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콘테스트> 제33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by korean posted Mar 01,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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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콘테스트> 제33차 공모 
당선작 및 심사평






  [월간문학 한국인]이 작가로서의 꿈을 이루고자 분발하는 젊은 영혼들의 순수 문학 창작의욕을 북돋기 위해 기획한 <창작콘테스트>가 제33차 당선자를 발표한다. 
  [월간문학 한국인]<창작콘테스트>는 작가로서의 무궁한 필력이나 완벽한 전문성을 하나하나 따져 시상하는 그런 대단한 문학상이 아니다. 오로지 전문작가가 되기만을 꿈꾸어온 예비작가들의 작품들 가운데 다소 흠결이 있더라도 치열한 작가정신과 독특하고도 개성있는 표현, 문학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따져 우열을 가릴 뿐이다. 따라서 설혹 미흡한 부분이 있더라도 그 가능성을 보아 당선작을 뽑을 뿐임으로 문학상으로서의 권위를 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할 것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그간 겪어온 체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감각에 의해 산고를 겪듯, 그 누구도 쓰지 않는 자기 자신만의 문체와 어법, 시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이 아니겠는가.
  이번 <창작콘테스트> 제33차 공모는 입상자로 동상 단 두 명만 선정되었다. 응모 작품수도 저조했지만 무엇보다 문학적 수준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까닭이다.  
  참여해주신 작가 여러분들, 그리고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 창작을 자신의 운명으로 택하려하는 모든 분들께 신의 가호가 깃들기를 기원하며 각별한 감사와 격려의 뜻을 전한다.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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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부문



■ 행복의 향기
   - 정순옥


문을 열고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리 없이 내리는 비 사이로 바다는 회색빛 얼굴로 꿈을 꾸듯 잠잠하다. 발밑으로 느껴지는 흙의 부드러움은 비를 머금어 촉촉했고 길을 따라 서 있는 나무들도 부드러움을 머금고 있다.

하루 중 이 순간이 참 좋다. 바다를 마주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아직도 낯선 이곳에서의 하루하루를 버티어낼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이 순간 때문인지도 모른다. 숙소에서 나와 카페까지 걸어가는 채 5분도 되지 않는 이 순간이. 변함없지만 늘 다른 얼굴로 마주하는 바다가.......

“엄마, 나 지금 퇴근해. 근데 나 목요일에 화보 찍어요. 회사에서 주력하는 제품 홍보하는데 제품하고 연구원들을 촬영하는데 나도 참여하게 되었어. 그래서 강남에서 메이커업도 받아, 나 머리 괜히 잘랐나봐.“

아이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잘 되었네. 너는 머리 짧아도 귀여워. 바로 집으로 가는 길이야?”

“응, 나 지금 출발해요. 집에 먹을 게 뭐 있어?”

“그럼 집에 도착하면 전화해. 운전 조심하고.”

아이와 통화를 하는 중에도 계속 주변을 맴돌던 남편의 궁금함을 풀어주느라 나는 아이와의 통화를 이야기로 풀어놓는다. 먼눈으로 회색빛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제주시 북동쪽의 해안로를 따라 가다보면 바다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카페, 삼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그 곳에 있으면 왼쪽부터 시작해 고개를 완전히 돌릴 때까지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마음이 반짝일 만큼 멋진 풍경을 선물한다. 그에 비해 이곳을 찾는 손님은 그리 많지 않아 마음을 무겁게 한다.

남편이 이 카페를 운영하게 된 것은 작년 가을부터였다. 2년 전, 느닷없는 퇴직으로 긴장된 날을 보내던 남편에게 선배로부터 제의가 들어왔고 남편은 한동안 고민 끝에 받아들이게 되었다. 건설 일을 하고 있는 선배는 제주도에서 리조트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리조트 앞쪽으로 카페가 있었고 그 카페 운영을 남편에게 맡아서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반면 남편은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결국 남편은 선배의 제의를 받아들였고 작년 10월초에 내려와 일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을 시작한다는 것부터 내키지는 않았지만 딱히 일이 잡히지 않아 더 이상 만류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나도 그저 손님처럼 왔다가곤 했었는데 겨울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일주일에 반은 제주에서, 나머지 반은 집에서 보내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 러니까 한 달에 비행기를 여덟 번씩 타고 다니는, 그 뿐인가? 집에서 나와 제주 카페에 도착하기까지 거의 일곱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버스에 전철, 비행기, 택시를 타야 하기 때문에 집을 나설 때는 심호흡을 하곤 한다. 거기에 비행기 값도 무시할 수 없어 마음 같아서는 그 횟수를 줄이고 싶지만 그것도 마음뿐, 남편을 위주로 하면 아이가 걸리고, 아이를 위주로 하면 남편이 걸려서....... 아르바이트생을 쓰는 대신에 내가 왔다 갔다 하는 게 낫다는 안위로 대신한다. 다만 카페에 손님이 많기를 바랄 뿐이다.

 

휴대폰으로 아이가 나를 불렀다. 시간을 보니 집에 도착할 시간은 좀 이른 것 같은데.

“응, 어디야?”

“엄마, 아아아앙, 엄마, 아아아앙.......”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뜻밖의 아이 울음소리에 순간 온 몸으로 소름이 돋았다. 초보운전으로 대학원에 다닐 때 졸음운전으로 접촉사고가 났을 때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왜 그래? 어디 다친 곳은 없니? 괜찮아?”

내 목소리는 한 옥타브쯤 높아졌다.

“아아아앙. 엄마, 보고 싶어. 아아아앙.......”

“.......”

다시 한 번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사고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동안 내색하지 않던, 아니 꾹꾹 누르고 있었을 아이의 외로움이 오롯이 전해져 마음을 적셨다.

올해 스물일곱인 아이는 올 해 대학원을 졸업하고 3월에 연구원으로 취업한 새내기 직장인이다. 완벽함을 추구하며 까다로운 남편, 그런 남편을 꼭 빼닮은 큰아이와 달리 작은아이는 긍정적이고 단순해서 늘 나를 편안하게 해준다.

낙천적이고 단순하고 잠도 많이 자는 아이는 막내라는 생각에 어려서부터 많이 관대하게 키웠던 것 같다. 공부에 욕심이 많고 그만큼 잘하는 큰아이에 비해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 잘 먹고 잘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곤 했었다. 우등생에 모범생으로 성적이 항상 전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큰아이를 뒷바라지 하느라 작은아이는 늘 뒷전이었다. 그런데도 별 탈 없이 잘 자라주었고 그 모든 것이 큰아이의 그늘에서 자라기 때문이라는 우스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마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아이는 스스로 자신의 일을 해결하는 방법을 터득했던 때가. 밖에서는 늘 웃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집안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코맹맹이 소리를 섞어가며 어깨를 주물러 주기도 하고 남편의 구두를 닦아놓기도 했었다. 그렇게 지내더니 대학생이 된 후부터 아이는 달라졌다. 그렇게 힘든 통학거리를 소화해내는 것은 물론 결석은 물론 지각도 하지 않았고 성적장학금을 꼬박꼬박 타는 것이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게 재미있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그래도 생각지도 않았던 일에 나는 놀랍고 대견스러웠다. 장학금을 받았다고 용돈을 더 쥐어준 적도 없었으니.......

그렇게 4년 동안 변함없이 통학을 하고 성적장학금을 받더니 전액장학금으로 대학원에 다니게 되었고 졸업 후에는 전공을 살려 연구원으로 취업하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집안에서는 늘 부족하고 어리게만 생각했었는데 정작 아이는 밖에서 남들의 부러움을 받는 아이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워낙 말이 없고 자신이 맡은 일은 끝까지 해내는, 내가 차려주는 대로 먹고 알아서 생활하는 탓에 나도 작은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에 무심했었다.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인 남편과 아직도 공부에 전면하는 큰아이를 챙기는 것만으로도 힘겹다는 이유로,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사랑을 운운하고 있었으니.......

“집에 오면 아무도 없어서 싫어. 흑흑, 예전에는 집에 오면 언제나 엄마가 있었잖아. 엄마, 우리 예전처럼 같이 살자. 나 대학교에 다닐 때도, 대학원에 다닐 때도 통학시간이 두 세 시간 씩 걸려서 기숙사에서 지내게 해달라고 그렇게 졸랐는데도 같이 지내자면서 붙잡아두더니 지금은 나만 혼자 두고 다들 나가버리면 어떻게 해. 엄마, 보고 싶어. 그냥 엄마가 집에만 있으면 좋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숨만 쉬고 있어도 나는 좋단 말이야. 엄마, 보고 싶어. 흐흐흑.......“

“그래. 엄마도 보고 싶어. 다행이다. 엄마는 사고 났는줄 알았어. 토요일에 올라갈게“

아이의 울음이 잦아들면서 나는 한동안 아이의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면서 코끝이 싸아해졌다. 그 사이로 춤을 추고 있었다. 회색빛 얼굴의 바다가, 그 바다를 마주하고 서 있는 남편의 뒷모습이. 아이의 환한 웃음이.......

그리고 깨닫게 된다. 한집에서 부대끼며 사는 평범한 일상이 소중하다는 것을,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는 소소한 웃음이 행복이라는 것을,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때로는 발목을 잡기도 하지만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삶의 힘이 된다는 것도.......

 

토요일, 제주에서 집으로 가는 길. 새벽 6시에 카페를 나와 집에 도착하니 오후 1시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이는 막 집을 나서려는 중이었다.

“나 왔어.”

“응.”

“어디 가니?”

“은솔이 만나기로 했어.”

무심한 듯 나서는 아이를 보며 나도 애써 서운함을 감추었다.

“미리 전화라도 하지. 엄마 오는 거 알면서, 조금만 늦었으면 얼굴도 못 볼 뻔했네. 피곤하다며 좀 쉬지.......“

나가려던 아이는 순간 몸을 돌리더니 어린아이처럼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엄마, 와서 좋아, 아니. 그냥 엄마가 곁에서 숨만 쉬어도 좋아.”

들릴듯 말듯 속삭이는 아이에게서는 바다 내음이 났다. 행복이라는.......



■ 요셉, 나의 아버지 요셉
   - 정순옥


얼굴을 스치는 칼바람에 몸은 물론 마음까지 움츠려든다. 올 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일기예보가 실감나는 날이었다.

"요한, 바오로, 노마. ......."

아버지 기일을 얼마 앞두고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세례명들이 오갔다. 며칠째 되뇌어 보아도 도무지 아버지 세례명이 기억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지 세례명만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정말 기가 막히고 어이없었다,

오늘은 아버지 기일이다. 원래대로라면 외아들인 오빠가 제사를 지내야 하지만 처음 서너 해를 지내고서는 지금까지 10년이 넘도록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엄마 먼저 세상을 떠나고 홀로 남겨진 아버지. 허망함으로 돌아가신 엄마를 찾는다며 집밖으로 돌아 식구들 애를 태우시더니 어느 날 갑자기 진짜 엄마 곁으로 가셨다. 두 분의 모든 것을 걸었던 자식들, 특히 엄마에게 외아들인 오빠는 삶의 전부였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오빠를 위해서는 뼈라도 갈아달라면 갈아주겠다는 말로 마음을 아리게 하던 엄마, 그런 외아들로부터 되돌아오는 무관심과 며느리의 냉대는 헛헛함과 덧없음으로 병을 얻게 하더니 삶의 의미마저 잃어버려 결국은 스스로 삶의 끈을 놓게 했다.

그 모든 것을 함께 하며 엄마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아버지를 밖으로 돌게 했고 집에 있을 때도 하루 종일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건조함은 아버지의 정신을 헝클어진 실타래로 뒤엉키게 했다. 그래서 날이 밝으면 밖으로 나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리고, 그 횟수가 잦아지며 아버지 목에 주소를 적은 목걸이를 걸어주고 나중에는 바깥출입까지 금했다. 그러다가 병원 중환자실에서 마주한 아버지는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면서도 편안한 얼굴이었고 아기처럼 말간 살갗은 부드러움으로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두 분의 예기치 않은 죽음은 그 원인이 오빠와 올케언니 때문이라는 사실에 두 분의 기일 이외에는 전화 한 통 하지 않고, 말 한 마디 나누지 않는 남처럼, 아니 원수처럼 지냈다. 게다가 오빠가 살던 집이 재개발 사업이 시행되면서 이사를 가게 되자 그나마 기일 날 오는 것도 버겁다며 제사는 자신이 알아서 지내는 것으로. 상을 차리는 것보다는 성당에서 미사를 올리는 것으로 대신한다고 했다. 일방적인 오빠의 통보에 별 다는 대안이 없었고, 지금까지 거의 10년 넘게 그렇게 지내고 있었다.

그렇게 연락두절로 세월이 흐르면서 오빠가 위암 말기로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소식에 병원을 찾았고 낯선 오빠의 모습은 날이 선 마음을 무디게 했다. 그 날, 나는 결혼하고 나서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이십 여 년 만에 처음으로 성당을 찾아가 두 분께 오빠를 살려달라는 기도를 했다. 다행히 오빠는 수술이 잘 되고, 더 이상의 전이도 없어 일상으로 돌아왔고 일 년에 한두 번 안부를 묻는 것으로 끊어진 연을 조심스럽게 이어갔다.

“그런데 오빠, 엄마, 아버지 제사는 어떻게 하고 있어?”

“응, 성당에서 위령미사 올리고 있어. 집사람이 몸도 아픈데 마트에 다니다보니 제사상 차리는 게 쉽지 않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오빠의 덤덤한 목소리에 마음이 뾰족해졌지만 병원에서 보았던 초췌한 오빠의 웃음이 떠올라 풀어져 버리고.

“그럼, 그 날 미사에 같이 참여할까? 기일을 그냥 보내는 게 마음에 걸려서.“

“.......응, 마음은 알겠는데 굳이 그러면 네가 살고 있는 동네 성당에서 미사 올려도 괜찮아.“

“.......”

더 이상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것 같아 나도 입을 다물었다.

그 이후로는 나름대로 기일이 되면 성당에 가서 위령미사를 드리고 있다. 위령미사를 올리려면 기일 전날 성당에 가서 미리 접수해야 하는데 성의껏 준비한 돈을 넣은 봉투에 이름과 세례명을 쓴다. 분명히 작년에도 봉투에 아버지 세례명을 썼는데 그 세례명이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저기 묻지 않는 것은 올 해는 그나마 위령미사를 신청할 여유마저 없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 다 좋아진다는데 이즈음 되면 옛날이야기를 하며 나이듦의 여유를 누려야 하는데 요즘 나는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두 아이를 뒷바라지 하느라 양말 한 켤레도 제대로 사 신지 못한 남편,  손에 쥔 것은 없어도 자존심 하나로 버티고 살아온 남편, 당장 먹을 것이 없어도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 하다못해 한 이불을 덮고 사는 나에게도 꼿꼿하게 자존심을 세우곤 한다.

그 뿐인가? 대학3학년 때 휴학을 하고 외무고시 준비를 하고 있는 큰아이,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질끈 동여맨 머리에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고시원과 독서실을 오가며 공부하고 있을 아이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릿해진다.

큰아이는 자신이 뜻하는 일을 위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대학교에 들어가야 한다는 의지로 네 번의 수능을 치르고 대학생이 되었다. 재수, 삼수, 사수까지 네 번의 수능을 치르고 대학생이 되고 보니 남들보다 늦었다는 조바심으로 대학생활도 조기졸업을 목표로 학업이외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 생활을 하더니 느닷없이 외무고시를 봐야겠다는 말을 했고 남편과 나는 무조건 반대를 했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아이의 뜻을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공부를 시작한지 5년이 넘어가는데, 불안함이 점점 더 커져 요즘은 말조차 건네기가 어렵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도 그런 결정을 내리기다 쉽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먹먹해진다. 남들처럼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하는 평범한 삶을 바라기도 했지만 그러면서도 자꾸 머리를 드는 꿈에 대한 그리움, 지금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던 아이의 말이 자꾸 떠오른다. 빨개진 눈시울도.......

남편의 정년퇴직에 큰아이의 뒷바라지를 하며 5 년 정도 세월이 흐르면서 겨우겨우 모아두었던 돈은 물론 은행 대출에 주변에 아쉬운 소리를 해가며 돈을 빌려 쓰고, 이제는 그 마저도 여력이 되지 않아 당장 내일이 걱정되는 상황이다.

젊었을 때는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절실함으로 집에서 과외를 시작하는 것으로 생활을 책임질 수 있었는데 지금은 걱정만 하고 있을 뿐,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는다. 그렇다고 남편이 일을 시작할 기미는 보이지 않고, 큰아이의 마지막 시험이 8월이니 그 때까지 버티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툭하면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을 맞이하면서 그냥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마음속은 온통 비둘기 서성거리는 소리로 내딛는 발걸음도 휘청거린다.

오후 3시 즈음의 성당은 고요하지만 평온했다. 아무도 없이 텅 빈 본당은 어두웠지만 오히려 편했다. 집을 나설 때부터 먹먹했던 마음은 본당 문을 열고 들어설 때는 물먹은 솜처럼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터져버릴 것 같더니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으자 급기야 눈물을 쏟게 했다. 그리고 나즈막히 아버지를 불러 가슴 속에 묻어있던 아버지의 모습에 숨결을 불어넣어 되살려냈다.

눈 오는 크리스마스 이브날 밤, 자정미사를 보러갈 때 아버지 등에 업혔을 때 걸을 때마다 가슴으로 전해져오던 따뜻한 울림, 구두를 만드느라 투박한 손으로 안아주던 무뚝뚝한 아버지의 웃음,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내 발에 구두를 신겨주시던 자상한 아버지의 손길, 그리고 겨울 어느 하루, 아이 둘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았다가 돌아가는 길에 전철 역 건너편에서 하얀 눈을 맞으며 하염없이 손을 흔들어주던 마지막 모습까지 마주할 수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뜨니 어두웠던 성당은 창문을 타고 넘어 들어온 햇살로 밝아져있었고 텅 비어있던 가슴이 훈훈함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아버지를 입 밖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약속했다. 만만치 않은 이 세상, 어떻게든 살아내겠다고, 모자라고 부족한 것 투성이지만 다독이고 안아주며 이끌어나가겠다고. 아버지의 사랑을, 삶을 가슴에 안고 함께 하기로 마음의 손가락을 걸었다.

문득 아버지 세례명이 떠올랐다. 요셉….

나는 본당 문을 나오며 아버지의 세례명을 조용히 불러 본다.

요셉, 나의 아버지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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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당선작 심사평


  제33차 <창작콘테스트> 동상은 수필부문 정순옥 씨의 「행복의 향기외 한 편의 수필을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수필가 유미숙 / 수필가 정금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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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부문



동백의 춤
전정언



소영은 실크 소재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촘촘한 주름 위로 새겨진 플라워패턴이 전체적으로 붉은 느낌을 자아냈다. 소매와 네크라인의 러플 장식이 바람에 하늘거리자 꽃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얇은 소재 때문인지 몸의 윤곽이 훤히 드러나 그녀를 더 야위어 보이게 했다. 그녀는 가느다란 담배를 입에 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굵은 흑발이 어깨 아래로 흘러내리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몸이 짧게 진동했다.

소영을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관절을 비틀고 근육을 늘이면서 나풀거리는 야윈 몸, 황홀감에 젖어 있는 표정, 음악 소리에 맞춰 조금씩 움직거리는 붉은 입술, 단정하게 묶은 검은 머리카락과 조명을 반사하는 하얀 피부까지. 소영은 지젤 그 자체였다. 나는 빌리가 된 그녀에게 매혹당했다. 거미줄에 묶인 나비처럼 소영의 몸짓 하나하나에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그녀는 나비의 몸짓을 하면서 거미의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면 나 자신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앙, 드, 투와. 소영이 혼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초점 없는 눈길이 허공을 배회했다. 그녀가 장식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길고 가느다란 팔이 머리 위에서 팔랑거렸다. 하얀 조명이 손등 위에서 부서졌다. 소영은 목을 긁적거리다 시선을 돌려 나를 보았다.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끈질긴 시선에 입이 말랐다. 침이 목울대를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얼음 같은 정적이 흘렀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위태롭고 차가운 침묵이었다. 시선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아래로 처진 그녀의 입꼬리가 다시 달싹거렸다. 앙, 드, 투와. 낮고 은밀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의미 없는 숫자의 나열이었지만, 마치 하나의 주문 같았다. 일정한 리듬에 맞춰 반복되는 주문. 그녀는 무언가를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제처럼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숫자에 갇힌 사람 같았다. 그녀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

까무룩 잠에 빠져든 소영을 눕혔다. 종잇장 같은 몸이 침대 위에서 팔랑거렸다. 이불을 덮어주고 그녀의 발 근처에 앉았다. 발은 상처투성이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죄가 될 것 같은 은밀한 상처들. 상처가 꽃처럼 피어있었다. 나는 그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나는 소영의 상처를 좋아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매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곪아서 터져버린 것들, 찢어져서 피가 흐르는 것들,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들, 새롭게 돋아나기 시작하는 발톱, 이미 흉터가 되어버린 것들, 그것들을 쓰다듬으면 소영의 상처가 내게로 옮아오는 것 같았다. 그녀의 발에 입을 맞추며 모든 상처가 내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마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떨었다.

나는 장식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오르골을 집어 들었다. 피아노 모양의 오르골이었다. 명도가 높은 순백색이 차가운 느낌을 들게 했다.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서늘했다. 밑동에 녹이 슬어 있고, 군데군데 손때가 묻어 윤이 났다. 나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하단의 태엽을 돌렸다. 건반의 뚜껑을 올리자 발레리나가 원형 판 위에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익숙한 멜로디였다. 금속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간간이 들리는 쇳소리가 불협화음을 만들어 냈다. 나는 멜로디를 따라 천천히 흥얼거렸다. 은밀한 음색이 입안을 맴돌았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가느다란 소리였다. 제멋대로인 음정이 발음되지 못하고 뭉개졌다. 멜로디에 맞춰 발레리나가 춤췄다.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한쪽 발로 서서 다른 다리는 뒤로 뻗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양팔을 앞뒤로 넓게 벌린 자세였다. 튀튀를 입고 황홀감에 젖어 있는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깃털로 만든 튀튀가 서릿발처럼 얼기설기 뻗어있었다.

오르골을 선물하던 날 소영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공연이 끝나고,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웃는 그녀는 빛이 났다. 마지막 인사마저 우아했다. 조명이 눈부시게 빛나며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무대 뒤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마저 행복했다. 팔랑거리는 손을 잡고 그녀가 친 거미줄에 얽히고 싶었다. 마주한 눈동자가 따뜻했다. 가느다란 눈매가 천진하게 휘어졌다. 가지런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으레 짓는 연기가 아니어서,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웃음에도 색이 있다면 붉은빛일 거라고 생각했다. 꽃바람을 닮은 미소였다. 창밖의 하늘이 연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 순간의 공기가 얼마나 따뜻했는지 아직도 기억한다. 그때의 소음과 햇빛과 맞잡은 손의 온기까지. 오랫동안 그렇게 따뜻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었다.

음악 소리가 멎었다. 소영의 발을 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뼈는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부러질 것처럼 가늘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에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자 소영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핏발 선 눈이 나를 질책했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뗐다. 고개를 가로저었다. 목이 꽉 막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덜미 위로 소름이 돋았다. 나는 심호흡하며 몸을 일으켰다. 매트리스가 깊게 가라앉았다. 길게 늘어진 테이프처럼 움직임이 버벅거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내 움직임을 따라 이동했다. 입이 바싹 말랐다. 목이 탔다. 주변의 공기가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왜, 너도, 내가 병신 같아?

소영의 목소리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피부에 꽂혔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바닥만 바라보았다. 따가운 시선이 정수리로, 어깨로, 팔목으로 쏟아져 내렸다. 바늘이 돋는 것처럼 온몸이 간지러웠다. 나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소영의 시선을 마주했다.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빠르게 회전하는 놀이기구를 탄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버거운 일이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그 눈동자에 먹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병신. 읊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내게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흩어졌다. 소영이 상체를 활처럼 꺾으며 웃었다. 나는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 손바닥에 닿는 문고리가 유난히 차가웠다.

문에 등을 기대고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무릎을 세워 끌어안았다. 그 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소영의 모습을 담기 위해 똑같이 길러온 머리카락이었다.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문 너머에서 소영의 악다구니가 들려왔다. 비명에 가까운 고함이었다. 나는 귀를 틀어막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희미한 어둠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나는 암흑 속을 걷고 있었다.

나무마다 유리 조각이 걸려 있는 곳이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유리 조각이 팔과 다리를 스쳤다. 바닥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맨발에 닿는 느낌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자박자박 울려퍼지는 발소리에 아래턱이 뻐근해졌다. 걸음을 멈추고 길 한복판에 섰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온몸이 아득한 어둠 아래로 가라앉았다.

멈춰선 곳은 거대한 숲 한가운데였다. 사방은 암흑이었고 숨을 내쉬는 것조차 망설여질 정도로 괴괴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째서 이곳에 오게 된 것인지에 관해 생각하다 그만두었다. 그만두게 되었다. 알 수 없는 힘이 어깨를 짓눌렀다. 순간적으로 숨이 삼켜지고,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시선이 허공에 닿았다. 저편에서 붉은 물결이 출렁였다. 물결은 금방이라도 숲을 삼킬 것처럼 거칠고 사납게 몰려 왔다. 그 속도가 빨라질수록 호흡이 가빠졌다.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입술 안쪽을 힘껏 깨물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연기처럼 번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붉은 물결은 사라지고 없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비릿하고 습한 바람이었다.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바람이 밀려올 때마다 시큼한 악취가 느껴졌다. 커다란 포유류의 배설물이 썩는다면 이런 냄새이리라고 생각했다. 냄새가 점점 더 진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일정한 속도로. 나는 두 귀를 틀어막았다. 손바닥이 땀에 젖어 축축했다.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들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유난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마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발바닥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아니, 물방울이 아니었다. 붉은 꽃잎이었다. 숲이 날카롭게 진동했다.

몸은 천근만근인데, 모든 감각은 첨예하게 곤두섰다. 짙은 꽃향기가 코끝을 맴돌았다.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몸을 짓누르는 공기에 숨이 막혔다. 입 밖으로 내뱉으려던 말이 도로 목구멍으로 삼켜졌다. 자의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은 송장 같았다. 생경하면서도 익숙한 느낌이었다. 발가락 끝에 힘을 주어 경직된 몸을 이완시켰다. 오른쪽으로 돌아누워 몸을 둥글게 말았다.

그날 이후로 반복해서 꾼 악몽이었다. 아니 악몽이라고 할 수 있을까. 꿈에서 깨고 나면 돌덩이라도 삼킨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숨 쉬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아랫배가 벌렁거리고, 구토기가 치밀었다. 한쪽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손이 덜덜 떨렸다. 땀에 젖은 손바닥은 미지근했다. 콧등을 찡그리며 머리맡을 더듬었다. 핸드폰 불빛 때문에 눈이 부셨다. 새벽 네 시 반. 모든 움직임이 멈추고 공기마저 희미한, 우울하거나 슬퍼해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시간이었다. 습기의 냄새와 은백색의 달빛, 거리를 떠다니는 가로등 불빛과 어슴푸레 들려오는 엔진 소리 등. 그 모든 것이 뚜렷한 경계 없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등에 닿는 문은 여전히 차가웠다.

식은땀을 닦아내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등에 달라붙은 옷자락을 대충 떼어냈다.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집은 거대한 숲처럼 어두컴컴하고 고요했다. 유리로 된 숲 같았다. 조금의 소음이라도 들리면 깨질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바람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고요한 새벽이었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새벽의 냄새가 풍겼다. 은은하면서 은밀한 냄새였다. 달빛이 일렁거리며 얼굴에 닿았다. 희붐한 빛이 거실을 물들였다. 커튼의 무늬를 통과하며 얇게 조각난 달빛이 얼룩처럼 흩어졌다. 달빛을 따라 시선을 멈춘 곳에는 분홍 토슈즈가 있었다.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모양새가 휑뎅그렁했다.

하얀 세계를 유영하던 음악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어느 날, 그러니까 꽃잎이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부지하던 그런 봄날이었다. 소영이 몹시 상기된 얼굴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전에 본 적 없는 격한 움직임이었다.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그녀 같지 않았다. 몇 년을 알고 지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시는 모습이 낯설었다. 그녀가 입가를 거칠게 문지르며 몸을 돌렸다. 눈빛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지독한 생기였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잇새로 말이 다 나가기도 전에, 소영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다. “나 마녀가 됐어.” 나는 울먹거리는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나는 축하한다는 말을 반복하며 그녀를 마주 안았다. 소영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빠르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손바닥에 닿는 뼈가 아팠다.

소영이 속해 있던 발레단에서는 새로운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인어공주 이야기를 마녀에게 초점을 두고 새롭게 각색한 작품이었다. 마녀는 사실 인어공주를 사랑했던 거라고 말하는 소영의 눈동자가 젖어 있었다.

“그래서 목소리를 빼앗은 거야. 불가능한 것을 제안하면 인어공주가 단념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녀의 순수한 사랑에 불을 붙인 꼴이 된 거지. 마녀는 인어공주에게 붉은 동백나무를 건네며 이 꽃을 피우는 데 필요한 것은 진실된 사랑의 소통이라고 말해. 백일 뒤, 달이 붉게 차오르는 날까지 꽃을 다 피운다면, 그 사랑은 영원할 거라고 말이야. 마녀는 인어공주가 바다를 떠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어. 영원히 자신과 같은 공간에 있기를 바랐던 거지. 하지만 인어공주는 왕자와의 사랑을 확신하며 뭍으로 올라가고, 왕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인어공주를 이용해. 결국, 인어공주는 물거품도 되지 못하고 땅 위에서 스러지고 말아. 남겨진 마녀는 왕자를 용서할 수 없었지. 그래서 그녀는 이웃 나라 공주로 변신해서 왕자에게 접근해. 붉은 달이 떠오르고, 마녀가 왕자를 저주하자, 검은 물결이 그를 집어삼켜. 그리고 마녀도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게 돼.”

마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냐는 물음에 소영은 대답 대신 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글쎄 빼앗기기 싫다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소영의 목소리가 물거품처럼 흩어졌다. 나는 빼앗기기 싫은 게 뭐냐고 물었으나 아무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그 후, 며칠 동안 소영은 정신없이 공연 준비에 매달렸다. 이해해 본 적 없는 마녀를 이해하고, 마녀가 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전에 본 적 없는 소영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며 자리를 지켜야 했다.

소영은 그 자리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녀를 대체할 발레리나는 많았고, 소영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조금의 방심과 약간의 우연이 큰 오점이 될 거라는 것을 알았다. 지독한 날들이었다. 나는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있었다. 소영의 일까지 보듬어 줄 여력이 없었다.

비가 내렸고,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 때문에 눅눅했던 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팝콘 자루를 양손에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삿대질하는 손님부터 심야 시간대에 온 취객까지. 여러 가지로 인해 피로한 상태였다. 등 뒤에서 끈적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미처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정수리 위에서 숨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검지 손가락을 세워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농도 짙은 느릿한 손길에 소름이 돋았다. 오늘도 수고하고, 근데 오늘따라 치마가 짧네. 매니저의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려퍼졌다.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은 마녀가 아니라 내가 될 것 같았다.

그즈음 소영은 자책과 자기연민에 빠져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아라베스크마저 되지 않는다고 자책하며,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아름다움이 발가락 끝까지 정교하게 이어지지 않는다고 괴로워했다. 혹여나 발목에 무리가 갈까 두려워하면서도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가도 하필 공연 날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다고 하며,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곤 했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깨는 날도 많았다. “검은 바닷속에 갇히는 악몽을 꿨어. 온통 새카만 바닷속에서 움직이는 건 나뿐이었는데, 어둠 그 자체인 바닷물이 눈으로, 코로, 입으로, 귀로 밀려 들어와 결국 내가 터져버렸어. ” 소영은 이불을 걷어 내고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소영에게 소리쳤다. 나도 피곤하다고, 제발 그만하라고, 너만 왜 이렇게 유난이냐고. 되짚어보면 그렇게 맞받아칠 일도 아니었다.

음식을 만들어놓아도 소영은 먹지 않았다. 점점 더 야위어가면서 자꾸 체한 기분이 든다고 명치를 두들겼다. 뼈밖에 없는 소영의 가슴팍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화를 냈다. 자꾸 왜 그러냐고, 먹은 것도 없는데 체할 리가 있겠냐고, 그러다 말라 죽고 싶냐고, 제발 그만 좀 하라고, 너만 힘든 게 아니라고. 나는 소영의 손에 억지로 숟가락을 쥐여 줬고, 소영은 숟가락을 던지며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위태로운 날들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렇게 부딪힐 일도 아닌 것들에 예민하게 굴었다.

그날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모든 것이 깊게 가라앉은 저녁이었다. 바람은 습했으며, 창백하게 부서지는 달빛이 가지 사이를 통과하며 물웅덩이를 비추던, 그런 밤이었다. 거리는 적당히 소란스러웠으며, 적당히 붐볐다. 꽃잎이 우산 위로 떨어지다가, 옷자락에 달라붙다가, 땅 위로 내려앉았다. 거리는 분홍색 점묘화로 찍어낸 것처럼 물들어갔다.

선물을 사서 돌아가는 길이었다. 맥 빠진 얼굴로 나를 우두망찰 바라보던 얼굴이 떠올랐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려고 했다. 내가 심한 말을 했다고, 내가 잠시 뭐에 홀렸던 것 같다고 말하려고 했다. 새로운 토슈즈를 신고 발목을 푸는 소영의 모습을 떠올렸다. 쇼핑백을 달랑거리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버스 정류장에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바쁜 걸음을 내디디고 있었다. 빠른 걸음과 느린 걸음, 구두와 운동화, 그리고 그 밑에서 흔들리는 그들의 그림자를 흑막 같은 어둠이 덮었다. 발에 치이는 그들의 하루가 안쓰럽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건너편에 소영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소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서운한 마음이 그대로였는지, 아니면 정말 나를 모지 못했는지 소영은 고개를 숙이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노란 번호판을 단 택시와 여러 대의 자동차가 분자처럼 빽빽하게 들어서 도로는 답답한 모양새였다. 밀도 높은 움직임이 이어졌다. 도로가 한창 밀릴 시간이었다. 라디오 디제이는 도로가 정체 현상을 빚고 있으니 빗길 운전에 유의하라고 말하며 마무리 인사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치킨집 로고를 단 오토바이가 좁은 도로를 빠르게 달려왔다. 자동차 사이를 이리저리 피하는 모양새가 위태로웠다. 경적 소리와 바퀴가 빗길에 미끄러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신호가 바뀌고,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인파 속으로 사라진 소영의 모습을 찾기 위해 몸을 들썩거렸다. 색색의 우산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보고, 쇼핑백을 들여다보고, 핸드폰을 들어 괜히 얼굴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익숙한 번호를 누르며 귀에 가져다 댔다. 찬바람이 얼굴에 닿았다. 솜털이 곤두서며 몸이 떨렸다. 습기의 냄새가 공기에 가득했다. 귀에 익은 통화 연결음을 들으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빗방울이 손바닥에 닿으며 작게 부서졌다. 봄비치고는 차갑고 많은 양이었다. 물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았다.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웅성거리는 소음이 이어졌다. 전화를 받지 않는 소영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던 참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가 돌아갔다.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여러 켤레의 신발 사이로 익숙한 손가락이 보였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았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빗물에 젖어가는 굵은 머리카락. 나는 이어폰을 빼며 눈을 깜빡거렸다. 앞으로 꺾이는 무릎을 바로 세우며 걸음을 옮겼다. 자꾸만 벗겨지는 구두가, 미끄러지는 빗물이, 떨리는 다리가 원망스러웠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길이 길게 늘어진 것 같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빗물을 튕겨내고 있는 헬멧과 헛돌고 있는 바퀴와 차갑게 식어가는 치킨과 절규에 가까운 비명을 내뱉고 있는 남자가 보였고, 그 뒤에서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는 소영이 보였다. 소영은 천천히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눈에 띄게 떨리는 몸이, 손바닥을 짚으며 일어서려고 하는 몸짓이 느리게 이어졌다. 나는 소영의 앞에 웅크려 앉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빗물이 쏟아졌다. 끈적끈적하고 기분 나쁜 비였다.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소영의 턱이 덜덜 떨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김이 새어 나왔다. 얼굴은 이미 표정을 잃고, 분노라거나 슬픔이라거나 하는 기본적인 감정들마저 사라진 채로 식어가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들어 소영의 얼굴을 가렸다. 꽃잎이 팔랑거리며 소영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에이 씨. 바닥에 흩어진 치킨 조각을 보며 배달원이 뇌까렸다. 쇳소리에 가까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느리게 고개를 돌리며 배달원을 쳐다보았다. “다친 건 피차 똑같은 것 같으니까, 적당히 넘어갑시다. 유난 떨 필요도 없겠구만.” 그가 우리를 훑으며 내뱉었다. 그 시선이 콜타르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입을 벙긋거리며 적당한 어휘를 찾아 망설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굵은 빗방울이 우산을 때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쇼핑백은 사람들 발에 치이고, 비에 젖어 그 형태를 잃어가고 있었다. 찢어진 쇼핑백 사이로 분홍색 리본 끈이 보였다.

일상을 살아가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는 상처였다. 하지만 소영은 두 번 다시 나비처럼 날아다닐 수 없었다. 재활치료를 하는 동안 모든 것은 엉망이 되었다. 가장 기본적인 자세마저 지적받아야 했고, 집요하게 연습하던 도중 앓던 발목이 다시 문제가 되었다. 소영은 그렇게 별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등 뒤로 미지근한 체온이 닿았다. 소영이 굼뜬 손놀림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가 무언가 부탁하고 싶을 때 주로 하던 몸짓이었다. 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느새 아침이 밝아왔다. 어슴푸레한 햇살이 거실을 물들이고 있었다. 징그럽고도 다정한 햇살이었다. 주위가 환해질수록 마음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소영이 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동백꽃이 보고 싶어.” 혼곤한 목소리였다. 깊게 가라앉아 있고,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 같았다. 나는 몸을 돌려 소영을 쳐다보았다. 반평생을 살며 흐트러지지 않았던 등이 구부정하게 휘어있었다. 벌레가 거실을 배회하다 중간에 잽싸게 방향을 틀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건조하고 냉랭한 바람이 불었다. 겨울과 봄의 중간이었다. 눈이 내릴 것 같았다. 맑은 하늘이었는데, 왠지 그럴 것 같았다. 구름이 땅으로 쏟아질 것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는 얼굴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소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영의 등 뒤로 골목이 길게 이어졌다. 구불구불 이어진 비탈길을 따라 오래된 나무가 즐비해 있다. 나무마다 세월의 흔적이 여실히 드러났다. 골목은 미로처럼 엮여 있었다. 곡선의 길 끝에 다다르면 또 다른 길이 가지를 뻗듯 이어졌다. 안으로 비집고 들어갈수록 꽃냄새가 짙어졌다.

골목의 끝에 서서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높낮이가 다른 돌계단이었다. 계단 곳곳이 깨지고 금이 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커다란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위태롭고 불길하면서도 예스러웠다. 불편한 조화였다. 우리는 그것들을 잠시 바라보다 걸음을 뗐다. 가파른 경사에 숨이 가빠졌다.

산길을 따라 형성된 섬은 바다와 마주하고 있었다. 바다에서 올라오는 물안개가 나무 사이를 가득 메웠다. 붉은 바람이 불었다. 동백꽃이 물안개와 섞이며 오묘한 광경을 연출했다. 숨을 들이마시자 안개의 냄새가 온몸으로 펴졌다.

물속에서 번져가는 피 같아.

소영이 동백나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리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것들을 응시했다. 그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낼 것처럼 끈질긴 시선이었다. 불안한 침묵이 흘렀다. 소영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여과되지 못한 기억이 물안개 속에서 피어올랐다. 기억은 부패하면서 진한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부패한 기억에서는 짙은 어둠의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허공으로 풀려 들어가 그 일부가 되었다.

동백꽃은 우리가 좋아하는 꽃이었다. “가장 아름다운 꽃이 뭐라고 생각해?” 소영이 목을 끌어안으며 물었던 적이 있다. 로션 향인지, 그녀의 살 냄새인지 모를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창 너머의 세상은 온통 하얬다. 눈으로 가득한 세상에 우리만 남은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소담스럽게 쌓인 눈 위로 흩어지는 햇빛과 이따금 바람이 불면 회오리치며 날아오르는 눈보라, 등 뒤에 닿는 따뜻한 체온과 주위에 가득한 분홍색 꽃향기. 그 속에서 나는 동백이라고 대답했다.

“가장 싸늘한 계절에, 시린 바람을 견디며 그 어떤 것보다 아름답게 피어나거든. 꽃이 질 때조차 꽃잎은 시들지 않아. 서로 흩어지지도 않아. 단지 그 상태 그대로 송이째 떨어지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눈물 나게 아름다워. 마치 우리처럼.”

내 말을 들은 소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웃었다. 그 목소리가 심장을 간지럽혔다. 그 환한 미소가 머리에 박혔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창밖에서 눈보라가 일었다.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소영이 물었다. “동백의 꽃말은 뭐야?” 나는 붉게 물든 그녀의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한다.”

동백나무 아래, 동백이 가장 흐드러지게 흩어진 곳에서 소영은 멈췄다. 그녀는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토슈즈를 꺼내 신었다. 미처 선물하지 못했던, 비에 젖어 눅눅해진 채로 방치되었던 토슈즈였다. 물안개가 내 목을 옥죄어 오는 것 같았다. 살갗이 따끔거렸다. 자세가 경직되고 호흡이 가빠졌다. 명치가 꽉 막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가까스로 팔을 뻗었다. 엷은 미소가 소영의 입가에 물결처럼 번져갔다.

토슈즈의 리본을 묶는 손길이 정갈했다. 소영은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양 무릎을 굽히며 인사했다. 파도 소리와 꽃잎이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를 들으며 소영은 춤췄다. 물안개를 가르는 손가락이 우아했으며, 곧게 펴진 척추의 움직임이 아름다웠다. 감정이 고조됨에 따라 동작도 빨라졌다. 소영은 한쪽 다리에 반동을 주고 뛰어올랐다.

붉은색의 로맨틱 튀튀를 입고 허공을 가로지르던 소영의 모습이 생각났다. 발목 위까지 내려오는 로맨틱 튀튀를 입고 허공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붉은 꽃잎이 천천히 피고, 떨어지는 모습 같았다. 환상 같던 모습이 사라지고,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소영의 모습이 보였다. 숨 막히는 아름다움은 그대로였다. 바닷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무너뜨릴 것처럼 사나운 바람이었다. 바닥을 수놓은 동백꽃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소영의 주변으로 꽃바람이 일었다. 바람에는 소금기가 묻어 있었다. 눈이 따가운 바람이라 나는 소영을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툭, 동백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바람이 멎었다.

소영은 붉은 동백꽃 속에 파묻혀 있었다. 시큼텁텁한 냄새가 알싸하게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나는 소영의 이름을 부르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더듬거리는 손으로 불을 켰다. 급하게 구한 방이라 곳곳에 낡은 흔적이 많았다. 나프탈렌 냄새와 물이 썩어가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시큼한 악취였다. 여러 마리의 하루살이가 백열등 주변을 잉잉거리며 날고 있었다. 거울에 여러 사람의 손때가 묻어 있어 더 낡고 오래된 느낌을 들게 했다.

소영은 분명 거울을 보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거울을 두고 시선이 마주쳤다. 텅 빈 얼굴이 기묘했다. 깊게 가라앉은 얼굴 위로 미소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공기가 음산하게 얼어붙었다. 불길한 침묵이 흘렀다. 파우치를 뒤적거리는 손길이 가지런했다. 눈을 마주치며 웃는 모습이 위태로웠다. 후들거리는 무릎을 세우며 소영에게로 다가갔다. 자꾸만 더뎌지는 발걸음에 신발이 벗겨졌다. 발에 닿는 바닥이 금속처럼 시렸다.

“오지 마. 죽어버릴 거야.” 소영이 칼날을 목에 대며 말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나는 그 자리에 박힌 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팔이, 다리가 뒤틀리며 괴기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소영이 무릎에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칼날이 소영의 피부를 스쳤다. 그 위로 좁쌀 같은 핏방울이 맺혔다. 핏방울이 모여 다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선연한 색깔에 소름이 돋았다. 소영은 흘러내리는 피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 눈빛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 같았다. 흥건하게 고인 핏물이 소영의 발바닥을 적셨다. 벌어진 상처에서 점점 더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나왔다. 소영이 상처 위를 누르며 나를 쳐다보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웃음기가 번졌다. 피비린내가 습기의 냄새에 섞여갔다. 소영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새하얗게 누워있는 소영의 옆에 앉았다. 푸석해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땀에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어 있고, 입술은 각질이 일어 금방이라도 갈라질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소영의 무릎을 만지작거렸다. 붉은 상처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나는 힘겹게 고개를 내저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왜 하필 소영이었을까. 그 많은 사람 중에, 하필 소영이어야 했던 이유가 있었나. 너무 순식간의 일이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는데, 상처는 평생 따라다니는 것이 되었다. 몇 번이고 그 장면을 되짚어보아도 결과는 같았다. 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까슬까슬한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발끝까지 전해졌다. 내가 건너갔어야 했다. 그날 길을 건넌 게 소영이 아니라 나였다면, 아니 어쩌면 애초에 소영과 다투지 않았다면, 차라리 소영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소영을 이해하고 다독여줬다면, 어쩌면 소영은 여전히 나비처럼 날아다니고, 별처럼 빛나고 있겠지. 전혀 관계없는 타인은 이해하려고 했으면서 왜 소영은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창밖의 세상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이 올 것 같았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영이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봤다. 내뱉는 숨에 하얀 성에꽃이 피었다. 바람이 창을 흔드는 소리가 요란했다. 소영이 창을 열어 팔을 뻗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소영의 손바닥으로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미안해.

소영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아슬아슬하고 쓸쓸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소영이 두 다리를 내리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는 빗물에 젖은 손을 닦아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쉰 목소리가 뱉어졌다.

네가 미워. 그래서 미안해. 근데 떠나지 마.

두서없는 말들이 이어졌다. 소영이 나를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근데,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살기가 무서워.

소영의 목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차라리 인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흐릿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머리 위를 쓰다듬는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소영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심장이 출렁거렸다. 소영이 흔드는 징검다리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이는데, 우리의 시간만 빨리 움직였다.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소영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너는 지금 행복하니.

거미 같은 눈빛이 나를 옭아맸다.

 

비가 내리고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많은 것이 떠오른다.

하나, 둘, 셋. 하면 뛰어내릴 거야. 소영의 말이 신기루처럼 피어났다. 옷자락이 바닷바람에 펄럭이며, 그녀의 몸피를 여실히 드러냈다. 굵은 흑발이 아슬아슬하게 손끝을 스치며 멀어졌다.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혀 움직일 수 없었다.

감은 눈 위로 두 개의 종아리가 떠올랐다. 아주 천천히 떨어지다가, 바람에 밀려 다시 떠올랐다. 피멍이 번져 얼룩덜룩한 종아리. 순백색의 클래식 튀튀를 입은 채 황홀한 표정으로 떨어지고 있는 발레리나. 칠흑 같은 바다 위로 동백꽃이 떨어졌다.

허공에 희미하게 떠 있던 어둠이 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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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당선작 심사평


  제33차 <창작콘테스트> 동상은 소설부문 전정언 씨의 「동백의 춤」를 선정했다.
당선자께선 본 당선을 계기로 향후 한국 문단, 더 나아가 세계 문단에 우뚝 설 수 있게끔 
보다 치열한 정진이 있기를 기대한다.


소설가 김영찬 / 소설가 김충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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