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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0 19:38

꽃샘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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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



   두 여자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자 목련에서 채 피지 못한 봉우리가 통째로 떨어졌다. 바야흐로 꽃을 시샘하는 추위가 몰려오고 있었다.


*


      깊숙이 뿌리박힌 겨울의 기운을 모조리 빼내려는 듯 땅에서 냉기가 쉼 없이 뿜어져 나왔다. 바람이 잘 벼른 칼끝처럼 예리해졌다. 날 선 바람이 사람들을 향해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바람의 변덕은 첨단컴퓨터조차 예측할 수 없는지 곧 봄이 올 거라는 일기예보는 번번이 빗나갔다. 봄 앞에서 날씨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일기예보를 믿고 얇은 옷을 입은 사람들은 낭패라도 본 듯 불만스럽게 옷깃을 여몄다.

     옷깃을 여미는 사람들 사이로 숙희가 바람을 맞고 서있었다. 저가의 옷을 박리다매로 파는 대형 체인점 옷 가게 Forever 21는 영원토록 스물한 살로 머물길 바라는 젊은 여성들로 언제나 붐볐다. 그곳에서 나온 여자들은 싱그러운 개나리 같은 노란색 쇼핑백을 빠짐없이 들고 있었다. 마치 스물한 살의 산뜻함이 영원하기라도 할 듯, 쇼핑백을 든 얼굴들은 그들의 젊음에 만족스러워 보였다. 노란 개나리 꽃무리 사이로 검은 가시덤불이 불쑥 솟은 것처럼 숙희는 마냥 그렇게 서있었다. 

     쇼 윈도우가 가감 없이 숙희의 얼굴을 비췄다. 엄마를 닮은 숙희의 얼굴을. 숙희는 “공부 좀 해라”라는 말보다 “엄마 닮았네.”라는 말을 더 듣기 싫어했다. 하지만 숙희는 엄마를 닮았다. 깊게 쌍까풀 져 안으로 꺼진 눈도, 그 눈에 촘촘히 붙어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속눈썹도, 선이 둥그런 유려한 콧선도, 지나치게 작은 입도 꼭 제 엄마 선영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숙희는 사람들이 저와 엄마를 번갈아 보고 “아이고, 숙희는 엄마를 꼭 뺐어, 아주 그냥 도장이네.” 하면 입술을 댓발 내밀기 일쑤였다. 엄마를 닮아 예쁜 얼굴을 가졌것만, 숙희는 엄마를 닮은 제 얼굴에 진저리를 쳤다. 숙희는 엄마와 다른 점을 찾기 위해 “아냐, 나는 엄마 보다 눈이 좀 더 크잖아. 코도 분명 틀려.” 하며 인상을 폈다, 구겼다 했다. 이맛살을 찌푸린 표정마저 엄마와 똑같다는 걸, 숙희는 남자와 잠자리를 갖고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이 인이어를 끼고 무전기를 통해 말을 주고받으며 사뭇 삼엄하게 입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워낙 유동인구가 많은 곳인데다 만만한 가격에 여고생들까지 들락날락 거려 북새통을 이루는 바람에 옷 몇 가지를 훔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필요한 것은 돈을 주고 사기보다는 훔친 적이 많았던 숙희에게는 더욱더 말이다. 그렇지만 숙희는 쇼윈도우 앞에서 머뭇거렸다. 왠지 모르게 떨리는 것이었다. 만만이 가게에서 처음으로 사탕을 훔쳐 나왔을 때조차 떨지 않았던 숙희였다. 그때 숙희 나이 고작 아홉이었다. 훔친 사탕을 빨며 여봐란 듯, 집에 들어갔을 때 강희는 바닥에 배를 깔고 수학 숙제를 하고 있었다. 빨강 색연필 소나기를 맞은 강희의 수학 점수는 20점이었다. 숙희는 속으론 오빨 비웃었지만 알은 체도 않고, 매주 봉사활동을 오는 여대생 언니가 눈물까지 보이며 주고 간 바비 인형의 머리를 정성스레 빗겨주며 훔친 사탕만 쪽쪽 빨아 먹었다. 그 인형은 숙희가 최초로 가진 오롯한 ‘제 것’이었으므로 인형을 받았을 때 숙희는 퍽 기분이 좋았다. 여대생이 왈칵 눈물을 터뜨려 산통만 깨지 않았더라면 숙희의 기분은 아마 더 좋았을 것이었다.

 

   -이 불쌍한 것……!


     여대생이 눈물을 흘리며 숙희를 격하게 안는 꼴은 신파극의 여배우처럼 제법 비감한 모습을 갖췄으나, 역시 신파극의 대사처럼 어딘가 모르게 과장돼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는 비닐판자촌에 사는 숙희를 진심으로 가엽게 여겨서가 아니라, 같이 온 선배라는 남자에게 여자로써의 순수함을 내보이기 위한 가증스런 거짓 눈물일 뿐이라는 것을 숙희는 금세 눈치 챘다. 여대생이 그녀의 가방에서 윤기가 나는 금발의 바비인형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숙희는 여대생의 팔목을 앙 물어 그녀에게 ‘하훼마을 아이들의 진면목’을 보여줄 셈이었다. 신파극은 바비 인형을 소유한 숙희가 갑자기 사래가 걸려 “고, 고맙습니다.” 했던 순간 절정을 찍고 순진한 대학생 둘이 깊이 감동한 것으로 막을 내렸다.

     여동생이 사탕을 빨아 먹고 있는 꼴이 아니 꼬왔는지 강희는 날랜 동작으로 숙희의 사탕을 뺏었다. 성장이 빠른 강희는 12살이었지만 몸집은 중학생에 가까웠고 그래서 3살이나 어린 여동생의 사탕을 빼앗는 꼴은 그악스럽고 거칠었다. 오빠가 사탕을 빼앗았지만 숙희는 평소처럼 주먹으로 오빠를 올려붙이거나 날카롭게 기른 손톱으로 꼬집어 대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사탕 하나를 더 꺼내 까먹었다. 그 모습은 아주 여유 있어보였고 강희는 바싹 약이 올랐다.


     -야, 너 이 사탕 어디서 났어?

     -만만이네 가게서.


     만만이네 가게, 라는 숙희의 말에 강희는 할 말을 잃고 꿀꺽 침만 삼켰다. 동생에게서 사탕을 빼앗던 심술궂은 표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대신 여동생에 대한 존경심이 강희의 얼굴에 떠올랐다. 하훼마을 아이들에게 만만이네 가게를 턴다는 것은 할례와 같은 통과의례였다. 

     J동 하훼마을……. 동화에나 나올 법한 하얀 울타리에 둘러싸인 J동 하훼마을은 사랑스럽고 평화로운 외관과는 달리 내관은 어둡고 음침한 비닐판자촌이었다. J동 하훼마을은 그곳에 있었으나, 존재하지는 않았다. 하훼마을은 정부로부터 어떤 행정적 지원도 받지 못 했고, 심지어 하훼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지방자치단체에서 주민등록증 발급을 거부당해 타지역에 사는 친인척의 집에 가짜로 주민등록을 해야만 했다. 2m의 하얀 울타리 안에 아무렇게나 만든 집은 달동네의 집들보다 형편없이 후져있었다. 슬레이트 지붕을 얹으면 먹고 살만한 집에 속할 정도였다. 비닐로 대충 비를 막고 위에 타이어를 얹어 무게를 더하면 그게 지붕이요, 집인 곳이었다. 누더기를 기운 듯 흉물스러운 하꼬방 50채가 경계 없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건넛집의 기침소리며 심지어는 밥상에 수저 내려놓는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려왔다. 비가 내리면 똥물이 길을 타고 흘러 썩은 냄새가 났고 해가 나면 말라붙은 똥물 냄새가 진동을 했다. 낮은 지붕의 집들은 2m의 울타리 안에 완벽히 은닉 돼 있었다. 하훼마을 사람들은 밖을, 밖의 사람들은 하훼마을의 존재를 쉬이 알 수 없었다. 하훼마을은 마음먹고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쑥 빼는 정성 없이는 결코 알 수 없이 은밀히, 그러나 확실히 그곳에 있었다.

     하훼마을 끄트머리 동네의 유일한 슈퍼마켓이요, 잡화가게요, 저녁엔 술가게도 되는 만만이의 가게가 있었다. 만만이의 가게에는 간이 침상과 등받이 없는 플라스틱 의자 몇 개가 있어 저녁엔 어김없이 술상이 차려지곤 했다. 볼이 홀쭉하게 들어간 구멍가게 주인 만만이는 40대였는데 늘 무기력하게 간이 침상에 누워있었다. 물건을 파는 건지 조는 건지 그는 가게 앞 침상에 누워 노상 해바라기만 했다. 파리채를 쥐고도 파리를 쫓지 않았다. 만만이에 대한 소문은 여러 가지였다. 만만이에게 잘못 걸리면 몽둥이로 볼기짝을 만대 정도 맞고 엉덩이가 만두처럼 터진다는 소문도 있었고, 만만이가 실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다 남산에서 심한 고문을 받아 머리가 돌아버린 천재 대학생이란 소문도 있었다. 장애물은 언제나 모험을 더 달콤하게 만들기 마련이었다. 만만이에 대한 출처 모를 소문들은 하훼마을 아이들의 승부욕을 자극시키고도 남았다. 그래서일까? 만만이 가게를 성공적으로 털었다는 어느 공고생의 이야기는 아이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퍼져있었다.


     -그 오빠가 만만이 가게에서 소주를 무려 열병이나 훔쳤대.

     -소주를?

     -아냐, 소주 다섯 병에 담배 한 보로라고 했어.


     만만이의 구멍가게를 터는 것, 그것은 어쩌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들과 달리 장애물 투성이인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하훼마을 아이들의 숙명인지도 몰랐다.

     숙희의 핸드폰이 울렸다. 숙희는 핸드폰 대신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찌뿌듯한 잿빛이었다. 숙희가 전화를 받자 안에서 생전 처음 듣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안개처럼 음습하게 퍼져나갔다. 숙희는 한참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쇼윈도우 안에선 여대생이 주고 간 바비인형의 눈동자 색과 꼭 같은 하늘색의 원피스가 삼만 오천 원이란 가격표를 달고 있었다. 숙희가 그렇게 아끼던 바비인형은 머리가 분해되어 어느 지붕 위로 던져졌다. 숙희는 하늘색 블라우스에서 시선을 고정 시킨 채로 대답했다.

     저, 안녕하세요, 숙희가 전화기 안의 낯선 남자에게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첫마디를 건넸을 무렵 숙희의 엄마 선영은 집에서 화장 중이었다. 파운데이션을 바르려는 선영의 손놀림은 조급했고 몇 십 년 동안 해오던 화장은 처음 하는 투로 서툴기까지 했다. 앗차, 하는 순간 선영은 파운데이션을 바닥에 떨어트렸고 파운데이션은 지진이 난 땅처럼 쫙쫙 갈라져 조각조각 흩어졌다. 이 아까운 것을 어째, 하다가 쉽게 깨지는 모양새가 역시 싸구려 값을 한다며 뇌까리자 아까운 마음도 금세 사라졌다. 선영은 파편들을 대충 쓸어 담아 파운데이션 통에 넣은 다음 퍼프로 꾹꾹 눌러 다졌다.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처바르며 문득, 선영은 아침에 퉁이 잔뜩 나 집을 나간 딸 숙희가 떠올랐다.

     선영은 선영 나름대로 딸 숙희가 자신을 닮았다는 사실을 내켜하지 않았다. 그건 숙희가 엄마를 닮았다는 사실을 싫어하는 것과는 좀 다른 이유에서였다. 숙희가 엄마 선영의 별 볼 일 없는 삶을 답습할까봐 제 얼굴을 싫어한 반면 선영은 자신을 지나치게 닮은 숙희에게서 제 어릴 적 모습을 발견하는 까닭에 숙희의 얼굴이 꺼려졌다. 지난주부터 엠티를 간답시고 새 옷을 사달라며 끈덕지게 자신을 보채는 숙희의 투정에서 선영은 소싯적 자신의 과오를 떠올렸다. 선영은 고입고사가 끝난 뒤, 엄마에게 파마약을 사달라고 끈덕지게 졸랐다. 그러나 선영모는 삼일간의 치열한 단식투쟁에도 끝내 선영에게 파마약을 사주지 않았다. 이것은 선영모의 의견이라기보다는 시어머니, 즉 선영의 친할머니의 의견이 크게 반영된 것이었다. 선영이 단식투쟁을 한지 삼일 째 되던 날, 선영모는 먹는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선영이 파마 그까짓게 뭐라고 굶기까지 하는 게 한편으론 안쓰러워 쌈짓돈을 줄까 잠시 고민했다. 선영모가 농에서 쌈짓돈을 꺼내려 할 때, 시어머니가 장죽으로 며느리의 손등을 툭 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비녀가 고우면 규수도 머리쓰개를 하지 않는 법이다.

     

     운도 지지리도 없지, 눈이 파란 코쟁이 양놈을 구경하러간답시고 마실에 나섰던 남편이 탱크에 깔려죽고 고부갈등은 극에 달했다. 시어머니는 선영모에게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고 욕하기 일쑤였고, 선영모는 선영모 나름대로 과부로 사는 것도 서러운데 사사건건 자신에게 서릿발을 세우는 시모가 마뜩치 않았다. 선영모는 시어머니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었는데, 비녀가 고우면 규수도 두루마기를 하지 않는 다는 시모의 말은 참으로 그럴싸했다. 아니, 그럴싸한 정도가 아니라 선영모는 삶의 정체를 번연히 깨달은 것 같았다. 선영모는 쌈짓돈을 도로 농에 넣었다. 그건 마침 시모가 장죽으로 담배를 태우고 있어서는 아니었다. 시모는 툭하면 담배를 펴다 말고 장죽으로 선영모의 머리통을 갈기곤 했던 것이었다.

    선영모가 시모의 말을 따른 이유는 뼈아픈 자기반성에서 비롯됐다. 그 자신도 댕기머리 유난히 잘 묶인 사월 초파일 어머니가 가지 말라고, 가지 말라고 그렇게 뜯어 말렸던 탑돌이를 하러 절에 가지 않았더라면 남편을 만나지 않았을 테고, 그랬더라면, 버드나무 밑에서 남편이 자신의 고름을 풀지도 않았을 테고, 옷고름이 풀리지 않았더라면, 첫순정을 받쳤다는 이유로 허세만 부릴 줄 알지 쥐뿔도 없는 몰락한 양반님네 장손 며느리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렇담 툭 하면 장죽으로 며느리의 대갈통을 갈구는 시모 밑에서 과부로 살지 않았을 테고 장사치라도 배불리 먹여주는 남자를 만나 밥 굶을 걱정 없이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쌈짓돈을 도로 넣어두는 선영모를 보는 시모의 주름진 입에서 담배 연기가 적요롭게 피어올랐다.

     배가 고픈 선영은 어미 몰래 광에 들어가 숭늉 한 대접을 먹기로 했다. 몰래 먹고 입 닫으면 일자무식인 어미는 그녀가 여전히 단식투쟁 중이라고 생각할 것이리라. 선영은 친할머니가 낮잠을 자고 어머니가 장독대를 정성스레 닦는 틈을 타, 광에 몰래 들어가 숭늉 한 사발을 먹었다. 죽을 때가 다 됐는지 친할머니는 한 번 잠에 빠지면 저녁까지 뒤척이지도 않고 잠만 잤고, 어머니는 장독대가 유일한 친구인냥 말을 걸어가며 닦느라 장독대를 닦을 땐 시간 가는 줄도 몰라 했다. 김이 모락 나는 뜨거운 숭늉은 어찌나 맛나고 달던지, 선영은 장독대를 닦다 말고 마당에 고추를 널어놓은 것을 깜빡한 어미가 광으로 들어와 자신을 빤히 보는 것도 모르고 숭늉을 호호 불어가며 쉴 새 없이 먹고 있었다.

  

     -간장 주랴?

     -아, 뜨뜨!


     선영에게 말없이 간장 종지를 꺼내 맑은 간장을 부어주던 선영모는 승자만이 지을 수 있는 호방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하여 모녀의 싸움에서 패배한 건 딸, 선영이었다. 선영은 그 일로 놀러 갈 때면 어미로부터 숭늉 마시러 가냐, 라는 놀림을 받아야만 했다. 선영은 어미에게 들켰겠다, 오기로라도 파마를 하기로 마음먹었고 결국 미용실을 하는 엄마를 둔 친구에게서 당시 거금 천원을 주고 파마약을 구했다. 모든 딸들의 운명은 어쩌면 이렇게 자신의 어미를 배반함으로써 조금씩 완성 되어 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 배반조차 운명의 바퀴 안에 있다는 걸, 그래서 결국은 어미를 닮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어미가 되기 전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파운데이션을 다 바른 선영은 아이라이너 펜슬을 집었다. 아이라인을 그릴 차례였다. 아이라이너 펜슬촉이 무뎌져 있었다. 선영은 커터칼을 꺼냈다. 왼손으론 펜슬 아이라이너를 잡고 오른손으론 커터칼을 잡은 뒤, 엄지손가락에 힘을 조절해가며 아이라이너 심을 돌려 깎았다. 사각, 하고 종잇장보다 더 얇은 껍질이 벗겨지자 안에 단정히 박힌 검은 심이 보였다. 일부러 깎는 수고도 마다 않고 연필처럼 깎아서 쓰는 펜슬 아이라이너를 고집하는 건 액체나 붓으로 된 아이라이너를 쓸 때는 느낄 수 없는 정결함이 그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선영모가 편리한 믹서기 말고 굳이 어처구니를 잡고 힘들게 돌려야 하는 맷돌을 고집하는 이유와 비슷했다. 민태가 제 딴에는 큰 맘 먹고 장모에게 최신 믹서기를 선물으나 선영모는 믹서기도 믹서기를 선물한 사위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생급스럽다, 치워라. 저 칼이 얼마나 예리한진 몰라두 몇 번 써보니 쇠비린내가 진동을 해서 먹을 수가 없어. 싹 갈아버리니 걸쭉한 맛도 없고. 이 맷돌을 봐라, 제 몸을 깎아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게 기특하잖니. 네 친할머니가 살아계셨음 믹선지 민선지 동구 밖에 갖다 버리라고 했을 거다. 느이 서방은 어째 갖다 줘도 이런 걸…….


     다 깎은 뒤, “후후.”하고 바람을 불자 남아있던 재들이 분분히 날렸다. 선영은 깔끔하게 깎여 뾰족해진 아이라이너로 눈점막 안부터 시작해서 눈꼬리까지 세심하게 검은 선을 채워 넣었다. 눈꺼풀 위로 얇은 검은 선 하나를 그리는 일은 외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았다. 잘못 놀린 한 번의 걸음에 모든 것을 망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선영은 한 손으론 눈두덩이를 올리고, 아이라이너를 잡은 한 손으로 점막 위에 촘촘히 아이라이너의 검은 액을 그려갔다. 외줄타기에 모든 인생을 건 줄꾼 어름산이 만큼 숙연한 표정이었다. 다 그렸다, 싶었는데 손이 빗나갔다.


     ‘거의 다 왔는데…….’


     선영은 휴지에 침을 묻혀 실수를 수정하려고 했지만 검은 액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다 지웠다고 생각했지만, 검은 얼룩이 선영의 눈에는 보였다. 선영은 우울한 마음으로 콤팩트에 붙어있는 동그란 거울을 보며 휴지로 박박 눈을 문질렀다. 선영의 눈이 거울에 담겨있다. 웅숭깊이 들어간 선영의 눈에 지난날의 실수와 울분들이 넘실거렸다. 숙희가 옷을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더라면 결코 떠오르지 않을 그런 쓴 기억의 일부가 선영을 괴롭혔다. 파마를 한 것은 사실 그리 중요한 사건이 아니었다. 파마를 하고 갔던 곳이 중요했다. 파마를 한 다음 스카프로 멋을 내고 D대에 벚꽃놀이를 갔던 그 날, 선영은 처녀성을 잃었다. 잃었다고 하기에는 뭐하고 법대생이라는 남자에게 자신의 처녀성을 16살이란 나이에 줘버린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이는 법대생도 아니었고 대학생은 더더욱 아니었던 선영의 남편, 민태였고 민태 역시 고등학생으로 그저 여대생을 보러 왔을 뿐이었다.

     선영은 한 번 더 쓸 수 있겠다 생각하며 파운데이션 뚜껑을 닫아 화장대 위에 올려놨다. 펜슬 아이라이너의 뚜껑을 덮자 꼭 맞물리는 것들의 경쾌한 소리가 났다. 커터칼 핸드를 내리자 드르륵 하며 커터칼이 집속으로 쏙 들어갔다. 로즈핑크 루주를 바르는 것을 끝으로 선영은 단장을 마치고 집을 나섰다.

문을 열자마자 시베리아에서부터 불어 온 한기가 선영을 밀쳤다. 선영은 바바리코트 앞섬을 손으로 꼭 말아 쥐었다. 바바리코트를 입기엔 추운 날이었지만, 노인의 취향을 고려해 참기로 했다. 노인은 꼴에 취향이랍시고 오드리 햅번을 좋아했는데,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햅번이 바바리코트를 입고 나왔다며 한사코 선영에게 바바리코트를 사서 입히는 것이었다. 노인은 선영에게 알몸으로 바바리코트만 입혀 놓고 보기를 즐겨했다. 그러니까, 노인의 취향을 꼴에 취향이랍시고 비아냥거리는 선영의 이죽거림이 영 틀리 것은 아닌 셈이었다. 무스탕 입은 년을 좋아하면 얼마나 좋아, 선영은 툴툴거리며 하얀 울타리를 밀고 나섰다.


     ‘무스탕 입은 년을 좋아하면 얼마나 좋아, 그렇담 나도 하나 얻어 입었을 텐데, 빌어먹을 영감탱이!’


     선영이 툴툴 거리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을 때, 숙희의 핸드폰이 또 다시 울렸다. 숙희가 뒤를 돌아보자 검은색 그렌져 차량이 숙희를 향해 헤드라이트를 깜빡였다. 숙희는 차문을 열었다.


     -소드68님, 맞으시죠?


     남자는 한 번 더 불면 빵 하고 터질 것 같은 풍선 같이 뒤룩뒤룩 살이 쪄있었다. 손에도 어찌나 살이 두둑하게 붙었는지 핏물을 빼려고 물에 불린 족발 비슷하게 보였다. 남자의 손등엔 혐오스러울 정도로 규칙적이게 검은 털들이 나 있었다. 남자가 숙희의 손을 잡았을 때 숙희는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다음 주에 갈 신입생 MT 때 엄마의 바바리코트를 입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단순히 추위나 열을 피하기 위해 옷을 걸치지 않는다. 더 나은 옷을 입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계급장이었고 다들 더 비싸 보이는 옷을 입기 위해 혈안이 됐다. 교복도 없고 회사원처럼 일정한 틀도 없이 늘 다양한 사복을 입고 수업을 들어야 하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옷 잘 입기는 경쟁에 가까웠다. 숙희는 옷이, 아니, 더 나은 계급장이 절실히 필요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기껏의 돈은 교통비나 식비 등의 생활비로 나갔고 MT를 위해 착실히 모았던 비상금은 오토바이 뺑소니를 친 오빠의 합의금으로 흩어졌다. 월급날은 멀었지만 MT는 바로 다음 주였다. 그래서 숙희는 눈을 질끈 감고 축축이 젖은 남자의 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옷값이 몸값이 되어버린 요즘, 처녀성을 삼십만 원에 판다는 건 그리 손해 볼 일도 아니라고 숙희는 생각했다.

     숙희는 멀어져 가는 하늘색 블라우스를 보며 그 날을 떠올렸다. 정성스레 빗질을 해 인형을 학교에 가지고 가 자랑을 했던 날을 숙희는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여자 아이들이 숙희를 에워싸고 서로 인형 한 번만 만져보게 해달라고 졸랐지만, 숙희는 사뭇 암팡지게 “안 돼! 내 거란 말야.”했다. 그때, 아이들의 소란스러움에 나타난 여선생이 숙희의 인형을 보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숙희를 타일렀다.


     -이건 바비인형이 아니라 비비인형이란다. 메이커를 조악하게 따라한 가짜일 뿐야. 참, 그러고 보니 숙희는 아직 영어를 읽지 못 하는 구나. 어서 알파벳을 떼어야지. 영어를 모르면 앞으로 고생할 거야.


     바비가 아니라, 비비. 숙희는 그 날 학교에 다녀와서 그렇게 아끼던 바비, 아니 비비인형의 모가지를 신경질적으로 비틀어 분해한 다음 지붕 위로 던져 버렸다. 비비의 커다란 하늘색 눈이 숙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숙희가 남자의 차량에 올라탔을 때, 선영은 버스를 탔다.


     ‘보증금 500에 월세 30……. 강희, 그 자식 합의금만 안 나갔어도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었는데. 아이고, 내 팔자야.’


     노인을 처음 만나기 전까지 선영도 다달이 내는 월세를 밀리지 않고 꼬박꼬박 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살고 있는 둥지는 지켜야 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첫경험을 기억하는 것처럼 선영은 처음으로 월세를 밀렸던 날을 제법 소상히 기억한다. 숙희를 낳고 백 일도 치루지 않아 남편 민태가 허리를 다쳐 병원에 입원했을 때였다. 앙앙 울어 젖히는 숙희를 업고 땡깡을 부려대는 강희 입엔 인공젖꼭지를 물린 채 선영은 민태의 속옷을 챙기러 신첩살림을 차린 집에 들렀다가 월세를 걷으러 온 노인과 부딪쳤다. 인터넷뱅킹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은 당시만 해도 매달 주인이 일수 가방을 끼고 월세를 받으러 오곤 했다. 그날, 선영은 숙희와 민태를 옆방에 재우고 처음 노인과 일을 치렀다.

     젊고 싱그럽기까지 한 선영의 육체는 노인을 받기에 충분하고도 남았으나 어쩐지 선영은 노인과 잠자리를 할 때마다 비틀거리게 됐고 정성스레 그린 아이라이너가 다 지워지도록 쓰라린 눈물이 나왔다. 이놈과 또 자면 내가 갈보다, 했으나 그것도 한두 번, 눈만 질끈 감으면 끝나는 일에 월세가 탕감되는 거래는 선영에게 떨쳐낼 수 없는 유혹이었다. 해가 갈수록 노인의 기력이 쇠하니, 선영에게는 오가는 수고가 노인과 치루는 일보다 더 고역이었다.

     차문이 열릴 때마다 차가운 바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선영은 버스문이 열릴 때마다 바바리코트 깃을 여미며 버스를 타는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봤다. 그들의 얼굴을 하나같이 혼곤했다. 이 추운 날, 도로에 넘쳐나는 자동차 한 대 갖지 못해 버스를 타야 하는 그들의 운명을, 선영은 비웃었다. 선영이 내리기 전, 한 여자가 버스 안에 올라탔다. 여자는 노란색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는데, 검은색 활자로 Forever 21라고 써져 있었다. 선영은 떠듬거리며 영어를 읽었다.


     -포……레……버…….


     강희를 임신한 탓에 고등학교 1학년을 중퇴한 선영이 포레버란 영어 단어의 뜻을 기억하는 건, 민태가 보낸 편지 때문이었다. 강희를 임신했다는 선영의 말에 민태는 비틀즈의 <strawberry fields forever>의 가사를 편지에 써서 주었다. 민태도 선영도 가사를 오해하긴 마찬가지였다. 민태는 선영에게 아이를 지우잔 뜻으로 영어 좀 한다는 친구에게 체념과 관련된 팝송 가사를 적어달라고 한 것이 비틀즈의 <strawberry fields forever>였다. 편지를 받은 선영 또한 영어 좀 한다는 친구에게 그 뜻을 물어보았다. 친구는 영원한 딸기 밭에 가자는 것이 노래의 내용이라고 가르쳐주었고 선영은 그 뜻을 프로포즈로 받아들여 강희를 지우지 않고 배를 불렸던 것이다. 강희는 오해 속에서, 숙희는 체념 속에서 태어났다. 여자의 노란 쇼핑백에서 선영은 영원한 오해와 함께 그녀의 체념과 마주하는 듯 했다.

     남자가 숙희의 하나 남은 속옷을 벗길 때, 선영은 노인의 속곳을 벗겨 주고 있었다. 이제 갈 때가 다 된 듯, 노인은 발기 된 성기를 꺼내놓을 기력조차 없는지 침대에 가만히 누워 선영의 손길을 받고만 있었다. 선영은 문득 친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억지로 지켜봐야만 했던 염습이 떠올랐다. 치매로 죽을 때까지 엄마를 괴롭히던 친할머니의 몸뚱어리는 생전의 패악스러움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초라했다. 선영은 염을 하는 내내 설피 울던 엄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노인의 속곳을 벗기고 성기를 애무해 주어야 하는 지금, 선영은 어쩐지 시모의 죽음을 두고 엄마가 울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도 느꼈다. 사그라지는 육체의 보잘 것 없음은 육체를 지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겐 저주와도 같은 허무함이었다. 노인의 성기는 선영의 몸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수그러들었다. 노인은 민망한지 다시, 다시 하며 선영을 보챘다. 선영은 여유 있게 웃으며 그럼 한 달 몫 더 주기다? 했다.

     선영이 노인의 위에 있을 때, 숙희는 헐떡이며 움직이는 남자 밑에 깔려 있었다. 울지 않으려고 했지만 눈물은 스스로 생명을 가진 것처럼 절로 눈에서 태어나 절로 볼을 타고 턱밑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천장에 붙은 거울이 숙희의 얼굴을 똑바로 비추었다. 숙희는 지금 이 순간 가장 떠 올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계속해서 떠올라서, 결국 그 사람을 부르고야 말았다.


     -엄마…….


     숙희가 선영을 찾을 때, 선영은 알몸으로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노인은 선영의 가슴을 만지며 오랜만에 풀린 욕정이 주는 개운함을 즐기는 듯 했다. 거울에 비친 눈이 유난히 딸 숙희를 떠올리게 했다.


     ‘추워 죽겠는데 기집애가 얌전히 집구석에 쳐박혀 있을 일이지.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이 날씨에 아르바이트를 갔담.’


     선영은 노인을 졸라 용돈조로 돈을 탈 심산이었고 그 돈으로 숙희의 옷을 사주리라 마음먹었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아이라이너를 그리려는데 아이라이너 펜심 끝이 힘없이 부서졌다.


     ‘빌어먹을, 그리기도 전에…….’


     선영은 커터칼을 꺼내 부러진 아이라이너 끝을 깎았다. 제 몸을 깎듯. 사각, 사각, 얇은 껍질이 벗겨져 나갔다. 그때, 노인이 입을 열었다. 노인이 입을 열자 동태 썩은 내가 훅, 선영의 코로 끼쳐 들어왔다. 흐흐, 노인은 기분 나쁘게 웃었다.


     -나, 말야, 망했어. 아들놈 보증 서준 게 다 날아갔지 뭔가.


     손을 멈추고 선영이 말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집이 남아 있어서. 역시 사람은 집이 있어야 해요. 그렇죠?

     -집도 말아먹었지. 자네하고 마지막으로 보내려고 전화했어. 아직 탱탱하구만.


     선영이 쥔 커터칼이 부들부들 떨렸다. 노인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선영이 바닥에 주저앉아 이미 죽은 그녀의 엄마를 찾으며 오열할 때, 숙희는 화장실 바닥에 쭈구려 앉아 있었다. 손가락엔 불붙은 담배가 들려있었지만 한 모금도 빨지 않았다. 담배가 사그러질 때까지 숙희는 아랫배에 밀려오는 생경한 통증을 느끼며 욕을 뇌까렸다. 숙희는 겨우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앞엔 엄마를 닮았으나 어쩐지 낯선 여자가 빤히 숙희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의 눈은 마스카라가 번져 내려 검게 물들어 흉흉해 보였고, 색이 모두 지워진 입술은 하얗게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 그때 숙희의 맘에 불쑥 떠오른 건, 비비인형을 던져 버린 그 날 초경을 시작했단 사실이었다. 머리를 산발한 채 모가지만 떠있는 비비인형의 대가리는 통째로 낙하한 피지 않은 꽃송이 같아 보였다. 그 꽃송이 같은 모가지가 주는 원인 모를 애통함은 낯선 생리통으로 배앓이를 하는 내내 끈질기게 숙희를 따라다녔다. 초경을 하기에 지나치게 이른 나이었고 매미가 울어대는 짙푸른 하늘의 여름이었다. 숙희가 결코 갖지 못할 여름하늘이었고, 선영은 이미 잊은 지 오래인 여름하늘이었다.


     -병신 같은 새끼! 내 돈 내놔! 내 돈!


     선영은 노인의 얼마 남지 않은 머리채를 쥐고 흔들었다. 노인이 죽는 소릴 해댔지만 선영은 멈추지 않았다. 노인이 어구구, 나 죽네 할 때마다 선영은 더욱 더 세게 노인을 타작했다. 마지막으로 선영이 노인을 바닥으로 밀쳤을 때, 선영의 손엔 여전히 커터칼이 쥐여져 있었다. 바닥에 고꾸라진 노인의 얼굴에 빨간 선이 그어지고 그 선에서 이윽고 피가 흘러나왔다. 선영은 커터칼을 집에 밀어 넣었다. 드르륵, 꼭 맞는 것들이 내는 소리가 음산에게 퍼졌다. 선영이 노인의 지갑에서 고작 삼 만원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숙희는 십 만원을 더 준다는 남자의 보챔에 못 이겨 남자 밑에 깔려있었다. 몇 분 후, 헐떡거리며 남자가 숙희의 가슴팍 위로 쓰러졌다. 사내의 손등에 난 털들이 폐허에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처럼 괴괴해 보였다. 숙희는 화장실에 가서 피우지도 않을 담배에 불을 또 붙였다.

     숙희가 남자와 함께 차를 타고 나왔을 때, 선영은 삼 만원을 바바리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고 노인의 집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선영은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손으로 볼을 감싸 쥐고 구르는 노인이 나 죽네, 나 죽네 하는 꼴이 숫제 우스웠기 때문이다. 선영은 바바리코트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바람 부는 거리를 걸었다.

     선영이 거리를 헤맬 때, 숙희는 남자의 차안에서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여관에서 세수를 하고 나온 숙희의 얼굴은 말갛게 개어있었다. 너무 수수한 맨 얼굴이 보기 싫어 숙희는 차가 덜컹거리는 것도, 남자가 자신의 허벅지를 만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화장을 했다. 숙희는 엄마의 혼곤한 얼굴을 닮은 제 얼굴에 색을 넣었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아이라이너를 잡은 손도 같이 흔들렸다. 화장이 잘 되지 않자 숙희는 얼굴을 찌푸렸다. 얼굴을 찌푸리자 거울 속의 숙희를 닮은 선영이, 아니 선영을 닮은 숙희가 어두운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여자가 아이라이너가 번진 흉한 눈으로 남자의 담배 심부를 하러 차에서 내려 편의점으로 향했을 때, 여자는 바바리코트 여기저기에 피가 묻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여자는 문득 서럽게 울고 싶어졌다. 간장 주랴? 하며 간신히 웃음을 참느라 씰룩거리던 어미의 입매가 떠올랐다. 그리고, 응, 엄마, 하며 실없이 웃던 어떤 소녀의 철없는 목소리가 바람 너머 설핏 바람 속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애초에 없던 것처럼 바람 너머로 빠르게 사라져갔다. 편의점 직원은 여자에게 신분증을 요구했다. 학교를 1년 빨리 입학한 여자는 법적으로 아직 미성년자였고, 여자는 직원에게 괜한 짜증을 부리며 저 검은색 그렌져 차에 있는 아저씨가 시키는 심부름이라고 낮게 말했다. 그러나, 여자가 가리킨 곳에 검은색 그렌져 차는 없었다. 여자의 손가락 너머 남자의 검은색 그렌져 차가 유유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여자는 뛰었다. 한참을 뛰었다. 손엔 담배 값 삼천 원이 들려있었다. 여자는 자신이 있는 곳을 벗어나려 뛰고 또 뛰었다. 팽팽한 바람을 가로지르며 뛰었지만 바람은 더욱 거세게 여자를 밀치었다. 마침내 두 여자가 거리에서 마주했다. 바람이 불자 목련에서 채 피지 않은 봉우리가 통째로 몸을 떨구었다. 바야흐로, 꽃샘 추위였다.


-끝



이유리아

spoon881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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