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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17 11:34

그녀는 악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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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악녀였다

 

 

오늘은 아내와 나의 3번째 결혼기념일입니다. 아내와는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번역 일을 하면서 만났습니다. 4년 전 크리스마스 -이 날은 저의 생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술에 취한 채 저의 오피스텔을 방문했습니다. 어쩐 일이세요. 이 밤중에...그녀의 갑작스런 방문에 전 당황해했습니다. 집에 계셨네요. 계단을 오르느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내는 대뜸 자그마한 케익 상자를 내밀었었습니다. 차라도 한 잔 하시겠어요? 저는 살짝 문 옆으로 몸을 비켜섰습니다. 아뇨. 오늘은...저 취했거든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계세요? 안 좋은 일이라...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제 마음을 몰라줘요. 이거 안 좋은 일 맞죠? 그 날의 아내는 평소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오늘은 그냥 갈게요. 생일 축하해요. 어정쩡한 자세로 케익 상자를 들고 서 있는 절 뒤로 한 채 그녀는 몸을 돌렸습니다. 있잖아요...문을 닫으려고 하는 순간 그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전하실 원고라도? 전 더듬거리며 말했습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저, 그게, 저 좀 수주해 주실래요. 제 곁에서 저 좀 해석하구, 밑줄 그어가면서 고쳐도 주구, 그래 주실래요? 그게 아내로부터의 프로포즈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민석 씨. 뭐, 먹을래? 4년 전과 그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아름답습니다. 스테이크로 하지, 뭐. 당신은? 미소를 머금은 채 메뉴판을 아내에게 건넵니다. 난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걸루...돌솥 비빔밥? 저의 실없는 농담에 아내가 새침하게 눈을 흘깁니다. 여보,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제가 그때 화장실만 가지 않았더라도...하필 그때 그녀가 그 레스토랑에 오지만 않았더라도...화장실 앞에서 그녀와 그런 식의 어색한 대면만 하지 않았더라도...저의 3번째 결혼기념일은 아주 즐겁고, 평온하게, 그렇게 끝났을 것입니다.

나는 강철의 심장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우연히 한 러시아 혁명가의 전기를 접하게 된 후부터 저는 치기어린 이론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강철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고, 누구나 강철의 심장을 가져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고, 그것만이 인간적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나는 아나키스트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강철의 심장을 얻을 것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 십일조를 바치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교인들처럼 저는 러스킨의 혁명이론서를 향해, 가장 완벽한 진보주의자가 되도록 해달라고 매일 기도했습니다. 물론 그 대상이 하나님은 아니었지만 내 영혼은 아직 어렸고, 그만큼 순수했었다고 기억됩니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전 양산에 있는 공단에 취직을 했습니다. 종업원이 겨우 서른 명쯤 될까한 그저 그런 작은 공장이었습니다. 어느 여름 날, 회사 선배들과의 술판이 벌어졌더랍니다. 술자리에 여자가 없어서 되겠냐. 취기가 오른 한 선배가 갑자기 저와 친구 한 명을 지목했습니다. 지금부터 임무를 주겠다. 여자를 조달해 와라. 이미 새벽 2시를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친구 녀석과 전 계단에서 쭈그리고 앉아 하릴없이 담배만 축내고 있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한창 이 난관을 벗어날 타개책을 궁리하고 있는 우리들 앞으로 뭔가 후다닥하고 지나갔던 건. 친구 녀석과 전 동시에 눈을 마주치고 씩 미소를 지었습니다. 여자다. 사라지는 그림자들을 뒤따라 간 곳은 근처의 아파트 공사 현장이었습니다. 이윽고 트럭 뒤편에 몸을 숨기고 있는 세 명의 여자애들을 발견해 낸 우리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저는 우리 또래일거라고 느꼈습니다. 아마도 달빛이 흐려서였을 겁니다.

 

너희들, 여기서 뭐해? 여자애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더군요. 그러다 한 애가 앞으로 나섰습니다. 그러는 아저씨들은 왜 우릴 따라오신 거예요? 아저씨라니.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너희들, 몇 살이냐? 그러는 댁들은? 그제서야 우리가 그다지 나이가 많지 않다는 걸 눈치 챈 모양이었습니다. 왜 따라왔냐구요? 더워서...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친구 녀석의 질타하는 눈빛이 느껴졌습니다. 큭, 큭, 여자애들이 키득거리기 시작하더군요...결국 우리들은 간단히 맥주를 한 잔 하는데 의견 일치를 봤고, 개선장군처럼 아파트로 돌아왔죠.

뭐해요? 시끄러운 자리를 피해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제 곁으로 그녀가 다가왔습니다. 왜 안에서 놀지 않구...자꾸 술 따르잖아요. 전 아빠한테두 술 따라 본 적 없단 말이에요. 어머, 개구리들이 울기 시작하네. 밝은 데서 본 그녀의 얼굴은 아주 앳되게 보였습니다. 너, 진짜 몇 살이니? 오빤? 그녀가 갑자기 반말을 하더군요. 글쎄요.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부터.

난 스물...삶의 짐이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스물...강철의 심장을 가진 스물...난 고1, 열일곱. 꽃다운 나이...

그런 거 아십니까. 왜 스무 살엔 말입니다. 중딩들이나 고딩들보면 애같이 느껴지잖아요. 난 어른이라는 가당찮은 자존심이 작용하는 거죠...아직 애구나. 툭하고 전 채 불이 꺼지지도 않은 담배꽁초를 아주 멀리...베란다 앞에 펼쳐진 논 쪽으로 툭하고 손가락으로 팅겼습니다. 웃기네. 그녀는 토라진 목소리로 내 어깨를 툭 쳐 보였습니다. 겨우 세 살 차이밖에 안 나면서. 부부들 봐. 대여섯 살 차이는 기본인걸. 별소릴 다한다...나는 피식 웃었습니다. 오빠, 여기서 살아? 응. 난 우성빌라. 우성빌라? 저기 초등학교 옆에 새로 지은 맨션 있잖아...아. 하얀 건물? 그래. 거기 1층. 근데 너희들 이 밤중에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아. 방학이라 친구들이랑 오랜만에 만나서 좀 노는데 글쎄, 학생주임한테 걸렸지 뭐야. 그래서 냅다 튀고 있는데 오빠들이 담배 피고 있더라. 깡팬 줄 알구 계속 뛰다 보니깐 공사장이지 뭐야. 죽었구나 싶었는데...죽긴 왜 죽냐? 여기 좀 험한 동네거든...

그 날부터 그녀는 학교가 마치기가 무섭게 아파트로 달려 왔습니다. 집에서 김치를 훔쳐 내오기도 하고, 먼지가 수북히 쌓인 제 방을 마치 마누라라도 되는 양, 투덜거려가면서 치우기도 하고, 아...가끔씩은 기름때가 찌든 작업복을 빨아주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연인? 글쎄요. 그럴리가요. 그녀는 겨우 고등학생에 불과했고 전 강철의 스무 살이었는데요.

부산의 집으로 돌아와, 뒤늦게 대학을 준비하기까지 그녀는 거의 매일 기숙사를 찾아 왔습니다. 나중에 짐을 정리하러 기숙사에 들렀을 때 선배는 그녀와 어떻게 됐냐구 묻더군요. 매일 저녁마다 와서는 울고불고 난리다. 어떻게 할래? 연락처 모른다고 하세요. 저 학원 등록했어요. 아무래도 대학은 가봐야 할 것 같아서...전 여자한테 관심 같은 거 없어요.

이듬해 전 그런대로 괜찮다는 대학에 적을 두게 됐습니다. 새로운 환경은 저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물론 그녀의 일도 까마득히 잊고 지냈습니다. 우연히 그녀를 시내에서 만나게 되기 전까지는요.

MT준비로 같은 과 친구 녀석과 이런저런 물품들을 사러 시내를 걷다가 그녀와 마주치게 된 겁니다. 나와 시선이 교차하자마자 그녀의 눈에는 금세 그렁그렁한 눈물이 맺히더군요. 바쁘다는 나를, 그녀는 기어이 커피숍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여긴 어쩐 일이야? 학교는? 나 학교 안 나간 지 좀 됐어. 오빠. 좀 놀랐습니다. 약간 빗나간 구석은 있었어도 그렇게 막 되어먹은 아이는 아니었었거든요. 왜?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여기 커피 되게 맛있다. 그치. 이윽고 그녀다운 쾌활함이 돌아왔습니다.

 

그 때 내가 이해인님의 시를 읽었었더라면, 아마도 그녀의 경쾌한 목소리에 감춰진 무거운 떨림을 읽었겠죠. 아. 이해인님의 시요? 다 기억하지는 못합니다만, 이 한 줄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네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해서 미안해...시간이란 항상 앞서가는 법입니다. 어제 스포츠 신문이던가요. 러시아에서 타임머신을 개발 중이랍니다. 담당 과학자에 의하면 지금은 1분 30초 정도를 당기는데 불과하지만 시간 여행이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거짓말하지 말라구요? 하기야 사실이라면 톱 뉴스감이겠죠. 스포츠 신문이란 게 원래 온갖 추측기사들과 시덥잖은 창작물들이 난무하는 데니까요.

오늘 시간 좀 내줄래? 전 담배를 짜증스럽게 비벼 껐습니다. 오늘은 좀 그런데. 내일이 우리 과 MT라서. 그랬구나...다시 약간의 침묵이 흘렀습니다. 오빠. 혹시 사귀는 사람 있어? 어이없게도 웃음이 나올 뻔했습니다. 왜냐구요? 전 강철의 심장을 가졌었거든요. 마징가 제트가 누군가 사랑했었다는 말 들어 보셨어요? 있어. 왜? 전 일부러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다시 잠깐의 침묵. 그럼 난? 난 뭐야? 전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뭐라니? 오빤 내가 그렇게 여자로 안 보여? 나 오빠 옆에 있음 안 돼? 나두 조금만 있으면 고등학교 졸업하구, 그리구, 그리구. 스무 살이 돼... 스무 살이라, 스무 살. 속으로 스무 살을 되뇌었습니다. 넌 좋은 동생이야. 앞으로두, 내 말 알겠지? 버스 정류장까지 그녀는 힘없는 걸음걸이로 내 뒤를 따라 왔었습니다. 오빠, 나 오빠 마음 다 알겠어...알겠으니깐, 오늘 하루만 같이 있어주라. 나 너무 힘들어서 그래...글쎄, 오늘은 안 된다니깐. 우리 다음에 보자. 응? 그녀의 팔을 간신히 떼어놓자 버스가 섰습니다. 버스에 오르면서 그녀를 힐끗 보았을 때 그녀는 울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 현이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미연이 만났었어? 가시 돋친 목소리. 응, 저번 주에 우연히 시내에서 만났었어. 왜? 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었죠. 너 그 날 미연이 만난 게 우연이 아닌 모양이야. 우연이 아니라니? 걔가 너 만나려구 학교도 안 가고 니가 갈 만한 곳만 뒤지고 다녔나 봐. 어떻게 헤어졌냐? 전 그 날 있었던 일을 녀석에게 숨김없이 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젠 안 만나 줘도 좋으니까 하루만 같이 있어 달라는 부탁을 거절했다는 거야? 전 조금씩 녀석과의 대화가 지루해졌습니다. 그게…. 녀석의 거친 숨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느껴졌습니다. 나쁜 새끼. 녀석과의 통화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물론 그녀에게서 다시 연락이 오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 시절, 학교는 어수선했습니다. 대학 생활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을까, 나는 입대를 결정했습니다. 나, 군대가. 군대? 친구들은 놀란 얼굴로 되물었습니다. 너, 졸업하구 갈 거라구 했었잖아. 그건 그렇고...너...그건 뗐냐? 그거라니? 짜식이, 순진한 체 하기는. 애인두 없구, 너 아직 그거지? 내가 좀 알아 봐줄까? 됐어. 얌마.

그 날 저녁에 전...그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일 년하고도 반년 만이었습니다. 웬일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습니다. 잘 지냈어? 찰칵. 라이터를 켜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후...이번에는 담배연기를 뿜어내는 소리입니다. 혹시 지금 담배 피는 거야? 왜 피우면 안 돼? 몸에 해롭잖아...결국 난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여대기 시작했습니다. 몸에 해롭다구? 오빠. 증말 웃긴다. 빈정대는 그녀의 말투. 전 점점 그녀에게 전화를 한 걸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나, 지금 좀 바빠. 용건만 얘기해 줄래? 그냥...실은 나 군대 가... 근데? 오빠 군대 가는데 왜 나한테 전화를 해? 난 더욱더 난처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냥. 군대 가기 전에 한 번 봤으면 해서...아냐, 미안하다. 잘 자. 전 그렇게 전화를 끊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건 며칠이 지나 시내에서 친구들이 마련한 마지막 환송식에 가려고 막 나서려는 참이었습니다. 나야. 오늘 시간 돼? 시간? 지금 친구들이 환송식 해 준대서 막 나서려는 참인데...환송식? 입대가 언젠대? 내일 모레. 그녀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눈치였습니다. 어디서 하는데? 환송식. 어. 시내.

친구들은 이미 취해 있었습니다. 야. 주인공이 이렇게 늦으면 어떡해. 그리구. 너 혼자냐? 소주의 짜릿함이 온몸으로 퍼집니다. 왜? 친구 한 녀석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입니다. 야. 그럼 형님한테 미리 상의를 해야 할 거 아냐. ...그때였습니다.

오빠. 내가 좀 늦었지? 그녀였습니다. 닥달을 하던 친구 녀석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습니다. 그녀는 냉큼 내 옆자리에 앉았습니다. 뭐야. 이 자식. 이렇게 어여쁜 재수씨를 지금까지 숨겨왔단 말야? 능구렁이 같은 놈. 오빠가 제 얘기 한 번도 안했었나 보죠? 그녀는 생글거리며 말했습니다.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이 자식 말입니다. 지가 무슨 황희 정승이라구 여자라곤 통 거들떠보지를 않아서요. 우린 이 자식 고잔줄 알았거든요. 야. 그만하구 술이나 마시자. 녀석의 술잔에 술을 채우려고 몸을 일으키자 녀석이 팔을 휘휘 저어댔습니다. 야. 넌 됐구 재수씨가 따라주는 술 한 번 받아보자. 전 오빠한테 여자 친구 많을 줄 알았는데...그녀는 농담을 가볍게 받으며 술을 따랐습니다.

갈증 때문에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제 옆에서 새근거리며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고 고주망태가 된 채로 친구들에게 이끌려 술집을 나온 것까지는 기억이 났습니다. 전 그녀를 조심스레 흔들었습니다. 왜? 그녀는 힘들게 눈을 떴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술집 나온 건 기억나? 응. 집에 간다는 오빠를 오빠 친구가 끝까지 말리면서 방까지 잡아 주더라. 들어와서도 한참을 토했어. 담배를 빨아들일 때마다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습니다. 그리곤? 그리곤 뭐? 그리곤 그냥 잠만 잤어? 이번엔 제가 담배를 물었습니다. 정말 기억 안 나? 그녀가 되묻더군요...전 정말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그냥 잠만 잤어? 난 재차 물었습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8주 동안의 기본훈련이 끝나고 편지 쓰는 일이 허락됐을 때 전 제일 먼저 그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사실 훈련을 받는 동안 전 줄곧 그녀를 떠올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아마도 너무 훈련이 힘들어서...그래서 마음이 약해져서...그랬을 겁니다. 이곳은 네가 있는 바깥세상과는 너무도 다른 곳이야. 지난주에는 진흙탕을 박박 기게 하구선 30명을 목욕탕에 집어넣고 겨우 5분의 목욕시간을 허락하더군. 비눗칠을 겨우 했을 뿐인데도 우리들은 강제로 끌려나왔어. 군기가 빠졌다는 이유로 우린 다시 진흙탕을 기어야 했지. 그런데 더 무서운 건 정말 그렇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우리가 변해가고 있다는 점이야. 이번 주에는 같은 5분의 목욕시간을 부여 받았을 뿐인데도 모두 목욕을 끝내고 정열을 하고 있었어...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도 답장을 기대하진 않았습니다. 그냥 누구에겐가 그 더러운 기분을 토로하고 싶었고...제일 먼저 떠오른 대상이 그녀였을 뿐이었습니다.

첫 휴가. 부산역에 내리자 비릿한 바닷내음이 코를 찔러 왔습니다.

자네가 웬일인가? 그녀의 어머니는 절 한동안 노려보더니 거실에서 뭔가를 들고 다시 나오셨습니다. 받게. 편지였습니다. 봉투가 채 뜯어지지도 않은 편지들. 오거든 돌려주라고 했네. 미연이는? 어디 있는지 모른다네, 우리도. 만나게 해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전 간절하게 부탁했습니다만, 그녀의 어머니는 냉랭했습니다.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딸아인 자네 때문에 학교도 졸업하지 못할 뻔했어...겨우 고등학생인 딸이 매일 밤 자네 이름을 부르면서 잠드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부모 심정을 생각해 봤니? 이제 와서 자넬 탓할 생각은 없어. 난 갤 믿어. 언젠가 제 자리를 찾을 거야.

귀대일을 하루 앞두고 어머님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전화가 왔었네. 돌아가라고 하더군. 잊게. 저 복귀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소린가?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전...억지 부리지 말게. 기다리겠습니다. 미연이가 올 때까지. 이젠 기다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터미널은 일종의 황량함마저 느끼게 했습니다. 시계는 자정을 지나고 있었고...저는 허탈감에 서 있을 기력조차 잃을 지경이었습니다. 뜨거운 것이 얼굴을 흘러내렸습니다. 그때, 그녀가 절 사랑했을 때, 왜 그때 그 마음을 받아주지 못했을까라는 자괴감과 이렇게도 무기력한 심정을 그녀가 그 어린 나이에 겪어야만 했었다는 사실이 절 한없이 슬프게 했습니다.

무슨 짓이야. 그녀였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절 사랑해 주었던, 저 때문에 책을 찢어 던지고, 목이 따갑도록 담배를 피워대고, 이기지도 못할 만큼 술을 들이켜야 했던...그런 식으로, 자신을 저주해야만 했던, 그녀였습니다. 저는 왈칵 눈물이 쏟아져 아무 말도 못한 채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지금 날 가지고 노는 거야? 그녀는 제 손을 뿌리치더니 이렇게 쏘아 부쳤습니다. 미연아...장난치는 거 아냐, 난...그 땐 내가 너무 어렸을 뿐이야. 내가...내가 너무 늦은 거야?

밥은 먹었어? 한동안 절 지켜보던 그녀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저는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저었습니다. 밥 먹자. 우리는 서로 말을 아꼈습니다. 오빠. 이제 편지 같은 거 하지 마. 내 생각도 하지 말구. 그럴수록 서로 상처만 받을 뿐이야. 그녀는 있는 기력을 다 쥐어짜낸 듯 보였습니다. 이젠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사랑이란 게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잊을 수 있는 거야? 난 그녀에게 따지듯이 물었습니다. 어떠한 미사여구를 구사할 그럴 힘도 제겐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나. 사귀는 사람이 있어. 못난 사람이지만 내겐 소중한 사람이야.

다음 날 귀대한 저는 바로 영창으로 보내졌습니다. 15일의 영창생활은 정말 길고도 길었습니다. 고생했지? 아닙니다. 중대장님께는 죄송할 뿐입니다. 첫사랑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런데 왜 모두 결혼하고 잘 사는 줄 아나? 세월이 흐르면 사랑도 잊혀지는 법이라서요? 틀렸어. 사랑했던 기억은 없어지지 않아. 아무리 긴 세월이 지난다고 해도. 수긍하는 거지. 단념하는 거야. 인정하고 묻어두는 거야.

여보. 안 자고 뭐해? 아내가 눈을 비비며 부엌에 들어섰습니다. 어. 잠이 오질 않아서...조차장 만난 건 어떻게 됐어? 새 작품은 어떤 거야? 그냥 그렇지, 뭐. 아내는 제 앞에 커피 잔을 놓더니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왜?

당신, 아직도 그 여자 못 잊었지? 갑작스런 아내의 공격에 전 당혹스러워집니다. 무슨 소리야? 지금은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는걸, 이제는...

거짓말. 아내는 장난스럽게 입술을 삐죽 내밉니다. 정말이라니까. 오늘 새벽에 당신 잠꼬대한 거 모르지? 잠꼬대? 아내는 양손으로 턱을 굅니다. 그 여자 이름을 어찌나 간절하게 불러대는지. 얼마나 애절하던지 내가 대신 대답이라도 해 주고 싶을 지경이었어.

제대를 하고 수소문 끝에 그녀의 친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절대로 제가 가르쳐 줬다고 하지 마세요. 저 맞아 죽어요...

침침한 복도를 가로질러 들어선 실내는 다행히 복도보다는 밝은 편이었습니다. 술집 다녀요...그녀의 친구는 그랬습니다. 많이 말렸는데 철저하게 자신을 학대하면서 살아 갈 거라고...

저 미연이라고 여기 일하죠? 바텐더가 피식 웃었습니다. 여기선 본명 가지곤 못 찾습니다. 그때 룸에서 나온 듯한 아가씨가 바텐더에게 술 취한 목소리로 뭐라고 지껄였습니다. 바텐더에게 양주 한 병을 건네받은 아가씨가 뒤돌아서려고 할 때였습니다. 혹시...난 용기를 내서 말을 걸었습니다. 짙은 화장과 베이지색 정장. 그녀...였습니다.

 

그녀는 술 취한 눈을 몇 번이나 비비고서는, 그제서야 날 알아 본 듯 했습니다. 오빠, 이거 좀. 바텐더에게 양주를 건넨 그녀는 내 맞은 편 자리에 다리를 길게 꼬고 앉았습니다. 제대했어? 응...술 마시러 온 거야? 복학했겠네? 응. 어떻게 지냈어? 그녀는 내 맥주잔을 뺐더니 단숨에 들이켰다. 보시다시피. 난 맥주를 병 채로 들이켰습니다. 그녀를 다시 찾을 때만 해도, 그녀가 돌아온다면 그녀를 받아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짙은 화장의 그녀와 재회했을 때...난 일종의 환멸을 느꼈습니다. 지금까지 저 여자는 얼마나 많은 남자들에게 웃음을 팔아왔을까...얼마나 많이 그들이 내미는 팁을 받아 챙기며, 사장 오빠. 사랑해를 연발했을까...

오빠가 이러면...컵을 쥔 그녀의 손에서 파란 핏줄이 돋아났습니다. 이제 이런 일 그만 두구 오빠한테로 돌아 갈래라고 하면서 내가 부탁이라도 해야 하나? 그게 오빠가 그린 시나리오야? 그녀는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습니다. 잘 가.

술집을 나오면서 난 다시는 그녀를 찾지 않으리라 맹세했습니다. 이제는 정말로 그녀를 잊으리라. 세상에 물들지 않은, 청순하고, 지적이고, 천사 같은 운명을 만나리라...

졸업을 하면서, 전 운 좋게 대기업의 사원 뱃지를 달았습니다. 입사와 동시에 외국연수가 있었고, 그렇게 훌쩍 몇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못 본 사이 녀석은 배도 약간 나와 있었고, 연륜이라고 할까요...뭐 그런 것이 느껴졌습니다. 멋지네. 프로그래머라. 휴대폰의 플립을 닫으며, 현이는 모르는 소리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말이 좋아서 프로그래머지. 이거 완전히 노가다다. 비오는 날도 출근해야 하고. 녀석의 얼굴엔 호기가 넘쳤습니다. 근데...녀석이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나...걔 만났다. 누구? 미연이.

녀석의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흘러 나왔습니다. 야. 정말 세상 좁더라. 우리 사무실 옆에 하드웨어 취급하는 딜러가게가 있는데...녀석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 왔습니다. 점심시간에 놀러 갔는데 걔가 있지 뭐냐? 어찌나 놀랬는지...너. 괜찮냐? 응...여기서 일하냐고 물었더니 글쎄. 놀라지 마라. 걔 컴퓨터 학원에서 애들 가르치고 있대더라. 너 믿어지냐?

솔직히 믿기 힘든 이야기였습니다. 제게 남아있던 건 짙은 화장과 팔을 드러낸 베이지색 정장의 그녀였으므로...명함까지 주더라. 갑자기 목이 탔습니다. 줘 봐...안 돼. 절대로 안 돼. 녀석은 끝까지 그녀의 명함을 주지 않았습니다. 너 아직도 잊지 못한 거야?

넌 멀리서 지켜만 보는 거야. 알았지? 약속장소에 들어선 녀석은 창가 쪽의 테이블로 다가 갔습니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나도 방금 왔어. 그녀였습니다. 아, 그녀는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가벼운 화장을 한 건강한 얼굴. 자신감이 느껴지는 목소리. 세상에 찌든 호스테스의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학원 일 힘들지? 아니. 나 몰랐었는데 선생 체질인가 봐. 애들도 잘 따르구. 그녀의 밝은 목소리를 들으며 전 왠지 모르게 참혹하다고 할까요. 그런 심정에 빠져 들었습니다. 그녀가 저 없이도...충분히 행복하게 살아 왔다는 사실이 심장을 후벼 팠습니다.

 

남자는? 남자? 사귀는 사람은 있지? 녀석이 은근히 물었습니다. 응. 있어. 민석 오빤 잘 지내? 그녀는 여전히 진한 커피를 마시지 못합니다. 블랙커피에 뜨거운 물을 반이나 붓고서는 천천히 젓습니다. 아마도 핸드백 안에는 작은 생수병이 들어있을 것입니다. 걔 00그룹 다녀. 그녀는 약간 놀라는 표정으로 단발머리를 쓸어내립니다. 공부 되게 잘 했나 보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담배를 꺼냅니다. 불을 붙이기 위해 약간 고개를 떨군 그녀의 목덜미에서 흔들리는 앙증맞은 목걸이. 아마도 그 남자가 선물해준 것이겠죠. 하긴. 오빠. 똑똑하긴 했었지. 예전부터...그래서 말인데...민석이 한번 만나볼래? 그녀의 손이 멈춥니다. 무슨 뜻이야? 현이는 당황해서 손을 내젓습니다. 그냥 뭐 친구같이 편하게 생각하면서...현이 오빠 생각이야? 아님. 그녀는 아주 깊이...숨을 들이쉽니다. 민석이가 그러더라. 그냥 얼굴 한 번만 보고 싶다구, 솔직히 나도 반대했다... 그치만, 뭐 인연이란 게 그렇지 않냐, 사귀는 남자도 있다니까 나도 한결 안심도 되구...

좋아. 그녀의 얼굴에서 잠시 떠돌던 긴장감이 풀어집니다. 사실, 나도 한 번 만나 보구 싶었어. 어쨌든 한때는 사랑했던 사람이니까.

저는 녀석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습니다. 당혹감으로 달아올랐던 그녀의 얼굴은 이내 평정심을 찾았습니다. 우리 술 마시자. 전 마셨습니다. 마시고...마시고...또 마셨습니다.

오빠. 그녀의 목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이기지도 못할 술을 왜 그렇게 마셔? 그녀는 꾸짖듯이 말했습니다만...저는 순간 누군가...그렇게 누군가가 절 꾸짖어 준다는 게 너무 좋아서...왈칵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천천히...저의 머리를 감싸 안아 주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전과 다른 것은 그녀의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뿐. 우리의 사랑은 너무나 긴 세월을 거쳐 이제 결실을 맺은 거라고...그렇게 믿었습니다.

우리 결혼할까? 어느 날인가 그녀는 불쑥 이런 말을 꺼냈습니다. 그 사람은? 이번 주에...얘기할래. 그럼 다음 주에 전화할래? 그때 가서 이야기하자... 그래. 긴장 속에 일주일이 흘렀습니다. 오빠...일요일 저녁.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 속의 그녀는 울고 있었습니다. 헤어졌어...이제 내 여자가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그녀를 저토록 슬프게 하는 그 사람에 대한 질투심이 한없이 끓어올랐습니다. 그러나, 정말 고통스러운 것은 그녀임에 분명했습니다. 자신을 나락에서 건져 내준 그를 버리고...그 불행한 시간의 씨앗을 잉태시킨 저를 선택한 그녀. 10월쯤이 어떨까? 난 더 빨리 하고 싶은데...그녀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 같아보였습니다. 그러나 형도 아직 결혼하지 않은 터에...가부장적인 아버지를 설득하는 일이 그렇게 녹록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때쯤부터 그녀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술에 취한 전화...바쁘다는 핑계...빌려가는 돈의 액수도 점점 커져 갔습니다.

여기 병원인데요. 김미연씨 아시나요? 여기 양산 병원 응급실이에요. 응급실요? 가슴이 뛰었습니다. 여자 분이 계단에서 굴렀어요. 어쨌든 빨리 와 주세요.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그녀는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술에 취해서 계단에서 구른 모양이에요. 애인이세요? 예. 링겔 한 병 놓았어요. 원무과로 가셔서 계산 해 주세요. 계산 끝나면 바로 데리고 가시구요. 간호사는 한심하다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샤워 좀 해야겠어. 자신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화장실로 들어갔습니다. 샤워를 마친 그녀는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서는 TV를 켜고서 코미디 프로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깔.깔.깔. 뭔가 해명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해명? 무슨 해명? 친구들 만나서 술 마셨어. 실수해서 계단에서 발을 헛디뎠구. 친구? 친구 누구? 그녀가 정색한 표정으로 얼굴을 돌렸습니다. 내가 누굴 만나는 것까지 일일이 보고해야 돼? 학원은? 때려쳤어. 그런 일은 나하고 먼저 상의해야 되는 거 아냐? 왜 그렇게 제멋대로야? 전부터 얘기했잖아. 메이크업 공부하고 싶다구. 어차피 임시직이구.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간섭하려고 들어?

 

그녀의 집을 나서면서...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와 결혼한다면 행복하리란 것. 모든 과거의 잘못들이 제자리를 잡고 나를 둘러싼 우주도 코스모스의 상태로 돌아오리라는 것. 나는 무슨 신념처럼 그것에 매달려 왔습니다. 그런데 마치...그렇습니다. 마취에서 깨어난 것처럼...복선이 깔린 소설의 시작처럼 스물스물 그림자가 깔리기 시작했습니다. 제 속에서...

두 달 정도가 흘렀을까요...다시 만난 그녀는 달라져 있었습니다. 진한 화장과...어깨가 드러나는 블라우스. 숨이 막혀 왔습니다. 우리 헤어져. 그녀는 담배를 물며 내뱉듯이 말했습니다. 왜? 짜증나. 그녀의 대답은 간결했습니다. 사람이 싫어졌는데 이유가 필요해? 조금도 슬프지 않았습니다. 그 때의 제 감정은...솔직히 후련함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직감처럼...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녀의 마음이 변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아무 미련도 없다는 듯이 뒤돌아 섰습니다. 버스를 타자 거짓말처럼 눈물이 났습니다. 슬프지 않은데도...왜 눈물이 나는 것일까...감정과는 상관도 없이 눈물이 나기도 하는 법이란 걸. 그 때 처음 알았습니다.

전 사람이 두려웠습니다. 정형화된 모든 사물들이 봄날의 아지랑이 속에 있는 것처럼...울렁거려서 전 자주 구토를 해댔습니다...이유가 뭐야? 여기 적힌 일신상의 이유란 게? 최대리는 사직서를 봉투 안으로 다시 밀어 넣었습니다. 일단 사직서는 수리하지. 등 뒤로 그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듭니다. 언제까지나 피할 순 없어. 세상을 이해하려면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해. 싸우고, 증오하고, 부대끼면서, 그래야 뭔가 얻을 수 있을 거야.

저는...세상에 남았습니다. 술과 천박한 여자들. 내가 경멸해 왔던 그것들만이 저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저녁까지 술을 마시고 아침이 되면 거리의 여자들의 품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점점 더 세상은 저를 나락으로 떨어뜨렸습니다. 아니, 저입니다. 제가 세상의 어둠을 향해, 모닥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그렇게 달려들었습니다. 원룸 보증금 천만 원. 어느덧 제게 남은 건 그게 전부였습니다. 4달 뒤에 전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 그 미지의 세계에서 숨 쉬는 것이 전 너무 행복했습니다. ‘부끄럼 많은 인생을 보내 왔습니다. 저는, 인간의 생활이라는 것이 도무지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다자이의 ‘인간실격’은 읽으면서 그 동질감이 너무 좋아서...너무 설렜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습니다.

여자도 생겼습니다. 난 심장이 없어. 누구한테 줘 버렸거든. 내 건조한 목소리에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 심장, 내가 만들어 줄게.

야. 너 이제야 제대로 된 여자 만난 것 같다. 축하한다. 경아의 이야기를 듣고 난 현이는 잔을 치켜들었습니다. 제대로 된 여자...

미연이 소식은 알아? 녀석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습니다. 아직이냐? 너 일본 갈 때 뭐라고 했냐. 증오한다며? 악연이었다며? 녀석은 술잔을 단숨에 털어 넣었습니다. 뭐해? 지금은? 다시 강사일 하나 봐. 다시 학원으로 돌아갔다는 얘기에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한참을 생각에 잠겼던 녀석이 입을 뗐습니다. 사실 이번 주말에 보기로 했다. 얼굴 한 번 볼래?

방학이라구? 응. 그녀는 안주로 나온 돈까스를 잘게 썰어서는 내 앞에 놓았습니다. 기억하는구나. 나 돈까스 좋아했던 거... 설마. 그런 것까지 잊었을라구. 그녀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눈빛이 좋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걸하고 있습니다라는 눈빛. 예전에는 어땠는데? 글쎄...어쨌든 달라졌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우리들은 점점 취해 갔습니다. 처음엔 그랬지. 오빠에게 돌아가면 내 어두운 과거도, 손목의 상처도...모두 사라질 거라고. 근데 아니었어...어느 날부터인가 난 오빠가 증오스러워 보이기 시작한 거야. 오빠가 웃을 때마다...어떻게 내 앞에서 웃을 수가 있지라는 생각이 들고. 모든 게 뒤틀려 보이기 시작했어. 순리가 아니었던 거야...지난 일이긴 하지만 이런 말까지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잔을 비우고서 그녀의 이야기는 이어졌습니다. 나중에는 복수하고 싶다는 기분이 들더라. 내가 느낀 고통. 그 절반이라도 저 인간이 느끼게 해 주고 싶다.

나 안 돌아갈랜다. 무슨 소리야? 다음 날 만난 미연인 내가 이런 말까지 꺼내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을 터였습니다. 나 남자 있어. 그 사람 사랑해? 그녀는 대답을 회피했습니다. 난 가지 않아. 아니, 갈 수 없어. 나한테 이러지 마. 오빠...그녀의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몇 년마다 불쑥 이렇게 나타나서 흔들지 마. 제발...그 사람 사랑하냐구. 나는 일종의 도박을 한 셈이었습니다. 그녀의 대답을 듣게 된다면 이제 정말 깨끗이 포기하리라. 뇌 속에 남아있는 모든 것을, 하드디스크의 불량 섹터처럼 기생하는 그녀에 관한 모든 기억들을 지우리라. 사랑하지 않아. 그녀는 덤덤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게 중요해? 날 더 이상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마. 그리고 오빠두 사귀는 사람 있다며? 난 모든 걸 버릴 수 있어. 정말 그랬습니다. 내 앞에 앉아있는 이 여자밖엔 사랑할 수 없다. 넌 내 심장을 가지고 있잖아...물론 이 말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서, 몇 년 동안 힘들게 이뤄온 걸 다 버린단 말야? 그래. 다. 그러면 되겠어? 오빠...나. 생각할 시간 좀 줄래?

뭐 해? 며칠 뒤에 전화가 왔습니다. 그냥 책 좀 보구 있었어? 금방 터질 것 같은 엔진처럼 헐떡이는 심장의 박동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나 그 사람. 그렇게 쉽게 정리할 수 없어...시간이 많이 걸릴지도 몰라... 괜찮아. 미연아. 이해할게. 다 이해할게.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라. 너 여기서 학교를 그만둔다는 건...현아. 소용없어. 탑승시간이 다 되었을 때 현이의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미연이다. 현이는 휴대폰을 건네 줬습니다. 어. 오빠. 미안. 어제 일이 좀 있어서 늦게까지 학원에 있었거든. 정말 미안. 언제 돌아와? 응. 다음 주 수요일. 귀국하는 날엔 꼭 나갈게. 조심해서 잘 갔다 와. 그녀의 다정스러운 목소리를 듣자 뒤엉켰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녹아 내렸습니다. 응. 그래. 더 자. 갔다 올게.

자퇴? 세끼구치 교수는 화들짝 놀라며 책을 덮었습니다. 내 굳은 표정을 읽은 그의 말투가 부드러워졌습니다. 이봐요. 민석군. 우리학교 국문과가 생기고 유학생을 선발한 건 민석 군이 처음입니다. 학교에서 민석 군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알잖아요? 죄송합니다.

다음 날 학과 사무실에 갔습니다. 사무실에는 주임교수인 카토교수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말인가? 돌아간다는 게. 설득의 여지는 없나? 예. 유감이네.

토요하라 상. 저 김입니다. 아. 김상. 혹시 내일 시간 있으십니까? 그는 나보다 네 살이 많았고, 쮸오대학 대학원에서 국제 관계학을 전공하고 있었고 대학에 들어갈 때 제 보증인이 되어 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 그럼 맥주나 한 잔 하자구. 마침 오전이면 수업이 끝나거든. 내일 학교로 가겠습니다.

악녀로군. 그는 대뜸 그랬습니다. 대낮부터 그는 맥주 집으로 날 이끌었습니다. 기분이 상했나? 김상도 한 잔 더? 아뇨. 전 다시 학교에 가 봐야 합니다. 바쁘군. 하루라도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모양이지? 그보다 악녀라니...우선 말이야. 자네는 그 여자가 평범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고. 뭐, 그런 무난한 삶을 걷지 못한 게 자기 때문이라는 부채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야. 대낮부터 술을 마신 탓인지 머리가 찌근거려 왔습니다. 이 망할 놈의 더위. 그건 그냥 그녀의 삶이었던 거야. 자네를 봐.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또 유학생활을 팽개치려고 하는 자네 모습을 보라구. 토요하라 상은 사랑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는군요. 사랑? 그는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일은 잘 끝났어? 까만 썬그라스를 낀 그녀는 정말 예뻤습니다. 많이 힘들었지? 그녀는 제 팔장을 끼었습니다. 아냐? 니가 있는 걸. 난 괜찮아.

왔냐? 현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 맞았습니다. 정말 감당 못할 놈이다. 너란 놈. 미안해...나한테 미안할 게 뭐냐? 니 인생인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번엔 확실히 좀 잡아라. 생각해 봤는데, 친구로서 말야. 미연이하고 다시 잘 되는 데 최선을 다해 돕기로 했다. 친구니깐...고마워. 가슴 속에서 뭔가가 쏴하고 뚫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뭐 할 거야? 앞으로? 번역사 시험을 칠 생각이야. 그걸로 먹고 살 수 있나? 하기 나름이겠지. 하기야...그녀는 말을 흐렸습니다. 한참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응. 그렇다니까. 그녀가 누군가와 전화를 하는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그녀의 낮은 목소리. 그래. 조금 멀리 와 있어. 꼭 지금 가야 돼? 아냐. 응. 알았어. 사랑해. 그녀의 애교 띤 목소리. 그녀가 제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오빠. 오빠. 왜? 저는 일부러 막 잠을 깬 듯이 몸을 일으켰습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가봐야 되겠어. 이 시간에? 응. 동생이 사고를 당한 모양이야. 같이 갈까? 아냐. 오빤 더 자. 가서 전화할게. 나오지 말구. 뒤이어 차 시동소리가 들리고...그녀는 그렇게 떠나 버렸습니다.

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거짓말을 늘어놓을 때마다 전 치욕감에 몸부림쳤습니다. 퇴근길에 우연히 들른 현이가 방문을 열었을 때 전 엉망으로 취해 있었습니다. 방 안에는 소주병들과 함부로 끈 담배가 채 꺼지지 않은 채 꾸물꾸물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야? 전 녀석을 붙잡고...울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이 없어...나...

너 무슨 속셈이야? 처음부터 그랬잖아. 그 사람 쉽게 버릴 수 없다구...끝낼 마음은 있고? 저는 허수아비처럼 눈만 뜬 채로 누워있었고 현이는 매섭게 그녀를 쏘아 붙이고 있었습니다. 민석이 듣는 데서 다 얘기해. 민석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민석이 너도 분명히 들어. 그녀는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난...오빠가...내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아. 이런 게 가슴이 애린 거구나...전 여전히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그녀의 손을 쥐었습니다. 미연이. 너. 그렇담 최소한의 인간적인 배려는 해야 하는 거 아냐. 동생이 사고를 당해?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너 저울질 당하고 있어. 그 남자 알아봤는데 P대 졸업하구 외국계회사 다닌다더라. 내가 저울질 당하고 있다는 거 나도 알아. 지금은 그 사람 쪽이 무겁다는 것도. 하나도 분하지 않아. 어떻게 하면 그 저울이 다시 내 쪽으로 기울 수 있을까...그것만 생각해. 성인군자 났네. 미친 새끼.

한국에 돌아온 지 세 달이 흘렀습니다. 일본어학원에서는 모두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기왕이면 졸업을 하시고 오시지. 교육부 조례란 게 있어서 말입니다. 채용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습니다. 저희만 그런 게 아니라 어딜 가도 마찬가질 겁니다.

또? 그녀가 그렇게 물어올 때가 제일 힘들었습니다. 서서히 멀어져 가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고...삶이라는 게 너무 치욕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잠시 찾아왔다가 돌아간 어느 날 저녁. 전 그녀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해변가에 잠시 걸터앉았다. 황량한 해변가에는 몇 쌍의 연인들과 점을 보는 할아버지 한 분이 정물화처럼 보인다...올 여름 이 바다는 많은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화려했으리라...그러나 겨울이 다가오는 바닷가는 쓸쓸하다 못해 황량하기까지 하다. 초라해지면...모두 떠나는 법이다. 어쩌면 바다는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그러나 다시 여름이 찾아오고, 그 화려함이 돌아온다면 이 바다는 과연 지금의 쓸쓸함을 기억할 수 있을까...난 사실 나의 진심만 전달된다면...모든 게 잘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어쩌면 앞으로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이 바다처럼 나도 한없이 무력하다.

답장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던 겁니다. 울산에 오지 않겠냐고. 우리는 어둠이 깔린 문수경기장의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인 거야?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녀의 전화를 받고 전 참 많이 들떴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준비하고 있었던 건 마지막 만찬이었습니다. 더 이상 나, 힘들어 견딜 수가 없어, 마치...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아...그리고 오빠, 이제 내 인생에 대한 죄책감 같은 거 가지지 마.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언젠가...이런 결말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눈물을 감추기 위해 전 줄곧 호수 쪽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무리에서 벗어난 오리 한 마리가 물 위로 올라서더니 몸을 흔들어 대면서 물기를 털어 댔습니다. 나 땜에 너무 많은 걸 잃게 해서 미안해...하지만 나두 오빨 다시 좋아해 볼려구 많이 노력했어. 하지만...안 되는 걸...도무지 마음이 열리지가 않아. 그렇다구 내가 언제까지구 오빨 붙잡아 놓을 순 없잖아. 그건 정말 죄악이라고 생각해...안주머니에 넣은 오른손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돌려줄 게 있어...그녀는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진작 돌려줬어야 했는데...그녀는 천천히 사진을 받아들었습니다. 어머. 이거 나 고등학교 때 사진이네. 내가 줬었어? 모르겠어...나도 기억이 나질 않아.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는지...그녀의 핸드백 속으로 사라지는 사진...이제 무엇으로 그녀를 추억해야 할 지...막막했습니다. 참 길었다. 우리...

 

그녀가 핸드백을 메고 일어섭니다. 그래...너무 길었지...길고도 길었어...결국 이렇게 끝나고 말 걸...너무 먼 곳을 돌아왔어. 태워다 줄까? 아냐. 곧 아침인데. 버스 타고 갈래...그럼 터미널까지 태워다 줄게. 아냐. 먼저 가. 난 좀 더 있다가 갈게...내 뒷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그녀는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오빤 좋은 사람이야...만약에 세상이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사자와 양떼들이 초원을 뒹구는 그런 세상이라면 난 어떤 망설임도 없이 오빨 선택했을거야. 제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전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제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려고 합니다. 부르릉...하고 시동이 걸리고...딸칵 하고 기어가 들어가는 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릅니다. 혹시라도 말야. 전 울먹이면서...그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혹시라도 말야...외로워져서...너도 지금의 나처럼 외로워져서.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아서...그래서 내가 필요해지거든...날 찾아. 기다리고 있을테니...무슨 소리야. 그게? 그녀는 조용히 묻습니다. 그러지 마. 오빠. 이젠 오빠의 길을 가. 그게 날 위하는 거야. 전 그녀가 이렇게 말해 주길 바랐습니다. 그러나...그녀의 차는 절 남겨둔 채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갔습니다. 저의 젖은 눈 속엔 언제까지고 그녀의...끄덕거리는 고갯짓이 남아 있었습니다.

시체처럼 지냈습니다. 악녀는 잘 있나? 토요하라 상한테 전화가 온 건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끝났습니다. 모든 게. 그쪽으로 가게 됐어. 그 쪽 Y대학 일본어 과 교수로 초빙을 받았네. 2년 계약으로. 어쨌든 한국에는 꼭 한 번 가 보고 싶었으니까.

잘 된 거야. 공항에서 만난 토요하라 상은 내 손을 꽉 쥐었습니다. 주술이 풀린 거라구. 그리고 이거. 그는 서류 봉투를 꺼내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뜯어봐. 그는 절 재촉했습니다. 복학허가서...그건 복학허가서였습니다. 이게...

자네가 한국으로 돌아가고 나서 학교로 찾아갔지. 다행히 아직 처리가 되지 않았더군. 교수들을 설득했어. 김군은 돌아올 거라고. 내가 강제로라도 다시 데리고 오겠다고. 그런 우수한 학생을 다시 받기는 힘들 거라고. 그래서 자퇴서를 휴학계로 바꿔치기한 거야. 어때? 내 선물, 마음에 드나...낄낄거리는 토요하라 상의 모습이 뽀얗게...흐려졌습니다...

여보. 내일 화이트 크리스마스래. 9시 뉴스를 보고 있던 아내가 어린아이처럼 환호성을 질러 댑니다. 전 노트북을 덮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린 참 손해보고 사는 것 같애. 손해? 무슨? 아내는 장난스럽게 볼에 바람을 넣고는 제 팔을 어깨에 두릅니다. 봐. 12월 25일은 크리스마스니깐 원래 축하하는 날이지? 뭐...그렇지...근데 내 생일이 또 내일이지? 그렇지... 거기다 우리 결혼기념일두 내일이지. 봐. 완전히 트리플이잖아. 정말 그렇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립니다. 학교 다닐 때 말야...개천절하고 일요일하고 겹치면 괜히 심술나던 거하구 똑같네. 그래. 그래. 아내는 재미있다는 듯이 손뼉을 쳐 댑니다. 인형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딸아이도 신이 나는지 덩달아 손뼉을 칩니다. 엄마. 난데. 내일 애 좀 봐 줄래? 아내가 전화를 하고 있는 사이, 전 베란다에 나가 담배를 피웁니다. 스무 살, 그 시절엔 내가 이런 소시민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었는데...스무 살...그 막막했던 시절...창 밖을 보라. 창 밖을 보라. 흰 눈이 내린다. 아파트 입구에 있는 교회의 휘황찬란한 불빛이 노랫소리에 맞춰 춤을 춥니다. 정말 눈이 내릴까?

많이 기다렸지? 시내는 좀처럼 일기예보를 믿지 않은 사람들 탓에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아내는 눈 때문에 많이 들떠 보였습니다. 우리의 축복 받은 크리스마스...그런데...거기서...그런 식으로...그녀를 만나리라곤...

오랜만이네. 응...그렇네. 그녀의 눈빛이 저의 전신을 훑어 내립니다. 좋아 보인다. 결혼은 했어? 어, 4년 전에...오늘, 결혼기념일이야...전 겸연쩍게 대답했습니다. 크리스마스에, 결혼했어? 그녀가 아주 잠깐 숨을 끊습니다. 그랬구나...저는 초조해져서 화장실과 실내를 가로지른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아내의 모습을 찾습니다. 아이는? 응, 딸 하나. 할 말을 찾기 위해 저는 아주 열심히 머리를 굴립니다. 행복해? 어...아주 행복해. 그녀의 질문에 약간 망설였던 자신에게 조금 화가 치밉니다. 넌? 넌 결혼했어? 그래 보여? 그 말을 듣고서야 전 그녀의 모습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립니다.

 

당연히 했지. 나이 차이는 좀 있는데 잘해줘. 참, 나 미국에 살아. 일이 좀 있어서 잠시 들어와 있는 거야. 미국? 응. 시애틀. 밤이 아름다운 곳이야. 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란 영화도 있잖아. 그녀가 외국에서 살고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었습니다. 일 봐, 기다릴 텐데. 할 말이 끝났다는 듯 그녀는 손을 내밉니다. 반가웠어, 어쨌든. 그녀의 손을 아주 잠깐 쥐었다 놓습니다. 손이 자유로워지자마자 그녀는 화장실로 발길을 옮깁니다. 맥이 탁 풀려서...저도 몸을 돌립니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 발을 멈춥니다. 온몸에 찌릿하게 긴장이 흐릅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힘겹게 고개를 돌립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슨 화장실을 그렇게 오래 다녀와? 아내는 약간 토라져 있었습니다. 나두 화장실 좀 다녀올래. 아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그녀의 온기가 남아있는 오른손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그리곤 꼼지락거려 봅니다. 여보. 저기...아내는 호들갑스럽게 의자에 앉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가려다가 사람하고 부딪힐 뻔했다. 나.

왜?

글쎄, 문을 여는데 웬 여자가 문 앞에 서서 펑펑 울고 있는 거야.

울고 있었어? 응. 실연 당했나 보다. 그지?

 

전 오른손을 탁자에서 슬며시 내려 감춥니다. 그 반대일 수도 있지...반대? 아내는 고개를 갸우뚱해 보입니다. 누군가를 버려야만 해서...누군가를 선택해야만 해서...그리고 그 버려야만 하는 사람을 실은 자신도 사랑하고 있어서...그래서 울 수도 있잖아...치, 말도 안돼. 그런 게 어딨어. 사랑이 얼마나 이기적인 건대...그런 건 소설 속에나 나오는 거라구.

아내와 와인잔을 부딪치며...결혼 3주년 기념, 영원한 사랑이라는 쵸코 시럽이 수놓아진 케익을 자르며...저는, 딸아이는 잘 놀고 있을까라는 걱정을 합니다. 난...소설을 쓸 테지만 소설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뭐라구? 아, 아냐. 아무것도...

그 날 그녀의 그 마지막 말이 환청이었는지, 아님 정말 그녀가 던진 말이었는지는, 아내가 보았다는 그 여인이 그녀였는지, 다른 여자였는지... 분명치는 않습니다.

세상엔 보이는 사랑도 있고, 보이지 않는 사랑도 있습니다. 주기만 하는 사랑도 있고 받기만 하는 사랑도 있습니다. 받아들여지는 사랑도 있고, 끝끝내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세월 속에 묻히고 마는, 그런 사랑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랑도 있고 추악한 사랑도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글쎄요...아직 해답을 내리기엔...너무 이른 것도 같기도 하고...이미 결론이 내려진, 그래서 예정 지어진 길을 걸어 왔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왜, 우리는 서로 필요할 때. 같은 맘이질 못했을까...이건 그녀가 제게 보낸 마지막 메일의 내용이자, 그녀와 제가 나름대로 내린 어줍잖은 사랑의 정의입니다. 캐롤송이 울려 퍼지는...눈물이 나도록...아름다운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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