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콘테스트> 제17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월간문학 한국인]이 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고자 분발하는 젊은 영혼들의 순수 문학 창작의욕을 북돋기 위해 기획한 <창작콘테스트>가 제17차 당선자를 맞았다. 이번 제17차 공모는 양적, 질적 수준이 미흡하다 여겨 아쉽게도 금상을 내지 못했다. 대신 은상과 동상엔 각 두 편씩 모두 네 편을 뽑았다.
[월간문학 한국인]<창작콘테스트>는 작가로서의 무궁한 필력이나 완벽한 전문성을 하나하나 따져 시상하는 그런 대단한 문학상이 아니다. 오로지 전문작가가 되기만을 꿈꾸어온 예비작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다소 흠결이 있더라도 치열한 작가정신과 독특하고도 개성있는 표현,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따져 우열을 가릴 뿐이다. 따라서 설혹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 가능성을 보아 당선작을 뽑을 뿐임으로 문학상으로서의 권위를 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할 것이다.
이번 응모자 또한 모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을 터이고 나름의 재능을 발휘하였다고 보여지지만, 상당수의 작품들은 여전히 진부한 낱말들의 사용과 구태의연한 표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점이 아쉽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그간 겪어온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에 의해 산고를 겪듯, 그 누구도 쓰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문체와 어법, 시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이번 <창작콘테스트> 제17차 공모에 참여해주신 작가 여러분들, 그리고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 창작을 자신의 운명으로 택하려하는 모든 분들께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기원하며 각별한 감사와 격려의 뜻을 전한다.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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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부문
도장 파는 여자
- 김서현
그녈 처음 보았을 때 수의를 입은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졌다. 장례는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아버지의 뜻대로 매장으로 치러졌다. 염을 마친 어머니는 수의를 입고 이름 모를 나무 관 속에 누워 있었다. 띠로 몸을 바짝 동여맨 채 하얀 얼굴만 드러낸 그날의 어머니. 나는 그 모습을 본능적으로 기억 깊은 곳에 묻어버린 줄로 알고 있었건만, 그것이 이토록 반사적으로 회상된다는 건 그녀가 어딘가 남달랐기 때문에, 아니 어딘가 어머니와 닮았기 때문이 아닐까.
오전의 햇살이 횡단보도 건너편에 그녀가 있는 건물 유리창으로 내릴 때였다. 그녀의 모습은 고작 유리창 너머로 상반신만 간신히 보일 뿐이었고 더군다나 마른 체형인데다가 허리 아래까지 끝을 모르고 내려간 숱 많은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그녀의 몸을 절반은 가리고 있어서 그마저 조차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살랑일 때마다 언뜻 보이는 얼굴이 너무 희어 멀리서도 표정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의자 등받이에 짙은 색 카디건을 걸쳐 두어 더 그래 보였는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신호등을 건너 다가가보니 아래로 숙인 고개가 어떤 일에 집중을 하는 모양인지 미간에 잡힌 옅은 주름이 보였다. 간격은 더 가까워지면서 거의 유리창에 이마가 닿을 듯 바짝 한 발 내딛었을 때 툭 하고 발끝에 뭔가가 채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허리춤까지 오는 도장 모형이 언제부터인가 거기 있었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열중하던 일이 무엇인지 짐작이 갈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내가 짐작한 일이란 어느 여배우가 미싱을 돌리다 캐스팅되었다는 비화만큼이나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일 같았다. 그녀가 일종의 그런 여배우 같은 귀티를 풍기는 건 아니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가고 있었다.
가게 문에는 경종이 없어 조용히 열리고 닫혔다. 희미한 빛 아래 떠도는 먼지 틈으로 나무 냄새가 풍겼고 작은 조명이 밝힌 어둠은 그늘이 되어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그녀를 덮고 있었다. 내가 제법 가게 깊이 들어와도 그녀는 인기척을 못 느꼈는지 계속 테이블에 고개를 숙인 채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헛기침을 했다.
-흠.
먼지들이 부산스럽게 흩어지면서 나무 가루들이 달아났다. 그 바람에 그녀는 길고 풍성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는 불쑥 나타난 손님을 쫓는 것 같아도 초점은 여전히 테이블 위에 둔 것처럼 보였다.
-아, 어서 오세요. 죄송해요. 한창 작업 중이어서 들어오신 줄도 몰랐네요.
그늘진 가게 안에서 보니 그녀의 얼굴은 밖에서 볼 때보다 더 하얘 보이는 것 같았다. 시종일관 보였던 진지한 표정 탓에 그녀의 나이를 나보다 위로 잡아 봤었지만 머리를 묶는 동안 드러난 그녀의 쌍꺼풀 없는 눈꼬리 부근에 촉촉한 윤기가 도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그녀가 나와 비슷한 대학생 끝 무렵의 나이쯤이라고 생각을 하게 됐다.
-어떻게 오셨어요?
그녀로서는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어수룩하게 허를 찔리기라도 한 것 마냥 우물쭈물 댔다. 그때 문득 일 년 전 공업 폐수에 떨어뜨린 인감이 생각났다. 얼마간은 필요 없을 것 같아 차일피일 미뤄둔 게 떠오른 것이다.
-인감 하나 파려고요.
-내, 이 주문서에 성함하고 연락처 적어 주시고요, 이름은 한글로 하실지 아니면 한자로 하실지 골라서 인각하실 문자 적으시고 또 서체도 골라주세요. 그리고 아래 칸에 재질 선택 하셔서 동그라미 쳐 주시면 돼요.
그녀의 요구는 예상보다 다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장이란 그저 나뭇가지를 파내서 깎고 다듬는, 그런 간단한 작업 정도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뜩이나 쇠붙이만 만지작거리던 내게 금속 재질 빼고는 다 총집합한 갖가지 재질 항목들은 골치 아프기 충분했다.
-재질이 중요한가요?
-거의 느낌차이죠. 맘에 드는 디자인을 고르는 거라 보시면 돼요.
그녀는 어느새 밖에서 볼 때처럼 테이블에 고개를 숙인 자세를 하고 있었다.
-요즘엔 어떤 걸 많이들 하나요?
-본인거세요?
-네? 아, 네. 제 겁니다.
-젊은 분들은 나무 재질보다 가옥(假玉)을 많이들 찾으시긴 해요.
마지막 항목인 재질을 비워둔 채 서성거리던 나는 의도치 않게 그녀가 앉아 있는 테이블 근처로 가까워졌다. 그러자 그때 날아 온 그녀의 하얀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죄송한데 그림자 져요.
-아, 예. 미안합니다.
머쓱해진 나는 엉거주춤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자리에서 허리 한 번 고쳐 잡지 않고 꼿꼿하게 앉아 작업에 열중하는 그녀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내가 들어오고 나서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햇빛은 똑같은 높이로 유리창에 붙어 일정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머리를 가지런히 묶어 그녀의 하얀 턱 선이 훤히 드러났지만 그녀 주위를 에워싼 그늘은 머리카락 한 올 무게만큼 가벼워지지도, 또 그 두께만큼 줄어들지도 않아 보였다. 그녀의 말투엔 냉담함보다는 정중함이 더 묻어 있었던 것 같아 나는 내 쪽에서 말을 붙여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모든 도장을 다 파시나 보죠?
-아뇨. 아직 배우는 과정일 뿐인걸요.
-그럼 후계자셨군요. 손님 입장에서 보기엔 믿고 맡겨도 될 것 같아 보였거든요.
-그래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가식 없이 진솔한 음성으로 답례했다. 하나 얼굴에 기쁜 내색은 찾을 수가 없었다.
-가업을 물려받으시는 건가요?
-네. 아빠가 여기 주인이시거든요.
-요즘은 이렇게 일일이 수작업으로 하지 않더라도 도장 파는 기계도 나오지 않나요?
-왜 없겠어요. 그런데 여전히 수공예 도장을 고집하는 어르신들이 있거든요. 그리고 기술을 배워두면 어떻게든 밥줄이 되는 거라고 아빠가 입이 닳도록 닦달하는 판이라서.
그녀는 말을 제법 길게 하면서도 손놀림은 전혀 둔해지지 않았다. 테이블 위를 보니 각기 길이나 크기가 서로 다른 칼들이 늘어져 있었다. 칼끝의 모양들이 저마다 다르게 휘어져 있었는데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보기엔 칼 손잡이마다 둘러진 테이프에 적힌 숫자만으로 겨우 그 차이를 구분 할 수 있었다. 그 옆엔 붓이 머리를 풀어헤친 듯 널브러져 있었고 또 그 옆엔 수북이 쌓인 톱밥이 산처럼 솟아있었다. 가게 먼지 속을 떠다니며 냄새를 풍기던 것이 바로 그녀가 종일 앉아 깎아낸 이것이었나 보다.
-다 작성하셨어요?
-아, 네. 여기요.
그녀가 갑작스레 채근하는 바람에 나는 보지도 않고 재질 선택 항목에 아무렇게나 대강 동그라미를 치고 주문서를 건넸다. 주문서를 받은 그녀는 찬찬히 살펴보다가 처음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 얼마 되지도 않는 침묵과 고요함에 침이 말라갔다.
-뭐 잘못된 거라도 있나요?
-아뇨. 이렇게 하신다는 거죠?
-네.
-알았어요.
그녀는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으며 주문서를 테이블 옆에 얹어두었다.
-왔냐?
-몸은 어떠세요?
-훨씬 나아지고 있다.
거짓말이 눈앞에 만져진다. 아버진 당신의 주름이 하루가 다르게 안쪽으로 파고들고 있다는 걸 온종일 누워만 있으니 잘 모를 만도하다.
-뭐래더냐?
-생각해보겠대요.
-생각해 본다는 말 따위 기대도 마라. 자기 욕 덜 처먹을 그럴싸한 변명거리나 생각하는 거겠지.
-삼일만 쿠사리 먹다보면 원숭이도 배우는 일인데요. 화장실 갔다 온 사이에 자리 뺏겨도 이상할 거 하나 없는 자리였어요.
-속 편하게도 말한다.
-이미 그렇게 된 일인 걸요 뭐.
확실히 사장의 거짓말도 혓바닥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곧장 만져졌다. 만약 그때 내 손가락이 조금만 더 말려 들어갔더라면 며칠 동안 깁스만 하는 정도로 상황이 일단락되진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사장에겐 사인해야 할 서류가 수두룩이 쌓였을 것이고 안전 관리 담당자들의 전화와 방문이 따라다니는 것과 더불어 고용주를 대상으로 한 의무 교육 참여 소환이 사장을 귀찮게 했을 테니까. 아마 내가 앰뷸런스에 올라타고 차량 뒷문이 닫히는 그 순간 이미 기다렸다는 듯이 누군가 내 자리를 꿰찼을 것이다. 그때 나는 무얼했나 떠올려 보니 응급실로 실려 가면서도 오늘까지 일한 일당을 계산해보면서 등록금만큼은 채웠다는 생각에 마음을 놓았었다. 마음이 놓이니 손가락뼈가 뒤늦게 아려오기 시작했고 고통을 잊으려고 학교 다니던 시절을 떠올려봤다. 어느 강의가 떠올랐는데 거기서 배운 실존주의에 따르면 우린 세상에 던져진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지금 시대에 우린 세상에 버려진 존재다. 이젠 그 학설이 달라진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들고 말았다.
갑자기 병실에 있는 텔레비전이 켜지고 소리가 나기 시작하자 동시에 아버지는 눈을 감았다. 화면은 쇼핑몰 채널에 맞춰져 있었다. 리모컨은 늘 그렇듯 병실 구석에 누워 있는 폐암 환자인 중년 아줌마가 독점하고 있었다. 화면에 나오는 쇼호스트는 골반까지 쫙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고 여성용 속옷을 소개하고 있었는데 믿거나 말거나 자기 몸매 라인의 비결이 바로 이 속옷 덕분이라고 흥분한 톤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옷걸이에 도장 파는 여자를 대입시켜봤다. 허튼 짓이었다. 아까 가게에서 그녀를 훔쳐보면서도 내 시선은 그녀의 골반까지는 물론이고 쇄골만큼까지도 아래로 내려가 보지 못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때 그녀에게서 육감적인 이미지를 머릿속에 담아 올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던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가 내 팔을 툭툭 건드렸다. 아버지는 손끝으로 서랍장을 가리켰다. 나는 서랍에서 라디오를 꺼내 아버지 귀 옆에 올려놓았다.
창틈으로 오후의 하얀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눈을 감고 라디오 소리에 귀를 완전히 묻은 듯 평온해 보였다. 갑자기 아버지는 누런 잔디처럼 마른 눈꼬리를 잔뜩 찡그렸다. 그럴 땐 라디오에서 광고가 나오는 순간이라는 신호다.
-사연보다 광고가 더 많은 게 라디오가? 게다가 요즘 광고도 다 지랄 같은 광고들뿐이다. 도무지 정이 안 간단 말이다.
-사연 안 보내실 거예요?
-내일.
아버지가 엽서에 적어 보낼 사연은 일 년 전에 죽은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였다. 입원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너무 건강해서 탈이었다. 어머니와 내겐 일상이 호흡 곤란과도 같이 숨통이 조이는 나날들이었다. 아버지는 이따금 나에게는 물론이고 어머니에게까지 손찌검을 하는 통에 어머니로서는 집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게 그나마 속이 편하다고 내게 입버릇처럼 하소연 하시곤 했다. 결국 평소처럼 집 밖으로 뛰쳐나간 날, 그 날 어머니는 덤프트럭에 깔리셨다. 그 날 내가 어머니를 못 나가게 잡았더라면, 그게 아니라 함께 뛰쳐나가기라도 했다면 뭐가 달라졌을까.
죽음만큼 진부한 게 또 있을까 싶지만 그만큼 진부하게 또 의미를 붙여주는 사람들이 바로 라디오 DJ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버지는 DJ의 가슴을 후려쳐 집에 박혀있는 낡은 냉장고를 바꿀 요량이었다.
-가 볼게요.
-호연아.
호연지기에서 호연. 남자란 모름지기 큰 뜻을 품고 세상을 두루두루 넓게 살아가란 의미로 아버지가 붙여준 이름이다. 막연히 거대한 그 무언가가 대체 무얼 말하는 건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무튼 많은 기대가 담긴 이름이란 것쯤으로만 알아두고 대강 살아 온 이름이다.
-네, 왜요?
-내일 오는 길에 엽서 한 장 사오너라. 제일 좋아 보이는 걸로다가.
-네. 알았어요.
-어디 갈 거냐?
-학교에 잠시요.
-뭣하러?
-복학 신청하려고요.
-알았다. 가 봐라.
학교로 가는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나는 다시 가게 건너 횡단보도에 섰다. 주홍빛 황혼이 내린 유리창 너머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착각인지 몰라도 그녀의 커튼 같은 머리카락이 좀 더 열어젖힌 듯 보였다. 횡단보도를 건너 나는 가게 문을, 병실 문을 열 때보다 그리고 오전에 처음 가게 문을 열 때보다 더 쉽게 열어젖혔다.
-어, 다시 오셨네요. 뭐 놓고 가셨어요?
-아니요. 그게, 저… 맞다. 아까 제가 작성한 주문서 좀 다시 볼 수 있을까 해서요.
그런데 그녀로부터 주문서를 건네받는 순간 삐걱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게 또 다시 다친 손가락이나 상할 대로 상한 고막이 문제를 일으키나 싶어 애꿎은 그녀의 손에서 까칠하게 주문서를 낚아채다시피 받고 말았다. 그녀 쪽에선 나름 놀랐던 모양인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나는 얼른 무안을 감추려 주문서에 얼굴을 묻었다. 거기에 유별난 점이라고는 생긴 것과 다르게 거창하기만 한 내 이름 말고는 별 게 없었다.
-저기, 아까 뭘 보고 재차 물어보신 거죠?
-아, 그거요? 그냥 요즘 젊은 분들치고 도장을 그런 재질로 주문하는 경우는 한 번도 못 봤거든요.
그제야 나는 내가 보지도 않고 동그라미 친 재질 목록을 살펴보았다.
-취향이 남다르시구나 싶었어요.
-그런 건 아니에요. 사실 이 나무가 뭔지도 몰라요. 그냥 아무 생각 않고 표시한 것뿐인걸요. 그건 그렇고 그쪽은 어떤 도장 쓰세요?
그녀가 고개를 들자 그녀를 덮은 그늘이 햇빛에 씻겨 하얀 얼굴이 환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약간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 도장이 없어요.
내겐 그녀의 대답이 자기는 이름 같은 건 가진 적이 없다는 것처럼 들렸다.
-보통은 연습할 때 본인 이름으로 도장을 팔 거라 생각하는데.
-제 이름은 예쁘지가 않은걸요. 깎고 싶지가 않은 이름이에요. 있잖아요 도장은 있죠. 없어지지 않는 한 평생 갖고 살아야 하는 거니까요.
살아야 한다는 그녀의 말은 내게 있어서 생의 어떤 의무감 같은 것을 연상케 했다. 그녀도 나처럼 세상에 버려진 존재일까. 그녀는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 내린 햇빛이 하얀 그늘처럼 보이는 바람에 차마 어떤 이름이냐고 물을 용기가 나질 않았다. 형식적인 위로랍시고 뱉었다간 자칫 대화가 엉망진창이 되기라도 할까봐 나는 얼른 화제의 키를 고쳐 잡았다.
-도장파기에서 제일 중요한 건 뭐에요?
-음… 특별할 건 없어요. 손 조심 하는 거예요.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는 이 저녁 무렵의 햇빛의 각도는 그녀가 작업하는 테이블 높이까지는 닿지 않았다. 그러나 어둠이 짙은 가운데 그녀의 길고 가는 손가락은 유난히 찬란해 보였다. 자세 보니 볕을 쬐지 못한 탓인지 무척이나 흰 그녀의 손가락에 깊은 지문처럼 긁혀있는 상처들이 또렷이 보였다. 내가 눈을 떼지 못한 채 말했다.
-까딱했다간 일을 못하게 될 수도 있겠군요.
-것보다 흉이 보기 싫은 걸요. 내가 평생 도장만 파다가 장인이 될 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죠?
그녀가 그늘을 벗고 대꾸했다. 그래놓곤 가게와는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말투가 저도 민망했던지 옅게 웃어보였다. 그리고 말을 다시 이었다.
-개명을 할까 해요. 그런 생각 안 해보셨어요?
-왜 안 해 봤겠어요. 어딜 가든 이목이 쏠렸거든요. 다들 기대가 가득한 눈길들로 날 바라봤어요. 무슨 일이든 뭐든지 잘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로 몰아갔거든요. 그런데 헛배짱만 크지 실속은 텅 비었어요.
-내가 파면서도 피식거렸다니까요. 재밌는 이름이긴 했어요.
-이름보다 더 재밌는 얘기 하나 해 줄까요? 군대에 있을 때 민가와 가까운 전방에 있었거든요. 한 날은 갇혀 지내는 게 너무 답답해서 몰래 담을 넘어 민가에 있는 중국집에 들어가서 자장면에 짬뽕에 탕수육까지 배 터지게 먹은 적이 있었어요. 에라 모르겠다하고 먹는 동안에 사장님 곤란해 하는 표정 보면서 몇 번이나 얹혔는지 참. 지금 생각해도 그 많은 걸 혼자 다 먹었다는 게 신기했다니까요. 아무튼 그걸 다 먹었다면 시간이 얼마나 지났겠어요.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부대에 돌아와 보니 난리가 난 거였죠. 부대원들이 전부 맨바닥에 머리를 박고 있었어요. 자다가 불려 나와서 팬티 바람으로 덜덜 떨면서 머리를 박고 있는 최고참을 보니까 모든 상황이 계산기 돌아가듯 후다닥 깔끔하게 정리되고 짧은 머리카락이 바짝 곤두서더라고요. 그 다음은 어떻게 됐겠어요. 분리수거장에서 고참들한테 워커발로 걷어차인 횟수를 큰 소리로 세야 했는데 두 자릿수가 넘어가고부터는 목소리가 안 나오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맞는 와중에도 참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게 맞다보니 배가 꺼졌는지 꼬르륵 소리가 나지 뭐에요? 그 바람빠진 풍선 같은 소리가 둔탁한 소리를 비집고 울려 퍼지니까 주위가 조용해졌어요. 그때 최고참이 화를 내야할지 어이없어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황당한 투로 한 말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아요. 야, 네 배때지 하나만큼은 호연지기다. 넌 뒈지는 순간까지 밥그릇 씹으면서 뻗을 줄 알아. 그러곤 군견 쇠 밥그릇을 가져와 내 입에 물리고선 계속해서 마저 때리더라고요. 그렇게 쇠맛을 질리도록 맛봐서 그런지 다음부터 철책 담만 봐도 넘을 생각은커녕 진저리가 쳐지더라니까요.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녀는 눈썹 사이를 오므렸다가 또 입술을 질끈 물었다가 이따금은 손으로 입을 가리기도 하면서 마지막엔 농도 짙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이건 내 동기의 이야기다. 당시 함께 담을 넘자던 동기의 유혹을, 나는 뿌리쳤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내 일화인 것처럼 떠들어 댄 건 담 안쪽에 덩그러니 남아있던 내 모습을 내세우기엔 부끄러운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층 앳되어진 그녀의 활짝 열린 웃음을 타고 좀 더 깊은 사연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왜 개명을 하려는지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아빠가 지어준 이름인데요. 언제인가 그 이름을 곰곰이 뜯어보니 내가 여기서 도장을 파고 있는 게 어쩐지 태어나 이름이 붙여진 그날부터 계획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뭐에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무섭잖아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안 돼요? 수공예 도장이라면 정통성도 있고 무엇보다 안정적이기도 하고. 또 마음먹기에 따라 의미 있는 직업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다. 도장이란 무서운 물건이다. 하지만 우린 그 조그마한 나무 위에 이름 석 자를 새겨 넣지 않고는 살아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인생이란 덮이는 관 뚜껑에 새겨질 그 이름 석 자를 평생 끌고 가야만 한다.
-의미라. 아빠 말로는 도장이란 게 재산을 들여다 오는 물건이래요. 웃기죠? 돈이란 게 없다가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잖아요. 도장에 묶인 돈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도장 없이 살 수 있나요 어디.
-아빠랑 똑같은 말을 하네요.
그녀의 말엔 호흡이 많이 실린 깊은 숨소리가 있었다.
-아, 그게 나쁜 뜻은 없었어요. 그냥 농담하려다 보니 그만. 미안해요.
-괜찮아요. 사과할 건 아닌걸요.
잠시 침묵이 흘렀고 나는 그만 일어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참, 잠시 어딜 가는 길에 들른 거거든요. 다음에 또 올게요.
-도장이 다 되려면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요.
-그전에 또 올게요 그럼.
가게를 나와 유리창을 돌아다보니 그녀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날 향해 웃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 남아있던 그녀의 잔상은 학교로 가는 버스를 막 타려는 찰나 걸려온 전화 한 통에 흩어지고 말았다. 병원이었다. 아버지의 주치의는 직접 할 말이 있다고 했고 어차피 내일도 도장 가게 앞을 지나 올 테니 학교야 내일 가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러나 그럴 일은 생기지 않았다.
주치의 말로는 아버지의 몸이 굳는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지고 있다고 했다. 일주일이라 말은 했지만 경험상 최악의 상황은 넉넉잡아 계산하는 법이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다. 주치의의 말을 나름 해석해봤을 때 아마 아버지는 한 시라도 빨리 수술에 들어가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어디 가게?
-학교에요.
-어제 갔잖아?
-일이 생겨서 못 갔어요.
-의사가 뭐래디?
-그냥 늘 똑같은 얘기죠.
-호연아.
-네.
-공부 열심히 해라.
아버지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눈을 감아버렸다. 이름만 던져 주고선 옛 추억 속으로 숨어버리는 안개처럼. 그 말은 내게 해결책도, 심지어는 한 푼어치의 위로조차도 되지 않았다. 그때 폐암 환자 아줌마가 텔레비전을 켜자 아버지는 구시렁거렸다.
-저년이 얼른 향나무 관에 들어가야 좀 조용히 살지.
그러곤 얼어버린 내 팔을 툭툭 건드리며 서랍장을 가리켰다.
다음날 늦은 오후 가게 유리창엔 햇빛이 거의 시들어 가는 볕을 밀어 넣고 있었다.
-왔어요?
그녀가 친근하게 반겨주었다. 하지만 내겐 사무적인 용무가 있어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열었다.
-도장 줄래요?
-네?
-다 된 거 맞죠? 다름이 아니라 급하게 쓸 일이 있어서 그래요. 지금 줄 수 있어요?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지만 미소를 완전히 거두진 않았다. 그리고는 눈꼬리에 촉촉이 옅은 미소를 머금어 둔 채 테이블 아래로 몸을 숙였다. 그러자 유리창을 넘어 들어오던 햇빛의 사각지대 아래로 그녀의 몸이 완전히 파묻혔고 전신이 그늘 속에 가려졌다. 나는 그녀가 사라진 착각이 들 정도로 눈앞이 깜깜해졌다. 얼마간 더듬거리는 소리가 환상처럼 들렸고 그늘로부터 점차 가까워지는 드르륵 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고무바퀴가 구르는 소리와 철심이 삐걱거리는, 마치 공장에서 내 손가락을 아작 낼 것처럼 쇠로 된 이빨이 맞물리는 소리가 폐부를 파고들었다. 어느덧 그녀는 내 옆에 바짝 다가와 있었다. 날 향해 내민 포장된 도장 케이스는 축 늘어진 내 손 높이에 와 닿았고 그보다 낮은 위치에서 그녀의 시선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 훨씬 아래쪽에 그녀의 떠 있는 발을 태운 바퀴달린 의자가 수줍게 멈춰 서 있었다. 나는 말없이 도장 케이스를 받아들었다. 그녀가 남아있던 희미한 미소를 짜낸 채 말했다.
-또 오세요.
은행원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급한 돈이 필요하냐며 예사말을 던졌다. 이 땅에서 내 또래가 좋은 일로 적금을 깨러 오는 경우가 있을까. 나는 나와 겨우 탁자 하나 간격을 두고 무심한 말을 내던지는 은행원이 라디오 DJ와 별다를 바 없는 인간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라디오 DJ가 어머니의 죽음 값으로 냉장고를 줄 수 있다면 이 은행원은 내 대학 등록금의 죽음 값으로 아버지의 굳어가는 몸을 녹여주는 해동기인 셈이다.
-여기 형광펜으로 칠해진 곳에 사인해 주시면 돼요.
-네? 도장은 필요 없나요?
-네. 그냥 서명만 해주시면 돼요.
도장케이스를 열려다 말고 나는 허탈해졌다. 표시된 곳에 서명을 다 마치고도 개운치 않아 서류를 이리저리 뒤집어 다시 보았다. 정말 그게 전부였다. 일은 도장도 필요 없이 간단하게 끝나고 말았다.
김호연님. 그렇게 적힌 통장에 들어 온 액수의 금액을 보니 그것이 내 호연지기의 최대 한계를 나타내는 지표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내 소유라고 해서 자유로울 수 없는 돈이었다. 통장에 새겨진 금액의 잉크는 아버지의 척추로 스며들어 갈 것이고 아버지의 손가락에서 써진 잉크는 라디오 DJ의 혓바닥으로 스며들어 우리 집 한 구석에서 냉장고가 되어서는 또 다시 낡아 갈 것이다. 결국 나는 내 손가락을 거의 아작 내면서 번 돈으로 낡아 갈 냉장고를 사게 되는 것이었다.
걸어가면서 열지 못했던 도장 케이스를 열어 보았다. 좋은 일로 적금을 깨러 오는 젊은이가 없는 것처럼 향나무로 도장을 만드는 젊은이 역시 없지 않을까. 도장에선 언젠가 한 번 맡았던 적이 있는 묘한 향과 더불어 그녀의 손에서 묻은 듯한 온갖 나무 냄새와 비누향도 함께 났다. 도장을 눕혀 인각된 이름을 보았다. 김호연. 양각으로 판 모음의 뾰족한 획이 힘차게 위로 뻗어 있었지만 둥그런 원 안에 갇힌 이름이 허리도 못 펴고 쭈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날의 관이 아른거렸고, 그날의 어머니 옆에 누워 있는 기분이 들었다.
걷다보니 신호등 건너편 가게 유리창너머 그녀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홍빛 황혼이 쏟아지자 가게 안으로 그늘이 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두워지는 가게 안에서 그녀 하나만은 유난히 환해지는 것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내가 그 그림자를 흡수하기라도 하는지 내 온 몸이 검은 그늘로 뒤덮이는 것 같았다. 움직일 수도 없이 이건 마치 수의를 입은 기분이었다. 그때 한 행인이 지나가다 내 등에 쿵하고 부딪쳤다.
-뭐야? 눈을 어따 두고 다니는 거야?!
도리어 신경질을 부리던 행인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구기며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내 손에 있던 도장도 사라진 걸 알았다. 그때 횡단보도로 덤프트럭 한 대가 지나갔다. 고무바퀴가 구르고 철심이 삐걱거리며 손목이 아작 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나무가 으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여자의 비명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마지막 소리는 내 귀에만 들렸는지 주변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제 갈 길을 갔다. 내겐 다시 도장이 없어졌다. 그러나 나는 처음처럼 저 가게 문을 열고 걸어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내 그늘이 그녀에게 묻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겐 언제까지고 그녀 이름이 새겨진 도장이 없을 것이다. 그녀는, 붉은 인주 범벅으로 자기 이름이 짓눌리는 도장을 판다는 건 결국 자기 관을 스스로 짜는 일이었음을 알고 있었지 않았을까. 이제 알았다. 어머니의 하얀 얼굴은 결코 죽음의 빛깔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같은 얼굴빛을 띤 그녀는 세상에 버려지지도, 그렇다고 이미 던져진 존재도 아니었다는 것을. 달릴 수도 없는 그녀는 세상을 뛰쳐나간 존재였다는 것을. 그녀는, 언젠가 집을 뛰쳐나간 그날의 어머니처럼 그녀 스스로 새로 지은 이름을 가슴에 품은 채 법원까지 힘차게 바퀴를 굴려 갈 것이다. 내가 만약 그날의 어머니를 따라 뛰쳐나갔더라면 오늘이 달라졌을까. 관 속에 누운 어머니의 하얀 얼굴을 끌어안고 아버지에게 어머니를 살려내라고 울부짖었다면 이토록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어머니의 원래 바람대로 관 뚜껑에 이름을 새기지 않고 화장을 한 뒤 강물 위로 뿌렸다면 내게 지금처럼 두려움이 찾아오지 않았을까. 결국 나는 등을 돌리고 말았다. 돌아서서 가는 이 길을 걷다 보면 발길에 치이는 건 높은 철책 아래에 있는 병실 문일 뿐 더 이상 도장 모형은 아닐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문득 눈가가 가렵기 시작했다. 눈가로 쏟아지는 주름에 메말라가는 눈꼬리 위로 아린 통증이 찾아와 눈을 감고 말았다. 세상이 온통 그늘로 뒤덮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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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당선작 심사평
제17차 <창작콘테스트> 은상은 소설부문 김서현 씨의「도장 파는 여자」를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소설가 김영찬 / 소설가 김충근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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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부문
■ 어셔가의 몰락
- 이한비
어셔가로 마차를 타고 급히 그곳에 당도하려하오.
오랜만에 만나는 로더릭의 안색이 몹시도 좋지 않았었소.
그는 잿빛의 얼굴이 되어 버렸소만,
폭우가 마차를 몰고,
덜컹이는 수레에 앉아 그의 편지를 읽고 있었지.
마차의 바퀴가 늪에 빠져 나오기를 반복하고 있소만,
로더릭!
난 늦을것 같소.
이대로 폭우는 계속될 것 같소이다!
"어이! 아직 멀었는가?" 하고 창을 열어
마부를 재촉했소만,
"이만하시오. 이만하시오."
로더릭, 나도 이미 늦었소...
■ 눈, 코, 입
- 이한비
부르동은 부춧간에서 햄 3Kg을 산 후 알베르토의 집으로 향하는 길 이었다.
가랑비가 내려 우산을 들기도 무엇한 상황이었고 비가 내려 부춧간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가 코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걸 이렇게 어깨에 매고 길을 향해야 하니 여간 비위가 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들 로트랙이 유일하게 좋아하는 이 햄을 사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들만 아니었다면 브루동은 접하기 힘든 생선이나 채소류 따위를 섭취하고 싶다. 로트랙은 편식이 심한 편이라 육류가 아니면 도무지 포크질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햄을 늘 잘 먹는 것은 아니다. 식사시간 집중을 잘 하지 못할 뿐더러 햄으로 비행기 놀이를 해가며 포크를 입에 넣어주지 않으면 식사하지 않는 날들이 더 많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 솟을 때도 있지만 쩝쩝 씹어대는 모습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곤 한다. 로트랙의 보모가 그렇다고 말했다. 부르동은 아들을 무척 사랑한다. 보모는 "이렇게 별난아이는 처음봅니다." 하고 말할 정도로 로트랙은 산만한 아이이다. 이 아이가 커서 무엇이 되려고 하나 하고 부르동은 생각한다.
오늘은 알베르토와 술 약속이 있다. 해는 정오를 가르키지만 오늘이야 말로 알베르토를 곤란하게 만들 무언가를 단단히 만들어 놓겠다고 우격다짐을 했다. 이런것을 보면 로트랙은 참 부르동을 닮았다. 부르동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알베르토를 골려주겠다고 생각했다. 알베르토는 촌철살인으로 부르동을 곤란하게 만든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매번 큰 결심을 하고 알베르토를 만나지만 번번히 실패를 겪었기 때문이다.
옅은 비가 멈추어가나 하고 생각할 때 즈음 부르동은 땅에서 빛나는 무엇을 보았다. "어라...? 이게뭐지?" 하며 고개를 숙이며 빛나는 물체를 보았는데 그것은 요즘 부인들이 가지고 다니는 큐빅이 박혀 있는 손거울이었다. 이렇게 큰 물건이 이렇게 땅에 버려져도 좋은건가 할정도로 단순한 물체의 실종이 아니라 고의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큰 녀석이 땅에 버려져 있으니 부르동은 알수 없는 소름이 돋았다. 이것을 주워가도 되냐는 자문자답에 쉬이 답을 내리기 힘들었다. 이런물건따위 아내도 없는 내가 주워가져 무엇하냐는 생각과 함께 지나치려는 순간 손거울에 비친 부르동의 코에 콧털이 삐죽나온 모습에 "아차차!"하며 손거울을 집어 들었다. 한번 들었으니 쉬이 버리지는 못할테고 이 콧털만 제거한다면 로트랙의 보모에게나 주어 버려야지 하고 생각해버렸다. 부르동은 엉거주춤 손거울을 쥐고서는 축축한 콧속을 정리한 후 바지춤에 쥐어 넣었다.
샌들을 신은 터라 발가락 끝이 촉촉하고 햄 냄새가 아니라면 여간 좋은 느낌이 아닐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저 멀리 알베르토의 집이 보인다. 부르동은 "영차" 하고 햄꾸러미를 손에 들고 이따금 봉지를 어깨에 둘러매기도 하고 갈 길을 재촉했다.
■ 고르고네스의 딸
- 이한비
저기 멈춰서는 경주마.
분노로 꾸준히 달리는 나의 증오.
2시를 알리는 종소리는 오직 나에게만 울리고.
"나의 딸아! 저기 저 소년이 너의 몸을 애타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 저 내달리는 말 한필을 저에게 보내 주셔요."
저 재앙의 말발굽 소리.
그리고 환희에 찬 소녀의 소원.
나의 딸은 아테나의 저주를 받았다네!
아스타트가 빛나는 2시의 종소리는 새벽을 알리고.
그렇게 나의 증오는 달리고 달리지.
나의 딸아!
나의 메두사!
너의 시간속에 나는 몰약을 바르고
아들을 조소하는 너의 실체는 나의 분노.
마비된 너의 심장은
저 판도라의 상자 속으로 넣어 두자꾸나.
그래, 너의 뱀과 함께 열매를 넣어 저기 저 거울속으로부터.
■ Letter 1
- 이한비
너는 겨울에 태어난 새하얀 눈송이 같은 소년.
나는 철탑속에서 멋진 왕자님을 만났지.
오랜밤의 나라에서 오신 고귀한 사신.
여름의 차가운 장미였을까?
가슴속의 흐르고 흐르는 시간은
소녀를 거울속 노인으로 만들어 놓았고.
비통한 사신 또한 오래된 임금으로 나라를 지키고 있단다.
그러나 소년아!
흐르고 흐르는 시간은 마치 레테의 강과 같아.
철탑속의 소녀와 사신인 왕자는 어느새
늦은시간 깊은 잠으로 사라질지도 모르지.
신의 명부는 아무도 모른단다.
새하얀 눈송이 같은 여호수아!
나의 아들.
어느새 추운겨울이 지나고 봄이 온단다.
너의 탄생은 목련꽃의 봉우리가 봄볕을 터트린
꽃망울과 같이!
싱그러운 너의 첫 미소와 같이!
그래. 너의 어느날.
소녀는 아들의 눈송이를 맞으며 손을 맞잡는다.
오래된 임금과 함께.
사랑을 담아...
■ 춤
- 이한비
핏방울에 손이 닿아 장미가 되고,
이 새벽의 안개가 그 가시를 감싸 사랑이 됩니다.
저녁놀은 한송이의 나리꽃이 되고,
죽음은 그 검은 낙인이 찍혀 저승화가 됩니다.
호숫가에 얼굴을 비추면 수선화가 되고,
그 꽃에 손을 대면 메아리가 됩니다.
저 하늘을 응시하면 후리지아가 되고,
눈을 감으면 봄의 향기가 됩니다.
그리고
그대의 허리춤에 손을 얹으면 음악이 되고,
우리들의 움직임은 왈츠가 됩니다.
바로 이 꽃무덤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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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당선작 심사평
제17차 <창작콘테스트> 은상은 시(詩)부문 이한비 씨의「어셔가의 몰락」외 네 편의 시를 선정했다.
이국적이면서도 다소 몽상적인 분위기의 시가 개성을 돋보였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시인 김호철 / 시인 정은정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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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부문
■ 설경
- 이소현
눈이 내리는 밤이면 아버지는 10킬로
갈빛 비료포대를 길목마다 쌓아놓고는 했다
깊게 가라앉은 발자국을 따라 물들던
누런 땀방울은 하얀
눈송이를 조금 녹이고는 해서
다시 떨어지는 눈은 온전히 그림자를 덮지 못했다
늘어나는 주름살 따라 해마다
낡던 땅은 한 포대
비료를 더 마시고는 했다
늦둥이 외동딸의 책가방을 위해선
삼만원 비료는 아무것도 아니라던 아버지의 어깨에는
언제나 검은 지게자국이 길을 닦고 있었다
한 해, 한 해
쌓이던 비료포대는 벌써
육십을 무장하고 있었다
낡은 고무장화는 이제 밑창이 까졌고
오래된 밀짚모자는 갈라진 짚을 조금씩
떨어뜨리고 있었다
육백 킬로 짐을 인 어깨는
눈송이 사이를 꼿꼿이 지나고는 해서
작은 밭 한켠에 쌓은
오백그람 질 좋은 황토 빛깔 흙들은
투명 비닐 팩에 담겨 언젠가
숨 쉴 날을 기다리는 중이었지만
늙어가는,
찌꺼기 밭을 메운 흙은 자꾸만 검게 닳아갔다
눈 내리는 겨울이면
■ 유년
- 이소현
골목을 굽이굽이 돌다 마주하는 오래된
가게에는 간판이 없었다
낡은 마을 깊숙이 감춰진 가게의 주인아저씨를
동네 아이들은 언제나
옥수수 아저씨라고 부르고는 했다
쪼그려 앉아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언제나
이백 원짜리 아이스크림을,
고르라 해놓고 늘 본인이 고르시던
겉은 뻥튀기에 속은 슈크림을 얼린
옥수수 모양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 쯤이면
집으로 가던
엄마들은 늘 삼백 원
콩나물이나 두부를 사 가고는 했다
밀물처럼 어둠이 불쑥 좁은
마을을 덮을 때면 거리를 쓸어 담던
아저씨는 홀로 남은 밤마다
조금씩,
떨어져 나,
간 삶들을,
엮어내고는 했다
마을 입구를 메운 쓰레기통으로 어렴풋이
해가 떠오를 때면 비추는
똥에서는 연기가 나기도 했다
강아지 똥도 아닌 사람 똥에
으레 놀라고는 했지만
옆에 놓은 백삼십 원 공병을 줍는 할머니는
낡은 약국 봉투로 똥을 치우고는 했다
낮은 지역에 뜨는 해는 따뜻하다는 걸
기억하는 날
■ 물 속 잠긴 도시
- 이소현
하늘을 오르는 물거품은 점점 커진다는 소문이 있었다
물에 잠긴 세상에는
해가 너무 멀리 뜬다는 사실을 알던 날이었다
오물거리는 입을 재촉하며
걷는 걸음은 퇴화된 지느러미처럼 느리게
흩어지고는 했다 파도는
낮마다 햇빛을 몰고 가버리고는 해서
보이지 않는 길을 걸을 때마다
도시를 달리는 자동차들은 얼굴로 메케한
한숨을 뿜어내고는 했다
소원을 버려야 살 수 있다는 도시는
어두운 그림자로 입을 막았다
바쁘게 헤엄치는 파도가 짓이긴 것은 오르는 거품 한 줌
금방이라도 떠날 수만 있다면 고향 행
열차를 끊어 달려가고는 싶었지만
그림자는 쉽게 벌어지지 않아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건 가벼운 공기방울뿐이었다
자꾸만 커지는 물거품은 수면에
닿으면 죽어버릴 거라고 중얼거리며
어쩌면 죽어버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눈을 돌릴 때면
눈으로 들어오는 건 지독한 어둠
일렁이듯 차오르는 잔뜩 일그러진
거리뿐이었다
수면을 닿은 공기방울은
태양까지도 힘차게 오르고 있는데
■ 어제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요
- 이소현
허공은 부유하는 단어만 담고 있어
하늘을 씹는 사람은 분명
제 꿈을 이룰 거라 하지만 질긴
공간은 아무도 삼키지 못했어요
아직 끝나지 않은 어제의 이야기
반복되는 낱말들은 단단하게 언 아이스크림 같아
달콤한 듯 했지만
진득한 얼룩을 늘어뜨리고는 해요
억울하게 날갯짓하는 까마귀는 마냥
검은 털을 털어내고 있어요
의미 없이 돌아가는 자전거 바큇살 같은 인생은
헛감켜 어쩌면 지친 브레이크를 타박하는 중이나
옆집아이가 뱉어내는 울음만큼
커질 것도, 서러워질 것도 없는 삶의 자국은
공중에서 피어난 밤을 닮아
그림자만 남긴 채 사라졌어요
바람은 연민처럼 불고 있고
하얀 새가 날아간 저녁을 지키는 까마귀는
세상에서 가장 구슬픈 울음을 지어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어제의 이야기가 계속될 때에
■ 그대는 거기에 있어요
- 이소현
그대는 거기에 있어요
스치는 바람이 설핏
그대를 잊고 지나쳐갈 쯤
아스러지던 머리카락이
그대의 뒷모습을 훑을 때면
입술은 물들고는 했어요
핏빛 색으로
밤은 이윽고 지나간다는
이야기를 되새김질해요
나는 길을 벋어나고 싶지 않아
그대가 길을 잃을 것 같은 날에는
스치는 바람으로 발목을
휘어잡아 줄 테니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그것은
어쩌면 목은 휘감기도 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것이 그곳에 머물고 있다면
그대는 묵묵히 그 길을 걷기만 해요
언젠가
그대가 걸어온 이야기가 들릴 때면
나는 그대 가는 길마다
하얀 꽃잎을 흩뿌릴 터이니.
그대는 언제나 거기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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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당선작 심사평
제17차 <창작콘테스트> 동상은 시(詩)부문 이소현 씨의「설경」외 네 편의 시를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시인 김호철 / 시인 정은정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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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 순한 하루에도 봄은 온다
- 선민영
머리 위로 어둠이 맺힌다. 분침과 초침이 정확히 12를 가리키는 순간 스위치를 내리며 소리친다. “순한 하루였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경기도 최강 방패라는 의무 경찰 기동 1중대의 인사말은 ‘순(盾)한 하루’라는 말이었다. 하루 웬 종일 방패와 함께 근무하는 날 수고했다는 의미로 쓰이는 은어였다. 그도 그럴 것이 1중대의 근무는 항상 방패가 되어 막는 일이었고, ‘순(盾)한 하루’ 중 제대로 순의 역할을 하지 못해 뚫리는 날은 선임들의 창과 같이 날이 선 분노를 받아내야 했다. 나는 그 자체로 방패가 되어야 했다.
최강의 방패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방패가 된다는 것은 중대라는 산 속에 가지 많은 나무 한 그루가 되는 일이었다. 나무는 시위대가 바람이 되어 흔들고 때로는 태풍의 위험반원처럼 날카로운 바람으로 나의 몸을 도려내도 더욱 더 깊숙이 뿌리 내려 그 자리에 서있어야 한다. 흔들릴수록 뿌리 깊은 나무가 된다고 했던가, 원치는 않았지만 최강의 방패라는 위명 탓이었는지 바람은 잦았고 나무들의 나이테는 늘어갔다.
나이테와 함께 가지가 늘어간 탓인지 마음의 폭은 좁아졌다. 나를 향해 꺼지라는 듯 소리치는 그들이 미웠다. 벽돌을 던지고 쇠파이프로 내리치는 시위대를 상대할 때면 약을 넘어 독이 올랐다. 하지만 방패일 뿐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막고 서있는 것뿐이었다. 단단한 샌드백이 되어 막고 서있는 내가 뚫리지 않으면 시위대는 원하는 장난감을 갖지 못한 아이처럼 떼를 쓰곤 한다. “폭력경찰 물러가라!” 이런 외침은 날이 선 우박이 되어 내 밑동에 생채기를 낸다. 시위대라 불리는 이들이 참 미웠다.
가지 위에 빳빳한 가시가 돋치고 있을 즈음 봄이 되었다. 출동 전 중대에는 여느 때와는 달리 비장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4월의 한 가운데에서 딱 하루가 더 지난 날, 그 날은 천개의 바람과 마주하는 날이었다. 출동 전 교양 사항에는 시위가 길어질 것이니 오늘 안에 부대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하지 말라는 지시 사항이 있었다. 이런 지시 사항이 있는 날이면 기대마에 탑승하는 의경들의 모습에는 분노가 서려있다. 한탄하는 선임들과 욕을 하는 선임들이 보였다. 세월호의 슬픈 이름은 모난 순(盾)이 된 우리에게 고단한 하루를 예고하는 일기예보 같은 것이었다.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인지 지원 중대 역할을 맡게 되었다. 우리의 임무는 시간별로 각 요지에서 대기하다가 위험 상황이 있을 시 유동적으로 이동해 지원 하는 것이었다. 요령껏 요지를 잘 피해 다니면 누구도 다치지 않고 끝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능력만큼이나 뛰어난 직업정신을 가진 중대장은 중대를 난장의 한복판으로 끌고 갔다.
난장의 가운데에는 진도에서 올라온 천개의 바람이 있었다. 상황이 어떠한지 인지하기도 전에 다급한 목소리로 막으라는 무전이 들렸고 어느새 나는 그들 앞에 섰다. 시위대 앞에 서는 것은 언제나 긴장되는 일이지만, 땅 속 가장 깊숙한 곳에 뿌리박은 나무로서 어느 대찬 바람이 불어도 뚫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그들과 마주 섰다.
그들 역시 여타 시위대와 다를 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은 창이 되어 뚫으려 할 것이며 나는 방패가 되어 막으면 될 일이었다. 그래서 막았고 뚫리지 않았다. 모(矛)같은 순(盾)이 된 나에게 벽이 되는 일은 이제 간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바람은 그 곳에서 부터 불기 시작했다.
그들이 울기 시작했다. 아니, ‘울다’보다는 ‘울부짖다’라는 말이 그 모습을 설명할 수 있는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들은 뚫리지 않는 산성에 주저앉았다. 주저앉아 울부짖으며, 아이들의 이름을 외치고 제발 비켜달라고 했다. 순간 내 가슴에 커다란 벌레 한 마리가 내려앉은 듯 했다. 벌레가 내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가장자리까지 모두 씹어 먹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식 잃은 그들의 울부짖는 모습을 보면서도 막고 서 있는 일은 그대로 질식할 것 같은 고통이었다.
나 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막고 서있던 모든 이들이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우리 역시 죽도록 비키고 싶었다. 하지만 발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물러서기엔 너무 깊이 뿌리 박혀 있었고, 그 나무들이 뿌리박고 있는 토양은 군대이고 명령이었다. 나는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산성의 나무 한 그루가 되어, 쉰 목소리로 울부짖는 그 바람에 찍히며 꼬박 하루를 견뎠다. 아마 나는 전역증을 받기 전 까지 잎 없는 겨울나무의 모양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해산이라는 말은 동이 틀 때 쯤 들려왔다. 부대로 돌아가는 길에는 누구도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 아마 꼬박 하루를 견디며 여러 감정들이 뒤섞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복귀 후에 많은 것들이 씻겨 내려가는 샤워를 했다. 머리를 덜 말렸는지 배게 위에 무겁게 머리를 뉘었다. 그 때 소대 가장 후임이 불을 끄며 소리쳤다.
“순한 하루였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 어느 날 보다도 많은 생채기가 난 하루를 보냈다. 평소에 정 없던 선임들까지도 모두 수고했다고 서로를 위로하듯 격려했다. 참 순(盾)한 하루였다. 아니, 순(洵)한 하루였다. 괴리로 들고 있던 방패 때문에 속으로 눈물 삭히게 되는 하루, 그래 순(盾) 때문에 순(洵)한 하루였다. 눈물과 함께 가시가 쓸려 내려갔다. 나무는 더 이상 바람이 밉지 않았다.
순(洵)한 마음으로 한 번의 봄을 더 보낸 뒤 나는 꽃잎이 되었다. 남은 나무들에게 순한 하루를 보내라는 말로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전역증을 받았다. 그리고 지금, 다시 봄이 되었다. 그래도 봄과 봄 사이의 겨울이 마냥 춥지만은 않았던 듯 세월호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고 바람에게도 봄이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다. 세월호가 진실과 함께 인양되고 있다. 그 곳에서는 많은 것들이 떠오를 것이며, 아직 많은 것들이 변해야 한다.
막는 사람과 막혀버린 사람, 극단으로 보이는 두 집단이 같은 고통을 느끼는 이 일이 끝났으면 한다. 그 날처럼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야하는 아픔은 없어져야 한다. 이제 바람은 가고 싶은 곳으로 불어야 하고 나무는 꽃을 피워야 한다.
전역하는 날 집에 가는 길은 날이 너무 좋았고, 노오란 개나리를 보았다. 심술궂게 그 노란색에 손을 뻗어 꺾어보지만 햇볕은 계속 따사롭다. 세상은 누군가 아무리 꽃잎을 꺾어도 그 날 내게 불던 바람처럼 봄이 계속 다가오는 것이었다.
■ 유자차를 내밀었다
- 선민영
눈이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 날이 어두워져 달이 뜨고 이제 잠과 함께해야하는 시간을 스마트폰만 잡고 있었으니 내 눈도 어둠에 동화 되어 시야를 가리는 것이겠지. 아마 그 어둠과 함께 나도 같이 밤으로 변했나 보다. 눈에 초점이 예전 같지 않으니 선명히 보이던 것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변했어” 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됐고 그 변화는 밝음보다는 어둠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스스로도 전보다 많이 건조해지고 있음을 느낀다. 밋밋한 사람으로 살아감은 쓰라린 일이었다. 신나는 일이 있어도 기쁘지 않고 슬픈 일이 있어도 그다지 울컥하지 않았다. 감정의 진폭이 적어 함께하는 이들과 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없는 것은 내게 짙은 그림자를 더해주었다.
그 우울이 아물지도 않고 깊어지던 계절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게 되었다. 그 만남은 겨울의 마지막 한 잎이 떨어질 때쯤이었다. 설렘과는 거리가 먼 계절이었기에 큰 기대를 갖지는 않았지만 새로움은 나에게 약간의 떨림을 가져다주었다.
사실 책임감보다는 한 가지 바람으로 학생회를 시작했다. 아이들과의 새로운 만남으로 또는 그들 앞에 서서 그들과 함께 한 해를 지내는 것으로 내 어둠에 손톱달 만큼의 빛이라도 내보여 밤을 몰아내 백색이 되고 싶은 소망. 소박하지만 커다란 기대였다. 하지만 정말로 그 바람만으로 괜찮을지 밤마다 잠이 무거워지고 덜컥, 겁이 난다
걱정으로 그리고 기대로 오티의 첫날을 맞이한다. 피켓을 들고 서있으면 얼굴 가득 새로움을 간직한 아이들이 하나 둘씩 내 앞에 선다. 낯선 얼굴과 서먹한 분위기가 주변을 돈다. 마지막 한 잎뿐인 겨울이라지만 초면의 사람들을 만나는 긴장감은 그들의 손을 시리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라, 유자차를 내밀었다. 온기는 손을 녹여주었고 아이들은 새하얀 웃음을 내보인다. 보름달의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스무살, 나이만큼이나 그들의 웃음에서는 빛이 나고 나는 또 덜컥, 가슴 가득 겁이 고인다. 나는 이들이 올 해 써내려갈 시나리오의 장르를 전지적 시점에서 써내려가야 할 작가이다. 그런데 나처럼 밝지 못한 인간이, 먹구름보다 더욱 덤덤한 내가 이들의 이야기를 과연 명작으로 이끌어 줄 수 있을까. 다시 아이들을 바라본다.
아이들은 항상 웃고 있다. 그들의 미소를 보는 것은 회장으로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호사이다. 한 번의 미소에 몇 가지 가식이 들어가 있는 나와는 달리 그들의 웃음 속은 순백의 진실뿐이었다. 나와는 참 다르다. 있는 그대로의 그 순수함은 너무나 소중해 보였고 닮고 싶었다.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내 회색빛을 순색으로 순화시키고 싶었다.
그 순간 아이들의 얼굴에 어릴 적 처음으로 샀던 장난감이 겹쳐 보인다. 나는 그 장난감이 너무 좋았고, 그래서 몇 날 며칠을 가지고 놀았고 장난감은 금세 고장이 났다. 아이들과 함께 새로운 만남을 이어가게 될 것이 기쁘다. 하지만 내가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그 때 고장나버린 장난감처럼 어떠한 아픔이 될까 혹시 부담스러운 일이 되지는 않을까
또 덜컥
겁은 부지런히도 잠에서 깨어난다.
내가 걸어온 기나 긴 복도를 둘러본다. 학교를 다니는 일은 수많은 관계와 함께한다는 것이다. 그 관계라는 끈 속에는 분명히 즐거운 일과 행복한 일도 있다. 그렇지만 계속되는 지치고 힘든 일은 그 끈을 점점 회색으로 변하게 한다. 마치 나처럼. 학업과 가정, 선배와 후배, 사건과 갈등은 그들을 나와 같은 탁색으로 만들려 할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더 다가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덜 말하는 것으로 더 말해주고 싶다. 그들이 나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항상 활짝 맑게 웃어 주길. 지금처럼, 순수하게.
희미하게 밝음이 버려지던 때 나는 유자차를 내밀었다. 유자차를 내밀면 온기를 가득 담은 손을 움츠리며 순백의 웃음을 보여준다. 빙긋한 웃음이 제법 눈부시다. 긴 어둠을 지나 복도 끝에 다다랐다. 아이들이 내게 보여주는 미소는 향그럽게 차오른다. 그 미소는 동그랗게 빛나는 보름달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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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당선작 심사평
제17차 <창작콘테스트> 동상은 수필부문 선민영 씨의「순한 하루에도 봄은 온다」외 한 편의 수필을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수필가 유미숙 / 수필가 정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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