실로 오랜만에 자신 쪽으로 기운 대화에 희명이 약간 신난 말투로 떵떵거렸다. 어머, 정말? 진짜 잘 되려나 보다! 기대하는 대답을 해주길 기대하니 절로 입 꼬리가 올라간다.
“돈 내고 기계가 선택해 준 게 의미가 있어? 그리고 3프로는 누가 책임져 주는데. 괜한 돈 쓰고 물까지 건너갔는데 망하면 어쩌려고.”
“야, 너는 친구가 큰 맘 먹고 사업 좀 해보겠다는데 성공할 거다. 잘 될 거다. 그냥 응원 해주면 안 돼? 시작도 전에 그렇게 초를 치면 속이 시원하니?”
질투하는 것도 아니고. 끝말은 꿀꺽 삼키고 반복해서 재생되는 양화대교의 볼륨을 높였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너와의 대화를 그만하고 싶다는 은연의 제스처가 전화 너머로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안정적인 회사 잘 다니고 있는 순진한 애한테 괜한 바람 넣어서 돈 날리는 거 아닌지 걱정돼서 그러지.”
순진한 애, 괜한 바람, 돈 날리기. 어느 포인트에서도 화를 참아야 할 명분을 찾지 못해 지숙이에게 처음으로 거하게 한 번 화를 내어볼까 고민하는데 전화 너머로 희미한 옹알거림이 건너왔다. 아기가 울어서 갑자기 전화를 끊은 게 미안한 건지 시작도 전에 초를 친 게 미안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어 희명의 속이 들끓었다.
한국 브랜드는 중국에서 잘 통하지만 너무 큰 기업의 브랜드는 마진이 적으니 중소 브랜드를 고르라는 컨설팅 매니저의 추천에 희명과 민정은 한국 치킨 중에서 맛있다고 소문난 치킨 회사를 몇 군데 탐방 다녔다. 1일 1치킨이라는 치느님의 당연함에도 일주일이 넘게 치킨을 먹고 있으려니 코끝에서 치킨 기름 냄새가 맴돌았다. 한 번은 희명이 좋아하는 에그타르트를 먹으려 집어 들었을 때도 희미하게 치킨 기름 냄새가 지나갔다. 왜지? 왤까? 에그타르트. 에그. 달걀. 닭이 낳은 달걀. 닭은 치킨. 그래서 그런 건가?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엉뚱한 논리를 부리며 웃음을 물었다.
컨설팅 매니저부터 카톡 단체창의 친구들이 대부분 찬성하는 브랜드의 본사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부족한 카페인을 채우려 집 앞 커피숍에서 원두 한 봉지를 샀다. 친구들은 카페가 아닌 커피숍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는 희명을 자주 놀려댔다. 생긴 건 서울 앤데 가끔 보면 촌 동네 출신 티가 난다며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분위기를 간지럽혔다. 오늘도 커피숍이라고 했네. 웃으며 빌라 1층 보안문을 열었다. 월세로 6년, 반전세로 3년, 10년째가 되는 작년에서야 전세로 거듭난 온전한 희명의 공간은 방 2개에 작은 부엌이 딸린 빌라다. 번지르르 하게 보이고 싶은 사람에게는 투룸, 돈 빌려달라고 할 것 같은 사람에게는 방 하나에 좁아터진 창고 하나라고 둘러대는 오래된 빌라였다. 보안문을 열고 들어서자 희미한 청국장 냄새가 코끝을 지난다. 어디서 청국장을 끓여 먹나. 살짝 배어나온 군침을 삼키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을 눌렀다. 2층, 3층으로 올라갈수록 진해지는 냄새에 희명은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땡. 문이 열리자마자 바깥에서 뭉쳐져 있던 냄새가 서로의 어깨를 밀치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이닥쳤다. 원두냄새에 설레던 희명이 갑작스런 공습을 받았다. 인상을 찌푸리다 아, 짧고 진한 탄식을 흘리며 급하게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섰다. 식탁에 원두를 턱, 핸드백을 턱, 휴대폰을 살짝 던져놓고 다급한 몸짓으로 현관문 앞에 있는 덩치 큰 택배 박스를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아이씨……. 모서리 부분에서 베어 나온 축축함에 손이 젖었다. 싱크대에서 손을 씻고 휴대폰에서 ♡를 검색하자 ‘어무니♡’가 나타난다. 버튼을 누르자 엄마의 목소리를 듣기 전 먼저 들어야 하는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울린다.
"오야~."
차분하게 떨어지는 아빠의 목소리와는 달리 엄마의 말 뒤로는 항상 물결이 달렸다.
"엄마 청국장 다 터졌다!"
희명은 ‘엄마 내다. 밥은 먹었나. 아픈 데는 없고.’ 같은 인사보다 공습경보를 먼저 발령했다.
"단디 쌌는데 또 터졌드나? 우야노~ 많이 베렸나?"
"봉다리로만 싸지 말고 반찬통에 넣고 나서 봉다리로 다시 싸라고 했잖아. 박스까지 젖어가꼬 난리났다 아이가. 동네방네 청국장 배달 왔다고 소문났겠다."
니 청국장 좋아하니까 많이 보낸다고 그란 거 아이가. 다른 반찬은 괜찮드나. 회사는 어떻고. 요새 만나는 사람은 없나. 전혀 다른 주제의 이야기가 너무 자연스럽게 이어져 희명은 화를 내다 말고 전화를 끊었다. 엄마는 그저께도 물어봤던 요새 만나는 남자에 대해 또 묻는다. 제가 팜므파탈도 아니고 3일 사이에 무슨 수로 남자를 만들겠나. 하지만 희명은 모른다.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게 아니라 아직은 모르는 거다. 재촉하고 다그치고 엉덩이를 때려주면 ‘드러워서 하고 만다.’는 인생의 진리를 엄마가 알고 있다는 걸 희명은 모른다.
바싹 말라있는 플라스틱 통을 꺼내 박스에 있던 반찬들을 옮겨 담는다. 달걀 3개에 김치, 먹다 만 아구찜이 전부였던 어제와는 딴판이다. 배를 굶기는 것도 모자라 상한 음식까지 집어넣은 주인을 아마도 욕했을 냉장고는 포만감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라면을 끓이는 임무만 하사받았던 말년 냄비는 청국장을 한소끔 끓이고 있다.
청국장에 밥을 슥슥 비벼 한 그릇 해치우고 커피 한 잔으로 입 안을 개운하게 비우는 시간이다.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는 단 커피고 뭐고 특유의 쓴맛 때문에 아예 못 마시질 못했다. 커피숍에 가면 아이스초코만 시키는 희명에게 또래 친구들은 '커피를 즐길 줄 알아야 어른이 되는 거다.'라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누구는 고추냉이, 또 누구는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을 수 있어야 어른이라고 했지만.
첫 커피는 직장에 다니면서였다. 탕비실에서 노란봉지의 커피를 따뜻한 물에 타서 몇 모금 마시는 찰나가 꽃잎에 앉아 쉬어가는 나비처럼 가벼웠다. 노란봉지에 익숙해지자 마끼아또나 라떼 같은 달달한 커피는 금방이었다. 10년 째 회사 생활을 하는 지금은 씁쓸한 원두커피를 즐기기에 이르렀다. 사실 희명은 원두커피의 맛보다 냄새가 좋았다. 씁쓸함이 아니라 은은하게 향긋한 꽃잎을 배꼽 아래로 보내 간질이는 기분이었다. 꽃잎이 배꼽 아래에서 팔랑 거리면 심장이 파득거렸다. 그래서인지 이제는 한 모금 호로록 마셔 봐도 쓰다고 미간을 찡그리는 일이 없다. 오히려 원두의 향을 좇으려 코를 킁킁 거린다. 쓴 커피를 마시는 희명은 이제 어른이 된 걸까.
여섯 번째 층, 전세 빌라 아래로 뻗어진 키 작은 주택들을 보며 어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희명은 지숙의 말을 떠올렸다. ‘기계가 대신 해 준 선택이 의미가 있니?’그 말이 귀에 물이 걸린 것처럼 위이잉 하고 자꾸만 울린다. 지숙이는 어쩌면 앞길 하나 스스로 결정 못 하는, 스스로 헤쳐 나가지 못 하는 미혼의 희명이 어른스럽지 못해 걱정하는 것일 테다. 130번이 인쇄된 종이를 구깃거리던 아빠도 혹시, 그와 비슷한 마음일까.
"조급해 안 해도 된다. 살다 보면 잘못된 길로 갈 수도 있다 아이가. 길을 잘못 들면 언젠가는 잘못 온 걸 눈치 채게 돼 있다. 그러면 왔던 길 다시 돌아와서 그 다음에 다른 길로 가면 된다. 조금 더 걸을 뿐인데 길 가는 걸 무서워하면 되겠나. 인생 짧다, 짧다 해도 충분히 짧은 기다. 인생한테도 시간을 줘야 되는 거 아니겠나."
이루어 놓은 것 없는 서른넷에 조급해 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철부지 아닌가. 느려 터진 1000번 버스 곁에서 나란히 달리기는 건 생각하기도 싫다.
"나는 엄마 아빠처럼 살기 싫다."
잠깐 흘러가는 말 한 마디, 내가 고른 말 한 마디도 맘처럼 떠내려가지 않는데 내가 하는 선택이라고 얼마나 더 큰 의미가 있겠냐고. 묵묵히 정면을 바라보는 여윈 등을 입에서 떨어진 꽃잎이 때리고 지나간다.
매미 대신 귀뚜라미가 울고, 하얗고 가볍고 팔랑 거리는 손님의 발길에 모든 존재가 숨죽였다가 얼마 전 호텔 뒤편, 네모나게 정갈한 공원에서 개구리가 울었다. 그리고 오늘, 시끄러운 개구리 울음 소리에 원래 일어나기로 했던 오전 7시보다 20분 일찍 눈을 떴다. 보드라운 거실화에서 여유로운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원두커피를 한 잔 할 셈이다. 어젯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센트럴파크 건너편 커피숍에서 'BEST' 스티커가 원두를 샀다. 스티커가 붙은 원두 종류는 3가지였지만 그 중 몸값이 가장 비싼 놈을 물어왔다. 학교에서 수년 동안 배워 온 영어는 찌꺼기 밖에 남지 않아서 몸값이 비싼 이유를 묻는 대신 카드를 내밀었다. 영어 잘 하는 유학생이라도 구해서 과외를 받아 볼까. 핸드밀의 나사를 조이고 드르륵 드르륵 원두를 갈며 원두향보다 가벼운 고민에 빠졌다. 손바닥에 돌돌돌 원두가 바스러지는 진동이 느껴진다. 여과지에 부드러운 가루를 올리고 뜨거운 물로 곱게 원을 그린다. 아직은 연한 커피가 좋아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여러 번 원을 그린다. 보글보글 거품이 올라온다. 10년 전에는 몰랐던 원두의 고소한 향. 남자들이 좋아한다는 여자들의 향수도, 베이비 파우더의 냄새도 이보다 희명을 들뜨게 할 수 없었다. 혀 위로 한 모금 올려 돌돌 굴리다가 삼키면 혀끝부터 목구멍까지 소소한 탄내의 길이 이어진다.
한국에서 막 인기몰이를 하던 치킨 브랜드는 상해의 번화한 골목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닭을 튀기기가 무섭게 팔려나간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됐다. 보통 오전 11시부터 점심을 먹는 중국인들에 튀겨야 할 닭이 부족해 저녁이 되기도 전에 문을 닫은 적도 있었다. 휴대폰 속에서 우왕좌왕 하던 채팅창은 희명과 민정의 치킨 가게보다 더 성황을 맞았다. 부럽다는 친구, 치킨 먹으러 한 번 들르겠다는 컨설팅 전문가, 지금이라도 투자할 수 없냐는 옛 회사 동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돈 냄새에 달려들었다. 명절에도 못 본지 몇 년째인 친척은 다짜고짜 재작년에 돌아가신 시어머니 수술비를 빌려 달라고 했다. 무슨 기금에서 일한다던 친구는 중국이 아니라 한국에도 도와야 할 사람들이 많다며 다짜고짜 계좌번호를 보냈다. 돈이 필요한 온갖 이유를 고해하는 사람들의 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휴대폰 속에서 가장 고요한 사람은 아직도 1000번 버스를 타는 부모님이었다. 우편으로 보낸 신용카드는 그보다 더 한가로웠다. 하루에 7번 다니는 1000번 버스 대신 발 아래로 서울의 지하철이 뚫린 주상복합에서 엄마, 아빠를 내내 기다리고 있었지만 희명은 매번 답 없는 거절을 당했다. 희명이 그럼 서울 근교에 아담한 전원주택을 얻어 주겠다며 달디 단 설탕 알갱이를 부스럭거려 봐도 엄마, 아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라곤 싱거운 '뭐하러.'뿐이었다. 1000번 버스와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이라도 하신 건지 두 분은 다리 박힌 장승처럼 그곳에 남겠다고 했다. 남들이 기웃거려도 내 어깨 젖기 싫어 혼자만 쓰던 커다란 우산. 그 우산 아래서 유일하게 함께 품고 싶던 부모님은 그저 우산 밖에 서 있었다. 희명의 어깨가 젖는 게 싫은 사람은 희명 혼자만이 아니었으니까.
빳빳한 카드가 첫 편지의 발신지는 1000번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와 또 다른 버스를 갈아타야 도착하는 종합병원이었다. 일에 휩쓸려 전화하기를 며칠째 깜박했다가 같은 병원의 이름으로 두 번째 편지가 왔을 때 희명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병원 갔드나?"
"별 거 아이다. 속이 안 좋아서 내시경 받느라고. 별 거 아이란다. 걱정마라."
별 거 아닌 게 어느 정도로 별 것이 아닌지 자세히 묻기도 전에 오전 11시부터 점심을 먹는 중국 사람들이 몰려와 사장인 희명마저도 후끈한 기름 앞으로 다급하게 소환되었다. 이후로 신용카드가 희명에게 편지를 쓰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중국에서 3년쯤 장사를 하고 돈이 모이자 민정은 또 누구에게 정보를 입수했는지 미국 다운타운을 노려보자며 다짜고짜 영어 학원을 끊었다.
휴대폰의 벨소리가 퍼뜩 울렸다. 7시에 맞춰둔 알람인가 싶어 거실화를 끌고 다가가니 화면에는 아부지♡가 둥실거린다. 뉴욕보다 13시간 미래에 있는 곳에서부터 걸려온 미래에서 온 전화다. 미래비전에서는 중력이 시간을 통과한다고 했지만 이쯤에서 생각하면 시간을 통과하는 건 인터넷 아닐까. 피식 실웃음을 터뜨리며 휴대폰을 든다. 10시에 잡힌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다운타운 부동산 전문가와 통화를 하려면 시간이 빡빡한가. 회의 끝나고 전화하면 너무 늦은 시간일까. 진득하게 울리는 벨소리에도 시간을 분 단위로 끊어 계산하고 나니 1~20분 정도의 여유가 있다. 가벼운 손놀림으로 초록색 전화 아이콘이 빛나는 방향으로 화살표를 밀었다.
"희명아."
'여보세요'로 마중을 나가기도 전에 13시간 후에서 보낸 아빠의 목소리가 터졌다.
"어, 아빠."
"느그 엄마 아프단다."
커피가 컵에 남긴 갈색 지도를 씻느라 틀어 놓은 물이 멈추지 않고 계속 흘렀다. 휴대폰을 들고 잠시 멍해진 사이 컵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물이 흘러 넘쳤다. 위암 3기. 내 일이 아니라고 믿었던 일이 벌어지자 3기라는 것이 어느 정도로 엄마를 괴롭히고 있는지, 얼마나 아픈 건지, 얼마만큼 시분을 다투는 건지 어떤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입원은 했는데 수술을 빨리 잡는 기 낫다고 해서 오늘 이것저것 계산을 좀 해야 된다꼬. 당장 우찌 되는 건 아니라니까 너무 걱정 말고. 니한테 또 병원 문자 가면 먼데서 걱정할까봐 전화했다 아이가."
언제나 원하는 바를 등 뒤로 숨기던 아빠였다. 희명이 그리우면 거친 손으로 그저 등을 한 번 툭 치던 아빠,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는 말이 '사랑한다.'는 말이었던 아빠였다. 그런 아빠가 13시간 후의 미래에서 보낸 말 뒤에는 듣지 못한 말이 숨어 있다.
"니 하고 싶은 거, 해야 되는 거 다 하고 온나. 뭐한다고 비행기 값 버리면서 왔다 갔다 하노."
"아빠 내 금방 다시 전화할게."
싱크대에 컵을 던져놓고 침대 맡의 노트북을 켠 희명은 여권이 캐리어 어느 깊숙한 곳에 누워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인터넷 창을 열고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 시간을 검색하다 또 한 번의 벨소리에 잠시 멈췄다.
[다운타운에 정말 괜찮은 목이 몇 군데 있어 메일 드려놨습니다. 이런 귀한 곳은 금방 금방 계약되니 오늘 회의 때 확인해 보시고 내일부터 바로 상권 체크하시죠.]
교포 3세라는 부동산 전문가의 문자가 13시간 후의 미래에서 희명을 끄집어냈다. 순식간에 텔레포트라도 한 듯 잠시 멍해졌다. 오후 2시 20분 출발 비행기를 클릭하려던 손도 희명을 따라 멍해졌다. 움직이는 건 원두 찌꺼기에서 풍기는 커피 향기뿐이다. 느그 엄마가 아프단다. 이번 회의 잘 하면 투자 제대로 받을 수 있으니까 정신 차려야 된다. 아빠와 민정의 말이 귓가에서 동시에 둥지를 틀었다. 희명은 여전히 멍했다.
희명은 매일 목말랐다. 어쩔 수 없어서 어쩌지 못했던 현실 때문에. 스스로가 납득할만한 비까번쩍한 사람이 되고 팠던 나날들. 1000번 버스와는 다른 시간을 살고 싶어 머리를 바짝 조였던 나날들. 목마름을 적셔줄 시원한 물길이 이제 막 터지기 시작했는데.
마우스를 클릭하기 직전 멈춰있던 집게손가락을 내렸다. 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하고 싶은 대로. 아빠의 목소리가 희명의 등을 툭 치고 원두 향과 함께 사라진다. 단숨에 휴대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그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서너 번의 벨소리가 울리고 상냥한 목소리가 들리자 희명은 밝게 웃었다.
"네, 미래비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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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당선작 심사평
제20차 <창작콘테스트> 금상은 소설부문 이정희 씨의 「미래에서 온 전화」를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소설가 김영찬 / 소설가 김충근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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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부문
■ 무령왕릉을 걷다
- 조성범
가을 숲 소란스럽다
단 하나의 습기조차 남기지 않은 가랑잎, 단단한 땅을 뚫고 솟아오를 부활을 예비하는 열매들
날아오르는 새들의 몸짓에 마른 잔가지 부러지는 소리
송산리 백제 고분군은
천년의 영광을 꿈꾸는 왕조의 말발굽 소리
새벽 별빛에 깨어나 달빛에 잠들고 싶었던
젊은 도공의 간절했던 기원
연화 무늬 벽돌 한 켜 한 켜에 쌓이던 울음
천년의 꿈속에 웅웅 거리고 있었다
절대 멈추지 않는
컨베이어 벨트 위 하루를 잠시 벗어두고
햇빛을 가리지 않고, 바람을 피하지 않고 떠나 온
하루는 고요하 질 않았다
다시 천년이 지나고 난 후
어느 흔적, 어느 작은 소리가 내 오늘을 꿈꾸게 해줄까
■ 늙은 남자
- 조성범
오래전 아주 오래전
봄바람을 뚫고 달려 사막을 찾아 모래성을 쌓았지
허리를 곧추세운 채 시선은 정면을 향하여
성난 고양이 꼬리같이 잘 다려진 바지에
굽이 단단한 구두를 신은 채
두 팔을 힘차게 흔든다
가을 햇빛은 찬란하고
시간은 여유롭다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골목은 꽤 길다
한참 지나도 지나는 사람 하나 없고
빈집 문틈으로 바람만 지나고
골목은 한적하기만 하다
술, 담배는 해로워 끊었고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음성 메세지는 1번 문자 메세지는 2번
쓰레기 더미 속 개 한 마리 짖어대고
그는 아직도 봄 속에서 모래성을 향해 달려간다
그는 여전한 듯했는데
사소한 것들에 슬퍼졌고
낙엽은 화려했고 바싹하니 말라 바스러지고 있었다
■ 낙타를 보내며
- 조성범
95년식 십삼만 킬로
길 잃은 대상을 태우고 미로 같은 사막을 헤매고 다녔지
외등 물혹을 지니고 오른쪽 다리에 상처를 입어
절룩이고 가는 내 젊기만 했었던 날들을 공유했지
날렵한 검은 갈기 휘날리는 천리마처럼 쌩하니 지나치곤 했던
언뜻 고귀해 보이던 자들 손가락질 개의치 않았어
사막을 횡단하던 내겐 참고 또 참아내는
너의 카키빛 가죽이 좋았어
모래바람을 견디어내는 것은
사막을 건너는 자의 외로운 특권
운수 좋은 날엔
오아시스를 찾아 맑은 샘물 맘껏 들이키고
별빛을 바라보며 잠들곤 했지
나는 낙타의 전생을 알 수 없었어
공작새의 깃털이었는지
초원의 붉은 야생화였는지
전생을 모른다 하여
발굽에 박힌 가시를 모른척하진 않았어
낙타가 주저하지 않을 때 절망보다는
아득한 슬픔을 느꼈지
적어도 나는 너의 짙은 갈색 눈동자를
외면하지 않으려 했어
뜨겁게 불타오르는 태양 아래
사막의 한가운데서 길을 잃었을 때를 잊지 않았어
끝내 마른 가시나무에 불을 지펴
너를 보낼 수밖에 없을 때 불어오는 서풍에 기도했지
너의 환생을 위해
■ 영등포
- 조성범
한 때는 붉은 해당화,
거룻배 타던 등판 널찍하던 사내들 지천이었다는
떠돌던 말들까지 샛강으로 아득하게 멀어지고 난 뒤
덜컹대는 안갯속으로 야윈 웃음 짓는 소녀들이 모여들고
소녀들 따라 붉은 등 별빛을 발했었다
암초에 좌초한 사내들이 역전에서 표류했고
뒷골목 좌판에 걸린 커다란 솥 안에 남루한 하루가
펄펄 끊어댈 때 우리는 밥 대신 술을 마셔댔다
어느 이국 소공녀의 이름이 높게 매달리고 난 뒤로
삐걱거리던 나무 계단들은 허물어지고
기름때 묻은 손가락들 더 이상 펴지지 않게 되었다
꽃들조차 피어나지 않은 봄이 지나갈 때
모퉁이마다 깨어나지 못할 꿈속에 별들이 내려앉는다
여기는 물을 잃은 포구
꽃을 잃은 달의 뒤편
■ 한 때 흐리고 비
- 조성범
견고한 자음의 틈으로
파고드는 모음의 가쁜 숨결들
거부할 수 없는 규정과 수칙들
나는 허울 허울대는 협력사 비정규직
전광판 숫자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할 때
정확하고 신속해야만 한다
나는 시지프의 톱니바퀴
독실한 신자처럼 주일 아침마다
화려한 비상을 빌어보고 또 빌어보지만
매월 이십일 받아 드는 명세서는
평일 한낮 술잔 속에 물비린내로 가득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바닥은
오래된 밥알처럼 딱딱하다
여직 풀지 못한 박스 속 흐려지는 꿈과
자주 베이는 선뜻한 현실 사이엔 안개 자욱하다
한 때 흐리고 비가 오겠다고
붉은 입술의 기상 캐스터 속삭인다
오늘은 비가 와도 좋겠다고
흠뻑 젖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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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당선작 심사평
제20차 <창작콘테스트> 금상은 시(詩)부문 조성범 씨의「무령왕릉을 걷다」외 네 편의 시를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시인 김호철 / 시인 정은정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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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부문
■ 바닥에 문
- 방미영
바닥의 소인이 찍힌 지문을 살핀다
네 군데마다 무료한 숙성과 젖은 파문이 있고
내면 안쪽 깊이, 꺼내듯 자국을 쏟아내는 몸짓
칸칸의 그늘로 좀 더 낮게 엎드려야한 시절에
바닥에 더덕, 달라붙은 생혈을 새긴 채
겹겹이 뒤엉킨 길들을 풀어놓으려는
발의 문이 엇박자다
자칫 갈증 때문에 저 넓은 시베리아 벌판까지
날아갔다는 풍문에는 솟대를 잡았던 슬픔이 각을 세웠다
매번 반복되는 시퍼런 각질 슬그머니 치켜들 듯하였다
뭉툭한 구릉을 따라 몰아치던 기억들은
바닥까지 덧대어진 족쇄였다
밖으로 간신히 흔적을 내미는 일은 거의 없었고
어느새 쑥, 질러 자라는 꽉 움켜진 지문
이리저리 가늠하고 있는 똬리의 덫도 깊었다
먼 평야에서 가까스로 날개를 오르내렸다
긴 부름으로 환해지는 생의 길
푸른빛 하늘을 모색하며
쉼 없이 바닥 면상을 다지고
엉거주춤, 저릿하게 도드라졌다
남루한 능선 마디마디
엉켜 뒹구는, 뿌려 칠 듯 휘도는 문을 좇으며
스스럼없이 가야 하는 곳을 간다
그 바닥의 문紋, 환한 길이 트인다.
■ 시선과 시각
- 방미영
시선이 집중될 때, 안개 사이로 드문드문 처지는
시각은 뒤꿈치가 멀다.
두 발로 벗고 나서는 것이 일이 되었고
짧고 신속한 맹목이 되었다.
멀어지는 시선視線는 발로 옮겨갈 때마다 첨벙거리고.
감봉된 시각은 늘 아래로 처지는 법.
층층의 공간을 짚으며 시선이 시각을 모으고
뒤집으면 칼끝은 나를 향한다.
허공을 더듬는 눈빛으로
손을 흔들거나 달려오면 시선은 사나워졌다
맞물린 선처럼 서로를 놓지 못하고 제 넋을 출렁이며
시각은 각진 미소로 주시한다
새하얀 캔버스에 색채와 질감으로 안고
양 날개를 펴고 먼 길을 달리는 시선과
주름진 바람으로 사물을 투시하는 시각이
뻐드렁니처럼 드러나 있다
비뚤비뚤하게 전경과 배경이 마주하며 물렁해질 때
온갖 중독된 시각視角, 날 서게 뻗어 있다
내일도 엿볼 수 있을 저 뉴스의 가려운 궁금증,
벅벅 긁어주는지, 붉은 시선이 흥건하다
정면으로 시선, 시각을 악착같이 붙여본다
맞닿은 곳으로 곁촛점, 주름진 동공의 몫이었다.
■ 투구꽃
- 방미영
잔인한 역사의 광기에 쫓겨 이곳까지 왔다.
멀고도 먼 깊은 산속까지 쫓겨났다.
목숨을 바쳐 지켜야 마땅했지만
후일의 도모를 위해 그렇게 은닉하여
기나긴 서러운 한을
발목아래 비밀리에 숨기고 있다.
그것이 흙속의 육신을 맹독으로 집어삼켰을 것이다.
애간장을 끓듯
재앙의 낯 달을 삼킨 채
벗을 수 없던 자줏빛 투구.
덜 삭은 안타까움에
오랜 세월 불면에 부르튼 창백한 입술.
저 어긋나게 교대로
불침번 서는 이파리들을 보아라.
머리 맞대며 안쓰럽게 회포를 풀며
집요하게 어울린다.
저주받은 세월을 마늘처럼 들고
부적삼아 악귀 달래며
허공에 안타까운 사연하나 적어
그리하여 손꼽아 기다려온
둥근 달빛이 아린 사연을 추궁하면
가슴에 응혈 진 속울음은
거친 톱니가 되어
산신령의 무딘 귀를 열게 한다.
■ 틸란시아*
- 방미영
거기, 깊고 아득한 잎들이
가라앉지 않는 것도
해파리처럼 넘실거리며
햇빛을 뾰족한 촉수로
빨갛게 물들이는 모빌의 파인애플
천정에서 늘어뜨리는 공간의 생명
보랏빛 꽃대가
아랫도리가 없어도 당당한 것도
허공을 꽉 움켜진 무한한 자유
흙이 필요치 않는
상식을 벗어난 덩굴처럼
질긴 그의 잎사귀들이 퍼져나간다.
단단하게 용수철처럼
겹겹으로 훑어보며
천공의 메마름과 먼지를 깨고 있을 뿐이다
*틸란시아Tillandsia: 공기 속 수분과 먼지 속 미립자를 자양분으로 살아가는 식물이다
■ 세 개의 시선, 큐브
- 방미영
보이는 면은 좀처럼 달랐다
모서리의 삼각 면에 예각지게 용접되어 있었지만
비스듬한 기둥을 맞잡아 이어진
세 개의 꼭지, 최대한의 보이는 면이었다.
몇 층의 부력으로 기둥을 밀어 올렸다
어제까지 세워졌던 벽과 창
오늘부터 다른 면들이 예고된 바닥처럼 떠받쳐 올랐다
뚝 끊어진 벼랑길을
서로 이어 불규칙적으로 서로를 포갠다
보이는 면은 일정한 층을 머무르는 種,
쉬이 머무를 수 없는, 온갖 기억을 묻어둔다
정수리를 돌다가 소용돌이치는, 경계
네모의 속성에서 탈피된 의혹
하나하나 돌리고 돌려
휑한 면을 끼우고 수상한 잎맥을 엮고 있다
탁탁, 돌리다
일렬로 튀어 오르는 돌발의 큐브
속도만 전념하다 제 발목에 갇히던 당신
면 안팎을 거세게 몰아 당차게 안착한다
개방된 면과 면이 벼려지고
반듯한 생의 지혜가 되고
그렁그렁 해묵은 패착이 떨어져 나가는
면과 면의 선택적인 점괘
주위에서 부활하는 면의
연속적인 착란錯亂이었다.
세 개의 시선,
왼쪽과 오른쪽 그리고 면이 길게 뒤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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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당선작 심사평
제20차 <창작콘테스트> 동상은 시(詩)부문 방미영 씨의「바닥에 문」외 네 편의 시를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시인 김호철 / 시인 정은정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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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 혀
- 김근욱
신지를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아버지가 중국으로 출장을 떠난 후 홀로 철부지 아이 셋을 감당하기 버거웠던 어머니는 나를 할머니 댁에 맡기셨다. 내가 다닐 새로운 학교는 운동장 한 켠에 금방이라도 로봇으로 변신할 것 같은 웅장한 트랙터가 세워져 있는 시골 학교였다. 신지도 나와 같은 이방인 신세였다. 선생님께서는 나보다 보름 정도 먼저 들어온 친구가 있다며 미리 그녀의 이름을 말해 주셨다. 그런데 교실에 첫 발을 내 딛던 순간 나는 사진조차 본 적 없는 신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교실 왼쪽 끝자리에 앉아있었다. 영어가 난잡하게 적힌 캡모자를 쓰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자사이로 비추는 그녀의 얼굴은 구운 계란처럼 거무튀튀한 색이었다. 얼굴색 때문인지 그녀의 분홍빛 입술이 유난히 돋보였다. 그녀는 손을 입술에 대고 입술 껍질을 하나하나 벗기고 있었다. 그 손이 어찌나 불안했는지 까닥하면 입술에서 피가 흐를 것 같았다.
나는 며칠 사이에 영산초등학교의 스타로 등극했다. 쉬는 시간이면 4학년 동생들부터 6학년 누나들까지 우리 반 문 앞을 서성이며 나를 흘겨보았다. 서울에서 왔다는 이유였는데 특히 나의 말투를 신기해 하는 듯했다. 내 앞에 와서 아무 말이나 해 달라고 조른 다음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응?” 이라고 대답할 때면 저들끼리 서울말을 잘 쓴다며 박수를 쳐대곤 했다. 반면 신지는 혀에 가시라도 돋은 듯 하루 내내 말이 없었다. 내가 신지의 목소리를 처음 듣게 된 것은 입학한지 일주일 째 되는 국어 수업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신지에게 교과서 168페이지의 소설을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신지가 입을 떼기도 전에 주변에서 킥킥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소란스러운 교실을 비집고 희미한 신지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개뱅…둘러주는 아이, 바용태” 내 옆에 앉은 녀석은 태어나 가장 재밌는 일을 겪었다는 듯 목젖을 훤히 드러내며 웃었다. “선생님, 쟤 원래 말 잘 못해요. 가방을 개뱅이라는디요?” 나는 신지가 말을 하지 않는 이유를 그때 알아차렸다.
아이들은 신지를 제 장난감 인 냥 가만 내버려두질 않았다. 모자를 벗기거나 뒤에서 의자를 빼는 등의 장난은 허다했고 사물함에서 신발을 꺼내어 남자 화장실에 던져 놓고는 나 몰라라 하는 일도 있었다. 말투가 어눌한 그녀가 쉽게 고자질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교실에 우유가 배달된 적이 있다. 반장의 어머니께서 간식삼아 빵과 함께 보내준 것인데 문제는 초코우유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흰 우유의 비릿한 맛을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린 우리들은 대부분의 우유를 남겼고 우리 반의 행동 대장 격이었던 경환이는 주변 아이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들은 자칭 우유 분수대를 만들어냈다. 우유팩을 옆으로 눕힌 다음 윗면에 구멍을 서너 개 뚫은 것이었다 그들의 작전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경환이 ‘우유 분수대’를 들고 교실의 뒤편으로 향했을 때 신지는 뒷문을 열며 들어왔고, 그녀가 의자를 뒤로 빼며 자리에 앉으려는 찰나 경환은 의자위에 우유 분수대를 재빠르게 올려놓았다. 신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신지의 옅은 청바지만 짙게 물들어 갈 뿐이었다.
방과 후 수업을 듣고 난 늦은 하교 길이었다. 노을 빛을 입은 청무밭 앞으로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신지였다. 그녀는 앙상한 다리가 훤히 드러나는 반바지 체육복을 입고 손에 청바지 끝을 쥐어 잡은 채 밭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혹 긴 소매를 펄럭이는 무용수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한참을 주저하다 이내 노을을 따라 밭으로 내려갔다. 나를 발견한 신지는 당황한 기색이었다. 나는 잠시 기다려 달라는 신호로 그녀에게 손바닥을 펴 보인 뒤 가방에 있던 담요를 꺼냈다. 그리고 담요를 펼쳐 내 허리에 감싸는 시늉을 한 다음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우리는 밭에 놓여있던 단무지색 플라스틱 상자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색한 듯 청바지만 만지작대고 있는 신지에게 내가 먼저 물었다. “너는 어디서 왔어?” “난 진해” 나라를 물은 것인데 잘못 이해했나 싶어 다시 물었다. “왜얼 얼 유 프롬?” “코.리.아 나 한국 사람인데?” 누가 봐도 외국 얼굴인데 왜 자신을 한국인이라 거짓말하는지 그때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지가 한국 국적을 취득한 혼혈아임을 깨닫게 된 것은 내가 한참을 크고 난 후 였다.
“아까 바지 말리는 거 멋있더라?” 춤추는 지 알았어” “야! 얼마나 춥고 힘들었는데” 전학생 동지의 대화는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나는 그날 신지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여럿 알게 되었다. 우리 할머니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으며 키티 인형 두 마리를 키우고 신지의 아빠는 잠을 잘 때 코를 사자처럼 곤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내가 신지의 말을 무리 없이 알아듣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래 아이들만큼의 수준은 아니었으나 우리가 대화를 주고 받음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는 내 말을 끊고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했다. 신지는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직 아이들의 거친 장난을 견뎌내기에 그녀는 너무 여릴 뿐이었다. 신지와 대화를 하는 동안 분홍빛 입술 사이로 그녀의 혀가 보였다. 신지의 혀는 붉은 선홍 빛이었다. 피부 색은 달라도 혀 색깔은 모두 같았다.
신지에게 물었다. “너는 제일 좋아하는게 뭐야?” “눈” “대박, 나도 눈 좋아하는데” 라며 우리는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우리가 바라본 하늘에는 어느덧 해는 저물고 수없이 펼쳐진 별들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 야식
- 김근욱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직 일이 손에 익지 않은 탓인지 끝내야 할 일만 서둘러 마무리하고 나왔는데도 이미 열 시가 넘어 있었다. 지하철 4호선을 타고 길음역에 내려 다시 정릉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탔다. 아침에 엄마가 다려서 목에 걸어준 넥타이가 푹 고은 육수용 멸치 마냥 매가리가 없어 보인다. 2년 동안의 취업준비 끝에 얻은 꿈의 직장이었다. 첫 출근 날 열심히 하겠다는 나의 인사를 “열심히 하면 안되고 잘해야 되” 라고 정정해준 대리님의 말씀을 머릿속에 각인하고 다니고 있다. 물위에 떠있는 기분이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어느덧 버스는 아파트 단지의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아침의 부산스러운 공기와는 사뭇 다른 정적 속에서 나지막한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가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불 꺼진 간판들 속에서 홀로 환하게 빛을 내는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에펠탑’ 문양의 네온사인이 그려진 빵집이었다. 나는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비상구 표지판을 만난 듯 그곳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미 늦은 시간이라 대부분의 빵은 이미 다 팔린 상태였다. 남아있는 것이라곤 소보로빵, 땅콩크림빵, 초코소라빵처럼 이름만 들어도 중후한 느낌이 드는 빵들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두어개씩 집어 트레이에 옮겨 담고는 계산대로 향했다. 배가 고파서 사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무언가를 사야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을 뿐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집안은 조용했다. 부모님께서는 이미 잠자리에 드신 듯했고 동생 녀석의 방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나는 조용히 비닐 봉투를 식탁에 올려 놓고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그런데 씻고 나와 방으로 들려가려는 그때 부엌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싶어 부엌으로 다가가보니 잠에서 깬 아버지가 빵 봉투를 뒤적이고 계셨다. 아버지는 뒤돌아 나를 보고는 “왔나” 라는 짧은 인사와 함께 초코소라빵을 한입 베어 무셨다. 나는 불 켜진 가게를 발견한 것처럼 부엌으로 걸어가 아버지 옆 의자에 앉았다. 빵을 먹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옆에서 보고있자니 가을 밤의 파도처럼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우리가 별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저 너무나도 맛있게 먹어주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에겐 위로였고 포옹이었다. 나도 봉투 속에서 소보로 빵을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는 퇴근 시간이 늦으신 날이면 어김 없이 까만 봉투와 함께 들어오셨다. 우리는 이부자리에 누워 있다가도 바스락거리는 비닐 소리를 듣고는 거실로 달려나가곤 했다. 비닐 속에는 주로 빵이 담겨있었다. 그런데 항상 빵 종류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시지 피자 빵이나 크림 치즈 도넛을 좋아한다고 누누이 말씀드렸건만 아버지께서는 매번 밤식빵이나 모카빵 같은 어른 취향의 빵만 사오셨다. 정작 자신은 몇 입 먹지도 않으면서 왜 이런 빵만 사오는지 그땐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이 돈을 모아 통닭을 한 마리 시켜주는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문득 아버지께서 사오신 야식은 자신을 위한 또다른 발버둥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다니며 하루의 절반을 모니터 앞에 앉아 있으니 내가 사람인지, 모니터 옆의 선인장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때가 있었다. 온몸이 가시라도 돋는듯 근질거려도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직 열려 있는 가게가 반가웠다. 비록 인기 없는 빵들만 있었지만 카드를 건네며 결제를 하는 순간 다시 사람으로의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았다. 한편으로는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오늘 제가 야근까지 총 13시간 동안 일을 했습니다. 일해서 번 돈으로 이렇게 먹을 것도 사왔습니다. 힘들게 일한 것을 저를 좀 알아봐 주십시요 하고 말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투정을 부릴 수도 없으니 자식을 불러모아 얼굴을 한 번 보는 것만으로 푸념을 대신하신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뚜렷하던 전등이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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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당선작 심사평
제20차 <창작콘테스트> 동상은 수필부문 김근욱 씨의「혀」외 한 편의 수필을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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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유미숙 / 수필가 정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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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당선자들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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