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콘테스트> 제37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by korean posted Nov 0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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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콘테스트> 제37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월간문학 한국인]이 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고자 분발하는 젊은 영혼들의 순수 문학 창작의욕을 북돋기 위해 기획한 <창작콘테스트>가 제37차 당선자를 발표한다. 
  [월간문학 한국인]<창작콘테스트>는 작가로서의 무궁한 필력이나 완벽한 전문성을 하나하나 따져 시상하는 그런 대단한 문학상이 아니다. 오로지 전문작가가 되기만을 꿈꾸어온 예비작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다소 흠결이 있더라도 치열한 작가정신과 독특하고도 개성있는 표현,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따져 우열을 가릴 뿐이다. 따라서 설혹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 가능성을 보아 당선작을 뽑을 뿐임으로 문학상으로서의 권위를 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할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그간 겪어온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에 의해 산고를 겪듯, 그 누구도 쓰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문체와 어법, 시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이번 <창작콘테스트> 제37차 공모에 참여해주신 작가 여러분들, 그리고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 창작을 자신의 운명으로 택하려하는 모든 분들께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기원하며 각별한 감사와 격려의 뜻을 전한다.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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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부문



수제비 꽃
이상길



  인간의 미스터리는 장수를 바라면서도 늙기는 싫어한다는 데에 있다.

 나는 잠결에 어머니의 고함 소리를 듣고 안방에서 뛰어나왔다.
 “누가 박재순이를 나오라고 해.”
 어머니가 창밖을 내다보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창문 밖에 서 있는 목련이 새벽빛에 어렴풋이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머니는 밖에 시커먼 옷을 입은 사람이 찾아와 당신 이름을 부른다며 무엇에 쫓기는 듯 창문을 응시했다 나는 얼른 구급상자에서 청심환을 꺼내드리고 밖에 아무도 없다며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어머니는 자리에 누웠으나 환청이 들리는지 불편한 몸을 자꾸 일으키려고 했다.
 스치기만 해도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버릴 것만 같은 핏기 없는 얼굴, 쑥대머리처럼 헝클어진 백발, 초점을 잃고 흔들거리는 눈동자…….
 형광등 불빛에 민낯으로 드러난 구순이 넘은 어머니의 모습은 혼백이 나가버린 영락없는 반송장이었다. 나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더는 미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곧바로 주방으로 가 양푼에다 밀가루를 붓고 물을 섞어가며 반죽을 시작했다. 손에 끈적끈적한 밀가루 반죽이 달라붙었다. 무른 반죽에다 밀가루 한 컵 분량을 더 끼얹었다. 되게 반죽을 개면 밀가루 덩이가 그대로 씹히는 맛이 나고, 반죽이 질면 풀을 쑨 것처럼 맛이 밋밋하다. 감칠맛 나는 수제비 요리를 위해서는 쫀득쫀득한 밀가루 반죽을 만들어 내야 한다. 수제비는 손맛이다. 그리고 손맛은 반죽에서 나온다. 자장면과 냉면이 면발에 따라 식감이 다르듯 수제비 또한 반죽에 따라 맛에 차이가 난다.
 반죽 한가운데 구멍을 내고 물을 반 컵 정도 부었다. 겉에다 물을 부으면 반죽이 질척거려 작업하기가 불편할 뿐만 아니라 수분이 골고루 스며들지 않아 좋은 반죽이 나오지 않는다. 수제비를 빚다 보면 옹이처럼 반죽 속에 밀가루 덩이가 박혀있는데 그건 실패작이다. 반죽할 때 찬물보다는 미지근한 물을 사용하면 흡수가 잘되어 옹이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가 있다.
 수온 13~15도의 물이 건강에 좋다고 한다. 이 상태에서 인체에 수분 흡수가 가장 빠르며 이보다 물이 너무 차갑거나 뜨거우면 수분이 세포로 스며드는 속도가 더뎌지고 몸에도 좋지 않다. 온도에 따라 물의 입자가 달라져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소매를 걷어붙인 채 양쪽 무릎을 꿇고 밀가루 덩어리를 뒤집으며 안간힘을 다해 반죽을 빚었다 무릎이 시큰거리며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문득 중학교 1학년 때 은사인 김미나 선생님이 떠올랐다.

 오전 수업이 끝나자 담임인 김미나 선생님은 가정 방문할 마을을 칠판에다 적으며 해당 지역에 사는 학생들은 해찰을 부리지 말고 곧장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가정 방문이 있는 날은 오후 수업이 없어 아이들은 기분이 들떠있었다.
 산 그림자가 앞마당까지 길게 내려오자 나는 들에 나간 어머니를 대신해 수제비를 만들었다.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매기~ 내 사랑하는~.”
 음악 시간에 김미나 선생님이 가르쳐준 ‘매기의 추억’을 흥얼거리며 한창 수제비 반죽을 주물럭대는데 누군가 밖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어보니 베이지색 원피스 차림의 김미나 선생님이 툇마루 앞에 서 있었다.
 나는 물건을 훔치다 들킨 사람처럼 밀가루가 묻은 손을 얼른 뒤로 감추고 멋쩍게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후끈거리며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우리 마을은 오늘 가정 방문 일정표에 빠져있었다. 선생님은 내 모습에 당황했는지 옆 마을에 왔다가 시간이 좀 남아서 들렀다며 뽀얀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한참 침묵이 흐르고 나서야 선생님은 지금 무슨 요리를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수제비 요리를 하려고 밀가루 반죽을 빚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토박이인 선생님은 신기했던지 어떻게 수제비 요리를 배웠냐고 물었다. 나는 어머니 일을 돕다가 저절로 배우게 됐다고 말하자 선생님은 나더러 효자라며 칭찬까지 해주었다. 선생님은 부엌에서 손을 씻고 오더니 자기도 한번 반죽을 해보겠다고 나섰다. 선생님이 야무지게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반죽을 주물러대자 긴 머릿결이 허리 위에서 미끄럼질쳤다. 몇 번을 반복하다가 선생님은 제풀에 꺾인 듯 주저앉더니 반죽하기가 이렇게 힘들 줄을 몰랐다며 숨을 할딱거렸다.
 나는 선생님과 나란히 아궁이 옆에 앉아 물이 끓어오르는 솥단지 속으로 수제비를 떨어뜨렸다. 선생님이 빚은 수제비는 반반한 얼굴과는 달리 모양이 뭉툭했다. 적당한 크기로 반죽 덩어리를 떼어내 손가락 끝으로 수제비를 빚어내야 하는데 선생님의 수제비는 모양이 들쭉날쭉했다.
 나는 수제비 빚는 방법에 대해 시범을 보였다. 손끝에서 순식간에 꽃잎처럼 예쁘게 빚어지는 수제비 솜씨에 선생님은 눈길을 빼앗겼다. 선생님은 내게 바짝 고개를 내밀며 긴 손가락 끝으로 반죽을 조심스럽게 매만져가며 어쩌다 수제비 모양이 잘 나오기라도 하면 소녀처럼 까르르 웃었다. 어느새 선생님의 분홍색 손톱은 하얀색으로 변해버렸다.
 수제비를 한 상 차렸다. 반찬이라야 깍두기와 김치뿐인데도 선생님은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오후 내내 이 마을 저 마을 걸어 다니느라 허기가 졌는지 이슬만 먹는 줄 알았던 선생님이 쩍쩍 입맛을 다시며 수제비를 삼키는 모습은 아주 색다른 느낌이었다.
 선생님은 당신이 만든 수제비와 내가 만든 수제비를 번갈아 가며 맛을 보더니 내 수제비가 훨씬 맛있다고 칭찬해 주었다. 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면서도 어깨가 으쓱했다. 수제비 요리 하나로 단박에 우리 학교에서 오직 한 명뿐인 멋쟁이 여선생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우와! 목련꽃 예쁘게 피었네.”
 마당을 나서던 선생님이 뜰에 핀 목련꽃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선생님 키를 훌쩍 넘긴 목련이 새하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다 쌍꺼풀진 눈, 우윳빛 나는 피부. 목련 앞에서 넋을 잃고 꽃송이를 바라보고 있는 김 선생님의 자태가 한그루 목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죽이 거의 다 되어 갔다. 솥에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를 켰다. 김 선생님을 깜짝 놀라게 한 그 명품 수제비를 얼른 어머니께 선보여야 한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도회지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바람에 내 수제비 요리는 식탁에서 자취를 감췄다.
 멸치나 바지락을 넣어 수제비 국물 맛을 내기도 하는데 어머니는 맹물을 고수했다. 맹물에다 다진 마늘과 쪽파를 송송 썰어 넣고 간장으로 간을 맞추면 그게 곧 국물이었다. 쌀밥 대신 수제비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어머니로서는 멸치나 조개 국물은 사치나 다름없었다. 멸치 등을 우려낸 국물은 반죽이 조금 부실해도 수제비 맛을 잡아줄 수 있지만, 어머니의 맹물 수제비는 반죽이 받쳐주지 않으면 대번에 풀죽 맛이 나버린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수제비를 뚝뚝 떼어 솥 안에 넣으면 될 것이다. 손등에 난 흉터가 눈에 띄었다. 왼손에 생긴 작은 수제비 모양의 흉터는 내가 중학교 때 수제비 요리를 하다가 뜨거운 물에 덴 상처다. 애당초에는 농사일에 바쁜 어머니를 도와주려고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숫제 내가 수제비 요리사가 돼버렸다.
 첫 작품은 실패로 끝났다. 밀가루 반죽이 제대로 되지 않아 쫄깃쫄깃한 맛이 없었고, 수제비를 솥에 넣으면서 서로 엉겨 붙지 않도록 국자로 잘 저어야 하는데, 수제비 빚는 데만 정신이 팔려 수제비가 솥 밑바닥에 떡처럼 엉겨버렸다.
 손은 데었어도 수제비 솜씨는 날로 늘어갔다. 김을 매로 온 동네 아주머니들이 내가 쑨 수제비를 먹고 수제비가 꿀맛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저절로 어깨가 우쭐거렸다.

 반죽이 완성됐다. 밀가루에서 이렇게 부드럽고 매끄러운 작품이 만들어지다니. 나는 반죽을 손으로 들어 올리며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반죽 빚기가 가장 힘들다. 반죽만 완성되면 수제비 요리는 거의 끝났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어머니가 담낭염으로 한 달 넘게 입원했을 때 어머니는 병원에서 나오는 음식보다는 수제비를 먹고 싶어 했다. 나보고 한번 수제비를 만들어보라고도 했다. 환자 상태에 맞춰 영양사가 만든 식단이라 수제비보다 더 영양가가 좋다고 말씀드려도 어머니는 듣는 둥 마는 둥 수제비 타령이었다.
 담석을 제거했는데도 복통만 완화됐을 뿐 헛소리를 하는 등 건강 상태가 회복되지 않자, 담당 의사는 어머니가 노환이라 특별한 처방이 없고  치매 증세가 보인다며 소견서를 써줄 테니 요양원에 모시는 것이 어떻겠냐며 의향을 물었다. 병원에 오기 전에도 어머니는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했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도 집에서는 모시기 힘들다며 요양원을 권유했다. 긴 병에 효자가 없다면서 어떤 요양원이 시설이 좋다고 위치와 상호까지 알려주는 지인도 있었다.
 어머니는 평소에 요양원이란 ‘요’자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머니는 요양원은 자식들이 부모를 거두기 싫어 내다버리는 현대판 고려장으로 인식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병세가 악화되기 전에 경로당에 다녔는데, 경로당 친구인 흰머리 할머니-유난히 머리가 희어 경로당에서 그렇게 불렀다-를 자식들이 요양원에 보내버렸다며, 어떻게 자기를 낳고 기른 부모를 함부로 내다버릴 수가 있냐며 천하에 불효막심한 자식들이라고 핏발을 세웠다.

 친구 J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쳤다. 장모님을 뵈려 요양원에 갔는데 노인들이 버려진 물건처럼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자식들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더란다. 그 모습이 하도 안쓰러워 J는 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전적으로 장모님 수발을 들겠다며 그날 바로 집에 모시고 왔는데, 며칠도 지나지 않아 J의 야심만만한 다짐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는 술을 부르고 술은 부부싸움을 불렀다.
 J는 3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부랴부랴 장모님을 다시 요양원에 보냈는데 딱 보름 만에 장모님이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왔더란다. 조금만 더 참고 장모님을 보살펴드렸으면 좋았을 텐데 후회가 막심하다고 J는 눈시울을 붉혔다.
사실 나도 요양원에 대한 선입관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자식들에게 쏟은 사랑과 희생을 봐서라도 부모가 늙으면 당연히 자식이 모셔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아내 또한 나와 뜻을 같이했다. 그러나 밤새워 어머니를 간병하는 횟수가 늘수록 내 마음은 점점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병원 가는 길에 칼국수 한 그릇을 샀다. 수제비를 사려고 이곳저곳 음식점을 기웃거렸으나 옹심이나 칼국수를 파는 곳은 있어도 수제비는 눈에 띄지 않았다. 병실에 도착하자 병간호를 하던 아내가 내 귀에다 대고 어머니가 방금 잠이 들었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아내와 교대하고 보조 소파에 누웠다가 깜박 잠이 들어버렸다. 뭔가 얼굴을 스치는 느낌이 들어 눈을 떴다. 어머니가 피 묻은 손으로 당신이 덮고 있던 이불을 안간힘을 다해 침대 난간 위로 넘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 손목에 꽂힌 주삿바늘에서 링거 줄이 튕겨 나가 역류한 피가 침상을 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자식이 행여 감기라도 들까 봐 이불을 덮어주려고 불편한 몸을 억지로 움직이다 보니 일이 벌어진 것이다. 급히 간호사를 불러 응급조치를 끝내고 나는 어머니를 꽉 껴안았다. 요양원을 맘에 두고 있던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퇴원 후에도 어머니는 거동이 불편하여 화장실조차 갈 수 없었다. 기저귀를 채우면 금방 빼버렸다. 어머니의 기저귀에 대한 심한 기피증으로 아내는 꼬박 6개월 동안이나 대소변을 받아냈다. 어머니는 거동은 못해도 정신줄은 붙들고 있어서 아들인 내가 당신의 속옷을 벗기고 대소변 처리하는 것을 꺼리는 통에 이 일은 아내 몫이 돼버렸다. 아내는 대소변을 받아내며 그동안 고생한 일이 너무 억울해서라도 기어이 어머니가 당신 혼자서 화장실에 다닐 수 있게 만들 거라며 의지를 다졌다.
 드디어 아내의 지극한 병구완으로 어머니는 기어서나마 화장실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어머니가 두 손바닥을 거실 바닥에 짚고 화장실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자 아내는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를 지켜본 엄마처럼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대소변을 받아낼 때는 어머니가 화장실만 다니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반찬을 장만하여 식사를 챙기는 일은 물론 목욕과 세탁, 손발톱 깎기, 이발 등 할 일이 태산 같았다. 그리고 응급상황에 대비해 한 사람은 어머니 곁에 붙어 있어야 했다. 특히 어머니는 허기에는 인색하여 조금만 식사 때가 벗어나면 배를 움켜잡고 금방이라도 명줄을 놓아버릴 것처럼 끙끙 앓았다.
 밤에는 어머니가 요강에다 소변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화장실 변기에다 요강을 비우고 물로 행구는 것이 일과의 시작이었다. 그럴 때마다 밤새 묵은 소변이 역한 암모니아 냄새를 풍겨 나도 모르게 숨을 참느라 얼굴이 일그러졌다. 

 더군다나 어머니는 그전에 없던 버릇이 생겨났다. 바로 잔소리다. 틈만 나면 주방에 나와 아내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며 잔소리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친척들에게 전화를 걸어 며느리가 밥을 늦게 준다느니, 찬밥을 준다느니, 우리 먹을 것도 없는데 남에게 뭘 다 퍼준다느니 하며 아내의 흉을 봤다. 귀가 어두운 어머니는 인기척을 못 느껴 며느리가 집에 들어온 지도 모르고 전화로 흉을 보다가 아내에게 들킨 적도 있다.
 차라리 내 흉이라도 보면 괜찮겠는데 어머니는 줄곧 아내 이야기만 했다. 나는 어머니가 이모와 통화를 하면서 아내 흉을 보는 것을 우연히 엿듣게 되었는데 아내가 들으면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시어머니 병수발 하느라 고생한다는 말은 빼먹고 완전히 못된 며느리로 몰아가고 있었다. 거동이 불편하여 늘 병석에 누워있어서인지 어머니는 당신이 상상한 일을 마치 현실인 것처럼 상대방에게 전달했다. 시쳇말로 완전히 가짜뉴스였다.
 아내의 마음이 돌아서 버리기 전에 뭔가 특별한 대책이 필요했다. 어머니를 모시느라 죽도록 고생만 한 아내가 친척들에게 못된 며느리로 낙인찍히는 것 같아 마음이 언짢았다. 나는 전화를 차단했다. 전화는 어머니가 바깥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속도 모르는 어머니는 그까짓 전화세가 얼마나 나온다고 전화를 끊었냐며 너무한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나는 어머니가 한번 더 잔소리를 퍼붓거나 며느리 흉을 보는 날엔 요양원에 보내버리겠다며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어머니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전에는 자식 말이라면 무조건 다 들어주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급기야 어머니는 냉장고 사건으로 아내의 속을 몽땅 뒤집어 놓았다. 아내가 자리를 비우면 어머니는 슬금슬금 주방으로 나와 냉장고에 들어있는 식재료들을 깡그리 끄집어내 내용물을 확인하고는 냉동 냉장실 구분 없이 뒤죽박죽 다시 처넣어버렸다. 시어머니 잔소리도 잘 참아 넘긴 아내가 냉장고 문을 열어보고는 안색이 싹 변해버렸다. 나는 혈압이 올라 목덜미가 당기더니 뻐근한 기운이 어깻죽지까지 뻗쳤다.
 아내는 인천에 사는 친구가 지난번에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셨는데 말동무가 생겨서 집에 있을 때 보다 오히려 건강이 더 좋아졌다 하더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는 아내가 밖에 나가 조금만 늦어도 불안감에 사로잡혀 아내의 옷가지들과 여행용 가방이 그대로 있는지를 확인하는 버릇까지 생겼다.
 냉장고 문에다 자물쇠를 채울 수도 없고 없애버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머니 귀에 대고 만약 냉장고에 한 번 더 손을 대면 이번에는 진짜로 요양원에 보낼 거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어머니가 이렇게 자꾸 말썽을 부리면 며느리가 아들하고 못살고 집을 나가버릴 수도 있다고 겁을 주었다. 어머니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외출했다 돌아와 현관문을 열자 생선가게에 들어선 것처럼 비린내가 확 풍겼다. 어머니가 냉동실에 들어있는 식품들을 주방 여기저기에다 꺼내놓고 봉지를 풀어헤치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생선이 녹아 바닥에는 물기가 흥건했다.
 “어머니, 지금 뭘 해요?”
 내가 퉁명스럽게 묻자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말문을 열었다.
 “밀가루가 없네.”
 “밀가루는 왜요?”
 “니가 수제비를 안 해 준께 그런다. 죽기 전에 니가 만든 수제비 한번 원 없이 묵고 싶었는디…….”
 어머니는 말꼬리를 흐리며 입맛을 다셨다.
 나는 어머니가 잔소리를 안 하고 냉장고에 손대지 않으면 수제비를 꼭 만들어드리겠다고 어머니와 손가락을 걸었다.

 “누가 박재순이를 나오라고 그래.”
 다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치매 증세가 점점 심해진 모양이다. 얼마 전부터 어머니는 도깨비 같은 헛것과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헛것을 저것들이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날마다 헛것들과 전쟁을 벌였는데 내용은 이러했다.
 창밖에 저것들이 살고 있는데 하루는 어미가 자식 한 명을 잡아먹더니 날마다 자식들을 죽여 창가에 묻어서 공동묘지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에게도 어서 죽으라며 뱅이와 해코지를 하는 바람에 무서워서 못 살겠다고 어머니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공동묘지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며 창문도 열지 못하게 막았다.

 친부(親父)이자 천신인 우라노스를 낫으로 거세하고 세력을 잡은 크로노스는 자신도 자식들에게 축출당할까 두려워 부인인 레아가 아이를 낳으면 곧바로 삼켜버렸다. 졸지에 다섯 아이를 잃은 레아는 막내아들 제우스를 지켜내기 위해 시어머니인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계략을 꾸민다. 레아는 남편 몰래 크레타섬에서 제우스를 낳아 크레타 왕 멜리세우스의 딸 아말테미아에게 아이를 돌보도록 맡긴다. 남편에게는 제우스로 위장한 강보에 싼 돌멩이를 삼키게 하여 작전에 성공한다.
 어른이 된 제우스는 어머니로 하여금 크로노스에게 구토제를 먹이게 하여 형제들을 모두 토해내게 만든다. 결국 제우스는 자신이 구출한 형제들과 힘을 합쳐 아버지인 크로노스와 그를 따르는 티탄족을 물리치고 신들의 제왕 자리에 오른다.
 그리스신화는 들어본 적도 없고 오직 자식밖에 모르는 어머니가 신화처럼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연출한 것은, 자식이 당신을 요양원으로 내쫓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과 불안감에 무의식적으로 방어기제가 작동한 것이 아닐까.

어머니는 헛것들과 전깃불을 켜네 마네 하고 며칠을 싸우더니 온 집안의 불이라는 불은 모두 꺼버렸다. 이유는 저것들이 불을 켜지 말라고 했다는 거였다. 졸지에 가족들은 암흑 속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아내가 주방에서 요리하면 어느새 어머니가 다가와 불을 탁 꺼버렸다. 더군다나 어머니는 밤늦게까지 회사 일을 처리하느라 신경이 곤두선 딸아이의 방문을 두드리며 불을 끄라고 소란을 피우는 통에 나는 딸아이 눈치를 살펴야 했다.
 아내는 어머니가 헛것을 핑계 삼아 전기세를 절약하기 위한 작전이라고 입을 삐죽거렸다. 평생을 휴지 한 쪼가리라도 허투루 사용한 적이 없는 어머니였기에 아내 말도 수긍이 갔다.
 어머니는 아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귀신을 쫓는다며 막소금을 뿌려 집안을 온통 염전으로 만들어 놓더니, 급기야 방안 곳곳에 고춧가루를 뿌려놓았다. 거실에 있는 소파 위에까지 고춧가루가 묻어있어 나는 아내가 돌아오기 전에 몰래 청소하느라 진땀을 뺐다. 부랴부랴 창문을 열어 매운 냄새를 내쫓았는데 집안에 들어선 아내는 코끝을 만지더니 고춧가루 단지를 열어보고는 머리를 움켜쥔 채 한참을 서 있었다.
 핏기 없이 환자처럼 야위어가는 아내를 바라보며 이러다가는 우리 내외가 스트레스로 쓰러져 어머니보다 먼저 죽을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어머니는 지금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다. 죽음이 목전에 있는 사람을 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앞길이 창창한 우리 내외가 꺼져가는 생명줄을 붙잡고 몸을 망가뜨리며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어머니는 텔레비전도 켜지 못하게 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이 당신을 빤히 쳐다보며 흉을 본다는 거였다. 그 사람들이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다며 텔레비전 앞에서는 옷도 갈아입지 못하게 했다. 화면에 나온 사람이 진짜 사람이 아니라 영상이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곧이듣지 않았다.
 아내가 낙으로 삼는 드라마를 볼 때마다 아내는 어머니와 한바탕 입씨름을 해야 했다. 사람이 TV를 시청한 것이 아니라 TV가 사람을 시청한다는 어머니의 기가 막힌 발상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집 안에 있는 물건들이 자꾸 없어졌다. 아내의 립스틱이 없어졌고 내다 버리려고 현관에 내놓은 옷가지들과 종이박스, 생선을 담았던 비닐봉지까지 감쪽같이 종적을 감췄다. 이 물건들은 나중에 어머니 방에 있는 반닫이와 베란다 구석에서 발견됐는데, 어머니는 서울 막둥이를 주려고 챙겨놓았다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립스틱은 찾지 못해 나는 아내에게 립스틱을 사라고 돈을 손에 쥐어주었다.
아내가 밖에 나가자 어느 틈에 어머니가 다가와서는 화장이 잘 됐냐며 히죽히죽 웃으면서 입술을 내밀었다. 덕지덕지 칠한 새빨간 색조가 입술을 벗어나 쭈글쭈글한 볼까지 번지고 있었다.
 차라리 대소변을 받아내던 때가 더 나았다 싶었다. 그때는 어머니가 움직이지 못하고 누워만 있으니까 냉장고를 뒤진다거나 불을 끄는 이런 속상한 일은 없었다. 어머니는 정말 미운 짓만 골라서 했다.
 아내의 얼굴에 점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한바탕 소나기가 퍼부을 것만 같았다. 아내와 30년을 함께하면서 줄곧 아내에 대한 기상 상태를 관측해 왔는지라 이번에 분석한 기상 전망은 아직까지 겪어보지 못한 최악의 상황이었다. 아내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길게 장마전선이 걸쳐있어 단발성 폭우가 아니라 태풍을 동반한 지루한 장마가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절체절명의 위기와 맞부닥뜨리고 있었다. 장맛비가 쏟아지기 전에 하루빨리 가족을 위해 가장으로서 비장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내 손을 잡고 노래방으로 향했다. 아내를 무장해제 시킬 방법은 노래밖에 없었다. 나는 재빠르게 리모컨으로 김용임의 ‘사랑의 밧줄’을 입력했다. 반주가 경쾌하게 울려 퍼지자 마이크를 잡은 아내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감돌았다. 이참에 아예 아내를 사랑의 밧줄로 꽁꽁 묶어버리겠다고 마음먹고 나는 패티김의 ‘초우’를 비롯하여 아내의 애창곡을 연달아 예약했다.
노래를 좋아한 아내는 20여 곡을 지치지도 않고 엉덩이까지 흔들어대며 척척 불러댔다. 부쩍 늘어난 아내의 흰머리가 조명 빛에 언뜻언뜻 모습을 드러냈다. 어쩌다 점수가 100점이 나오면 아내는 노래자랑에서 대상이라도 수상한 듯 펄쩍 뛰며 기뻐했다. 아내는 노래 앞에서는 아무 근심도 걱정도 없는 철부지였다.
 노래방을 나서면서 아내는 내 손목을 꼭 붙잡았다. 아내의 온기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이제 조금만 지나면 어머니가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의 수제비 요리를 맛볼 수가 있다. 반죽을 조금씩 떼어내 검지와 중지 위에 올려놓고 엄지로 쭉쭉 늘려가며 수제비를 빚어 물속으로 떨어뜨렸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국물과 함께 수제비들이 서로 어우러지며 피어올랐다. 그것은 생의 한가운데에서 모진 풍파와 싸워가며 어머니가 눈물로 피워낸 수제비 꽃이었다.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 수제비가 되곤 했다. 펄펄 끓는 세파 속으로 수제비처럼 뛰어들고, 자식의 허기를 채울 수만 있다면 기꺼이 수제비가 되기를 자처했다. 뜨거운 물기둥과 함께 솟구쳤다가 곤두박질치는 수제비가 주름투성이인 어머니 얼굴과 뒤섞이자 나도 모르게 온몸이 달아올랐다.
칼자루 끝으로 마늘을 다지고 쪽파도 엇비슷하게 썰어 간장과 함께 국물에 넣었다. 국자로 휘휘 저으며 간을 보니 맛이 너무 심심했다. 간장을 반 숟갈 더 넣자 삼삼한 맛이 났다. 어머니가 좋아한 짠맛을 내기 위해 간장을 한 숟갈 더 부었다.
언제부턴가 어머니는 입맛이 변했다. 짜고 단 음식만을 고집했다. 아내는 어머니용 음식을 따로 조리해야 했다.

 수제비를 한 상 차려 들고 어머니 방으로 갔다. 간장도 한 종지 따로 챙겨서 밥상에 올려놓았다. 서두르다 보니 설탕이 빠졌다. 어머니의 입맛에 맞추려면 설탕이 필요했다. 양념통이 진열된 곳에 설탕은 없었다. 아내에게 물어보려고 휴대폰을 들었다가 그냥 탁자 위에 놓았다. 장모님 이장 때문에 친정에 내려간 아내와 통화하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싱크대와 찬장 구석구석을 뒤져 어렵사리 설탕 단지를 찾아냈다.
 설탕 단지를 들고  어머니 방에 들어갔다. 어머니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수족관 안의 에인절피시에게 숟가락으로 뭔가를 먹여 주고 있었다. 수제비였다. 에인절피시가 수제비 냄새를 맡고 몰려들자 어머니는 마치 배고픈 아이에게 밥이라도 먹이는 양 고개를 끄덕이며 무척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너무 행복해 보여서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어머니는 당신은 한 입도 안 잡숫고 수제비 한 그릇을 물고기들에게 죄다 먹여버릴 요량이었다.
밥은 어머니에게 신이자 종교였다. 일제강점기와 육이오사변을 거치며 남편마저 잃은 어머니는 자식들의 끼니 해결이 최우선 과제였다. 밭뙈기 몇 마지기를 부치는 것으로는 일곱 식구의 주린 배를 채우기엔 역부족이었다. 허리띠를 동여매고 힘겹게 넘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험한 보릿고개 앞에서 만신창이가 된 어머니는 온몸으로 바닥을 치며 밥을 달라고 절규했다. 이 집 저 집 품팔이에다 나물을 뜯어 시장에 내다 팔며 어머니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밥은 어머니에게 믿음과 희망을 주기도 하고 어머니를 나락으로 빠뜨리기도 하는 존재였다. 밥을 위해서는 영혼까지 흥정할 수도 있었다. 어쩌다 자식이 밥 한 톨만 흘려도 어머니는 천벌 받는다며 야단을 쳤다. 어머니는 배고픈 설움이 제일 크다며 마른 논에 물이 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보기가 좋다고 했다. 내 자식이든 남의 자식이든 배고픈 꼴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는 이웃집 아이에게도 젖을 물렸다.

 “어머니!”
내가 부르는 소리에 어머니는 깜짝 놀라 숟가락을 수족관에 떨어뜨리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이구, 영감, 여길 어떻게 왔소. 내가 잘못했소. 얼른 자리에 앉짔소. 내가 오징어 사다 줄게.”
 어머니는 와락 달려들어 나를 부둥켜안고 얼굴을 비벼대며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사별하고 나서 살아생전에 오징어 하나 사주지 못한 게 한이 된다며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아버지가 장날에 오징어가 먹고 싶다며 하자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돈을 아껴야지 무슨 오징어 타령이냐며 면박을 줬는데, 가슴에 응어리가 생길 줄 몰랐다며 소매로 눈물을 훔치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가에 어른거렸다.
“여보, 내가 잘못했소. 그까짓 돈이 뭣이라고. 거기서 밥은 묵었소?”
어머니는 잠시 울음을 그치더니 눈물로 뒤범벅이 된 얼굴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어머니는  내게 얼굴을 맞대고 마구 흔들어대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아이구, 영감, 미안하요. 오징어가 얼마나 묵고 싶었소. 정말 미안하요!”
나는 어머니를 부둥켜안았다. 뜨거운 눈물이 솟구치며 어머니의 눈물과 뒤섞여 뺨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주방에 가서 다시 수제비 한 그릇을 가져와 한 숟갈 떠서 먹여 드렸다. 어머니는 맛이 없는지 어린아이가 쓴 약을 혀로 밀어내듯 그냥 뱉어냈다. 간장과 설탕을 더 넣어 간을 맞춘 다음 수제비 한 덩어리를 떠서 천천히 입안에 넣어드렸으나 어머니는 인상을 찡그리며 재차 혀로 밀어내 버렸다.

 나는 어머니를 등에 업었다. 물기가 빠져나간 어머니는 헛것이었다. 어머니는 어린애처럼 목을 꽉 껴안았다. 앞뜰에 서 있는 커다란 목련이 잔디밭에 하얗게 수제비를 뿌려놓았다.
나는 목련꽃을 가리키며 저 꽃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내가 손가락질한 데는 눈길을 주지 않고 자꾸 애먼 곳만 바라다보았다. 나는 꽃잎 한 개를 주워 어머니 손에 쥐여 주었다. 어머니는 꽃잎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더니 입안에 넣고 입을 옴질거렸다.
어머니는 꽃 중에서 목련꽃을 최고로 좋아했다.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긴긴 겨울을 견뎌내야 하는 어머니는 들에 나가 푸성귀라도 뜯어 먹을 수 있는 봄을 기다렸고, 봄을 알리는 목련꽃은 희망의 상징이었다. 어머니는 목련 꽃잎이 수제비 같다고도 했다.

 목련꽃 하나가 쿵하고 떨어졌다. 갑자기 등이 따뜻해지며 그 기운이 허리 아래까지 뻗쳤다.
어머니를 침상에 뉘고 바지를 벗겼다. 속옷을 벗기려고 하자 어머니가 자꾸 발을 꼬았다. 실랑이 끝에 속옷을 벗겨 내렸다. 지린내가 코를 찔렀다.
 생전 처음, 나는 어머니가 감추고 있는 고향을 보았다. 어릴 적에 뛰놀던 수풀이 무성한 들녘과는 달리 눈에 비친 내 고향은 풀 한 포기도 나지 않은 메마르고 비탈진 불모지였다. 여섯 마리 흑염소가 드세게 풀뿌리까지 파먹고 떠나버린 고향은 온통 상처투성이였고 황량한 기운이 뒤덮고 있었다.
 별은 생성하고 소멸한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별 중에는 별빛이 무한한 우주 공간을 달려오는 동안 이미 소멸하여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별도 있다.
 어머니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어쩌면 벌써 소멸해 버린 별 하나가 내 곁에 누워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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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당선작 심사평


  제37차 <창작콘테스트> 은상은 소설부문 이상길 씨의 「수제비 꽃」을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소설가 김영찬 / 소설가 김충근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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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부문



서울의 꿈
남상봉



1975년

민수는 배가 고팠다.
부엌 구석에 매달린 선반 위로 삶은 감자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발돋음을 해서 손 끝으로 잡으려 해 보았으나 키가 작아 될 턱이 없었다. 그때, 마당 한가운데 읍내에 내다 팔려고 모아둔 가마니 더미가 보였다. 민수는 재빨리 달려가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선반 밑에 쌓았다. 감자를 먹기 위한 민수의 욕망은 대단했다.
감자는 너무도 달콤했다. 하지만 그것을 다 먹어서는 안 되었다. 형수님의 화난 얼굴이 눈에 선했다.
"선반 위의 감자 누가 먹었당까?"
형수는 새빨간 볼을 더욱 쌜죽거리며, 말을 이었다.
"진우, 니냐? 아니면 신우 니냐?"
꼬마 자식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고개를 흔든다.
민수는 논두렁 샛길진 곳에서 혼자 물장난을 하고 있었다. 서울에 계신 엄마 생각이 났다.외가집에 사는 형도 보고 싶었다. 세 식구가 떨어져 사는 것이 민수는 슬펐다.
어린 민수로서는 감당하지 못할 만큼 괴로움의 나날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시자 당장 생계가 곤란한 처지에 놓여 엄마는 서울로 상경하고 형은 외갓집에 민수는 사촌 형 집에 따로 맡겨져 살고 있는 것이다.
"민수얏 !"
째지는 듯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소년은 흠칫 놀라와 논두렁 속으로 빠질 뻔했다. 민수 앞에 화난 얼굴로 팔을 꼬고 서 있는 형수의 모습이 보였다.
"잠깐, 따라와 보랑께."
형수는 민수의 팔을 낚아채듯 집으로 끌고 들어갔다. 억센 손이 압박해와 소년은 통증을 느꼈다.
"삶은 감자 니가 먹었제?"
"야....... ."
기어드는 목소리로 민수는 대답했다.
"그걸 와먹노 ,이것아 !"
가녀린 소년의 뺨이 크게 흔들렸다. 이 정도 서러움이야 형수에게 늘 받아왔던 민수지만 꼬마에겐 힘이 없었다.
해가 질 무렵 사촌 형님이 일터에서 돌아왔다. 정님이 상식에게 다가갔다.
"저-민수 말이여 서울 엄마한테 보내야 겠어라 !"
정님이 말했다.
"글씨, 생각 쫌 해 봐야 겄어. 내게 맡겨둔 논도 좀 있고 한디...... ."
"아따, 생각할 거 뭐 있다요? 내일 쯤 해서 보내부쇼."
"그라도 어째...... ."
그는 뭔가 탐탁지 않은지 망설였다.
다음날 아침 상은 유난히 푸짐했다.
"오메 !이거 머여? 엄니 오늘 무슨 날이라요?"
막내 신우가 법석을 떨었다. 명절이나 잔칫날이 아니면 맛보기 힘든 생선이 올라와 있었다.
"아제, 이거 먹어봐 ,맛있당께 !"
신우가 큼직한 생선을 민수의 밥 위에 놓았다.
"아녀 ! 니나 많이 먹어."
민수는 대답했다.
식구 중에서 민수는 신우와 유일하게 친한 사이였다. 형님도 민수를 조금 위해주었으나 그럴 때는 아내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아침 햇살이 가난한 초가집 지붕을 비추고 있었다 하늘 높이 먹이를 찾기에 분주한 매들이 공중을 돌고 있었다. 마당에 한가롭게 뛰노는 병아리를 보호하려고 암탉은 재빨리 새끼를 날개 품에 감아 들였다.
"다 됐다냐?"
사촌 형의 목소리다.
"조금만 하면 되지라."
"아따, 싸게싸게 하랑께. 뭐 그리 느리다냐."
정님의 콩 볶는 듯한 말투는 소년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시방 나가지라"
"성님 어딜 간당까요?"
"알 것 없다. 잠자코 따라 오기나 혀라."
소년의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상식이도 더운지 손등으로 이마를 닦았다. 신작로를 따라 좌우에 길게 뻗은 느티나무 잎들이 바람에 한들거렸다. 잠시 후 버스 한 대가 흙 쌓인 시골길에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와 멈췄다. 둘은 재빨리 올라탔다. 창가에 자리를 잡은 민수는 시종 신기한 눈으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타 보는 버스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었다.나무가 움직이는지, 버스가 질주하는지 분간 할 수 없었고 산과 논들이 온통 뒷전에 쳐져 순식간에 지나는 것이 마냥 신기했다.
길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동경의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소년도 그들에게 조그만 손을 저어 주었다.
무더운 대낮에 버스는 쉬지 않고 달려 느지막이 역에 도착했다 .역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황혼이 깃들기 시작할 무렵 기차가 무거운 쇳소리를 내며 질주해왔다. 상식이 소년의 손목을 꽉잡고 말했다.
"내 손을 잡어라 ."
둘은 많은 사람들 틈 사이에 애써 올라탔다. 서울행이라 쓰여져 혹시 엄마한테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들었으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열차 안은 발붙일 틈도 없었다. 민수는 간신히 좁다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기차는 어두운 철로를 긴 기적 소리를 내며 쉬지 않고 달렸다. 민수는 몸이 고단해 의자 난간에 기대어 잠이 들었다. 잠이 깨었을 때는 새벽녘이었고 서울역에 도착해 있었다. 역 대합실을 가로질러 천천히 걸어 나오는 민수에게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수많은 빌딩들, 그리고 자동차들......많은 사람들과 휘황찬란한 간판들......소년은 경이와 흥분에 찼다. 사진으로만 보아왔고 귀로 듣기만 했던 서울의 풍경을 직접 마주 대하게 됐다는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민수는 두리번거리며 넓은 광장을 걷기 시작했다. 광장에 솟은 시계탑이 여섯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밑으로 민수에게 낯익은 여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여인은 누구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머리를 돌려 지나치는 행인들을 살피고 있었다. 순간, 소년은 북받치는 반가움에 어쩔 줄 모르고 상식과 잡았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갔다.
"엄마아~"
근 삼년 여 동안 친척 집에서 핍박과 욕짓거리를 들어온 것이 한마디로 폭발하는 듯 했다.
"엄마, 보고 싶었지라우. 참말로 보고 싶었지라우."
떨리는 말과 함께 뺨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그래, 그래 민수야 ,차타고 오다 멀미 안했어 ?"
"난 그땅거 안했어라. 밤새 잠만 잤당께!"
뒷전에 서서 모자의 상봉을 지켜보던 상식이 영심과 인사를 나누었다.
안개낀 서울의 새벽 거리를 세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민수, 너,배고프지?"
"뭐, 먹고 싶어?"
영심이 아들에게 물었다.
"나라, 우유 먹고 싶지라."
농도 짙은 사투리를 내뱉는 소년에겐 더할 수 없는 천진스러움이 엿보였다. 일찍 문을 연 음식점으로 세 사람은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상식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질 낮은 담배 연기가 식탁 주위를 맴돌았다. 우유를 들이키는 아들을 바라보던 영심이 짧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약속이 틀리잖아요. 분명히 내년까지...... ."
영심이 말끝을 흐렸다.
""아,시방 고걸 말 할순 없지라. 말은 이따가 드리지라."
두 사람의 대화를 민수는 듣고 있었다. 어린 소년도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었다.그러나 다시는 엄마와 헤어지기 싫었다.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엄니, 나 이제 엄니랑 사는거제?"
민수는 병 우유를 탁자에 놓으며 물었다.
"그래, 이젠 엄마랑 사는거야. 민수 학교도 보내주고 옷도 새것으로 갈아 입혀줄게."
여인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비쳤다. 상식이 그걸 보고 있었다.
"성도 엄마랑 사는 거재? 그라믄 얼매나 조으까 !"
소년은 제멋에 겨워 떠들었다. 그녀가 남편을 잃고 떠나온 지 3년. 아직 세 식구가 살기엔 돈이 부족했다. 남편이 남기고간 논 몇을 그녀는 상식에게 맡겼으나 그는 참을성 있게 관리하지 못했다. 사업을 한답시고 거덜을 냈다. 그로 인한 죄책감에 상식은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영심은 그를 미워하지는 않았다. 다만, 어린 자식을 잘 보살펴 줬으면 하는 바램 뿐 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상식은 투숙할 여관으로 갔다.
민수는 엄마를 따라 넓은 주택가를 걸어 들어갔다. 그녀는 주은 상선 회장의 가정부로 일 하고 있었다.
"민수야, 지금 들어가는 집에선 얌전해야 돼. 우리집이 아니야. 명심해 ,알겠니?"
그녀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예~"
소년은 대답하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엄마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엄마와 맞잡은 손이 거칠게 느껴졌다. 집은 굉장히 호화로웠다. 육중한 대문의 빗장 여느 소리가 들리고 한 남자가 문을 열어주곤 아무 말 없이 들어갔다.
"엄마, 무서워라."
새퍼트 들이 소년을 보고 사납게 짖어댔다. 현관문으로 향해있는 곱게 깔린 타일위를 걷던 민수는 어떤 압박감을 느꼈다.
"그 아인 누구냐?"
현관문을 막 들어서려 할 때 낮게 갈라진 음성이 들렸다. 소리 나는 쪽을 보니 귀부인 같은 중년 여인이 서 있었다.
"예? 예, 제 아들이에요."
영심은 당황한 듯 더듬거렸다.
"한 이삼년 굴렀으니 아들 하나 끌고 와도 괜찮다는 거지?"
"아니, 저 그......그게 아니라......"
민수는 엄마가 쩔쩔매는 것이 안쓰러웠다.
"빨리 안으로 들어가 새퍼트 밥을 주고 잔디풀을 뽑아라."
여자는 차게 내뱉고 사라졌다.
"민수야, 이리와라."
엄마가 인도하는 방으로 민수는 따라 들어갔다. 조그마한 방에 밤색 장농이 하나 있고 화장대와 몇몇의 옷가지가 포개져 있었다. 엄마가 나가자 소년은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창을 통해 비친 사각 모양의 버스가 더 이상 신기하지 않았다. 수 많은 빌딩들도 거리감이 느껴졌다. 가만히 시간이 갔다. 어둠이 깔릴 무렵 엄마가 초췌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민수야, 밥 먹자."
식당에 들어가자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소년은 엄마 곁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맞은편엔 좀 전에 대문을 열어준 남자가 아무 말 없이 밥을 먹고 있었다. 그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중년 여인은 쉬지 않고 지껄였다. 밥이 왜 탔느냐. 꽃에 물은 줬느냐. 냉수 좀 가져와라 등등..... .숨 돌릴 틈도 없이 영심에게 심부름을 시켰다.민수는 형수를 생각했다. 때릴 땐 심했어도 저렇게 냉정하진 않았지... 민수는 식당 밖으로 보이는 철망으로 둘러싸인 높다란 담과 어제 까지만 해도 살던 맑은 하늘이 내다뵈던 초가집을 비교해 보았다. 크진 않으나 여닫기 쉽던 싸리나무 문과 육중한 철문을 또 비교해 보았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마치고 방에 돌아온 소년은 천장위에 매달린 형광등을 바라보았다. 문득 늘 성냥불을 켜서 신우와 도란도란 얘기하던 때가 그리워졌다 민수는 다시 시골 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늘 야단을 치고 핍박하던 형수도 ,자신에게 늘 장난만 치던 진우도 보고 싶어졌다. 밖에서 새퍼트의 짖는 소리가 들렸다.
"저 개는 하루종일 사슬에 묶여 혹시 낯선 손님이 들어올까 집을 지켜야 해. 먹는 건 내 바둑이 보단 낫지만, 마음껏 뛰놀지도 못하고 높은 담만 보며 괴로워하고 있어. 하지만 내 바둑인 나와 함께 뜀박질도 하고 방죽에 가 수영도 해. 저 개는 우리 바둑이보다 불행해."
엄마가 피곤한 몸짓으로 뒤늦게 들어왔다
"아들, 많이 기다렸지? 엄마가 내일은 서울 구경 시켜줄까?"
그녀는 민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가도 되지라."
"엄니, 난 벌써 서울이 싫구 마니라. 넓은 집안과 잔디 깔린 정원보다 내가 늘 갔던 뒷산이 더 좋구 마니라. 엄니는 저 여자에게 잘 보여야 돈을 벌지라? 시골로 내려가 좀 참으께라.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라. 글구 옆방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외국노래도 싫구마니라. 엄니,쪼금 참으면 되지라? 성하고 살라믄 이라."
민수가 울먹거렸다. 영심이 아들을 조용히 껴안았다.
"시골로 내려가 있을께라. 글고 나는 서울 싫구마니라. 시골이 더 좋아라."
민수가 엄마품에 더 바짝 안겼다.
"그래, 아들 ,아들이 대견스럽다. 엄마는 민수가 자랑스럽구나."
그녀는 소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영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날 밤은 유난히 짧았다. 열린 커튼 사이로 별 하나가 흐리게 빛나고 있었다. 넓은 집안이 고요로 잠들고 어디선가 풀벌레가 울고 있었다. 곤히 잠든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던 여인도 밝은 아침을 맞기 위해 살며시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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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당선작 심사평


  제37차 <창작콘테스트> 동상은 소설부문 남상봉 씨의 「서울의 꿈」을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소설가 김영찬 / 소설가 김충근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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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부문



면접
최영두



  휴대폰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팔을 뻗어 액정 속 알람을 해제했다. 어제 마셨던 술이 덜 깼는지 아직도 머리가 아팠다. 오늘 열시 면접까지 술이 깨야 할 텐데 걱정이었다. 어제는 전 직장 선배였던 ‘덕호형‘과 저녁 식사를 한 날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면접을 보게 될 회사 간부와의 저녁식사 자리였다. 직급은 ’상무‘였고 덕호형과는 친한 사이라고 했다. 면접 전 나를 꼭 소개해 주겠다며 마련된 자리였다. 덕호형은 나의 재취업에 이리저리 신경을 써 주었다. 한 달 전에도 직장을 소개해 주었는데 업무 포지션이 맞지 않아 거절했었다. 이번에는 업무 포지션도 딱 맞았고 직급도 국장급이라 괜찮을 거라 말했었다. 덕호형이 나의 재취업에 이렇게 열정적으로 도와주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는 나에게 권고사직을 통보했던 상사였고, 두 번째로는 회사에서 제일 친했던 동료인 때문이었다. 저녁식사로 끝날 줄 알았던 자리는 새벽이 되어서 마무리가 되었다.
  새벽 세시에 잠을 자서 그런지 숙취가 남아있었다. 머리가 아플 뿐만 아니라 속도 쓰렸다. 상무의 분위기를 맞춘다고 빈속에 술을 마셨기 때문이었다. 쓰린 속을 부여잡으며 괴로워하고 있을 때 휴대폰 문자 알람 소리가 울렸다. 덕호형에게 온 문자였으며 오늘 면접 잘 보라는 내용이었다. 오십대 나이에 맞지 않게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낸 문자였다. 나는 덕호형에게 고맙다는 답장을 보냈다. 안방 문 사이로 요란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침 식사 준비로 아내가 바쁜 모양이었다.
  나는 두 달째 아내와 아이들에게 퇴사 사실을 숨겼다. 아내가 받을 충격, 초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을 둔 아버지로서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그래서 두 달 동안 위장 출근을 하고 있었다. 출근 패턴은 그대로 유지했다. 아침 여덟시에 출근해 저녁 아홉시 전후로 집에 돌아왔다. 월급은 퇴직금으로 충당했다. 통장에 찍힐 이름도 수정해서 입금했다. 보내는 이름을 나의 이름에서 전 직장 회사명으로 적어 넣었다. 번거로움은 있었지만 재취업을 하기 전까지 퇴사 소식을 숨기고 싶었다. 또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혼자 술을 마시고 새벽에 귀가 한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생활이 짜릿했다. 아내를 속인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첩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 같았다.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실 때에도 현금으로만 결제했다. 동시에 구직활동도 병행했다. 재취업이 바로 될 줄 알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서류 통과 자체가 안 되고 있었다. 사십대 후반, 이십년차 경력자가 갈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오십 번째 서류를 접수하고 날짜를 확인하자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몸무게도 오키로그램이 빠졌고 엠자 탈모도 심해지기 시작했다. 가끔 술을 마시고 귀가하는 날이면 아내는 갈수록 내 얼굴이 해골이 되어 가고 있다며 음식에 신경을 쓰겠다고 했다.

  그만둔 회사는 일 년 전부터 경영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 회사에서 나는 십년 동안 근무를 했고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신문사였다. 차장급 사진기자로 사진부 소속이었다. 미디어 플랫폼이 인쇄매체에서 모바일로 바뀌던 초창기에는 회사가 굳건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신문사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매체도 아닌 신문매체가, 그것도 메이저 신문사가 폐간될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사진기자로 근무하면서 많은 지식인들을 만났다. 지식인들조차 책과 신문을 읽어야 삶이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 폐간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구독률은 점차 낮아졌고 한자리를 유지했던 구독률은 급기야 소수점을 기록했다. 회사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것은 사장과 경영진이 회사 시찰을 돌면서부터였다. 십년 동안 나는 사장 얼굴을 딱 두 번 봤다. 첫 번째는 면접 때였고, 두 번째가 시찰을 돌던 두 달 전이었다.

  사장이 시찰을 돌던 날에도 나는 데스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신문사 차장급은 실무업무를 하지 않았다. 관리자급으로 흔히 말하는 ‘캡‘으로 불렸다. 캡은 데스크에 앉아 인력을 컨트롤했다. 정치부, 사회부, 스포츠부 등 다양한 부서의 기자들이 사진부로 업무요청을 했다. 기자와 동행 취재를 요청할 때도 있었고, 사진기자 단독으로 현장 커버를 요청할 때도 있었다. 업무요청은 사내 인트라넷 ‘알리고’ 프로그램으로 접수되었다. 업무요청 내용, 기자와 동행 여부, 장소 등, 입력된 정보를 컨트롤 하는 게 나의 일이었다. 아무튼 그날 오전에도 팝업창이 떴다 사라졌다. 출근 한지 두 시간도 안 돼서 열 번째 뜨는 팝업창이었다. 스포츠 부서에서 올린 업무요청이었다. 기자와 동행하며, 취재 내용은 ‘손흥민 선수 입소 마지막 인터뷰’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내심 손흥민 선수가 국방의 의무를 안 했나 생각하며 보드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드판에는 스무 명의 사진기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먼저 이십 사 시간 근무자, 휴가자, 종로 경찰서 뻗치기 인원을 제외 시켰다. 제외된 이름 위에는 빨간색으로 x자를 그었고, 나머지 중에 적당한 이름을 골라 전화를 했다. 그런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모니터 쪽으로 시선을 돌려 전화를 받지 않는 사진기자 프로필을 확인했다. 삼 개월 시용기자였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사진기자는 업무능력보다 전화 받는 능력을 우선시했다. 우리들은 섹스 중에도, 샤워를 할 때에도,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화를 받아야 했다. 현장에서 좋은 영상을 못 담는 상황이 생겨도, 전화를 못 받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역시 곧이어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지금 일층인데, 사진기자가 왜 안 오는지에 대한 재촉 전화였다. 손흥민 선수가 제주도에서 삼 주간 기초군사 훈련을 받아 김포공항에서 인터뷰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 가도 늦는데, 왜 아직도 안 오냐며 화를 냈다. 이 년 차 기자였다. 엠바고급이 아닌 이상, 사원이 차장에게 전화로 업무요청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직속 상사가 아니더라도 기수문화가 남아있는 회사라 나는 충격이 컸다. 신입기자도 아니고, 이 년 차 팬기자가 나에게 전화를 해서 재촉을 하다니, 전화를 끊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다행히도 마침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방금 마곡동 물류센터 화재 취재를 마쳤고, 회사로 복귀하겠다는 삼 년 차 사진기자의 전화였다. 마곡동이면 김포공항과 가까워 나는 회사 복귀 대신 김포공항으로 이동을 지시했다. 그러곤 두 기수 후배인 스포츠국 차장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사진기자를 바로 현장으로 보내겠다고 말했다. 곧이어 나에게 재촉 전화를 걸었던 팬기자에 대해 물었다. 후배 차장기자는 혀끝을 차며 말했다. 직접 말은 안 했지만, 사장 라인을 타고 있는 거 같다며, 우리들도 그 친구 눈치를 보고 있다고.
  몇 개월간 참은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서랍을 열었다. 열자마자 고약한 냄새가 났고 역한 냄새를 참아가며 서랍을 뒤적였다. 은단 껌, 신다 버린 양말, 유통기한 지난 빵이 보였다. 담배가 있을 리 없었다. 서랍을 닫았다. 데스크를 후배에게 맡기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사무실 밖에 있는 복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십오층 에서 근무를 하면 장점과 단점이 있었다. 장점은 딱 한 가지였다. 흡연 시절, 옥상과 가까워서 담배 피우러 가기 편했다. 이 장점도 금연을 한 뒤로는 무의미해졌다. 반대로 단점은 너무나도 많았다. 연식이 오래된 건물이라 엘리베이터 상태가 좋지 않았다. 상태뿐만 아니라 속도 또한 느렸다. 다른 건물에서 삼십 초면 도착할 지하 일층을 우리 엘리베이터는 일분 이상 걸렸다. 만약 일층에서 십사층 까지 모두 정지하는 날이면 삼분 이상 걸릴 때도 많았다. 그래서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거북이 엘베라고 불렀다. 신입사원 시절 나는 어느 선배에게 왜 거북이 엘베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선배는 거북이처럼 느려 생긴 별명이라고 말했었다. 나는 별명이 잘 지어졌다 생각하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지하 일층을 눌렀다. 삼초간 정적이 흐른 뒤 문이 닫혔다. 십오, 십사, 십삼. 숫자는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지하 일층까지 삼분은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순조롭게 내려가던 엘리베이터는 십층에서 멈췄다. 살짝 벌어진 엘리베이터 사이로 네 명의 남성들이 보였다. 세 명의 중년 남성이 60대 남성을 둘러싸고 있었다. 문이 완전하게 벌어지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보도국장 A(덕호형), 전략기획 국장 B, 논설 국장 C였다. 회사에서는 존칭을 썼지만, 사석에서는 모두 형으로 부르던 사람들이었다. 국장 세 명은 서로 합을 맞춰 60대 남성을 호위했다. A가 버튼을 누르고 있으면, B는 안에서 버튼을 눌렀다. C는 60대 남성을 에스코트하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입장했다. 이 장면은 G20 정상회담에서 미국 대통령이 경호원에게 받는 의전활동에 버금가는 행위였다. 나는 오 층에서 내리고 싶었지만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담배 생각이 더욱더 간절해졌다. 60대 남성은 사장이었다. 공기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제발, 아무 말 없이 지하 일층까지 도착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나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사장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김 차장! 아까 보도국에서 화가 많이 난 거 같던데 괜찮나?”
등이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니 더 당황스러웠다. 사장 물음에 답변을 하려던 순간 보도국장 A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장님도 아시겠지만, 보도국이 어찌 조용할 날이 있겠습니까?”
논설 국장과 전략기획 국장이 웃기 시작했다. 뜨거워진 공기, 어색한 웃음소리가 단번에 엘리베이터를 휘감았다. 팔십 년도 유머 일 번지에 나올법한 콩트 같았다. 일층에 도착할 때까지 콩트는 끝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일층에 도착하자 나는 안에서 열림 버튼을 계속 누르고 있었고, C와 B는 밖에서 대기했다. 나는 허리를 숙여 사장에게 인사를 했다.
  “조만간 또 볼 날이 있을 테니, 다음에 봅시다.”
사장과 호위무사들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지만 나는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일분째 누르고 있었다.

  지하 일층 편의점에 도착해 담배와 라이터를 구입했다. 동시에 갈증도 나서 냉장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양한 맥주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중에서 세 개에 만 원짜리 맥주를 골랐다. 계산을 마치고 그 자리에서 맥주 하나를 비웠다. 갈증이 해소되지 않아 맥주 하나를 더 비웠다. 빈속에 마신 술이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의자 쪽으로 자리를 옮겨 세 번째 맥주를 마실 때였다. 휴대폰이 울렸고 보도국장에게서 온 전화였다. 어디 있느냐는 말에 나는 지하 일 층 편의점이며 맥주를 마시고 있다고 말했다. 보도국장은 지금 옥상에서 보자고 했다. 올라올 때 소주 두 병과 새우깡을 사 오라고 말했다. 맥주를 마저 마셨다. 세 번째 맥주를 비우니 취기가 확 돌았다. 나는 소주와 새우깡, 그리고 종이컵을 사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는 흡연자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다섯 명 정도 되는 인원이었다. 그 일행 중 제일 오른쪽에서 보도국장인 덕호형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덕호형은 나보다 여섯 기수 선배였다. 흔히 말하는 사수였다. 덕호형 쪽으로 다가갔다. 나는 종이컵을 건넸고 덕호형도 아무 말 없이 나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정적이 흘렀다.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포장지를 벗겼다. 덕호형이 침묵을 깨며 말했다.
  “너 담배 끊은 거 아니었냐?
  “오늘부터 다시 피우려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육 개월 만에 피운 담배치고는 형편없는 맛이었다. 덕호형이 나에게 두 번째 술잔을 따라주며 말했다.
  “너 다음번 정리해고 명단에 있더라.”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나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었다.
  “다시 말해줘. 형! 뭐라고?”
너무 당황해 손이 흔들려 바닥으로 술을 흘렸다. 덕호형도 이런 말이 하기 싫은지 짜증을 내며 말했다.
  “너 다음 달에 회사 잘린다고 새끼야.”
손이 계속 떨렸고 달아올랐던 취기마저 사라졌다. 덕호형이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백방으로 너만은 해고 명단에서 삭제시켜 보려 했는데 쉽지 않았어. 사장이 삼년 전 경위서까지 들먹이는데 할 말이 없더라.”
덕호형이 계속 떠들어 댔지만 일분 전부터 립싱크처럼 들리고 있었다. 이제 손이 마구 떨려 술잔을 쥐고 있을 수 없었다. 술잔을 내려놓고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했다. 하지만 라이터를 작동시킬 수 없었다. 덕호형은 나의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삼 년 전 일은 네가 실수한 거야. 알지? 어떻게 사진기자라는 놈이 그림을 안 찍고 할아버지를 도와줄 생각을 했냐?

  삼 년 전 나는 칠 년 차 사진기자로 1191번째 수요 집회 현장을 취재하고 있었다. 처서가 지나긴 했지만 아직도 정오 시각의 온도는 삼십 이도를 웃돌았다. 원래 고참 사진기자는 시위 현장이나 경찰서 출입은 하지 않았다. 대부분 신입기자들이 취재를 맡았다. 하지만 그날따라 인력이 부족했다. 당시 데스크 캡이었던 덕호형(현재 보도국장)이 수요 집회 현장 취재에 나를 배치시켰다. 큰 이슈 없이 집회가 마무리될 때쯤 ‘80대 할아버지’가 분신자살을 시도했다.
분위기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방송국 카메라 기자, 신문사 사진기자들이 불에 타들어 가는 할아버지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 현장을 바라보고 있던 시민들이 수근거렸다.
  “사진기자들 미쳤나 봐. 어떻게 사람이 타들어가고 있는데, 구해 줄 생각은 안 하고 어떻게 촬영만 할 수 있지?”
직업의식이 투철했던 1~3년 차 사진기자였다면 시민들 말에 동요되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왜 그랬는지 시민들의 대화가 귀에 박히듯 들려왔고, 때마침 앰뷸런스가 도착했다. 119소방대원들이 들것을 들고 할아버지쪽으로 다가갔다. 나도 같이 그쪽으로 움직였다. 카메라를 목 뒤로 휘감았다. 입고 있었던 남방을 벗어 할아버지 몸에 붙은 불을 끄기 시작했다. 불이 어느 정도 꺼졌다. 할아버지는 신음소리를 내며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소방대원들이 들것에 할아버지를 싣고 있었다. 반대편을 바라봤다. 방송국 카메라 기자, 사진기자들이 나를 찍고 있었다. 아니 할아버지를 찍고 있었기에 나까지 찍혔다.
얼마 뒤 휴대폰이 울렸다. 캡의 전화였다.
  “종현아! 그림 많이 땄어? 빨리 본사로 그림 보내줘. 지금 데스크 난리도 아니다. 사장까지 그림 빨리 달라고 지랄이야”
머뭇거리며 나는 대답했다.
  “캡! 저 그림 제대로 못 땄습니다. 죄송합니다.”
캡이 욕을 해댔다.
  “이런 개뼈다귀 같은 새끼를 봤나. 네가 짬밥이 몇 년인데 그걸 놓쳐? 아무튼 경위서 준비하고, 회사로 바로 복귀해. 지금까지 찍은 거라도 빨리 보내고”
캡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80대 할아버지가 분신했던 자리에는 경찰들이 폴리스 라인을 치기 시작했다. 선명하게 들렸던 앰블런스 소리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웠던 분위기가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삼일 뒤 나는 경위서를 제출했다. 경위서는 직속 상관 선에서 마무리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본부장에게 보고를 해야만 했다. 사장이 왜 우리 신문사만 분신자살 사진이 없는 거냐며 진노했다. 이 사건은 경위서로 끝날 일이 아니라 직무유기로 징계위원회를 열어야 한다고. 하지만 평사원을 너무 몰아붙이면 안 된다는 경영진들의 논리가 사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 결과 나는 경위서만 제출하면 되었다. 경위서를 작성하고 본부장에게 찾아갔다. 본부장도 나에게 훈계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훈계에 집중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집중하고 있었던 곳은 오늘자 발행된 신문 지면이었다. 사회면에 기재된 단신으로 ‘수요 집회 도중 분신한 D씨 결국 사망’ 이란 기사였고 그림은 첨부되어 있지 않았다.

  덕호형이 두 번째 소주 병뚜껑을 돌리며 말했다.
  “만약 그때 너 때문에 국장 타이틀 못 달았으면 내가 너 죽였을 지도 몰라.”
농담으로 한 말 같았지만 전혀 웃기지 않았다. 나는 덕호형이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종이컵이 축축해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만 같았다. 덕호형은 말을 이어갔다.
  “사장이 그러더라. 차장급 한 명 월급이 인턴 이 점 이명의 월급이고, 국장급은 인턴 세 명 월급이라고. 다음 달에 진행하는 정리해고는 일 차고, 육 개월 뒤 이 차로 물갈이가 진행될 수 있다고. 나도 지금 간당간당하다.“
술기운이 다시 올라오고 있었다. 빈속에 맥주와 소주를 연거푸 마셨더니 속도 쓰려왔다. 뭐라도 먹고 싶었다. 새우깡을 뜯는 순간 덕호형이 나에게 다시 말을 건네었다.
  “아까 보도국 시찰 돌다가 사장이 한마디 하더라. 종현이 너를 가리키며, 인턴들 이 점 이배나 받아 가는 작자가 책상머리에 앉아 후배들 갈구기나 한다고”
나는 새우깡을 한주먹 움켜 집고 입안으로 넣었다. 기존에 알고 있던 새우깡 맛이 아니었다. 덕호형도 새우깡을 먹으며 말을 이어갔다.
  “나도 몰랐는데, 손흥민 인터뷰 요청한 팬기자 있잖아, 사장 조카란다. 그 새끼가 미쳤는지 사장한테, 다이렉트로 전화해서 너 업무 졸라 못한다고 까더라. 씨발! 아무리 사장 조카라도 그렇지. 기수가 열 기수 넘게 차이 나는데......”
덕호형 스스로 열이 더 받았는지 담배에 또다시 불을 붙였다. 나도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 지 않기 위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래서 언제 나가면 되는데?”
  “다음 달이라고는 하는데, 내일이라도 나가고 싶으면 나가도 돼, 내가 권고사직으로 해줄게, 그리고 퇴직금 명목으로 해서 최대한 많이 챙겨줄게”
두 번째 술병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술을 나에게 따르며 덕호형은 올해 마신 술 중 제일 쓰고 맛이 없다며 투덜댔다. 나 또한 그랬다. 덕호형은 볼 일이 있다며 일어났다. 그러곤 손바닥에 묻은 새우깡 부스러기를 털면서 면접 자리를 많이 알아봐 주겠다고 말했다. 덕호형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나는 술을 깨고 들어갈 테니 형 먼저 내려가라고 했다. 덕호형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축축했던 종이컵이 찢어져 있었다. 하늘을 쳐다봤다. 비라도 내리면 좋으련만 지랄같이 푸른 하늘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방에서는 아직도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냄새를 파악했을 때 호박죽 같았다. 아무래도 아내가 나의 입맛을 돋우기 위해 준비한 모양이었다. 호박죽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또다시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알람을 해제하고 일어났다. 어제 술자리를 다시 한번 더듬어 보았다. 상무가 대략적인 회사소개를 해주었다. 중견기업으로 토목, 건축 사업을 한다고 했다. 원래 유능한 홍보부장이 있었는데 갑작스레 이민을 가게 되어 공석이라 말했다. 그래서 친분이 있던 덕호형에게 문의했고 오늘의 자리가 성사되었다고. 덕호형은 귓속말로 “너 나 평생 업고 다녀야겠다”고 생색을 냈었다. 퇴사 뒤 한 달 동안 지원한 이력서만 오십 통이 넘었고 이 중 면접으로 이어진 경우는 삼 회도 안 되었기에 생색을 내도 될 만하다고 생각했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거울을 바라보았다. 어제 마신 술로 얼굴이 푸석해 보였다. 아내가 방문을 열어 아직도 꾸물거리냐며 핀잔을 줬다. 아내의 앞치마는 음식이 묻어 색깔이 변해 있었다. 나는 알았다는 말만 반복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아내가 나를 안아주었다. 아내의 가슴 윤곽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촉이었다. 아내가 “요새 부쩍 멍해질 때가 많은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어?”하고 물었다. 요새 상사가 힘들게 한다는 말로 나는 둘러댔다. 나의 머리카락만 쓰다듬을 뿐 아내는 별말이 없었다. 호흡을 가다듬고 아내는 나에게 말했다. 첫째 아들 동진이가 예술고등학에서 피아노를 정식으로 배우고 싶다고. 그러려면 지금부터 입시 과외를 시작해야 하는데 보내도 되는지. 나는 아내의 말이 여기서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내는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이번에는 둘째 딸 동희의 영어캠프에 관한 이야기였다. 동남아 지역 말고 캐나다에 보내자며 내 의견은 어떤지 물었다. 나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아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고 말했다. 아내는 나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열시 면접에 가야 했다. 간단히 세수만 하고 거울 앞에 앉았다. 평소 바르지 않던 선크림도 얼굴에 발라 보았다. 방문 밖에서 아내가 식사 독촉을 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이 없다며, 호박죽은 퇴근하고 먹겠다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아내도 포기했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시선을 옷장 쪽으로 돌렸다. 무채색 계열의 상, 하의가 걸려 있었다. 구석에 걸려 있는 정장을 꺼내 보았다. 드라이클리닝을 맡겼는지 비닐에 쌓여 있었다. 마지막 정장을 입었던 날이 육 개월 전 친구 조모상 때였다는 기억을 하며 정장을 쇼핑백에 넣었다. 정장은커녕 세미 정장도 입지 않는 나였다. 만약 아내가 정장을 만지작거리는 나의 모습을 본다면 집요하게 추궁할 게 뻔했다. 평소와 같이 무채색 계열의 옷을 입고 집을 나왔다.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에어컨을 삼단으로 맞추고 뒷좌석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정장의 비닐을 제거했다. 육 개월이 지났지만 세탁소 특유의 냄새가 남아있었다. 상의는 조수석 의자에 걸쳐 놓고 와이셔츠를 입기 시작했다. 내비게이션에 있는 시계가 여덟시 정각을 알려주고 있었다. 바지를 마저 입고 앞 좌석으로 넘어갔다. 티맵 내비게이션에 ‘공덕동4872-3번지’를 입력했다.

  동부 간선도로는 꽉 막혀 있었다. 상계동에서 공덕까지 교통체증을 감안해도 아홉 시 삼십 분 전에는 도착 예정이었다. 티맵의 도착시간은 아홉시 십분을 예상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어제 술자리에서 오갔던 이야기를 상기시켰다. 상무 말로는 오늘 열 시 면접은 최종 면접이라고 했다. 워낙 급한 채용이라 임원면접은 생략한다고. 사장 한 명, 지원자 두 명이 대화 형식으로 면접을 진행할 거라고. 제안한 연봉도 나쁘지 않았다. 두 번 오지 않을 기회였다. 여기에 덧붙여 사장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키워드 두 가지를 알려주었다. 첫 번째는 “시간”이었고 두 번째는 “센스”라고, 특히 약속 시간 십분 전 도착을 좋아한다고. 상무 말로는 실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두 지원자가 있었는데, 면접 도착시간으로 최종 합격을 가를 때도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면접 대기 시간 일 분만 늦어도 마이너스 오십 점을 주고 시작한다고 했다. 정말 기가 막히게 잘 보지 않는 이상 막판 뒤집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십 분 전에 도착하면 문제가 없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아무튼 나는 아홉시 오십분에 도착하면 되는 것이었다. 라디오를 작동시키자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덕호형 십팔번 곡이었다. 오늘따라 <낭만에 대하여>가 다르게 느껴지고 있었다. 자동차 보닛 위에 빗방울이 거세게 쏟아지고 있었다.

  면접 보게 될 회사에 도착했다. 지하 삼층에 주차를 하고 시계를 확인했다. 아홉시 십분이었다. 티맵의 도착시간은 언제나 정확했다. 약간의 허기가 느껴졌지만 지금 먹으면 면접에 영향을 줄 거 같아 참기로 했다. 갈증도 찾아왔다. 자동차 구석구석을 뒤져 마실 거를 찾아보았다. 마실 거는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글로브박스를 열었다. 자동차 등록증만 떡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아홉시 십오분이었다. 나는 면접 장소도 확인하고 물도 마실 겸 일 층으로 올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조수석 의자에 걸쳐 놓은 상의를 어깨에 둘러메고 차 문을 열었다.
  지하 삼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두 개의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왼쪽 엘리베이터는 고장이란 종이가 붙어 있었고 오른쪽 엘리베이터는 숫자 삼십이 이십구로 바뀌고 있었다. 갈증이 심했기에 화물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화물 엘리베이터는 공사장 인부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반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했다. 아직도 십오층에 머물러 있었다. 전 직장 거북이 엘리베이터랑 비슷한 속도를 보였다. 열시 면접 장소는 삼십층, 십 분 전 도착을 위해서는 여유를 가지고 엘리베이터에 탑승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나 해서 아홉시 사십분에 알람을 맞춰놓았다.
나는 원래 일층을 가려고 했다. 하지만 누가 눌러 놨는지 지하 일층에서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편의점이 보여 지하 일층에서 내렸다. 편의점으로 들어가 일 점 오 리터 생수를 골랐다. 오백 리터로는 갈증을 해소하지 못할 거 같았다. 계산을 마치고 의자에 몸을 기대 생수를 들이부었다. 거친 숨소리를 내며 입 주위에 묻은 물기를 털어냈다. 아침의 숙취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화장실에서 간단히 소변을 보고 머리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크게 숨을 한번 들이켰다.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아홉시 사십분을 알리는 알람 소리였다.
  지하 일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삽십 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아홉시 오십분까지 면접 장소에 도착해야 했다. 물을 마신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십오층에서 잠시 멈추었고 휴대폰 시계는 아홉시 사십일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칠층에서 또 한 번 멈추었다. 면접 대기 시간에 늦을 것 만 같은 초조한 생각이 들어 화물 엘리베이터로 몸을 옮겼다. 아까처럼 인부들이 짐을 옮기고 있었다. 다시 일반 엘리베이터로 이동했다. 일 층에서 B1로 숫자가 바뀌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삼십 숫자에 버튼을 눌렀다. 아홉시 사십 삼분이었다. 제발 삼십층까지 한 번에 갔으면 했지만. 엘리베이터는 일층에서 멈추었다. 닫힘 버튼을 계속 눌렀다. 왜 이리 문이 더디게 닫히는지 원망스러웠다.
엘리베이터 문이 1/3 정도 닫히고 있을 때 멀리서 “잠시만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연배도 나와 비슷해 보였고 무엇보다 급박해 보였다. 나랑 열시 면접을 같이 보는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더욱더 빠른 속도로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눌렀다. 2/3 정도 닫혔을 때 그 사람은 넘어졌다. 넘어진 남자 손 위로 ‘우민 건설에 입사하게 되면’ 글자가 적힌 종이가 보였다. 넘어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엘리베이터 문이 완전히 닫히고 있었다. 닫힌 엘리베이터 문으로 반사된 나의 모습이 보였다. 입고리가 살짝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삼십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우민건설 명패가 보였다. 명패 위로 시계가 있었고 아홉시 사십 팔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이십구층부터 지하 삼층까지 한 번씩 다 눌러 놓았다. 총 서른 세번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면접 장소로 이동하며 생각했다. 삼년 전 소방대원들과 함께 할아버지 몸에 붙은 불을 끄던 사람이 내가 맞는지 씁쓸했다. 나 자신이 실망스러워 고개가 떨궈졌다. 그러나 나는 아침에 나누었던 아내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동진이의 피아노 레슨비가 생각났고 동희의 영어캠프 등록금이 생각났다. 자꾸 수그러드는 몸을 애써 펴고 우민건설 출입문을 행해 걸어갔다. 나의 등 뒤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이십구 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문이 닫힙니다.
  이십팔 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문이 닫힙니다.
  이십칠 층입니다. 문이 열립니다. 문이 닫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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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당선작 심사평


  제37차 <창작콘테스트> 동상은 소설부문 최영두 씨의 「면접」을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소설가 김영찬 / 소설가 김충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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