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의 10가지 조건<아홉번째>
- 시인 박남희
9.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발견의 눈을 길러라
시인은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남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보아내는 자이다. 그것은 시인이 창조적인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인 눈으로 세상을 보면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보인다. 이런 것을 어떤 시인은 발견의 눈이라고 하기도 하고 직관의 눈이나 마음의 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표현은 각자 다 다르지만 시인은 남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은 대상을 새롭게 바라볼 뿐만 아니라 대상 속에 숨어있는 것들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직관력에서 생겨난다. 그러므로 시인은 끊임없이 대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그 속에 숨어있는 것들을 찾아내어 새로운 언어로 재창조해 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재창조 과정에서 주의할 점은 대상을 바라보는 창조의 눈과 언어가 일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대상을 새롭게 보았더라도 그것을 언어로 표현해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시인의 상상력은 한 개체의 내면뿐만 아니라 광활한 우주까지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시인은 이러한 상상력을 순간의 언어로 일체화시켜서 표현해내는 자이다. 이렇듯 시를 쓰는 행위는 사진 찍기와는 달라서 시를 쓰는 과정에서 창조적 상상력이 발현되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관념이나 생각까지도 구체적인 이미지나 묘사를 통해서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 순간적인 발견이나 깨달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시상(詩想)은 기독교에서 신의 임재를 나타내는 에피파니(epiphany), 즉 현현’(顯現)개념과 서로 상통하는 바가 있다. 에피파니는 겉으로 보이는 현상의 옷을 벗고 사물의 본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발견의 시학에 맥락이 닿아있다. 시인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시학적 의미의 에피파니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시인이 사물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해 내는 것은, 다른 관점에서 보면 시의 신이 열린 시인의 마음 문을 통해서 사물 속에 숨어있던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이렇듯 시는 이미 사물 속에 숨어있던 것이 시인의 언어적 에피파니를 통해서 구조화되어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나면서 못 만나는
- 유안진
꽃은 소리 없이 피고
바람은 모습 없이 불어도 당연하게 여기면서
소리 안에 갇힐 수 없는 음성이
소리로 안 들린다고
모습 안에 갇힐 수 없는 모습이
모습으로 안 보인다고
없다고 한다
별이기도 눈물이기도 한잔의 생수이기도 하는 온갖 모습인 줄 몰라,
언제 어디서나 마주치면서도 알아보지 못한다
풀벌레 소리이기도 아기 옹아리 소리이기도 하는 온갖 소리인 줄 몰
라, 언제 어디서나 들려오는데도 알아듣지 못한다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고, 메뚜기가 내년을 몰라도, 내일과 내년이
있는 줄은 알면서
모습은 귀로 들으려 하고
소리는 눈으로 만나려다가
늘 어긋나고 만다
아무리 마주쳐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신神을 닮았어도 모품(模品)은 이렇다
지평선
- 위선환
삽시간이었다
한 사람이 긴 팔을 내려 덥석 내 발목을 움켜쥐더니 거꾸로 치켜들고는 털털 털었다
부러진 뼈토막들이며 해묵은 살점과 주름살들이며 울컥 되넘어오는 욕지기까지를 깡그리 내쏟았다
센 털 몇 올과 차고 작은 눈물 한 방울도 마저 털고 나서는
그나마 남은 가죽을 맨바닥에 펼쳐 깔더니 쿵! 키 높은 탑신을 들어다 눌러놓았다
그렇게 판판해지고 이렇게 깔려 있는데
뿐인가
하늘이 살몸을 포개고는 한없이 깊숙하게 눌러대는 지경이다
(탑 뿌리에 잘못 걸렸던 하늘의 가랑이를 그 사람이 시침 떼고 함께 눌러둔 것)
잔뜩 힘쓰며 깔려 죽는 노릇이지만
이건,
죽을 만큼 황홀한 장엄(莊嚴)이 아닌가
사지에서 구름이 피고 이마 맡에서 별이 뜬다
달북
- 문인수
저 만월, 만개한 침묵이다.
소리가 나지 않는 먼 어머니,
그리고 아무런 내용도 적혀있지 않지만
고금의 베스트셀러 아닐까
덩어리째 유정한 말씀이다.
만면 환하게 젖어 통하는 달.
북이어서 그 변두리가 한없이 번지는데
괴로워하라, 비수 댄 듯
암흑의 밑이 투둑, 타개져
천천히 붉게 머리 내밀 때까지
억눌러라, 오래 걸려 낳아놓은
대답이 두둥실 만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