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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콘테스트> 제12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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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 한국인]이 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고자 분발하는 젊은 영혼들의 순수 문학 창작의욕을 북돋기 위해 기획한 <창작콘테스트>가 제12차를 맞았다. 이번 제12차 공모에서도 금상에 해당하는 작품을 선정할 수 없었음에 유감을 표한다.
  [월간문학 한국인]<창작콘테스트>는 작가로서의 무궁한 필력이나 완벽한 전문성을 하나하나 따져 시상하는 그런 대단한 문학상이 아니다. 오로지 전문작가가 되기만을 꿈꾸어온 예비작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다소 흠결이 있더라도 치열한 작가정신과 독특하고도 개성있는 표현,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따져 우열을 가릴 뿐이다. 따라서 설혹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 가능성을 보아 당선작을 뽑을 뿐임으로 문학상으로서의 권위를 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할 것이다.
  이번 응모자 또한 모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을 터이고 나름의 재능을 발휘하였다고 보여지지만, 상당수의 작품들은 여전히 진부한 낱말들의 사용과 구태의연한 표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점이 아쉽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그간 겪어온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에 의해 산고를 겪듯, 그 누구도 쓰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문체와 어법, 시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이번 <창작콘테스트> 제12차 공모에 참여해주신 작가 여러분들, 그리고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 창작을 자신의 운명으로 택하려하는 모든 분들께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기원하며 각별한 감사와 격려의 뜻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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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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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부문





이상향
엄수현

 


  눈을 뜨니 흰색의 천장이 보인다. 재빨리 눈을 다시 감고 방금 전의 이미지를 떠올려 본다. 썰물이 스치고 간 모래사장처럼 기억에는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속으로 욕을 내뱉은 후 몸을 일으킨다. 결국 오늘도 꿈을 꾸지 못했다. 그 꿈을 꾸기 위해 바쳤던 어제 하루의 노력도 무의미하게 지나가버린 셈이다. 나는 머리맡에 있는 작은 수첩과 펜을 든다. 그리고는 어제의 날짜 밑에 크게 X표시를 한다. 두 개의 선이 교차하는 지점이 오늘따라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꿈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한 달전부터였다. 회사에서 명사를 초청한 강연이 열렸고 나는 반강제적으로 그 곳에 참석했다. 머리가 거의 벗어진 중년의 남자 하나가 <현실에서 찾는 즐거움>이라는 주제로 이야기했다. 그는 우리가 발딛고 있는 현실 안에, 아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색다른 즐거움이 많이 있다고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대부분의 방법이란 시중에 나온 흔한 자기계발서에 실려 있을 법한 상투적인 내용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고리타분함을 느끼며 좌석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끝이 없는 지루함의 능선을 건너며 내 기억 속에 남은 유일한 내용은 꿈을 기록해 보라는 말 하나 뿐이었다.

- 꿈 일기를 써가는 것은 – 실질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수면의 시간에, 지금과는 다른 어떤 삶을 살아볼 수 있다는, 일종의 환상성이라는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를 통해 느낄 수 있는 감정들 역시 색다른 즐거움이지요.

  그렇긴 했다. 기억나는 꿈은 많이 없었지만 적어도 그 꿈들은 내가 살아가는 현실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꿈 속의 나는 현실에서의 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상에 묶여있던 사람이 즉흥적으로 여행을 떠나 먼 타지로 떠나고, 그 이방인으로서의 경험과 감정을 기억해 두었다가 먼 후일에 과거형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자취를 뒤돌아보며 즐거움을 느끼듯, 나도 꿈을 기록함으로써 그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기록한 꿈들은 별 볼일 없는 개꿈들이었다. 그저 내가 코끼리를 타고 밀림을 지나고 있다거나,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개다리춤을 추는 그런 꿈이 전부였다. 그리고 일기를 시작한지 삼 주가 지난 저번 주에 그 꿈이 찾아왔다.

  아주 긴 계단이 있다. 나는 그 계단을 기계처럼 올라가고 있다. 계단의 꼭대기에는 다른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삼 분의 일 정도 되는 지점에서 갑자기 처음 보는 여자가 나타나 길을 막는다. 올라가시면 안 됩니다. 나는 그녀를 무시한다. 그 여자는 허무할만큼 쉽게 길을 비킨다. 계단의 중간에 다다르자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눈이 가느다란 남자가 나타난다. 그 역시 올라갈 수 없다며 길을 막는다. 나는 계단의 꼭대기에 반드시 도달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남자를 옆으로 밀쳐낸다. 밀쳐진 남자는 층계의 언저리에 가만히 서 있다. 몇 걸음을 더 올라가다가 뒤돌아 보니 남자는 사라지고 없다. 계단의 끝에 다다르자 다른 남자가 나타나 길을 막는다. 나는 그 남자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든다. 그는 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들어가면 안 돼. 하나의 내가 또다른 나를 잡아끈다.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달려가서 문을 연다. 문을 여니 내가 밟아온 수많은 계단들이 모두 사라진다. 그리고 문의 뒤에
  한 여자의 뒷모습이 있다. 나는 아, 하고 짧은 숨을 내뱉는다. 소리를 들은 여자가 뒤를 돌아본다. 그녀는 놀란 눈치다. 시간이 느려진 듯한 정적이 흐른 후 그녀가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녀는 나를 향해 한 발자국씩 걸어온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진다. 여자의 두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그 눈동자에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의 수면같은 공간감이 느껴진다. 

  그 꿈을 꾼 아침 나는 회사에 지각을 했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나를 부장이 경멸 섞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는 나를 구석에 있는 정비실로 부른다. 회사의 일원으로서 지녀야 할 책임감과 직업 의식, 올해로 쉰이 다 되어가는 주름많은 부장의 얼굴은 그것들에 대해 설파한다. 나는 조용히 손을 모으고 듣고만 있는다. 부장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나에게 대답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장마 기간 내내 막아두었다가 마침내 터뜨린 둑처럼 할 말을 모두 토해낸 부장은, 오늘도 한 건의 결함을 지적해 주었다는 데에서 오는 우월감에 도취된 발걸음으로 자리에 돌아간다. 그는 등받이를 한껏 뒤로 젖히며 아, 하는 신음을 낸다. 부장이 무엇이라 말하는 입모양이 언뜻 보인다. 주변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한 번다보더니 낄낄거린다. 나는 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떠올려 보지만 이내 지워 버리고 만다. 나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를 언청이라고 부른다. 인중 바로 밑을 기점으로 두 조각으로 나뉘어진 윗입술.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으레 나의 입술을 가장 먼저 응시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나는 당신의 결점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호의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눈동자에서 연민의 가면을 쓴 우월감과 옅은 안도감을 발견하고는 했다. 당신은 언청이로군요. 나는 언청이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꺼이 당신을 동정해 주겠습니다. 그들의 눈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했다. 
  물론 내가 처음부터 언청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육학년까지 나의 주변 사람들은 나의 입술 모양을 순수한 마음으로 신기해 했다. 주헌이는 윗입술이 두 개야. 만화영화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표식 같은 건가봐. 그러던 육학년의 어느 날 읽기 시간에, 교과서에서 언청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지문 옆에 작게 쓰인 <뜻풀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입술이나 입천장이 태어날 때부터 비정상적으로 갈라져 있는 사람. 담임 선생은 이 뜻을 읽어주고난 후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당혹감이 묻어 있었다. 교실의 몇몇 아이들이 교과서에서 눈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수많은 눈동자가 내 입술을 응시하고 있음을 느낀다. 지금에서야 나는 그 당시 친구들의 눈빛이, 지금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흔히 짓는 표정의 눈빛과 비슷하다는 것을 안다. 그 후로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영웅의 표식을 지닌 만화 주인공이 아닌 언청이가 되었다. 

  삶의 순간 순간마다 나는 몇 개의 어휘(語彙)들을 잃어갔다. 내가 말을 할 때마다 사람들이 나를 보는 시선은 더 강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 시선을 감내할 정도로 충분히 강하지 못했다. 나는 정확한 말을 하지 못했다. 입술의 모양 때문에 나의 발음은 쉽게 뭉개지거나 어눌해졌다. 특히 입술을 붙였다 떼며 발음하는 소리들 - ㅁ, ㅂ, ㅍ 등의 자음을 발음할 때마다 내 윗입술 사이로는 바람 새는 소리가 섞여 나왔다. 그 소리는 마치 추수가 끝난 들판에 몇 개 남지 않은 갈대들 사이로 부는 바람의 소리처럼 쓸쓸했다. 아빠, 엄마라는 말을 들었을 나의 부모님도, 바로 그 쓸쓸함 때문에 나를 버렸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간이 지나고 내가 커갈수록, 보통의 소리와는 너무도 이질적인 나의 언어를 듣는 사람들은 그 특유의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곤 했다. 나는 그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말을 줄여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 지금 회사에서 나에게 사람을 대하는 일을 맡기지 않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대면이 필요하거나 대화가 필요한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청소나 문서 작성, 전달 등의 기본적인 일을 도맡아 했다. 잡일이나 육체적 노동에 불려가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나는 어떤 대우를 받아도 묵묵히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이 회사가 나를 채용한 이유일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365일을 일해도 단 한마디의 불평을 하지 않는 기계처럼 나는 일을 했고 삶을 살았다. 
  정비실에서 자리로 돌아온 나는 모니터 앞에 앉아있다가 문서 파일을 연다. 오늘 정리해야 할 자료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파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침에 꾸었던 꿈의 잔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나를 째려보는 부장의 시선이 느껴진다. 부장은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다. 나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린다. 모니터의 활자들 위로, 가느다랗고 날이 선 부장의 눈과 대비되는, 깊은 호수를 닮은 눈동자 하나가 떠오른다. 그 형상은 마치 먼 과거로부터 온 것 같다. 그녀는 왜, 오늘 나의 꿈에, 나타났던 것일까. 

  그녀는 내가 열여섯 살일때 나의 반으로 전학을 왔다. 혜윤이라고 해. 어깨 아래까지 오는 숱많은 생머리에, 흰 피부와 큰 눈을 가진 아이였다. 담임은 비어있는 내 옆자리로 새로운 전학생을 앉혔다. 몇몇 남자아이들이 우우, 하는 소리를 냈다. 
  그 때쯤의 나는 많은 어휘들을 잃어버린 아이였다. 그래서 그녀가 옆에 앉은 후에도 별 말이 없이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 그 아이는 먼저 말을 걸어왔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간신히 응, 안녕이라고 대답한다. 그 아이의 깊은 눈동자가 나의 윗입술을 잠시 응시한다. 나는 그 익숙한 시선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그러나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서 나는 이전까지 누구의 눈에서도 본 적이 없는 깊이감을 느낀다. 그건 마치 깊은 호수의 고요한 수면과 닮아있어서, 감히 그 안에 무엇이 있다고 읽어낼 수가 없었다. 나는 사람들의 눈동자를 보면서 그 이면에 있는 우월성이나 연민을 어렵지 않게 찾아내곤 했지만 혜윤의 눈동자 이면에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나는 이 아이가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나를 이름으로 불러준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주헌아. 중학교로 올라온 아이들은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마치 이름으로 친근하게 나를 부르면 윗입술이 갈라지는 벌이라도 받는 것처럼 그들은 나를 야, 혹은 저기, 등의 추상화된 명사로 불렀다. 눈이 찢어진 한 남자 아이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나를 청아- 라고 부르며 낄낄거리곤 했다. 그 청아- 라는 호칭이 언청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다는 것을 아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혜윤은 나를 주헌이라고 불렀다. 혜윤은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깊은 눈동자처럼, 그녀는 쉽게 시끄러워지거나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대부분 잔잔했다. 그래서일지는 몰라도 나는 주헌아, 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소리를 발음하는 혜윤의 입술을 바라보곤 했다. 나의 흉한 윗입술과는 비교할 수 없이 깨끗하고 예뻤다. 나는 그 무결한 입술 앞에서, 어눌하고 뭉개진 언어밖에 뱉어낼 수 없는 나의 입이 처음으로 슬퍼졌다. 나는 그 입술을,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던 호수같은 눈동자를 언제부터인가 동경하고 있었던 것 같다. 

  체육대회가 다가오자 담임은 우리 학급이 전통무용 공연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두 명의 남녀가 짝을 지어서 연습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시선을 회피하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에게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심한 무례라는 것을, 그래서 마지막 남은 사람과 불가피하게 짝을 이루어야 하는 순간까지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눈이 찢어진 남자아이와 그 무리들이 저들끼리 웃으며 내쪽을 곁눈질했다. 아마도 그들 중 한 사람이 와서 혜윤을 데려가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옆에서 혜윤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면 같이 할래. 나는 환청을 들은 사람처럼 멍하니 혜윤을 바라보았다. 말이 생각을 거치지 않고 으응-하고 튀어나왔다. 과연 얼마 후 눈이 찢어진 아이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 나랑 하자.
- 미안. 먼저 약속한 사람이 있어.
- 누군데?
  그녀가 내쪽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 아.
  찢어진 눈에 조소의 빛이 어리는 것을 나는 본다. 그는 뒤돌아 자신의 무리가 있는 쪽으로 간다. 무리는 나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짓고 있다. 혜윤이 쉬는 시간에 자리를 비우자 무리 중 몇 명이 다가왔다. 
- 청아, 출세했다.
- 아 이 새끼가 눈치가 없네, 참.
  그들은 내 뒤통수를 툭툭 건드린다. 이윽고 찢어진 눈이 내 앞으로 걸어온다. 그는 내 턱을 몇번 툭, 툭 들어올리더니
- 좋다.
  하고 내 뺨을 한 대 쳤다. 내뱉고 싶은 말이 떠오르지만 나는 이내 지워버리고 만다. 몇년동안 살아온 언청이로서의 삶의 관성은 나에게 말하지 말것을 요구했다. 더 큰 비웃음을 살 뿐이야. 조용히 넘겨버려. 나는 그 시선들 사이에서 차마 나의 언어를 말하지 못한다. 

  우리는 특수 제작한 의상을 입어야 했다. 또래 아이들보다 조금 조숙했던 가슴과 조금 더 길었던 다리 때문인지, 의상을 입은 혜윤은 그녀의 눈만큼이나 청아해 보였다. 두 명이서 추는 춤이었기 때문에 서로의 손을 잡아야 하는 동작이 종종 있었다. 이성의 손을 잡아본 적이 아주 오래된 나였다. 설령 누군가와 손을 잡아야 하는 순간에도 검지손가락이나 새끼손가락 끝부분을 걸치는 것이 고작이었고 그마저도 상대 여자 아이의, 마치 더듬이가 팔십 개쯤 달린 풍뎅이를 만지는 듯한 표정을 견뎌내야만 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혜윤은 언제나 그랬듯, 의미를 알 수 없는 깊은 눈동자로 나를 보며 손을 내민다. 나는 천천히 내 못생긴 작은 손을 앞으로 뻗는다. 혜윤의 눈이, 하얀 천으로 덮인 가슴의 곡선이, 여러 개의 천으로 감추어진 얇은 허리가,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나는 이상향(理想鄕)에 닿은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다시 일 주일 전. 부장이 사원들을 사무실 한 쪽 벽으로 불러모은다. 다음주 목요일에 회식이 있다고 했다.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최대한의 인원이 참석하기를 권한다는 것. 나는 그것이 권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명히 알고 있다. 누군가가 2차도 있습니까, 하고 능청스레 묻는다. 돌아보니 <찬>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능글맞게 미소짓고 있다. 부장은 호탕하게 웃는다. 그 날카로운 눈매의 끝에 주름이 새겨진다. 사원들은 모두 참석하겠다는 말을 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온다. 나는 인터넷을 열고, 자신이 꾸고 싶은 꿈을 꾸는 방법이 있는지에 대해 찾아본다. 

  나의 삶에서 혜윤은 하나의 이상향이었다. 나는 혜윤 앞에서 말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은 혜윤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조잡하고 뭉개져버린 언어의 파편들을 어눌하게나마 뱉어냈다. 그 눈동자는 다른 이의 눈과는 다르게 나를 편하게 했다. 혜윤은 나의 언어로 소통하기에 무리가 없던, 심지어는 조금의 공감마저 느끼게 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혜윤의 언어. 혜윤은 정확한 발음을 구사했다. 또박또박한 발음과 그 발음을 내뱉는 도톰한 입술을 볼 때마다, 나는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매료되곤 했다. 나의 갈라진 윗입술과는 달리, 하나의 음절을 말할 때마다 그 음절에 가장 적합한 모양으로 바뀌어가는 미적 완결성이 그녀에게는 있었고 나는 그 속에서 이상향을 만났을 때 느낄 법한 행복을 느꼈다.

  이상향을 만난 것이 나에게 큰 의미였고 행복이었던 이유는, 그만큼 나의 현실이 이상의 대척점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반증이기도 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옛날, 부모라는 사람들이 나를 버린 이후로 나는 서울 변두리에 있는 <화합의 집>이라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처음에 그곳의 어른들은 나의 부모가 돈을 벌기 위해 먼 곳으로 떠났다고 했다. 몇년 지나지 않아 나는 부모가 나를 버렸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나는 내가 버려진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유 없이 행해지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고, 그렇기에 굳이 모든 일의 이유를 찾아내려는 것은 허망하다는 사실을 알 정도로 나는 자라 있었다. 
  <화합의 집>은 아주 높은 곳에 있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백 개가 넘는 계단을 올라가야만 했다. 역설적이게도 그 안에서는 항상 불화가 가득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쉽게 윽박지르거나 구타를 가했고 아이들은 2주에 한 번 꼴로 그곳에서 탈출해 버렸다. 몇은 다시 잡혀 돌아왔고 몇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 속에서 말을 아끼는 법을 배웠다. 나는 중고등학교를 모두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수많은 울음과 수많은 공포가 청소년의 나를 감싸왔다. 혜윤은 그런 나에게 다가온, 가까이에서 만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이상향이었다. 

  졸업이 가까워지면서 고등학교 배정 결과가 나왔다. 혜윤과 나는 멀리 떨어진,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가게 되었다. 긴 겨울방학이 지나고 봄의 문턱 즈음 해서 열린 졸업식 날에 나는 <화합의 집>에 단 하나밖에 없는 카메라를 가져갔다. 
- 멋지다.
  그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혜윤은 말했다. 그날따라 혜윤의 긴 머리가, 약간의 화장기를 품은 눈이, 옅은 분홍색으로 빛나는 입술이 더 선명해 보였다. 담임은 나의 카메라로 헤윤과 나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혜윤이 나의 왼팔에 팔짱을 꼈다. 왼팔에 혜윤의 가슴이 닿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 연락해.
  그녀는 품에서 수첩을 꺼내 한 장을 뜯는다. 그리고는 무엇을 적어 준다. 나는 그것을 두번 접어서 바지 오른쪽 주머니에 넣는다. 아침만 해도 맑게 개어있던 하늘은, 졸업식이 끝나가는 낮 즈음 해서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내가 <화합의 집>근처까지 가는 버스를 타자마자 미친듯한 폭우를 쏟아내리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에는 없었는데, 하여튼 요즘 기상청 개새끼덜 말은 맞는 게 없어, 라고 기사와 승객들이 불평을 했다. 

  <화합의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까마득했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비는 어떻게든 자신을 피해보려는 한 소년을 능욕하기라도 하듯, 나의 머리카락부터 신발 속까지 모두 적셨다. 물을 잔뜩 머금은 옷이 마치 납을 매달아놓은 것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계단의 중점에서 나는 발을 헛디뎌 계단의 모서리를 밟았다. 몸이 앞으로 쓰러지면서,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바닥을 짚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내 손에 있던 카메라가 사라진 것을 느낀다. 나와 혜윤의 모습을 품고 있는 카메라는 이제 지뢰를 밟은 전차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산산조각이 나 있다. 필름은 없어져 있다. 미처 계단에 착지하지 못한 부품들이 계단 난간 너머에 있는 경사를 타고 아득한 밑으로 굴러가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그날 <화합의 집> 원장에게 뺨을 스무 대 맞았다. 터져버려 피가 흘러내리는 윗입술을 휴지로 닦아내면서 나는 주머니에 있던 쪽지 생각을 한다. 혜윤이 마지막으로 남겨둔 그녀의 자취는 이제 빗물에 모두 번져버린 하나의 자국에 지나지 않아 있었다. 

  혜윤은 그렇게 추상적인 과거의 기억으로만 남겨졌다. 점차 굳어가는 석고 안에 있는 철사처럼, 한때 내 삶을 지탱했던 이상향은 현실이라는 덩어리에 묻혀 들어갔고 곧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후 고등학교로 진학한 나는 이름없는 대학교에 무난하게 진학했고,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왔다. 하지만 사회는 말 못하는 언청이를 쉽게 받아들일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스물여섯 번의 시도 끝에 나를 받아준 것이 지금의 회사였다. 나는 마침내 작은 성공이나마 이루었다면 스스로를 위안했다. 하지만 세상은, 불행에는 더없이 관대했지만 행복을 누리는 데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만큼의 대가를 요구했다. 부장은 나를 고용해 준 것이 대단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고 끊임없이 나에게 상기시켰다. 나는 부장에게 많은 것을 바쳐야 했다. 돈과 시간, 포장지에 쌓인 그 무엇, 자존심, 개인으로서의 사생활, 그리고 결코 보이고 싶지 않은 가장 은밀한 치부까지 드러내야 했다. 이게 현실이야, 하고 나는 무감각하게 생각했다. 
  십 년만에 현실이라는 두터운 막을 뚫고 저번주의 꿈에서 나타난 이상향은, 지금 나의 현실에서 거의 유일한 빛줄기였다. 인터넷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꿈이라는 것은 그 하루, 혹은 그 전날 정도부터 기억에 남아있던 파편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일종의 환상입니다. 꾸고싶은 꿈을 꾸는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전날에 그 생각을 많이 떠올려보면 그 이미지가 꿈에 나올 확률을 높일 수는 있지 않을까요. 
  그 후부터 일주일동안 나는 하루의 절반 정도 혜윤을 떠올렸다. 아주 먼 기억 속에 있는 사람이었고, 졸업앨범도 어디에선가 잃어버렸기 때문에 온전히 나의 상상으로만 이루어지는 회상이었지만 나는 행복했다. 그러나 지금 일주일이 지나도록 혜윤의 꿈을 꾸지 못하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나는 슬슬 몸을 일으켜 옷을 입고 출근을 한다. 

  사무실이 시끄럽다. 승진 예정자 명단이 올라온 모양이었다. 역시 나의 이름은 없다. 나는 바람에 쓸려가는 낙엽이라도 본 무심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는다. <찬>이 다음달에 자신이 승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시끄럽게 떠벌리고 다닌다. 나는 모니터를 켜고 바탕화면의 문서를 누른다. 단조로운 숫자들과 글자들이 나타난다. 몇 분동안 일을 해 보지만, 곧 꿈을 위한 회상에 빠져 버린다. 퇴근할 때쯤 해서 짐을 싸 일어섰다. 뒤에서 부장이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욕지거리를 하는 것이 들려왔다. 

  나는 어떤 도시에 있다. 처음 와 보는 도시인데도 길을 잘 찾아 걷고 있다. 도시에는 유리로 된 정육면체 모양의 구조물들이 있다. 몇몇 구조물 속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사람들이 들어있다. 그 무수한 구조물들 사이에서 회색빛을 띤 정육면체를 발견했다. 나는 그곳으로 걸어간다. 그 안에, 아주 깊은 호수의 수면같은 눈을 간직하고 있는 혜윤이 있다. 나는 그 정육면체를 열어서 그녀를 꺼내려 한다. 하지만 정육면체에는 열리는 부분이 없다. 나는 구조물의 표면을 두드려 본다. 안이 빈 것 같은 청아한 소리가 울린다. 혜윤은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 나좀 보지.
  출근 시간에서 삼십 분이나 지난 시점에 사무실로 들어가자마자 부장이 나를 부른다. 정비실로 들어가자마자 부장은 손에 들고 있던 종이 뭉치로 내 머리와 뺨을 후려쳤다. 
  - 두고 보지.
  부장은 그 말을 끝으로 자기 자리에 돌아간다. 나는 자리에 앉아 오늘의 문서를 꺼낸다. 총무과에 내야 할 서류다. 총무과 사무실로 가기 위해 복도로 나온다. 복도 한 쪽에 걸린 게시판에는 구조조정... 하는 프린트물이 걸려져 있다. 

  회식은 한 고기집에서 이루어졌다. 잘 들어가지 않는 술을 억지로 들이키다보니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부장과 <찬>은 벌써 어깨동무를 하고 신명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 2차를 가지.
  술이 얼큰하게 취한 부장이 상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말한다. 나는 그것이 권유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나는 일어나서 사람들을 뒤따라 나선다. 2차는 노래방에서 있을 것이라고 했다. <찬>이 나에게 다가와 마스크를 건넸다. 우리에게 안내된 방은 크기가 아주 큰 방이었다. 방을 안내해준 화장 짙은 여자와 부장은 아는 사이로 보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부장이 <무시로>를 부르기 시작한다. 나는 이 와중에도 혜윤을 떠올린다. 오늘 밤 꿈에도 그녀가 나타나주기를, 제발, 기원한다. 그러던 도중 문이 열리고
  여자들이 들어온다. 그리고 너무도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남자들의 옆에 가서 앉는다. 나는 당황하여 눈을 돌린다. 옆에서 <찬>과 부장은 이미 여자를 휘감고 능숙하게 입을 맞추고 있다. <찬>의 여자는 어두운 화장을 하고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다. 부장의 여자는 그의 뒤통수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곧 부장이 키스를 끝낸 이후 떼어낸 여자의 얼굴, 그곳에는 아주 익숙한, 깊은 호수의 수면을 닮은 눈동자가 있다. 눈동자 주위로는 싸구려 화장이 덕지덕지 묻어있다. 부장이 여자의 가슴을 더듬기 시작하자 나는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와 노래방 건물 밖으로 뛰쳐나온다. 나는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는 거리 구석진 곳으로 가서 구토를 한다. 웩 - 소리와 함께 눈이 액체로 차오른다. 잘못 본것이다.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얼마나 많겠는가. 나는 스스로를 다그친다. 하지만 나는 노래방으로 돌아갈 용기는 내지 못한다. 나는 택시를 잡아탄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집에 도착할 때 쯤에는 더욱 거세진다. 

  다음날 아침 나는 제 시간에 출근했다. 나는 어떤 꿈도 꾸지 않았다. 부장이 나를 불러, 두 문서를 각각 인사과와 정보과에 넘겨주라고 했다. 인사과로 가는 문서에는 극비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대개 정보과로 가는 문서는 사내 인터넷망으로 보내는데, 약간의 의아함을 품고 돌아서려는 찰나 나는 부장의 얼굴에 떠오르는 비웃음을 느낀다. 
  정보과는 복도 끝에 있었다. 복도 중간에는 큰 게시판이 있었다. 그 중에는 형광펜으로 칠해진 종이가 한 장 걸려 있었다. 나는 무심결에 종이를 바라보았다. 구조조정 대상 - 으로 시작하는 문서 중간에 - 김주헌, XX읍 영업부 재배치 - 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XX읍은 경상남도에 있다. 이게 현실이야. 나는 생각한다. 어젯밤 부장의 옆에 있던 여자가 떠오른다. 현실이야. 나는 혜윤이 추었던 전통 무용을 기억하려 애쓴다. 생각이 나지 않는다. 현실이라는 석고가 다시 이상향이라는 철사를 휘감고 굳어가고 있다. 나는 파쇄기 앞으로 간다. 두 서류를 파쇄기 속에 집어넣는다. 드르륵 - 하는 소리와 함께 문서들이 잘게 쪼개어져 사라진다. 돌아온 나를 사무실 사람들이,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나는 그날 밤도 꿈을 꾸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출근하니 사무실이 난장판이었다. 사람들이 부장 자리 근처에 모여 있었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야 -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놀라울 만큼 강한 손이 나의 뺨을 후려갈겼다. 나는 띵- 하는 충격을 느끼며 나가떨어졌다. 
- 은혜도 모르는 개새끼. 내가 어제 준 서류는 어디다 박아둔거지? 이 개같은 언청이 새끼를 살 방도 마련해 주었더니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는다 이거지?
  부장이 벌게진 얼굴로 소리친다. 헉, 하고 나는 명치 부분에 통증을 느낀다. 억센 구둣발이 나의 가슴을 차고 들어왔다. 사원들이 우수수 몰려든다. 나는 그날로 깔끔하게 회사를 나왔다. 내 윗입술은 터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몸을 눕힌다. 이제 현실에 더이상 남은 것이 없으니 오히려 홀가분했다. 막노동이라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침대에서 잠을 청한다. 하지만 그날따라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다. 집 근처에 있는 약국에서 수면제를 한 통 사서 들어온다. 한 알을 먹자 정신이 몽롱해진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 서있다. 별다를 것 없는 세상의 모습이다. 아니다, 보통의 현실과는 다르다. 계속 걷던 나는 그 차이를 눈치챈다. 세상은 흑백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사람들이 나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다. 나는 그들을 보고 있지만 그들의 눈에 나는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나는 어느 건물로 들어간다. 익숙한 복도와 방이 나온다. 며칠 전 부장과 갔던 노래방이 틀림없다. 입구에 거울이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언청이가 아니다. 나는 내가 들어갔던 방의 문을 연다. 
  방의 중앙에 누군가가 앉아있다. 화장으로 덮여 있지만 깊은 호수의 표면을 닮은 눈동자가, 싸구려 립스틱으로 덧칠되어 있지만 도톰하고 부드러운, 아주 정확한 발음을 내는 부드러운 입술이, 숱많은 생머리가 있다. 그녀는 꿈에서 많이 보아왔던 여자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녀는 나를 보지 못한다. 피곤한 얼굴로 앞만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입술에는 상처가 나 있고, 옷은 풀어헤쳐져 있다. 그때 뒤쪽에서 문이 열린다. 눈이 째진 남자가 들어온다. 그는 비열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리고 내 방의 흰 천장이 보인다. 

  우우우우, 나는 미친 사람처럼 괴성을 지르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나는 단 한가지 생각만을 하고 있다. 다시 잠들어야 한다. 꿈은 이어 꿀 수 있다. 혜윤을 구해내야 한다. 이제 나의 현실은 꿈이 전부다. 나는 책상 한 구석에 뒹굴고 있는 수면제 통을 찾아낸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낸다. 나는 남은 수면제를 모두 입에 털어넣고 삼킨다. 다시 눕는다.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한다.
  그녀의 입술 근처에 생긴 수많은 생채기들에 하나하나 입을 맞추고 싶다. 낯선 남자들에게 많이 바쳐졌을,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는 그녀의 예쁜 가슴을 어루만져 주고싶다. 다 풀어헤쳐진 옷의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주고 싶다. 꿈 속에서의 나는 언청이가 아니다. 꿈 속에서의 나는 말을 할 수 있다. 누구도 그녀에게 해 주지 못했던 말을 할 것이다. 내가 한 번도 말하지 못했던 언어들을 말할 것이다. 그녀는 들을 것이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볼 것이다. 
  흰색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저 앞으로, 춤을 추고 있는 당신의 뒷모습이 보인다. 어깨 밑까지 내려온 당신의 긴 머리가, 구름 위의 세계처럼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고 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간다. 세계에는 나와 당신밖에 없다. 정말

완벽한

이상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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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당선작 심사평


  제12차 <창작콘테스트> 은상에 이름을 올리게 된 작품은 엄수현 씨의 단편소설「이상향」이다. 
  엄수현 씨의 은상 당선을 축하한다.


소설가 김영찬 / 소설가 김충근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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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부문



준희
김민지




여자는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골까지 쨍한 악다구니가 텔레비전 스피커를 통해 집 안 전체에 퍼졌다. 재방송되고 있는 연속극은 막 절정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사랑의 정점과 권태기가 동시에 들어있는 드라마 한 편. 불타오르는 사랑을 외면할 수 없었던 남녀 한 쌍은 부모도 친구도 버리고 시골로 도망 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모두가 반대한 결혼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모두 두 편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볕이 좋고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오는 주말 오전. 저런 하극상을 보며 허송세월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싶다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내 몸과 꼭 같은 온도로 따뜻해진 소파 때문에 그랬고, 노곤해지는 기분이 좋아서 그랬다. 눈이 감기는 속도가 점점 느려지고,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시끄러운 소리들이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눈을 덮은 눈꺼풀 속으로, 더 짙은 어둠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멀리서 전화벨이 울렸다.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잠깐의 선잠이었지만 아주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난 듯 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부엌 식탁으로 다가갔다. 부엌에 막 들어섰을 때 즈음, 전화벨이 뚝 끊겼다. 몸을 부르르 떨어대던 전화기의 진동도 멎었다. 전화기를 들어 통화목록을 살펴보았다. 진 혜영. 이라는 고딕체 글씨가 목록 제일 위에 떠 있었다.
 
혜영은 내 대학동기였다. 나는 핸드폰을 들고 소파에 돌아가 앉았다. 인조가죽 아래에 겹겹이 쌓인 스펀지들이 새삼스레 딱딱하게 느껴졌다. 왜 전화를 걸었을까. 나는 혜영에게 다시 전화를 거는 것이 조금 꺼려졌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혜영은 이따금 내게 전화를 걸어 보호자 행세를 하곤 했다. 통화를 할 때 마다 열심히 살고 있냐고 채근하는 혜영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다시 전화를 걸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핸드폰 화면에 다시 혜영의 번호가 떴다.
전화를 받았다. 혜영은 글 쓰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얼결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내가 방해한 거야? 미안해. 전화 받을 수 있어?”
“응, 괜찮아. 말 해.”
“아, 별로 안 바쁘구나. 다행이다. 혹시 너 준희 기억해?”
준희는 혜영과 친한 대학 후배였다. 내가 준희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건 ‘길다’는 느낌뿐이었다. 목도 길었고, 손가락도 길었고, 말도 길었다. 나는 어렴풋한 준희의 실루엣을 떠올리며 무릎을 모아 앉았다. 추리닝 무릎부분에 조그마한 구멍이 나 있었다. 무릎에 잡힌 주름이 틈으로 보였다. 구멍으로 보이는 무릎을 긁으며 전화를 받았다. 혜영이와 이야기를 괜히 부산을 떨고 싶어진다.
“준희가 재작년부터 자취했던 건 알고 있지? 과 조교로 취직해서, 학교 근처 원룸에 살잖아. 과 선배가 쓰던 방 이어받았다고 내가 그랬었잖아.”
“응. 기억나.”
“근데 알고 보니까 거기 원룸 사장이 완전 또라이였대. 샤워하는 소리가 너무 크다, 여자가 라면을 너무 게걸스럽게 먹는 거 아니냐. 속옷빨래는 손으로 해라. 이러면서. 완전 변태 아니냐? 그래서 준희가 사생활침해 그만하라고 부탁했는데 주인이 갑자기 노발대발 화를 내면서 나가라그랬대.”
“응.”
나는 무릎을 긁던 손을 들어 반대쪽 귓구멍을 후볐다. 왠지 습한 것 같았다. 손톱 끝에 노란빛을 띄는 부스러기가 끼였다. 후, 귀지를 불어내자 혜영이 잘 듣고 있는 거냐며 물어왔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혜영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딱딱한 소파에 계속 앉아있으니 허리가 뻐근하게 저려왔다. 상체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혜영의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응, 응. 투박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내 목에서 난 소리가 맞을까. 잠시 내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근데 혜영아. 네가 전에 너희 집 혼자 살기엔 조금 넓다고 했었잖아.”
짙은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오기 시작했다. 발가락을 움츠려 보았지만, 나는 불안이 곧 현실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혜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준희가 두 주 동안 머물 곳이 없다고 전해왔다.
“그래서 말인데, 준희가 이 주일만 너희 집에서 살면 어떨까 싶어서. 네가 학교 근처에 살아서 준희가 출퇴근하기 편할 것 같더라고. 이건 그냥 내가 물어보는 거야. 부담 가질 필요 없어. 근데 어디든 구해지기만 하면 방세는 제대로 낼 거라더라. 너 요번에 책 낸 거 좀 안 팔렸잖아.”
사실이었다. 작년의 주말의 나였다면 영화를 보러 나갔을 테지만, 텔레비전 앞에서 드라마를 보는 게 내 유흥의 다였다. 영화 값이 너무 비싸졌다. 내게는 비싼 영화 값을 감당할 여유가 없었다.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혜영의 말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문화생활을 줄이고, 옷값을 줄였다. 전날 밤까지만 해도 식비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식탁에는 뜯어보기 두려워 쌓아둔 카드 고지서 더미가 있었고, 꼬박꼬박 써나가던 가계부는 이미 손을 놓은 지 오래였다.
“어쩔래? 빨리 정해줘야 준희가 다른데 구해보든 일주일 더 버티든 할 텐데.”
“언제 방 빼야 하는데?”
“다음 주 금요일 이었나 그럴걸.”
나는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쌀도 다 떨어져가고 있었고, 대중교통을 탈 돈이 아까워 외출도 줄였다. 준희, 라는 이름을 떠올렸을 때 쌉싸래한 느낌이 드는 것이 꺼림칙했지만 당장 필요한 돈은 메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언제 이사 오는데?‘
“준희한테 네 번호 보내놓을게. 그럼 글 열심히 써. 화이팅!”
전화가 끊겼다. 뭐라 단정 지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해야할까. 두려워야 할까. 설레어야 할까. 뭔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나니 별안간 배가 고파졌다. 텔레비전에서 격한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자 조연이 주인공 남자의 뺨을 때리는 장면에서 드라마는 끝났다. NG가 많이 났었는지 남자 배우의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있었다. 왜 항상,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저 모양일까.
라면이나 끓여먹을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화벨이 울려서 핸드폰을 확인 했는데, 모르는 번호였다. 무심코 끊으려다가 준희인가 싶어 전화를 받았다. 콧소리가 섞인 여자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해왔다.
“언니, 저 준희에요. 진짜 오랜만이에요! 룸메이트가 생기는 게 내내 꿈이었는데, 그게 언니라니 진짜 기분 좋은 거 있죠?”
준희는 잔뜩 흥분해서 자신이 공동생활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청소는 잘 하지만 남이 주변을 어질러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갈비찜을 한 시간 안에 만들 수 있고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는 삼십분 안에 끝낼 수 있다면서.
“이사는 다음 주 금요일에 하려구요. 언니 그날 시간 괜찮아요?”
“응. 나는 뭐 항상 집에 있지.”
“어, 그러면 시간도 제 맘대로 정해도 될까요?”
“그렇게 해. 정해지면 연락 줘.”
 
수요일 오후 한시. 준희의 짐이 도착하기로 한 시간이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서 현관문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활짝 열린 문 밖에서는 바람소리만 들렸다. 무거운 짐을 옮기는 소리나, 준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곧 2시가 되었다. 준희는 10통의 전화를 모두 받지 않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별안간 손바닥을 크게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일어나 보니, 생글생글 웃는 준희가 눈앞에 서 있었다. 이사가 시작된 것 이었다. 인부들은 신발을 신은채로 집 안을 성큼성큼 걸어 다녔다. 거실에 짐들을 내려놓고, 하나씩 준희의 방으로 옮겼다. 준희 역시 신발을 신고 들어와 거실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언니, 나 물 좀 주세요. 원룸 짐 싸면서 먼지를 너무 많이 마셨더니 목이 말라요.”
나는 서둘러 부엌으로 갔다. 컵 건조대에는 내 컵과 준희의 컵이 뒤섞여 정리되고 있었다. 나는 준희의 컵에 물을 담아 갖다 주었다. 준희는 한숨에 물을 마시고 소파에 등을 기대 눈을 감았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거실 바닥에 앉았다. 크고 작은 상자들이 끊임없이 거실에 쌓였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지친 기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끊임없이 짐을 들고 들어오는 인부들 사이를 비집고 준희의 방 앞으로 갔다. 인부들은 준희의 침대를 옮기고 있었다. 좁은 방문을 통과하기엔 너무 큰 침대였다. 이리저리 침대를 돌려보며 방 안으로 옮기려 하던 인부들은, 침대 모서리가 비닐 장판을 찢고 나서야 침대 틀을 분해하기 시작했다. 방 배치는 얼추 다 끝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방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침대,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책상, 남은 공간에 빈틈없이 서있는 책장. 제대로 발 디딜 틈이나 있을까 싶었다. 발가락을 세워 찢어진 장판 사이를 살살 긁어보았다. 엄지발톱만 한 구멍 사이로 시멘트의 거친 질감이 느껴졌다.
직원들은 자장면을 한 그릇씩 먹고 이사를 마무리했다. 집에 들어왔을 때처럼, 나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들은 커다란 박스들을 정리하고 현관에 깔아놨던 담요도 척척 접어 치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에 남아있는 사람은 나와 준희 둘 뿐이었다. 나는 집안 곳곳에 찍힌 발자국들을 따라 기어 다니며 걸레질을 했다. 이마에 난 땀이 손등으로 떨어졌다. 준희는 제 침대에 걸터앉아 책을 정리하고 있었다.
준희가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책을 정리하는 일이 꽤 즐거운 모양이었다. 나는 마지막 발자국을 다 지우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걸레냄새가 배인 손으로 땀을 닦았다. 온 몸에서 젖은 걸레 냄새가 풍겼고, 온 몸이 다 축축했다. 가볍게 샤워를 할 요량으로 화장실 문을 열었다. 변기 커버가 올라간 채 오줌자국이 여기저기 튀어 있었다. 검은 발자국들이 여기저기 찍혀있기도 했다. 나는 다리를 뻗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슬리퍼를 하나씩 신었다. 그리고 화장실 청소를 시작했다. 바닥에 찍힌 발자국을 지우고, 변기를 닦았다. 내 몸에 흐르는 게 물인지 땀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준희는 청소를 다 마칠 때 까지 콧노래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나는 옷을 벗고 물줄기 아래로 들어갔다. 정수리부터 따뜻한 물줄기가 흐르며 몸에 묻은 냄새를 씻어 내렸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다. 머리를 말리며 화장실과 마주본 준희의 방을 건너보았다. 준희는 기다렸다는 듯, 배가 고프다며 저녁을 먹자고 말했다. 나는 냉장고를 열어 반찬을 훑어보았다. 장조림, 멸치볶음, 숙주나물이 차례로 쌓여 있고, 전날 저녁에 한 밥이 담긴 밀폐용기가 제일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준희는 다른 반찬은 필요 없다며, 얼른 밥을 먹자고 말했다. 우리는 마주보고 앉아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준희의 벌린 입 사이로 장조림이 씹히며 형체가 변해가는 과정이 보였다. 묽어진 밥과 장조림이 뒤섞여 갈색의 덩어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평소 반찬을 잘 해 먹지 않는 나에게는 장조림 한 통 만드는 것이 꽤 큰 행사였다. 고기를 한 시간 가까이 삶고, 식히며 생기는 기름 층을 다 걷어내고, 메추리알은 따로 삶아 껍질을 다 벗겨내어 만든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차려놓은 상만 내려다보며 밥을 먹었다. 준희의 젓가락은 자꾸만 장조림으로 향했다. 자꾸만 줄어드는 장조림을 바라보며 아까워하지 말자고 나를 다독였다. 준희는 장조림 국물에 밥을 비비는 내 숟가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 했다는 듯 한 표정이었다.
“왜?”
“그냥, 언니도 편식을 하는구나 싶어서요. 언니는 고기만 주로 먹나봐요.”
대답 하고 싶지 않았다. 뭐라고 대꾸를 하면 날 선 대답이 튀어나갈 것 같았다. 밥을 씹으며 넘어오려는 말을 겨우 참았다. 고기 향과 간장 냄새가 풍겼다. 이따금 마늘이 씹히기도 했다. 준희는 멸치볶음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마늘이나 꽈리 고추는 쏙 빼고 대가리까지 성하게 달린 멸치만 골라 먹었다. 멸치볶음도 빠르게 줄어들어갔다. 나는 준희의 젓가락질이 점점 더 신경 쓰였다. 내가 밥을 제대로 씹고 있는지, 입에 마늘이 들어갔는지 메추리알이 들어갔는지 알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준희는 남은 밥을 싹싹 긁어 먹는 것으로 식사를 끝냈다.
 
밥을 다 먹은 준희는 식탁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준희의 시선은 의자 등받이에 걸린 내 카디건에 닿았다. 가을에 곧잘 입고 다니다가 날씨가 추워져 가끔 쓰레기를 버리러 내려갈 때 걸치곤 하는 것이었다.
“언니, 저 카디건 되게 예쁘네요.”
“어, 저거 쓰레기 버리러 갈 때 입는 거야.”
“아, 진짜요? 저 잠깐 봐도 될까요?”
나는 등에 깔린 카디건을 빼 준희에게 건넸다. 준희는 어깨에 옷을 걸쳐보더니 팔을 하나씩 끼웠다. 팔 부분은 팽팽하게 당겼고, 카디건의 끝부분은 어정쩡한 위치에서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했다. 준희는 카디건을 입은 제 모습을 내려다보더니 잘 어울린다며 손뼉을 쳤다. 나는 준희와 카디건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몸에 딱 달라붙은 비즈 장식은 어깨에서 돋아난 것 같았고, 팔은 옥죄어와 살이 볼록볼록 솟아나 있었다. 준희는 카디건을 벗지 않고 집 구경을 했다. 현관의 내 구두를 신어보더니 아무렇게나 벗어놓았고, 큰 맘 먹고 산 챙 모자를 써보더니 소파 아무데나 던져 놓았다.
나는 마지막 한 숟가락을 먹고 몸을 일으켰다. 준희는 거실에서 부엌까지 달려 들어와 상을 치웠다. 카디건 끝자락이 장조림 국물에 빠질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나는 그릇을 모아 개수대에 넣었다. 준희는 첫날밤을 같이 지내는 기념으로 맥주 한 잔 마시는 게 어떠냐고 물어왔다. 나는 저녁을 많이 먹어 배부르다고 했다. 배가 부르면 아파트 근처의 공원을 걷자고 물어오는 준희에게 걸레질을 하도 많이 했더니 무릎이 아프다고 말했다. 준희는 나와 무언가를 함께 하고 싶어 했다.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 노트북을 켜고 앉았다. 나는 실시간 검색어를 하나씩 검색해보며 준희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기를 기다렸다.
 
알람이 울렸다. 8시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문은 닫혀 있었고, 세찬 물줄기 소리가 들려왔다. 준희가 샤워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거실 소파에 앉아 준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선잠을 자다가 눈을 떴다. 10시 20분이었다. 소변이 마렵기 시작했다. 다리를 꼬고 앉아 화장실 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물소리는 좀처럼 끊이지 않았다. 죽죽 떨어지는 물줄기 소리를 듣고 있자니 배를 짓누르는 느낌이 점점 더 심해졌다. 10분이 흐르고, 또 10분이 더 흘러도 준희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나는 화장실로 다가가 노크를 했다. 물소리가 잠시 끊겼다.
“준희야, 나 화장실 가고 싶어서 그러는데 언제쯤 나와?”“저 이제 샴푸 씻어내는데요.”
“좀 빨리 하고 나와 주면 안 될까?”
“언니, 그냥 들어와서 누세요.”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허벅지에 힘을 주고 자꾸만 지금 상황을 곱씹었다. 내 집에서, 화장실을 가지 못하고 이렇게 오줌을 참고 있어야 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 준희만 없었어도 내가 이렇게 40분을 날릴 일은 없었다. 나는 다시 화장실로 가 문을 두드렸다. 주먹에 감정이 실려 문 두드리는 소리가 꽤 크게 들렸다. 물소리가 다시 끊겼다.
“언니, 그냥 들어오세요. 안 볼게요.”
“소리는 어쩌고.”
“제가 계속 물 틀고 있을게요. 진짜 신경 안 쓰이니까 그냥 들어오세요.”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문고리를 돌렸다. 뿌연 증기가 화장실 밖으로 몰려나왔다. 준희는 이제 린스를 바르고 있었다. 나는 준희의 몸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하며 바지를 내렸다. 변기 커버에 온통 물이 튀어 엉덩이가 축축해졌다. 그러다가 나를 쳐다보고 있던 준희와 눈이 잠깐 마주쳤다. 준희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물을 틀었다. 린스를 헹궈내며 물 아래에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엉덩이를 살짝 들어 휴지로 변기 커버에 묻은 물기를 닦아냈다. 일어서서 바지를 올리고 변기 뚜껑을 닫았다. 준희는 몸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몸에 거품을 칠하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씻으며 준희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정말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한 표정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증기를 뒤로 하고 문을 닫았다. 그 후로도, 물소리는 30분 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 들려왔다.
드라이어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준희가 콧노래를 부르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 틈새로 준희가 내는 소음이 스며들었다. 지금까지의 아침은 항상 조용했는데, 이젠 그렇지 않았다. 소변을 참아야 했고, 식사시간도 평화롭지 않았다. 원하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었다. 이어폰을 찾으려 몸을 일으켰을 때, 드라이기 소리가 뚝 끊겼다. 혜영은 여전히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머리를 빗으며 내 방을 기웃거렸다.
“왜?”
“손톱깎이 어디 있어요?”
“거실 텔레비전 앞에.”
준희는 다시 콧노래를 부르며 거실로 향했다. 경쾌한 듯 한 허밍은 온 집 안을 들쑤시고 다녔다. 이내 딱, 딱, 하고 손톱 깎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문득 고개를 들어 문 밖을 쳐다보았다. 왠지 정수리 쪽이 환한 느낌이 들었다. 방 맞은편의 화장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보였다. 문은 반 정도가 물에 젖은 채 활짝 열려있었고, 바닥은 물 범벅이었다. 엉킨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나는 바지를 걷어붙이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기를 틀어 머리카락을 수챗구멍으로 몰았다. 물이 튀어 바지에 자국이 생겼다. 준희의 밝은 머리카락은, 한 번에 수챗구멍으로 몰리지 않고 화장실 바닥을 떠돌았다. 나는 발로 바닥을 슥슥 밀어 머리카락을 모아 휴지로 훔쳤다. 준희는 화장실에 머리를 디밀고 손톱깎이를 변기통 위에다 대고 몇 번 흔들었다. 준희와 잠시 눈이 마주쳤다. 긴 눈매가 유령처럼 화장실에 잠시 머물렀다 밖으로 나갔다.
엄지손가락에 축축한 머리카락이 들러붙었다. 거머리 같기도 했고, 거미의 다리들이 서로 꼬여있는 것 같기도 했다. 여덟 개의 눈을 가진 거미를 떠올리자 소름이 돋았다. 손을 흐르는 물에 씻어 보아도 잘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다른 손으로 머리카락을 떼어 변기에 버렸다. 손을 깨끗하게 씻고 화장실을 나오려다가 다 닫히지 않은 선반을 발견했다. 선반 밖으로 드라이어기의 까만 전선이 선반 밖으로 툭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드라이어기를 꺼내 전선을 단정하게 감은 뒤, 선반에 넣고 화장실 불을 껐다. 발가락 사이에 머리카락 한 가닥이 끼여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다가 바닥에 떨어져있는 손톱깎이를 발견했다. 지렛대 부분을 접지 않아서 반달모양의 날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준희의 방으로 향했다. 자꾸만 손톱이 밟혔다. 발톱인 것 같기도 했다. 하얗게 각질이 낀 손톱 조각들은 눌린 것도 아니고 박힌 것도 아닌 상태로 발바닥에 붙어있었다. 손톱들은 레드카펫처럼 내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준희의 방. 나는 방문을 두드려 준희를 불러냈다. 준희는 문을 벌컥 열고 환하게 웃어보였다. 준희의 뒤로 보이는 방은 금방이라도 바퀴벌레가 기어 나올 것처럼 더러워 보였다. 하루 만에 저런 상태가 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멍하니 옷 더미를 쳐다보다가 준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얼굴은 참 말끔하게 생겼는데.
“준희야, 바닥에 손톱 떨어진 것 좀 치워줘.”
“네. 그럼 손톱 치우는 김에 청소기 한번 싹 돌릴게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괜찮아요. 안 그래도 한가했는데 제가 할게요.”
해맑게 웃고 있는 준희를 보고 있다가 그냥 뒤돌아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 이틀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마음 상하면 안 되지. 그냥 내가 너무 예민한 거야. 답답하게 막힌 것 같은 가슴을 두드리며 한숨을 쉬었다. 자꾸만 순진하게 웃는 준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선량한 원룸주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음씨 좋은 아줌마일까, 참을성 많은 아저씨일까. 깊고 굵게 자리 잡은 세 줄의 이마주름과, 축 쳐진 눈 꼬리, 둥근 코끝에 달린 깊은 인중, 가는 입술. 평생 화 한번 낸 적 없는 것처럼 생긴 사람이겠지. 아마 살면서 처음 화낸 대상이 준희일지도 몰라. 지금 첫날이라 눈치를 본다고 본 게 저런 걸까. 혜영이는 준희의 성격 어디가 마음에 든다는 걸까.
저번 일요일, 혜영의 전화를 받은 손이 간질거렸다. 한 대 때려달라고 설설 기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침 진동모드로 설정되었던 핸드폰도 짜증났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절대 혜영이의 전화를 받지 않겠어. 몇 번이고 후회를 하며 컴퓨터를 켰다. 영화를 봐야했다. 아니면 음악을 들어야 했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욕설을 참으려면 다른데 관심을 돌려야 했다. 뮤지컬 영화를 틀었다. 화면 속에 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단정한 원피스를 입은 소녀들이 뛰어다니며 경쾌한 노래를 불렀다. 턱을 괴고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멀리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소나무 향기가 풍겨왔다.
영화는 한없이 경쾌했다. 고난도 역경도 경쾌하고 긍정적인 자세로 모든 것을 이겨냈다, 서로 양보하고, 먼저 사과하고. 각자 배려했다. 마음씨 착한 등장인물들을 보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준희를 웃는 얼굴로 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영화 안의 사람들처럼, 모두 언젠가 지나갈 일로 대하면 되는 것이었다. 웃는 얼굴로 다시 영화에 집중했다. 모든 등장인물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극적인 화해 뒤에 흘리는 감동의 눈물이었다. 흐느끼는 소리와, 잔잔한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착한 감상에 젖어들었다.
별안간 바닥에 딱딱하고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귀신이 아니라면, 준희의 짓임이 틀림없었다. 짜증이 솟구쳤지만 웃는 얼굴로 대하자고 스스로와 약속한 뒤였다. 문을 열자 수납장에 넣어 놓은 것들, 소파 위에 쌓아두었던 신문들, 식탁 위에 올려놓았던 잡동사니들이 바닥 위에서 뒹굴고 있는것이 보였다. 나는 마스크를 낀 채 내 방으로 들어서는 준희를 붙잡았다.
“지금 뭐해?”
“청소기 돌리는 김에 대청소하려고요.”
“그래서 지금 하는 거라고?”
“네. 지금 딱 하고 싶어서요.”
“내 방에는 왜 들어가는데?”
“대청소잖아요. 온 집안을 싹 청소하는!”
나는 준희를 방 밖으로 밀어냈다.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도 준희는 내 방을 꼭 치워주고 싶다며 우겼다. 나는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준희를 피해 노트북과 핸드폰을 챙겨 거실로 나왔다. 발 디딜 틈이 없어 까치발을 들어야 했다. 하얗게 먼지가 앉은 소파를 대충 털어내고 앉았다. 겨우 다스려놓은 마음이 다시 흔들렸다. 준희는 콧노래를 부르며 내 책을 바닥에 다 흩어놓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이 책은 내가 좋아하는 책이고, 이 작가는 내가 싫어하는 작가라며 내게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나는 이어폰 틈으로 들어오는 준희의 목소리를 못들은 체 했다. 준희는 언니, 언니 하며 나를 몇 번 불러보다가 이내 포기했다.
콧노래 소리가 끊겼다.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방을 청소하러 들어간 것인지, 방을 구경하러 들어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화면에 시선을 집중하고 내 방으로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도, 준희가 혼잣말을 하는 소리도. 나는 노트북을 접고 방으로 다가갔다. 준희는 활짝 펼쳐진 책을 한 권 들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준희를 흔들어 깨웠다. 준희는 화들짝 놀라며 깨더니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아, 언니. 나 아직 피곤이 다 안 풀렸나 봐요. 낮잠 좀 자고 다시 치울게요.”
“네가 바닥에 다 흩어놓은 건 어쩌고?”
“좀 자고, 일어나서 싹 다 치울게요. 그냥 두세요.”
준희는 좀비처럼 일어나 제 방으로 갔다. 나는 엉망이 된 내 방을 둘러보았다. 거실과 부엌 청소는 준희에게 맡긴다 쳐도, 방 청소는 내가 해야만 했다. 작가별로 책을 모아 책장에 꽂았다. 팔과 손바닥에 먼지가 묻어났다. 텅텅 빈 책장과, 바닥을 가득 메운 책들. 사방이 조용했다. 아주 낮게,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책을 치웠다. 주말에 봤던 연속극이 기억났다. 귀가 울리도록 소리 지르는 사람들,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손을 날리는 주인공들.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며 재미를 느끼는 이유가 그거였구나.
책을 다 치우고 나니 바닥을 굴러다니는 먼지가 보였다. 책 위에 쌓여있던 먼지들이 방 안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손을 씻고 팔에 묻은 먼지를 털어낸 뒤 청소기를 꺼내러 거실로 나갔다. 거실도 엉망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잘 수납되어 있던 것들까지 죄 바닥에 내려와 있었다. 손에 묻은 물기를 대충 닦아내고 신문을 모아 소파 위에 쌓고, 약통을 정리해 수납함에 넣었다. 코로 먼지가 들어왔다. 금방 목이 칼칼해졌다. 어지르는 건 금방이어도, 치우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생각해보니 나는 3일 내내 청소를 해왔다. 이사를 하기 전날, 이사를 온 날, 그리고 이사 온 다음 날. 나는 등줄기에서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해가 다 저물어갈 때 쯤, 정리가 대충 끝이 났다. 준희는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발바닥에 밟히는 먼지들이 조금씩 사라졌다. 걸레로 바닥을 닦아야할 것 같았지만, 그러기에는 몸이 너무 피곤했다.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꽤 크게 느껴졌다. 푹 자고 있던 준희에게도 그랬는지, 어두운 방에서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이불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준희는 눈을 비비며 방 밖으로 나왔다. 나는 준희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계속 청소기를 돌렸다.
“언니, 왜 청소해요. 제가 한다니까.”
“됐어. 거의 다 했어. 너 피곤해 보이는데 다시 들어가서 자.”
“언니 아니에요. 청소기 제가 돌릴게요.”
나는 준희의 말을 무시하고 부엌으로 넘어갔다. 청소기 소음 때문에 못들은 체 할 생각이었다. 준희는 휘청거리며 거실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다시 병든 닭 마냥 졸기 시작했다. 나는 부엌을 마저 청소하고 청소기를 껐다. 발바닥에 먼지가 잔뜩 묻어있었다. 발을 씻지도 않고 방에 들어가 손에 잡히는 대로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지갑과 핸드폰을 챙겨 거실로 나갔다. 목을 한껏 꺾고 잠이든 준희를 깨웠다.
“나 어디 좀 나갔다 올게. 반찬 제대로 없으니까 뭐라도 시켜먹어.”
“1인분은 배달 안 될걸요? 언니 어디가요. 내가 김치찌개 해주려고 했는데.”
“그럼 2인분 시켜서 남겨. 나 나갈게.”
준희는 현관문을 나서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 하더니 신발장 문을 닫아버릴 뿐이었다. 굳게 닫힌 복도 창문 바깥으로 거센 바람이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찬 공기가 온몸에 달라붙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1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안을 울려대는 바람소리를 듣고 있는데, 혜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준희에게서 벗어나니 혜영도 반가웠다.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오늘 전화 빨리 받네. 맨날 전화 끊을까 말까 고민할 때쯤 받더니만.”
“핸드폰을 들고 있었어. 근데 전화 왜했어?”
“준희 때문에. 준희는 너랑 사는 거 좋고 편하대. 고작 이틀 살았는데 벌써 가족처럼 편하다네. 눈치 보며 살지 않아도 되고.”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목 끝까지 차올라 있던 준희의 흉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혜영은 내 눈치를 살피는 듯 했다. 혜영이에게 소리가 닿지 않게 조심하며 침을 삼켰다. 준희가 정말 좋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무슨 저런 애가 있냐고 화를 내야 할까. 혜영이도 준희가 어떤 아이인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준희를 내게 떠맡기기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할 뿐 일수도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입술을 떼었다. 혜영이를 떠보기 위해서였다.
“근데, 준희는 뒷손이 좀 없는 것 같던데.”
“그래도 시키면 다 하지 않아? 자기가 저질러 놓은 건 꼭 자기가 처리하고.”
“그래도 언제까지 내가 지적해주고 있을 수는 없는 거잖아.”
“너 또 예민하게 굴지. 그러니까 네 옆에 사람이 없는 거야. 준희만 한 애가 어디 있니?”
혜영이 예의 그 따박대는 말투로 어조를 바꾸었다. 나는 혜영이 내게 ‘피와 살이 되는’이야기를 해 주기 전에 선수를 쳐야 했다. 하지만 혜영의 말은 끊이지 않았다.
“보통사람 같았으면 이사 오자마자 짐 싸서 도망갔을걸. 아마 앞으로도 준희만큼 너한테 잘 맞춰주는 사람은 없을 거야. 걔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리고 너 성격 맞춰 주는 게 어디 쉬운 일이니?”
한숨을 쉬었다. 혜영은 나의 말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애써 모른 척 하고 있는것일지도 몰랐다. 혜영이의 경쾌한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노래를 부르는 듯 한 말투가 낮에 본 영화를 상기시켰다. 한없이 긍정적이고 이타적인 주인공들. 딱 혜영 같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앞치마를 펄럭이며 춤을 추는 여주인공과 수화기를 붙들고 재잘대는 혜영을 떠올렸다. 방정맞고 수다스러운 게 꼭 닮았다. 나는 묵묵히 걸으며 혜영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혜영은 그러니까, 하면서 지금까지 해온 말들을 정리하려 했다.
“그래서 말인데, 계속 같이 사는 건 어때?”
나는 별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전화를 끊었다. 화면이 어두워진 휴대폰에서 혜영이 하는 말이 아직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휴대폰 전원을 끄고 가방에 넣었다. 그래도 혜영의 목소리는 계속 귓전에서 아른거렸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번잡한 마음이 조금 사라질 것 같았다. 나는 내 앞을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고 마트에 가달라고 했다. 택시가 출발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동네 대형 마트에 도착했다. 저녁식사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라 사람이 많았다. 나는 카트를 뽑고 마트 안을 빙글빙글 돌아다녔다. 무료 시식 행사하는 것도 몇 개 집어먹고, 카트기에 토마토나 냉동만두같은 것들도 조금 담았다. 발바닥이 조금 아파온다고 생각 할 즈음에는 벌써 마트 문 닫을 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계산을 하러 가는 길에 있는 빵 코너 앞을 지나고 있는 중이었다. 하얀 두건을 머리에 쓴 종업원이 고구마 케이크를 반값으로 판다고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이미 배도 부르고, 조미료 향에 한껏 취한 사람들은 케이크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같은 말을 기계처럼 반복하는 종업원에게서 어떤 절박함이 묻어났다. 케이크를 팔지 못하는 것이 종업원 탓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파는 사람으로서의 책임감 같은 것일까. 나는 케이크 하나를 들어 보았다.
“이거 오늘 바로 안 먹어도 되고, 냉장고에 하루 이틀 넣어 놨다가 먹어도 괜찮아요. 반값 할 때 사 가요. 이 케이크 맛있어요.”
“하나 주세요.”
냉동만두와 토마토 옆에 고구마 케이크가 하나 놓였다. 집까지는 걸어갈 생각이었다. 시간을 확인하려 핸드폰을 들어보니 준희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와 있었다. 전화를 걸고 싶지는 않아 문자를 남겼다. 케이크를 사 갈 테니 포크와 앞 접시를 챙겨놓으라고. 만두와 토마토가 든 봉지와 케이크 상자를 각 각 한 손에 하나씩 쥐었다. 하루는 너무 길었고, 팔에 힘은 하나도 없었지만 앞으로 닥쳐올 일들을 생각하면 힘은 절로 솟아났다. 모든 것은 지나가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속으로 시시한 명언들을 중얼거렸다. 상자 안에 든 케이크가 자꾸만 기우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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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당선작 심사평


  제12차 <창작콘테스트> 은상에 이름을 올리게 된 작품은 김민지 씨의 단편소설「준희」이다. 
  김민지 씨의 은상 당선을 축하한다.



시인 김호철 / 시인 정은정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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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부문



■ 바람이 시킨 일
   - 김지섭


버스 차창 사이로 바람,
스민다 바람, 수풀을 섞어 여름을 차리고 있구나
 
차분한 아침, 얼굴을 감싸는 바람에
어른들의 말이 믿어지고
그 말들을 연습하며 어른들의 말을 믿게 된다
 
난 열심히지 않았던 거구나
후회를 버리면 바람, 넌 밀려가겠지
밀려서 밀려서 잡히지 않을 때쯤 넌
밀리고 밀려서 또 내게로 오겠지
 
오늘은 누군가의 말을 성실하게 들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역시 오월, 차창, 바람에 똑같이
썰물 몰려간 빈 집에 바람 기억 머물렀고
밀물 몰려와 찰박 쓸려갈 뻔 하였지만
 
오늘만큼은 자신의 탓이었음을 쑥스럽게 웃어 보이길,
이 역시 바람
 
 
 
■ 저녁노을이 당신의 얼굴 위로
   - 김지섭

 
세수를 마친 당신의 얼굴 위로 봄향이 지나갔다
복숭아를 닦아내던 손에 묻은 달풋한 냄새였다
 
당신은 복숭아를 좋아했다
지나간 사랑에 저녁놀이 서렸기 때문이다
봄이 하늘에 풀던 물감에 당신을 녹이면
말간 복숭아 빛이 번져가고 놀의 끝마저 파랬다
복숭아를 닮은 저녁에 당신의 어깨를 걸면
그 색은 곧 영원을 믿게 만드는 색이 되곤 했다 
 
그날의 풍경의 색이 깊어져
문득 당신은 서랍을 열어 파레트를 꺼낸다
굳은 물감들은 색마다 서로의 색을 묻히고 있다
서로에게 엉키던 시간들을 분홍빛으로 멈추어 놓았다
 
무른 복숭아를 깨물어 우르르 즙을 내어 당신에게로 가고 싶다

 
 
 
■ 혼자가 된 날
   - 김지섭

 
빵바구니에는 크로와상이 빗겨 놓여있다
누군가의 발, 그에 꼭 맞는 구두의 모양으로
 
울음 뒤 조금 짠 맛으로
버터의 그리운 향으로
겹겹이 애달은 슬픔으로
 
저 빵을 품 안에서 조금 더 구우면 알게 된다
가볍게만 느껴지던 빵의 그 미묘한 맛을
 
열일곱 층에 기억이 움직일 때마다
마음 벽면에 약간의 소금기가 맺히고
열일곱보다 짙은 버터의 향이 났다는 걸
 
소금의 결정이 저릿하고 버터가 숨을 쉴 때마다
아픔을 털어내어 조금씩 가벼워지고 정갈해졌다는 빵
 
비로소 혼자가 된 오늘에
오늘까지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는 걸
불이 꺼진 신발장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나는 너의 환영과 함께 해서 더욱 외로워졌다는 걸
 
너를 지우고 났을 때 알게 되었다
열일곱 층 기억을 간직한 가벼운 빵의 맛을
 
나 이제 고단한 신발을 벗어 이윽히 자유를 향한다

 
 
 
■ 달그림자의 밤, 깊다
   - 김지섭

 
사랑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사슴 한 마리가 샘물에 눈을 헹구듯
잔잔한 물기가 어리는 일이었다
 
이상하다 이미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사슴을 따라 잠시 너의 눈에 다녀왔으므로
너와 함께 너의 이름처럼 살고 싶어졌으므로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기에
얼굴에 한 줄 거미줄이 붙은 것처럼 미약한 기분으로
걸려 있어야겠다 나는 떼어져 나갈 것이므로
 
걸어둔 적이 없는데 너는 내게 오래된 달처럼 걸렸고
나는 네게 무게 없는 그림자를 기대었다
 
이상하다 너를 사랑하게 된 밤
하늘에 슬픔과 무관한 무수한 별이다
 
결국에 달그림자는 스러지는데― 그것과도 무관하게 수북이 별이다
 
 
 
■ 각자의 낮달의 말
   - 김지섭

 
속은 엉망이고 피부가 까슬한 날이면
엄마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말씀하셨다 
 
잠을 좀 자두거라
 
무성하게 자란 소음이 둥당거리는 밤
낮달처럼 그 말이 피어 오른다 거기 떠있다
잠들지 못하는 밤, 생각 한 편에 곤히 잠들어 있는 투명한 달
 
각자의 낮달의 말들이 거기에 있어주어 우리를 지속하게 했을 것
스러지지 않도록 우리를 투명하게 희석시켜 주었을 것
 
잠을 좀 자두었더라면 무언가는 달리 되었을까
평생을 어리석었는데 또 한 번 어리석다
 
낮달만 물끄러미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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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당선작 심사평


  제12차 <창작콘테스트> 동상은 시(詩)부문 김지섭 씨의「바람이 시킨 일」외 네 편의 시를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수필가 유미숙 / 수필가 정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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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당선자들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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