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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25 12:19

편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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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convenience store

 

버스 정류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저마다 자신의 목적지로 가는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며 버스가 돌아나오는 길 모퉁이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시내를 빠져나가는 길목에 세워진 간이정류장으로 버스들이 모여서 마지막 승객을 태우는데 시외버스터미널로부터 한길을 따라오던 버스들이 이곳에서 각자의 노선으로 흩어진다. 간이정류장이지만 엄연히 매표소도 있고 주위에 주택가도 있어 사람들이 꽤 많다. 시내버스처럼 버스가 자주 있는 편이 아니지만 사람들의 마음엔 꼭 금방이라도 저 모퉁이를 돌아서 자신이 탈 버스가 다가올 것만 같다. 담배를 피는 남자, 전화를 하는 여자, 담배피면서 전화하는 아저씨, 담배피면서 전화하며 음료수까지 마시는 할아버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그 좁은 공간에 머물다 버스에 실려 떠나간다. 버스는 파도와도 같이 사람들을 쓸어가고 또 다른 사람들이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몰려들어 그 자리를 메운다. 그렇게 간이정류장엔 떠나는 사람만 있고 오는 사람은 없다. 그 정류장 옆으로 셔터가 내려 가는 일이 없는 조그만 편의점이 있다. 그 안에 오늘도 한 소녀는 카운터를 지키고 앉아있다.

이제 스물살인 소녀는 갓 대학에 입학했을 때, 새내기로서의 상큼함과 풋풋함을 흘리며 캠퍼스를 누비고 다녔다. 처음엔 모든 것이 신기했지만 대학교란 너무도 빨리 익숙해져 버리는 곳이었다. 소설책에 나오던 캠퍼스의 낭만도, 시트콤에 나오던 짜릿한 사건도 없는 그 자리엔 정형화된 체계 안에서 비슷비슷한 행로를 걷고 있는 청춘들이 있었다. 술은 쓰기만 했고 심하게 취하면 머리가 아프면서 오장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강의실 의자는 강의 분위기만큼이나 딱딱했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 그리고 리포트로 성적을 매기는 것은 고등학교의 잔상(殘像)과도 같았다. 확실히 학업에 대한 분위기는 고등학교 때보단 훨씬 널널했다. 공부를 하든 안하든 자유로웠고 옆에서 공부해라 이거해라 저거해라 하는 사람도 없었다. 정해진 교과과정 외에 어디서 무슨 활동을 하든 내 자유였다. 하지만 성적에 대한 압박감은 어떻게 보면 고등학교 때보다 더했다. 장학금이 걸려 있었기 때문인데 대학교 때 받는 장학금은 어마어마한 등록금으로 인해 부모님께 죄송스러운 마음과 자기의 부담을 덜 수 있는 길이었다. 그래서 시험기간이 되면 신경이 날카로워졌고 괜히 짜증이 나기도 했다. 학교 인터넷사이트에서 시험성적을 확인하러 키보드를 두드릴 땐 오타가 날 만큼 손이 떨렸는데 성적이 좋으면 기뻐서 입을 가렸고 성적이 나쁘면 울고 싶어 얼굴을 가렸다. 2학기 중간고사 때 소녀는 나쁜 성적을 받았다. 1학기때보다 덜 놀고 더 열심히 공부한 것 같았는데 과목이 어려워서인지 성적이 처참했다. 곧바로 장학금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이 성적으로 장학금은 어림도 없겠구나...... 어머니아버지께 미안해서 어쩌지......’

도대체 왜 시험성적 가지고 우리가정의 경제적인 형편을 생각해야 하는지 소녀는 인정하기 싫었지만 대학교는, 사회는 그런 구조였고 소녀의 옆에 앉은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하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런 걱정들이 쓸모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부모님는 내가 행복한 캠퍼스 생활을 하기를 바라시지 이렇게 시험성적에 얽매여서 주눅 들기를 바라지 않으실 거다. 떨어지는 낙엽을 봐도 웃을 수 있는 이 나이, 한창 에너지가 솟아오르는 이 청춘에 미래의 청사진(靑寫眞)을 그리며 꿈을 키워가야지 이렇게 점 단위로 표시되는 숫자에 웃고 울어서야 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니 소녀는 어느 정도 괜찮아 지는 것 같았다. 이미 지나가버린 건 어쩔 수 없으니 다시 힘을 내서 앞으로의 것을 준비하면 되는 거다 라는 생각을 하니 자신의 걱정이 사라지는 듯도 했다. 하지만 생각이 깊어질수록 그 생각이 긍정적인 것인데도 불구하고 왠지 착잡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당장에 드러난 현실, 자신이 잘하지 못했다는 현실 앞에 소녀는 자존심이 상했고 다음 학기 등록금 고지서에 찍혀 나올 큰 액수를 볼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든 부담을 덜어야했고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었다. 그 기분이 소녀를 편의점까지 이끌었고 카운터를 지키게 되었다.

시급 4200원, 최저임금에도 못미치는 시급으로 소녀는 흘러가는 시간을 딱 물건만 팔기에 좋은 좁은 공간에서 지새우고 있다. 대학교 근처는 최저임금을 지켜서 시급을 주는 곳을 보기 힘들다. 손님이 별로 없어서 그렇다는데 편의점 앞의 간이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입이 심심해서 들어오는 손님만 해도 꽤 된다. 어차피 학교 근처라 아르바이트 할 사람은 널렸기 때문에 업주들은 굳이 최저임금을 지키지 않아도 아르바이트생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오늘도 소녀는 본사의 로고가 큼직하게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카운터 앞에 앉아있다. 마냥 손님을 기다리는 일은 당연히 심심하다. 카운터의 계산기는 일반컴퓨터와 같은 기능이 없다. 인터넷도 되지 않는다. 컴퓨터 한대만 있어도 시간이 훨씬 빨리 갈 테지만 편의점엔 컴퓨터가 없다. 아마 컴퓨터에 신경 쓰다 손님에게 소홀할까봐 본사에서 컴퓨터를 지급하지 않는 것 같다. 그나마 요즘은 스마트폰이라도 있기에 소녀는 한동안 스마트폰을 쉴새 없이 만지작거린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진 못한다. 모바일 게임 같은 것엔 흥미가 없고 조그만 화면만 계속 쳐다보는 것도 왠지 성미에 안 맞아서 소녀는 스마트폰과 긴 시간을 함께 하는 인내가 없다. 문 밖엔 버스를 기다리는 손님들로 북적대지만 편의점 안은 고요하다. 편의점의 얇은 유리문이 바깥세상과 편의점을 차단하는 듯 했고 편의점 안을 맴도는 공기의 흐름은 썰렁한 적막마저 감돌게 했다. 소녀는 눈으로 편의점을 한바퀴 슥 둘러보다 천장에 달린 감시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어본다. 카운터에 있는 모니터에 손을 흔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나온다.

‘카메라는 여전히 제대로 돌아가네’

소녀는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소녀는 진열장과 편의점 곳곳에 널려있는 상품들을 둘러본다. 마치 뭘 살까 고민하는 손님처럼 상품들을 눈팅하는 것 같지만 편의점 점원으로서 어디에 무슨 상품이 있나 확인해 보는 것이다. 이름이 어려운 상품들의 이름을 외우고 손님이 그거 안파냐고 물어봤을 때 그게 버젓이 있는데 없다고 하는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소녀는 비교적 꼼꼼히 상품들을 확인한다. 제일 외우기 어려운 건 담배이름이다. 자기가 담배를 안 피워서 그런지 도무지 담배엔 관심이 가지도 않고 외우기도 싫다.

‘냄새도 이상하고 몸에도 무지 안 좋은 저런걸 사람들은 왜 피울까?’

백해무익(百害無益)한 담배를 돈 들여가며 사서 멀쩡한 폐를 왜 썩히는지 소녀는 담배 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남자손님의 반 이상이 담배손님이기 때문에 빨리 외울수록 편했다. 그래도 담배를 사 가는 남자손님이 아버지뻘 되는 아저씨라면 나이를 생각해서 담배를 끊으시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들곤 했다.

‘난 왜이리 담배가 싫을까, 꼭 말리고 싶단 말이야’

담배의 이상한 냄새가, 담배의 인체에 대한 유해성이 싫기보단 소녀는 담배가 그냥 싫었다.

아침 8시, 소녀가 편의점 일을 시작하는 시간이다. 문 밖의 간이정류장엔 아침부터 어딘가 먼 곳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꽤 모여 있다. 소녀 또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편의점 앞에서 두 손을 점퍼 주머니에 넣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어딘가로 급히 가야 하는데 버스가 빨리 안 오나보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어떤 남자는 긴 코트를 입었는데 한쪽 손으로 전화를 받고 한쪽 손으로 보는 사람도 없는데 무언가 제스처를 하고 있다. 한창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는데 비즈니스 때문인 거 같기도 하고 단순히 친구랑 이야기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 남자의 통화는 버스를 탈 때까지 아니 타서도 계속될 것이다. 남자 옆자리에 누군가 앉는다면 남자의 목소리가 시끄러워 그를 한번 흘깃 쳐다볼 것이다. 남자가 눈치가 있다면 목소리를 낮추거나 얼른 전화를 끊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을 향한 눈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휴대폰에 대고 떠들 것이다. 소녀는 혼자 카운터에 앉아 들리지 않는 사람들의 대화를 보며 미래의 상황까지 이런저런 추측을 한다. 땡그랑 하는 종소리와 함께 편의점 문이 열리면서 어느 중년 아줌마가 들어온다. 오서오세요~ 대부분의 손님들이 그렇듯 아줌마도 어서 오시라는 인사말에 반응하지 않는다. 제법 세련된 스타일에 명품지갑을 팔짱에 끼고 있는 아줌마한테서 귀티가 났다. 아줌마를 보니 소녀는 왠지 고등학교 때의 가정 선생님이 생각났다. 전혀 가정적일 것 같지 않던 가정선생님은 여자지만 왠만한 남자들을 휘어잡을 만큼 기가 셌다. 여느 선생님보다 패션에 신경을 썼고 멋 부릴 줄 아는 감각도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 사이에서 그다지 인기는 없었지만 많은 여학생들이 가정선생님의 라이프스타일을 부러워하곤 했다. 편의점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차림으로 다소 도도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아줌마를 보니 그 가정선생님이 자연스럽게 생각났다. 뭐 찾으시는게 있냐고 소녀가 묻자 아줌마는 소녀에게 눈길을 한번 슥 주더니 다시 눈길을 돌려 나지막히 말했다.

“아니, 내가 이 편의점을 인수하려는데 좀 어떻나 보러 왔어요”

편의점 사장이 편의점을 내놓았던 것이다. 문 앞에 북적대는 사람들에 비해 손님이 많진 않아도 그렇게 장사가 안 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좀 의외였다. 자기한텐 그런 말 없었는데, 아니 아르바이트생한테 그런 말 할 필요는 없었겠다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뭐 됐네”

이 한마디를 하고 아줌마는 편의점을 나갔다. 산다고 정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아리송한 말이었다.

아줌마가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어떤 남자가 들어왔다. 20대 후반쯤 돼 보이는 남자는 소녀를 보자 활짝 웃으며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를 건넸다. 손님이 그렇게 반갑게 인사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좀 의아(疑訝)했지만 좋은 인상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던 소녀는 활짝 웃으며 어서오시라는 인사를 했다. 보통 편의점에 오는 손님들은 자기가 뭘 살지 정하고 오기 때문에 그 물건만 사서 얼른 나가는데 남자는 뭘 살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음료수 코너 앞에 선 남자는 음료수 이름을 외우기라도 하는 듯했고 소녀의 눈치를 살짝살짝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어떤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 어서오세요라는 말에 여자도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남자를 보니 조금 흠칫 하는 것 같았다. 마치 편의점에 남자가 있는 줄 모르고 들어온 것 같았다. 그런데 여자도 마찬가지로 빨리 물건을 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것이다. 마치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견제하기라도 하는 듯 했고 물건을 사려면 한참을 있어야 될 것 같았다. 소녀는 그 둘을 보다가 혹시나 둘이 연인인데 조금 전에 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지만 아무리 싸웠다고 해도 연인 사이 치고는 너무 어색한 거 같아 이내 그 생각을 접었다.

‘뭐지? 이 사람들, 뭘 망설이는 거지......?’

그 사이에 어떤 아저씨가 담배를 사러 들어왔다. 츄리닝 차림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왔고 덥수룩하게 난 수염은 ‘나 외모 관리 같은 거 안 하오’라고 광고하는 것 같았다. 담배를 사는 짧은 순간에도 뒷목을 사정없이 긁어대던 아저씨는 담배를 받자 ‘이쁜 아가씨가 오늘따라 더 이쁘네’ 라는 멘트를 남기고 편의점을 떠났다. 소녀가 속으로 털보아저씨라 부르는 그 아저씨는 거의 매일같이 편의점에 들러 담배를 사간다. 꼭 하루에 한 갑씩 사갔는데 역시나 소녀는 아저씨에게 담배를 건넬 때마다 ‘털보아저씨 담배 좀 끊으시는게 어때요? 당장 끊기가 어렵다면 좀 줄이시는건 어떠세요? 하루에 한 갑은 너무 많잖아요’라고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털보아저씨가 나가자 그때까지 머뭇거리던 여자는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얼른 물건을 집어 계산대로 가져갔다. 생리대였다. 그제야 소녀는 여자가 왜 물건을 얼른 사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마침 편의점 점원이 같은 여자라서 편한 마음으로 들어왔는데 밖에서 보지 못했던 남자가 있었으니 좀 당황스러웠을 것이고 그 남자가 나간 뒤에 생리대를 사 가자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남자가 나갈 생각을 안 하는 것이었다. 같은 여자로서 그 여자의 마음에 충분히 공감한 소녀는 눈치껏 얼른 계산을 해주었고 여자는 쌩하니 편의점을 나갔다. 쨍그랑 쨍그랑 문이 빠르게 열리자 종소리는 더 요란했다.

‘그런데 저 남자는 왜 머뭇거리는 거지? 저 사람도 생리대를 사러 온 건 아닐텐데’ 라고 소녀가 생각할 무렵 드디어 남자도 물건을 집어서 카운터로 가지고 왔다. 커피 음료수 두 개 였다. ‘이 남자 참 커피음료수를 신중하게 고르네’ 라는 생각을 하며 계산을 해 주자 남자가 수줍어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저...저기”

“네?”

“저기 되게 실례지만요, 혹시 연락처 좀 가르쳐 주실래요?”

편의점에 들어올 때 활짝 웃던 모습과는 달리 남자는 긴장한 듯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소녀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지금은 좀 곤란하다는 말을 했다. 물론 남자가 상처 받지 않게 특유의 밝은 미소를 지으며 좋게 말해 주었다. 남자도 여전히 미소짓는 얼굴로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알겠다며 커피 음료수 하나를 소녀에게 주고 나갔다. 멋쩍어 하면서 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소녀는 남자가 좋은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줍어 하던 남자의 고백, 난생 처음으로 받아본 프러포즈였지만 아직 겪어보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일까? 소녀는 왠지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 그래서 저 남자도 그렇게 기다렸던 거구나’

소녀는 웃음이 나왔다.

12시, 흔히들 말하는 점심시간이었다. 시급 외에 식대를 따로 받긴 하지만 편의점을 비우고 어디 나갈 수도 없고 편의점 안에 있는 음식만 사먹을 수 있었다. 배가 고파진 소녀는 오늘은 뭘 먹을까 하고 편의점을 둘러봤는데 음식은 많지만 사실 점심으로 먹을만 한 건 거기서 거기였다. 빵, 김밥, 라면 중에 하나를 골라야했다. 다른 건 양이 작거나 너무 비쌌다. 잠깐의 고민 끝에 밀어올려 먹는 김밥을 선택한 소녀는 김밥과 음료수로 끼니를 때웠다. 김밥을 먹다가도 손님이 들어오면 나갈때까지 일어서 있어야 했다. 밥을 먹다가도, 정산(定算)을 하다가도, 새로 들어온 물건을 정리하다가도 손님이 들어오면 카운터에 서 있어야 하는 것이 제일 번거로운 점이었다. 어떨 땐 ‘왜 하필 지금 들어오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손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손님은 소녀의 그런 기분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언제나 소녀는 백만불짜리 미소로 손님들을 대했기 때문에 손님들은 소녀를 ‘인상 좋고 친절한 여학생’으로만 기억했다. 소녀의 미소가 얼마나 보기 좋은가 하면 그 얼굴로는 욕을 해도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런 정도였다. 김밥을 먹으면서 소녀는 오늘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뭘 해야 되는지 생각했다. 딱히 없었다. 방학인데다 아르바이트 외엔 따로 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료한 일상이었다. 그래도 긴 방학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선 아르바이트 외에 다른 뭔가를 해야했다. 배낭여행을 가볼까? 친구들이랑 바닷가로 놀러갈까? 자전거를 타고 국토순례(國土巡禮)를 해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방학 동안에 토익점수를 올려놔야겠다는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 소녀의 결론은 아르바이트 끝나고 토익학원에 등록하는 것이었다. 오후가 되면 몸도 마음도 나른해진다. 편의점이라 왠만하면 손님이 끊이지 않지만 묘하게 손님이 없는 시간이 있다. 소녀는 카운터에 엎드려서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하고 있었는데 보라카이 해변사진을 보고 있었다. 소녀는 언젠가는 뜨거운 태양 아래 펼쳐진 그 아름다운 곳에 가서 시원한 바닷바람에 실려오는 바다내음을 맡으며 맨발로 해변을 거닐 것이라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발바닥에 와닿는 보드라운 모래결과 살며시 밀려와 발을 간질이는 파도, 파도에 실려오는 파도소리와 귓가를 간질이는 바람소리 모든게 상상만해도 기분이 좋았다. 몸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더니 눈 앞이 어두워졌다 밝아졌다를 반복했다. 이윽고 뜨거운 태양빛이 소녀의 온몸을 뒤덮었다. 파아란 하늘엔 새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고 새를 따라 시선을 옮기니 하늘처럼 파란 바다가 또 하나의 하늘을 이루고 있었다. 천천히 밀려오는 파도와 그 파도를 품어내는 해변, 해변에 늘어선 늘씬한 야자수, 야자수... 그곳은 바로 보라카이였다. 바다위에 흩어진 빛무리가 파도를 따라 해변으로 밀려왔다 밀려났는데 저멀리까지 이어진 빛무리는 하늘과 바다의 경계에서 사라지는 듯도 했고 태어나는 듯도 했다. 시간과 공간이 애초에 하나인 듯 구분할 수 없었고 적막한 하늘은 오히려 평화로웠다. 소녀는 두 팔을 크게 벌리고 앞으로 내달았다. 피부를 스쳐가는 바람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노랑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귀여운 서양 아이들이 해변에서 뛰놀고 있었고 한 아이가 소녀를 보자 앙증맞은 얼굴을 찡그리며 윙크를 했다. 소녀도 답례로 밝은 미소와 함께 윙크를 했고 아이와 소녀 모두 크게 웃었다. 푸스스 스스스슥 푸스스 스스스슥 파도소리와 바람이 야자수 나뭇잎에 스치는 소리가 어울렸고 저편 바다끝엔 어느새 노을이 드리우고 있었다.

‘어머 벌써 노을이 지네’

소녀는 노을을 바라봤다.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과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무슨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귀를 기울이니 마치 사람 목소리 같았다.

호휘 오위 노우 노으... 소리는 점점 분명하게 들려왔고 이내 소녀의 귀에 분명하게 들렸다.

‘노을’ “노을!?”

분명 노을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소녀는 놀랐다.

“노을이라니? 노을이 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노을이라니? 노을이 뭐......”

“......노을 주세요, 노을 주세요, 이봐요 오늘 하나 주시라구요”

소녀는 눈을 떴다. 뿌옇게 흐린 시야가 점점 밝아지더니 소녀 앞에 웬 낯선남자가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악, 뭐야!”

소녀는 벌떡 일어났다. 낯익은 풍경, 편의점이었다. 낯선 남자는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꿈 깼어요 아가씨? 노을 하나 주시라구요, 저기 저거”

노을, 새로 나온 담배 이름이었다. 상황을 제대로 인식한 여자는 얼근 죄송하다는 말을 한 뒤 노을을 집어 주었다. 계산을 하고 나가던 남자가 다시 뒤돌아 보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말 하는게 낫겠죠, 입에 침 좀 닦으세요, 수고하세요”

소녀가 입을 닦으니 차가운 액체가 묻어나왔다. 보라카이에서 흘린 침이었다.

“아이 씨, 쪽팔려”

백말불짜리 미소의 소녀였지만 이때만큼은 너무나 창피해서 오만상을 찌푸렸다.

“담배 이름이 노을이 뭐야 촌스럽게!!”

어느덧 오후 2시, 이때쯤 늘 오는 뭔가가 있다. 소녀는 올때가 됐다는 생각으로 편의점 밖을 응시했다. 승객을 태우기 위해 정지해 있는 큰 버스 외엔 별로 시야에 들어오는게 없었다. 편의점 앞에 버스가 서면 버스를 세상을 다 가렸다. 소녀는 그때마다 ‘버스가 저렇게 컸나, 나도 저 버스 타고 어딘가로 가고 싶다’ 등의 생각을 했다. 그러다 ‘저 버스 안에 탄 사람이 편의점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배고픈 사람은 햄버거가, 목마른 사람은 음료수가 생각나겠지’ 등의 생각까지 하게 되면 별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이내 생각을 접곤 했다. 땡그랑~ 편의점 문이 열리면서 “입고품(入庫品) 왔습니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마에 ‘나성실’이라고 적힌, 누가봐도 성실하게 생긴 남자가 웃는 얼굴을 내밀었다. 공장에서 편의점까지 물건을 옮기는 유통담당자였다. 소녀도 웃으면서 인사를 했고 남자는 편의점 문을 열어놓은 채 차에서 편의점 창고로 박스를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은 입고품이 꽤 많은 것 같았다.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도 남자는 땀을 흘렸고 착한 소녀는 마음 같아선 도와주고 싶었지만 박스 하나도 제대로 못드는 자기가 끼여봤자 방해만 될게 분명했다. 박스를 다 옮긴 남자는 소녀에게 장부를 내밀었다. 소녀가 장부의 확인란에 서명을 하자 남자는 “다른 곳까지 다 돌기 귀찮은데 그냥 남은 박스 여기다 다 넣어주고 갈까요?” 라며 실없는 농담을 했다. 소녀가 말했다.

“하루에 몇 군데 쯤 도시는 거에요?”

“보통 20군데요”

“와 정말 많이 도시네요”

“네, 그래서 진짜 돌아버리겠어요”

“네??”

“농담이에요 하하, 그래도 나름 재밌기도 하고 보람도 있어요, 운동도 되구”

성실한 사람다운 대답이었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웃는 남자의 모습이 소녀에게 너무나 순박해보였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만 가득하다면 모든게 순조롭게만 돌아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남자가 나간 후 땡그랑 하는 편의점 종소리도 왠지 성실하게 들렸다.

‘저 사람 내일도 2시에 오겠지, 어떻게 저렇게 힘든 일을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내 웃음도 저런 웃음이 되었으면, 내일은 음료수라도 하나 드려야겠다’

소녀는 편의점 밖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버스가 멈춰섰고 세상은 버스에 덮혀졌다.

땡그랑 문 열리는 소리에 소녀는 본능적으로 어서오세요라는 인사를 했다. 그런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문 열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들어오려다 도로 갔다보나 하고 생각하던 찰나 어디선가 누나 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소녀는 환청(幻聽) 이라도 들었나 싶었지만 다시 누나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자기를 부르는 소리였다. 조심스레 카운터 너머를 보니 꼬마 남자아이가 서 있었다. 작은 키가 카운터에 가려져서 안보였던 것이다.

“응 그래 뭘 사려고 왔니?”

“땡땡초코바 두 개 주세요”

“땡땡초코바 좋아하나 보구나, 두 개나 사게”

소녀는 어린이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혼자서 좋아하는 초코바를 사러 온 아이가 마냥 귀여워 보였다.

“아니오, 하나는 우리 엄마 줄 거에요”

“하나는 엄마 꺼라구?”

“네, 엄마 하나 먹고 나 하나 먹을라고 돈 모아서 사러 왔어요”

귀엽기만 하던 아이가 대견해 보였다. 보통 먹고 싶은게 있으면 엄마한테 사달라고 조르는데 이 아이는 자기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돈을 모아 엄마 것까지 사러 온 것이었다. 소녀는 아이가 자기 동생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귀엽고 대견한 동생, 동생 같은 아이에게 소녀는 사비를 들여 초코바 네 개를 쥐어주었다. 아이는 신이나서 양손에 초코바 두 개씩을 움켜쥐고 뛰어 나갔다. 소녀는 흐뭇했다. 이제 저 아이의 기억 속에 자기는 예쁘고 친절한데다 마음씨 좋은 누나로 기억될 터였다. 아니 그보다 아까 담배사러 왔던 털보아저씨처럼 투박한 손님들, 때로는 여자라고 집적거리는 손님들까지 상대하다 저런 앙증맞은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만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조금 먼 훗날의 이야기지만 자기도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저런 아이를 낳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소녀도 초코바를 하나 사서 입에 물었다. 달콤한 바닐라 향기의 초콜릿이 입안에서 샤르르 녹았다. 맛있었다. 아이가 좋아할 만 했다. 그래도 담부턴 사먹지 않기로 했다. 왜 살찌니까.

시계를 보니 아르바이트 마치는 시간인 오후 4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동안 간이정류장엔 다양한 디자인의 버스들이 섰다가 가기를 반복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들도 저마다의 사연과 목적지를 가지고 정류장으로 모여들었다 사라졌다. 소녀도 슬슬 마무리를 해야했다. 재고 확인과 정산 등 다음 사람에게 인수인계 할 준비를 하려는데 땡그랑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오세요 라고 하며 돌아보니 어떤 중년 남자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안경을 낀 남자는 머리가 이마에서부터 정수리 부근까지 불모지(不毛地)가 되어 있었고 다른 곳도 사막화가 진행 중이었다. 어쨌든 훤칠한 표면은 이따금씩 백열등에서 내뿜는 빛을 반사하고 있어 약간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액면가로 봐서는 딱 소녀의 아버지뻘 되는 나이었다. 남자는 묵직한 표정으로 편의점을 둘러보았다. 뭘 찾는건지 그냥 둘러보는 건지 모르겠지만 남자는 천천히 여기저기를 살폈다.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소녀는 여자로서, 손님이지만 낯선 남자들은 왠지 조심스럽고 경계가 되었다. 그래서 활짝 웃지만 눈은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뻘 이상 되어 보이는 남자들은 달랐다. 아버지 같은, 할아버지 같은 정겨움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남자도 빨리 나갈 것 같진 않았지만 그냥 이대로 소녀가 굳이 뭘 물어보지 않고 편하게 두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남자는 별 거 없다는 표정으로 소녀에게 노을 하나를 달라고 했다. ‘노을이 담배 중에서도 맛있나봐’ 라고 생각하며 소녀는 노을 한 갑을 건네주었다. 계산을 한 뒤 남자가 말했다.

“실례지만 아가씨는 올해 몇인고?”

“네, 스무살이에요”

“우리 딸내미랑 동갑이네, 편의점 일 힘들이 않아?”

“괜찮아요, 재미도 있고 할 만해요”

“그래, 우리 딸내미도 피씨방 알반가 뭔가를 하거든. 나도 담배를 피지만, 담배연기 몸에 해로우니까 그만두라고 해도 그때마다 네네 알았어요 대답만 하지 아직까지 하는 거 같아, 가끔씩 딸내미한테서 담배냄새가 나면 이 녀석이 또 피씨방 알바 하고 왔구나 싶지”

말을 하던 남자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소녀는 아버지가 생각났다. 말씀 드린 적이 없었는데 아버지는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날 조용히 얘기를 꺼내셨다.

‘경험삼아 편의점 아르바이트 하는 건 좋은데 너무 늦은 시간에는 하지 말거라, 좀 해달라고 해도 아버지가 못하게 한다 그래. 그리고 방학이 끝나면 아르바이트도 그만두거라, 넌 다른 거 신경쓰지 말고 마음 편히 공부하고 니 하고 싶은 거 하면 돼, 알았지?’

그리고 아버지는 담배를 피웠다. 그랬다. 소녀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기분이 좋을 땐 웃었지만 기분이 좋지 않을 땐 늘 밖에 나가 담배를 피웠다. 담배를 피우는 아버지의 뒷모습은 힘없고 초라해보였다. 축 늘어진 어깨너머로 담배연기가 피어올랐고 이따금씩 한숨을 쉬었다. ‘담배는 힘들 때 피는 거구나’ 소녀는 생각했었다. 담배는 늘 아버지의 어깨와 한숨을 떠올리게 했다. 피씨방 일을 하는 딸을 걱정하는 남자의 얼굴에 소녀의 아버지 얼굴이 겹쳐졌다. 힘없이 늘어진 어깨, 야윈 얼굴...... 중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가족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소녀는 숙연해졌다. 하지만 이내 다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따님도 아버지 마음을 아실 거에요, 힘내세요!”

“아이구 이거 내가 처음 보는 아가씨 앞에서 주책을 부렸구만”

“아니에요, 우리 아버지도 제 걱정 많이 하시는걸요, 앞으로 아버지께 더 잘해야겠어요”

“허허허 기특한 아가씨구만, 자 이거 하나 마시면서 해”

“저... 손님 외람된 말씀이지만요, 담배 끊으시는게 어때요? 아마 따님도 손님이 담배 피시는걸 걱정 하고 계실 거예요, 손님이 따님 걱정하는 것처럼”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남자에게 금연을 권유했다.

“허허허 내 담배 사러 많이 다녔지만 손님한테 담배 끊으라고 하는 사람은 처음 보는구먼, 참 착한 아가씨야”

남자는 담배를 반납하더니 주위를 둘러보다 자양강장제(滋養强壯劑) 두 병을 가져왔다. 그리고 하나를 소녀에게 쥐어주고 편의점을 나갔다. 소녀는 남자의 뒷모습, 그 어깨를 보면서 저 어깨가 좀 더 넓고 크게 펴지기를 바랐다. 아르바이트를 교대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람이 불었다. 보라카이의 시원한 바람이 아니라 몸을 움츠리게 만드는 차가운 바람이었지만 따뜻하게 지낼 수 있는 집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만드는 바람이었다. 길가에 늘어선 은행나무에선 낙엽이 떨어졌다. 편의점으로 아르바이트 하러 갈 때만 해도 소리 없이 떨어져 내리는 낙엽이 철근같이 무거워 보였고 앙상한 나뭇가지는 나무의 모든 것이 끝나버린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낙엽이 바람에 자유로이 몸을 맡기고 있었고 묵은 것을 떨어낸 나무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집으로 가면 어머니를 두 팔로 안아드리고 아버지 두 손을 꼭 쥐어 드려야지’

소녀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학교 강의실 외에도 배움을 얻는 곳은 많았다.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자괴감 때문에 시작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소녀는 자신이 생각지 못했던 삶의 부분부분들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짐이 아니라 즐거움이 된 편의점 카운터에서 소녀는 잠들지 않고도 보라카이 해변을 걷는 꿈을 꾼다. 땡그랑 편의점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온다. 누가 어떤 사연을 가지고 무엇을 사러 이곳에 왔을까 소녀는 특유의 백만불짜리 미소로 손님을 맞이한다. 편의점 바깥의 간이정류장엔 여전히 사람들이 모여들고 버스가 가던 길을 멈춘다. 그리고 함께 사라진다. 그 빈 자리에 다시 사람들이 모이고 버스가 멈추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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