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콘테스트> 제32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by korean posted Dec 3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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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콘테스트> 제32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월간문학 한국인]이 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고자 분발하는 젊은 영혼들의 순수 문학 창작의욕을 북돋기 위해 기획한 <창작콘테스트>가 제32차 당선자를 발표한다. 
  [월간문학 한국인]<창작콘테스트>는 작가로서의 무궁한 필력이나 완벽한 전문성을 하나하나 따져 시상하는 그런 대단한 문학상이 아니다. 오로지 전문작가가 되기만을 꿈꾸어온 예비작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다소 흠결이 있더라도 치열한 작가정신과 독특하고도 개성있는 표현,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따져 우열을 가릴 뿐이다. 따라서 설혹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 가능성을 보아 당선작을 뽑을 뿐임으로 문학상으로서의 권위를 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할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그간 겪어온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에 의해 산고를 겪듯, 그 누구도 쓰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문체와 어법, 시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이번 <창작콘테스트> 제32차 공모에 참여해주신 작가 여러분들, 그리고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 창작을 자신의 운명으로 택하려하는 모든 분들께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기원하며 각별한 감사와 격려의 뜻을 전한다.








금상
*******************************************************************
시(詩)부문



■ 분실물을 찾습니다
   - 김희성


분실물센터에 버려진 것들을 볼 때면
가난뱅이의 견본과 고낭 난 텔레비전이 생각났다
사고사한 동생과 대출이 전부인 동창생
우리는 없는 채널 안에서도 서로의 사연을 밤새 뒤적였고
어림잡아도 10평뿐인 밤엔
주인공이 된 듯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었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어느 날
비눗방울로 나와 닮은 얼굴을 만들어 본 적이 있다
오른손잡이인 내가 오른손으로 만든 얼굴이
왼손으로 만든 얼굴보다 예쁘지 않을 때
나는 왜 이방인이 된 것 같았을까

밥벌이의 시간엔 과식은 죄라는 교훈과
자신만만한 표정이 필요했다
우리는 귀가시간도 잊은 채 자주 모였다
지구 건너편에 나와 닮은 얼굴을 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에 대해 떠들며
서로의 말마따나 겸허하게 행복을 받아 들였다
가끔은 독촉전화에 심장박동수가 빨라져
모욕적인 말을 스스럼없이 발설했고
새해다짐으로 순응을 되새기곤 했다
서툰 말주변은 자주 혓바늘이 되었다
어느 날은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었다며
성공학과 동기부여에 대해 설교했고
잃어버린 것들이 떠오르는 밤이면
너도나도 분실물센터를 찾았다

증명사진으로 기억된 얼굴들
웃어야 복이 온다는 말 뒤엔 많은 밤이 뒤따랐을 거야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이혼경력을 들먹이고 소주잔을 마주했다
날씨가 좋다는 말들로 전할 말이 가득해
입소문은 긴 시간 열차를 탔다
우리는 모두 닮아가는 중 이었다



■ 항구의 밤
   - 김희성


그리운 이들이 있어 내 이름은 바다의 편지야
갈매기들이 한 줌 끌어온 이야기에 기대
오늘도 두런두런 사연을 나누곤 해
매일 목마른 시간들에 노을을 한 움큼 삼키면
바다도 가끔은 절벽이 되어 항구를 적시곤 한단다
길지 않아도 바다만큼 푸르던 나날들
가로등처럼 비춰 환하게 꿈꿔온 시간들
어느덧 내 몸은 촉수가 되어
긴 시간 어부의 삶을 항해해 왔지

바다의 혀끝에 앉아 별들은 꽃을 피워 내
물과 가까워서 긴 시간 눈물을 적신 걸까
나는 부두 안에서 소금기 어린 이야기들을 건져 내지
항구의 밤에도 어둠은 깊어서
우리는 매일 파도를 피해 수없이 헤엄쳐 왔을 거야
오늘 밤엔 어떤 꿈이 하늘 높이 튀어 오를까
목적지 없이 흘러가는 바람의 귀에
물결은 반 페이지의 사연을 새기고 있어
일몰은 늘 방파제의 끝에서 가장 잘 보인단다
별들이 정박하고
그림자들이 등대 아래 모이면
우리는 이곳에서 가장 큰 숨을 들이쉬지
때론 거침없고 때론 자유롭게 드나들며
이 밤도 우리답게 그려두는 거야

저 멀리 바다의 이야기가 떠밀려 온다



■ 해녀 김해운씨의 바다 이야기
   - 김희성


3대째 해녀 집안인 김해운씨는 오늘도 거친 파도를 넘습니다
그녀가 사랑한 계절엔 어떤 이야기가 자라날까요
하루의 끝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보름달과
유일하게 집이 되어 주었던 바다
운명이라는 파도는
어쩌자고 숨이 되었는지 빗소리만 굵어집니다

휩쓸리듯 성큼 다가온 봄에도
나비는 하루 종일 바다 위를 날았고
그녀는 오랜 친구를 반기듯 바람을 타고 내렸죠
서로의 눈이 되어 헤엄치던 밤
그리운 인연들이 그물처럼 얽혀
긴 시간 그녀의 섬이 되어 주었던 걸까요
인생이라는 돌다리의 연속에서
바다는 해운 씨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긴 서사를 풀어냅니다
밥그릇 안에 수북이 담기는 숨들
힘을 다해 물결을 움켜쥐던 새벽도
울컥이듯 고요를 품습니다

해운 씨는 깊은 사연을 고백하듯 보초를 섭니다
바다가 쓸고 간 자리, 보금자리 없는 이들은
한바탕 기지개를 켜고 서로를 환영합니다
물장구를 치며 한평생 애물단지를 품어온 기억
서로 다른 보폭으로 물 위를 오가던 태양
가장 낮은 음역에서 환란하던 꿈들
휘몰아치는 것들은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는지
간밤에 꾼 꿈에 바다의 행렬이 우렁찹니다



■ 가난과 밤
   - 김희성


우리는 올해도 어김없이 가난을 사육했다
불면의 밤에도 매일 일하러 가는 일용직 노동자 언니와
귀뚜라미처럼 울던 동생들
밤이 드리우면 달도 자주 담벼락에 걸렸다
닮은 것들은 어떤 혈통을 가지고 있을까
굶주린 배는 유일하게 하루의 시작과 끝을 알렸고
우리는 모여 앉아
서로의 정신력과 적응력을 탓했다

서둘러 걷는 법은 잊은 지 오래였다
우편물처럼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밤이 무서워
서로의 뒷모습을 부둥켜 안던 기억
가로등 불빛이 한 잎씩 피어나면
우리는 자꾸만 솔직해졌다
밤은 왜 이리 빨리 찾아오는 걸까

속이 더부룩할 때면
졸업장과 이력서를 사이에 두고
두런두런 가족 행사에 대해 이야기했다
침묵을 집어삼키는 밤과 그림자
옷깃을 흔드는 찰나의 한숨과 탄성
우리가족은 가장 조용한 맹수가 되기 위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는 연습을 했다
밤하늘은 머리를 질끈 묶어 맸고
허공을 메우는 바람의 선율
귀가하지 않는 별자리의 시간들은
여전히 발바닥처럼 가렵기만 하다



■ 
   - 김희성


인터폰으로 쥐떼의 속죄를 엿들었다
암호를 외치듯 찍찍거리는 작은 사제들
급한 용건은 발자국을 길게 수놓았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길이었다
빠르게 벗어나는 것은 가장 쉬운 일이라며
밤바람에 생(生)은 쫓기듯 자취를 감췄다
길을 잃은 것 같기도 했다
듬직한 품은 오후 2시의 햇볕과도 같았고
하수구를 떠돌며 오랜 시간 그림자를 찾았다
그것이 길마다 버려져 있는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남겨줄 수 있는 것이 오직 오염된 자리이기에
오랜 서식이 가끔은 공포스럽기도 했다
갉아먹기에 유용한 이빨
갉아내기엔 많은 생명이 배 속을 부여잡고 있구나
한 달 치 식량이 자신의 몸보다 크게 느껴질 때
죽음은 꼬리를 쫓고 배는 뒤끓었다
언제부턴가 길이 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좋다는 핑계로 오랜 시간 방랑했다
아무도 우리를 도망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식량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모으면
저절로 정직하고 엄숙해지는 표정
탄식하듯 뱉어낸 말들은 순식간에 바람에 새겨졌다
코 푼 휴지처럼 붙어있는 숨
비상구뿐인 나의 집
물고 늘어진 시간들은 여전히 막다른 골목을 떠돌고
세상 아래 숨어사는 버릇만
길바닥 위를 나뒹군다






********
금상
당선작 심사평


  제32차 <창작콘테스트> 금상은 시(詩)부문 김희성 씨의「분실물을 찾습니다외 네 편의 시를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시인 김호철 / 시인 정은정






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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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 el condor pasa
   - 장미자


달팽이가 되기보다는 참새가 되어야지.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게 좋겠지. 못이 되기보다는 망치가 되어야지.
부모님이 다 돌아가신 후 대학에도 못가고 이런저런 허드렛일로 전전하던 나는, 오빠에게 돈 백이십만 원을 빌렸다.
그리고 조카 둘이나 있는 빠듯한 오빠 집에 더는 얹혀 살 수가 없었기에 그 길로 짐을 챙겨 나와 방을 구했다.
일명 오차라는 동네 계단 아래, 주인집을 중심으로 총 아홉 칸이 옆으로 다다닥 붙어 있는,
보증금도 없이 한 달 방세 2만원을 먼저 내고 사는 고작 서너 평 방 한 개.
그래도 내 생에 처음으로 나 혼자 살 수 있는 집이라는 게 생겼다.
암에 걸려 고통으로 울부짖던 어머니의 신음소리도, 폐병으로 각혈해대던 아버지의 앓는 소리도,
돈 없어서 나 죽겠다며 안달복달하던 올케언니 앙칼진 한탄소리도 없는 나만의 집.
가장 먼저 연탄 서른 장을 들여놓았고, 다문 중고 텔레비전 살 돈도 아껴야 했기에 치직거리는 싸구려 작은 라디오나 샀다.
이불이며 베개는 오빠 집에서 내가 덮고 베던 걸 들고 나왔으니 자는 데야 별 문제 없었다.
밤이 깊어지자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갈까 싶어 라디오 볼륨을 최대한 줄인 채 나는 방 한 복판에 앉았다.

다음 날 아침, 오빠에게 돈 빌린 애초의 계획대로 중고 1톤 트럭을 물색했다.
운전면허증이야 이미 전에 따 놓았으니 그저 굴러가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이래저래 다리품을 팔아 겨우 내가 가진 돈에 맞는 트럭 한 대를 구했다.
고작 70만원 하는 차였으니 트럭 꼴이야 말하면 뭐하랴.
아무튼 나는 트럭을 구한 뒤 짐칸에다가 주황색 포장을 치고 가스며 그릇이며 깍두기며 단무지며 우동장사 준비를 마쳤다.
많고 많은 것 중에서 하필 길거리 우동장사를 하려고 마음먹게 된 이유는, 다른 데서 몇 번 사 먹을 때마다
‘아, 이걸 하면 빨리 돈을 벌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장사 준비를 하며 며칠 동안 몇 번이고 알아본 끝에 장사할 장소를 찾아냈다.
소위 말하는 방석집이 다다닥 붙어 있는, 술 따르는 여자나 술 취한 손님이나 여기저기에서 빈 술병처럼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웃음소리와 신음소리가 섞여 밤하늘에 별조차 낯부끄러워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던 사창가 바로 앞.
가능한 나이가 들어보이도록 한 뽀글뽀글 파마, 그리고 할머니들이나 입는 꽃무늬 알록달록한 긴 솜바지,
그런 꼴을 하고선 천 원짜리 우동과 천이백 원짜리 김밥 사 먹을 손님을 마치 방석집 윈도우 안 몸 파는 여자처럼 트럭 짐칸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내 나이 스물둘 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동이 다 떨어져 장사를 막 마치고자 하던 새벽, 사창가 골목에서 나온 만취 된 남자가 우동을 달라했다.
남은 게 없다며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남자는 부득부득 당장 말아 달라 갖은 욕지거리로 트럭을 쳐가면서 난동이었다.
“몸 파는 년이나 우동 파는 년이나 똑같지. 우동 없으면 아줌마 나하고 잘까? 커억~”
남자는 침을 트럭에다 뱉더니 사라졌고 내 눈에선 금세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내렸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저 인간을 망치로 때려 부수고 싶었다.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철새는 날아가고(El Condor Pasa)가 들려왔다.
여명 속을 푸드덕대던 그 선명한 소리에 나도 모르게 음악소리를 따라 갔다.
음악은 저만치 있던 외국인클럽에서 틀어놓은 것이었다.
홀린 듯이 나는 문밖에 서서 계속 반복되어지고 있는 철새는 날아가고를 듣고 서있었다.
그런데 그때 문을 열고 나온 야한 옷차림의 아가씨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어? 저기서 우동 장사하는 예쁜 언니 아니가?”
그러곤 내게 백을 뒤져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건네주며 다시 말했다.
“내일 우동 한 그릇 말아도. 예약하는 기다. 나머지는 언니 밥 사 묵고.”
한사코 됐다는데도 기필코 돌려주는 돈을 뿌리치더니 아가씨는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
아마 나보다 적어도 한 다섯 살은 많은 테지? 그런데 이걸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솔직히 너무나도 기뻤다. 때 아닌 공돈 이만 원이 생겼으니.
이만 원이면 우동을 무려 스무 그릇은 팔아야 하는 대단한 액수 아닌가.
그날 나는, 서러운 못일랑 가슴에서 뽑아버리고 몇 개 새벽별 푸르게 망치질하며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도 철새는 날아가고 허밍이 좀체 입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뒤 힘들 때마다 철새는 날아가고를 들었고, 당시엔 귀하기만 하던 안데스 잉카음악 테이프를 발품 팔아가며 사서까지 들었다.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게 좋겠지. 멀리 멀리 떠나고 싶어라. 날아가 버린 백조처럼.
인간은 땅에 얽매여 가장 슬픈 소리를 내고 있다네, 가장 슬픈 소리를.
세월은 여지없이 흘렀다. 그리고 사랑하는 언니가 죽었다.
독신주의인 내게 시집가란 말을 밥 먹듯 전화로 해대던 내 언니가 죽어버렸다.
은행잎이 수런수런 날리던 가을, 우울증을 앓던 언니는 창문으로 몸을 날려버렸다.
나를 두고 어찌 이럴 수 있는 거냐며 숨 끊어진 언니 몸뚱이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언니가 죽은 후 나는 모든 걸 스톱한 채 매일 어두운 방구석에다가 소주 세 병과 함께 나를 고립시켰다.
그런 나를 보며 안타까워하던 친구가 들어보라며 건네 준 쿠스코 CD 한 장.
그것은 바로 하얀 눈의 산맥인 저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 따라 흐르는 잉카음악이었다.
그랬지. 나는 잉카음악을 참 많이도 들었었지. 그간 내가 안데스산맥을 잊고 살았구나.
가장 처음 나오는 음악은 다름 아닌 철새는 날아가고였다.
철새는 스물두 살의 선 월세 2만 원 짜리 쪽방과 우동과 김밥과 트럭과 외국인클럽의 아가씨를 날개에 태우고
푸드덕푸드덕 하늘로 솟아올랐다.
언니의 자살을 목격한 트라우마까지 죄다 날개에 실어 가져가 흩어 버려주었다.
어느새 나는 서서히 나를 다시 일으켜 안데스산맥에다 우뚝 새파랗게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또한 잉카음악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듣고, 바람 불면 바람이 분다고 듣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언니가 그리울 때마다 듣고 들었다.
쿠스코와 더불어 잉카음악은 여기저기 죄다 찾아가며 들었다.

길보다는 숲이 되어야지.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게 좋겠지.
세상을 내 발밑에 두어야지.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그게 좋겠지.
삶의 고비 때마다 희한하게 나로 하여금 살 힘을 주었던 철새는 날아가고, 그리고 쿠스코 잉카음악.
정말 내 생애 단 한 번이라도 안개 가득한 마추픽추에 앉아 안데스산맥을 바라보며 쿠스코 음악을 들을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오죽하면 안데스산맥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쿠스코 음악을 듣다 죽는다면 얼마나 나 행복할까도 생각했다.
나는 꼭 페루로 갈 것이다. 저 머나먼 남미 안데스로 갈 것이다.
금정산 상계봉 바위에 섰다. 부산시가 내 발 아래 있다. 페루로 갈 이 설렘을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심장은 안데스 산맥에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울렁이고, 머릿속은 안개 속에 울려 퍼지는 영롱한 오카리나 소리로 가득하다.
먼 훗날 나는, 철새들의 날개를 타고 내 아버지 어머니 산소 위를 훨훨 날아, 내 언니 납골당 위를 훨훨 날아,
안데스산맥의 콘도르가 될 것이다. 숲이 될 것이다. 하나의 맑은 별이 될 것이다.



■ 龍 넷
   - 장미자


강아지 산책길에 가끔 들러 자판기 믹스커피를 빼 마시곤 하는 공원 안 간이매점,
거기서만 장사한 지 무려 30년이라는 주인아주머니와 하여 이런 저런 일상적인 말 정도 가볍게 하는 사이가 되었다.
부슬부슬 비 오던 얼마 전 어느 날, 참새 방앗간처럼 매점으로 들어갔다.
앉을 탁자 해봐야 두 개가 전부인 곳, 그나마 오랜 세월이 말해주듯 나무 탁자는 결 따라 쩍쩍 갈라져 있다.
물론 플라스틱 몇 개 의자 역시 성한 거라곤 없다.
“언니, 오늘은 비가 내려서 공원이 조용하네요.”
“응, 어서 와. 강아지는?”
“이렇게 비가 오는데 당연히 강아지야 집에 있죠. 그냥 산책이나 할까 싶어 왔어요.”
정구지(부추)를 다듬던 주인은 나를 보며 반색했다. 대낮인데도 정구지를 보자마자 나는 커피가 아닌 막걸리가 대번 당겼다.
해서 막걸리와 정구지지짐을 주문했다.
스물여섯에 결혼해서 갓난아기를 등에 업고 이 장사를 시작했다는 둥, 사실은 시어머니 폭풍 잔소리가 너무 싫어
벗어나고픈 마음에 이 매점으로 왔다는 둥, 내가 막걸리 한 통을 비우고 한 통을 더 시킬 때까지도 주인 수다는 끝이 없었다.
주인의 수다가 지긋지긋해질 즈음 때마침 연세 팔순은 족히 보이는 할아버지 두 분이 낡은 여닫이문을 밀고 들어오셨다.
할아버지들은 안쪽 탁자에 앉으셨다.

주인은 여전히 내게 말이 많았으나 데시벨을 현저히 낮췄다.
대신 두 분 할아버지 중 한 분이 목청을 높였다.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시경이 어떠니 서경이 어떠니 주역이 어떠니
사서삼경을 달달거리며 앞에 앉은 할아버지께 웅변하셨다.
그도 모자라 윗도리 속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탁자위에 탁탁 펴시고는 펜을 또 꺼내 온갖 한자들을 써 보이며
아는 자랑을 해대셨다. 맞은 편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그 어떠한 추임새나 말씀도 없었다.
잠잠하다는 건 상대의 요란함에 받아치거나 대꾸할 실력과 능력이 없다는 것이겠지.
주인은 이제 더 떠들어댈 기운이 떨어졌는지 수다가 드문드문해졌고, 나는 얼굴 후끈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라왔다.
여전히 안쪽 탁자 똑똑한 할아버지는 숨이 차도록 열변중이셨다.
그래도 주인이 주저리주저리 떠들 때가 막걸리 맛이 났건만 막상 조용해지니 영 술맛이 없다.
차라리 말 많으신 할아버지와 내가 합석하고, 말 한마디 없이 가만히 듣고만 계시는
저 할아버지와 주인 따로 앉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잠시 스쳤다.
그런 나는 사붓이 할아버지 두 분 앉아계시는 탁자로 다가갔다.
때 아닌 젊은 여자의 접근에 할아버지들은 짐짓 놀라는 표정인 듯했으나 경계까지야 하지 않으셨다.
“어르신, 잠시 옆에 앉아 들어도 될까요? 정말 박식하신 분이세요.”
“그러시구려. 어험~”
그러나 똑똑한 할아버지는 조금 전 했던 사서삼경 타령을 도로 시작하셨다. 분명히 이건 대놓고 나 들으라 하는 것이겠다.
잠잠하시던 할아버지는 내게 바통을 물려주어 이제야 개운하다는 듯이 크게 기지개를 켜셨다.
한 쪽 손등을 턱에 괸 채 예의상 집중하고 듣는 척 하던 나는, 때가 왔구나 하며 할아버지께 대뜸 물었다.
“아주 많이 아시는데 획수가 가장 많은 한자는 그럼 뭔 줄 아시나요?”
“으음...”
할아버지는 당황한 낯빛이 역력했다. 아마도 모르시는 눈치였다.
내내 잠자코 듣고만 계시던 할아버지도 눈꺼풀을 들썩이셨다.
이 잘난 체 하는 양반을 마치 한방에 훅 보내기라도 할 것처럼 내가 낸 문제의 답을 바로 일러주기로 했다.
그러나 얄궂은 심보가 이내 도졌다. 용용 죽겠지, 할아버지를 좀 민망하게 만들어야겠다.
“한 글자의 획수가 무려 64획이나 되는데요.”
“모르시겠어요? 그럼 음...龍자 네 개를 합친 건데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한자 수업한 종이를 탁자에서 거두어 접어 다시 윗도리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시며 큰 기침만 해대셨다.
역시 이렇게나 힌트를 내리 드리는데도 결국 모르시는 거다. 나는 드디어 기세등등하게 답을 알려드렸다.
“어르신, 바로 수다스러울 절 자랍니다. 호호호!”
할아버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셨고 꾸벅꾸벅 조는 주인을 깨워 할아버지들의 율무 찻값을 내가 내드렸다.
그렇게 할아버지들은 매점에서 나가셨다. 그리고 나도 막걸리에 벌게진 얼굴을 최대한 우산으로 가리며 집에 왔다.
몇 시간 뒤, 내가 취한 거였나? 그 무슨 망측한 주정이었느냐고.

강원도 정선 산골, 아버지는 늘 사랑방에 틀어박혀 한자나 쓰며 한문을 읽어댔다.
고추밭이며 감자밭이며 갈고 솎고 뽑고 따고, 하물며 십리 읍내로 내다 파는 일까지 고스란히 어머니 차지였다.
아무리 어머니가 사네 못 사네 바드득거려도 아버지의 공자 왈 맹자 왈은 그치지 않았다.
아버지가 외출할 일은 뻔했다. 싸릿골 글 모르는 몇 사람에게 편지를 읽어주거나 써주는 일,
또는 배나무골 황부자집에 가서 한문 자랑 하는 일. 어머니는 정말 징글징글했을 것이다.
남의 땅 몇 뙈기 빌려 겨우 옥수수밥 보리밥이나 먹고 사는 주제에 아버지는 밭일 들일 다 않고 저러고나 있으니.
아무튼 새마을지도자 완장을 따낸 아버지의 한문 잘난 체는 더욱 충천했다.
누에고치 몇 포대 값도 안 될 그깟 나랏돈이나 받자고 완장을 찬 거냐며 어머니의 팔자타령도 귀 아프게 탱천했다.
나는 아버지 때문에 고생만 하는 어머니가 가여웠고, 한문 자랑이나 해대며 뻐기는 아버지가 싫었다.
툭하면 우리 형제들을 불러 앉혀 하늘 천 땅 지 천자문 늘어놓던 그런 아버지가 너무 싫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 제도가 폐지되면서 사실상 이름뿐이었지만 아버지는 명색이 향교출신이었다는 것을,
내가 네 살 무렵 산판 하러 갔다가 독사에게 허벅지를 물려 그 후 아버지는 노동력을 거의 상실했다는 것도,
삼십년 전 쉰아홉 아버지 돌아가신 뒤에야 제대로 알았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매점에서 만난 그 할아버지께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쓰이지도 않고 쓸데도 없는 한자 한 글자 알아서 무얼 하나. 손님이 찾지 않는 물건을 굳이 매점에다 들여 놓을 필요 없듯이.
생각할수록 기가 찬 일이다. 한자 기껏 삼백 자도 쓸 줄 모르면서 획수 많은 글자 하나 어디서 주워듣고선
인생 무려 근 백년을 사신 분들께 떠들어댄 건방이라니.
경제력 노동력 무력해진 아버지에게 한문은 그야말로 유일한 자존심이자 존재의 이유였을 것이다.
숨이자 맥박이자 아버지를 그래도 지탱하게 하는 첩첩한 기운이었을 것이다.
며칠 지나 우연히 들었다. 잠잠하던 할아버지는 과거 교사셨고, 말씀 많던 할아버지는 올봄부터 치매시란 걸.
매점에서 만난 그 할아버지들께 나는 절대로 수다스럽지 않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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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당선작 심사평


  제32차 <창작콘테스트> 은상은 수필부문 장미자 씨의 「el condor pasa외 한 편의 수필을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수필가 유미숙 / 수필가 정금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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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부문



■ 골동품 가게에서
   - 간결


야외전축은 아직 살아 있다

바늘도 여전히 긴 칼날 기립한 채
우리의 코발트 빛 계절을 재현하는 중이다

진정한 명반은 나이가 들수록 울림이 짙어진다지
판의 시원지에서 나온 결들이 마치
우듬지의 나이테를 닮았다며

네가 뱉은 언어에서 편백 향이 스멀거린다
오래 묵혀두어, 겹으로 쌓였을까
어떠한 불안과 고독에도 너는
콧노래 흥성거리며 온몸으로 맞서왔기에

참, 음표 같은 生이었다고

노익의 레코드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그 건재한 선율에 대하여
헤진 통기타의 스트링, 스트링
튜닝되지 않은 조화로움에 관하여
우리의 손목 위 힘줄 바싹 세운 에프,
에프 코드
낙제의 심볼과 슬픈 자화상
그 역설적인 콘트라스트를 덧칠하면서

전축이 자전한다
우리의 소우주 속에서
자폐적으로 맴도는 행성이여
최초를 모방한 최후의 회전으로
단 한 바퀴만 남긴 채로

대중가요의 사 분은 왜 이리 짧아,
너는 혼잣말로 질문한다

야외전축은 아직 살아 있으니까

불현듯 이탈한 음계에도
너는 고개를 나선형으로 끄덕거리고
나는 우리 주름의 폭이 꽤 닮았다며

새로운 레코드판을 꺼낸다
바늘 추켜 올리어

얼마든지
봄은 같은 결로 반복된다



■ 무한리필
   古 최진리, 구하라를 추모하며
  - 간결


어릿광대의 장례식에서
노잣돈 단 한 번만 지불하면
애도를 무한으로 즐길 수 있다

추모식은 간결하고
죽은 광대의 예명에는
잉걸불이 쉽게 달라붙는다
밤에 엽전은
더욱 빨리 침전하기에

우리의 손가락이 자꾸만
비겁해지는 이유에 관하여
놀이줄에 유리 조각 박아 놓은
범인의 정체에 대해서
우리는
진상 규명을 하지 않은 채로
그저 딱 한 사람이 죽었다고 말한다
죽을 사람이 죽었다고
운명론자의 얼굴로 얘기할까

한계점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 끝자락에 서 있다
사공이 연무를 끊임없이 뿜어대고
낮달이라 불렸던 달이
허물을 홀랑 벗는다,
나신이 된다,
별의 떨기가 되어 내린다
그런 날은
누구 한 명도 즐겁지 않다

이제 심지어
열 줄기 손가락마저 수치심을 느낀다
우리는 우산도 없이도 젖어 들어
줄의 팽팽한 장력이 힘을 잃고 끊어진다

손가락은
그날의 잔혹사를 기억하지 못한다



■ 해갈(解渴)
   - 간결


코발트

이곳 맹그로브에는 너와 나 둘뿐이야
아열대의 열풍이 낮은 층으로 불어와
우리의 지독한 생물성은
광합성 없이도 음울하게 몸을 늘리고

코발트
너의 어항 속 소우주는 자폐적이기에
걸음마다마다 양각으로 갈지자를 새긴다,
퍽 유려한 곡선의 헤엄
물 이곳저곳 변곡점 찍어대면서 침전,
누대의 것으로

목이 마를 때 가끔 너의 서식지를 훔쳐 마신다
실수로 아가미에 키스하거나
네가 나의 식도를 타고 들어 온 날
우리 밀림에는 밤새 별의 폭우가 나리었다
턱 끝까지 침수되는 꿈을 꾸었다고
코발트,
너는 성긴 자유를 갈망하며 어떤
총천연색 바다로,
다른 결의 生을 위하여

블루,
갈증이 끓는다 이 열대야가
그만 끝이 났으면 좋겠어,
라고
코발트, 너는

내 목소리의 형태를 흉내내었다



■ 달걀 껍질이 붙은 병아리의 발레*
   - 간결


껍질 깨고 나온다
빠져나오다가 발목 접질려
두개골이 결딴난다
처음 마시는 공기는 지중해 맛
닭으로 살지 않는 삶도
꽤 괜찮을 것 같은데
태어나자마자 무용을 펼친다
토슈즈가 벗겨지면
이윽고 공연은
2부로 접어든다

발코 수직으로 추켜든다
닭이 먼저인가, 예술이 먼저인가
몸에 껍질 조각
덕지덕지 붙어 있다
관객들의 찬사, 극장은 고요해
달걀이 먼저인가,
탐험가가 되는 게 우선일 수도
달걀로 바위를 깨부수다가
포기하고 수직으로 세워본다
하물며 공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매

커튼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간다
모형 바다가 잠잠했다가
다시 파랑이 요동친다
달걀에서 생명이 깨어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 간다
나는 행위와
무용의 공통점에 관하여
어린 조류는 생각하지 않는다
마침내 공연은
조용히 막을 내린다


*빅토르 하르트만의 작품 <달걀 껍질이 붙은 병아리의 발레(Chicks Sketch for Trilby ballet)>



■ 도그 파티
   - 간결


순식간에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공들여 쌓은 케이크 오층 석탑이
일순 개들의 점심식사로 전락한다

우리는 붕괴 현상을 자축했지만
쉽게 무너진 것들에 불만을 느낀다
기어코 파티라 부르지는 않았으므로

은퇴한 군견의 벌건 콧잔등 위
생크림을 바른다,
피에로가 되면
우리들의 우상은 한 번 더 일그러진다

개들도 사람처럼 안식년을 축하할까
찬미를 보낸다,
예의를 갖추고서
오늘 희생당한 음식을 위해 경배를 올린다

축사를 진행한다
이제는 타인의 성취를
진실 된 마음으로 축하하는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 한 마리
개도 남지 않았다
결국 케이크 찌꺼기들만 낭자해
복도를 어지럽힐 뿐이다

차라리 개의 몸짓으로
사람인 척하는 건 어떨까
간결한 짖음으로
대화를 나눌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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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당선작 심사평


  제32차 <창작콘테스트> 동상은 시(詩)부문 간결 씨의「골동품 가게에서외 네 편의 시를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시인 김호철 / 시인 정은정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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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부문



붉은 원피스
박상미



  나는 서랍장을 열고 붉은 원피스를 꺼냈다. 붉은 옷을 입은 것도 아닌데 얼굴엔 붉은 기가 돌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요즘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아도 얼굴로 열이  오르며 붉어진다. 의사는 여성 호르몬의 수치가 떨어졌다고 했다. 뭐가 급하다고 반갑지 않은 소식이 남들보다 먼저 오는지. 이마의 땀을 닦고 나서 원피스를 바닥에 펼쳤다. 색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선명한 붉은색이다. 목선 가운데로 가윗날 한쪽을 집어넣다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망설였다. 민준을 처음 만난 날 입고 있던 옷이다.

  영어 회화 첫 개강 날이었다. 강의실 문을 여는데 남자들 시선이 내게로 몰렸다. 나는 반을 잘못 찾은 건 아닌가 하는 당혹감으로 문을 닫아버렸다. 학원으로부터 받은 문자를 확인 후  다시 들어갔다. 구부정하거나 삐딱하게 앉은 남자들 사이로 유난히 곧추앉은 남자가 인상적이었다. 나는 출입문 쪽의 빈자리에 앉으면서 강사에게 인사를 했고 강사는 이름을 물었다. 나는 이름을 말한 후 영어 닉네임은 일부러 만들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내친김에 내 소개까지 해버렸다. 레벨이 올라갈 때마다 하는 절차라서 부담 없었다. 강의실 문을 열었다가 닫아버린 것은 잘생긴 남자들을 보고 놀라서란 변명도 했다. 사람들은 폭소를 터뜨렸고 곧추앉은 그만 웃는 듯 마는 듯했다.

  옷을 잘못 입고 나오신 것 같습니다. 전 붉은색만 보면 덤벼들거든요. 수업이 끝나고 둘이 펍으로 갔을 때 그가 했던 첫마디였다. 네 ? 한 옥타브 올린 목소리로 반문했더니 순진하단 듯이 쳐다보았다.  그는 안주를 거의 입에 대지 않았다. 위스키를 입에 털어 넣고 말했다. 붉은색은 위험하다고 . <색 , 계>의 ‘탕웨이 ’ 립스틱이, <화양연화>속 ‘장만옥 ’의 옷이 그렇다고 했다 . 그는 말끝에 십 년 전 , 첫 애인도 붉은색을 즐겨 입었다고 혼잣말을 했다. 불륜이 연상되었지만 내 나이의 무게를 생각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과거형인데 , 뭐 .
  대화는 붉은색으로 이어졌다. 그가 붉은색에 꽂힌 이유는 ‘호르스트 바커바르트 ’의 사진집 때문이라고 했다. 붉은 소파를 들고 다니면서 전 세계의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촬영한 기록이라고 했다. 사진집을 덮고 나서도 사진 속의 붉은색이 떠올랐단 말도 덧붙였다. 그는 말을 하는 도중에 위스키 잔을 만지작거리거나 머리를 쓸어 올렸다. 뜸을 들이면서 말하는 습관은 그를 신중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지금도 사진작가는 지구 어딘가를 돌고 있겠죠. 언젠가 나한테도 붉은 소파를 내밀면서 사진을 찍자고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붉은색은 흔드는 색인데 말이죠. 
  이 남자에게 붉은색은 어떤 의미일까. 사연이 있어 보여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반 이상 남은 치즈는 마르고 손도 안 댄 크리스털 통 속의 얼음은 물로 변해있었다. 나는 트러플 치즈를 손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그도 나를 따라했다. 나는 치즈를 입안에서 굴렸다. 치즈가 녹으면서 입안에 퍼지는 향처럼 그와의 관계도 천천히, 오래 가길 바랐다. 꼿꼿이 앉아있는 그를 보고 나도 자세를 고쳐 앉았다. 당신이 맘에 듭니다. 술친구 합시다. 헤어지기 전 그가 했던 제안이다. 자신에 찬 말투와 억양이 좋았다. 우리는 영업이 끝날 때까지 한 장소에 있었다.

  우리는 학원을 핑계 삼아 이틀에 한 번꼴로 만났다. 장소만 바뀌었을 뿐 수업의 연장일  때가 많았다. 질문을 받으면 답을 길게 할 때도 있지만 워낙 말수가 적은 그였으므로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술병을 가운데 두고 얼굴만 마주 보았을지도 모른다.
  하루에 영어 한 문장씩을 같이 만들자는 제안을 했을 때 , 그는 오글거린다는 반응을 보였다. 사랑은 유치할수록 좋다며 구슬렸다. 무슨 제안을 하면 처음엔 손사래를 치다가도 결국 들어주었다. 내가 문자를 보냈다. ‘나는 오늘……’ 한 사람이 운을 띄우면 상대가 문장을 완성하는 방식이다. 답이 왔다.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느라 점심은 걸렀지만 술을 거를 수는 없다. 술은 배신하지 않는다.’ 이 문장에는 내가 없고
내가 원하는 답도 없다. ‘배신’이란 단어가 첫사랑과 관련된 말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했다. 얘기의 머리와 꼬리를 자르고 몸통의 일부만 들이미는 식의 문자는 애매할 때가 많았다. 다음 날은 그가 먼저 문자를 보내왔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나는 그가 원하는 답을 보냈다. 그는 주로 답글 대신 이모티콘을 보내왔는데 역시 글자는 한 자도 없고 술병 모양의 이모티콘만 도배되어 있었다. 그나마 하트 이모티콘 하나를 선심 쓰듯이 끼워 보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나를 안달 나고 갈증 나게 했다.

  내가 간직하고 있는 그의 독사진은 모두 옆모습이었다. 옆에 앉아서 그의 옆모습을 감상하는 게 좋았다. 그의 뺨을 쓰다듬거나 콧날에 손가락을 대어 보기도 했다. 거만해 보이는 삼각형 눈썹과 그 위로 생긴 주름, 힘차게 뻗은 코, 약간 나온 턱선이 이루는 옆얼굴 라인은 나를 설레게 했고, 뜬금없이 내뱉는 한마디는 나를 끌어당겼다. 아주 예뻐요. 이 말을 듣고 잠을 설쳤다. 얼굴이 예쁘다는 건지, 목소리가 예쁘다는 건지, 맘씨도 예쁘다는 건지, 옷만 예쁘다는 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편한 대로 해석하고 나서야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와의 데이트는 계획 없이 이뤄질 때가 많았다. 그날의 기분에 맞는 제안을 해서 나를 들뜨게 했다. 술을 마시다 말고 바다를 보러 가자며 서울역으로 나를 끌고 가거나, 홍콩으로 밤 도깨비 여행을 떠나자며 집 앞으로 오기도 하고, 새벽에 잠결 묻은 목소리가 듣고 싶다며 전화를 주기도 했다. 그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나에게 직진했고, 밀당은 할 줄 몰랐다. 또한 따지지도, 대가를 바라지도 않았다.

  종일 그에 대한 생각을 달고 살았다.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궁금했다. 나이가 들어도 연애 감정은 젊었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한 번은 내 생각을 자주 하느냐고 물었더니 일할 땐 여자 생각 안 한다고 잘라 말했다. 눈을 흘겼더니 내 허리를 확 끌어당겼다. 밉지만 밉지 않았다. 그의 무뚝뚝한 성격과 무심함과 속말을 잘 안 하는 점이 서운하면서도 민준바라기를 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가족 얘기를 아끼는 편이고 어머니에 대해선 아버지를 떠났다고만 말했다. 길을 걷다가 다정한 모자간을 보면 한참 바라보면서도 자식을 낳고 싶지 않다고 말 한 적도 있다. 그 사람 속의 풀어내지 않은 응어리나 지나친 음주를 비롯하여 못마땅한 점들이 생겨났다. 그런 이유를 생각하다 보면 에너지 소모가 심해져서 몸까지 아프고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늘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였다.

  여전히 가윗날은 원피스의 목선을 향해 있었다. 애꿎은 빈 가위질만 몇 번 했다. 가위가 잘 드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은빛 날을 옷 끝에 대어 본다는 것이 그만 가위질 돼버렸다. 옷은 망가졌고 다음 동작으로의 연결은 쉬웠다. 서걱서걱 소리와 함께 옷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결의에 찬 가위질을 하면서 그뿐 아니라 그녀와의 관계도 잘라내리라 결심했다. 그와는 뜨거운, 그녀와는 따뜻한 관계였다. 십 년 동안 언니, 동생으로 지내던 관계가 일 년을 사귄 남자 때문에 폭격을 맞는다고 생각하니 입안에 쓴 기가 돌았다. 내가 아프면 죽을 쒀서 달려오고, 무조건 내 편이던 그녀를 주저 없이 끊어내려는 나를 보면서 질투가 지나치면 가윗날이 그녀를 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잘못은 하나도 없다. 굳이 잘못이 있다면 그날 하필 붉은 원피스를 입고 나왔던 일밖에. 옷의 조각을 뭉쳐서 방구석으로 던졌다. 터지거나 깨지는 파열음이 들려야 속이 조금이나마 후련할 텐데, 옷 조각들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흩어져서 방만 지저분해졌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 날의 일이 또 떠올랐다.

  이른 저녁, 민준의 손을 잡고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를 채 둘러보기도 전에 입구에 앉아있던 그녀가 일어났다. 반듯한 이마처럼 예의 바른 그녀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는 그녀를 대학원 모임에서 알게 되었고, 그녀에게 같은 부서에서 일하자는 제안을 했었다. 상대를 잘 설득하는 점이 영업부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인사를 하는 그녀의 얼굴이 아닌 , 입고 있는 붉은 원피스에 눈이 갔다. V 넥 칼라와 굵은 벨트가 부착된 플레어 원피스였다. 살짝 보이는 가슴골이 신경 쓰였다. 그가 손을 놓으려고 하자 나는 손에 힘을 주어 그의 손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
  민준과 그녀가 네 번째 만나는 자리였다. 함께 하자고 내가 제안했다. 그가 그녀에게 꽃다발을 내밀며 생일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잡았던 손이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나는 그에게 꽃 한 송이 받아 본 적 없다. 책이나 운동 기구를 받은 적은 있었다. 꽃을 사 오자는 제안은 그가 했고 나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프리지어 무척 좋아해요.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성의를 생각해서 그럴 수 있지 하고 쿨하게 넘기려는데 그의 말과 그 뒤에 이어지는 그녀의 반응이 가시처럼 걸렸다. 꽃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지 않나요, 그가 말했다. 꽃을 싫어하면 더는 여성이 아닌 거죠, 그녀가 답했다.
  쟤는 왜 여성성을 운운하는 건지

  셋은 거의 동시에 앉았다. 두 사람은 서로 근황을 물었고 나는 듣고 있다가 그녀가 일을 잘한다는 칭찬으로 끼어들었다. 그녀가 웃으며 치아를 드러냈다. 치아가 하얗다는 생각과 동시에 내 치아 색이 궁금해졌다. 창으로 들어오는 지는 햇살이 그녀의 상체를 비췄다. 스포트라이트가 켜지는 듯했다. 그녀가 돋보였다. 헤어샵에서 손질 받고 왔다는 단발머리도 세련되어 보였다. 특히 애교로 빼놓은 귀밑머리가 여성스러움을 더했다. 그녀는 ‘탕웨이’고 ‘장만옥 ’이었다. 이 애가 이렇게 미인이었나.
  메뉴판을 들어서 하나는 그녀에게, 다른 하나는 나에게 내미는 그를 보면서 생각했다.
  달려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까. 그녀는 메뉴를 고르느라 눈을 내려뜨고 있었다. 끝이 살짝 말린 긴 속눈썹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그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메뉴판을 들여다보았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고양이상의 눈매가 유혹적이었다. 이런 사실을 왜 미처 몰랐을까? 전엔 그녀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의 비교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옷 입는 감각도 떨어지고 머리 손질도 서툰 편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입는 옷은 홍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품이었다.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손으로 차양을 만든 그녀에게 나는 벽으로 붙어 앉으라고 말했고 그는 일어나서 뒤에 있는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 사이 직원이 와서 물을 놓고 갔다. 시야가 편해진 그녀가 말했다. 형부, 센스만점이세요. 그녀를 위한답시고 내가 한 말은 안 하느니만 못했다. 나는 입만 씰룩거렸고 말대꾸는 하지 않았다. 비위가 틀리기 시작했다.

  지난 세 번의 만남과 달리 그녀가 신경이 쓰였던 이유는 몇 주 전 민준에게 들은 말때문이었다. 여자를 소개해 주겠다는 그의 후배 제안을 전해 듣고 나서부터다. 결혼 적령기를 막 넘긴 여자라고 했다. 게다가 후배는 띠동갑도 커버할 수 있는 능력자라며 민준을 추어올렸단다. 뭐라고 대답했냐고 물었더니, 됐다, 한마디만 했단다. 그는 왜 나의 존재를 말하지 않았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된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로 내 나이가 더 의식되었다. 평소에도 그보다 나이 들어 보일까 봐 전전긍긍하는 나인데. 그는 나보다 다섯 살 연하이고 내 후배는 그보다 다섯 살 아래다. 말하자면 그녀와 나 사이엔 긴 시간이 틈입해 있다. 외모로는 그녀에게 밀리지 않는다 해도 탱탱한 피부와 싱그러움은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는 부분이었다. 나의 젊음이 부럽다던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
  각자 좋아하는 메뉴를 시켜서 나눠 먹기로 했는데 민준은 굳이 파인애플 볶음밥을 추가했다. 셋 다 입이 짧아서 남길 텐데도 인색하다는 오해를 받을까 봐 만류하지는 못했다. 그는 내가 아끼는 후배의 생일이니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느냐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후배님, 오늘따라 더 아름다우십니다. 그가 말했다. 내 동의를 바라는 듯한 그녀의 눈빛과 마주친 나도 반응을 보였다. 붉은색이 잘 어울린다.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민준은 고기를 잘라서 내 접시 위에 그리고 그녀의 접시 위에도 올려주었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는 선을 넘어주었으면 할 때는 넘지 않고, 넘지 않아야 할 때 넘는 경향이 있었다. 그가 음식을 먹기 전에 내 접시에 먼저 덜도록 길들이는데 한 달 걸렸다.

  후배님, 탁월한 선택입니다, 그가 고기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말이며 행동이 과했다. 자꾸 안 좋은 쪽으로 생각이 가닿았다. 생리를 건너뛰어 민감해진 탓일까, 생리가 석 달째 소식이 없다. 이제부터 피부가 쪼그라들고 목소리가 굵어지는 일만 남은 걸까, 식탁에는 매번 콩이나 두부를 올리고, 흰 머리카락을 뽑고, 약국에 들러 윤활제를 사고, ‘산부인과 성형 ’이란 광고에 시선이 가게 될 거라는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덧붙인 한마디, 부정할수록 더 크게 다가온다.

  나는 먹기만 했고, 둘은 대화를 이어갔다. 직장이 우리 회사 근처라면서요? 식사 대접하고 싶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야릇한 기분이 드는 순간 민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했다. 말로만 그러는 거 아니죠? 그의 말이 내 귀에는 기다렸어, 로 들렸다. 그녀의 이름은 물론 회사도 알고 있으니 맘만 먹으면 나 몰래 연락하는 일은 쉬웠다. 나는 소스병을 집는 척하면서 피클 접시를 엎었다. 접시는 뒤집어지고 그녀의 붉은 원피스에 국물이 튀었다. 나는 미안하단 말만 반복하며 공중에서 두 손을 떨기만 했다. 그가 얼른 물티슈를 건넸다. 얼룩이 표가 나지 않아 붉은색 국물이 야속했다. 그녀의 붉은색 옷도 야속했다. 무엇보다도 봄날 저녁의 붉은 노을이 더욱 그랬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먹기 시작했다. 대화는 멈추고 먹는 소리만 들리는데 느닷없이 그녀가 재채기를 했다. 그가 ‘블레스 유 .’라고 말했다. 그녀는 간격을 두고 재채기를 두 번 더 했고 그는 모두 반응을 보였다. 나는 그를 흘겨보았다. 그의 시선은 나를 아랑
곳하지 않고 그녀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 쟤는 별 걸로 다 관심을 끄네, 나는 스테이크가 담긴 접시를 그녀에게 밀면서 다 먹으라고 했다. 어머 , 튀었어요?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나는 밥을 깔짝거리다가 파인애플 조각을 테이블에 떨어뜨렸다. 얼른 주워서 그가 눈치 채지 못하게 개 간식 던져주듯이 그녀의 접시에 올리면서 인간이 어디까지 치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
 내 맘이야. 작지만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가 움찔했다. 다행히 그는 밥을 먹다 말고 문자를 확인하고 있었다.
  둘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디 불편해요? 후식이 나왔을 때 그녀가 물었다. 제가 뭘 잘못했나요, 라고 묻는 표정이었다. 나는 어색함을 모면하기 위해 갑자기 복통이 온다며 일어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가 내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 나를 일으켜 세웠다. 비틀하면서 그의 품에 기댔다. 그녀에게 우리 둘 사이를 과시하고 싶었다. 그가 나를 붙들면서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업힐래요? 나는 참을만하니까 집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 그의 등에 업혀서 집에 간적이 있었다. 그에 대한 감정이 서운함을 넘어서 원망이 되던 날, 술을 작정하고 마셨다. 그날 나는 필름이 끊긴 척했고 그의 등에서 시체처럼 늘어져 있었다. 그는 나를 업고 걸으면서 내가 듣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미안하다. 앞으로 잘 할게, 란 말만 반복했다.
  그가 직원을 불러 계산을 치른 후 나를 부축하여 밖으로 나왔고 그녀도 내 핸드백을 들고 따라 나왔다. 하늘에는 붉은 기운이 꺾인 상태였다. 3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는 4월이 반갑지 않다고 했었고 4월이 가까워지면서 불안해 보였다.
  나는 핸드백을 건네받으며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꽃다발을 땅바닥에 패대기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

  그 후로 불길한 기운이 내 주위를 맴돌았다. 영어 문장 주고받기는 흐지부지해졌고, 비록 오늘도 수고했어요, 란 반복적인 내용일지언정 매일 보내오던 문자도 며칠씩 걸렀다. 대신, 해독하기 어려운 문자를 가끔 보냈다. 4 월이 두렵다고 했다. 한 사람을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데 장애가 있다고도 했다. 적어도 내가 일회용 밴드가아니란 생각이 들어서 다행이었다. 처음엔 설명 없는 한 줄의 문자나 말들이 호감으로 느껴졌다. 자신을 맘껏 열어요, 단 지갑은 열지 말고. 라든가 내가 음식을 못 한다고 걱정하면 흔한 게 식당이죠. 라는 말로 나를 기분 좋게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당장 이해가 되지 않아도 곱씹으면 의도를 알 수 있는 말도 했지만 최근엔 이해할 수 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나중에 설명해주겠다고 미뤘다. 캐묻는 여자는 싫다고 했었다. 그 또한 캐묻는 성격이 아니고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는 쪽이었다. 그는 내 몸을 닳도록 쓰다듬으면서 내 맘을 쓰다듬는 일은 서툴렀다. 서운한 감정을 모았다가 지나간 일까지 몰아서 퍼부으면 당신은 기억력이 너무 좋아, 란 말로 입막음을 해버렸다. 내가 토라지면 손을 잡아주었지만, 구체적인 말로 무엇 때문에 미안하단 사과는 하지 않았다. 다
투는 일이 있어도 아니, 일방적으로 내가 골을 내도 데이트를 일주일 이상 건너뛴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말다툼해 본 적이 없었다. 이번엔 두 주째 만나자는 말이 없이 지나갔다. 변명도 없이 지난주는 건너뛰었다. 그냥 일이 있다고만 했다. 늘 그렇듯이 사소하게 시작된 나의 불만은 시간이 갈수록 상상이 더해지고 그 로 인해 잠까지 설치고 업무에 지장까지 주게 되면서 부피를 키워갔다. 이번엔 느낌이 달랐다. 그가 화가 난 나를 방치하다가 어느 날 연락을 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자 그를 안고 싶어졌다. 선배는 남편 외도의 낌새를 알아챘을 때, 고갈된 성욕이 다시 생겨났다고 했다. 남편의 바람이 지나간 후에도 선배는 몇 년간 마음을 끓이더니, 어느 날  자기 파괴적 행위를 멈추겠다고 선
언했다. 늘 남편이 우선이었던 선배가 자기중심적으로 변했다. 인문학 강의를 듣고 그림을 배우러 다니고 주말에는 그림 소재를 찾아서 밖으로 나갔다. 선배는 일상의 배경에 자신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자신의 모습을 변형시켜 그려 넣고 자신만의 표식을 해두었다. 선배는 길바닥의 비둘기가 되기도 하고, 빈 벤치가 되기도 하고, 때론 빗방울이 되기도 했다. 그림 그리기에 빠지면 남편의 동선에 둔감해지고, 집을 비울 때도 카레를 한 솥 끓여놓고 남편에 대한 신경을 끊고 나온다고 했다. 선배의 표정이 편해졌다. 나도 선배처럼 되고 싶다.

  나는 ‘휴 ’ 한 글자만 그에게 보낸 후 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서 주말에 만나자고 했다. 그녀의 생일 이후로 회사에서 냉랭하게 대하다가 전화를 하니 놀랐겠지, 그녀는 선약이 있다며 미안해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흔들린 건지 내 맘이 불안한 건지 모르겠지만 여
느 때와 다르게 느껴졌다. 혹시…… 과한 상상이 더해갔다. 두 사람에게 외면당한 나는 거북이 걸음 처럼 지나버린 주말의 끝에 있었다.
  가위를 든 채로 말도 안 되는 억측을 하고 억측은 여러 갈래의 길을 만들어갔다.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거나 잘라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 휴대폰이 울렸다. 경고음처럼 들렸다. 그가 만나자고 했다.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시간은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예감이 틀리기를 바라면서 그와 자주 만나던 집 근처의 펍으로 갔다. 문을 밀고 들어가는데 평소보다 무겁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먼저 절교 선언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구석 자리에서 이미 취해있었고 위스키는 바닥나 있었다. 그의 몸이 좌우로 약씩 흔들렸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내가 마주 앉자 한참 뜸을 들이더니 미안하다고 했다. 그의 눈도 목소리도 풀려있었지만 말은 진심으로 느껴졌다. 목소리가 너무 무거워서 내가 따지고 들 틈이 없었다. 밑도 끝도 없이 그만 만나자고도 했다. 역시 말이 짧았다. 매달려도 시원치 않을 판에, 변명이라도 댔다면 내 연륜을 생각해서 약간의 너그러움을 발휘할 수도 있었는데. 매력으로 다가왔던 적은 말수가 헤어지도록 결심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의 입을 통해 결별 이유를 듣고 싶었지만 말해 줄 그도 아니고 내가 먼저 묻도록 자존심이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의 뺨을 후려치는 거로 끝내고 싶었다. 붉은 원피스를 입고 있던 그녀를 떠올렸다. 뭔가를 숨기는 듯했던 전화 목소리. 가증스러웠다. 나의 미래를 망쳐 놓은 그녀의 뺨으로 머리로 숱하게 손이 올라갔다. 그와 그녀를 서로의 입술이 닿는 거리까지 한 프레임 안에 넣었다가 그녀만 프레임 밖으로 밀쳐내기도 했다. 머릿속으로 별별 상상을 하는 와중에도 그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무던히 표정 관리를 했다. 주먹을 쥔 손이 떨렸고 얼굴은 뜨거웠다. 고개를 숙인 그의 몸은 여전히 좌우로 흔들릴 뿐이었다.

  긴 침묵 끝에 우리는 일어났다. 밖으로 나와서 그는 나를 안으려 했다. 그를 밀쳤다. 그는 저항하는 나를 다시 강제로 안았고 나는 팔의 힘을 풀었다. 그는 오랫동안 나를 부둥켜안았고 내 뺨이 눌렸다. 내 짐작이 틀렸는지도 몰랐다.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는 걸까. 그는 내 귀에 대고 잘 살라는 한 마디를 내뱉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가. 어둠 속으로 비척비척 멀어져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귓전이 얼얼했다. 현기증이 났다. 눈앞의 풍경이 흔들려 보였다. 나한테 정착하고 싶다던 그를 무엇이 무너지게 한 걸까. 우리의 관계는 불면 날아가는 먼지만도 못했던가. 상처는 먼지처럼 날리고 사랑만 가슴에 담으라던 선배의 말에 반대되는 꼴이라니.

  화가 치밀어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그를 만나고 들어온 후로 얼굴이 더 화끈거리고 머리에 불을 이고 있는 느낌이었다. 열을 식혀줄 뭔가가 필요했다. 그가 말한 사진집이 생각났다. 그 때문에 생긴 열을 그와 관련된 물건으로 식히려 하다니, 연애하면서 이런 모순투성의 나를 종종 발견했다. 사진집을 꺼냈다. 그의 말을 듣고 바로 샀지만 꽂아두기만 했던 책이다. 냉동실에 얼려 둔 수건도 꺼냈다. 침실 창문
을 열고 창틀에 앉아서 지퍼백에 넣은 얼린 수건을 머리에 얹었다 책을 펼쳤다. 붉은 소파에 앉거나 눕거나 기대서 찍은 사람들 사진과 함께, 작가와의 인터뷰 내용도 실려 있었다. 행복 , 소망 , 두려움 등을 묻는 내용 중에서도 ‘사랑’이란 단어에 시선이 갔다. 처음 만난 날, 사랑은 개뿔이라고 했던 민준의 말이 생각났다. 거친 표현이 무례하면서도 맘에 들었고, 사랑이 개뿔이 아니란 것을 가르쳐 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
다. 아픔이 있을 거라며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가면서 내가 그를 포용하는 방식은 그를 더 알아가고 어루만지는 식이 아니라 그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급급함이었다. 알게 모르게 그가 연하라는 사실을 의식했던 모양이다. 서로 부딪히면서 관계를 촘촘히 다져 가지 못했다. 깊은 시간이 아닌 깊은 공감이 부족했다.
  머리가 시리다 못해 아팠고 잠시 후엔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수건을 집어던졌다. 하필 조각난 원피스 옆에 떨어졌다. 저걸 깁는다 한들 원상태로 안 되겠지.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 후회하지는 않았다. 창가에서 내려와 창문을 닫고 의자로 옮겨 앉았다. 사진집을 마저 보았다. 중간 중간에 그에 대한 생각이 끼어들면 잠시 멈추거나 다시 앞 페이지로 돌아가야 했다. 때론 소리 내어 읽기도 하고 찬물을 마시기도 했다. 상념을 물리치면서 사진집을 끝까지 읽었다.
  작가는 하필 붉은색을 택했을까? 사진 속 배경은 무채색 같은 일상이고, 소파의 붉은 색은 삶을 추동하는 자극제인가, 아니면 죽음을 향한 표식인가. 작가가 쉬지 않고 사진을 찍고 인터뷰할 사람들을 찾으러 다니는 행위도, 민준이 좇는 붉은색도 같은 이유일까.
  시계를 보니 그가 집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각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의 글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새벽 5시였다. 그의 블로그로 들어갔다. 30 분 전에 올린 글이 보였다. 노크도 없이 그의 방문을 연 느낌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어머니가 떠났다. 그때 나는 중 2 였다. 뒤늦게 찾아온 나의 첫사랑도 약ㅎ혼식을 올린 다음 날 떠나갔다. 둘 다 뒤통수를 후려치는 4월의 이별이었다. 그 후로 나는 몇몇 여자들을 만나왔다. 4월이 되면 자꾸 뒷걸음질 친다. 나의 연애는 자꾸 미끄러진다.
  그녀는 불ㄱ은색 원피스가 무척 잘 어울렸다.’

  술 탓이었는지 오타가 더러 있었지만 정신은 멀쩡한 듯했다. 처음 두 문장을 읽고 그와 나 사이가 멀게 느껴졌다. 나야말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이건 뭐지? 그는 여자를 좋아한 걸까, 붉은색 원피스에 집착한 걸까, 한 줄 띄고 마지막 문장이 있었다. 국문학을 전공한 그답다. 글에 나오는 그녀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 문장을 붙잡고 있는 한, 나는 자유로울 수가 없다. 설령 마지막 줄을 붙여 썼다 한들 그에게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 후배 때문에 흔들릴 믿음이라면 여기서 멈추는 편이 낫다. 계속 만나는 한, 마음을 졸이고 나 자신을 들볶을 테니. 젊게 보이려고 눈썹 끝을 뭉뚝하게 그리거나, 젊은 여자를 향하는 그의 시선에 불안해하는 일은 이제 하고 싶지 않다. 몸매를 강조하는 옷에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내 나이와 성별에 연연해하지 않기로 했다. 나 자신을 놓아주기로 했다. 20대의 나였다면 달랐겠지. 60대의 나라면 어땠을까. 망설이다 그의 연락처와 카톡을 차단했다. 삭제 버튼을 누르는 순간 우리는 휘발되고 나는 본래의 하나로 돌아왔다. 그의 옆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그가 한 말이나 행동이 아닌 옆모습이라니. 생각해보니 그의 말이 맞는 듯하다. 개뿔, 없는 걸 잡으려고 허공에다 헛손질을 한 건가.

  사랑에 관한 사진집의 인터뷰 내용을 생각하다가 사랑이 끝난 후에 대해 생각하다가 씁쓸함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입이 썼다. 밤을 새우고 나니 입안이 텁텁하고 정신이 몽롱했다. 출근도 해야 하므로 정신을 차리기에 적당한 뭔가가 필요했다. 냉장고에서 레몬을 꺼냈다. 혀에 닿자마자 느껴지는 상큼함과 뒤에 이어지는 달콤함이 좋아서 기분전환으로 한두 조각 먹곤 했다. 습관적으로 신맛과 단맛이 없어질 때쯤 레몬을 뱉어 내곤 했다. 이번엔 뱉지 말고 끝까지 씁쓸한 맛을 음미해야겠다. 한 입 베어 물었더니 과즙이 사방으로 튀었다. 천천히 씹었다.

  동이 트고 있었다. 붉은색이 퍼지기 시작했다. 마음도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웃는 법을 잊어버리고, 뭘 한들 재미도. 의미도 없을 것이다. 휴대폰을 닳도록 만지작거릴 테고, 매일 밤 그의 블로그 언저리에서 망설이겠지. 
 나는 더 젊은 남자를 만나서 더 안달복달해야 한다. 그는 더 많은 여자를 떠나보내고 더 많은 실연을 겪어야 한다. 더 허우적거려야 극복하는 법을 터특하겠지. 레몬의 씁쓸한 맛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어떤 사물을 봐도 그를 떠올리지 않게 될 때까지. 그러다 보면 붉은색을 보아도 흔들리지 않게 되는 날이 오리라. 아니, 다시 붉은색 옷을 즐겨 입고 붉은색을 좋아하게 될지도 몰라.
  그녀에게 말해줘야지. 그날 붉은색 원피스가 잘 어울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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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당선작 심사평


  제32차 <창작콘테스트> 동상은 소설부문 박상미 씨의 「붉은 원피스」를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소설가 김영찬 / 소설가 김충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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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당선자께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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