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콘테스트> 제19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by korean posted Nov 01,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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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콘테스트> 제19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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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 한국인]이 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고자 분발하는 젊은 영혼들의 순수 문학 창작의욕을 북돋기 위해 기획한 <창작콘테스트>가 제19차 당선자를 맞았다. 이번 제19차 공모는 이전 공모에 비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매우 미흡했지만 그래도 격려 차원에서 금상, 은상, 동상을 모두 뽑았다. 
  [월간문학 한국인]<창작콘테스트>는 작가로서의 무궁한 필력이나 완벽한 전문성을 하나하나 따져 시상하는 그런 대단한 문학상이 아니다. 오로지 전문작가가 되기만을 꿈꾸어온 예비작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다소 흠결이 있더라도 치열한 작가정신과 독특하고도 개성있는 표현,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따져 우열을 가릴 뿐이다. 따라서 설혹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 가능성을 보아 당선작을 뽑을 뿐임으로 문학상으로서의 권위를 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할 것이다.
  이번 응모자 또한 모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을 터이고 나름의 재능을 발휘하였다고 보여지지만, 상당수의 작품들은 여전히 진부한 낱말들의 사용과 구태의연한 표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점이 아쉽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그간 겪어온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에 의해 산고를 겪듯, 그 누구도 쓰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문체와 어법, 시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이번 <창작콘테스트> 제19차 공모에 참여해주신 작가 여러분들, 그리고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 창작을 자신의 운명으로 택하려하는 모든 분들께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기원하며 각별한 감사와 격려의 뜻을 전한다.


제19차창작콘테스트상장_3종.jpg









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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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부문



■ 고난은 예술이다
    -무료급식소
   - 박은창

“얻어먹는 사람은
짠 것을 찾게 된다”며
이미 삼삼하게 간해 나온 반계탕에
다시금 손님은
소금을 풀어 넣고 있다.
 
요며칠
그의 진한 슬픔들이
많이도 빠져나갔을 것이다.
 
국그릇 안에는
죽은 닭이 반 쪼개져 사는
이상한 바다 하나가 만들어지고,
숟가락 헤쳐 일으켜 세우는
기름 낀 파도 조각들이
무거워 보인다.
 
나는 덤덤하게
고개까지 끄덕이며
그 작품의 시작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 천혜향
   - 박은창

위~잉크 여섯 개를 집어넣고, 네 앞에서 깜직해 질 거야.
깜박,깜박,깜박,깜박,깜박
깜박하고, 깜박 한 개는 오렌지 빛 햇살위해
놓고 올 거야.
 
오른쪽 눈으로는 질릴 때까지 널 바라보고
왼쪽 눈으로는
깜박깜박깜박깜박깜박
불을 켤 거야.
그러고도 모자란 불빛은 햇살위에 놓고 온
깜박 하나 깜박하고 떠올릴 거야.
 
오렌지처럼, 햇살처럼 나도
환하게 환하게 켜질 거야.
환하게 주황빛으로
눈이부시게 새콤하게
깜박깜박,깜박깜박,
깜박
까아~암.


■ 잔설
   - 박은창

죽은 천사는
숨이 멎는 그 와중에도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전부를
품어주었습니다.
 
내 방의 창문은
마치 액자처럼
오늘 아침 그를 담아두었습니다.
 
0℃의 체온을 지나쳐
죽고 또 죽고, 죽고 또 죽어
 
시체의 썩는 냄새 같은 건
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연약한 눈물에도 그는
고이 녹아 내렸습니다.
 
죽은 천사는 죽는 동안
내 세상의 전부를 얼려 놓았지만
그것은 내가 본 것 중
그 어느 것에도 비할 데 없는
따뜻한 마음이었습니다.


■ 바람은 어떤 술인가?
   - 박은창

바람은 어떤 술인가?
어쩌자고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뼈저리게 취하게 하는가?
식물들은 또 어쩌자고 대책도 없이
저 바람 속에 몸을 놓고 헤매는가?
언제부터 육체와 영혼을 뒤집은 채
정신없이 저렇게들 취해 들고 있는가?
 
 바람은 어떤 술인가?
겨울은 왜 이렇게 독하디 독한 것인가?
이 겨울 내가 마신 소주 몇 병은
내 영혼 깊은 곳에서
또 어떻게 불어오고 있는가?
나는 어떻게 흔들리고 있기에
이렇게도 심하게 비틀거리는가?
 
걷지도 못하고 차라리 부러짐을 택하는
식물들은 도대체
얼마나 얼마나 대취한 채 사는가?
 
바람은 어떤 술인가?
우는 술버릇을 가진 식물들의 울음소리는
또 어쩌자고
그 안에 섞이어 발효되고 있는가?


■ 눈보라 2
   - 박은창

겨울 속에
틈이 있다.
 
그 틈을 지우려고
발악이다.
 
비켜라!
나는 저것 비집고 당장
전생으로
간다.



********
금상
당선작 심사평


  제19차 <창작콘테스트> 금상은 시(詩)부문 박은창 씨의「고난은 예술이다외 네 편의 시를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시인 김호철 / 시인 정은정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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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 유일한 실재實在
   - 박지선

  길을 걷다보면 낯선 아주머니가 다가와 대뜸 말을 걸 때가 있다. “어유 학생, 영이 참 맑아 보이네. 어때 우리 어디 가서 얘기 좀 할까요?” 미안하지만 나는 종교도 없고, 그리 감상적인 성격도 아니다. ‘영혼? 그게 있건 말건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야.’ 이것이 영혼에 대한 나의 건조하고 시니컬한 한줄 평.
 그런데 어느 날, 여느 평범한 날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떠한 전조도 맥락도 없이 갑작스레. 그건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목도한 죽음이었다. 메말랐던 머릿속에는 전과 다른 파문이 일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어렵지 않게 그때 본 꽃상여를 선연히 떠올릴 수가 있다. 딸랑, 딸랑, 고막을 때리는 상여꾼의 종소리와 그가 낭랑하게 우짖는 노랫가락, 그리고 다 큰 어른들의 목구멍에서 터지는 울음....... 죽음은 생각보다 번잡했고 어딘가 요란한 구석이 있었다. 잔잔한 바람에도 파르르 하릴없이 흔들리던 상여 위 종이꽃의 연약함만이 그 와중 유일하게 소리 없는 것이었다.
 할머니의 발인이 있던 날엔 가족들을 비롯해 온 마을 사람들까지 모여들었다. 그네들은 기꺼이 상여를 짊어지고 험한 산길을 굽이굽이 올랐다. 땅덩이를 파내어 봉분을 다지고 단단한 비석을 세웠다. 그 과정에서 무엇 하나 정성과 애도가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왜일까. 나는 오히려 허무해졌다. 당신을 기억하며 오래도록 슬퍼하리라 마음먹었으나, 그럼에도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잊게 될 것이다. 이 곳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의 수명까지 다하고 나면 더 이상 무덤 앞에 꽃이 놓이는 일은 없겠지. 삼베로 감싼 시신은 금방 썩어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당연한 수순. 그러나 만일 죽음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이와 같은 無라면 나란 존재는 결국 무엇이며, 무얼 위해 살아가는 것이지?
 인간의 평균 수명은 고작 80년에 불과하다. 지구에 아주 조그만 흔적조차 남길 수 없는 짧은 시간. 만일 영혼마저 없다면 우리는 삶의 끝에 기다리는 이 초라한 결말을 인정해야한다. 산다는 것의 덧없음도. 그렇다면 짐작해 보건데, 영혼이란 건 그런 두려움을 무마하려고 인간들이 만들어낸 환상인 걸까.
 “영혼이란 대체 무엇인가?” 인간은 오랫동안 이 질문의 답을 찾아 헤맸다. 처음에는 영혼이 가슴에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이를 만질 때나, 두려움을 느낄 때, 사정없이 가슴 안쪽을 울리는 심장의 박동.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뛰는 그 움직임을 영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조금 지나자 인간은 심장이 그저 간이나 창자 같은 장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장이 아니라면 뇌 속인가? 인간을 사고思考하게 만들어주는 시냅스의 복잡한 화학작용과 전기신호. 영혼은 그 속에 있는 것이던가.
 이에 과학자들은 끔찍하면서도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사망 직후 조직이 붕괴되기 전에 뇌를 정확히 스캔해서 데이터를 보관한다면, 미래의 어느 날에는 죽었던 사람의 정신이 컴퓨터를 통해 부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은 것이다. 결국 그들은 종양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한 여대생의 머리를 잘라 질소가스용액으로 채운 냉동고에 보관하기에 이른다. 나는 이 기사를 읽고 오래도록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자, 이제 이것으로 우리는 영혼을 얼려서 잠시 붙잡아 두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손 안의 조그만 기계로 세상의 모든 걸 알아낼 수 있는 시대가 왔지만 우린 여전히 답을 모른다. 내 멋대로 영혼이 있다고 믿어보기로 했다. 바람은 색이 없으나 나부끼는 머리칼은 그 존재를 증명하므로. 생각, 감성, 추억, 말투, 문체… 아무리 닮은 사람이라도 완벽하게 똑같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인간이 단순한 탄소화합물이 아니라는 증거는 이렇게나 많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이상한 불안에 사로잡혔다. 누굴 좋아하는 감정이 어느 순간 원래부터 없었던 양 사라진다거나,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때면, 말할 수 없이 쓸쓸해지는 것이었다. 정말로 간직하고 싶은 것들이 금세 휘발되어 날아가 버리는 까닭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늘 일기를 쓰고 사진도 열심히 찍으며 붙잡아보려 애를 쓰지마는 손안엔 빈껍데기만 남아있는 것처럼 허탈했다. 할머니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던 순간을 떠올려보려 애쓰지만 벌써 희미해져 흐릿한 인상만 남아 있듯이.
 그런 우울과는 별개로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갔다. 어느새 장례식 뒤로 한 달이 지났다. 동생과 나는 몇 달 전부터 예약해둔 여행을 취소하려 했으나, 괜찮으니 다녀오라는 엄마의 손에 떠밀려 무거운 마음으로 비행기에 탔다. 철없게도 금방 이국의 정취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후덥지근한 보라카이 해변을 거닐다 분위기 좋은 노상 술집을 발견했다. 백사장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의자에 엉덩일 붙이고 앉아 맥주를 마셨다. 조그만 촛불이 아른아른, 바로 가까이서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마음에 가득 차올랐다.
 문득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 아깝다.” 동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다. “이 순간이 너무 좋은데 언젠가는 다 잊어버릴 거 아냐.” 내 말에 그 애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당연한 걸 슬퍼하는 사람이 다 있네.”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는 사이 바닷물이 흰 거품을 내며 모래 위로 밀려왔다가 빨려나가길 반복했다. 그걸 지켜보는 동생의 옆얼굴이 마냥 행복해 보이는 것이었다. 맥이 탁 풀렸다. 아아, 그래 나의 불안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모든 것에 끝이 있다는 걸 슬퍼했으나, 태양조차 우주조차 수명이 있다는데 대체 영원함을 쫒는 게 무슨 소용인가? 어쩌면 나의 우울은 오만이었을지도. 중요한 건 영혼 같은 막연함이 아니라 ‘지금’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실재實在인 것이다.
 “내가 바보였네.” 나는 그렇게 말하곤 동생의 딱딱하고 좁은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우리는 맥주를 홀짝이며 모래사장 곳곳에서 쏘아 올리는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밤하늘을 밝히는 단 5초의 아름다움. 쏟아지는 색색의 불꽃은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그것을 슬퍼하는 사람은 없다.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마음속 공허한 구멍은 그렇게 메워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아무렴 어때, 영혼이 있건 말건?”


■ 곰의 부탁
   - 박지선

 대학교 시절 아주 친하게 지낸 남자애가 있었다. 동그란 이목구비에다 곰같이 커다란 덩치를 가진. 얘를 편의상 ‘곰’이라고 부르겠다. 나는 곰을 동아리에서 만났다. 신입생만 스무 명이 넘을 정도로 큰 음악동아리였다. 사실 처음에 난 곰이 별로였다. 보컬인 내가 노래만 부르면 이런 점은 좋지만 저런 건 고쳐야하고, 뭐는 어쩌고저쩌고, 그러는 게 영 싫었다. ‘사람 주눅 들게 자꾸 왜 저러지?’ 그런 곰이 내 목소리를 꽤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건 아주 나중의 일이다. 그가 칭찬이 부끄러워서 사족을 다는 성격이라는 걸 미리 알았다면 우린 더 일찍 친해졌을지도 모른다. 곰과 내가 하도 철썩 붙어 다니는 바람에, 선배들은 장난삼아 “너희 정말 사귀는 거 아냐?” 몇 번이고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곰과 나 사이엔 그 어떤 핑크빛도 없었다. 곰은 미련퉁이였으며 나는 지독하게 무뚝뚝했다. 스무 살의 곰은 아직 고등학생인 첫사랑을 못 잊은 채였고, 나도 다른 사람을 짝사랑 중이었다. 비슷한 우울을 공유하며 함께 술잔을 기울이다보니 어느새 친구가 되어 있었을 뿐이다. 남녀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냐고 의심을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진짜로 그랬다. 그렇게 우리의 우정은 계속 되는 듯 했다.
 시간이 흘러 2학년 겨울방학이 끝나자 곰에겐 여자친구가, 나에겐 남자친구가 생겼다. 우리는 서로 거리를 두기로 정했다. 물론 상대를 남매처럼 여기고 있다고는 하나, 예전처럼 막역하게 지낼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건 각자 연인에 대한 예의였다. 자연스레 곰과 멀어졌다. 그가 군대를 가면서 우리는 더욱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며칠 전, 곰에게서 연락이 왔다. 반가우면서도 의아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거의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곰은 늘 그렇듯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후배 H를 좀 만나달라는 부탁이었다. 얘가 지금 뭐라는 거야? 난 어이가 없었다. “너넨 헤어졌잖아, 그것도 2년 전에!” 내 외침에 수화기 너머 곰은 말이 없어졌다.
 한참 만에 입을 연 곰의 말에 따르면, 요즘 H의 우울증이 많이 심각한 상태라고 한다. 죽음까지도 생각한 H는 최후의 보루를 붙잡듯 곰에게 연락해왔고, 그는 흔들렸다. 곰은 진심으로 H를 좋아했으니까. 그러나 거기에 애정이 남아있는 것 같진 않아 곰은 이내 비참해졌다. 단지 자기가 힘들어서 기대는 건 너무 비겁하지 않은가. 그렇다 해서 H를 잘라내기엔 그 애의 상태가 너무 위태로워 보였다. 주변에 마음 둘 사람 하나 없이 고립되어 있는 H. 그 애를 신경 쓰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다는 걸 알려줘야 할 것 같았다고 한다. 고민 끝에 내게 부탁해볼까 싶었다는 그런 이야기를 하며, 곰은 많이 미안해했다.
 “알겠어. 내가 만나볼게.” 반은 곰에 대한 의리로, 나머지 반절은 나의 후배이기도한 H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그리 대답했다. 솔직히 H의 우울에 내가 무슨 도움이 될까 싶었으나, 조금은 책임을 느꼈다. 간간히 H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올 때마다 귀찮다는 핑계로 보지 못했던 것이다. 조금 변명을 해보자면 춘천까지 가야하는 게 번거로웠다지만 시간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날로 H와 약속을 잡았다. 그 애가 기뻐하고 있다는 건 살짝 떨리는 목소리만으로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H는 처음 봤을 때부터 나를 좋아하고 따랐다. 글쎄 어떤 이유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냥 내가 맘에 들었을지도 모르고, 어느 날 술 취한 내가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H의 볼을 만지며 “H, 키 작은 게 대체 뭐 어떻다는 거야. 난 귀엽기만 한데!” 하고 웃었던 우연한 순간 때문인지도 모른다(H는 곧잘 그때를 회상해 얘기하곤 했으니까). 그 애의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떠올려보면 참, 그 시절로 돌아가고픈 마음 밖에 안 든다. 그간 내 안에서 H는 이미 ‘과거’였던 것이다. 그립고 좋았지만 이미 지나가버렸고 더 이상 나와는 상관없는. H를 현재로 끌어오고 보니 나란 인간, 이렇게 무심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H의 연락을 가볍게 여긴 거야? 내가 그렇듯 H도 표현에 서툴다는 걸 알면서. 그 애가 고민 끝에 보낸 메시지는 어쩌면 간절한 구조요청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금세 약속 날이 되었다. H는 무척 초췌한 몰골로 나타났다. 밥을 사주며 어색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별로 내보이고 싶지 않은 내 이야기를 꺼내야했다. 평소에 연락을 자주 하지 않아서 나눌 이야깃거리가 궁하기도 했지만, H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비집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 것부터 털어 놓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노력에 H는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연극배우를 꿈꾸는 H의 우울은 나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H는 하고 싶은 일을 향해 그야말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고, 그럴싸한 성과도 거두었으며 스케줄도 연말까지 빼곡했다. 카페에 처박혀 잡문이나 끼적이며 시간을 보내는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멋졌다. 그런데도 그 애는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했다. ‘도대체 뭣 땜에?’하고 굳이 묻지 않았다. H의 우울은 감기 같은 거니까. 물에 빠져서, 일교차가 심해져서, 동생에게 옮아서… 수백, 수천가지 상황으로 인해 감기가 걸리지만 거기에 딱히 이유 같은 건 없을 것이다. 바이러스에 대체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위로에 영 서툰 나는 그저 쓸데없는 잡담을 하며 H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건 내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다정함이었다. 조금 건조하고, 나보다 한마디 정도 작고, 까무잡잡한 그 애의 손을 오랫동안 만지고 살펴봤다. 너는 손이 네모나게도 생겼다, 손가락은 엄청 긴데? 여기를 꾹꾹 눌러주면 진짜 시원하거든. 아, 너 손금은 볼 줄 알아?… 하하, 정말이지 아무 말이나 지껄였을지도.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야하는 H의 일정 때문에 오래 같이 있진 못했다. 그냥 그러다가 시간이 다 가버렸고, 버스를 태워 H를 집에 보냈다.
 그 애를 보내고도 나는 정류장에 좀 더 앉아 있었다. H의 마음을 조금은 알 거 같았다. 이유 없이 우울할 때마다, 곁에 아무도 없다는 걸 실감하게 되는 외로움을 나 또한 잘 알고 있으니까. 나는 가끔 ‘전부 스치고 지나간다.’는 문장을 절감했다. 자꾸만 마음이 텅 비고 가벼워지는데 감정이고 인간관계고 어느 것 하나 무겁게 날 눌러 주는 법이 없었다. “결국 난 혼자구나.” 이 말만 중얼거렸다. 그럴 때면 누군가 다가와 날 구해주는 상상을 했다. 내가 어떻게 엉망이든 옆에 앉아 “누구야, 내 앞에서는 울어도 돼.” 속삭이는 그런 달콤한 상상. 허나 그건 나의 이기심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허상이고, 내가 바뀌지 않는 이상 아무 것도 달라질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바뀌는 건 늘 너무 어렵다.
 외로움은 가벼운 감기를 찐득한 독감으로 만드는 독이다. 그러니 우울보다 치명적인 건 오히려 이쪽이다. 그러나 나는 H에게 이 말을 하는 걸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아니 정말 그럴까? 나조차 모르겠는데? 그 말을 삼키고 대신 이렇게 말했다. “H야, 너무도 사소한 것에 쉽게 우울해진다면, 반대로 기뻐질 수도 있다는 거 아닐까?” 나는 그저 내 말이 오만하게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네 우울을 전부 안다는 듯 넘겨짚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오늘의 만남이 아주 조금쯤, 먼지만큼이라도 좋으니 지친 네 하루에 기쁨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에게 내가 상상했던 그런 위로가 되어주고 싶었는데 그러기에 나는 너무 다정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춘천에 있던 곰에게서 술이나 한 잔 하자는 연락이 왔다. 곰은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건지, 날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정말 고맙다.” 아냐, 난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곰은 그래도 고맙다고 했다. 같이 술을 마시니 꼭 예전으로 돌아간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술을 마실 때마다 곰은 나한테 “마음은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며 잔소리를 했었는데. “있잖아, 나 조금은 달라진 걸까?” 곰에게 물었다. 곰은 묵묵히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불확실한 것에는 말을 아끼는 그다웠다. 나도 딱히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기에, 소주병을 들어 그의 빈 잔을 채웠다.
 오늘, H에게 괜찮으니 나에게 기대라고는 끝내 말하지 못했다. 나도 언젠가는 그런 다정함이 자연스러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걸까. 




********
은상
당선작 심사평


  제19차 <창작콘테스트> 은상은 수필부문 박지선 씨의「유일한 실재외 한 편의 수필을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수필가 유미숙 / 수필가 정금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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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부문



행방(行方)
김지은


 ‘어젯밤 오후 10시경, 철거 예정이었던 한 서울 세제 공장 안에서 남자 두 명이 살해된 채 발견되었습니다. 두 남성은 배가 갈라져 모든 장기들이 빠진 상태여서 더욱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끔찍한 사건은 이번이 처음은 아닌데요, 지난 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경찰은 아직 범인이 누구인지…’

-삑

오후 10시…… 서울 공장…… 남자 두 명…… 장기. 좁은 방 안을 메우던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TV를 끄자 내 머릿속에서 잔상을 남기며 메아리 쳤다. 저런 사건은 내가 맡아야 해. 당장 해결할 힘도 없는 경찰 피라미들이 아니라, 이 능력이 있는 내가.
 
나갈 준비를 하면서 탁자 위에 놓여있던 택배 상자를 집어 들었다. 마치 머릿속에서 영화를 보는 것처럼 이미지들이 파노라마로 지나갔다. 화물차에서 내려진 상자를 힘겹게 손에 얹고 왔다 갔다 하는 택배원과 그를 재촉하는 다른 남자. 택배는 그렇게 문 앞에 놓여지고 내 손 안으로 들어온다. 상자에서 손을 떼니 다시 보이는 책상, 의자, TV, 일상적인 모습들.
물건 속에 숨겨진 기억을 읽는 능력 ‘싸이코 매트리,’ 그 위대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바로 나다.
*   *   *
“빨리 빨리 움직여!”
“찍지 마세요! 찍지 마시라고요!”

노란 접근 금지 테이프로 에워싸여 있는 현장은 사람들로 북적댄다. 목에 빨간 핏줄이 돋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경찰들이 있는가 하면, 커다란 카메라를 한 손에 들고 마이크를 이리저리 휘둘러대는 기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시끄러운 카메라 셔터 소리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입을 열 때마다 발바닥에서 피어 오르는 먼지 구름이 제 입 속으로 들어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누구 하나 입 다물 생각을 안 한다.

‘난 달라.’

구렁이 담벼락 넘어가듯 그럴듯한 말만 지껄이는 경찰들, 기삿거리 하나 잡았다 하면 호들갑을 떨며 온갖 과장을 섞어 기사를 찍어내는 기자들과 난 다르다. 조용히 시끌벅적한 그곳을 돌아, 공장 뒷문으로 갔다. 무언가에 찍힌 흔적이 남은 문고리가 시야에 들어온다. 아마 범인이 급하게 도망치느라 남은 흔적이겠지. 좀 더 들어가 안을 깊숙이 들여다보려는 때에 부시럭 소리가 나는 것이 내 발 밑에서 느껴졌다. 가만히 내려다보니 카드 한 장이었다. 이제 됐다. 저것만 손에 닿으면… 허리를 숙여 내 손 끝이 카드에 닿은 찰나, 내 몸은 그대로 굳었다. 감은 두 눈의 어둠을 뚫고 환영이 보인다.

한 남자가 더러운 공사장 위에서 칼을 꺼내 든다. 눈 앞엔 두 시체가 있다. 아니, 시체가 아니다. 두 사람은 산고통에 무의식 중에서도 비명을 질렀을 것이고, 눈을 떠보려 했겠지만 이미 도려내어진 눈동자는 먼지 바닥 위에 떨어져 자신의 몸을 초점 없이 올려다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칼을 든 사람… 식은땀으로 얼룩진 얼굴은 하얀 마스크에 감춰져 있고, 손은 덜덜 떨리지만 절개는 한 치의 오차가 없다.언뜻 이 일을 아주 오래 전부터 해온 것 마냥 칼질에 거침이 없지만, 이따금씩 주위를 둘려보는 불안한 눈동자와 다리의 잔떨림은 숨길 수 없다. 분명 살인은 처음이고 몸에 칼을 대는 직업, 의사일 것이다. 바닥에 퍼부어진 핏덩어리들이 고약한 악취를 뿜어내는 것이 느껴진다. 미동이 없는 오른쪽 남자의 속은 텅 빈 통나무처럼 비어 있다. 이제 파여진 심장, 내장, 간은 모두 저 병에 담길 것이다. 그리고 곳곳에 팔려 나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 몸에 박힐 것이다.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와 웅성거림이 점점 더 크게 들렸다. 눈을 떠보니 나를 가리키며 미간을 찌푸리는 경찰이 보인다.

“어? 거기 계시면 안돼요. 나오세요!”

그가 어느새 다가와 내 팔을 거칠게 잡아 끌었다.

“아, 빨리 나와요. 일반인이 거기 들어가 계시면 어쩝니까?”

지금 나한테 짜증내는 건가? 이 사건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건 난데?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제가 범인을 알고 있습니다.”

미동도 없는 나에게 점점 높아지던 언성이 순간 뚝 그쳤다.

*   *   *

“아니 근데 그게 말이 되나? 그런 사람이 있냐고?”
“터무니 없는 말 이라 기엔 너무 자세하지 않아요? 저걸 저렇게 당당하게 말해?”
“아 몰라, 그래서 어쩌자고? 혹시 같은 패 아냐? 보상금 좀 뜯어보겠다고…”
“그럼 아무 거나 집어보고 어떤 건지 말해보라 할까요? 그거 좋네! 그럼 이걸로-“

방금 전, 벙쩌있는 경찰을 앞세워 인근 경찰서에 들어온 후, 지금까지 알아낸 것과 내가 갖고 있는 능력에 대해 모두 말했다. 그런데 어서 수사에 착수하지는 못할 망정, 내 앞에 모여서 잡담하기에 바쁘다.

 “지금 이럴 시간이 있습니까? 하루 빨리 범인을 잡아도 모자를 판에 이렇게 책상 앞에만 모여 있으면 어떡해요. 당장 몽타주라도 만들어서 뿌리던가, 뭘 좀 해봐야지.”

차분한 내 음성에도 아직도 나를 불신의 눈빛으로 바라보는 눈들이 만연하다. 심호흡을 한 번한 후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경찰들에게 말을 건넸다.

 “전 어렸을 적 강도로부터 아버지를 잃었습니다. 때문에 제 어머니와 형제들은 긴 시간 동안 많이 힘들어했고, 저 또한 극심한 우울증을 견디다 못해 가족들의 권유로 잠시나마 병원에 입원해 있기도 했습니다. 경찰관님, 남일 같지 않아서 그래요. 정 의심스러우시다면, 지금 당장 제 신원이라도 확인해보세요. 그리고 제가 아까부터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키 170이상, 나이 50대 중후반, 안경 쓰고 피부 까무잡잡하고 이름은 신승민, 의사. 제가 말한 사람이 범인이 맞건 아니건 일단 데려와서 물어 보기만이라도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벌써 첫 번째 사건이 있은 지 며칠이 지났어요, 온 국민이 불안에 떨고 있다고요”

미동 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길래 말이 좀 통하나 싶었더니만, 이렇게 말해도 경찰은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아무 증거도 없이 죄 없는 사람을 데려온다는 거 자체가-"
“반장님! 또 같은 살인 사건입니다! 그거, 모, 몸에 장기 없이요! 동작구 동작구!”

키보드 치는 소리만 가득했던 경찰서가 어느새 시장 통처럼 시끄러워졌다. 잠시 말이 없던 반장이 내 쪽을 바라보다, 한숨 한 번 내쉬곤 옆에 있던 동료에게 한 마디 건넸다.

 “방금 저 분이 말한 사람 설명 그대로, 신원 조회해봐.”
*   *   *

“범인이 순순히 범행을 자백했다고 하는 데요, 미리 알고 계셨던 겁니까?”
“어떻게 키와 인상착의와 이름까지도 정확하게 알 수 있었죠?”
“싸이코 매트리가 정말 있는 능력입니까?”
“앞으로도 수사에 협조할 생각이 있으십니까?”

사방에서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이 내 귀를 즐겁게 한다. 플래시가 곳곳에서 터진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다. 마이크가 더 이상 가까워 질 수 없을 것 같은 거리인데 자꾸만 다가온다.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침을 삼켰다. 모두가 숨죽이며 내 입을 주목한다.

“전 그저 국민 여러분들이 불안에 떨지 않게 하기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을 보탠 것뿐 입니다.”

플래시 소리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곳곳에서 아우성과 환호가 끊이질 않는다. 지금 내가 내뱉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 하나가 전국에 퍼지겠지. 모두가 보겠지. 어쩌면 전 세계가 볼 지도 몰라. 난 주목 받고 있어. 바로 이런 기분이다. 난 원래 이런 위치에 있을 사람이야!
*   *   *

 ‘-습니다. 전 오직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들의 안위를 위해 추악 범들을 계속 잡아낼 것을 맹세합니다. 앞으로도…’

-삑

“지랄하네…”

거칠게 리모컨을 집어 조용한 사무실을 시끄럽게 하던 TV를 꺼버렸다. 그 새끼의 목소리가 징그럽도록 내 귓가에서 맴돈다.

‘국민의 안위? 웃기고 있네.’

몇 달 전,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난 미꾸라지 한 마리가 지금 대한민국을 흐리고 있다. 말로는 자기가 무슨 대단한 능력이라도 있어서 사건을 해결하는 것처럼 경찰 행세를 하지만, 왠지 탐탁지가 않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 데, 검사 생활 10년이면 이제 사람 냄새만 맡아도 어디가 구린지 솔솔 감이 온다고, 내가. 얼마 전 자신에게 ‘싸이코 매트리’라는 능력이 있다고 말한 그 자식이 연쇄 살인 사건의 용의자를 지목하자, 그 용의자는 순순히 범행을 인정했다. 곧 그 일이 물결처럼 퍼져서 각종 언론사의 기자들이 법원 앞에서 진을 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때마다 그런 대접이 당연하다는 듯 뻔뻔한 미소를 지으면서 답지 않게 취재진의 안부나 묻는 모습이 치가 떨린다. 지가 국회의원이야 뭐야.

몇 주전부터 그 자식 집 앞으로 온갖 과일 박스들이 날라온다는 소문이 이 바닥에 파다하다. 그보다 중요한 건 겉치레일 뿐인 과일이 아니라, 그 밑에 신사임당이 몇 분이나 깔려있나지. 검사든 변호사든 거기에 한 푼이라도 안 보탠 사람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니 말 다했다. 어쨌거나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고 정의와 평등을 첫째로 삼아야 할 법원은 이제 그 권위를 잃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검사이고 피고인을 유죄를 모는 게 내 직업이어도, 판사까지 그 새끼 말을 믿는 건 뭔가 잘못됐다.

‘우리 이홍태씨께서 범인이라는데, 뭐 더 진행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런 것도 판사라고 국민들 세금 빼서 월급으로 주다니. 그렇다고 국민들이 비난을 하는가 하면 또 그렇지 만도 않다. 이미 세뇌를 당한건지, 홀린건지, 그는 벌써 수많은 젊은 층의 지지를 받고 있다. 우리의‘악을 처단할 대한민국의 새로운 히어로’님께선 인터넷에서도 추앙 받고 있고, 아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계시다.

가뜩이나 그것도 열 받는데 거기에 이상한 것도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분명 그 놈이 처음으로 잡은 범인은 자기가 한 게 맞다고 순순히 인정했는데, 그 뒤에 잡은 범인 놈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아니라고 발뺌한다. 어떤 사람은 억울하다고 울며불며 생난리도 치고, 누구는 절대 자기가 아니라며 재판장에서 아주 욕을 하고 별지랄을 다 떤다. 그래도 어쩌나, 이미 주위에선 뻔뻔하다고 욕먹고 인간의 탈은 쓴 짐승이라고 낙인 찍혀버렸는데. 이홍태가 찍으면 범인이고, 그의 의견에 반하는 자도 곧 범인이다. 생각할수록 짜증이 나 한 손에 잡고 돌리던 펜을 콱, 종이에 내동댕이쳤다. 순간 조용한 방에 전화기에서 비서의 말이 울렸다.

‘민경철 검사님, 한지후 검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아, 들어오라고 하세요. 커피 두 잔 부탁해요.”
“전 커피 말고 녹차요!”

전화에 대고 말하자마자 혼자 있던 사무실에 갑자기 난 사람 소리에 놀라 고개 들었더니,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들어온 한지후가 녹차를 외치며 털썩 소파 위에 드러누웠다.

“야 새끼야 일어나!”
“어우 나 저번 강남역 살인 사건 때문에 한 숨도 못 잤어… 잠 와 죽겠네.”

쿠션까지 집어서 얼굴 밑에 들이밀며 아예 숙면을 취할 것 같은 모습에 쿠션을 확 잡아뻈다.

“일어나서 얘기나 좀 해봐 임마. 저번에 부탁한 거 말이야.”
“아 그거? 너무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티 일 얘기 밖에 안허고.”

아직도 완전히 사투리끼를 벗지 못한 친구의 어색한 서울말이 절로 웃음 돋게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로 낄낄거릴 때가 아니다.

“어때? 뭐 좀 나와?”
“내가 뭐 시간이 남아돌아서 갸 뒷조사까지 한 건 아니고, 싸이코 매... 매추리? 그런 능력이 있긴 있나보더라.”
“그런 게 있다고? 말도 안돼. 누가?”
“마, 내가 그런 것까지 알아봐 줘야 하나? 잘은 모르겠고, 물건에 손을 대면 그 물건에 남아있는 기억을 읽어 내는 거래. 네이버 언니야한테 물어봐라 다 나온다. 아, 그리고 하나 비슷한 일은 있었는데.”
“뭔데?”
“별건 아니고, 1900년대에 미국에서 한 점쟁이가 있었는데 그 여자도 싸이코 매추리 그거였다고 하더라. 근디-”

‘똑똑’

비서가 들어오는 바람에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끊겼다. 우리 둘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두 잔이 놓여지고 다시 조용해지길 기다린 후, 한지후에게 추긍했다.

“근데 뭐?”
“아니 난 분명 녹차 달라고 했는데 커피를 갖고와삐맀네. 아씨 나 다이어트하는데 다 망했다.”

이 자식이 커피잔을 보면서 투덜대는 바람에 없던 인내심이 더 바닥났다.

“근데 다음에 뭐, 말을 해 새끼야!”
“어이구 왜 화를 내고 그래! 자자 들어봐. 1900년대 미국에서-“
“-한 점쟁이가 있었는데 그 여자도 싸이코 매트리였다고, 응. 근데 그 뒤에 뭐?”
“그 때도 살인사건이 있었는데 그 여자가 범인이 트럭 운전수라고 했다드라. 똑같이 남겨진 물건을 만지고 나서. 이름까지 맞췄대. 그 사람이 범인이 맞았고. 근데! 그 뒤에 어떤 쇼 프로그램에 나갔는데, 거기서 그 여자가 사기친 게 다 드러난거지.”

역시 사기겠지. 그딴 능력이 있을 리가 없잖아. 가만, 들통났다고? 그러면 이번에도 혹시…

“어떻게 밝혀졌는데?
“그게 또 웃기다. 암만 생각해도 그거 밖에 없는데.”

점점 들을 수록 계획이 머릿속에서 선명해졌다. 좋아, 정말 단순하고 확실한 방법이잖아? 벌써부터 그 자식이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하는 모습이 눈 앞에서 선하다. 당장 시작해야겠는데?

“야, 나 그 사기꾼 고소할거다.”

여전히 녹차가 아니라고 툴툴대며 커피를 홀짝거리던 치후가 내 말에 놀라 입이 저절로 벌어진 덕에 커피 한 줄기가 입가에서 떨어졌다.

“아으 디러! 야, 뭐라고? 너 지금 제정신이야? 어? 니 그러다 길에서 돌 맞아 임마!”
“나도 다 생각이 있어. 우선, 그 자식 집부터 찾아갈 거야. 가서 그 괴상한 능력이 사기라는 증거를 가져와야지.”
“얼씨구야. 니가 찾아가면, 어이쿠 검사님 오셨습니까, 예, 제가 바로 사기꾼입니다, 증거 받아가십쇼 헤헤. 잘도 그러겄다. 아서라, 대낮에 아침 드라마 찍지 말고 손떼.”
“잘 들어봐. 이거면 그 자식 빼도 박도 못하고 사기죄 인정해야 된다니까?”

*   *   *

재판장 안에 콩나물처럼 뺵뺵히 앉아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 누구도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좌석엔 카메라만 만지작거리는 기자들로 가득 찼다. 판사는 코 끝에 걸친 안경을 올리며 미간을 찌푸리고, 서기는 손 끝에 배여 나온 땀을 연신 닦아내며 참을성 있게 다음 말을 기다린다.

폭염 주의보가 내린 날이지만 망가진 에어컨 탓에 오래된 선풍기가 힘없이 돌아갈 뿐이다. 왼쪽 자리엔 턱까지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내며 마른 입술만 연거푸 핥는 배심원들이 있다. 그 중에서 더러 몇 명은 언제 자리를 박차고 나갈까,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리고 이 지루한 공간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두 사람, 검사 민경철과 피고인 이홍태.

탁상 위에 따분한 듯 늘어져 앉은 이홍태 앞에, 검사는 상기된 얼굴로 장 내를 둘러본다. 분위기가 텁텁한 침묵으로 가라앉자,드디어 검사는 입을 열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여러분. 저는 어제 피고인 이홍태를 사기죄로 고소했습니다. 피고인은 현재 있지도 않은 능력을 진짜처럼 속여 결백한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감옥으로 보내는 등, 나아가 무고한 목숨까지 잃게 하고 있습니다.”

힘있는 검사의 목소리에 이홍태 곁에 앉아있던 그의 변호사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다가 몸을 숙여 이홍태 귀에 뭐라 속삭였다. 그들에게 눈길 한 번 주고 검사는 말을 이어 나갔다.

“지난 2016년 2월 17일, 피고인 이홍태는 미궁 속에 빠져있던 서울 세제 공장 살인 사건의 범인 조영훈을 검거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추리였지.”

그의 말을 들으며 그 순간을 회상하기라도 하는 듯, 이홍태가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이후에도 2016년 3월 2일 묻지마 폭행의 범인을 잡았고,”
“아주 악질인 놈이었는데.”
“그 달 3월 16일 부산 납치 사건의 범인 또한 검거,”
“그 새낀 어찌나 뻔뻔하던지,”
“그리고 4월 7일 종로 살인…”
“아주 울고 불고 난리 쳤었지.”
“피고인!”

인내심이 없어진 검사가 들고 있던 종이를 구겼다. 자신을 노려보는 검사의 눈과 마주치자, 이홍태는 어깨를 으쓱하며 눈을 돌렸다.

“아무튼, 그 이후에도 피고인은 수많은 사건을 해결해왔습니다. 아니, 해결 했다고 믿게 했습니다. 피고인 이홍태는 자신에게 사물의 기억을 꿰뚫어보는 일명 ‘싸이코 매트리’라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그 동안 해결한 수많은 범죄는 바로 그 능력 덕분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판사님, 지금 검사 측은 아까부터 본론과는 상관없는 말들로 시간을 끌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재판 진행은 불필요합니다.”

이홍태의 따분한 표정을 불안하게 지켜보던 변호사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판사에게 말했고, 이에 검사가 받아 쳤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제부터가 진짜입니다. 피고인을 심문할 기회를 주세요.”

판사는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배심원 중 한 여자의 번진 눈 화장이 시간이 꽤 경과했음을 알려주었다. 다리를 떨며 유난히 초조해 보이는 한 남자는 재판이 예상보다 길어져서 인가. 앞다투어 몰려왔던 기자들도, 더 이상 재판 내용을 메모하지 않았다.모두가 지치고 따분하다.

“…심문하세요.”
“그럼 피고인 심문,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저번 주 금요일, 그러니까 6월 3일 피고인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때 제가 왜 찾아갔었는지 기억나시나요?”

“뭐, 범죄에 사용된 흉기라면서 칼과 손수건 같은 걸 들고 오셨었죠. 수사에 도움을 요청하시면서요. 그래서 제가 도와드렸잖습니까. 그 대가가 저를 사기범으로 몰고 가는 것이라니. 매우 불쾌합니다.”

“피고인은 묻는 말에만 대답하세요. 재판장님, 제가 당시 피고인에게 건넸던 주방용 칼과 손수건을 증거로 제출합니다.”

검사는 증거물들을 각각 비닐 팩에 담아 판사에게 건넸다. 서기도 자판을 오가던 손을 잠시 멈추고 궁금한 듯 판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장미 꽃이 화려하게 수놓아진 부엌칼은 이 무거운 재판장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피고인은 제가 범죄에 쓰인 흉기들을 내밀자 그것에 손을 대고, 당시 범죄현장과 범인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묘사해주셨습니다. 물론, 이 사건들은 언론에도 공개되지 않았던 사건들이었죠.”

잠잠히 듣고 있던 변호사가 감탄 어린 눈빛으로 자신의 의뢰인을 바라보았다. 검사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말을 이어갔다.

“피고인, 피고인은 본인이 저 주방용 칼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저 칼은… 아, 골목길에서 발생한 사건이었을 겁니다. 범인은 백수였고, 사회인들에게 큰 반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밤 11시쯤,지나가던 성인 한 명을 두 차례 찔렀죠.”

순식간에 장 내의 모든 사람들은 경이로운 눈빛으로 이홍태를 바라보았다. 민경철 검사 역시,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떡였다.이어 손수건에 대해서도 물었다.

“아, 저건 확실히 기억납니다. 자신과의 이별을 택한 전 여자친구에 대한 복수극이었죠. 겨울 어느 날 전 여자친구의 집 앞에서 그를 기다리다가, 손수건에 마비제를 묻혀 입을 막고 장소를 옮겨 살해했습니다. 참 세상에 웃긴 놈들 많아요. 안 그런가요, 검사님?”

검사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마치 ‘그 웃긴 놈이 너야’ 라고 말하는 듯했다. 입술을 잘근 깨물고 민경철은 판사를 돌아보았다. 판사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 칼은 전주에서 일어난 한 살인 사건에 이용된 주방용 칼입니다. 이 사건은 어떤 언론에서도 보도 된 적은 없지만, 아마 판사님은 기억하실 겁니다. 불과 며칠 전에 일어난 일이고, 바로 판사님이 그 재판 현장에 계셨으니까요. 그리고 피해자를 살해한 범인은…”
 “…40대 주부였지. 남편의 폭력을 참지 못한 우발적인 살인.”

 판사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검사의 말을 끝냈다.

“그렇습니다. 이상하네요. 피고인은 분명 백수인 범인이 골목길에서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는데 말입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홍태의 능력을 우러러보던 사람들은 이제 충격으로 서로 눈치 보기에 바빴고, 변호사까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듯 자신의 의뢰인을 슬쩍 살펴보았다.

“손수건 역시 그렇습니다. 이 손수건은 사실 제 애인의 생일 선물로 저번 주에 백화점에서 산 것입니다. 전여자친구에 대한 한 남자의 처절한 복수극이요? 하하, 전 그런 무서운 짓 못합니다!”

검사는 재미있다는 듯 짧은 웃음소리를 뱉었지만, 사람들은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는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기에 바빴다. 작은 웅성거림이 물결처럼 배심원들 사이에 퍼져나갔고, 드디어 기자들은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빈 노트에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텁텁한 공기 대신 긴장된 분위기가 실내를 에워쌌다.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던 이홍태의 얼굴에서 미소가 점점 사라져갈 때쯤 검사는 마지막 말을 이어갔다.

“세상엔 절대 없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공짜, 정답, 그리고 비밀. 피고인은 지난 수개월 간 무고한 사람들을 범죄의 가해자로 몰아 희생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언론을 선동하여 여론을 들끓게 했습니다. 현재 우리는 극심한 여론 물타기로 골머리를 썩고 있습니다. 누가 진정한 범인인지, 좀 더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상입니다.”

검사는 느긋하게 자리로 돌아갔다.

검사의 말이 끝나자 번쩍 정신이 든 변호사는 반론을 위해 허둥지둥 일어났지만 그의 손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수북이 쌓인 종이와 서류들 사이에서 방황했다.

“아… 그러니까, 제 생각엔…”

몇 가지 파일이 맥 없이 땅으로 떨어졌다. 우물쭈물하며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자신의 변호사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홍태가 천천히 일어나 떨어진 파일들을 모아 변호사에게 건넸다.

“많이 긴장하셨나 봐요, 변호사님. 전 괜찮습니다. 그땐 제가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서 제 능력이 제값을 잘 못 한 겁니다. 괜찮아요, 가끔 있는 일이에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는 이홍태를 보며, 변호사의 얼굴은 다시 밝아졌다.

“아, 역시 그렇군요. 맞습니다. 피고인은 검사 측이 찾아왔던 날, 하루 내내 진행된 재판에 굉장히 피곤했을 겁니다. 따라서 그의 능력에 약간의 착오가 있었던 것뿐입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재판장님.”

자신감을 되찾은 변호사의 목소리에 검사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약간의 착오가 있었다고요? 문제가 없다고요? 그렇다면 그런 확실치도 않은 능력 따위로 이제껏 사람 인생을 가지고 장난쳤다는 겁니까? 이건 확실히 문제가 있습니다, 재판장님!”
“어쨌든 그 동안의 진범은 틀림없이 잡았습니다 검사님.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범인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변호인!”

흥분한 검사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던 이홍태는 무언가 반박하려던 변호사를 한 손으로 제지시키곤,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모든 이목은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 또한 없었죠. 그리고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경찰들이 동분서주 할 때, 전 이 손만으로 모든 사건을 해결시켰습니다. 그리고, 제가 활약했던 첫 번째 사건 기억하십니까?”

찬찬히 주위를 둘러본 이홍태는 의기양양하게 이어 말했다.

“한 공장에서 일어난 인신매매 사건이었죠. 당시 저는 범인의 직업뿐만이 아니라 이름까지도 맞췄었습니다. 게다가 그 범인은 용의자로 지목 당한 후 순순히 자백까지 했었고요. 네, 바로 저의 이 대단한-“

이홍태가 무언가 더 말하기도 전에, 검사는 듣기도 싫다는 듯 그의 말을 잘랐다.

“하지만 그 뒤로는요? 그 뒤에 유죄로 선고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며 끝까지 범행을 부인했습니다. 누구 한 명 인정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본래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은 끝까지 자신이 짐승인지 모릅니다. 누구도 그 상황에서 맞습니다, 제가 범인입니다, 제발 감옥에 가두어주세요, 이렇게 말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순식간에 검사와 변호사의 대화는, 검사와 피고인의 신경전으로 불꽃이 튀었다. 장 내에 모든 사람들은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배심원들 중 누구도 유난히 식은 땀을 흘리며 다리를 떠는 한 사람을 알아채지 못했다. 보다 못한 재판장은 잠시 10분간 휴정을 선언했다.

재판장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제각기 모여 방금 본 충격적인 상황에 대해 논의 하느라 여념이 없을 때, 검사는 한숨을 쉬며 그들 사이를 지나 복도의 자판기 앞으로 가 발길을 멈췄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막 동전을 집으려던 순간, 뒤에서 초조하게 서성거리던 한 남자가 이내 결심한 듯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어… 안녕하세요 민경철 검사님.”

땀이 차있는 손을 연신 셔츠에 문지르며 남자는 긴장한 듯 검사를 바라보았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남자의 말을 집중해서 들으며 가끔 고개를 끄덕이던 검사는, 대화가 끝나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재판, 재개하겠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증인을 요청합니다.”

판사가 허락하자 배심원들 중 한 남성이 천천히 일어났다. 재판 진행 중 내내 유난히 초조해 보이며 연신 다리를 떨던, 그 사람이었다.

“야… 양심에 따라 숨김과 보탬이 없이 사… 사실 그대로 말하고 만일 거짓말이 있으면 우… 아니 위증의 벌을 받기로 맹…세합니다”

연신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떨리는 목소리로 증인 선서 낭독을 마친 남자는 증인석에 앉아 이홍태의 눈치를 보았다. 검사는 다독이는 눈길로 증인을 바라보다 곧 그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증인, 본인 소개를 해주세요.”
“…저는 새돌 정신병원에 원장으로 있는 이문식 원장입니다.”
“이 자리엔 어떻게 오시게 되었습니까?”
“저는… 지금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이홍태씨를 몇 년 전에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에 대해… 할 말이 있어서..”

자신의 눈치를 보며 말을 더듬는 원장을 한참 동안이나 빤히 쳐다보던 이홍태는, 갑자기 동공이 커지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지금 정신병원 원장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당장 안 끌어내? 여길 정신병원으로 만들 셈이야?”
“피고인 진정하세요! 증인, 괜찮으니까 계속 하세요.”

단호한 판사의 말에 힘입어, 증인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몇 년 전, 이홍태씨는 주위 가족의 권유로 저희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이홍태 씨는 아주 극심한…”

자신을 노려보는 이홍태의 눈에 증인이 더는 말을 잇지 못하자, 검사는 그를 격려하며 문장을 끝낼 것을 권유했다. 재판장 안에 모인 사람들도 손에 땀을 쥔 채 표정으로 증인을 재촉했다.

“….아주 극심한, 과대망상증 환자였죠.”

곳곳에서 경악에 찬 탄식이 터졌고 사방에서 말소리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점점 얼굴이 불처럼 타오르던 피고인 이홍태는, 증인을 삿대질하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판사에게 요구했다.

“판사, 지금 저 정신병자가 미친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고! 어서 끌어내! 당장!”
“아니요, 전 거짓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 당시 이홍태 씨가 입원해 있었다는 기록지입니다. 입원증도 있습니다.”

검사가 받아서 재판장에게 건넸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찬찬히 종이를 훑어보던 판사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피고인 이홍태가 맞습니다.”

장 내는 제어가 안될 정도로 소란스러워졌고, 기자들 또한 이 장면을 카메라에 담을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며 손에 불이 나게 노트에 글씨를 휘갈겼다. 재판은 점점 열기를 더해가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더위를 잊은 지 오래였다.

“전 처음 이홍태 씨가 뉴스에 나왔을 땐 믿지 못했습니다. 여론이 그를 신 모시듯 받들었을 때도요. 설마 내가 알던 그 환자겠어?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홍태씨의 인터뷰 화면을 보고 저 사람인 것을 확신했습니다. 당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보다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으니까요. 말투나 행동, 사소한 제스처까지도 말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이었는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홍태씨는 유난히 주위로부터 주목과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했습니다. 카메라 앞에서 하는 행동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죠. 자신을 향하고 있던 눈이 다른 곳을 향하는 걸 견디질 못하는 분입니다.”

이홍태는 앞에 놓인 종이 더미를 한 손으로 세게 움켜쥐다 못해 종이가 너덜 너덜 해질 정도로 헤집었다.

 “증인은 이제 자리로 돌아가 주시길 바랍니다.”

판사의 말에 안도한 원장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이홍태를 슬쩍 보며 그의 앞을 지나가려던 순간,

“피고인!”

이홍태는 의자가 뒤로 넘어질 만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우악스럽게 원장의 멱살을 잡았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탄성을 질러댔다. 이홍태는 소리쳤다.

 “이 망할 새끼들, 다 한 패지? 다 같이 짜고 치고, 웃기지마, 온 나라 사람들이 내 편이야. 저 위에 있는 새끼들도 다 나한테 굽실댄다고!”

“피고인! 당장 놓으세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배심원들은 동요하고 기자들은 펜을 노트에서 떼고 침을 삼키며 지켜봤다. 판사는 단상 뒤에서 의사봉만 쳐댔다. 원장은 어떻게든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검사는 달려와 이홍태의 팔과 어깨를 잡고 피고인석 책상으로 그의 상체를 눌렀다. 이홍태는 힘겹게 변호사를 불러보았지만, 변호사는 사색이 된 채 저 구석으로 달려가 현장에서 없어진 지 오래였다. 문을 지키고 있던 경찰 두 명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들 사이를 헤쳐나가 재빨리 이홍태의 두 팔을 잡아 재판장의 뒷문으로 향했다. 거칠게 저항하는 소리가 저 멀리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니네가 나한테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거기 안에 있던 놈들 내가 다 똑똑히 기억해. 지금 내 밑에 돈 갖다 바치는 개새끼들이 얼마나 많은데? 내 말 한 마디면 너네 싹 다 없애 버릴 수 있어! 죽여버릴거야!”

분노와 광기로 가득찬 이홍태의 고함 소리는 복도에서 울려 쉽게 사람들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   *   *
 
날씨 참 좋다!

저번 주 사기꾼 이홍태를 고소하고 당당하게 승리를 거머쥔 나는, 오랜만에 보는 하늘을 보며 한껏 의기양양해 있었다. 기자들은 어찌나 빨리 자판을 쳐댔는지, 재판이 끝난 지 10분도 채 안 돼서 이미 상황은 내 기억보다도 더 세세하게 보도가 되어 전국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유죄 판결이 나기도 전에 재판장에서 끌려 나가며 처량하게 울부짖던 그 모습이란. 정말 웃음 없인 못 볼 광경이었다.
 
“이홍태 씨, 면회 왔습니다.”

잠시 손톱을 보며 잘라야 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옆에 서있던 감시원의 목소리와 함께 유리창 너머로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어휴, 이홍태씨 많이 수척해지셨네.

“오랜만입니다?”
“…”
“여기 밥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아, 원랜 더 비싼 밥 드셨을 텐데. 입맛에 안 맞으려나?”
“…왜 오신 겁니까.”
“얘기나 좀 들어보려고요.”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대하던 이홍태가 내 대답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에이, 사기 치면서 잘 살고 있었던 사람 하루 아침에 빵에 가둬놓으니까 마음이 편하질 않아서요. 뭐 싸이코 매추리같은 말도 안 되는 능력이 없다는 건 아니까, 왜 그랬는지 편하게 얘기해보세요.”

너무 비꼬았나? 그래도 정신병 환자 한 명 내가 이야기 들어주겠다는데, 불쌍한 죄수 한 명의 속, 내가 시원하게 풀어주겠다는데. 침묵 속에 시간은 흘러가고, 이홍태는 더 이상 입을 열 기미가 없어 보이자 거절 의사로 알아듣고 나가려 했다. 그런데 의자를 밀고 일어서려는 순간.

“9살 때, 제 아버지는 밤길에 들이닥친 강도 한 놈한테 살해당했습니다.”

처음으로 운을 뗀 말치곤 꽤 어두운 이야기였다. 살며시 다시 자리에 앉는 나를 개의치 않고 그는 다시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버지께서 돌아 가신 뒤에 집안 곳곳에 빨간 딱지가 붙기 시작하고, 빚은 점점 이자를 더해 불어났습니다. 분명 전 없는 살림에 큰 눈엣가시였을 겁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거실에 있던 어머니와 삼촌을 본 그 날이, 제가 기억하는 제 어릴 적 집의 마지막 모습이니까요.”

마지막…?

“검사님.”

살짝 입가를 올리고 나를 마주보는 시선에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저는 10살에, 어머니로부터 정신 병원에 강제 입원 당했습니다.”

유난히 시계바늘 소리가 크게 들린다.

“뭐, 그 당시엔 재산 상속이나 보험금 때문에 가족이나 친족을 강제 입원시키는 일이 많았었죠.

전 무서웠습니다. 멀거니 앉아 허공을 바라보며 침을 흘리는 사람들, 인형을 들고 구석에 서서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고작 초등학생인 아이가 감당 할 수 없는 스트레스였습니다. 매일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나에게 관심을 가질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 여길 나갈까…

우연히 병원 휴게실 책장에 너덜너덜해진 초능력에 관한 만화책을 읽고 이거다 싶었습니다. 무슨 짓을 해서든지, 의사건 간호사건 환자건 모두 절 알아주길 바랬죠. 인정해주길요. 그러면 어머니가 찾아와서, 얘, 몰라봐서 미안하다, 이제라도 나와 나가자라고 말해줄 것 같았어요.”

믿어달라는 듯이 이홍태의 눈이 유리창에 나 있는 구멍들을 향해 점점 더 가까워져 왔다. 난 나무 말 없이 그저 옷 소매만 만지작거렸다.

“사실 전 아직도 저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걸 인정 못하겠어요. 여전히 손끝이 닿으면 환영이 보이고, 손을 대면 이미지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데…”

이야기가 끝난 것인지, 가만히 자신의 두 손을 들여다보던 그가 툭, 탁자에 팔을 떨어뜨린다.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감시원의 면회가 끝났다는 한 마디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었나.

“하나만 묻겠습니다. 그러면… 처음 그 공장에서 범인을 잡았을 땐, 어떻게 정확하게 짚어냈죠? 이름부터 체격, 직업까지.”

그는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곧 외투 품속에서 낡은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오랫동안 지니고 다녔는지, 테두리엔 손때가 묻고 카드 속 증명사진은 빛이 바랬다. 이 사람은…!

[원장 신승민- 대한 세브란스 병원]

 “두 번째 범행이 일어났던 다음 날, 사건 현장에서 주운 카드입니다. 단 한 번도 제 손에서 떨어진 적이 없어요. 제게 모든걸 준 물건이니까요. 전 이제 필요 없습니다. 가져가세요.”
 
건물에서 나와 오독거리는 자갈길을 천천히 걸었다. 오랜만에 본 하늘은 아까와는 좀 다른 빛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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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당선작 심사평


  제19차 <창작콘테스트> 동상은 소설부문 김지은 씨의「행방(行方)을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소설가 김영찬 / 소설가 김충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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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당선자들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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