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콘테스트> 제30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by korean posted Sep 0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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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콘테스트> 제30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월간문학 한국인]이 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고자 분발하는 젊은 영혼들의 순수 문학 창작의욕을 북돋기 위해 기획한 <창작콘테스트>가 제30차 당선자를 발표한다. 
  [월간문학 한국인]<창작콘테스트>는 작가로서의 무궁한 필력이나 완벽한 전문성을 하나하나 따져 시상하는 그런 대단한 문학상이 아니다. 오로지 전문작가가 되기만을 꿈꾸어온 예비작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다소 흠결이 있더라도 치열한 작가정신과 독특하고도 개성있는 표현,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따져 우열을 가릴 뿐이다. 따라서 설혹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 가능성을 보아 당선작을 뽑을 뿐임으로 문학상으로서의 권위를 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할 것이다.
  이번 공모 역시 응모편수가 역대 최저임에도 공모형식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응모한 작품이 상당수였으며 당선작으로 선정하기엔 작품성을 갖춘 작품이 없었다. 아쉽게도 이번 공모에서는 수필부문 한편만을 은상으로 뽑을 수밖에 없었음을 양해 바란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그간 겪어온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에 의해 산고를 겪듯, 그 누구도 쓰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문체와 어법, 시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이번 <창작콘테스트> 제30차 공모에 참여해주신 작가 여러분들, 그리고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 창작을 자신의 운명으로 택하려하는 모든 분들께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기원하며 각별한 감사와 격려의 뜻을 전한다.
  참고로 당선작들 가운데 일부 결격사유(등단작가가 응모한 경우를 말함)가 있다는 항의가 들어왔으나, 당선작을 발표하고 시상은 15일 이후에 주는 것은 결격사유가 있는지를 검증하기 위한 단계라 보면 된다. 따라서 15일의 검증기간이 지난 후에 즉 시상이 결정된 이후에 문제 제기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음을 밝혀 둔다.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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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 청춘미션
   - 김정예


  "젊을 때 많은 사람을 만나봐야 해."

 우리는 '왜'를 묻지 않았다. 젊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하기에, 그게 청춘의 임무이자 중년으로 넘어가기위한 미션이라기에 응당 수긍했다. 여자중학교 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에게 '남자'란 미지의 대상이었다. 과연 '많은'남자를 살면서 만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세상은 참으로 넓더라. 전혀 다른 컬러를 가진 남자들은 마치 무지개처럼 나에게 다가왔다. 붉고 강렬한 사람, 푸르고 편안한 사람, 신비로운 자주빛까지. 하지만 누구에게도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하고 한 명에게 귀속되는 순간 소중한 시간이 낭비되니까 말이다.

"왜 이렇게 한 곳에 머무르지를 못해?"
"더 많은 사람을 만나야하니까."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건 아니지만."

 상처를 받는 쪽 보다는 만드는 쪽이었다. 하지만 나는 억울했다. 젊을 때, 그러니까 지금 무작정 많이 만나보라고만 말하지 않았는가! 어른들의 말은 무책임한 것이었다. 많이 만나기위해서는 많은 이별이 필연적으로 따라왔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상처를 받아야만 했다. 사랑은 쌍방이라지만 애석하게도 제로섬 게임처럼 상처는 일방적이었고 나는 차라리 주는 쪽을 택했다. 내가 택한 마이너스 상처값은 상대방에게 플러스 상처값으로 되돌아갔다. 결국 이별 앞에 두 사람의 상처와 사랑의 합은 제로. 많은 이들을 향한 날개짓을 하면 할 수록 어른들이 부여한 미션에는 가까워졌지만 내게서 아픔을 배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미안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어른들이 말한 청춘의 미션이라며. 우리는 응당 이리 살아야 해.
 나는 젊은 남녀가 지켜야하는 지침을 착실히 수행했다. 청춘이 자꾸만 흘러갈 때마다 조급함까지 느껴가며 옆자리의 주인을 바꾸었다. 사람을 만날 수록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이 거듭 생겼으나 이렇게 만나고 만나다보면 언젠가는 멈출 수 있겠지. 내게 브레이크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조금만 더 힘내보자고.

"여러 사람을 만나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알았어."
"왜지?"
"정말 나에게 잘 맞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야."

 다행히도 악셀만 밟아대던 내 인생을 멈추게 하는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여태껏 지켜온 청춘미션의 해답같은 사람이요, 흔한말로 운명같은 남자였다.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을 만나기위해 여태껏 만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거구나, 한 사람을 가려내기 위한 배움이었구나. 청춘미션은 평지를 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꼭대기로 가기 위하여 순차적인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인가봐. 나는 단언했다. 그가 나의 꼭지점이자 마지막 층임을. 그는 나의 옥상, 그는 나의 브레이크. 더이상 악셀을 밟을 필요가 없었다.
 최선을 다해서 사랑했다. 여태껏 만남을 통해 배워온 모든 것을 그에게 투자했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지는 않았던 나였기에 이미 그에 대한 많은 정보가 있었던 터라 우리는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 역시도 나에게 최선을 다해주었다. 둘 중 어느누구도 악셀을 밟지 않고 정차해있는 사랑은 고인 물처럼 잔잔하고 평화로웠다. 나는 그가 나의 하늘에 뜬 마지막 무지개라고 믿었다. 여태껏 찾아 헤맸던 모든 색상을 온전히 품고있는 하나의 무지개, 완전한 빛이라고 말이다.

"다른 여자가 생겼어."

 착각이었다. 그는 예상을 빗나가는 유일 남자였다. 항상 좋을 거라고 확신했던 이 관계에서 유일하게 벗어나려는 남자였다. 만남이 시들해질 때쯤이었지만 그때도 나는 장기연애에서 한번쯤 스쳐가는 권태기라고만 생각했을 뿐 거기서 인연이 끝날 줄은 몰랐다. 학교 후배와 동아리 행사를 하다 눈이 맞았다며 솔직하게 모든 것을 고백하는 그 남자는 예전의 내 모습과 닮아있었다. 악셀을 밟고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려던,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달리려던 나의 모습 말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내가 서있는 곳은 계단의 끝도, 마지막 층도 아니었다. 그냥 도로였다. 여전히 우리는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멈춘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서로의 속도가 동일하여 멈춰진 것처럼 보였을 뿐 나는 안식에 안심할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브레이크가 아니라 차라리 신호등이었다. 잠깐 노란불을 켜고 내게 다가왔을 뿐 언제라도 초록불을 띄울 준비가 돼있었다. 

"왜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해?"
"더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니까."
"나를 사랑하지 않아?"
"그건 아니지만."

 머리가 아찔해졌다. 이런 것이 권선징악이고 인과응보란 것인가. 그도 어른들이 내려준 청춘미션을 착실히 수행하던 사람 중 한명이었다. 나는 그의 답변에 반박도 부인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그 말들을 뱉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아프다 못해 쓰려왔다. 처음으로 상처를 받는 사람의 입장이 돼 도망치려는 이 남자의 에너지를 수긍해야만 했다. 송곳보다도 아프고 독했다. 악셀을 밟고 어서 내 눈앞에서 멀리 사라지려는 그는 이미 입을 연 순간부터 부릉부릉, 배기가스를 내뿜고 있었다. 그의 말 한 마디가 연기처럼 코와 눈을 자극했다. 청승맞게 눈물 콧물 쏟아내며 담담한 척도 못한채로 마지막을 맞이해야만 했다. 내 사랑은 역시 머물러있지 못했다.

"정말 나에게 잘 맞고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야."
 
 그는 우리의 만남에는 반드시 이별이 따라올 수 밖에 없었으니 너무 슬퍼말라며 나를 위로했다. 그러고선 젊을 때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지 않게냐며 너도 힘을 내라며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웃을 수도 괜찮다고 끄덕거릴 수도 없었다. 여태껏 저 문장으로 내가 도망쳐온 사람들의 마음이 이렇게 아팠으리라. 고개를 애써 아래위로 저어보고 보내주는 그 남자의 뒷모습에 후회란 눈곱만큼도 없었다. 새로운 사랑과 사람을 행하여 도약하는 그를 뒤로하고 나만 정승처럼 우뚝 서있었다. 처량한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체인처럼 나를 옭아매는 상처를 기억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라고 말했던 이유, 어쩌면 만남에 있어서 인과응보와 카르마를 자연스레 배우라는 어른들의 지혜였나. 이것은 비단 성숙을 위한 지침이 아니라 또 한번의 혹독한 교육이었나. 알 수 없었지만 나 역시도 그 말대로 한번 더 살아야만 한다. 여기는 도로, 아우토반. 사람과 사랑을 향해 새로이 달리지 않으면 영원히 혼자다. 체인을 풀고 달려야만 한다. 아프고 힘들어도. 

"젊을 때 많은 사람을 만나봐야 해."

 밉다. 너무 밉다. 나는 이 말이 너무 밉고 아프다. 철칙처럼 지켜온 가치관, 너무 아파. 나는 사랑에 있어서 젊고 싶지 않아. 이제는. 



■ 글쟁이, 바벨론 탑에서
   - 김정예


  언제부터 돈이 인간의 정수리 위에 둥지를 틀고 살았는가. 인생의 목적은 오로지 자본의 바다를 향한 침수로만 향하고 있다.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온전히 경제적 가치, 재화로만 평가되고 이에 따라 경중이 측정된다. 그 와중에 '아티스트' 라고 불리는 예술가들은 도시의 부적응자를 자처하며 끊임없이 속세에 도태되고 있다. 물론 옐로우 저널리즘을 자극하는 상업기교를 보여주는 예술가들은 놀라울만큼의 높은 자본탑을 오르게 된다. 그러나 층계 위에 서길 거부하는 예술가들은 자연히 풍족함과는 멀어지게 된다. 순수 예술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익숙한 것 역시 이러한 사회 모습 때문이다.

"글은 돈이 안돼. 출판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몇이나 돼?"

 나는 15세부터 글을 썼다. 20대 후반이라는 라벨링이 붙은 지금까지 어떻게든 글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를 썼다. 누군가는 취미와 여가로 잡는 것이 펜이고 종이라지만 나에게는 꿈이고 유일한 캔버스였다. 물론 특출나게 이 분야에 재능이 있어서는 아니다. 단지 너무 사랑하기에, 내가 가진 재능 중 가장 즐겁게 써먹을 수 있는 재능이기에 그 역량이 소박할지언정 꾸준히 십여 년간 한 우물만 판 셈이다. 퇴사 후 본격적으로 글을 쓰겠다고 선언했을 때 주변사람들은 모두 합심한 듯 나를 말렸다. 자본탑의 세계에서 능동적으로 도태되길 선택하지 말라며 말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인기있는 요즘의 도서들을 잔뜩 보여주었다. 세상은 더 이상 긴 글을 원하지 않고 자신만의 감성을 담은 서사도 원하지 않는다고. 지금의 세계가 원하는 글이란 마치 서점의 베스트 셀러칸에 진열된 힐링도서들처럼 획일화 돼있다고 말이다. 예술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며 나에게 더 짧고 더 자극적이고 더 촌철살인 같은 문장으로 글을 쓰라 조언했다. 진정성과 진솔함은 이제 유희의 영역에 실존하지 못하는 듯 하다.

"자신의 글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새끼를 보듬지 못하는 부모와 같다."

 18세 때 문학선생님이 해주신 말이다. 그는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마땅히 숙명처럼 자신이 내놓은 작품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고 누차 강조했다. 자신의 글을 자식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책임있는 창작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가르침에 따라 수 년간 글을 쓰면서 나는 손끝에서 나온 창작물을 열렬히 사랑했다. 비록 성과는 작았지만 충분히 만족했다. 하지만 주변인들의 '돈' 이 되는 피드백을 듣고 난 이후부터는 창작이 두려워졌다. 어깨와 머리에 힘을 잔뜩 주고 의식하지 않으면 그들이 원하는 글을 써내려가기가 힘들었다.
 돈이 되지 않아, 돈이! 타이핑을 하고 원고를 써내려가면서 사랑했던 문장과 애정으로 매듭지은 문단을 지우고 거듭 수정했다. 조금 더 유명한 작가처럼, SNS에 공유가 많이 되는 글귀처럼. 퇴고에 퇴고를 거듭한 글을 보니 마음이 참담했다. 나는 글의 주인이 될 수 없었다. 기교와 신세대의 밈(meme)만이 잔뜩 남은 그 글은 흥미롭고 술술 읽힐지언정 진정성이 없었다. 

"그래. 이게 요즘의 글이야."

 주변인은 그 글을 좋아했다. 재미있고 흥미있다며 과분한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아주 모르게 돼버리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그들을 기쁘게 했는지, 정작 글을 쓴 나는 작품을 사랑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서러웠다. 모니터를 꽉 채운 기교 투성이의 글을 보고 왈칵 눈물이 나려고 했다. 이러려고 교복을 입었던 시절부터 글을 썼던 건 아닌데, 왜 진솔하게 쓰면 재미없는 글이 되는 거지. 어째서지. 새벽 4시까지 주변인들에게 사랑받은 글을 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과연 나는 자본의 탑에 오르기 위해 거짓으로 꾸며진 글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야하는가.
 그래도 먹고 살아야하지 않냐며 꾸역꾸역 예술가의 페르소나를 쓰고 사랑이 없는 글을 낳았다. 더이상 내가 작품을 만든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키치화풍의 모조 그림을 그리는 화가처럼 모작과 유사작을 타이핑했다. 주변인의 사랑을 듬뿍받고 자라난 내 글은 괴물이 돼있었다. 층계를 한 발짝 오를 때마다 글에는 가상화폐가 더덕더덕 붙어있었다.

"1000 포인트를 위하여."

 나는 아티스트가 아니다. 나는 아티스트로 영원히 살지 못할지도 모른다. 오로지 재화를 위하여 써내려가는 타이핑에 고개를 들 수 없다. 단출한 글쟁이의 삶을 갈망하면서도 통장 잔고를 보면 도저히 그 길을 고집할 수가 없다. 세상과의 타협이라며 현명한 방향이라는 주변인의 조언이 독인걸 알면서도 말이다. 사랑이 없고 애정이 빠진 글에는 부끄러움과 슬픔이 채워졌다. 애환으로 범벅된 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0 포인트라는 최소 결제단위로 이따금씩 팔려나갔다.
 나는 서럽다. 어째서 말초신경을 들쑤시는 글이 아니면 사랑받을 수 없는가. 야심한 밤 몰래 훔쳐보는 글이 아니고서야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인가. 나의 재능과 역량을 탓하라는 손가락질이 있겠지만 좌우지간 나는 자본탑 위에 펜을 든 사람으로써 마음이 애처로워진다. 돈이 아닌 진심만 담은 예술이란 마치 바벨론의 탑처럼 영원히 꼭대기에 군림할 수 없는 영역은 아닌가. 신의 미움을 사 서로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벌을 받은 사람들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탑을 오르려 하면 할 수록 주변인들과 멀어지는, 차라리 형벌은 아닐까. 돈을 포기한 예술의 모습은 바벨의 탑이 돼가는가.
 어쩔도리가 없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숙이며 자본탑의 층계를 대신 오를 수 밖에 없다. 한 층, 한 층 올라간다.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글을 바꾼다. 퇴고에 퇴고를 거듭하는 마음에 아쉬움이 차오른다. 완성된 글에 미련이 가득이다. 누가 알아줄 것인가. 그 누가 말이다. 나는 부끄러운 글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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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당선작 심사평


  제30차 <창작콘테스트> 은상은 수필부문 김정예 씨의 「청춘미션외 한 편의 수필을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수필가 유미숙 / 수필가 정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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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당선자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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