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콘테스트> 제6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by korean posted Aug 2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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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콘테스트> 제6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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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 한국인]이 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고자 분발하는 젊은 영혼들의 순수 문학 창작의욕을 북돋기 위해 기획한 <창작콘테스트>가 제6차를 맞았다. 이번 제6차 공모는 한여름 무더위 속에 진행된 탓인지 응모작이 이전 차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고, 작품의 수준 또한 기대에 못미쳤다는 평이다. 
  [월간문학 한국인]<창작콘테스트>는 작가로서의 무궁한 필력이나 완벽한 전문성을 하나하나 따져 시상하는 그런 대단한 문학상이 아니다. 오로지 전문작가가 되기만을 꿈꾸어온 예비작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다소 흠결이 있더라도 치열한 작가정신과 독특하고도 개성있는 표현,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따져 우열을 가릴 뿐이다. 따라서 설혹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 가능성을 보아 당선작을 뽑을 뿐임으로 문학상으로서의 권위를 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할 것이다.
  이번 응모자 또한 모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을 터이고 나름의 재능을 발휘하였다고 보여지지만, 상당수의 작품들은 여전히 진부한 낱말들의 사용과 구태의연한 표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점이 아쉽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그간 겪어온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에 의해 산고를 겪듯, 그 누구도 쓰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문체와 어법, 시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창작콘테스트> 제6차 공모에 참여해주신 작가 여러분들, 그리고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 창작을 자신의 운명으로 택하려하는 모든 분들께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기원하며 각별한 감사와 격려의 뜻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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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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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부문





동거
문영민

 
 
  수저를 내려놓았다. 도저히 더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입 안에는 씹고 씹어 흔적조차 없어진 밥알들이 허무한 단맛만을 내고 있었다.
  “뭐가 문제인거야?”
  습관처럼 울컥 짜증을 내자 식탁 밑에 쭈그려 앉아있던 아이가 고개를 들어 눈치를 살폈다. 나는 식기를 들어 싱크대에 넣었다. 수도꼭지에서는 쏴아, 소리를 내며 물이 쏟아졌다. 그래도 속은 풀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아이를 노려보았다. 아이는 미동 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다.
  “다 너 때문이야.”
  특별할 것 없는 아침이었다. 젖은 머리를 말리지 못한 채 식탁에 앉는데 그 아이가 마주보고 있었다. 물방울이 머리가닥 끝에서 톡톡 떨어졌다. 초대받지 않은 나의 일상에 예고 없이 침범한 이방인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나와 같은 식탁에 앉고 나와 같은 침대에 누웠다. 쫓아내려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현관 밖으로 몰아낼 때 마다 길쭉해진 이목구비로 고개를 숙이던 어린 침입자는 다음순간 기척도 없이 다시 거실 소파에 기대 앉아 있었다.
  아이가 찾아온 날, 나는 후각을 잃었다. 처음에는 내가 후각을 잃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예기치 못한 침입에 심기가 사나워져 입맛이 없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나 익숙한 감각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사람의 혀는 단맛, 짠맛, 신맛, 쓴맛을 느낄 수 있다. 통각까지 더해 내가 느낄 수 있는 맛은 매운 맛까지 다섯 가지나 되는데 나는 이 다섯 가지나 되는 맛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혀로 느끼는 미각과 치아로 느끼는 촉각만으로는 허전해서 나는 필사적으로 후각을 찾으려 애썼고 종내에는 내 몸에 혀만 남은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더욱 더 맛에 집착했다.
  의사가 처음 정신과 얘기를 꺼냈을 때야 나는 비로소 의학적으로 내 몸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확신했다. 처음에는 일부러 싱거운 음식을 찾다가 나중에는 혀가 견디지 못할 만큼 자극적인 음식을 찾았다. 그러나 그것은 혀에서만 느끼는 감각일 뿐 코에서 느낄 수 있는 영역이 아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잃어버린 감각에 대한 보상심리로 폭식을 하던 나는 어느새 지쳐갔다. 후각을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해버리고 나자 식사량은 자연히 줄었다. 지금 나는 살기위해 먹고 있다. 먹는다는 행위는 나에게 에너지를 소모해야하는 대단히 즐겁지 않은 일이 되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인의 이름은 뜨지 않았지만 누가 건 것인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몇 번 더 울리던 전화기가 잠잠해지고 곧이어 문자메시지가 들어왔다.
  ‘잘 지내? 전화 안 받아서 문자 남겨. 가끔은 연락해. 걱정된다.’
  바보 같은 사람. 그는 어떤 의미로 집요했다. 답이 없으면 포기할 만도 하겠건만 별거 후에도 일주일에 몇 번씩 살뜰하게 안부를 묻는 문자를 보내오곤 했다. 나는 전화기를 손에서 놓았다. 그의 다정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잠시 흔들렸지만 곧 메아리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욕실로 갔다. 샤워 젤을 듬뿍 짜서 거품을 만들고 또 만들었다.
  후각이 사라진 뒤로 나의 일상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음식의 맛을 온전히 즐길 수 없는 것은 다소 불편했지만 나에게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 모른다는 것은 불편을 넘어서 불안하기까지 했다.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조금만 오래 머무르면 그것은 나에게서 불쾌한 냄새가 난다는 신호가 아닐까 두려워졌다. 그래서 샤워를 병적으로 오래, 많이 하는 것으로 모자라 향수까지 듬뿍 뿌리고 다녔다.
  “자기 냄새 참 좋다.”
  “그래?”
  옆자리에 앉은 동료가 내게 그런 말을 해왔을 때, 무슨 냄샌데? 라고 물어볼 뻔 한 것을 겨우 참았다. 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애초에 향수를 살 때 시향조차 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제일 화려한 병에 담긴 것을 샀던 것 뿐, 과일 향이 나는지, 꽃 향이 나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모든 것이 그런 식이었다. 심지어 지금 내가 눌러 짠 샤워 젤도 장미꽃이 병에 그려져 있기에 장미향이라 짐작하는 것뿐이었다. 문득 혼란스러워졌다. 장미향이 무슨 냄새였더라?
  주말의 TV에서는 쉬지 않고 비슷한 얼굴들이 비슷한 표정으로 비슷하게 웃었다.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뱅뱅 돌리다 전원을 껐다. 잠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내 앞으로 어린 아이가 다가왔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했지만 그 눈에는 의지가 없어보였다.
  “가.”
  한마디에 거실 구석에 가 앉았다. 눈을 감았다. 뭐였더라? 어떤 냄새였더라?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맡았던 냄새가 무슨 냄새였는지 기억해보려 애썼다. 이러다가 정말 영영 냄새는 물론이고 냄새에 대한 기억마저 모두 잃을까 두려웠다. 상실한 감각의 기억. 감은 눈 안에서 발그레한 색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맡았던 냄새의 기억.
  그것을 거칠고 뜨거웠다. 아름다운 향기는 아니었다. 성냥 끝 빨갛고 우툴두툴한 유황냄새, 그리고 동네 놀이터의 모래에서 풍기는 먼지 냄새. 기억이 났다. 마지막으로 맡은 냄새가 이런 냄새라니……. 왠지 억울했다.
다시 집중했다. 눈 속을 떠돌던 붉은 잔상이 하얀 도깨비불처럼 떠다녔다. 이번에는 내가 많아 보았던 가장 근사한 냄새를 떠올려 보았다. 그가 나에게 내밀었던 부케에서 나던 하얀 장미꽃 냄새. 나는 흰 장미에서 산딸기 냄새가 난다고 그에게 말하곤 했다. 그가 산딸기라며 내밀던 장미 꽃다발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 냄새는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우체통에 우편물을 정리하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두꺼운 질감에 봉투를 열었다. 짙은 쪽빛 봉투 안에 반들거리는 청첩장이 들어있었다. 실크처럼 부드럽게 흐르는 종이를 펼치자 신부라는 글자 밑에 아는 이름이 보였다. 결혼, 언니도 결혼을 하는 구나. 청첩장 아래에는 꼭 오라는 언니의 메모가 적혀 있었다. 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사촌언니는 친척들 중에서 나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해 준 가장 친밀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의 결혼식에서 부케를 받은 것도 다른 이가 아닌 바로 언니였다. 그럼에도 망설여졌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다. 아니, 나의 마음이 지금 간사하다. 오늘따라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바라보며 그에게 먼저 전화를 해 봐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아직 우리가 별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위로를 가장한 시선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힘없이 탁자 위에 청첩장을 내려놓자 아이가 다가가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만지작거렸다. 소리를 지르는 대신 눈썹에 힘을 주었다. 아이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나도 신부였던 적이 있었다. 내 이름이 찍힌 청첩장이 돌았던 적이 있었다. 정갈한 글씨로 박힌 내 이름을 보면서 그제야 내가 결혼을 앞두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드레스에 대한 기대도,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두려움도 그리 크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 결혼은 살아가며 거쳐야 할 하나의 관문이자 순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나를 볼 때마다 설렌다고 했다. 그의 뜨거운 구애가 결혼에 대한 확신을 준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와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단 하나, 그가 편했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있어 결혼의 필요조건에 사랑은 없었다. 그것은 신뢰 하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제나 느긋했고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쓸데없이 다정한 성격에 화를 낼 줄도 몰랐다. 나와는 정반대인 그와 같은 사람이어야 했다. 이런,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청혼을 하며 반지를 내밀던 그의 반짝이는 눈빛이 떠올라버렸다.
  결혼 후의 일상은 행복하지 못했다. 화낼 줄 모르는 그는 답답했고 낙천적인 그 성격은 나태해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사소한 일로도 자주 날을 세웠고 사과는 언제나 그가 먼저 했다. 나도 내가 왜 그렇게 그에게 관대하지 못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나는 그를 향한 분노의 원인을 알았다. 나는 그에게 실망했던 것이다. 나는 그의 아내가 되면 그에게 온전히 의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내 온 몸을 맡기고 그가 가는 방향으로 휩쓸리고 싶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가 헤쳐 나갈 인생에 무임승차를 하고 싶었다. 결혼에 사랑이 필요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를 사랑해서 그와 결혼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 떠밀리듯 덤으로 살고 싶어서 그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따뜻한 봄날이었다. 햇살은 거실 창을 통해 정면으로 들어왔다. 창밖으로 목련 꽃봉오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반지가 바닥에 부딪혀 작은 소리를 내며 몇 번 굴렀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그는 석고상처럼 하얗게 굳었다. 현관 밖으로 그가 나갔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끝이 났다. 시시한 결말이었다. 섹스리스 부부로 지낸지 몇 달 째였다. 시시했으나 예상된 결말이기도 했다.
  나는 지쳐있었다. 나는 줄곧 빠른 속도로 홀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원망스러웠다. 잠시도 쉴 틈 없이 두 사람의 속도로 하루를 살아내는 나를 관망하며 혼자 유유히 일상을 영위하는 그가 미웠다.
  그러나 그 역시 나 만큼이나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돌기가 딱 맞아 들어가 서로가 서로의 동력이 되어줄 줄 알았던 우리는 사실 겉돌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내게서 멀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맞물려 들어간 줄 알았던 톱니바퀴가 사실은 톱니 몇 개가 빠져 고장 나 있었다는 것, 우리는 사실 맞닿아 있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힘도 될 수 없었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내가 고장 난 쪽이었다는 것을.
  잠들어있던 전화기가 기지개를 켜듯 울렸다. 그의 번호였다. 그대로 두었다. 짧은 신호음과 함께 문자메시지가 떴다.
  ‘별 일 없지? 혹시 도울 일 있으면 연락해.’
 
  “이혼은 안 돼.”
  그는 단호했다. 원래 이렇게 고집이 있는 사람이었나,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의 주장대로 별거를 택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혼의 정해진 수순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이렇게 끝까지 여지를 남기는 것이 참 그답다고 생각했다.
  그가 집을 떠난 뒤 나는 제일 먼저 휴대폰에 저장된 그의 번호를 지웠다. 내가 먼저 그에게 전화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행여 술에 취해서라도 그에게 전화하기 싫었다. 우습게도 연애시절부터 결혼한 후에도 외워지지 않던 그의 번호를 그가 떠난 후에야 선명히 기억하게 될 줄이야.
  휴대폰을 들었다. 머리와는 다르게 손가락은 한참이나 통화키 위를 맴돌았다. 그러나 끝내 누르지는 않았다.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지 않았다면 좀 더 편했을지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그에게 아무렇지 않게 전화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연락하고 안부를 묻기가 불편했다. 그에게 남은 감정이 애정인지 아니면 조금 남은 미안함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혼자만의 죄책감인지 몰랐다. 미안함이나 죄책감이라면 혼자 감당해야할 몫이었지만 그게 애정이라면……. 여기까지 생각하다 나는 웃어버렸다. 애당초 사랑이 없는 결혼이었다. 연애시절에도 없던 애정이 그가 떠났다고 샘솟을 리 없지 않은가. 그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나의 날카로운 가시가 그의 톱니를 깨뜨렸다. 그의 깨진 자리에도 나와 같은 가시가 자라고 있으려나.
 
 나는 느긋하게 일어나 공들여 화장을 했다. 아이라이너를 짙게 칠하고 속눈썹을 가닥가닥 올렸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진한 화장은 웃는 얼굴을 그리고 있었다. 표정을 보이는 것이 싫었다. 그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가지 않을 수 없는 자리였다. 결혼식은 소박했다. 크지 않은 예식장에 친지들이 모여 있었다. 일부러 늑장을 부리며 간 자리라 주례는 거의 끝나 있었다. 어차피 얼굴만 비추고 갈 계획이었다. 뒤늦게 축의금을 내고 간단히 인사를 한 뒤 돌아서는데 어깨에 이질적인 무게감이 얹혔다.
  “밥은 먹고 가야지.”
  온화한 할머님의 말씀에 그냥 돌아설 수 없었다. 식당이 있는 일층에는 이미 많은 친척들이 앉아있었다. 평소에 얼굴 한 번 보기 힘들었던 사람들이 모여 저마다 근황을 전하고 있었다. 나도 그 귀퉁이에 앉았다. 드레스를 갈아입은 신부가 신랑과 함께 테이블을 돌았다. 신부가 예쁘게 웃고 있었다.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보였지만 행복함으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축하의 말을 건넬 기회는 없었다. 익숙한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신랑과 신부가 식장을 떠나고 나는 묵묵히 접시를 비웠다. 예식장 뷔페는 참 맛이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지금 나에게는 모든 음식이 맛이 없다. 결국 다 비우지 못한 접시를 남긴 채 일어섰다.
  “벌써 가게?”
  “네, 바빠서요.”
  식당을 빠져나가며 신부 측 아버지를 곁눈질했다. 고모부는 축하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광대뼈가 올라가고 얼굴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딸을 곱게 키워 잘 시집보내는 아버지의 얼굴은 인자하기 그지없었다. 잠시 머물렀던 시선을 거두고 나는 거침없이 나와 버렸다. 집으로 들어온 나는 의도치 않은 다이어트 때문인지 매우 피곤했다. 구두를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소파 위로 엎드렸다. 나가던 순간까지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그 말이 그제야 목을 타고 나왔다.
  “행복하세요?”
  눈이 가물거렸다. 흐릿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아이가 보였다. 눈꺼풀은 점점 내려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꿈을 꿨다. 고모부 앞에서 나는 똑똑한 발음으로 말했다. 행복하세요? 그래서 당신은 아쉬울 것 없이 행복하냐고. 장면이 바뀌고 이번에는 그 앞에서 담배를 물었다. 불을 붙이고 크게 한 모금 빨아서 그의 얼굴에 뱉었다. 하얀 연기에 그와 주변에 있는 사람들 모두 흑백영화의 스틸 컷처럼 색을 잃었다. 이러면 내가 이기는 걸까? 나는 흐느끼듯 웃었다. 움직임을 잃은 정물들은 허물어져 검게 흘러내렸다.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고 발끝부터 감싸왔다. 치맛자락이 무릎 위를 쓸고 올라갔다. 뜨듯한 온기가 허벅지 위를 스치고 속옷을 헤집었다. 은밀한 부분까지 거침없이 올라갔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 질렀다.
  “무슨 짓이야!!!”
  아이였다. 놀란 눈으로 내 다리 사이에서 손을 빼냈다. 하지만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표정은 아니었다. 분노에 휩싸인 내 눈을 피하지 않으며 기쁜 듯이 웃었다.
  “이젠 소리 지를 수 있어.”
  나는 이성을 잃었다. 작은 손목을 잡아 침대 밑으로 내동댕이쳤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진심으로 나는 이 아이가 사라지길 바랐다. 나는 그 아이 위에 올라타 두 손으로 아이의 목을 틀어쥐고 손목에 힘을 주었다. 땀이 턱을 타고 내려와 그 아이 얼굴 위로 떨어졌다. 아이의 입이 열리고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듣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 작은 목소리는 너무 분명하게 들렸다.
  “고모부, 고모부였어.”
  손목에 힘이 풀렸다. 내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말 하지 마. 제발 조용히 해. 그러나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중얼거림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 날도 이런 여름이었다. 아이는 기억한다. 더운 여름 열대야를 피하기 위해 마당 앞에 쳐 놓은 텐트 안에서 아이는 사촌언니와 함께 잠을 자고 있었다. 서늘한 새벽공기가 내리며 소름마저 작게 돋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이는 눈을 뜨고 말았다. 몸이 이상했다. 눈을 뜨자 어스름한 대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새벽인지 저녁인지 헷갈릴 만큼 파랗게 어두웠다. 아이의 눈은 자신의 몸을 향했다. 그리고 아이는 어쩌면 보지 말았어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아이의 가랑이 사이로 큰 성인 남자의 머리가 쑥 나왔다. 그 머리에는 너무 익숙한 눈, 코, 입이 달려 있었다. 아이는 가랑이를 오므리고 몸을 돌려 모로 누웠다. 눈을 다시 감았다. 그가 이쯤에서 포기하고 가길 바랐다.
  소리도 지르지 않았고 놀란 티도 내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배운 적 없었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아이의 옆에는 사촌 언니가 아직 잠들어 있었고 깨서 이걸 본다면 많이 놀랄 것 같았다. 아이는 애써 다시 자는 척을 했다. 웅얼웅얼 잠에 취한 것처럼 소리를 내며, 그러나 그는 떠나지 않았다. 귓불에 뜨거운 숨이 닿았다. 그가 속삭였다.
  “괜찮으니 계속 자렴.”
  그의 손가락이 은밀한 부위를 파고들었다. 아이는 시체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고모부가 내 몸을 만졌어.”
  사촌언니에게 말했다.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언니밖에 없었다. 언니는 아이와 가장 친한 사람이었으니까. 아홉 살 어린 애가 할 만한 행동이었다.
  “우리 아빠가? 거짓말 하지 마.”
  “거짓말 아니야.”
  사촌언니는 퍽 복잡한 표정이었다. 아이는 숨을 죽였다. 사실 언니에게 뭔가 이 일을 해결해 달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사촌언니도 아이와 같은 어린이였을 뿐이었다. 단지 아이가 바랐던 건 괴로웠던 그 날 새벽에 대한 위로였다.
  “아니야. 네가 자다가 이상한 꿈을 꾼 거야.”
  억울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그때 언니를 깨우는 건데, 라고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후 할머니께서 아이를 부르셨다. 할머니의 윗입술 위에 큰 점이 움직였다. 그날 아이는 할머니께 꾸중을 들었다. 할머니는 아이가 거짓말쟁이라고 하셨다. 거짓말쟁이는 하늘나라에 못 간다고도 하셨다. 나쁜 거짓말로 착한 사촌언니를 물들이지 말라고 하셨다. 아이는 무릎을 꿇고 그 말씀을 들으면서 할머니 입술의 주름을 세 보았다. 주름을 다 셀 무렵 꾸중은 끝이 났다.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죄송하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언니에게 말을 한 것도, 그날 아랫도리에 고개를 파묻은 고모부를 본 것도 죄송했다. 할머니는 아이의 사과에도 불쾌함을 떨쳐내지 못하셨다.
  “언니, 미안. 내가 꿈을 꾼 게 맞아.”
  엄청 좋아할 줄 알았던 언니는 시큰둥하게 그래, 하고 넘겼다. 아이는 그 이상 어떤 말도 더 하지 못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날 새벽은 새벽인지 저녁인지 헷갈릴 만큼 짙게 푸르렀다. 그날 일도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만큼 헷갈린 거라고 믿기로 했다. 아홉 살 어린 애가 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날 이후로 그는 아이의 몸을 만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는 그것이 진짜 꿈인지 현실인지 내내 헷갈렸다.

  주문을 외듯 높낮이를 잃고 빠르게 읊어대던 아이의 목소리가 멈췄다. 시선은 허공을 맴돌았다. 그래서 이제와 어쩌라고. 나는 그 아이를 동정하고 싶지 않았다. 왜 이제와 내게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날 밤 아무도 믿지 않았던 추행에 대한 공소시효는 이미 지났다. 그것이 그렇게 사무치는 기억이 될 것이었다면 아이는 좀 더 적극적으로 대항했어야 했다. 소리를 지르고, 잠이 든 언니를 깨우고, 손에 잡히는 대로 뭐라도 집어던졌어야 했다. 그러나 아이는 그러지 않았다.
그토록 억울했다면 홀로 꿈을 꾸며 만족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자리에서 의미심장한 말 한 마디를 하거나, 피로연장을 뒤집어엎었어야 했다. 그러나 나도 그러지 않았다. 아홉 살 어린 아이는 갈 데 없는 자신의 주제를 너무 잘 알았고, 서른한 살 성인 여자는 자신의 파경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린 탓일까. 한 사람을 향하던 증오가 분산되어 버린 탓일까. 나는 나를 범했던 한 사람만을 증오하지는 않았다. 이 증오의 방향이 향한 것은 마땅히 보호해야 할 자기 자신조차 지키지 못했던 나 자신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나에게 용서를 구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새벽마다 울며 기도를 했다. 그 기도 안에 간간히 내 이름이 섞여 나올 때도 있었다. 죄가 많은 그는 거푸 용서해 달라며 주님을 찾았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미안하다면 나에게 사과를 하면 될 일이었다. 나는 그 사람의 바로 옆에 있었다. 만나기 힘든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고개를 돌리면 그 사람 옆에서 숨 쉬는 나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 보다 힘들었을까? 그는 나의 용서가 아닌 신의 용서가 필요했나보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나는 꿈을 자주 꿨다. 모든 아이들이 교복을 입고 앉아있는 교실에서 혼자 나체로 앉아있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책상과 의자로 내 살을 다 가릴 수 없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아무도 내가 벌거벗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나는 혼자서 수치스러움을 감당했다. 그 감정은 아침을 맞고도 한참을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숨겨야 할 것이 생겨버렸기 때문이었다. 싫은 내색 없이 아내를 찾아 집을 나간 남동생의 딸을 살갑게 대해주는 고모의 눈을 보기도 괴로웠다. 일기장에는 아무 일 없이 행복하다는 진짜 거짓말을 적다가 누가 볼세라 덮어버리곤 했다. 진짜 거짓말 속에서 가짜 거짓말이 비웃으며 떠다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일이 나를 완전히 무너뜨린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후로도 별 문제 없이 학교를 다녔고, 나이가 들어서는 연애도 했으며 지금은 별거중인 그와 한때 몸을 섞기도 했다. 그 일이 내 삶의 방향을 지배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일은 가끔 혼자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화장대에 앉아 팔자주름을 확인할 때, TV 채널을 돌리려 리모컨을 집을 때 카메라에서 터지는 플래시처럼 번쩍 하고 지나갔다. 치부를 남김없이 드러낸 채 예고 없이 터지는 플래시를 받은 것처럼 나는 그 순간마다 몹시 당황했다. 그리고 들리지 않는 소리로 되뇌었다.
  “그건 내가 아니야.”

  “그건 나 맞아.”
  아이의 목소리가 맥없이 흘러나왔다. 나는 새삼 그 아이가 무서워졌다. 내 모든 기억을 안고 있는 존재이자 내 모든 증오를 받아낸 존재였다. 거대하고 끔찍한 모습이었다면, 뿔이라도 몇 개 달렸다면 덜 무서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홉 살 아이는 또래에 비해 키가 작고 얼굴이 희었다.
  “나에게 원하는 게 뭐야?”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원하는 게 없다는 것으로 보였다.
  “어떻게 하면 날 떠나주겠니?”
  아이는 다시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내가 어떻게 해도 떠나지 않는다는 뜻인가? 나는 어떻게 해도 그 아이에게서 벗어날 수 없단 말인가? 생각 외로 화는 나지 않았다. 대신 지독한 무력감이 온 몸을 엄습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끝이 없는 궤도를 빙빙 도는 기분이었다. 뫼비우스의 띠, 알과 새가 떠올랐다.
  고교시절 동창이 웃으며 알과 새 중에 어느 것이 먼저일까 물었다. 나는 그때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 아이와 나, 우리 둘 중 누가 먼저일까? 우리 일의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은 누구일까? 나는 그것이 그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 아이가 겪은 일이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의 원인이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판단은 매우 불완전해서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서른하나 의 성인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아홉 살 아이가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그 일이 너무 참담했기에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 내색 없이 그 사람과 같은 집에서 십여 년을 더 살기 위해서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말아야 했다. 그 사이에 어린 치아가 저절로 피가 나고 흔들리다 빠지듯 나의 일부였던 부분은 부서져 떨어져갔다. 나는 불량품이 되었다.
  빠져버린 톱니에서는 피가 난 곳에 딱지가 앉고 어린 치아가 빠진 자리에 영구치가 자라나듯 새로운 무언가가 자라났다. 내가 톱니라고 착각했던 그것은 톱니가 아니었다. 상처받은 그곳에는 가시가 자라 여기저기 기회만 되면 찌르고 다녔다. 가시를 키우는 것은 나에게도 고통스러웠다. 날카로운 기억의 편린이 영혼을 뚫고 나오는 아픔을 익숙해 질 만큼 오래 알지도 못하고 앓았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원망 없이 바라본 아이는 많이 왜소했다. 낡아서 반들반들 해진 교복이 눈에 들어왔다. 구깃구깃한 치마 아래로 아이는 계절에 맞지 않게 겨울용 검은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저 스타킹 안에 뭐가 있는지 나는 안다. 멍든 다리를 감추고 있겠지.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딸을 들여다보던 아버지는 그리 다정한 사람이 아니었다. 분노로 충만했던 그는 딸을 자주 때렸다. 그 폭력의 강도가 견딜 수 없는 수준이 되면 누군가 와서 말렸다. 그가 딸을 보기 위해 찾아왔다가 아이를 때리는 건지, 아니면 아이를 때리기 위해 일주일간 기다렸다가 찾아오는 건지 아이는 혼란스러웠다. 할머니는 아이에게 검은 스타킹을 내밀었다. 손녀의 상처를 가리려는 게 아니라 아들의 비상식적인 행위를 가리려는 것이었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가며 깨달았다. 나는 그래서 그 아이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무렵의 숨죽인 울음소리, 거친 숨소리, 그것을 피하기 위한 애원들이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건 내가 아니어야 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탄생과 함께 울음을 터트린다. 그러나 너는 나의 사생아. 한 번도 태어나길 원한 적 없던 아이, 존재를 축복받을 수 없었던 나의 분신. 행여 누구도 그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게 끊어진 울음소리라도 들릴까 입을 막았다.
너를 차마 사랑할 수 없었다. 너를 위로할 수도 없었고 동정은 더더욱 하고 싶지 않았다. 너에게 마음을 쓰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보다 쉬운 길을 택했다. 너를 미워하는 일은 차라리 편했다. 그것은 오히려 나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나는 법관처럼 고고하게 너를 판결했다. 다른 이가 아닌 너였기에 나의 판결은 더 단호했고 더 가혹했다. 너였기에 나는 이해도 관용도 허락하지 않았다.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달팽이처럼 움츠러들었다. 아프지 않게 그 팔을 끌어 내 품에 아이를 안았다. 작은 숨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렸다. 그 아이를 안고서야 알았다. 그 아이는 나의 부서진 톱니바퀴 조각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 자랐는데 부서져 떨어져 나간 그 작은 조각은 그때 모습 그대로 자라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은 채로 이렇게 나를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와 그 조각이 다시 제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이미 성장해 있었고 그 작은 조각들이 들어올 자리는 무성히 자라난 가시들로 채워져 있었다. 혼자 자라버린 내가 해야 할 일은 이제 이 작은 조각이 더 이상 내 주위를 배회하지 않고 편히 쉴 수 있게 해 주는 것이었다.
  “여기 있어도 돼.”
  내내 표정이 없던 아이의 눈이 처음으로 커졌다. 정말 그래도 돼. 나는 돈도 벌고 있고 집도 있어. 그리고 이젠 어른들도 나에게 함부로 하지 못해. 여기는 안전해. 나는 안전해. 작은 짐승처럼 안겨있던 아이가 흔들거렸다. 웃는 것 같았다. 나도 웃음이 나왔다. 아이를 보내는 것을 포기하고 났더니 조금 편해졌다. 괜찮겠지. 함께 산다고 해서 더 나빠질 것은 없을 테니. 나는 눈을 감았다.
 
  휘파람 소리처럼 무언가 서늘하게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눈을 떴다.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긴 꿈을 꾼 게 아닌지 의심이 들 만큼 평온하고 고요했다. 창밖으로 부연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밤이 지나갔나보다. 한동안 나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주전자에서 끓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가스레인지를 껐다. 머그컵에 커피믹스를 넣고 물을 부었다. 머그컵을 들고 서성이다 소파에 앉았다. 그제야 외로웠다.
  나는 사실 온전히 혼자인 적이 없었다. 내 곁에는 그가 있었고, 그가 떠난 후에는 그 아이가 줄곧 나와 함께였다. 아니, 어쩌면 그 아이는 쭉 나와 함께였는지 모른다. 그와 함께였을 때도, 그와 만나기 전에도, 그리고 어쩌면 아직도 내 안에서 떠돌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나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외롭다. 그가 내 곁을 떠났을 때도 이렇게 외로운 줄 몰랐다.
  누군가의 말소리가 그리웠다. 한 번에 많은 에너지를 폭발시킨 탓인지 기운이 빠져 어깨가 내려왔지만 전화기를 들었다. 그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온 몸에 힘을 빼고 두런두런, 도란도란. 그게 누구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부재중 전화 목록에 그의 번호가 가득했다. 홀린 것처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길게 한 번 가자마자 그가 받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전화였는지 그는 매우 놀란 목소리로 나의 안부부터 물었다. 아마 내게 무슨 위급한 문제라도 생긴 것으로 여긴 모양이다.
  그에게는 미안했다. 끝내 나를 내어주지 않은 것, 나는 그에게 참 인색했다. 어쩌면 그 인색함이 그를 끝까지 나에게서 떠나가지 못하게 만든 원동력인지도 몰랐다. 쉽게 얻어지지 않는 것에 오기를 느껴 내내 이 관계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라면 그는 그대로 참 딱한 사람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그에게 박정했던 것이었을까?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그에게 이제까지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 집에 아이가 한 명 살고 있었어.”
  그는 두서없는 내 이야기에 몹시 당황스러운 것 같았다. 한동안 전화기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 여백과도 같은 그 정적은 편안했다. 그 느낌이 싫지 않아서 음악을 감상하듯 눈을 감았다. 나에게서 멀리 있는 그의 숨소리가 내 볼에 아주 가깝게 규칙적인 박자로 오르내렸다. 함께 살 때는 그의 숨소리가 이렇게까지 크게 들린 적이 없었다. 그때는 이렇게 조용하지도 않았으니까.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 TV소리, 청소기 소리, 가습기에서 나는 소리, 집 앞 골목을 돌아가는 오토바이 소리, 갖가지 소리의 장벽에 가로막혀 이 큰 소리를 듣지 못했나보다.
  “집이야? 지금 갈게. 기다려.”
  그의 그 말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 지금 와.”
  맹맹해진 코를 훌쩍이는데 희미하게 커피향이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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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부문
당선작 심사평


  제6차 <창작콘테스트> 소설부문에 이름을 올리게 된 작품은 문영민 씨의 단편소설「동거」이다. 
  문영민 씨의 금상 당선을 축하한다.



소설가 김영찬 / 소설가 김충근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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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어머니의 시준단지
정석대
 
 

 

 “지거가 거저 컷는 줄 아는가배”
 병실 문을 나서는 나를 향해 어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그 독백이 화살이 되어 등에 꽂히자 얼어붙은 듯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아! 어젯밤에 했던 그 말이 그렇게도 마음에 걸리셨을까?
  
어제 저녁때 어머니의 병환이 위중하여 선린병원에 입원준비를 하기위해 옷가지를 챙기다가 안방 장롱 위의 깊숙한 곳에 있는 그것을 발견했다. 작은 항아리에 한지로 덮개를 하고 무명실타래를 둘러놓은 시준단지다. 오래전에 없어져 버린 줄 알았는데 아직도 찌들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었다.
"이까짓 미신 덩어리, 이러니 아직도 이 꼬라지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린 혼잣말에 어머니는 가만히 눈을 감고 계셨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 버린 것이다. 이왕 나온 말끝에 요즘 시대에 이게 무슨 소용이며 그렇게 정성을 들였는데도 후손이 잘된 게 뭐가 있느냐는 말도 뱉어 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분명한데 물리적 힘을 잃어버린 어머니는 나의 도발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형산강변의 너른 들판 위에 깨어진 사금파리처럼 점점이 흩어진 작은 집들이 내 고향 마을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모두가 논농사에 의지하고 살았음으로 여러 가지 전통적인 농경 풍습들이 많았다. 이 시준단지 역시 영둥할매나 삼신할매처럼 농가에서 모시던 신 중의 하나였다. 그때 우리 마을에 시준단지가 없었던 집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사릿문이 삐딱이 서 있던 고향 집 안방의 실겅(시렁)위에 그 시준단지가 있었다. 호롱불 그늘에 낮게 깔리던 단지의 그림자를 보면서 잠이 들곤 했던 기억이 난다. 언제 적부터 우리 집에 있어 왔는지는 모른다. 윗대의 그 윗대가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도 종부라는 이유로 물려받았고 그것을 지키고 또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의무를 자연스레 가지게 되었다.
   
첫 농사를 지은 쌀을 담아 정성을 올림으로써 집안의 풍요와 안녕을 지켜준다고 믿는 시준단지는 안방 실겅 위 늘 그 자리에서 나의 유년기와 함께 지내왔다. 손바닥만 한 한 해 논농사의 흉년은 식구들이 굶어야 하는 절대적 위기였으므로 풍년에 대한 염원은 그렇게 간절했으리라. 햅쌀을 갈아 넣는 시기는 음력 시월의 손 없는 길일을 택하였다. 첫 햅쌀을 넣기 위해서는 나락을 쪄서 찐쌀을 만들어야 했는데 디딜방아 소리가 나면 아이들 마음도 덩달아 설레었다. 말랑말랑하고 고소한 찐쌀을 한 줌 얻어먹을 수 있다는 기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더 즐거웠다. 교체한 쌀로 밥을 해 먹었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떡이나 음식이 들어와도 반드시 먼저 올려놓았다가 먹어야 했다.
 
앞실산에 묘사를 지내거나 오천 종택에서 기제사를 지내고 봉개가 와도 가장 먼저 올려졌다. 식탐이 많던 우리 형제들은 자기 몫의 떡을 먼저 먹어 치우고는 시렁위에 눈길을 떼지 못하면 할머니는 “논에 물 들어가는 것 하고 자식 입에 밥숟가락 들어가는 모양이 가장 보기 좋다 했다” 하시면서 떡을 내려주시곤 했다. 집안에 아이가 태어나도 세 칠이 지날 때까지 미역국과 밥 한 그릇을 올려놓았다. 까치가 우는 새벽에 눈을 떴을 때 시렁 위에 떡과 과일이 올려져 있으면 간밤에 어느 집에서 기제사 있는 날이라는 것을 알았다. 대소가의 잔치에서 이바지떡 봉숭(잔치에 참석하지 못한 어른들에게 보내는 음식의 경상도 방언)을 보내오거나 심지어 옆집에서 호박전 한 장을 보내와도 시준단지가 가장 먼저였다. 투박한 듯 하면서도 단아하며 근엄하면서도 친근한 시준단지는 그렇게 우리 집의 긴 전설을 고스란히 담아 우리의 삶과 애환을 함께하였다.
 
어느 날 갑자기 좁은 비포장 신작로에 흙과 돌을 실은 지엠씨 트럭들이 분주히 달리기 시작하고 수평선처럼 보이는 포항의 갈대밭위에 공장 굴뚝들이 올라가고 농사를 짓던 마을 사람들은 포항으로 막일을 하러 다니면서 조용하던 농촌은 격변의 시기를 겪게 되었다.
 사람들은 '종철' 이 세워진다고 했다' 종철'은 포항종합제철을 포항 사람들이 초기에 그렇게 불렀다. 너나없이 종철이 다 지어지면 물에 젖은 솜이불을 덮은 것 같은 무거운 가난도 벗어날 거라는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형산강 건너 황무지 갈대밭에 자고나면 쑥쑥 올라가는 굴뚝만큼이나 희망도 부풀어 갔다.
 
댓 마지기의 논농사에 의존하던 우리 집도 예외 일수는 없었다, 그 열풍을 따라 열 명이 넘는 식솔을 거느린 가난한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더 젊은 날에 평생 업으로 하던 논농사를 버리고 포항시내로 이농을 했다.
그 때도 시준단지는 이불보 속에 고이 모셔져 따라 왔으며 실겅 위에서 장롱 위로 장소만 바뀌었다. 도회지로 나온 단지는 이제 풍년을 위한 기원보다는 어려움이나 우환이 있을 때 우리 집을 지키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큰 형님이 공고를 졸업하고 노란정복에 워커를 신고 종철에 첫 출근을 하는 날 새벽에도 어머니는 그 앞에서 합장을 하셨다. 내가 공무원이 되어서 첫 봉급을 받아왔을 때도 월급봉투를 가장 먼저 바쳤다. 종철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사고가 나서 죽었다는 소문을 들을 때 마다 어머니는 형산강 건너의 제철소 불빛을 바라보면서 시준단지는 아들의 무사고를 간절히 비는 신앙이 되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는 어머니 곁을 떠나고 마음이 황무지로 변했을 부모님은 객지에 나간 자식의 안녕을 이 단지 앞에서 수 없이 빌고 빌었을 것이다. 부평초처럼 타향을 전전하다 한 번씩 어머니의 집에서 마주치는 그것을 볼 때마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어느 시점부터 한 동안 보이지 않아서 잊어버리고 지냈는데 어제 장롱 위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그 단지를 발견한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형제들조차 자꾸 눈치를 주니 감춰 놓으신 것 같았다. `지거가 거저 컷는 줄 아는 가배` 라는 오늘 어머니가 나에게 퍼 부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질책으로부터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 토록 지키고자 했던 그것은 어머니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떨칠 수 없는 업이었을까? 자식들의 대지가 풍년을 이루어 가게 하는 정화수였을까? 좋은 날 보다 슬픈 날이 더 많았었을 어머니에게는 그것은 종교 이상이었으며 모질고 고된 삶을 지탱해 주었던 위안이었을 것이다. 아! 오늘 어머니의 그 독백처럼 내가 그저 큰 게 아니로구나.
 
이제 어머니의 날들이 잦은 기침 소리는 시간을 짐작할 수 없게 되었다. 철없는 자식의 오만함에 방어할 기력도 없는 아픔은 어떠셨을까?
 방아깨비처럼 나약해져 버린 어머니의 힘겨운 질책을 생각하면서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여러 가지 생각들로 마음이 복잡해진다.
깨알처럼 많은 우리 가문의 이야기와 조상들의 정성이 담겨있는 그 시준단지는 이제 누가 지켜 갈 것인가? 물려받아야 할 새 종부는 어림이 없는데.
 
 
 
 
비학산(飛鶴山) 기우제
정석대
 
 

 

 뉴스를 검색 하다가 낯익은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부장판사 정**씨 대법관으로 임명'
 "우리집안 어른이 서울서 검사라는 거 알재, 시방 공천만 받으면 국회의원 자리는 따논 당상인기라"
내가 어렸을 때에 술이 얼큰해진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 앞에 당신보다 나이 어린 아저씨뻘 되는 그 할아버지가 유일한 빽이었다. 나 역시 가문이나 고향이야기를 꺼낼 때는 은연중 자랑삼아 내세우던 이름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지내던 그 이름을 보자 청년 시절에 집안 기제사를 지내고 음복 후에 들었던 방천 할배의 무용담이 떠올랐다.
 
옛날에는 가뭄이 들면 부정하다고 생각되어 지는 것들을 찾아내어 그 원인을 제거하는 행위를 한다거나 기우제를 지냈다. 지독한 한발로 논밭이 거북등껍질처럼 턱턱 갈라지고 먹을 물조차 없이 어려움이 지속되면 산 너머 영덕바닷가에 홀아비가 천년 묵은 거북이를 잡아서 그렇다 하기도 하고 비를 가장 가까이 접하고 있는 산꼭대기에 산소를 이장해서 하늘의 기를 막아서 그렇다는 등 온갖 소문들로 민심까지 뒤숭숭해진다. 그러면 기우제를 지내야 한다는 여론이 자연이 형성된다. 비를 간절히 비는 마음도 있었지만 뒤숭숭해진 민심을 결집시키는 조상들의 지혜도 숨어 있었다. 이런 기우제 지내는 날은 술이 고픈 사람들에게는 목을 축일 수 있는 구실도 생겨지고 배고픈 아이들에게는 음복 떡을 얻어먹는 재미만으로도 일종의 축제의 날이 되기도 하였다.
 
천수답이 거의 대부분인 기북면에 하지가 훨씬 지났는데도 모를 낸 논이 없는 가뭄이 극심하던 그 해였다. 하늘만 쳐다보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판단이 되자 동회가 붙여지고 기우제를 지내기로 의견이 모여졌다. 기우제를 지내기에 앞서 먼저 비학산의 묏자리를 찾아서 파내자는 굳은 결의도 되었다.
 " 몬찾으머 인자 우리는 굴마 죽니데이”
“있지 아무렴 있고 말고 틀림엄서"
 
덕동 마을 앞을 부채처럼 감싸고 있는 험난한 바위산인 비학산(飛鶴山)은 포항시 신광면과 기북면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 명산으로 모양새가 학이 알을 품고 있다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 이라 하여 그렇게 불리게 되었으며 정상에는 시신 한 구가 들어갈 만한 석함이 하나 있는데, 이곳은 옛날부터 천하명당이라는 설이 있어 왔다. 하지만 이곳에 묘를 쓰면 삼년 안에 가운이 일어나 천석꾼 부자가 된다는 전설과 함께 반면에 근동 백리 안에는 큰 가뭄으로 흉년이 든다는 소문 때문에 못자리 쓰는 것이 금기시 되었다. 간혹 타관에 나갔던 사람들이 하는 일이 잘 안 되거나 집안에 우환이 들면 남 몰래 야밤을 이용하여 이장을 헤 놓거나 근처 풀 섶에 몰래 숨겨놓고 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묘를 이장한 집안이 큰 부자가 되었던 안 되었던 밝혀진 바는 없지만 심한 가뭄이 들 때는 비학산에 누군가가 이장하였다고 믿었고 거기에는 틀림없이 유골이 있었다.
 
가뭄의 원인이 자연히 그 쪽으로 여론이 모여지고 동회를 통해 부역이 소집되었다. 부역에 참여할 수 없는 형편을 가진 사람들은 품을 싸서라도 그 부역은 꼭 붙여야만 했다. 부역에 모인 사람들은 호미와 삽을 들고 분노와 설렘을 안고 비학산을 오른다.
   
동회가 붙여지고 기우제 결의가 되면서 부터 방천 할배는 남모를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작년 가을에 방천 할배도 아버님 유골을 모시고 남몰래 혼자 비학산을 올라갔기 때문이다. 야밤을 틈타 해발 육백메타도 넘는 험난한 바위산 꼭대기를 힘들게 올라가서 명당자리의 어느 한 곳에다 고이 안장하고 봉분도 만들지 않은 채 흔적을 없애고 내려왔다.
 
일찍이 조실부모하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어린 동생 하나를 부모 노릇을 하면서 키워 왔는데 동생이 수재 소리를 들을 정도로 특출한 총기가 있어 자신은 굶어 가면서도 대처에 내보내서 어렵게 어렵게 공부를 시켰다. 그러나 사법고시 준비를 하던 동생이 모두가 쉽게 합격 하리라던 기대를 져 버리고 번번이 낙방을 하였다. 심지어는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실성해져 버렸다는 소문까지 돌자 답답한 마음에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니 조상의 산소를 탓하는 점괘에 처음에는 많이도 망설였으나 자기가 해줄 것이 이것 뿐 이라는 판단으로 비학산에 부모님의 유골을 안장하기로 독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설마 했는데 가뭄이 들고 일이 이 지경까지 되고 보니 당황스럽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몇날며칠을 머리를 싸 메고 누웠다가 묘책 하나를 떠 올렸다. 기우제 전날 밤 방천 할배는 작은 옹기단지에 동물의 뼈를 집어넣고 한지로 싸서 지게에 짊어지고 야밤을 이용해 비학산으로 갔다. 칠흑 같은 그믐밤이라 넘어지고 엎어지면서 새벽녘에 산꼭대기에 다 달아 술 한 잔을 올리고 아버님의 유골함이 있는 자리에 몇 삽의 흙을 걷어내고 유골함 위에다 가져간 가짜 유골함을 얹고 곱게 흙을 덮어 두고 급히 산을 내려오니 거의 날이 새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동네 앞에는 기우제 부역을 나온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들고 방천 할배도 그 대열에 모르는 척 합류를 하였다. 그리고는 산으로 같이 올라가서는 동네 사람들의 뒷전에서 산소를 파는 모습을 가슴 조이며 지켜보았다. 분노한 사람들은 산봉우리의 평평한 곳은 죄다 파 헤쳤다. 다행히도 위에 새로 묻었던 가짜 유골함이 발견되자 흥분한 동네 사람들은 그 가짜 유골함만 들어내고 절벽 아래로 마치 분풀이를 하듯 던지며 '물이야' '물이야' 하고 외쳤다.
  그리고는 가져간 음식을 차려놓고 제를 올리고 모두가 흡족한 마음으로 산을 내려 왔다. 우연인지 기우제 덕분인지 산소를 파낸 덕분인지 모르지만 희한하게도 그날 밤에 비가 왔고 가뭄이 해갈되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 후 방천 할배의 아우도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긴 세월을 우리가문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검사 있는 가문 이 근동에는 없데이”
 
이 말은 아직까지도 아버지가 남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자랑거리이다. 오늘 대법관으로 임명된 친척할아버지가 그 방천할배의 아우이다. 승진뉴스로 새롭게 떠올린 방천 할배의 이 이야기도 하늘의 별들만큼이나 많은 세상의 이야기중의 하나이지만 지금 내가 여기에 기록하지 않는다면 영원이 묻혀 진다는 아쉬움 때문에 아련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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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당선작 심사평


  제6차 <창작콘테스트> 수필부문에서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작품은 정석대 씨의「어머니의 시준단지」와 「비학산(飛鶴山) 기우제」란 작품으로 두 작품 모두 옛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관습과 이를 지키려는 웃대의 집요함을 잘 그려냈다.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수필가 유미숙 / 수필가 정금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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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부문



■ 헤드라이트
   - 유다은 

    
텅 빈 고속도로 위
무심히 뱉어진 그의 이력서 몇장이
시든 전단지처럼 뒹군다
저만치 보이는 건물들은
높기만 하고, 다시
수취인 불명의 편지가 되어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희미한 빛조차 없는 그 길 위
충혈된 헤드라이트가 깜박 거린다
학자금 대출 독촉 전화에 깜박
면접관 앞 비루한 이력들이 깜빡
빛이 닿는 몇 개의 시간 끝
줄줄이 달려오는 치욕의 조각들이
몸을 떤다
 
가난한 그의 체온이 뜨겁게 달아 오른다
한잔 술에 취기 어린 경적 소리 울리고
돌아보지 않는 그의 청춘 뒤로
이제는 빛을 잃은 헤드라이트만이
있을 뿐이다
 
 
 
■ 희망
   - 유다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서른의 나이가
내 이력의 정중앙에 칼끝을 드러낼 때
그것에 놀라 오늘의 달력이 뒷걸음 칠 때
나는 얼려 놓은 희망 한덩이를 꺼낸다
 
뜨겁고 반짝이고 가슴 뛰는 희망
지금은 없다
느껴지는 차디 찬 금속 같은
야근과 세금과 적금에 파묻힌
식어버린 시체와 같은 너
콕콕콕 두통이 밀려온다
파닥거리는 시간 뒤로
얼음 위 춤을 추는 계집아이와
서걱서걱 그 위를 걷는 여자가 있다
이제는 닿을 수 없는 사이,
시린 바람이 내려 앉는다
 
떠나간 모습 뒤로 알람이 울린다
눈가에 뭉쳐진 피로를 안고
용산 직통 전철에 몸을 구겨 넣는다
 
 
 
■ 상자
   - 유다은 

    
수레의 무게에 몸을 휘청이는 밤공기가 그러하듯
쩔뚝이는 발자국이 남겨놓은 지난 사연처럼
시어빠진 김치와 함께 넘긴 찬밥의 무게처럼
어깨까지 쌓인 상자 더미를 돌아본다
 
어둠이 내린 그 길 그 골목
각자 다른 상표를 입은 상자들이
몸을 쭉 뻗고 누워있는 수레 위
김씨 할머니의 주름진 하루가
몸을 기대오는 그 곳
 
고물상 한켠에 낡은 시간들이 고단함에
그을린 손 위에
몇천원의 돈이 놓어지는 시간
그녀의 삶이 허공에 흩어진다
 
 
 
■ 어떤 전시회
   - 유다은 

    
눈가에 뭉쳐진 어제의 피로가
햇살 아래 반짝인다
실직 당한 남편의 구부러진 등허리 같은
하루 위로 시름시름 그녀가 걸어간다
 
생기 잃은 얼굴들을 잔뜩 실어
무거운 버스 안으로 그녀의 얼굴을 내민다
정제된 고단함과 지쳐버린 소망들이
조우하는 시간
덜컹이는 어떤 전시회가 시작된다
 
GS편의점이 형제 숯불갈비가 야곱 빵집이
풍경화가 되어 지나간다
어쩐지 버스 안 승객들을 닮아
흔해 빠진 그림들이
그녀의 틈 사이로 무심히 흘러간다
서로의 발끝에 맺힌 서러움쯤은
신발로 다 가려 버리고
저마다 기다리는
그림을 찾아 흘러간다
 
저 멀리 그녀를 닮은 그림이
천천히 다가온다
울음을 머금은 채
시린 바람에 위태롭게 떨고 있다
전시회 끝을 알리는 여자를 향해
삑 하고 울어 버린다
그것을 신호로 떠밀리 듯
그림 속으로 허둥지둥 뛰어간다
한편의 스케치가 되어
점점 멀어진다
 

 
■ 꽃
   - 유다은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리는 한 낮의 햇빛조각
외면하며 오르는 도서관 계단 위에는
지나온 자리에 밟혀진 젊은 시간들이
갓 잡은 생선처럼 팔닥팔닥
떨어진 꽃잎들이 조용히 떨고 있다
 
 
조화(調和)로운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해
스스로 조화(造花)가 되어버린 어린 청춘들이
책한권 앞에 두고 시작한 묵년의 시간
싱그러운 청춘을 노래하던 하루가
그만 지쳐돌아가면
그 위에 딱딱하게 굳은 가짜 꽃 하나 놓여있다
 
 
절대로 시들지 않을 거라는 달콤한 언약에
떨구어낸 빛나는 생들이 서럽게 울며
천천히시들어 가고 있다 꽃대를 푹 꺾어 버린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그렇게 맥없이 시들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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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부문
당선작 심사평


  제6차 <창작콘테스트> 시(詩)부문 수상자는 유다은 씨의「헤드라이트」외 네 편의 시이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시인 김호철 / 시인 정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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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당선자들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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