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콘테스트> 제28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by korean posted Apr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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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콘테스트> 제28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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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 한국인]이 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고자 분발하는 젊은 영혼들의 순수 문학 창작의욕을 북돋기 위해 기획한 <창작콘테스트>가 제28차 당선자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월간문학 한국인]<창작콘테스트>는 작가로서의 무궁한 필력이나 완벽한 전문성을 하나하나 따져 시상하는 그런 대단한 문학상이 아니다. 오로지 전문작가가 되기만을 꿈꾸어온 예비작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다소 흠결이 있더라도 치열한 작가정신과 독특하고도 개성있는 표현,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따져 우열을 가릴 뿐이다. 따라서 설혹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 가능성을 보아 당선작을 뽑을 뿐임으로 문학상으로서의 권위를 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할 것이다.
  이번 공모 역시 형식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응모한 작품이 상당수였다. 또한 모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을 터이고 나름의 재능을 발휘하였다고 보여지지만, 상당수의 작품들은 여전히 진부한 낱말들의 사용과 구태의연한 표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점이 아쉽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그간 겪어온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에 의해 산고를 겪듯, 그 누구도 쓰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문체와 어법, 시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이번 <창작콘테스트> 제28차 공모에 참여해주신 작가 여러분들, 그리고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 창작을 자신의 운명으로 택하려하는 모든 분들께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기원하며 각별한 감사와 격려의 뜻을 전한다.








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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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부문



사우나와 옥상
남원정



프롤로그

오늘도 밤샘이다. 나는 담배를 비벼끄고 환기를 위해 창을 살짝 열었다. 도시의 매캐한 매연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밤의 찬 공기가 훅하고 밀려 왔다. 나는 카디건의 앞섶을 살짝 풀어헤치고, 허리끈의 고리를 푼 뒤, 긴 한숨을 내뱉으며, 푸근하기 이를 데 없는 의자에 길게 몸을 뉘었다. 어찌 보면 이곳은 이제 집보다 더 편한 공간이 되었다. 지난 2년간, 하루 대부분, 내 몸이 속한 공간이 된 것이다. 3평 남짓한 곳. 대형 빌딩 사이 난쟁이처럼 끼어, 하루 2시간도 안 되는 채광이 마치 꽁지깃처럼 삐죽이 나왔다 사라지는 곳. 나는 이곳에서 30촉도 되지 않는 노란 백열등과 모니터 불빛에 의지한 채 대부분 업무를 수행한다.

<너구리 소굴>. 처음 직원들 사이에 불렀던 내 방의 별칭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뽀얀 담배 연기가 가득했다. 여직원들의 기피 대상 1호 방. 심지어 어떤 직원은 문만 빼꼼히 연 채 메시지만 전달하고 황급히 사라졌다. 대화를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최상의 안식처다. 나만의 궁전. 나는 여기서 자거나 일하거나 생각하거나 읽는다. 읽는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송 팀장과 가까워지면서 얻게 된 습관이다. 그녀는 외국 소설, 특히 일본 소설 마니아다. 그녀는 깔끔한 블라우스에 어중간한 길이의 치마를 즐겨 입고 나타나, 짧은 키스와 소설책 한 권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녀가 내게 내민 첫 소설은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였다. 밤새워 그녀와 여관방에서 뒹군 다음 날이다.

“우선 짧은 것부터 시작하시죠.” 붉은 색채의 루주를 입술 경계가 모호하게 덧칠한 그녀는, 실핏줄이 선연한 안구에 식염수를 떨어뜨리며, 책을 두고 갔다. 그날 아침 나는 파리하게 지쳐있었다. 그녀의 끝없는 욕구에 비루한 열등감으로 대응한 나는, 그녀의 품속에서 어떻게 잠들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회사에 출근했는지, 온통 머릿속은 분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진창에 빠진 딱정벌레처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욕망은 공평한지도 모르겠다. 과도한 쾌락 뒤엔 그만큼의 고통이 찾아오니 말이다. 그리고 그 속엔 배우자를 배신한 양심의 고통도 포함된다.

서른 중반인 그녀는 여전히 미혼이고, 자유분방하고, 앞으로도 결혼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향기를 몸 구석구석에 스민 채, 요란하고 기이하게 – 섹스 후 독서라니 – 나를 방문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양심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육체의 욕망에 비교해 턱없이 물큰하다.

나는 책을 가지고 빌딩 지하의 사우나로 내려갔다. 첫 장을 읽기 전에 잠들었고 깨어 보니 밤이었다. 휴대전화엔 5통의 전화가 왔고 모두 개발팀에서였다. 2시 팀장 회의를 건너뛰었으니 당연하다. 나는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짊어 진듯한 표정을 하고, 쥐새끼처럼 내 사무실로 숨어 들어갔다. 그리고 개발팀의 분위기를 조심스레 살폈다. 다행히 잠잠해 보였다.

나는 크게 한숨을 쉬고 내 자리로 돌아가 자정까지 프로그램 코딩 작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자정이 지난 뒤 나는 깨달았다. 그녀의 첫 선물을 사우나에 두고 온 사실을. 나는 다시 내려갈까 하고 생각을 하다 그만뒀다. ‘그따위의 책. 없어지면 다시 사면 될 일.’ 그리고 일주일 뒤 그녀가 두 번째 책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 -을 가지고 너구리 소굴을 방문하였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동안 사우나에 두고 온 책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책을 돌려받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책의 유무뿐만 아니라 내용도 묻지 않았다. 키스가 끝나고 그녀가 돌아가자마자 나는 잽싸게 지하로 내려갔다. 하지만 책은 돌려받지 못했다. 물론 책을 사지도 않았다. 결국, 나는 책 내용을 모른다.


1.

아내에게 간단하게 전화로 야근을 알렸다. 그녀의 반응은 더 간단하다.

“응.”

늘 있는 일이라 서로가 개의치 않는다. 대략 일주일에 절반쯤은 회사에서 아침을 맞는 것 같다. 특히 요즈음 같이 대형 프로젝트의 마무리 시점이 되면 날을 새는 빈도는 잦아진다. 곳곳에 버그들이 넘쳐나고 PM(프로젝트 매니저)의 신경질은 날로 거세지고 프로그래머들의 맥주 캔에는 담배꽁초가 수도 없이 채워진다. 바야흐로 고객과 물고 물리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하나라도 더 트집을 잡아 페널티를 물리려는 측과 하나라도 더 숨겨 교묘히 빠져나가려는 측의 숨 막히는 시간 전쟁.

항상 개발 시간에 쫓겨 다니는 나로선 그저 묵묵히 책상에 앉아 PC 모니터에 다양한 색상으로 펼쳐진,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코딩들을 쳐다보기만 한다. 항상 볼 때마다, 나는 형형색색의 실들이 둥글게 뭉쳐진 실타래를 생각한다. 처음엔 그저 혼란스럽고 막막하다. 하지만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각 실의 끝이 보인다. 그러면 그 끝을 잡고 끈기 있게 살살 잡아당기면 된다. 아무리 시간에 쫓기더라도 조급하게 확 잡아당기면 안 된다. 맹세하건대 절대로 풀리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 바라보아야만 한다. 그러면 버그가 내 앞에 나타난다. 누가 애초에 명명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버그>라는 용어는 참 적절하다. 가만히 누워 천장을 보고 있으면 벌레가 기어 나온다.

어릴 적 내 방이 그랬다. 낡은 시장 아파트 3층. 저녁이면 향긋한 꼼장어 타는 냄새가 1층 식당에서 솔솔 올라왔고 여름이면 시장 한쪽 구석진 곳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쓰레기더미에서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 벌레들에게는 그야말로 천국인 셈이다. 오히려 우리 집에 터를 잡은 바퀴벌레가 불쌍해 보였다. 왜냐하면, 우리 집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변덕스럽고, 쓸데없이 깔끔하기까지 한 누나는, 집안 어디에서든, 언제던 비명을 질렀고 그러면 나는 어떤 자세로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총알같이 달려가 바퀴벌레를 잡아야 했다.

벌레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어릴 적 나는 수수깡처럼 비쩍 말라 민첩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게다가 학습능력도 뛰어났다. 나의 눈에 띈 바퀴벌레는 대부분 그날로 삶을 마감해야 했다. 그러니 우리 집에서 벌레들의 삶은 하루하루가 생사를 오가는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인간처럼, 불행하게도 어제를 기억한다면, 그들의 하루는 침울하고 내일은 서글픔으로 가득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버그와 악연을 맺었고 그 맺음은 사십을 훌쩍 넘긴 나이가 되었는데도 여전하다. 그리고 변함없이 민첩하게 버그를 잘 잡아낸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긴장과 스트레스는 이제 내가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늙을수록 그 강도는 더 세지고 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하긴 뭐 내가 내 발로 찾아서 한 것이니 누구에게 원망도 못 하는 것이다. 부모님 말씀대로,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나와 대기업 연구소에 자랑스럽게 들어갔다. 그리고 이듬해 좋은 짝 만나 장가도 가고 자식도 둘이나 두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이 순풍에 돛단 듯 술술 풀리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광명을 상쇄할 불경한 운명이, 저 멀리 미국 국방성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인간 삶의 패턴을 바꿔버린 통신 프로토콜. 인터넷이라는 녀석 말이다.

나는 운 나쁘게도 인터넷을 너무 일찍 만났다. 내 인생의 봄날이 그때부터 저물기 시작하였다. 서른 중반이었다.


2.

좀 더 정확히, 나는 웹 프로그래밍에 빠진 것이다. 재미있었다. 아주 아주 재미가 있었다. 나는 퇴근과 동시에 저녁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며, 이제 막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웹에 감탄과 찬사를 보내며 학습하기 시작하였다.

웹에 빠져들수록, 당연하게도 수면시간이 줄어들었다. 어떤 날은 꼴딱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런 날이 늘어났다. 그러자 회사 생활이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꾸벅꾸벅 졸고 시간과 계획에 따라 정교하게 돌아가는 실험을 망치기 일쑤였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연구소가 이제는 끔찍하게 싫어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황폐한 이런 상태로는 몇 달은커녕 며칠도 버티기가 힘들었다. 아내를 설득하고 적금을 깨고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그리고 미리 봐둔 인터넷 전문가 과정에 등록했다. 주위의 걱정 섞인 시선이 돌아왔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미래는 인터넷 세상이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학원을 수료했지만 갈 곳은 없었다. 하긴, 아무리 인터넷 초창기라지만, 학원에서 고작 6개월 배운 비전공 초짜를 받아 줄 회사는 없었다. 경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떻게 경력을 쌓는단 말인가?

다행히 학원 수료생 중엔 나와 비슷한 처지가 많았다. 미래를 예감하고 뛰어들었지만, 막상 현실이 받쳐주지 않는 상황. 그래서 우리는 취업 대신 창업을 선택했다.

모두 10명의 갈 곳 없는 학원 수료생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자본금을 마련하고, 시내 외곽의 허름한 사무실을 빌려 회사를 차렸다. 직급은 나이순대로 정하였다. 최고 연장자는 대표이사, 가장 어린 사람은 대리가 되었다. 딱 중간인 나는 과장이 되었다. 명함도 파고 회사 차도 빌렸다. 사명도 짓고 명판도 입구에 달았다.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이제 우리는 인터넷 전문회사답게 당사 홈페이지를 정성을 다해 만들기 시작했다. 회사의 얼굴이자 사업의 기반이므로 회사원 모두 똘똘 뭉쳐서 늦은 밤까지 최선을 다했다. 웹 프로그래밍기술이 남들보다 앞섰던 나는 게시판과 방명록을 담당했다. 그렇게 나의 프로그래밍 경력이 시작되었다.

2년을 창립 멤버들과 함께했다. 그동안 수많은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겪었다. 처음 일 년은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그럭저럭 버텼다. 2년째로 접어들자 인터넷 붐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각 업체가 앞다투어 홈페이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초창기라 가격도 정해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때그때 회사 규모에 맞추어 받아들일 만한 가격을 제시했다. 제법 수주가 늘어났다. 직원도 20명으로 늘어났다. 나는 개발 팀장이 되었고 10명의 웹 개발자를 관리했다. 근무시간이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하지만 그런대로 행복했다. 예전보다 턱도 없이 작은 급여지만 아무튼 제날짜에 들어왔다. 아내도 전공 – 사범대 출신 –을 살려, 집 근처 학원에서 시간제 강사를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동안 아파트 구매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었던 가계부채가 다시 줄어들었다.

이제 나의 선택에 확신이 생겼고 미래에 대한 자신감도 늘어났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어려운 시간 속에 어렴풋하고 모호하던 잔재 같은 것이, 안정과 확신의 시간으로 바뀌자, 서서히 수면 위로, 마치 환등의 짙은 그림자처럼 우리를 자극하기 시작하였다.

사람의 문제였다. 사실 사업 초기부터 최고 연장자인 대표이사와 부장 간의 갈등은 있었다. 그리고 회사가 정상 궤도에 올라서자 그들의 간격은 심각하게 벌어졌다. 그들은 이제 대놓고 편을 가르고 서로를 비방하고 그들의 지분을 챙기려고 달려들었다. 결국, 갈등은 분열로 이어졌다. 어느 틈에도 끼고 싶지 않았던 나는 자연스레 퇴사하였다.


3.

나는 이력서를 온라인 취업사이트에 올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나의 휴대전화가 쉴 새 없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나는 하루에 서너 곳씩 면접을 보며 일주일을 보냈다. 겨우 웹 개발 경력 2년짜리지만, 하루가 멀다고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닷컴 회사들은, 심각한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이 기회를 잽싸게 이용했다.

면접을 보러 다녔지만, 역할은 바뀌어있었다. 나는 질문하고 판단하고 입사를 보류하거나 튕겼다. 그렇게 고르고 골라서 나는 한 회사를 선정하는 선심을 베풀었다. 사실 급여가 가장 후한 곳으로 들어갔다. 입사 전 내가 그 회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화상채팅 솔루션을 제공한다는 것뿐이었다. 솔직히 회사 홈페이지도 들여다보지 않고 지원했었다. 내가 골라서 가는 처지에 굳이 그런 수고를 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그런 수고로움을 안 한 대가는 나중에 톡톡히 치렀다. 입사 첫날 나는 그냥 단순한 채팅 사이트가 아닌 걸 비로소 알아차렸다. 관리자 화면을 통하여 모니터에 나타난 화면은 모두 벌거벗은 여인들이었다. 음란 채팅 사이트였다. 나는 놀라움과 당혹감을 동시에 내뱉었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은 개발자가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며 물었다.

“처음 봐요?”
“아 네.”
“앞으로 지겹게 보게 될 거에요”
“아! 예….”

나는 화면에서 거의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출근하자마자 흥분 상태가 되어 버렸다. 첫 출근 때 으레 갖게 되는 긴장감이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나는 후들거리는 마음을 겨우 억누르고 내게 주어진 업무를 하나하나 숙지해 나갔다.

나의 주 업무는 비교적 단순해 보였다. 홈페이지 관리였다. 개발도 아니고 그냥 관리였다. 버그만 잡으면 되었다. 버그잡이 인생이 여전히 진행 중인 것이다. 나는 우선 사이트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비교적 단순한 편이었다. 단순하다는 것은 그만큼 버그도 적다는 뜻이다. 즉, 할 일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뭐, 사실 핵심 기술은 영상 채팅 솔루션이고, 그 부분은 응용 프로그래머가 따로 있었다. 개발 부서에는 응용 프로그래머 1명, 서버 관리자 1명, 웹디자이너 1명, 웹프로그래머인 나까지 이렇게 4명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관리하는 사이트는 500개가 넘었다. 웹에이전시도 아닌데 말이다. 비결은 복사에 있었다. 모든 홈페이지가 똑같은 소스로 되어있었다. 즉 500개의 쌍둥이 사이트다. 다만 도메인과 디자인만 조금씩 다를 뿐이다. 나는 처음에 왜 이렇게 많은 사이트를 운영하는지 의아해했다. 정상적인 회사라면 하나의 도메인에 집중할 것이고 그래야만 홍보 및 마케팅을 펼치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그 해답은 며칠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우리의 가련한 홈페이지들은 태생적으로 수명이 길지 않았다. 사람들에게는 알려져야 하지만 더 알려져 사이버 수사대에 포착이 되는 순간 그 홈페이지는 우리 서버에서 삽시간에 사라졌다. 즉, 수많은 사이트가 생성되고 수많은 사이트가 죽는 것이다. 가련한 우리 집 바퀴벌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하는 주요 업무는 이렇다. 이미 등록된 많은 도메인 중 하나를 골라 웹 소스를 복사하여 서버에 세팅하고 디자이너가 제공한 이미지를 덮어쓰고 테스트해 본 뒤, 이상이 없으면 운영팀에 알려주면 된다. 또 운영팀에서 몇몇 사이트를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반대로 진행하면 된다. 즉, 복사한 웹 소스를 백업 후 삭제하고 서버에 세팅된 도메인을 없애는 것이다. 이 모든 작업을 하는데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에도 여러 수십 개의 사이트를 올렸다 내릴 수 있었다.

나의 업무시간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고객관리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지난달 10만 원 이상 결제 고객의 분석의뢰가 들어오면, 나는 스토어드 프로시저(Stored Procedure)를 작성해서 데이터베이스에 등록하고 실행한 다음, 그 결과를 엑셀이나 파워포인트 등을 이용해 작성한다. 데이트 도표와 관련 그래프도 만들어 제공한다. 문서에는 10만 원 이상 결제 회원들의 나이별 분포, 시간대별 활동분포, 선호하는 패키지별 분포 등 다양한 데이터들이 그래프와 함께 기록된다. 그러면 이러한 통계를 토대로 마케팅 분석이 들어가고 소위 표적 회원들에 대한 이벤트가 만들어지게 된다.

회계 쪽에서의 요청도 있었다. 돈과 관련된 것이므로 아주 민감한 사항들이 주류를 이룬다. 통계의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아주 세심하게 반복적인 검토를 통해 결과를 도출해낸다. 회사에 와서 허구한 날 게임만 하는 바지사장도 회계 쪽 보고서는 꼼꼼히 쳐다본다. 나는 이런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루 매출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녀석들이 이런 데다 돈을 쏟아붓는 걸까?

우리가 너무도 잘 알다시피 인터넷 세상은 포르노로 도배가 되었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접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런데 단지 라이브라는 이유로, 화질도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화상을 들여다보고 돈을 낸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많이 내는 이는 매월 수백만 원이 넘었다. 그런 얼빠진 회원이 한둘이 아니었다.

또 한 부류의 방문객들이 있다. 그들은 정상적으로 돈을 지급할 생각이 별로 없어 보였다. 그래서 비정상적인 경로를 선호한다. 시스템 보안이 취약한 곳을 끊임없이 탐구하여 몰래 침입하여 사이버머니를 슬쩍하든가 관리자 계정을 훔치는 짓을 한다. 세상은 그들을 해커라고 부른다. 회사 차원에서 해커는 골칫덩어리다. 더욱이 우리 같은 음란 사이트는 주요 표적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우리 회사가 지원하는 해커가 있었다.

사장의 말을 빌자면, 어느 날 까까머리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녀석이 한 명 찾아오더니 그의 노트북을 펼치고는 10분 만에 우리 사이트를 뚫어 버리는 시연을 펼친 것이다. 감탄한 사장은 즉석에서 그를 고용했다. 그는 이후 한 달에 한두 번씩 나타나 본인이 해킹한 부분을 보여주고 소정의 금액을 얻어갔다. 나의 전임자는 그를 아주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가 다녀가면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안과 관련한 일들은 언제나 귀찮고 까다롭고 골치 아팠다.

사실 웹 개발자 입장에는 억울한 면도 없지 않다. 해커는 온종일 뚫는 일에만 몰두하면 된다. 하지만 웹프로그래머는 늘 해야 할 일이 넘쳐난다. 보안은 자투리 시간에만 주어진다. 그리고 보안의 영역은 넓고 방대하다. 전문적으로 학습하지 않는 이상 그 모두를 막을 방법을 갖추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특히 보안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높지 않은 한국의 현실은 더 심각하다. 해커가 한번 헤집고 놓아야 부랴부랴 대책 마련에 고심한다. 그리고 그 대책이라는 게 결국 웹 개발자에게 맡겨지는 게 대부분이다. 웬만한 규모의 기업이 아니라면 말이다.

입사 후 한 달쯤 지났을 때 나는 그 해커 녀석을 비로소 볼 수 있었다. 의외로 순박한 얼굴을 한 그는 나를 보자마자 꾸벅 인사를 하더니 대뜸 점심을 대접하고 싶다고 하면서 가까운 순대국밥 집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는 식사 도중 내내 끊임없이 말을 내뱉었는데, 대부분 자기 자랑이었다. 요약하자면 자기는 해킹 실력이 탁월하여 미 국방성에서도 주의할 인물이라는 것이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보안 쪽에 그다지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그와 친해질 필요가 있으므로 맞장구를 적절하게 쳐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신이 난 듯, 앞으로 형님으로 모시겠다며 마치 영화에서 건달들이 하는 것처럼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당황하였지만 이내 침착함을 유지하고선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왔다. 안 그래도 회사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주변 상가와 음식점들에 급속히 퍼진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사업 파트너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다지 합법적이지 않은 업종 종사자들이었다. 아무튼, 녀석은 그날 이후 수시로 메신저를 통하여 안부를 묻고, 자신이 해킹한 사이트의 비밀 정보들을, 자랑삼아 선뜻 공유하곤 하였다. 그 중엔 이름만 들어도 대번에 알 수 있는 유명 기업들도 있었다.


4.

나는 화상 채팅 사이트에 2년 정도 근무하고 사표를 냈다. 나 스스로 사표를 던졌지만 내심 원하지 않던 거였다. 좀 더 정확히, 어쩔 수 없이 사표를 냈다. 사내 누구의 강요도 없었지만 그만둘 때라는 것을 직감했다. 아쉬움은 컸다. 빵빵한 월급에 차와 아파트가 제공되었고 보너스도 자주 나왔다. 한마디로 내 능력 이상의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엄연히 음란 사이트였고, 음란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여전히 완고했다. 뭐 미국이나 유럽 같았으면 당당하고 떳떳하게 드러내 놓고 하였겠지만 말이다.

사표 쓰기 3개월 전,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남쪽 지방의 모 사이버 수사대가 우리 사무실을 급습한 것이다. 우리 사무실은 서울에 있었지만, 사이버 수사대는 관할 영역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회사의 메인 서버와 주요 간부들의 노트북 그리고 서류들이 모두 압수당했다. 물론 나의 노트북 2대도 포함되었다.

사장은 즉석에서 체포되었고 직원 대부분은 며칠 내로 참고인 조서를 받으라는 출석 요구서가 주어졌다. 생애 첫 경찰서 출두 명령서. 나의 대학 시절, 신군부 시절 한가운데에 있던 그때, 남들은 앞장서서 데모할 때, 나는 하는 척 꽁지 따라 다니다, 적당한 때 슬그머니 사라지며, 요리조리 전경들 눈을 잘도 따돌렸었다. 하지만 나의 미꾸라지 인생에도 이런 날이 결국 찾아오고 말았다.

모두 세 번의 조서를 받았다. 뭐 조서라고 할 것도 없었다. 경찰은 우리 사이트의 모든 부분을 다 캡쳐해서 인쇄한 두툼한 종이 뭉치들을 한 장씩 한 장씩 넘기며 질문하였고, 나는 그 모든 것에 대해서 ‘네’라고만 답하였다. 숨길 것도 없었고 거짓도 없었다. 돈 만 있으면 아무나 들어와서 볼 수 있는 사이트를 숨겨본 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두 번의 조서는 일주일 간격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조서는 지방이 아닌 서울에서 두 달 뒤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나는 세 번째 조서 끝에, 담당 경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일러준,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참고인 조서 자주 받다 보면 언젠가는 본인도 걸려 들어갈 수 있어요. 이쯤에서 손 떼는 게 신상에 좋을 겁니다. 뭐 이 정도 스펙이면 요즈음 어디 가나 대우 잘 받잖아요? 인터넷 세상인데. 안 그래요?”


5.

새벽 2시가 조금 넘었다. 나는 푹신하기 그지없는 의자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거의 세 시간을 버그잡이에 열중했다. 눈이 뻐근해 오고 졸음이 몰려왔다. 휴지통과 빈 캔에는 담배꽁초가 넘쳐난다. 도시의 경적은 줄어들었지만 한 번씩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는 훨씬 선명하게 들려온다.

나는 지금 우리 팀이 짜놓은 코딩을 진득하게 쳐다보고 있다. 남들이 짠 프로그램 코딩을 해석하기란 적지 않은 인내를 요구한다. 문득 이해 안 될 수도 있지만, 여기에도 각자의 개성이 한없이 묻어나 있다. 프로그래머 집단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독특하고 강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적지 않게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뭐 어딘들 안 그렇겠지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간부터 타협 불허 인간, 4차원 인간들까지 그야말로 인간군상들이다.

프로젝트 시작 전, 우리는 최대한 많은 부분을 표준화시켜 혼란을 최소화하려고 여러 가지 방법론을 시도해 보지만, 기획 단계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한국적 풍토에서는 그저 사치스러운 일뿐이다. 우선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우선 만들어놓고 그다음 무수하게 쏟아지는 버그들을 잡아 드린다.

<땜빵>. 나는 이 용어만큼 우리를 적절하게 표현한 단어가 없다고 생각한다. 빵구난 곳을 땜질한다. 우리는 프로그램의 질이나 생산성 혹은 확장성 같은 사치스러운 용어에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 그저 구멍 난 곳을 메꾸는 중인 것이다.

그렇게 비몽사몽 간을 헤매며 버그들을 하나하나 죽이는 중에, 디자인 팀장이 씩씩거리며 찾아 왔다. 새벽 3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이미 사장에게서 어느 정도 언질을 받았다. 고객이 디자인 교체를 요구해 온 것이다. 그것도 메인 디자인을 말이다.

 
내일모레면 오픈인데, 고객사 회장이 직접 요구를 했다는 것이다. 80대 할아버지이신 그분의 표현을 빌자면 ‘너무 야하다는 것’ 이다.

송 팀장은 오자마자 나의 무릎에 털썩 쓰러지듯이 눕더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욕을 종합세트로 내뱉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메인 디자인 수정 요구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두 번 정도야, 약간 까다로운 고객을 만나면 겪는 일들이므로 수긍할 텐데, 이번 건은 이미 다섯 번째 요청이다. 과장 선에서 한번, 부장 선에서 또 한 번, 이사도 요청, 사장도 요청 이젠 회장까지 요청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모든 간부를 충족하는 디자인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번에 오픈하는 사이트는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쇼핑몰이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디자인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아주 이상하게도, 인터넷은커녕 타자기도 귀하던 시절에 젊음을 보냈던 분들이, 홈페이지 디자인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마치 트로트 세대가 힙합을 논하는 거와 흡사하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프로그래밍 부분에는 그다지 말씀이 없으시다는 거다. 왜냐? 모르니까. 하지만 디자인은 누구 하나 한두 마디는 꼭 거든다. 그리고 위로 올라갈수록 그 주장은 강하고, 강함에 비례하여 디자인은 엉망이 되는 것이다.

송 팀장은 우리 사장도 싸잡아 욕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중요한 고객이라도, 사흘 후에는 오픈인데 당연히 거절하여야 할 상황이고, 또 거절할 의무가 있는 데도, 사장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수정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직원이야 죽어 나가든 말든, 집을 못가던 말던, 자기 잇속만 챙기면 된다는, 고약한 심보에 울분을 토하는 거였다.

이런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뭐가 있겠는가? 나는 그저 그녀를 꼭 껴안고 그렁그렁 거리는 불만을 가만히 들어 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한동안의 울분이 지나갔다. 나는 손끝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살살 만지고 있었는데, 그만 몸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동시에 숨소리가 커지는 것도 느꼈다. 그녀는 이제 말을 잊었다. 어느새 내 방엔 적막이 흘렀다. 호흡 소리만 들려왔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응시하고는 손가락 하나를 위로 들었다.

나는 송 팀장을 따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늘은 맑았지만, 별은 보이지 않는다. 새벽 4시가 되었지만, 이곳, 도시의 한복판은 여전히 휘황한 네온사인 숲이다. 우리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출구 맞은편 환기구 틈 사이에 난 좁은 길을 따라 딱 1평쯤 나오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처음 이곳을 우리가 발견했을 때는 가을이었고, 둘 다 거의 토하기 직전까지 술을 마신 상태였다. 건너편 막걸릿집에서 회식하였고 둘이 동시에 토할 곳을 찾아 돌아다니다 이곳까지 오게 되었다. 결국, 우리는 서로의 등을 두드려 주며 각자의 흔적을 모서리에 남겼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이곳을 방문하였을 때는 이미 겨울이 지나 있었다. 처음과 달리 우리는 이곳을 황급히 뜨지 않았다. 오히려 쾌락에 몸을 맡긴 채 짙은 키스와 섹스를 즐겼다. 누군가 불쑥 나타날 것이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세상의 새벽은 온통 다양한 색으로 밝았지만, 이곳은 높은 빌딩 사이에 짙은 그림자를 품었고, 미로같이 좁은 길을 따라 난 공간을 알고 있는 이는 오직 우리 둘뿐이었다. 게다가 밖의 소음은 우리의 소리를 차단했다.

우리는 각자의 속옷을 젖히고 본능이 선사하는 선물에 몰두했다. 그렇게 각자의 성기가 얼얼해질 때쯤, 우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그날 내가 발견한 버그를 다 잡은 뒤, 지상에 널려 있는 24시 해장국집에서 아침을 먹고, 다시 지하 사우나로 향했다.

뜨거운 건식 사우나에서 땀을 쪽 빼고 나는 냉탕에 몸을 풍덩 담갔다. 출렁거리는 뱃살이 물결에 흐느적흐느적했다. 익숙한 즐거움이 찾아 왔다. 나는 일렁거리는 물결 속에 눈을 뜬 채 아내와 자식을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저녁은 집에서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갈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나는 수면실로 향했다. 문을 열면 언제나 특유의 기분 나쁜 곰팡내가 풍겼다. 자리를 잡기 위해 적당한 곳을 살피던 나는, 구석에 엎드린 채 옅은 휴대전화 불빛으로 책을 읽고 있는 사장을 발견했다. 자주는 아니지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이렇게 사우나에서 마주치곤 하였다. 나는 애써 못 본 척하려고 돌아서려는데 사장이 먼저 알아채고 손을 흔든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곁으로 갔다. 나체인 사장의 배는 볼 때마다 더 커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사장 옆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전신의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이내 잠들지 못했다. 그렇게 몇 분간을 뒤척이다 나는 곁눈으로 사장을 봤다. 어느새 그는 잠들어 있었다. 남산만 한 배가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했다. 나는 사장이 읽다 만 책을 어둠 속에 찬찬히 살펴봤다. 얇은 책이었다. 나는 그 책을 들어 벽에 깨알 같이 붙은 작은 전구에 천천히 대어 봤다. 어딘가 모르게 낯설지 않은 표지였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묘한 감정이 뒤죽박죽 섞여서 올라왔다. 사장의 자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나와 닮아가는 것도 같았다. 나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잠이 들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냥 누워 있었다. 이젠 집보다 더 익숙한 사우나 수면실. 나는 몸을 뒤척이며, 오늘은 꼭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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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당선작 심사평


  제28차 <창작콘테스트> 동상은 소설부문 남원정 씨의 「사우나와 옥상」을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소설가 김영찬 / 소설가 김충근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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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부문



■ 황태포
   - 최영란


부엌 싱크대 위에 
엎드려 있다
버썩 마른 누리끼리한 피부
등에는 검버섯이 그물처럼 깔렸다

차디찬 바닷물에서 
상선약수의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일까
무욕(無慾)의 눈에 심연을 담고
입꼬리를 들어 올려 호쾌하게 웃는다
곡선으로 유영하던 
바람과 햇살로 다비식을 치른 몸
유골이 발려져 대쪽같이 꼬장꼬장하다

짭짤한 눈물마저 말라붙은 
햇살 한 움큼 머금은 노란 속살

모유 같은 뽀얀 국물 풀어 놓는다



■ 콘솔
   - 최영란


베란다 창문 앞
붉은 갈색 피부의 삼바 무용수가 
레이스 치마에 하이힐을 신고 창가에 기대 서 있다
머리에는 칼랑코에 꽃 화분을 이고
매끄러운 네 다리로 포즈를 취한다

어떤 날은 작은 그림 한 점을 머리에 이고
또 어떤 날은 도자기 한 점 이기도 한다
새참을 나르는 시골 아낙네를 닮은 뒷모습

다가올 축제의 히로인이 되고 싶은 그녀
발뒤꿈치 높이 들고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언젠가 음악 소리 들려오는 날, 
머리 위의 짐 던져버리고 
집시처럼 춤을 출 것 같은



■ 갈참나무
   - 최영란


소래산 둘레길
서해바다에 엎드려 일몰을 보고 싶은
갈참나무
온몸을 흔들어 낙엽 떨군다

바람의 들숨, 날숨에
삐그덕삐그덕 항해를 시작한다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자꾸만 밑으로 가라앉는다

침몰하는 나룻배
숨이고기 몇 마리 깃들어 살기를

몸을 부비며 서걱거리는
폐선(廢船)들 아래
땅강아지 한 마리 몸을 누인다



■ 고로쇠나무(골리수骨利水)
   - 최영란


바닷바람이 닿지 않는 지리산 기슭
그의 몸에 마구잡이로 꼬챙이를 꽂는다
아프다는 비명 한번 지르지 않는다
엄마 젖처럼 뽀얗고 달짝지근한 
피가 흘러나온다

처음 그가 헌혈을 시작한 것은
뼛속이 점점 가벼워져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나물 캐는 할멈에게
진달래 꽃 같은 웃음소리를 들려주는 
아이에게
주는 선물이었을 것이다

먼 옛날 
이차돈의 순교가 이러했다



■ 냄비 받침
   - 최영란


뚝배기 속 된장찌개
부글부글 열변을 토한다
화가 단단히 났는지 입에 거품을 문다

알곡 다 털어준 지푸라기
또아리 틀고 맞이한다
서러운 이야기, 억울한 이야기 묵묵히 듣는다
짚이 타는 줄도 모르고 
끌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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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당선작 심사평


  제28차 <창작콘테스트> 은상은 시(詩)부문 최영란 씨의「황태포외 네 편의 시를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시인 김호철 / 시인 정은정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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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 스무 살의 일본
   - 신민영


공기는 너무 차가운데, 몸은 벌겋게 될 만큼 뜨거워졌다. 여기엔 진짜 별이 떠 있네.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애인이 생긴다면 꼭 여기에 데리고 와 밤에 몰래 다 벗고 둘이서만 여기에 있어야겠다는 다짐도 해보았다. 엄마도 옆에서 말없이 별을 봤다. 한국과 그리 멀지도 않은 이곳에는 이토록 맑은 별이 있다니.. 조금은 묘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우울한 졸업식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땐 그래도 이 졸업식은 덜 우울하다고, 다들 어딘가 갈 곳이 정해졌기 때문이라는 말을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었는데 어쩐지 고등학교 졸업식은 그 자체로도 너무나 우울해졌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갈 곳이 없는 한 사람이기 때문이었겠지. 뭘 하겠다고 결심하는 것 자체가 힘들 때였다. 몸도 마음도 알이 배겨 풀릴 때 까지 기다리는 것도 고역일 때기도 했다. 그 날 졸업식엔 국회의원이 왔었는데 사실 나는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다만 엄마가 그 분의 축하사에 너무 감격을 받아 버린 것이 문제였다. 뭐 그런 뻔한 말을 했다. 자기계발서 앞장에나 나올법한, 속도는 중요하지 않고 방향이 중요하다. 늦은 때는 없고, 심지어 나도 재수를 했다! 등등의..

그 날 엄마는 나를 뷔페파크에 데려갔다. 우리가 아는 가장 비싼 뷔페였다. 초콜릿 분수 앞에서 초콜릿을 퍼와 자리에 앉자마자 엄마는 나를 붙잡고 일 년 더하면 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솔직히 아무것도하기 싫었다. 공부도하기 싫었고, 운동도하기 싫었고, 뭐 다른 일도 딱히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냥 어딘가에 쳐 박혀 사람들이 모두 나를 잊어버렸기를 바라며 숨어 지내고 싶었다. 그냥 모든 게 다 창피했던 때였다. 하는 수 없이 재수를 결정하자마자 엄마는 또 일본여행 티켓을 끊었다. 온천에 가서 몸과 마음을 다 풀어놓고 와야 한다는 말도 했다.

여권사진이 너무 범죄자처럼 나왔잖아...

너무 급해서 어디 알아보지도 못하고 집 앞에서 후다닥 찍은 것이 화근이었다. 이걸 공항에서 몇 번이고 펼쳐 보여줘야 한다니...

후쿠오카에서 기차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유후인으로 갈 수 있었다. 몇 번을 타도 익숙해지지 않는 택시 자동문이 조금 웃겨졌을 때 도착한 료칸은 생각보다, 아니 상상보다 더 좋았다. 그곳엔 내 또래인 애가 일을 하고 있었다. 가업을 물려받는다니, 살짝 생소하고 또 신기해서 되지 않는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 몇 마디를 나눴다. 걔는 자기 몸 만한 이불들을 옮기고, 식기들을 정리하고, 온천물을 확인하러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한 번도 웃지 않거나, 인사를 거르는 일이 없었다. 매우 자주 마주치는데도 그 때마다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저녁식사 내내 코스로 나오는 요리는 사실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냥 일본에 도착해서 떠날 때 가지의 모든 음식들이 입에 잘 맞지 않았다. 생각보다 음식에서 단 맛이 너무 많이 났다. 간장냄새도 너무 많이 났다. 그리고 야채를 잘 먹지 않아 더 먹을 것이 없었다. 원래 이런 곳 와서는 이것저것 다 시도를 해봐야 한다던데 큰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나마 마지막 즘에 나온 와규를 열심히 먹고 나니 코스가 끝났다. 배가 꺼지기 전에 온천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 얼른 옷을 갈아입고 나갔다. 무지 깜깜했고, 시간이 늦어서인지 아무도 없었다.

엄마랑 목욕을 자주 가는 편인데도 알몸이 잠깐 어색해 도망치듯 온천 안으로 미끄러졌다. 뜨거운 물에 들어가려면 아예 몸을 다 담구는 것이 빨리 적응이 된다. 발부터 담그며 앉아있다가는 온 몸을 담그기가 힘들어진다. 얼굴만 내밀고 입김이 나오는 것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봤다.

추워...

그 말만 반복하다가 고개를 드니까 별이 엄청 많았다. 순간적으로 무지막지한 감성이 차올랐다. 일본에 가자고 했을 때 도쿄도, 오사카도, 삿포로도, 오키나와도 아닌 이곳에 오는 게 실망스러웠던 마음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마음이 좀 정리되는 것도 같았다.

올 해의 남은 시간들을 나를 더 가여워하며 지내고 싶었다. 나에 대한 연민은 가끔은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하니까.

다음 날 나는 걔와 조금은 아쉽게 인사하고 료칸을 나왔다. 사실 걔에게 나는 수많은 투숙객 중 하나였을 것이지만 나는 걔가 조금은 좋아질 것도 같았다. 아무리 봐도 멋있었다. 사실은 조금 부럽기도 했다. 나에겐 물려받을 것이 아무것도, 그리고 내가 대를 이어 해내갈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너무 당연하지만 괜히 서운하기도 했다.

안녕!

나는 한국어로 인사했다. 손을 흔드는 나와 달리 걔는 고개를 숙여 안녕..! 이라고 인사했다. 두 인사의 간극에 대해 생각하며 길을 나섰다.

그 뒤로는 따로 떨어져서 여러 상점들을 구경했다. 엄마랑 쇼핑을 할 때마다 엄마는 내가 관심 있는 것에 대해서, 나는 엄마가 관심 있는 것에 대해서 전혀 배려하지 않기 때문에 따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저 고로케 집에서 다시 만나서 고로케를 하나씩 사먹자! 하고선 한 시간 정도를 돌아다녔다. 확실히 여기도 관광도시 인가보다.. 뭘 많이 판다.. 하지만 내 수중에 있는 돈이라곤 천 엔이 다였다. 뭐라도 남겨서 사가고 싶었지만 그 어떤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맘에 드는 반지를 찾았을 땐 돈이 부족했다. 로밍을 하지 않은 탓에 엄마를 부를 수도 없었다. 아쉬운 마음에 그 반지를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한국에 가서 비슷한게 있으면 사야지..싶었지만 재수생에게 반지는 사치인 것 같기도 하고..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우동을 시켜두곤 맥주를 두 잔이나 마셨다. 오전 열 한 시였다. 엄마는 엄마랑 여행 온 가장 큰 장점을 말하라고 했다.

피임 안 해도 되는 거!

물론 난 그 이후로 몇 년 동안 피임할 일이 없었다.

둘 째 날 밤이 될 때 까지 계속 걷기만 했다. 무언가를 구경하고, 길을 찾고, 다시 기차를 타고 후쿠오카 역 근처의 호텔로 왔다. 마지막 날은 더 열심히 술을 마셔야지. 역에서 조금 더 벗어나 한국인을 절대 마주치지 않을 술집을 찾아갔다. 남은 돈을 다 쓰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계속해서 걸었다. 들어가면 무조건 맥주를 원샷할거고, 닭껍질꼬치도 시킬거고..기본안주가 완두콩이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며 다리가 아픈 것을 참았다.

엄마는 나보다 잘 걸었다. 발에 굳은살이 박혀있다면 분명 엄마는 나보다 더 많은 세월의 굳은살이 박혀있을까? 가늠할 수 없는 엄마의 스물여덟해가 어느 순간 밀려왔다. 뭘 해도 엄마는 나보다 먼저 해봤을 것이라는 생각, 그 깊이는 내가 알 수 없을 만큼 깊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 엄마가 권하는 모든 것들은 그다지 나에겐 큰 해가 되지 않는 다는 사실도. 어느 순간 아직 나는 엄마가 나를 낳은 나이까지 도달하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스무 살의 내가 가장 믿지 않는 말은 넌 너무 어리다,는 말이었는데 어쩐지 내가 정말로 어리구나, 하고 깨닫기도 했다. 재수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갑자기 차올랐다. 술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랬다.

우리가 네 가족이었을 땐, 주말마다 너무 바빴다. 놀이동산으로, 수영장으로, 눈썰매장으로, 동물원과 아쿠아리움으로 빠지지 않고 다녔다. 그 때의 부모는 우리를 위해 주말을 몽땅 다 쓸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금요일 밤마다 수영가방을 싸거나, 장갑을 챙기는 일에 익숙해졌다. 놀이공원에서 어떤 기구를 먼저 타러 뛰어 갈 것인지도 미리 정해둘 수 있었다. 대부분의 제안은 아빠를 통해 이루어졌고, 나머지는 별다른 의견 없이 따랐다. 운전과 비용과 정보의 제공은 아빠를 통해서 아주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고, 우리는 그 시간을 즐기는 것만이 의무였다.

처음으로 엄마가 나와 동생을 데리고 먼 곳에 간 것은 우리가 조금 더 어릴 때 일이었다. 사실 나는 그곳이 어딘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고속버스를 탔었고, 찜질방에서 하루를 보냈다. 나는 직감적으로 엄마와 아빠의 다툼 끝에 엄마가 우리를 데리고 도망쳤다는 것을 알아챘다. 찜질방에서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엄마가 계속해서 통화를 하거나, 울거나, 쓸데없는 음식을 사오는 것을 보기만 했다. 우리는 엄마를 피해 냉탕으로 가 바가지를 겹쳐놓고 놀았다. 나는 물속에서 조금 울었다. 어쩐지 여기서는 더 오래 있을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런 불안감이 밀려왔다. 차라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렇게 즐겁지 않은 주말은 처음이었다.

그게 엄마와의 첫 외박이었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맥주를 마셨다. 술을 마시면 별안간 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내게 되기도 했다. 그게 이제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그 때의 모든 감정이 복기되지는 않았다. 생애 첫 해외여행을 둘이서만 오게 되다니,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것을 직감했다.

흙탕물 같은 시간들이었어.

엄마는 항상 그때를 그렇게 칭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면 물 위는 맑은데, 사실 휘저으면 다시 흙탕물이 된다고,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너의 스무 살과 그 이후의 삶은 더 이상 흙탕물이 되지 않도록 엄마는 부단히도 노력하고 있어.

엄마는 또 그런 말을 덧붙였다.

가게는 좁았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들어왔다. 안주는 정갈하고 양이 적었고, 기름 냄새가 역하지 않게 고소했다. 여기서는 한국말이 들리지 않아서 더 크게 이야기 할 수 있었다. 하루의 일과를 끝마친 직장인들과, 연인들과, 가족들은 저마다의 표정으로 자리를 찾아갔다. 주위를 둘러보면 대부분은 취해있었고, 또는 취하는 중이었으며, 가끔은 울거나 소리를 치기도 했다. 다른 나라의 언어로 같은 인간의 감정을 가늠하는 것은 조금은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완벽한 이방인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다른 언어를 쓰는 우리를 힐끔거리는 시선을 즐기기로 했다.

어울리지 않는 노래가 아주 작게 흘렀다. 그 당시 나는 샘스미스의 노래에 미쳐있었고, 그 노래는 그 해 초에 나온 신곡이었다. 노래의 감미로움은 뒤로 하고 가사를 뜯어보면 그런 내용이었다. 너는 나를 베이비라고 부르지만, 나만 베이비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 나는 그 뜻을 전달했다.

원래 베이비라고 부르는 놈들 치고 바람 안 피는 놈이 없는걸..

정확한 해석이었다.

술을 마시고 나와 사원을 구경했다. 늦은 밤인데도 곳곳에 불을 켜 두었고, 사람들이 붐볐다. 왠지 소원을 빌어야 할 것 같은 곳들이 널려있었다. 확실히 동전을 호수에 던지며 비는 소원은 예의가 없었다. 믿지 않는 신이라도 있을법한 이곳에서 소원을 빌어야만 할 것 같았다.

엄마와 내가 만나지 않는 소원을 빌 수 있다면, 그건 엄마가 더 행복해지는 길이 될까? 그렇게 된다면 엄마가 말한 흙탕물 같은 시간들은 아예 없던 일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울적해진 마음으로 다른 소원들을 빌라고 재촉했다. 엄마 딸이 일류대학에 가도록, 섹시한 애인을 만들도록, 술을 아무리 마셔도 튼튼한 간이 지속되기를 등등의 소원이었다. 엄마는 그런 것들을 다 이루지 않아도 된다고는 했지만 빌어준 것 같기도 했다.

가깝고도 먼 나라에서 아주 가깝지만 또 너무나도 먼 사람과의 날이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 중도포기
   - 신민영


여러 가지 중도포기를 했을 때는 어금니 쪽 잇몸이 두근거리는 느낌이었다.

락스물에 머리까지 푹 담그고 숨을 참을 때면, 그리고 물안경이 있음에도 눈을 뜨는 것을 몇 초 정도 주저하다 보면 몸이 더욱 무거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어쩐지 수업이 끝나자마자 최와 나는 맥주를 마셔야만 할 것 같아서 홀린 듯 캔맥주를 마셨다. 기초반에서 초급반 까지도 올라가지 못한 채로 포기했다. 수영가방을 일부러 옷장에 넣지 않고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었다. 마음이 변하기를 바래서였다. 아르바이트 들을 관둘 때면 별의 별 변명들을 메모장에 10번까지 기록하다가 가장 그럴싸한 변명을 골랐다. 일자리를 포기하는 일은 돈의 욕심만 없다면 금방 이루어지는 것들이라서 쉬웠다. 그리고 어느 날 찾아오는 잔고의 압박은 다시 새로운 일자리를 모색하게 하니까 그리 힘든 포기가 아니었다. 탁구대에서 이쪽저쪽을 옮겨 다니는 탁구공처럼 아무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것이 약점이 아니라 진행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연극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는 충치치료를 하던 중이었다. 나는 가끔 감상적인 마음으로 치과 의자에 누워 치료가 아픈 것 보다 내 마음이 더 아프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치료를 끝내고 돌아와 다시 선언했다. 그 날 밥상에 나온 계란찜 위에 눈물이 떨어졌다. 그리고 정확히 2년 뒤 나는 같은 포기를 하겠다고 다시 말했다. 그 자리에선 놀란 사람도, 우는 사람도 없었다. 침묵이 길게 느껴졌다.

누군가 나를 보며 한심하게 생각할 것을 떠올리면 당장이라도 바깥으로 나가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어느 날 그게 변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인 것을 알아차리고 나는 더 열심히 중도포기를 했다. 당신들이 어떻게 생각해도 나는 계속 포기를 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의 중도포기를 안타까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가장 가슴 아파 하는 것은 나였다.

돈이 없어서. 엄마가 싫어해서. 몸이 잘 안받아줘서. 재미가 없어서. 집이랑 너무 멀어서. 다른 게 더 좋아서. 중도포기의 이유들은 수없이 쌓여갔다. 하지만 그 어떤 포기도 마음이 아프지 않은 적은 없었다. 각각의 이유로 나를 눈물짓게 했다. 스스로 결정한 일에도 나는 마치 보이지 않는 벽과 싸우는 외로움을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게 되었다. 누구도 모른다면 그것은 포기가 아닌 것 같았다. 그 이후로 일어났던 실패와 포기에 대해서는 잘 적지도, 기억하지도 않았다. 오답노트가 전혀 없는 인생이 시작된 것 같았다.

충치는 아닌데.. 뭐가 불편하다는 거에요?

왼쪽 어금니 쪽 잇몸이 너무 두근거린다는 말을 했다. 충치나 잇몸에 염증이 없으니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말을 들어도 별로 진정이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새 이가 나나? 꼭 그럴 때 애기들이 간지럽다고 그러는데.

그럴 리가 없으니 그냥 알겠다고만 하고 왔다. 새 이가 났던 순간들을 떠올리며 걸었다. 톱니 바퀴 같은 이가 고개를 들고 잇몸을 뚫을 때부터 혀는 계속 거기에 머물렀다. 까끌거리고 생경한 느낌들. 그런 기분이 지속되는 와중에도 잇몸이 두근거렸다.

무수한 이유로 포기를 경험했을 때, 그리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혼자만의 외로운 다짐을 할 때에 그런 두근거림이 온다는 것을 알았다. 잇몸에서..그게 잇몸에서 느껴지는 것이 좀 이상할 뿐이다. 나의 모든 신체에 가장 무지한 것은 또 나 자신 같았다.

재능이 없어서. 아직 그 이유를 써서 포기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여태 그래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으며, 나중에도 재능을 이유로 시작할 일도 없을 것이다. 나의 숱한 중도포기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그냥 시작했으니까 그냥 끝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포기를 할 때 즈음엔 나의 시작이 아주 거창해 보여서 자꾸 울었던 것이다. 왠지 나 엄청 잘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며 시작 한 것 같은데. 벌써 포기를?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고 생각해보면 그런 호언장담은 하지 않았다.

글을 써서 누군가에게 보내준다는 말을 했을 때에도 밥상 위에는 침묵만 있었다. 나는 여전히 잇몸이 두근거리는 상태로 두려움에 떨며 글을 쓴다. 누군가의 침묵에도 아직 포기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그냥 시작했으며 재능이 있는지는 더더욱 모른다. 다만 시작을 누군가에게 알렸다는 점이다. 이제 이 일의 중도포기는 그렇게 쉽게 이루어 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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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당선작 심사평


  제28차 <창작콘테스트> 동상은 수필부문 신민영 씨의 「스무 살의 일본외 한 편의 수필을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수필가 유미숙 / 수필가 정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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