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수는 물이 말라버린 어정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복역하기 전까지 물이 고여 있었다던 어정의 밑바닥은 마른 혓바닥처럼 갈라져 있었다. 나는 취재용 카메라로 솔기가 터진 장기수의 낡은 양복과 시커먼 우물 안을 번갈아 찍었다.
예전에는 이곳을 더운 우물 골이라고 불렀습니다.
장기수가 말했다. 나는 뷰파인더를 통해 그를 바라보았다. 장기수는 어정의 모서리에 몸을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었다. 금세라도 어정이 혀를 내밀어 그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장기수(長期囚)라고해서 풍채도 좋고 흉포한 사람일 줄 알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그는 키가 작고 왜소했다. 여러모로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우물 안을 걷고 있는 겁니다.
뜻 모를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장기수는 훈정동(薰井洞)이라 적힌 도로 표지판을 가리키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고문 후유증으로 마비된 입꼬리는 웃을 때마다 일그러져 그는 웃어도 우는 것처럼 보였다.
미세먼지 농도가 높은 날이었다. 거리는 오염된 물속처럼 뿌옇게 흐려 있었다. 황사용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함께 훈정동 일대를 걷는 내내 장기수는 두 걸음을 못가고 멈춰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곤 했다. 그는 오른 다리를 조금 절면서 걸었다. 걸음이 느린 사람이었다. 나는 그와 보폭을 맞추며 걷다가도 점차 빨라졌고, 한참 뒤에 보면 그는 나와 다섯 걸음은 떨어진 곳에서 걷고 있었다. 그는 처음 땅을 밟은 사람처럼 여기저기 기웃대고, 걸음을 멈추고 어딘가를 한참 바라보았다. 자꾸 멈칫대기는 했지만 장기수는 길눈이 어두워 방금 지나쳤던 곳도 헤매는 나와는 다르게 훈정동의 길목을 훤히 꿰고 있었다.
바뀐 게 많군요.
개량한복을 입고 셀프 카메라를 찍는 학생들을 보며 그는 우는 듯 우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얼떨결에 시작된 동행이었다. 장기수는 수습기자인 내게 훈정동에 함께 가주길 청했다.
이곳이 내가 나서 헤엄치던 곳입니다.
비전향 장기수로 35년간 복역한 그는 훈정동을 감옥 이전의 고향이라고 했다.
여긴 비포장 도로였는데…….
귀금속거리를 지나며 그는 말했다. 그는 큰 건물이 없는 쪽으로 걸어갔다. 골목으로 들어갈수록 사람도 줄고 차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장기수의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장기수는 오가 소개해준 사람이었다.
자기, 취재력 시험 본다며.
오는 내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입사 2년차인 오는 항상 나를 자기라 불렀다. 내 노트북 모니터 창에는 지난주에 오에게서 받은 100분 스피치 예상 질문이 띄워져 있었다. 입사 이후 오는 줄곧 내게만 수습기자 실무평가에 도움이 되는 ‘족보’를 건네주곤 했다. 직속 선배가 아닌데도 그랬다.
자긴 데이비드 보위랑 닮았거든.
오는 말했다. 나는 검색 창에 데이비드 보위를 쳐보았다. 성별이 같다는 걸 빼면 보위는 얼굴이 둥글고, 코볼은 유난히 넓은 나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도와줄까?
오의 손이 내 가슴팍으로 서서히 내려왔다. 잘 다듬어진 오의 콧수염이 내 볼에 닿았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교도관이 있어. 그 사람이 일하는 교도소에 삼십 오년간 복역한 장기수가 있대. 간첩 혐의를 받아서 장기복역 했다던데 전향도 하지 않고 송환기회도 놓쳤다고 하더라구. 지금은 석방돼서 대전에서 같이 석방된 장기수들이랑 살고 있데. 그 사람 융통성도 없고, 사회성이 부족하긴 한데 흥미로운 취재거리라고 하더라. 나한테 취재하라는 걸 특별히 자기한테 알려주는 거야. 시험에서 좋은 점수 받아야지.
근데 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저한테……. 전 선배 직속도 아닌데.
자긴 보위랑 닮았잖아.
오가 속삭였다. 오의 손은 어느새 허벅지로 내려와 있었다. 수습기간은 2개월이나 남아 있었고, 실무평가는 바로 다음 주였다. 오의 손은 뜨겁고 축축했다.
어정이 있는 종묘에서 나온 이후로 장기수와의 대화는 뜨문뜨문 이어지다 곧 끊기곤 했다.
선생님은 지금 어디서 지내고 계세요?
나는 취재수첩을 뒤적이며 미리 생각해온 질문들을 장기수에게 늘어놓았다. 장기수가 녹음을 거부해서 애써 가져온 녹음기는 가방 안에 넣어두어야 했다.
대전 교구에서 작은 쉼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가족도 없고, 마땅히 갈 곳도 없는 사람들은 다 그곳에 머물도록 해주더군요.
장기수는 취재 내내 깍듯한 경어를 사용했다. 편하게 말을 놓으라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그 방에서 지내던 습관이 아직 몸에 배어 있다고 말했다. 장기수는 교도소를 ‘방’이라 불렀다.
취재전화에 긴장되지는 않았나? 삼십 오년 만에 출소하셨는데 심경은 어떠신가? 나와서 무얼 가장 먼저 하고 싶었나? 나는 그를 향해 수많은 질문을 쏟아냈다. 그는 침착하게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어떤 질문에는 짧게, 어떤 질문에는 길게.
그런 질문 말고 다른 질문은 없습니까?
한참 질문에 답을 하던 장기수가 돌연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조금 놀라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나는 기자 양반의 질문이 듣고 싶습니다.
지금 했던 질문이 다 제 질문인데요?
내 말에 장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기자 양반의 질문이 듣고 싶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궁금한 것이 없습니까?
장기수가 말했다. 오의 말처럼 고집이 센 사람이구나. 생각하며 나는 수첩을 뒤적였다. 동시대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통증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다시 한 번 송환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수첩에 적어온 다른 질문들을 장기수에게 던져보았지만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걷기만 했다. 장기수는 다시 종묘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피가 나는군요.
한참 걷다 장기수는 내 손을 가리키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새끼손톱 거스러미가 벗겨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공채시험을 준비하면서부터 나는 습관처럼 손톱을 뜯었다. 취재력 시험은 수습 공채 전형 중 가장 중요한 시험이었다. 실무과정을 평가하는 박 팀장은 이번 시험을 통해 심사의 당락이 결정된다고 말했다. 동기들은 시험을 준비하며 적성을 의심하게 되었다고 볼멘소리를 하곤 했지만, 나는 그들이 임용시험 합격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임원 중 같은 학교를 졸업한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고, 매주 실시하는 자기PR시간에는 높은 토익점수나 스펙을 언급했다. 아홉 명의 수습사원 중 지방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이렇게 끝내면 안 돼. 장기수와 종묘를 거슬러 올라가며 나는 그럴싸한 질문을 열심히 생각해보았다. 거스러미를 뜯으며 할 말을 고르는 내게 장기수는 난데없이 말했다.
인간으로 죽기위해선 인간으로 살아야합니다.
그의 말을 수첩에 재빨리 받아 적은 뒤 나는 그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전향을 거부하고 고문을 견디며 내가 되뇌던 말입니다.
장기수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그는 뭔가를 더 말하려 입술을 달싹대다 어딘가를 쳐다보며 말을 삼켰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에 검은 헬멧에 방패를 든 전경들이 일렬종대로 서 있었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가 조금 지나있었다.
선생님 배고프지 않으세요?
전 괜찮습니다.
장기수는 수감기간동안 하루에 한 끼만 먹던 습관을 출소 후에도 지켜오고 있다고 했다.
돈반을 하게 되면 육체도, 정신도 둔해지는 법입니다.
그가 말했다. 나는 신문사에서 매일 이 시간에 점심을 먹었다. 수습사원들의 점심시간은 한 시부터 한시 반까지 삼십 분 동안 허용되었다. 수습사원들은 함께 점심을 먹기보다는 각자 해결하는 편이었다. 편의점 도시락을 먹거나, 비스킷을 먹거나, 아예 굶거나. 점심을 먹는 삼십 분까지도 평가에 반영되었기에 모두들 빠르게 먹고 삼켰다. 출근을 한 이래로 파블로프의 개처럼 한시만 되면 자동으로 허기가 졌다.
인터뷰를 마친 후에는 곧바로 신문사에 들어가 봐야했다. 오가 부탁했던 회의 자료를 정리하고, 내일 저녁까지 보내야할 르포 과제를 완성시켜야 했다. 식사를 할 시간은 지금 뿐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배에서 괴상한 소리가 났다.
장기수는 내 배에서 나는 소리를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조금 시장한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는 식당을 찾기 위해 창덕궁 삼거리로 나와 조금 걸었다. 근처에서 대규모 시위가 열리는 모양인지 기동대 버스가 거리에 일렬로 늘어서 가드라인을 만들고 있었다. 내게는 익숙한 광경이라 별 감흥 없이 지나쳤지만, 장기수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부산스럽게 차 안을 기웃거리고, 차벽을 두드리고, 심지어 전경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불러도 대답조차하지 않고 무언가를 골몰히 응시하고 있는 장기수를 보자니 슬슬 화가 치밀었다. 이제 그는 점점 차도 쪽으로 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손목을 세게 부여잡고 보도로 끌었다. 순간 그가 놀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 죄송합니다.
보도로 돌아가자 장기수는 내게 고개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꽉 잡은 손목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리를 걸었다. 장기수는 호기심을 가지고 가게를 구경하지도, 도시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저건 뭡니까, 묻지도 않았다. 괜히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나는 그와 두 걸음정도 떨어져 뒤에서 걸었다. 카메라로 그의 뒷모습을 연달아 찍었다. 키가 작은 그는 바지를 접어 입었는데 오른쪽 바짓단이 땅에 끌려 너덜너덜했다.
선생님 바지가 끌리는데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 말에 그는 작게 웃었다. 웃을 때마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내게 손짓을 한 다음 도보 한쪽으로 가 통이 넓은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렸다. 오른쪽 무릎에 철심을 여러 개 박은 흔적이 있었다.
나는 하지부동을 앓고 있습니다. 오른쪽 다리가 삼 센티 정도 짧지요.
고문 기술자가 망치로 무릎을 내리쳤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고 방치한 탓에 관절이 어긋나버렸다고 그는 말했다. 후두염, 폐렴과 폐결핵, PTSD……. 장기수는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고문으로 생긴 후유증을 나열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병명을 줄줄이 언급하는 장기수를 보며 나는 흠칫 놀랐다.
이젠 괜찮습니다. 익숙해졌거든요.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덧붙여 말했다.
위험한 일입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우리는 삼거리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근처 한정식집이나 레스토랑에 가고 싶었지만, 무급 인턴으로 일하는 나에겐 칠천 원 정도하는 백반은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회사에서 인턴비가 지급되긴 했지만 한 달 버스비 정도의 소액이었다. 회사에서도 나는 야채 크래커나, 삼각 김밥으로 점심을 때우곤 했다. 장기수도 딱히 배고파보이진 않으니까. 핑계를 둘러대며 나는 카페 문을 열었다.
카페에 들어선 순간부터 장기수는 상자에 갇힌 쥐처럼 안절부절 못했다. 그는 내 손목을 잡고 입구에 멈춰 섰다. 그의 손에서 땀이 나고 있었다. 카페 조명은 광도가 낮았다. 종업원의 안내에 따라 구석 자리에 앉으려 하는 나를 보며 장기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어두운 곳이 싫습니다.
카페 안은 점심시간을 마치고 커피를 마시러 온 손님들로 북적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길을 막고 엉거주춤 서 있는 나와 장기수를 한 번씩 흘낏대며 지나쳤다. 할 수 없이 음료와 샌드위치를 포장해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메뉴를 고를 때도 장기수는 오랜 시간을 들였다. 그는 카운터 메뉴판을 가리키며 종업원에게 이건 뭡니까, 그렇다면 저건 뭡니까, 끊임없이 물었다. 종업원은 처음에는 음료의 제조과정이나 재료에 대해 침착하게 설명하다 후에는 난감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선생님 제가 대신 골라 드릴까요?
잠깐만, 잠깐만요.
선생님 뒤에 주문을 기다리는 분들이 있어서요.
내 말에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우리 뒤에 줄을 선 사람들은 팔짱을 낀 채 우리 쪽을 쏘아보거나 빨리 나오라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초조하게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우리는 오 분 째 카운터에 서 있었다. 장기수는 여전히 메뉴판을 가리키며 저건 뭡니까, 묻고 있었다. 냉담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종업원에게 인사를 한 다음 그를 데리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나는 편의점에서 사온 샌드위치와 캔 커피를 장기수에게 건넸다. 우리는 창경궁 앞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아 그것을 먹었다. 샌드위치를 씹을 때마다 시들어버린 양상추의 식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장기수는 샌드위치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커피만 조금 마셨다. 율곡로 부근에서 추모집회가 벌어지고 있어 주변이 소란했다. 차벽을 치고 있는 경찰들과 그 앞에서 피켓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나는 괜히 수첩만 뒤적였다. 소득 없는 인터뷰였다. 답을 받은 질문보다 받지 못한 질문이 더 많았다. 그나마 답을 받은 질문도 녹취 없이 진행되다보니 수첩에 적지 못한 부분이 숱했다.
인간으로 죽기 위해선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
내가 제대로 적은 것은 그 문장이 유일했다. 취재보고서를 제출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기수는 캔 커피를 손에 쥔 채 고궁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샌드위치는 포장도 뜯지 않은 채. 피곤한 사람이야. 생각하며 시계를 보았다. 벌써 두 시 반이었다. 네 시까지는 신문사에 들어가 봐야했다.
저곳이 한때는 동물원이었다는 것 알고 계셨습니까?
그는 창경궁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뜬금없는 말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네?
내가 형무소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창경궁이 아니라 창경원이었습니다. 코끼리도 있었고, 호랑이도 있었죠. 봄이면 다들 창경원에 동물구경 하러가고 꽃구경도 했습니다. 그곳이 한때는 궁이었다는 사실은 잊고서 비단 구렁이가 든 수조 앞에서 사진도 찍고 도시락도 먹었습니다. 모두가 익숙해진 거죠. 그런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개량 한복을 입은 여학생 몇이 돈화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여학생들의 머리 위로 햇살이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감옥에 들어간 이후 처음 십이 년간을 독방에서 지냈습니다. 한 평 정도 되는 작은 방이었죠. 서향으로 난 벽에 작은 들창이 뚫려 있었습니다. 하루 중 내가 가장 기다렸던 시간은 해가 들어오는 시간이었습니다. 무릎에 책받침만한 햇빛을 올려놓고 앉아 있을 때면 그제야 조금 살만해졌습니다. 그 방에서 삶과 죽음 사이는 말입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 내밀었다. 희고 얇은 머리칼이었다.
딱 머리카락 한 올의 틈 밖에는 없습니다. 나의 동료 몇몇은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끌려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독방 밖에서 비명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밥이 들어오는 구멍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구멍으로는 사람의 발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누군가 끌려갈 때는 사람의 얼굴이 보이기도 합니다. 한번은 고문실로 끌려가는 동료와 눈이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얼굴은 희미하지만 지금까지도 그 눈만큼은 또렷이 기억납니다. 작고 둥근 눈이었죠. 그 사람은 나를 보고 나는 그 사람을 봤습니다. 찰나지만 그런 순간은 평생 잊혀 지지 않습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 곳에 있으면 말입니다. 겁이 많아집니다. 밤이 오는 게 두렵고, 비명소리가 두렵고, 좁은 곳에 있으면 숨이 막힙니다. 음식도 함부로 못 먹게 되죠. 늘 의심하고 경계합니다. 그리고…… 곧 익숙해집니다. 그 방에서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게 그겁니다. 본능을 이기며 단식을 감행하고, 교도관들 앞에서 알몸으로 고문을 당하는 일은 고통스러웠지만 견딜 만 했습니다. 진정 견딜 수 없는 건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이죠. 그 방에서 지내다보면 배설물 냄새가 진동하는 독방에서 잠을 자고, 때가 되면 고문 받는 것을 의식 없이 받아들이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때엔 공포도 고통도 모두 사라지죠.
장기수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어느 날 독방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내 무르팍으로 햇살이 내려앉더군요. 신문지를 두 번 접어놓은 것처럼 네모난 햇살이었죠. 따뜻했습니다. 따뜻해서 나는 간만에 낮잠에 들었습니다. 혼몽한 꿈속에서 나는 언젠가 나와 눈이 마주쳤던 그 사람을 봤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람의 눈을 봤죠. 작고 둥근 눈이요. 그 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의 눈 속에 갈고리에 걸린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게 뭔지 몰라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그건 나였습니다. 갈고리에 걸린 채 간신히 숨만 내쉬는 고깃덩어리가 나였죠. 나라는 인간은 사라지고 무력한 고깃덩이만 그 방에 남아 있었습니다.
장기수는 도중 숨을 골랐다. 길 건너편에서 집회를 하는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원남동 사거리 쪽으로 천천히 내려가며 집회를 이어가고 있었다.
인간으로 죽기 위해선 인간으로 살아야한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향을 거부하고 고문을 버틴 것도 다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아냈습니다.
대단하네요.
수첩에 그의 말을 받아 적으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는 대단한 일을 한 게 아닙니다. 그저…….
종로서 경비과장입니다. 해산 절차를 진행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불법집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즉시 집회를 종료하시기 바랍니다. 불법 행위를 정밀 채집하겠습니다.
장기수가 무슨 말인가 중얼거렸지만, 그의 목소리는 기동대 버스에서 들리는 집회금지 통고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우리는 처음에 출발했던 훈정동으로 내려갔다. 장기수는 잠자코 걷기만 했다. 아까와는 다르게 훈정동 일대는 소란스러웠다. 무장한 기동대가 피켓을 든 사람들을 막고 기동대 버스는 도로를 봉쇄하고 있었다. 나는 나보다 다섯 걸음정도 뒤처지는 장기수를 기다리며 수첩을 뒤적였다.
자극적인 소재가 필요해. 자기도 알잖아.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지.
내 어깨를 주무르며 오는 말했다. 자극적인 소재. 나는 중얼댔다. 확실히 지금까지 나온 취재물로는 부족했다. 신문사에 들어가기 전에 심사위원의 구미를 당길만한 소재를 찾아야했다. 나는 뒤를 돌아 장기수를 찾았다.
선생님.
장기수는 사거리 카페 앞에 멀거니 서 있었다. 선생님. 나는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귀를 얼얼하게 할 만큼 큰 비명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음이 소거되었다면 그것은 유쾌한 카니발처럼 보였을 것이다. 색소를 섞은 물줄기가 도로에 쏟아졌고, 사람들은 꼬리를 너울대는 열대어처럼 알록달록한 우비를 입고 뛰어다녔다. 모두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광경을 빤히 지켜보았다.
그것은 축제가 아니었다. 살수차가 쏘는 물줄기가 시위대를 덮칠 때마다 그들은 폐사 직전의 물고기처럼 숨을 헐떡였다. 전경차 밑바닥에 숨는 사람들과 그들이 뱉어내는 비명이 눅눅한 공기 속을 떠돌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들어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초점이 어긋나고 흔들린 사진들. 그런 것들을 지워버릴 새도 없이 물대포가 쏟아졌고 그것을 피하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도로는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뒤늦게 장기수가 생각났다. 선생님. 나는 사람들 틈을 헤집으며 그를 찾았다. 그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 옆에 서 있던 노인 하나가 경찰 버스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경찰차에 매인 밧줄을 홀로 당겼다. 그가 밧줄을 당기기 시작하자 물대포가 그에게 조준되어 고스란히 쏟아졌다. 나는 카메라를 들었다. 뷰파인더에 눈을 대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 위로 색색의 물대포가 쏟아졌다. 노인은 팔로 물대포를 막다 곧 강한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함께 시위를 하던 사람 몇이 쓰러진 노인을 보도로 옮겼다.
쏘지 마. 물 대포 쏘지 마. 여기 사람 있잖아.
사람들의 외침에도 물줄기는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거세졌다. 노인은 둥글게 몸을 만 채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장기수를 찾았다. 선생님. 장기수는 나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시위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바짓단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전경들이 시위대를 전부 연행하고, 노인이 응급차에 호송된 후에도 장기수는 푹 젖은 도로를 바라보며 그곳에 서 있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내 물음에 그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서둘러 수첩을 꺼냈다. 입술만 깨물던 장기수가 울음을 터트린 건 그때였다. 오래간 말라 있던 우물이 고이듯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웃는 것도,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닌 얼굴로 그는 울음을 토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수첩만 뒤적이다 나는 수첩에 갈겨 쓴 그의 말을 발견했다.
인간으로 죽기 위해선 인간으로 살아야한다.
주머니에 넣은 수첩까지 물에 젖어 잉크가 제멋대로 번져 있었다. 인간으로 죽기 위해선 인간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말을 중얼대며 나는 훈정동의 낯선 거리에 주저앉아 울부짖는 그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물비린내가 밀려왔다. 우물 속에 가둬두었던 물이 차올랐다 터진 것처럼 내 몸을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
몸이 축축했다. 양말도, 구두도, 첫 취재라는 명분으로 애써 입고 온 양복도 모조리 젖어 있었다. 장기수의 바짓단도 젖어 있어 땅에 끌릴 때마다 마찰음이 크게 났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훈정동을 걸었다. 집회가 정리되자 사방이 고요해졌다. 종묘도 다시 이전의 고적한 고궁으로 돌아가 있었다. 한참 걷다 장기수는 우리가 처음 만났던 어정 앞에서 멈춰 섰다. 그는 처음처럼 어정 안을 들여다보았다.
오늘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합니까?
장기수의 목소리가 어정 안에서 크게 울렸다. 나는 대답 없이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우리는 지금 우물 안을 걷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곳의 지명이 더운 우물골이니까요. 한데 이곳을 나간다고 해서 우리가 우물 안을 벗어났다 할 수 있을까요? 한 평짜리 우리에서만 살던 원숭이는 우리를 벗어나서도 한 평 남짓한 공간만 배회합니다. 익숙해진 거죠. 아직까지 나에게는 그 방에서 살던 습관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습관들은 늘 나를 괴롭게 하지요. 나는 아마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겁니다. 죽을 때까지 그때의 기억 안에서 배회하며 살 겁니다. 난 이미 늙고 지쳤어요. 하지만 당신들은 다릅니다. 당신은 달라요. 우물 안에서 사느냐 모험을 감수하면서 그 밖으로 나가느냐는 오직 나 자신만이 정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네 시가 되자 종묘 안에서 모현례를 재현하는 행사가 진행되었다. 외국인 관광객과 견학을 오거나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 둥글게 서서 전통 예복을 입고 거둥행렬을 하는 무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나와 장기수도 잠시 길 한편에서 서서 그것을 구경했다. 풍악이 연주되고, 왕과 왕비 역을 맡은 배우들이 가마를 타고 나타났다. 화려한 참배식을 보며 장기수는 우는 듯 우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기자 양반.
장기수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나의 질문이 듣고 싶다던 장기수의 말이 떠올랐다. 습관처럼 수첩을 뒤적이다 덮었다. 나는 장기수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도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장기수의 눈 속에 한 사람이 들어 있었다. 고깃덩어리처럼 일그러져 보이는 사람. 나는 어떤 질문도 할 수 없었다.
풍악이 고조에 이르자 사방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장기수와 헤어지고 신문사로 천천히 걸어갔다. 옷과 머리는 젖어 있었고, 몸에서는 매캐한 최루액 냄새까지 났다. 돌아가며 장기수 생각을 조금 했다. 긴 낮잠에서 깬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와 함께 보낸 하루는 희미하고 어렴풋했다. 장기수는 앞으로도 남들보다 다섯 보정도 느리게 걸으면서 세상을 구경할까. 운동장에서 노는 아이들을 구경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볼 때도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지을까. 무엇보다.
그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신문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오를 만났다. 오는 외근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취재는 어땠냐고 묻는 그에게 나는 말없이 웃음을 지어보였다. 오는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자기, 근데 뭔가 바뀐 것 같은데. 다른 사람 같아.
오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