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콘테스트> 제7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월간문학 한국인]이 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고자 분발하는 젊은 영혼들의 순수 문학 창작의욕을 북돋기 위해 기획한 <창작콘테스트>가 제7차를 맞았다. 이번 제7차 공모는 의외로 한여름 무더위 속에 진행된 지난 제6차 공모보다 응모편수가 더 적었고, 상대적으로 작품의 수준 또한 기대에 못미쳤다는 평이다. 이러한 현상은 외부에서 찾기보다 내부, 즉 주최 측의 운영의 미를 살리지 못한 미숙함에서 기인한 것이라 여기고 이 기회에 더욱 분발할 것을 다짐하는 바이다.
[월간문학 한국인]<창작콘테스트>는 작가로서의 무궁한 필력이나 완벽한 전문성을 하나하나 따져 시상하는 그런 대단한 문학상이 아니다. 오로지 전문작가가 되기만을 꿈꾸어온 예비작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다소 흠결이 있더라도 치열한 작가정신과 독특하고도 개성있는 표현,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따져 우열을 가릴 뿐이다. 따라서 설혹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 가능성을 보아 당선작을 뽑을 뿐임으로 문학상으로서의 권위를 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할 것이다.
이번 응모자 또한 모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을 터이고 나름의 재능을 발휘하였다고 보여지지만, 상당수의 작품들은 여전히 진부한 낱말들의 사용과 구태의연한 표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점이 아쉽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그간 겪어온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에 의해 산고를 겪듯, 그 누구도 쓰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문체와 어법, 시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창작콘테스트> 제7차 공모에 참여해주신 작가 여러분들, 그리고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 창작을 자신의 운명으로 택하려하는 모든 분들께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기원하며 각별한 감사와 격려의 뜻을 전한다.
금상
*******************************************************************
소설부문
검은언덕길
- 한명환
밤하늘은 아직 걷히지 않았다. 먼 곳, 그러니까 하늘과 바다가 모호하게 뒤섞인, 간극을 찾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수평선으로부터. 파도는 꿈틀거리며 육지를 향해 끊임없이 밀려들어온다. 눈 위를 떠돌던 잔상들이 노란 빛으로 합쳐진다. 그것은 눈을 감을 때마다 펼쳐진 색을 잃은 바다서 선해진다. 시야로 쫓아갈수록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다가 밀려오듯 돌아오는 것을 반복한다. 눈을 뜨든 감든 파도는 사라지지 않고 공간 속 모든 것을 흔들었다. 그것은 긴 세월과도 같은 것이었다.
조금씩 희어지는 것이 보인다. 하늘은 청색을 가득 머금은 백색에 가까워졌고, 사물들은 일치하던 색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났다. 그렇게 모든 것이 본질을 찾아가는데 그럼에도 먼발치는 여전히 모호했고, 심지어 그보다 가까운 곳 역시 흑색을 고수하고 있었다. 정면으로부터 불어오던 바람에 이끌려, 파도는 접힌 것이 풀려오듯, 검은 자국을 머금은 채 조금씩 다가왔다. 그리고 헐떡이듯이 모래밭에 도착했을 때, 그것들은 하얀 복부를 드러내며 드러눕는다. 그리고 다시 밀려나가는데, 그것은 마치 먼 여행길로 인해 지쳐 수면에 든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끊어질 것 같으면서도 가냘프게 이어지는 호흡을 하는 것 같았다. 지친 색이 선명하게 귀를 통해 전달되지만 그것에는 여전히 생명이 있는 것처럼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당신은 마치 이곳에, 바다로부터, 모래로부터, 하늘로부터, 바람으로부터, 소나무로부터 생겨난 존재 같다. 당신은 처음부터 이곳에 있어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휴식을 취할 곳을 찾으며 밤을 기다리는 것 같다, 소나무 숲에서 바람이 통하고, 하늘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고, 모래와 바다를 감시할 수 있고. 그런 곳을 당신은 너무나도 쉽게 찾았다. 알고 있을 겁니다 아버지는 당신을 가려주는 그림자는 거대하지만 옅었고, 당신의 그림자는 영향력을 행사할 범위는 거의 없는 것처럼 작았지만 그것은 새벽이 오기 직전의 밤처럼 된 진했고 견고했다.
당신 앞에는 흰색의 새 떼와 그것보다 좀 더 흰색에 가까운 구름이 뒤섞여있다. 철새가 아닌 텃새들은 어디로 가는지 스스로 인식 하지 못한다. 다만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길이 없었기 때문에 잃어버릴 것도 없는 것이겠지. 길이라는 것을, 항로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 아버지 처음부터 잘못 된 것이었습니다 라고 누구의 잘못이라고 쉽게 정의할 수 있었다면 진작 그랬을 겁니다 방향성이라는 것은 일출과 일몰이면 충분했을 것이며, 그것만으로 둥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새들의 종류가 같은 지는 확인이 되지 않지만, 그것들은 모두 제각각 낸 소리가 섞여 하나의 소리로 들리게 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새소리는 예상 외로 쉽게 사라졌다. 바람 속에, 멀어진 간격 속에, 지나간 시간 속에 희석되어 바다에 잠기듯이. 그럼에도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체감되듯 들리는데 그동안 들려온 새소리가 구름 사이에서 떨어지듯 긴 사선의 태양 속에 여전히 잔존하는 것처럼, 망각이라는 것이 없는 곳처럼.
만약 세상의 끝이 정말 회귀라면, 먼 세월을 지나 돌아오는 봄처럼, 윤회라는 것으로 인해 끝이라는 것이 없다면, 정말 그 뿐이라면. 우리가 저지른 그 행동이 너무나도 경악스럽고, 불쾌한 무언가라서 당신이 당신마저 그를 버림으로써 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당신과 저는 조금이라도 같이 살 수 있었으면 했습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하려 했고, 당신 역시 저를 사랑했다고 믿으니까요 그리고 그녀가 당신을 버렸을 때, 욕하며 당신을 버리려고 했을 때. 아버지가 어머니로 인해 밀착될 때, 그에게는 분노를 담은, 참으로 안타까운 눈빛이 붙어있었던 것 같았다.
네 년은 자식도 아니야. 네 년은 악마야. 어떻게 어미인 내게 이럴 수가 있어. 여보, 이건 당신 잘못이 아니야, 모두 저 년의 잘못이야. 저 년이 어느새 당신의 고간 위에 올라와있었을 거야…… 어쩜 자식이 그럴 수가 있니. 나가, 미친년아. 썩 꺼져버려.
아버지는 멍한 눈을 그저 뜨고 있을 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귀에는 욕설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고, 그 눈에는 내 나체가 담겨있다기보다는 그저 홍채가 나를 향해 있을 뿐인 것 같았습니다. 그 입에서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치 영처럼, 이곳에 존재할 수 없는 무언가처럼, 당신의 존재가 사라질 듯 무의미해보였습니다. 그 모습이 곧 사라질 것 같아 나는 당신을 기록하듯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정작 아버지와 저 사이에 있던 어머니가 유령처럼 사라졌습니다. 그 순간 우리 둘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당신의 본질을 본 것 같았습니다. 당신이 그동안 품어왔던 깊은 무언가를 어렴풋이나마 본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매우 깊고 어두워서 저도 모르게 그곳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소나무 숲에서 나왔다. 미처 윤회에 달하지 못한 솔잎들이 당신의 발에 눌러 붙었지만 그것을 떼어내려 하지는 않았다. 걸음걸이에는 죽은 것들이 잔뜩 묻어나온다. 이미 생명의 것이라고도, 죽음의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침엽수림을 감싼 얇고 단단한 흙 알갱이들 역시 습기를 머금어 신발의 틈새를 장악했다. 그러나 그것들의 무게는 매우 가벼워 당신은 개의치 않는다. 아스팔트로 나왔음에도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뼈대만 남아 웅장하고 깊었다. 이미 사라져야할 것들이 미처 떠나지 못해 그곳을 맴도는 것 같기도 했다. 사람은 죽은 것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는 법이란다 아버지는 예전에 말씀하셨다 그 소리에서 떠오른 형상은 당신의 상처 입은 경험을 안고 있는 배를 욱신거리게 했고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몸속에 담아냈다.
그 음향 속에, 고통이 함유한 미세한 진동이 담아낸, 영혼의 소리에 반응하는 울음은 어디로 가야 하나요. 그 울음 속 음향이 내는 분노의 종착지는 어디인가요.
이제는 어떻게 해야지
어떻게 하면
잊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사랑할 권리를 빼앗긴 당신의 품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을까
당신은 어렸을 적 아버지를 따라 목욕탕에 갔었다. 어머니는 일을 하느라 바빴기 때문에, 그것을 당연히 여겼다. 목욕탕에 들어가면 그는 언제나 30분 정도 마음껏 놀게 하고, 15분 동안 당신을 씻기곤 했다. 그는 당신을 자신의 무릎 위에 앉게 해서 최대한 편하게 한 다음, 30분 동안 뜨거운 물에서 노느라 불어버린 몸을 살살 밀면서 때를 벗기고, 비누칠하고, 물로 씻겨주곤 했다. 만에 하나 목욕탕에 가지 않더라도 당신을 씻겨주던 사람은 언제나 아버지였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당신을 씻겨준 적이 없었다. 언제나 군말 없이 때를 밀어주고, 비누칠을 해주고 물로 내 몸을 헹궈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는 당신을 씻기고 나면 언제나 자신만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식사시간에도, 수면시간에도, 유치원이 끝난 이후에도 아버지를 볼 일은 없었다. 그것은 당신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의 그런 행동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문이라는 것은 당신이 더 이상 같이 목욕을 하는 나이를 넘어 초등학교를 입학하고 6년의 시간이라는 것의 이끌림에 따라 퇴색되듯 희미해져갔다. 어쩌면, 그때부터 잊지 않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바닷가에서 여인숙을 발견하는 것이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해변 앞에 위치한 구멍가게를 중심으로 여러 체의 숙박업소가 자리하고 있었고, 좀 더 안 쪽으로 들어가면 4평 남짓한 공간에 가격을 매기는 집들이 있었다. 당신은 후자를 택했다. 내게 금전적인 뭔가를 기대하지 마 내게는 그런 것이 없을뿐더러, 있다 해도 줄 자격은 없으니까 하고 10년 만에 만난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당신은 대학생 1학년 때, 우연히 그의 존재를 다시 인식하게 되었다. 환절기로 인한 급성 장염 때문에 일찍 조퇴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그 날은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뭔가 낯설었다. 그러나 거부감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피톤치드처럼 모든 것을 초연하게 느끼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그 대기를 헤치며 부엌에 가자,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다. 청소기의 소리가 매우 커서 당신이 온 것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방 보러 왔어요?
네.
몇 명이요?
그 물음에 당신은 둘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뵙네요
왔니? 아버지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과 당신이 그날따라 일찍 온 것에 대한 궁금함이 어지럽혀져 있었고, 이미 공기 중으로 사라진 목소리에서도 그것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곧바로 숨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방으로 돌아가는 길은 당신이 있는 곳이 유일했다. 당신은 자연스럽게 그를 막아서게 되었다. 어째서 도망가려 하는 건가요. 왜 없는 사람처럼 지내온 건가요.
비켜라.
왜요?
더 이상 네게는 내가 필요하지 않으니까. 나는 네게 아무것도 줄 수 없고, 받을 것도 없단다. 내 의미를 너에게 설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할 수 없단다. 그것이 내 인생의 결론이야.
아버지는 당시로서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여놓았다. 제게는 아버지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당신은 스스로 부정할 수 있는 건가요.
하나요.
당신은 그 말과 함께 주인이 부른 방값을 선불로 건넸다. 들어가는 문은 근래 보기 드문 미닫이문이었다. 거실과 부엌을 이은 문이 미닫이문이 아니었더라면, 유리가 달려있지 않고, 커다란 존재감도 없고. 어떤 것이든 끊어져 버릴 것 같은, 그의 방에 달려있는 것 같은 여닫이문이었더라면. 아마 이번에도 난 아버지를 볼 수 없었을 것이었다. 방 안은 낡은 외관과는 대조되게 깔끔히 정리되어있었다. 당신은 짐이라고는 조그만 배낭 하나를 방 안에 던지듯 풀어줬다. 곧 그것을 배게 삼아 누워서 천장을 바라봤다. 그 면(面)은 주인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곳일까. 천장에는 쥐가 오줌을 눈 듯한 자국이 선명했다. 바닥에 붙듯이 누웠음에도 그 자국은 매우 선명하게 보였는데, 문득 천장이 매우 낮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천장에 머리가 닿는 것 아닐까요 괜찮아, 그렇게 요란스럽지 않으니 아버지가 처음 동침했을 때 내게 말씀하셨는데 자신을 위로하시는 것 같았다 불쌍한 아버지 사랑을 하는 방법을 숨기며 살아온 불쌍한 아버지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뇨, 됐습니다.
주인은 당신의 외양을 조금 훑어보더니 문 밖에서 사라졌다. 옷차림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 사연이 가득 배여 있는 것 같았을까. 그러나 그것은 개의치 않았다. 당신은 가방을 구석으로 몰아넣고 밖으로 나온다. 당신이 나올 때 시야에는 다시 주인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는 당신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 그의 무신경함에 당신은 순간 가지고 온 모든 관계가 무의미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부터 없었던 일들처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들은, 발을 질질 끌 때 조각나는 소리같이, 산산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라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감히 그 모든 일을 내가 무효할 수 있을까 주변을 넘으면 가득한 관계된 사물들을, 존재들을 감히 없었던 것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새벽의 안개처럼. 당신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잊혀짐이라는 것은 없다 아버지의 두 손을 잡았던 그 순간부터, 아버지의 위를 언덕처럼 오르던 그 순간부터, 아버지의 입은 그 문장을 언제나 중얼거리곤 했다.
당신은 아버지를 처음 본 그 날 그의 방에까지 발걸음을 넓혔다. 그는 당신을 말릴 힘도, 의지도, 이유도 없는 것 같았다. 이때의 저항이 마지막이었던 거야 몇 번이나 도망치려 했지만 당신은 끝까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묻고 싶은 것들이 하루처럼 용솟음쳤다.
왜 저를 피하시는 겁니까? 나무의 그림자는 마당에서 녹을 생각 없이 견고하게 붙어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도망치려 하지도 않았다. 곧 당신이 있든 말든 부엌의 청소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당신이 없는 것처럼. 그리고 청소가 끝나자 거실로 나가는데, 당신은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를 놓치고 말았다.
문을 열어 상체를 기울였다. 바다로부터 시작된, 걸어온 길이 한 눈에 들어왔다. 구불구불함에도 그 길에 은밀한 부위는 없었다. 구석마저 당당함을 뽐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당당하게 사실이라 할 수 있을까.
손에는 문에 슬어있던 녹이 묻어 서늘한 기분이 붙어 있다. 사라지지 않는 것은 스스로 변질된다. 아버지는 내게 왜곡된 기억을 사실처럼 생각하지 말라고 했다.
민박집이 집중되어있는 곳을 지나면 조금은 친숙한 사물들로 풍경이 바뀐다. 공과 저금통들을 그물로 묶어놓은 문방구를 필두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공간을 품고 있는 편의점, 작은 규모의 초등학교, 그리고 그 건물들을 이어주는 수많은 양철지붕들. 그리고 그것들 위에는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십자가가 보였다. 바다가 있는 곳 근처답게 조그만 어귀도 보인다. 어귀는 아직 여름이 한창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 녹음을 반사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제 때를 밀어준 것은 사실이잖아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아버지는 역시 기억하실 줄 알았어요
네 엄마는 바쁘셨어, 알잖니 지금도 바쁘셔서 너를 챙겨주지 못한다는 것을
엄마 이야기는 하지 말아요
어귀에는 아이들이 있었다. 모두 벌거벗은 모습이 더 자연스럽게 보이는 나잇대 같았고 실제로 발가벗은 애들 몇 명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머리가 굵은 애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기껏해야 초등학교를 눈앞에 둔 것 같은 아이가 제일 나이가 많아보였다. 주위에 그들의 부모로 보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는 왜 저를 혼자 놔두셨나요 조금 더 가까이 가보니 그들의 표정이 보였다. 그들의 표정은 다양했지만 시선은 전부 강 건너의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도, 돌아가는 곳은 결국 하나다 아버지의 문장은 언제나 곧장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의 말의 절반은 외딴 말이 되었고, 그 중의 반은 파악조차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당신과 한 방에 있을 때 언제나 말이, 영혼이 비틀거렸다. 그건 내가 우리 딸을 사랑하기 때문이란다. 사랑하기 때문에 돌아가는 곳이 정해져있는 법이지. 하고 말할 뿐이었다. 당신은 어딘지 모르게 허전했기 때문에, 채워야 한다고 했다. 모르겠니? 나뿐만이 아니야. 네 엄마도, 네 친구도, 내 먼 가족들도, 그리고 너 역시 허전하단다. 완전한 사람은 없단다. ‘완벽한 글은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문장이 없는 것처럼’이라 말하는 어느 소설의 첫 문장처럼 말이지. 엄마가 허전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네가 그것을 느끼게 된 것이란다 그건 단지 하나의 무의미한 문장에 지나지 않아요. 하고 당신은 말했다. 허전함 역시 마찬가지란다 아뇨, 그건 전혀 다른 것이에요. 아버지는 깨닫지 못하는 것뿐이라고요. 아버지는 저를 너무 몰라요. 아니, 나는 알 수 있단다. 너는 내 딸인 걸.
조금만 더 지나면 행복해질 수 있어
거짓말이야
내 가볍고 날카로운 말에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청소기를 든 채로 자기만의 방에 들어가더니 문을 닫으려 했다 그 모습이 너무 이질적이어서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곧바로 난 그 문 사이에 손을 넣었고 문은 닫히지 않았다 늙은 개 한 마리가 고독스러운 눈을 털 속에 숨긴 채,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의 자세에는 여유가 넘쳐보였지만 사람들이 돌 따위를 들기라도 한다면 곧바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돌을 들 생각이 없는 것 같다. 그냥 볼 뿐이었고 개 역시 그들을 응시했다.
뭐 하니?
아이들은 전부 이곳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 음색에 반응했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기분이 들어요 옛날에 목욕할 때 들었을 것 같기도 하는데 어쩐지 이번에 듣는 것이 처음인 것 같이 느껴져요
말 역시 문장만큼이나 무의미하니까 하고 아버지는 더 이상의 말을 삼키듯 입술을 닫더니 내 손을 문에서 때어내고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나는 그 틈에 아버지의 품속으로, 문 안으로 몸을 던졌다 끈은 이미 끊어졌다. 그들에게 당신은 확실히 인식되었고, 더 이상 당신의 존재는 숨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당신에게 다가온다.
누나는 누구에요? 그들의 눈에는 경계심보다는 호기심이 가득 차있었고 당신은 안심했다.
그냥 관광객이란다.
어디서 왔어요?
당신은 살던 곳을 말했다. 심심했던 거겠지. 아이들은 직업과 나이, 살던 곳에 대한 정보, 직업의 의미 등을 무질서하게 물었다. 당신은 그것들에 대해 차근차근 정리하며 이야기했다. 질문들은 겹쳐지는 것들도 많았지만 대충 답하려하지 않았다. 질문공세가 끝나자 말이 없어졌는데, 더위와 겹쳐 어색함은 답답함을 자아냈다.
저 개는 뭐니?
그 말에 그들은 다시 개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개는 처음 봤을 때의 그 기묘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오후 탓인지 나무 그림자가 강가에 드리워져 개는 움직이지 않고 그 사이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수평선처럼 정지되어있는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짓이니 얼른 나가라 그러나 아버지는 손으로 내 몸을 만지려 하지 않았다 그가 팔을 휘두르는 궤적 안에 내 몸은 기묘하게 벗어나 있었다 저 개요? 예전부터 저기에서 살던 개래요.
네가 엄마 뱃속에 있을 적부터?
아이들은 전부 그렇다고 했다. 예전에 몇몇 아저씨들이 저 개를 잡으려고 했는데요, 누구도 잡을 수가 없대요. 원래는 조용히 저곳에서만 살던 개였는데 그 이후 논밭에까지 찾아와 응가를 한 대요. 그래서 어떤 아저씨는 저 개를 잡는 사람에게 상을 준다고 했어요.
그래? 무슨 상인데?
몰라요. 아이들은 각자가 밟고 있던 바위 위에 걸터앉아 개를 바라봤다. 요괴워치 아닐까? 한 아이가 말했다. 바보야, 아저씨들이 그런 거 가지고 있을 리 없잖아. 다른 아이가 말했다.
요괴워치가 어때서, 요괴들을 잡을 수 있는 시계인데.
바보야, 세상에 요괴가 어딨냐?
있거든?
아이들의 대화는 어느새 요괴가 실존하는지 아닌지로 바뀌었고, 두 가지의 목소리로 합쳐졌으며, 고집과 모순으로 이루어진 그 목소리들은 순수함이 덧입혀져 그들의 귀여운 욕망을 말로 표현할 때 그렇듯 비현실적인 것을 가능한 무언가로, 그리고 그 가능성을 명백한 명제로 만들었다.
어머니에게 그 장면을 들킨 이후, 아버지는 자살했다. 그 장면을 들켜서인지, 이전부터 생각했던 행동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검은 언덕처럼 부유(浮游)한 언어를 흘렸고, 언제나 기억 속에서 저무는 것으로 끝이 났으니까. 그것을 제일 처음 본 당신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마치 몽중에 위치했던 것처럼 현실감이 부족했었고, 오히려 생시를 두드리던 꿈이 더 생동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신과 있었던 일은 분명한 진실입니다 제가 여기에 있고 당신이 여기에 없다는 것이
확실한 증거니까요
아이들의 토론들을 뒤로 한 채, 당신은 개를 바라봤다. 그림자 사이에서 햇빛을 받고 있는 그것의 거죽은 황금색 불덩이처럼 보였다.
너희들 약속 하나만 해줄 수 있니?
뭐요? 요괴가 있다고 말한 아이가 되물었다.
저 개를 잡지 않겠다고. 개가 언젠가 여기에서 모습을 감출 때까지 그냥 놔두겠다고.
아이들은 어차피 잡을 수 없다면서 긍정의 뜻을 보였다. 당신은 웃음을 지으며 고맙다고 하고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며 멀어져갔다.
당신은 그림자를 자연의 사물과 인간의 사물들이 형성한 그림자 속에 구겨 넣으며 어귀에서 멀어져갔다. 어귀에서 길이 멀어지며 좁아지더니 퍼지듯 갈라졌다. 골목에 드리워진 길은 여전히 불규칙한 곡선을 유지하며 퍼져가, 눈과 사상(思想)을 서늘한 청백색 굴 밑까지 안내했으며, 처마 위로 십자가가 묶인 철탑이 보였지만 충분히 멀리 있었다. 당신은 담 곁에 앉았다. 담은 반대편에서의 시점으로 내 모습을 전부 가려줬다. 길에 걸린 그림자들은 마치 갈비뼈처럼, 햇빛을 못 삼아 사선으로 박아 놓은 것처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변화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풍경에 당신은 홍채가 세로방향으로 잘려서 벗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진실 눈을 비비고 고개를 흔들었다. 구름은 상호를 존중하고, 때로는 충돌하며 모양을 지금 시야에 걸려있는 사물들 중 가장 빠르게 변해간다.
도망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아버지와의 관계로부터 나온 죄책감? 어머니의 분노? 아버지가 품고 있던 그 무언가? 당신은 다시 시작한 걸음을 멈추고 생각한다. 어차피 돌아올 곳은 하나야 하고 아버지는 반복할 뿐이었다 아니에요 하고 나는 말했다 아버지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 내 양 어깨를 움켜쥐더니 그대로 방 밖으로 밀어버렸다 대응하지 못한 난 밀리면서 중심을 잡지 못했다 그러나 힘을 제대로 주지 않아서일까 나를 미는 동시에 아버지도 약간 떠밀려나왔다 걸음의 끝에는 짐을 풀었던 민박집의 문이 걸려있었다.
아버지가 문턱에 서있었고, 다음 순간 당신은 아버지의 바지자락을 붙잡았다. 두 사람은 방 밖을 헤맸는데 아버지는 당신을 떼어놓으려 했고, 당신은 절대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 싸움은 결코 끝날 것 같이 꼬여있었다. 약간의 시간을 흘리고 나서야 우리는 움직임을 그쳤다.
놓아주렴.
싫어요. 어디 갔다 이제 모습을 보여요 주인이 물었다 나는 좀 걸었다고 했다 도대체 왜 저를 피하시는 겁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그곳에는 사진이 하나 놓여있었다. 당신은 그 사진을 알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는 어머니가 상을 받는 모습이 박혀있었다.
네 어머니는 매우 우수한 여인이야. 그렇기에 혼자서도 너를 훌륭하게 키울 수 있어.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시며 황홀경인지 무기력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색에 얼굴을 물들이고 있었다.
당신은 입술을 꽉 깨물며 생각했다. 어머니가 밉지 않으시냐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밉지 않으시냐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을 바라봤다 어느새 구름에는 분홍색이 배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저 고개를 저으시더니 결국 언제 열릴지 모르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히려 할 때 당신은 그의 방 안으로 손을 뻗었다. 아버지는 당신을 보지 못한 듯 문을 닫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당신의 팔을 따라 전선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문이 닫히지 않자 아버지는 문 밑을 확인했고 당신을 보고 말았다.
식사하세요.
집주인은 소반을 방 안에 들이밀었다. 소반 위에 있는 음식들은 배경 같이 소원했다. 방에 녹아들어 마치 벽에 새겨질 것 같았다. 어디에나 있는 구석의 어둠처럼 그것들은 어쩐지 애틋하게 보였다. 당신은 식사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식사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나는 아버지의 숟가락에 반찬을 올려놓았다 자 얼른 먹어 음식들의 간은 알맞았다. 그때 황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선의 단색광(單色光)이 슬슬 기어오더니 어느새 소반에 닿아 있었다. 그것은 익숙한 전개였다. 아버지와 재회하기 전까지의 당신은 저녁 구석 언저리에 감도는 여름의 냄새와 단둘이서 식사를 해왔었다.
한 번이라도
한 순간이라도
익숙한 이것을 떼어내서 행복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있었기에 가능했었던 겁니다
언제부턴가 공간 위에는 한 줄기 선이 존재했다. 쪽빛인 것 같기도 하고, 주황색인 것 같기도 한 그것은 간극 사이에 버티듯 웅크리고 있었지만 접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넘칠 것 같이 풍성했다. 시야는 점점 넓어져 파도의 크기는 점점 일정하게 보이는 간격이 번져가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보이던 시커멓던 곳 역시 조금씩 붉은 색이 짙어져 간다. 찬란한 황금색을 발하던 빛의 흔적들은 새로 유입되는 것들에 의해 자욱하게 덮여 검은색으로 침식되어 가면서도 수평선 언저리로 사라졌다 돌아오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그 기억은 인생처럼 사지(四肢)로 흘러들어온다.
한 소년이 억새의 품에 안겨있었다. 그가 위치한 억새밭은 산 정상 부근에서부터 진을 넓혀가고 있었다. 소년은 산에서 생성과 풍화를 동시에 보여주는 바람의 발자국을 몸으로 기록한다. 소년은 수평으로 서쪽을 본다. 하나의 검은 점으로 모이는 새가 청백의 경계점으로부터 조금 편중된 쪽으로 사라져간다. 그 모습을 인식한 후에야 소년의 몸은 잿빛으로 덮여간다. 하늘로부터 떨어져 흩어진 밤의 조각들은 아직 정상에 위치한 침엽수림에 걸려있었다. 그러나 곧 그것들 또한 사라지겠지.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지 않은 아스팔트 위를 걷는 사내의 손에 파란색이 떠오른다, 잿빛으로 물들어있는.
언제쯤 해석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당신이 내밀었던 하얀 손을 해석할 수 있을까
자리를 펴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액정에 떠오른 번호를 확인한 당신은 신호음을 무시했다. 다시 벨이 울리자 당신은 배터리를 빼버렸다. 그 순간 배가 욱신거렸다. 가방 안을 거칠게 뒤지고 진통제를 찾아냈다. 약을 삼키고 한숨을 내쉬는데 문이 열렸다. 집주인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문을 다시 닫아주라고 부탁했다. 의심할 것을 알면서도, 미심쩍은 눈빛을 흉터처럼 남기고 사라지게 했다. 문이 닫히자 당신은 마저 자리를 펴고 그 위에 누웠다.
모친을 피하기 위해 숙모의 집으로 피신한 당신은 다음날 숙모와 함께 산부인과에 가기로 했다. 건물에 들어가려는데 숙모는 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꼭 가야겠니?
당연하죠.
이 애를 세상에 내보낼 수 없잖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숙모는 뭔가를 더 말하려 하더니 고개를 숙일 뿐이다. 어찌 됐든 그 이후 상처를 안고 살게 되었고 저는 이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천천히 그녀의 손길로부터 멀어졌고 병원의 문에 다가섰다. 바람이 불었다 창 밖에 산의 모습이 바람과 함께 밀려들어오는 것 같이 보였다 산의 모습은 매우 시커멓고 거리가 있어 그 모습이 마치 언덕처럼 느껴졌다
저기 처자, 들어가도 돼?
목소리의 주인은 집주인이었다. 당신은 들어오라고 했다. 집주인은 문을 열고 느긋하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쩌다 이곳에 왔어? 당신은 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뭔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더 이상 대화가 오가지 않자 표정을 거뒀다. 뭐 어쩌다 보면 비수기에도 손님이 올 수 있지. 그녀는 중얼거렸다. 당신은 진흙이 몸에 구석구석에 달라붙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 침묵이 퍼지자 그녀는 어색함을 느끼는 듯 몸을 가만히 있지 못했다. 결국 그녀는 자리서 일어났다.
요즘 젊은 것들은…… 그녀는 그 말을 흘리고는 당신을 남겨두듯이 방 안서 나갔다. 젊다는 것이 다 뭔가요?
한 순간, 의사가 문 앞에 서있었다. 젊다는 것이 다 뭔가요 젊기에 할 수 있는 일을 당신이 멋대로 추측한 것은 아닌지요 의사는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입니까? 그의 휘청거리는 물음에 당신은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다.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턱을 집었다. 저녁의 단신이 물든 손만으로 깊은 밤을 건널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는 결국 결정한 듯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그를 따라 들어가는 중 시야에는 수술대가 생기다가 다 생성되기도 전에 사라졌다. 그는 당신에게 환자복을 주며 탈의실에서 입고 오라고 했다. 탈의실에 가는데 숙모가 다가오며 당신의 손을 잡는다.
결국 진흙을 털어내지 못한 채 눕는다 누운 채로 창문을 보는데 별이 손바닥에 쏟아지는 것 같았다. 멀리서 개들이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들은 바람이 스민 낙엽 소리처럼 끓어오르다 곧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그것들은 어지럽게 흐트러져도 결코 섞이지 않아 하나의 소리로 듣기는 불가능했다. 내 마음 속을 두 개의 비명 같은 것이 관통하듯 전신의 끝으로 들어온다 마취로 인해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도 그 비명만큼은 내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곁에서 숙모가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의식을 잃기 전 그녀를 보았다 울지 말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니 어떻게 숙모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더 이상은 보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것이 수술 전 당신이 기억하는 전부다. 수술이 끝난 후 일어났을 때는 아랫배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스크를 벗은 지 오래인 의사의 표정은 무한궤도에 도달하여 더 이상 일그러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뒤틀려져 있었다. 불쾌, 이질, 안타까움, 공포, 기묘가 섞이며 하나의 공포로 압축되었다. 표정은 그것을 그대로 본뜬 것 같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신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더니 문을 세게 닫으며 밖으로 나섰다. 곧 문이 다시 열리더니 숙모가 들어온다. 그녀는 얼굴처럼 영혼이 젖어있는 것 같았다. 진하게 배어들어서 마를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응시할 뿐이었지만, 목을 넘기지 못한 언어의 몽타주를 머릿속에서 그릴 수 있었다. 산 사람이 침묵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은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다시는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도.
초여름인데 날아가는 민들레 꽃씨가 보였다. 꽃이 저문 이후 열린 꽃씨는 본래 햇살처럼 하얗지만, 달 아래서는 그림자가 배어 달빛을 반사하지 못했다. 씨앗으로 이뤄진 구체는 풍화된 지 오래인지, 아니면 인위적으로 독립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주변에 다른 씨앗은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한 조각만 보일 뿐이었다. 그 조각서 만들어진 기이한 현상이 당신에게 들어온다. 원숙한 생명들이 정착된 땅 사이에 신생의 문을 열 수 있을까 혹시 문틈에 머무는 빛이 벌어져 영역이 확장의 반복으로 열리면 그에게 닿을 수 있을까
어쩐지 조금 자란 것 같아. 성장은 필연적으로 거쳐야할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자연히 들어오는 것 아닐까
너는 이미 다 컸어, 왜 나로부터 멀어지라는 말을 듣지 않는 거니?
아버지가 말했다. 당신은 아버지를 끌어안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당신을 두 손으로 제지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방 속으로 깊숙이 가라앉으려 했다.
왜 저를 자꾸 밀어내는 겁니까 무엇이 두렵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너는 말없이 옷을 벗는다. 제발 그만 둘 수 없니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당혹보다 슬픔이 더 진하게 묻어있는 것 같았다. 당신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옷을 다 벗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거부하지 않았다. 더 이상 저항이 불가능한 모습 같았다.
밤이 깊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조금 더운 감이 없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꿈은 예전부터 얇아져가는 잠을 깨트리고 생시에 간섭하려는 것 같았다.
바닥이 거울로 되어 있는 길 위를 걷는다. 열세 번째 걸음에 묵직함이 실렸던 것 같은데 금조차 가지 않는다. 그때 당신은 안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음 열네 번째 걸음을 딛는 순간, 디딤 발아래서 섬뜩한 소리가 솟았다. 그 순간 길은 박살났고, 세계가 뒤집어졌다. 당신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피가 아래 거울을 가리며 퍼져갔다. 당신은 그걸 보더니 다시 일어서서 걷는다. 피가 흐를 길이 있다는 것은 아직 걸을 곳이 있어서겠지 당신은 꿈에서 벗어나며 여운을 맞는다. 그러나 눈을 뜨는 대신 다른 꿈의 간섭을 받는다. 눈앞에 책이 있다. 책의 표지는 밤을 담은 것 같이 푸르렀고 하염없이 빛나고 있다. 책을 펼치는데 페이지의 나열이 분란하다. 책의 처음을 보려 했지만 페이지는 끝없이 늘어난다. 무수히 늘어나는 쪽수였음에도 책의 두께와 무게는 변하지 않는다. 어느새 처음에 잡고 있던 페이지마저 잃어버린 당신은 책의 중앙마저 잃어버린 기분이 든다. 페이지를 끝없이 넘기던 중, 종이에 손가락이 베인다. 피는 멈추지 않고 페이지 한 쪽을 전부 적셔버리고 만다. 이걸 이정표로 삼을 수 있을까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현실로 돌아온다.
당신은 꿈과 생시를 오가며 겪는 고통이 약해지는 것을 느낀다. 이렇게 생시와 맞닿은 꿈들을 하나하나 겪는다면 그 이후에 갈 수 있을까 이렇게 반복될수록 흐려지는 고통 끝에 행복할 수 있는 것일까 고통과 함께 잠도 얇아지고 동시에 현실을 두드리는 꿈이 확산된다.
낮아진 달이 구름에 침식된다. 구름의 테두리는 서늘한 연회색 빛을 흘렸다. 칠흑에 가까웠지만, 날카로움은 남중을 부유했던 달빛보다 예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합체는 산 뒤로 넘어가는데 능선을 따라 빛이 발아되고 있었다. 수림으로 인해 여과된 빛은 산 속에 사는 목숨들이 피어오르는 것을 감싸주는 것 같았다. 그에 반해 그림자는 진해져, 능선이 안은 산은 마치 허공에 구멍이 생긴 것처럼 공하고 허해보였다. 그 빛이 만든 창문의 그림자가 우물 정 자 모양으로 당신의 몸과 이불에 새겨졌다.
야밤에 울리지 않는 시계가 생각을 촉구하고 있다. 그것에서 찾을 수 있을 지도 몰라 당신은 가방을 열었다. 가방 속에는 공책이 하나 있었다. 표지를 펼치자 문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당신은 그걸 읽어본다.
그럴 리 없어
하얀 손을 씻어 내린다
숨을 다물면 될까
당신은 첫 문장의 염을 기억한다.
그럴 리 없어. 당신은 귀를 막는다. 정신 차려, 숙모가 당신의 어깨를 잡고 흔든다. 처음부터 아무 것도 없었다고. 넌 그저 네 마음을 감추려고 그렇게까지 몰아넣은 것뿐이라고, 스스로 죄책감을 느껴 애꿎은 처녀성을 낙태도구로 찢었다고. 아냐, 거짓말이야.
네가 아버지를 너무 사랑해서 생긴 망념일 뿐이야.
그럼 그 동안 제가 겪었다 증언하던 것은요. 제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요
그것 역시…… 숙모는 말을 맺으려 하지 않았다 조용히 방문을 나서는 당신의 손에 휴대전화가 쥐어져 있다 전원을 켜자 부재중 전화가 스무 통 와 있었다 그 목록을 보니 숙모와 어머니가 뒤섞여있었다 그 목록 중에서 아버지는 없었다 이제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을 알잖니 숙모는 내게 말했다 내려놓아야 잊을 수 있다고, 그래야 살아 갈 수 있을 거라고, 그래야 빛날 것이라고
그 빛이 낙엽소리처럼 눈이 부셔 멀어질까봐, 창백하던 하얀 손에서 튀어 눈이 부실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재중 번호 목록을 모두 확인한 당신은 전원을 눌러 기기를 죽인다. 혹시 몰라 액정을 누르는 손가락에 힘을 지긋이 더했다. 이윽고 손가락은 양 손이 되어 접힐 리 없는 그것을 안쪽으로 힘을 모으더니, 위태롭게 빛나는 소리를 내며 두 동강 나버린다. 힘이 풀려 손에는 피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달빛에 비춰진 손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을 색이라 할 수 있을까. 모든 색이 가라앉았음에도 홀로 창백함이 되어 떠오르는 이것을 색이라 할 수 있을까. 그저 사람들이 편의로 흰색이라 부르는 것이 아닐까? 애당초 흰색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색이 아니기에 씻겨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길이 빛 속에 잠긴 채로 떠오른다 광원이 스러져도 빛은 영원하고. 당신의 기억 속에서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어귀 건너 검은 산이 초혼(招魂)한다
이제 하얀 손을 씻으러 간다
두 번째 문장은 병원으로부터 마지막 단편이었다.
의사가 다른 환자의 수술을 마쳤을 때, 병상에 있던 당신은 그가 수술실을 나서는 모습을 본다. 그의 그 손은, 핏줄이 불거져 나온 그 손은 너무나도 생기가 넘쳐 보였다. 생명을 무너뜨려 왔던 그 손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무너뜨릴지 모르는 그 손은 도리어 생명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처럼 발열하는 것 같았다. 밤이 깊숙한 곳까지 단단해질수록 먼 새벽의 동은 밝아오는 거야 그의 당신의 정면에서 멈췄다. 무슨 일이십니까 당신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손을 바라봤다.
손에 머물다 간 생명들을 씻어내는 방법을 아시나요? 그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장갑 안의 손을 씻는 방법을 아시나요?
산에는 가로등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잎 스치는 소리, 수림에 묻은 먼 밤의 향기, 길 위에 존재하는 허공의 어둠은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하나로 어우러진 그것들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이따금 홍채의 단면이 날카롭게 잘리는 기분이 들었다. 종아리 근육이 내리막 방향으로 맹렬히 돌진하지만 당신이 길을 오름으로써 두 힘은 비기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발부터 머리까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당신이 요동이 된 듯, 요동이 당신이 된 듯, 영혼이 몸에서 벗어날 것 같았다. 놓지 말아라 감추지 말아라
놓지 마세요. 당신은 아버지께 말한다.
무얼 말이냐.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홀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사실 그건 나였는지도 모른다 혼자 살아갈 수 없었던 이는 나였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너도 나도 피곤한 것뿐이야. 너무 피곤해서 생시와 꿈을 구별하지 못했던 게지.
그건, 거짓말이에요. 그럼 당신을 놓으면, 저는 어떻게 살 수 있나요. 당신은 흐느꼈고, 아버지는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모든 일은 전부 없었던 것이야. 지금 너의 머리를 쓰다듬는 나 역시. 그럴 리 없어 이렇게 생생한데 아버지는 그저 감추려는 거야 감추지 마세요.
무엇을 말이냐. 아버지의 목소리는 지친 그의 표정을 매우 닮아있었다.
아버지 역시 저를 사랑했잖아요. 그러니 이렇게 관계를 맺은 것이잖아요.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냐. 당신은 더 이상 말할 수 없었다.
어떻든 상관없어 내 몸은 내 영혼은 홀로 살아가지 않게 되었으니 어떤 산맥과도 연이 없는 외로운 산은 높지 않았다. 정상은 둥글게 보였는데 부드러운 곡선은 모든 것을 감쌀 수 있는 것처럼 아늑했다. 산이 깊게 호흡할 때마다 옷깃이 흔들린다. 산의 여과된 날숨은 바다로부터 불어온 바람과 섞여 파도소리를 펼친다. 지워지는 것 같아 점점 마음도 걸음도 산의 호흡은 깊고 부드러웠으나 당신의 호흡은 얕고 거칠었다. 아직 몸은 산을 집어넣지 못한 듯 밤보다 더 검은 바다가 눈앞에 서린다. 멀고 험하기만 한 이 길 끝에 무엇이 있을까 여전히 밤은 깊었고 동녘은 수림에 쌓인 지평선에 간섭할 수 없이 멀었다. 걸음걸이가 더해질수록 문득 생각이 든다. 같은 마음으로 같은 걸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같은 것이란 이뤄질 수 없는 것일 것 같았다.
그럴 리 없습니다. 확실하다 믿으니까. 그렇기에 저는 지금 이 산을, 그러니까 이 검고 공허한 언덕을 오르는 것입니다.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의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바람결에 마음이 쓸려가지 않도록 저는 이 마음을 응고시키러 가는 겁니다. 당신을 따라, 어쩌면 정말 존재하지 않을 당신을 따라. 저는 이 밤에 머물 겁니다. 망각도, 고통도 모두 가져가겠습니다. 저 혼자라도 그것을 간직하겠습니다.
세상이 끝없이 역전한 후에야 당신은 주위에 나무가 많이 줄어들었음이 눈에 들어온다. 아래에서는 적막강산이었지만, 올라올수록 주위의 사물들에게서 일으키는 모든 현상이 소리가 되었다. 고개를 위로 올린 것만으로 낯설고 조각난 풍경들이 하나로 펼쳐진다. 별이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둘의 사이는 멀었다. 소음들이 익숙해지자 피로한 고요가 찾아온다. 달빛은 고요했고 내 몸에 잘린 그림자는 끝없이 어두웠다. 수많은 길이 퍼지는 것이 보인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어 어디로 가든 몸의 고도는 낮아진다. 어느 순간, 당신이 발하던 요동이 멈춰 있었다. 식어버린 당신의 몸에 한기가 달라붙어온다. 입으로 쉬던 숨은 목으로 넘어오는 한기에 의해 멈춰버린다. 당신은 그 순간 세 번째 문장의 담은 소망이 기억난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의 길이 보였다.
그댈 따라갈 이 언덕을 오릅니다
이제 숨을 다물기 위해
해가 떴지만 사선은 산란되어 보이지 않게 되었고, 파도는 부서졌다.
********
소설부문
당선작 심사평
제7차 <창작콘테스트> 소설부문에 이름을 올리게 된 작품은 한명환 씨의 단편소설「검은언덕길」이다.
마치 영화의 연출된 포커스처럼 이중 스토리 구조가 특이하다 여겨졌다.
한명환 씨의 금상 당선을 축하한다.
소설가 김영찬 / 소설가 김충근
은상
*******************************************************************
수필부문
카메라
- 양서현
스치는 바람이 여전히 차갑다. 카메라를 잡은 손은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벌써 새빨개져 있다. 할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렌즈를 본다. 렌즈 안에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참새가 들어온다. 참새는 나뭇가지 위를 총총 걷다 바로 날아가 버린다. 할아버지는 그런 참새를 놓치지 않고 재빠르게 셔터를 누른다. 거센 바람 소리 사이로 찰칵, 하는 셔터 음이 들린다.
시골의 바람은 차갑지만 견딜 만 했다. 할아버지 댁 마당에서도 조금씩 새싹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평소에는 놀아달라며 방방 뛸 백구는 아침이라 나른한 지 제 집 앞에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백구의 밥그릇을 채워주고는 백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마루에 멍하니 앉아 그런 할아버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할아버지 손에는 항상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워낙에 옛날 것이어서인지 카메라는 필름 카메라였고 낡기도 많이 낡아 있었다. 그래도 카메라라고 기능은 할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집 마당이나 집 주변 풍경을 보다가도 카메라를 들곤 했다. 찍는 것들은 거의 매일 비슷한 것들이었지만 그래도 찍는 재미는 있는지 할아버지는 셔터를 연신 눌렀다. 할아버지는 카메라 셔터를 누를 때만큼은 작게 웃곤 했다.
오래 전부터 할아버지 댁에서 지내고 있지만 할아버지와는 거의 말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가 워낙 무뚝뚝하셔서 도저히 말을 걸기가 힘든 탓이었다. 매일 카메라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서 좀처럼 다가가기 힘든 탓도 있었다. 내가 말을 한 거라고는 안녕히 주무세요, 진지 드세요 같은 인사 정도가 전부였다. 할아버지는 대답도 한 번 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 탓인지 나는 가끔 할아버지가 나를 별로 안 좋아하시나 하는 생각도 들곤 했다.
가방을 매고 마당에 멀뚱히 서 있는 나를 보고 할아버지는 들어와라, 하고는 몸을 돌렸다. 항상 할아버지 댁에 올 때는 엄마 아빠랑 같이 왔는데 이번에는 나 혼자였다. 할아버지는 혼자 여기에 온 나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엄마 아빠가 서로 갈라선 이상 내가 여기에서 다시 집으로 돌아갈 일은 없었다.
할아버지는 왜 내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던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 댁에 왔을 때 할아버지는 들어오라는 말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엄마 아빠는 뭐하고 있는 건지 질문이라고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런 게 마음이 편해서 좋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런 말도 위로도 없어서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일어나서부터 잠이 들 때까지 곁에서 카메라를 떼어놓지 않았다. 찍자마자 바로 사진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틈만 나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할아버지는 주말마다 읍내로 나갔다. 찍어놓은 사진을 현상하려면 읍내에 있는 사진관에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댁에서 읍내까지의 거리는 결코 멀지 않았다. 차를 타고 가고 어림잡아 한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그런데도 꿋꿋이 그 생활을 반복하는 할아버지가 나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할머니의 만류에도 할아버지는 기어코 밖으로 나갔다. 손에는 언제나처럼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할아버지가 걱정돼 나는 신발을 아무렇게나 구겨 신고 따라 나갔다. 도시만큼은 아니지만 시골 바람도 꽤나 쌀쌀했다. 할아버지 몸에 대충 걸쳐진 잠바는 너무 얇아 바람에 이리저리 요동쳤다. 할아버지는 몸을 떨면서 카메라를 들었다. 뭘 찍길래 이런 날씨에도 나와서 카메라를 드는 걸까.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추우니까 오늘은 그냥 들어가요. 나는 조심스레 할아버지께 말을 건넸다. 할아버지는 나를 빤히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감기 들어요. 나는 다시 한 번 할아버지를 재촉했다. 할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만 내저었다. 이렇게 추운데 왜 굳이 오늘도 나와서 사진을 찍으시는 거예요. 할아버지가 다시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 나는 할아버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사진에는 그 자체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내가 찍는 순간 이 렌즈 안에 하나의 이야기가 담기는 거지. 나는 끊임없이 그런 이야기를 이 안에 담고 싶구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지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할아버지가 마지막 한 장을 찍을 때까지 나는 할아버지의 카메라를 계속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역시 전 날 무리해서 밖에 나갔다 온 탓일까. 항상 일찍 일어나던 할아버지가 이렇게 늦게까지 방 안에 있던 적은 처음이었다. 혹시 진짜로 감기가 든 건 아닌지 나는 할아버지 방문 앞에서 우물 쭈물거렸다. 걱정은 됐지만 들어가는 건 왠지 실례가 될 것 같았다. 나는 아예 방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람에 온기가 다 얼어버린 나무의 딱딱한 촉감이 벽에 딱 붙은 등으로 전해져 왔다. 왠지 울컥했다. 눈앞에 싸우던 엄마 아빠의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나는 손으로 감싼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매일 그랬던 것처럼 벽에 딱 달라붙은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목이 메었다. 이곳에 와서도 잠이 들기 전 잠깐 동안은 항상 그랬었다. 무릎에 얼굴을 더 깊숙이 파묻을 때도 할아버지는 나오지 않았다.
밖에 누구 있냐, 할아버지의 낮은 목소리가 문 벽에 스며들었다. 할아버지, 일어나셨어요?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 나는 다급하게 문에 대고 말을 늘어놓았다. 아프긴, 할애비는 괜찮다. 얘야, 부탁 좀 들어주련? 조심스레 문을 열고 방안에 발을 내딛었다. 할아버지는 내가 들어온 걸 보고는 살며시 웃었다. 할아버지 입가에 묻은 웃음이 왠지 힘없어 보여 나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할아버지는 내게 항상 들고 다니던 카메라를 건네주었다. 이거 오늘 사진 뽑아올 수 있겠니.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 손에만 있던 카메라가 내 손에 들려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다 할아버지의 방을 나왔다.
필름을 인화하는 데에는 시간이 꽤 걸리는 모양이었다. 나는 사진관 안에 있는 의자에 앉아 발만 동동거렸다. 사진 다 인화 됐어요.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기다리다가 깜빡 졸아서 인지 정신이 몽롱했다. 카메라와 같이 인화된 사진들이 손에 들렸다. 나는 호기심에 사진을 꺼내들었다. 한 장 한 장 넘기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사진에 담긴 건 모조리 나였다. 할아버지 카메라에 지금껏 들어있던 건 다 나인 것이었다. 언제 이렇게 많이 찍은 걸까. 나는 항상 할아버지 옆에 있었는데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상자 안에 담긴 앨범 안에도 내가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계속해서 사진들을 넘겼다. 사진에는 그 자체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무슨 뜻인지 몰랐던 할아버지의 말이 들리는 듯 했다. 사진 속 나는 나조차도 생소할 만큼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내가 언제 이렇게 웃고 있었던 걸까. 사진을 보다보니 옅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제야 할아버지의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두운 방 안에서 쪼그려 앉아 있던 나는 이 안에 없었다. 내가 이곳에 왔을 때 할아버지는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한가득 내가 담긴 사진을 보니 할아버지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뺨에 붙었다. 머리카락을 떼어낼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나는 하나같이 다 내가 담긴 사진들을 넘겼다. 나는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사진 속 나처럼 환하게 웃어 보았다.
장마
- 양서현
장마가 휩쓸고 간 운동장을 본 적이 있어. 질척해진 운동장 바닥은 군데군데에 빗줄기가 쓸고 간 흔적이 남아 있었지. 창문을 거세게 내려치던 장대비는 깨끗이 사라지지는 않은 것 같아. 질척해진 바닥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게 되더라고. 그건 아마 아직 나도 깨끗이 그때 나를 보고 있던 너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너는 내 앞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어. 내 주위의 아이들은 장난을 치듯 너를 툭툭 건드렸지. 가볍게 건드리던 아이들은 너를 조금씩 때렸어. 나는 어느새 아이들과 같이 너를 때리고 있었어. 묵묵히 맞고 있는 너를 보고 있으면 왠지 스트레스가 해소되는 것 같았지. 종이 울릴 때까지 우리는 너에게 뻗은 손을 거두지 않았어.
학년이 올라가고 나는 흔히 말하는 일진이 되어 있었어. 어릴 적 따돌림을 당했던 이후로 나는 다시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고 그들과 내 위치를 바꾼 거였지. 가만히 움츠리고 있으면 내가 당할 테니까 이렇게 된 건 어쩔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몰라.
그 아이들은 가만히 앉아 있는 나를 툭툭 건드리곤 했어.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던 나를 내려다보며 킥킥거렸지.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 때면 나도 모르게 입술을 꾹 깨물었어. 그들은 기분이 나쁠 때면 곧장 내게로 왔어. 스트레스를 풀 상대가 필요했을 테니까. 나는 묵묵히 그들의 주먹을 맞고 있었어. 반항 한 번 하지 않고 맞고 있는 답답했지만 그러기에는 그들이 너무 두려웠어. 말없이 종례 시간만 기다릴 뿐이었지.
처음에는 따로 아이들을 괴롭히거나 하지 않았어. 다만 나에게 해코지 하려는 애들을 만나면 그때 조금 내 나름대로 방어를 했던 거였지. 그 방어가 계속되다 보니 아이들은 조금씩 나를 무서워했어. 교내에는 내가 세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지. 그래서인지 내 주위에 아이들이 속속 모여 들었어. 나를 괴롭히던 무리들이었지. 그 아이들의 태도는 순식간에 바뀌었어. 소문이 돌고 나서부터 내 주위로 모였고 나를 추켜세우기 일쑤였지.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동화되어 가는 것만 같았어.
그래서 그랬는지도 몰라. 어차피 나를 건드릴 애들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붕 뜨는 것 같았어. 한 번은 선생님께 잔소리를 듣고 온 후에 기분이 상해 그냥 내 앞 자리에 앉아 있던 너를 건드렸어. 순간적으로 화풀이를 한 것이었지. 너는 반박 한 번 하지 않고 내가 때리는 대로 묵묵히 맞았어.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더욱 더 주먹을 내둘렀지.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왠지 멈출 수가 없었어.
점심시간인지라 애들은 우르르 교실을 빠져나갔어. 교실에는 너와 나만 남겨졌고 정적만이 감돌았어. 야. 나는 조용한 분위기가 어색해서 툭 내뱉듯이 너를 불렀어. 너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어. 너의 눈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어. 나는 가만히 너와 눈을 마주쳤지. 너는 묵묵히 당하고만 있냐. 답답하지 않냐. 반항 한 번 해볼 수도 있는 거잖아. 나는 떠보듯이 말을 던졌어. 너는 내 눈을 피하지 않고 조용히 나를 보고 있었어. 그럼 너는 왜 그러는 건데. 나는 뭐? 하고 반문했어. 너는 끝까지 시선을 돌리지 않았어. 반항 한 번 하는 게 힘들다는 거 네가 더 잘 알지 않아? 내가 어떤 기분일지 네가 더 잘 알고 있으면서 너는 왜 그러는데. 떨리는 목소리로 너는 또박또박 말을 이어갔어. 그 눈동자 속에서 말없이 맞고만 있는 내가 보이는 듯 했지. 나는 눈살을 찌푸렸어. 시간이 흐르고 나갈 때처럼 아이들이 다시 교실로 밀려들어왔어. 내 주위에 몰려든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댔지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어. 알면서 왜 그러고 있냐는 너의 말이 계속 귓가를 떠나지 않았거든.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들과 마찬가지인 모습으로 너를 대하는 내 모습이 순식간에 눈앞을 스쳐지나갔어. 원래는 이러려고 했던 건 분명히 아니었는데 머리가 복잡해지고 지끈거렸어.
장맛비는 조용히 왔다가 깨끗하게 지나가지는 않아. 세차게 휘몰아친 흔적을 그대로 남기고 가지. 나도 그랬던 것 같아. 깨끗하게 그들에게 달라졌다는 것만 보여주려던 것뿐이었는데. 나는 굳이 내가 달라진 모습을 그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남긴 듯해. 빗물로 생긴 웅덩이에 비친 내 얼굴은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흐릿했어. 머리가 지끈거렸고 내 눈앞에는 덜덜 떨고 있는 네가 보였어. 흔들리는 너의 눈 속에는 너를 내려다보며 킬킬거리는 내가 담겨 있어.
나에겐 결국 강제 전학이라는 조치가 취해졌어. 아이들은 이제 해방이라며, 통쾌하다며 서로 소곤거렸어. 내 시선을 외면한 채 소곤거리는 아이들 사이로 네가 보였어. 아이들을 등지고 교실을 나서는 나를 너는 교문까지 따라나섰어. 이해가 되지 않았어. 나에게 가장 많이 괴롭힘을 당했던 넌데 어째서 나를 따라왔던 건지. 교문 앞에 다다르자 너는 그때처럼 내 눈에 눈을 마주쳤어. 좋겠다? 이제 나 없어지니까 아주 편안하겠네. 나는 비아냥거리듯이 말을 내뱉었지. 응, 그렇겠네. 너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어. 나 괴롭히면서 많이 재밌었어? 너는 내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말했어. 재밌었냐니. 나는 너를 바라보았어. 처음엔 재밌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너도 겪어봐서 알잖아. 그게 얼마나 괴로운 지. 나는 고개를 푹 숙였어. 너의 말이 나를 쿡쿡 찌르는 것 같았어. 그 애들에게 당하고 있는 나와 너를 괴롭히는 내가 동시에 떠올랐어. 나는 왜 잊고 있던 걸까. 네가 얼마나 괴로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나였는데.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어. 결국 나는 아무 말도 못한 채 네게서 등을 돌렸지. 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교문을 나섰어.
네가 그 아이들에게서 벗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어. 나는 아직도 끝까지 내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나와 마주하고 있던 너를 떠올리며 나지막이 미안하다고 중얼거리곤 해. 장마는 지나갔지만 나는 아직도 축축이 젖어 있는 것 같아. 그때는 나오지 않던 말이 왜 이제야 나오는 건지. 내가 다시 너와 마주해 네게 미안해 라는 말을 한다면 그때는 아직 젖어 있는 그때의 기억이 마를까. 그때에는 제대로 내리쬐는 햇빛을 받아낼 수 있을지 나는 모르겠어.
********
수필부문
당선작 심사평
제7차 <창작콘테스트> 수필부문에서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작품은 양서현 씨의「카메라」와 「장마」란 두 편의 작품이다.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수필가 유미숙 / 수필가 정금희
동상
*******************************************************************
시(詩)부문
■ 꿈꾸는 월경
- 김미소
저마다의 환호와 탄성이 터지는 축제의 밤
창문 안 사람들 웃음 짓는 어느 저녁 아래
발아되지 못할 운명인 줄 모르고
제 몸 울컥 쏟아낸 또 다른 불꽃이 허공에 그대로 결박되었다
허공엔 귓바퀴가 없어
한철 매미 같은 울음은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쏟아지고
성냥팔이 소녀 두 눈에 심은 성냥 한 개비의 시간이었음을
끝내 깨닫지는 못한 불꽃은
아직도 두 다리 사이 드리웠던 따듯한 그늘 추억하는 중이다
흙냄새를 찾아 뒤적이는 수만의 알갱이들
급한 성미 탓에
투명해진 알갱이에 점하나 생길 여유 없이
불꽃
새빨갛게 핀 울음이 비명같이 만개하는 그곳에서
또 다시 성냥을 집어 든다
골똘히
작은 불티 바라보며
미소하는 자궁 하나
■ 닭이 된 남자
- 김미소
1
딩동! 타이머가 울리면
오븐에서 노릇하게 구워진 닭
처음으로 식탁에 올려져서는
내 평생 살면서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올 수 있다니!
겨드랑이 바짝 붙이고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겸손하게 세상을 향해 대절
조아릴 대가리는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알맞게 조리된
나이프와 포크를 들고 각자의 몫만큼
교양을 나누어 가진 식탁 아래 얌전한 두 발 나란히
2
딩동! 도착 음이 울리면
엘리베이터 문을 걸어 나오는 한 남자
무언가 허전한지 머리를 매만지다
층수를 알리던 여자의 음성이 거세된 사실을
깨닫고
혼자인 것이 조금 아쉬울 뻔했다
가, 아차! 하고 되묻기를
그런데 말입니다
기계에도 목소리가 있는 것입니까?
■ 흰 손(白手)의 하루
- 김미소
어느날 눈을 떠보니 키운 적 없는 맨질맨질하고 투명한 것이 발뒤꿈치에 붙어있다
그 속엔 위장도 있는지 소화 잘 된 뒤꿈치는 살 비늘에 켜켜이 스스로의 나이테를 새겨 넣고
그것의 꾸준함에 스스로도 적잖이 놀라워
방심하는 사이 손톱이 뒤꿈치를 향한다
스스로로부터 매일 쫓겨나는 손톱은 끈질기게 붙박여있는 그것이 못마땅한 게 틀림없다
이것은 손끝 야무지게 힘을 지탱하고도 잘려나간 손톱의 복수다
하릴없는 골방의 흰 손의 결심이다
뜯자, 배만 불리는 얄미운 조직을 갈가리 찢어주자
그동안 가진 모든 힘을 손끝에 모아 새빨간 속살이 아린 숨을 내쉴 때까지
흰 손은 일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모든 신경과 감각은 손과 발에 집중되고 조용한 숨소리만 방안을 가득 채운다
생각을 할 수 없는 이상한 시간들이 매일 압축되고 기억은 점점 얇아진다
목적 없이 태어난 굳은살이 꼴 보기 싫은 것은 손톱뿐만 이었는가?
오기만 남은 뒤꿈치는 뜯을수록 세상에 두꺼운 낯짝을 들이밀고
손톱이 알아채지 못하게 날마다 조금씩 바닥과의 간극을 벌려놓는다
뒤꿈치가 유난히 노란 사람이 가장 높은 허공에 막 안착했다
■ 번데기 통조림
- 김미소
친절하게 유통기한표시 찍혀져 나왔으니
속에 무엇을 품든 아무도 겁낼 필요가 없었던 나날들이 억울해
펑하고 터질 줄 알았건만
기껏 목 딴 소리 쉭쉭 바람 새어나가고
보글보글 기포마저 끝내 발악하다 찔끔하고 고인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
무단투기금지 팻말 위로 던져버렸다
아무런 팻말 하나 내 앞에 세워보지 못하고 무능한 팻말을 탓하는 것은 어쩐지 겸연쩍은 일이라서
그만 조용히 지나가려는 찰나
똥파리 한 마리 앞에서 윙윙 거린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경박한 자유로움이 여기보다는 틀림없이 좋아 보이는 것이라
네온사인 십자가에 대고 협박 같은 기도를 하고는
파리, 통조림에 앉자마자 나지막이 묻는다
야야, 너도 번데기였니?
■ 이삿짐센터 남자
- 김미소
이삿짐센터 젊은 남자는
한때는 두 손으로 온 세상을 그릴 수 있다고 믿었던 미술학도였지만
두발로 디딘 현실에서 그의 손은 무능태
젊음이라는 가장 큰 사치를 부린 대가로
마감 없는 할부 명세서 다달이 받아 들고서
화창한 새봄맞이 이사철을 맞아 얼굴 모르는 그녀를 분주히 옮긴다
갖가지 책의 취향을 따져보고
혹시나 같은 낭만을 가진 여자일지도 몰라
알쏭달쏭한 신비로운 그녀에게 어울리는 색은 보라색
꽃무늬 옷을 즐겨 입는 향긋한 여자의 두 손에
꽃다발을 그려 넣고 가만히 웃는 표정을 상상한다
홍조 빛의 뺨 위로 가늘고 긴 그녀의 머리카락이 가슴 언저리에서 살랑거리도록
섬세하게 한 올 한 올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마음에 옮기자 설레는 마음 못이긴 땀방울
톡톡 터져 나오고
이마에 닿은 목장갑이 수줍음에 붉다
********
시(詩)부문
당선작 심사평
제7차 <창작콘테스트> 시(詩)부문 수상자는 김미소 씨의「꿈꾸는 월경」외 네 편의 시이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시인 김호철 / 시인 정은정
***
위 당선자들께서는
[월간문학 한국인] <창작콘테스트> 운영자 메일로
성명, 아이디(or 필명), 얼굴사진 데이터, 생년월일, 성별, 연락처(휴대폰 or 전화번호),
이메일, 거주지 주소(상장 우편발송용), 은행 및 온라인계좌번호(상금 입금용)를
신속하게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상금 입금 및 상장 우편발송은 15일 이내에 처리됩니다.
운영자 메일 : sahachanchan@hanmail.net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회원작가 여러분!
이번 기회가 아니더라도
당선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매회 실시되는 <창작콘테스트>에
끊임없이 도전만 하신다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