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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7 09:25

그녀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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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방


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진아는 침대에서 옆으로 돌아누워 벽을 보고 있었다. 이불은 허리까지만 덮고 있었기 때문에 반쯤 가려진 커튼 틈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그녀의 상반신을 비추고 있었다. 진아의 가녀린 등과 어깨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을 담은 대야와 젖은 수건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진아가 내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을 리는 없지만 그녀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내가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왼팔을 잡아들고 수건으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수건이 어깨부터 손가락 끝까지 내려갔다. 이어서 뒷목과 등을 닦았다.


우리의 이런 행위는 얼마나 반복되어 온 것일까. 우리에게 시간은 완전히 정지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매일 반복되는 이 의식과 같은 행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그저 내가 진아에게 할 수 있는 헌신과 같은 것이었다.


이불을 내리고 그녀의 엉덩이와 다리까지 닦기 시작했다. 수건이 그녀의 발까지 내려갔을 때 나는 그것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진아의 발이 유난히 작아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성을 다해 그것을 씻기 시작했다. 발가락 사이사이, 그리고 발톱까지 최선을 다 했다. 그리고 그녀의 발바닥에 내 입을 갖다 댔다. 간지러운 탓인지 진아가 움찔하고 움직였다. 그녀가 힘을 주었기 때문에 발바닥에 주름이 잡혔다가 풀렸다.


진아가 돌아누웠다. 천장을 향한 그녀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분명 잠에 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정신 상태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선은 형광등을 향해 있었지만 그것을 보고자 하는 의도는 없는 듯 했다.


수건이 진아의 오른쪽 가슴을 닦고 있을 때 나는 내 왼손으로 그녀의 왼쪽 유두를 잡았다. 그녀가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 것에 대한 일종의 보복이었는데 이번에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내 포기하고 그저 그녀의 몸을 닦는 일에 열중했다.


전부 다 닦는 데에 약 20분 정도가 소요된 것 같았다. 나는 일을 마치고 대야에 수건을 담고 일어섰다. 진아의 눈은 여전히 형광등을 향해 있었고 입은 살짝 벌리고 있었다. 갑자기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녀가 지금까지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화가 나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제 오늘 겪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다시 참아냈다. 그리고 나는 대야를 들고 방을 나갔다.


나는 저녁이 되어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하는 일이란 물류센터에서 물건을 옮기는 일이 대부분인 그런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날 저녁이 되면 온 몸이 땀으로 젖고 옷은 더러워지고, 머리는 헝클어졌다. 이런 생활을 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언제부터인지 그런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내 몸에서 냄새가 나는지,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피하는지, 지하철에서 내 옆자리에 앉는 것을 피하지는 않는지, 그런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일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는 직원들도 많이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는 행위는 일을 하고 있는 중에는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그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비겁한 행위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니, 그런 생각이 오히려 나의 비겁한 변명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체념해버리는 것이 항상 그것을 고려해야 하는 피곤함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방문을 열자 진아는 흠칫 놀라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이내 우리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그날 따라 그녀의 눈빛이 무얼 의미하는지 궁금해졌다. 내 행색을 보고 초라하게 느꼈을까, 아니면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보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의 상황이 너무 싫어 나를 죽여 버리고 싶지 않을까.


그렇게 잠시 동안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지켜봤다. 잠시 후, 진아가 고개를 돌려 나를 등지고 벽을 보고 누웠다. 왠지 그렇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느꼈다. 그 시간이 더 길어지는 것은 참을 수 없을 것처럼 느꼈기 때문이다.


개운하게 샤워를 마치고 젖은 머리에 상의는 벗은 채 반바지만 입고 다시 진아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한 손에는 퇴근길에 사온 햄버거가 있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햄버거를 내밀었다.


진아는 이불을 들춰내고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흰색 민소매 티셔츠에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얼른 햄버거를 낚아채 최대한 빨리 그것을 감싸고 있는 종이를 벗겨냈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려 햄버거를 베어 물었다.


“오빠.”


진아는 우물우물 씹으며 입이 가득 찬 채 부정확하게 말했다.


“다 먹고 얘기해.”


진아는 허겁지겁 입 안에 있는 음식물을 삼켰다.


“나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돼?”


“왜? 어디 가고 싶어?”


“아니, 그냥. 집에 가고 싶어.”


진아의 말투에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집에 뭐가 있는데? 네가 필요한 건 내가 다 해줄게.”


“설마 평생 이러고 있을 건 아니지?”


갑자기 진아가 다급한 말투로 얘기했다. 너무 빨리 말해서 그 말을 잘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대충 문맥으로 파악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건...’ 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진아가 눈동자를 굴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나도 몰라.”


진아는 내 말에 실망했는지 고개를 숙이고 다시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내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저 햄버거를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정적이 감싸는 그 공기가 매우 불쾌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매일 보는 그 방을 살폈다. 꺼져 있는 TV, 아침에 차려놓고 간 밥상, 행거에 걸려있는 옷가지, 그 어떤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TV위에 얹어져 있는 리모콘의 위치도 바뀌지 않았고 밥상위에 얹어놓은 신문지도 그대로였다. 진아가 하루 종일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오늘 뭐했어?“


나는 걱정하는 말투로 물었다. 햄버거를 거의 다 먹은 진아가 대답했다.


“내가 여기서 뭘 할 수 있는데?”


나는 손을 올려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진아는 잽싸게 내 손목을 잡아채고 내려놓았다.


“그럼 무슨 생각했어?”


“몰라.”


“내가 미워?”


“응.”


나의 질문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대답한 진아가 조금은 얄밉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일어났다.


“또 어디 가?”


갑자기 진아가 꽉 막힌 소리로 크게 말했다. 그 소리는 온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급작스레 큰 소리를 낸 것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게 했다. 소리는 크지만 그 안에 아무런 힘드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하루를 버티다가 지금 있는 힘을 다해 그렇게 소리쳤다.


진아에 대한 연민이 치밀어 올라 뒤를 돌아보았다. 크게 뜬 눈에 마치 눈물이 고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지금 나를 원하고 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를 부둥켜 안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다. 나는 그렇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 마음을 가다듬는다.


진아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해 침대 밑에 있는 요강을 들었다. 양손으로 그것을 들어 올리면서 진아의 눈이 마주쳤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 나를 갈망 하는듯한 눈, 그러나 나는 그것을 외면했다. 등을 돌려 걷는 순간 그녀가 침대에 드러눕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이불을 뒤집어쓰는 소리가 뒤따랐다.


나는 화장실에 요강을 들고 가 세척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다. 진아와 이 곳에서 함께 지낸지 벌써 3개월이 넘어가고 있었다. 처음 그녀를 알게 된 것, 진아를 여기로 데리고 오게 한 것, 진아의 눈물, 그런 것들이 머리를 스쳤다.


요강을 깨끗하게 닦아낸 후, 대야에 물을 받고 그 안에 수건을 넣었다. 화장실을 나와 대야를 들고 내가 지내는 방을 지나 진아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녀에게 가까이 갔는데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조차 쉬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놀라지 않는다. 그것은 진아가 나를 조급하고 당황하게 만들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미 초기에 많이 시도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진아가 잘 듣게 하기 위해 수건을 물에 적신 뒤 힘껏 짰다. 공중에서 대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그 방은 약 세 평 남짓한 작은 방이지만 가구나 물건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약간의 잔향이 있었다. 나는 그 잔향이 좋았다. 내 목소리는 작아서 내 것에는 잔향이 별로 없었지만 진아가 말을 할 때면 그녀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조금 더 이 방안에 남아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방은 그녀의 것이고, 그녀의 숨소리와 목소리가 가득한 곳이다.


“옷 벗어.”


진아는 이불을 내리고 그녀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무표정하게 누운 채로 민소매 티셔츠를 벗었다. 그리고 짧은 반바지를 내리자 귀여운 곰이 그려져 있는 팬티가 보였다. 그것은 진아가 처음부터 입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레이스가 있는 여성스러운 것으로 입혀주고 싶었는데 그녀는 완강히 거부했다. 귀여운 후드 티셔츠를 즐겨 입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런 것을 좋아하는 취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조금 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대현이가 준 선물이라든가.


“팬티는 안 벗을거야?”


“네가 벗겨.”


진아가 뾰루퉁하게 말했다. 그녀는 가끔씩 이렇게 반말을 하고는 한다. 그것이 그녀의 작은 힘으로 나를 공격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는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조심스럽고 세밀하게 그녀의 팬티를 벗겼다. 드디어 그녀의 알몸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작고 여린 몸이었지만 가슴에 비해 탄탄한 엉덩이는 언제나 매력적이었다. 무심결에 내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향했다. 잠시 정신을 놓고 그녀의 엉덩이를 만지는 일에 열중했다. 미동도 하지 않던 진아는 돌연 정면으로 누웠다.


나는 물에 적신 수건을 들고 그녀의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이마를 시작으로 눈 밑과 볼의 순서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 팔을 들어 겨드랑이부터 닦았다. 그때 적막을 깨고 내 휴대폰이 울려대기 시작했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휴대폰이 울렸다는 사실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일단은 받았다.


“응, 대현아.”


진아가 힐끗 나를 쳐다봤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려 관심 없는 듯 행동했다.


“진아는?”


내 말에 진아가 다시 나를 올려봤다. 본인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진아는 안 찾을 거야?”


“당연히 찾아야지! 그런데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라 얘가 급하단 말이야.”


“알았어, 우리 집으로 와.”


“고마워, 역시 너밖에 없어!”


대현은 매우 다급하게 얘기했다. 지금 어떤 여자와 함께 있는데 그녀가 너무 취해 있어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모텔을 가려고 했다가 그것보다 가까운 우리 집으로 오는 게 더 편하고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대현이 우리 집으로 여자를 데려오는 일은 그 전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대현은 학생 시절부터 인기가 좋았고, 본인도 술과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런 일이 언젠가 오리라고 생각했다.


대현은 180cm 정도 되는 키에 다부진 체격을 가지고 있었고 공부도 잘 했다. 원래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친구였는데 내 친한 친구의 친구라는 것 때문에 학생시절 꽤나 가깝게 지냈었다. 이후 대현은 좋은 학교에 들어갔고 해병대를 전역한 후에는 역시 좋은 회사에 입사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지방에 있는 전문대학교를 1년 다니다가 집안 사정으로 휴학하고 방황하다가 힘쓰는 일밖에 할 줄 모르는 나와는 많이 달랐다.


그래도 나는 대현을 자랑스러운 친구라고 생각했다. 내가 못 가진 것을 많이 가졌기 때문에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내게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그 마음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대현이 진아와 사귀고 나서였다.


내가 카센터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진아는 손님으로 왔었다. 운전이 서툴렀던 그녀는 가드레일을 받고 만신창이가 된 차를 끌고 왔었다. 나는 처음 만났을 때 진아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행여나 많은 돈이 청구되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다. 또한 그 차가 아버지의 것이었기 때문에 집에 들어가 혼나게 될 것까지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작고 여린 여자가 당황하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녀는 내게 고마워하며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내 친구였던 대현과 함께 만나기도 했다. 내게도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었기 때문이다. 날이 갈수록 진아에 대한 내 마음은 부풀어 올랐지만 고백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앞날이 창창한 여대생이었고 나는 고작 카센터에서 일 하면서 근근이 살고 있다는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결국 대현과 진아가 사귀게 되었다. 나는 딱히 진아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대현도 내게 미안한 마음 같은 건 조금도 없었고 그건 진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순식간에 외톨이가 되었다. 그 후로도 세 사람은 종종 만났지만 나는 결코 그 자리가 즐겁지 않았다.


“대현오빠가 나 찾는대?”


전화를 끊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차에 진아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유난히 앙칼지게 들렸고 그것이 고양이의 소리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너는 대현이가 없어지면 찾을까?”


“글쎄, 여기에 있기 전이라면 그랬을 것 같은데 지금은 솔직히 잘 모르겠어. 오빠는 나 없어지면 찾을 거야?”


“응, 반드시.”


“그렇지, 오빠는 날 찾아내서 또 이렇게 만들어 놓을 거야. 그런데 대현오빠는 여기로 온대?”


진아는 그것을 무척이나 반기는 듯 말했다.


“여자를 데리고 올 거야.”


나는 그녀의 마음을 찢어놓고 싶었다.


진아는 ‘여자라고?’ 하며 놀라서 말했다. 나는 그 반응에 웃음이 나올 뻔했다.


“대현오빠는 그런 사람이었나?”


“이제 조금 있으면 올 거니까 너에게는 미안한 짓을 해야 할 것 같아.”


나는 책상 서랍에서 재갈을 꺼내 가지고 진아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불안해하며 흔들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아무 소리도 안 낼게, 안 하면 안 돼?”


“안 돼.”


나는 단호히 거절하고 재갈을 그녀의 입에 물렸다. 잠시 동안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던 진아는 곧 포기하고 가만히 있었다. 내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침대 기둥에 갖다 대자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손과 발까지 묶어놓을까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진아에게 모진 짓을 해야 하는 것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대현이 왔을 때 그녀가 도움을 요청할까, 소리를 지르거나 어떤 물건을 집어던져 소리를 내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방문은 닫으면 잠기게 되어 있고 밖에서만 열 수 있기 때문에 그녀가 몰래 빠져나갈 걱정은 없었다. 그리고 왠지 그녀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나는 대현이 올 것을 대비해 방을 나가 부엌을 정리했다. 설거지를 하고 그릇과 컵을 깨끗이 정돈했다. 대현은 분명 잠을 자고 갈 것이기 때문에 내 침실도 깨끗하게 치우고 이불을 깔아두었다. 내 방은 진아가 있는 방보다 작았다. 그러니까 진아가 있는 곳이 안방이다. 나는 TV도 좋아하지 않고 별다른 취미가 없었기 때문에 방에 있는 것이라고는 장롱과 좌식 책상, 그리고 작은 책꽂이 하나가 전부였다.


방에 널브러져 있는 옷가지들을 모아 화장실에 있는 세탁기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던 중에 화장실에 있던 요강을 발견했다. 그것을 치우지 않았으면 분명 대현이 물어 보았을 텐데, 하는 생각에 아찔했다. 그때 대현에게 문자가 왔다.


‘얘가 많이 취해서 그냥 데려다 줘야 될 것 같아. 미안해.’


나는 울컥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왔단 말인가. 모든 것은 다 이 날을 위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포기해야 하는 건가. 그때 번뜩 진아가 입에 재갈을 물고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나는 요강을 들고 진아가 있는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재갈을 급하게 풀었다. 진아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말했다.


“이 나쁜 놈아, 이렇게까지 해야 돼?”


“미안해.”


“대현오빠는?”


“안 온대, 그 여자와 잘 안 됐나봐.”


“그래?”


“기분 좋아?”


“그냥 그래.”


대현이 못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진아는 어떤 생각을 할까. 대현이 보고 싶었는데 그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실망한 걸까, 아니면 그가 여자와 잘 안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쁜 걸까.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 복잡한 기분일 것이라 생각했다.



“나 쉬 할래.”


나는 가지고 온 요강의 뚜껑을 열고 진아 가까이에 가져갔다. 진아는 그 곳에 앉아 소변을 보았다. 그녀의 소변이 요강에 부딪히는 소리가 잔향을 일으켰다. 고요한 방에 오직 그 소리만이 존재했다. 그것이 매우 음란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소변이 끊어져 가는 소리를 듣고 잽싸게 물수건을 가지고 왔다. 두 장을 꺼내 진아의 밑으로 가져 가자 그녀가 낚아 채며 말했다.


“내가 무슨 아기인 줄 알아?”


진아는 물수건으로 밑을 닦은 후 침대 위로 올라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다시 그녀의 탐스러운 엉덩이에 시선이 끌렸다. 나는 대야에 걸쳐 놓은 수건을 다시 물에 적신 후 짰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대현이는 안 오니까 아까 하던 걸 계속 하자.”


진아는 대답 없이 왼 팔을 들어올렸다. 나는 그 팔을 잡고서 겨드랑이부터 씻어나갔다. 그때 갑자기 진아가 내 손목을 잡고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런데 오빠는 왜 나랑 안 해?”


“지금은 싫어.”


“매일 날 이렇게 벗겨 놓고 씻기면서 섹스하고 싶지는 않다고? 나를 이렇게 벗겨놓는 게 좋은 거야, 내가 오줌 싸는 게 보고 싶은 거야? 변태야? 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너, 그리고 한 가지 더.”


“그게 뭔데?”


나는 진아의 질문은 무시하고 내 손목을 잡은 그녀의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수건으로 그녀의 팔을 닦았다. 그녀도 나의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한 듯 고개를 다시 돌렸다. 다시 방은 정적으로 쌓였다. 진아의 몸을 스쳐가는 수건의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나와 진아는 움찔하며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고 얼른 재갈을 꺼내 다시 진아의 입에 물렸다. 대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서랍에서 밧줄을 꺼내 그녀의 오른 손목을 침대 기둥에 묶었다.


“미안해. 네가 믿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나는 너의 고통을 바라지 않아.”


그렇게 말하고 진아의 머리카락을 두어 번 쓰다듬고는 일어나 방을 나가 방문을 닫고는 확실히 잠겼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내 머리를 다듬고 ‘누구세요?’ 라고 말하는 동시에 현관문을 열었다.


“왜 이렇게 늦게 열어?”


대현이 인사불성으로 취해 있는 한 여자를 부추기며 서 있었다.


“안 오는 줄 알았어. 어떻게 된 거야?”


“집에 보내려고 했는데 이 상태로 가면 부모님에게 혼난다고 하더라고. 술 깰 때까지만 여기 있을게.”


대현이 데리고 온 여자는 높은 굽의 힐을 신고 있어서 유난히 커 보이긴 했지만 그게 아니라도 상당히 큰 편인 것 같았다. 와인색 머리를 하고 있었고 완전히 밀착된 스키니 바지를 입고 있었다. 얼굴에 홍조를 띄고 있었는데 술기운에 그런 것도 같지만 약간 붉은 볼터치를 바른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핑크빛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는데 아마 술자리에서도 덧칠을 했을 것이라 생각되어질 정도로 바른지 오래 된 것 같지 않았다.


대현은 그녀를 데리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외투를 벗긴 후 이불이 깔려져 있는 바닥에 눕혔다.


“성수야, 물 좀 줘.”


나는 냉장고에서 끓여놓은 보리차를 꺼내 두 컵에 나누어 담고 그것을 쟁반 위에 얹은 후 그에게 갖다 주었다. 대현은 두 개의 컵을 양손에 들어 내려놓고는 한 잔을 그녀에게 주었다. 여자는 배시시 웃으며 홀짝 거리며 물을 마셨다.


“고마워, 신세 좀 질게.”


대현은 나를 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여자를 보고 이제 정신이 드냐고 물었다.


“응, 나 잠 들었었어? 그런데 여기 어디야?”


여자는 반쯤 감긴 눈을 하고 풀어진 혀로 알아듣기 힘들게 말했다.


“여긴 내 친구 집이야, 편하게 있어도 돼.”


대현의 말을 들은 여자는 나를 올려보고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초면에 죄송해요.”


“아니에요, 편하게 쉬세요.”


여전히 그녀의 말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내가 쟁반을 들고 나가려고 하자 대현이 조금 더 있다가 가라고 말했다. 그는 항상 그렇게 말한다. 여자와 함께 있을 때 나를 부르기도 하고 내가 그 자리를 뜨려고 하면 더 있다가 가라고 말한다. 나는 그것이 그가 나를 안중에 두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와 함께 하고 있는 여자가 내게 호감을 가지거나,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녀들에게 접근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아니야, 그냥 쉬어.”


“오빠 친구 멋있다!”


대현이 데리고 온 여자가 그렇게 말하고 까르르 웃어댔다. 대현이 ‘너 취했구나.’ 라고 말하자 그녀는 더 큰 소리로 웃었다. 대현의 농담은 나를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다. 나는 뒤돌아 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방을 나와 방문을 닫았다. 이 방은 내가 지내는 곳이기 때문에 닫는다고 바로 잠기지는 않는다. 그리고 대현과 여자의 웃으면서 하는 대화소리가 들렸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내 험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진아가 있는 방에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그리고 책상에 있는 도청기에 헤드폰을 연결하고 그녀의 귀에 씌어주었다. 나는 다른 이어폰을 연결해 내 귀에 꽂고 도청기의 볼륨을 확인하고 약 3db 가량 올렸다.


“나 화장실 가고 싶어.”


그 여자의 목소리였다.


“여기서 싸.”


“뭐야, 이 변태야!”


헤드폰의 소리를 들은 진아가 놀라서 나를 쳐다봤다. 대현이 여자에게 빨리 다녀오라고 하는 말이 들린 후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진아는 묶이지 않은 왼손으로 헤드폰을 벗겨내려고 하자 내가 그 손을 잡아 제지했다. 그러자 진아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오빠 친구가 뭐라고 안 해?”


“왜 뭐라고 해?”


“그냥, 그런데 오빠 친구는 뭐하는 사람이야?”


“그 녀석한테 관심 있어?”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노가다 비슷한 거 해.”


“힘들겠다.”


“대학도 못 나온 놈이 취직한 게 어디야?”


“친구라면서 왜 그렇게 심한 말을 해?”


“걔 얘기는 그만하자.”


“왜?”


“우울해지잖아.”


대현은 그렇게 말하고 웃었고 여자 역시 따라 웃었다. 그때 재갈을 입에 문채 웅웅거리는 진아의 소리가 살며시 들려왔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진아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준 것이었다. 내가 진아를 아프게 했다는 사실에 놀라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흐르다가 야릇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건너편 내 방이 있는 벽을 응시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소리만으로도 그 장면이 그려졌다. 대현이 여자의 옷을 벗기고 그녀의 가슴을 애무하는 것 같았다. 나는 진아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나는 진아 옆에 누워버렸다. 그리고 눈을 감고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소리를 감상했다. 이것은 내가 기다려온 일이었다. 그래서 진아를 데려왔고 방문은 닫으면 바로 잠기도록 장치해두었고 도청기도 준비해 두었다. 모두 이 날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대현은 내가 원하던대로 여자를 데려와 내 방에서 섹스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분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막상 그 일이 벌어지고 괴로워하는 진아를 보는 게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것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한 것인지 이제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진아가 내 어깨에 기대 누웠다. 그녀가 내게 안긴다는 것은 내가 승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조금도 기쁘지가 않았다. 대현 역시 전혀 패배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내가 눈을 뜨고 옆에 누운 진아를 보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부끄러운 듯 눈을 내리깔고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눈을 뜨고 시계를 보자 오전 7시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옆에 누워 있는 진아를 보자 재갈과 손목의 밧줄을 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소름이 끼쳤다. 옷도 입고 있지 않았다. 나는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그녀를 입에 재갈을 풀고 손목의 밧줄 역시 풀었다. 그녀는 잠에서 깨지 않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나는 정신을 차린 진아를 보며 말했다.


“나 늦었어, 나가야돼. 대현이 보낼까, 아니면 그냥 둘까?”


진아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대현이 보내?”


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녀를 뒤로 하고 방을 나와 대현이 있는 방을 향해 갔다. 그리고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대현과 여자는 알몸으로 엉켜서 자고 있었다. 이불은 엉망진창으로 뒹굴어 그들의 몸을 조금밖에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대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나 출근해야 되니까 이 여자와 빨리 나가.”


“왜 그래, 조금만 더 잘게.”


대현은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세게 잡으며 빨리 일어나라고 말했다.


“너 진짜 왜 그래, 조금만 더 자게 둬!”


대현이 귀찮은 듯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소리에 여자는 깜짝 놀라 눈을 뜨고 자신이 알몸으로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놀라서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얼굴만 빼꼼이 내밀고 대현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몰라! 알았어, 간다고!”


대현은 버럭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있던 자신의 팬티를 주워 입었다. 그리고 티셔츠를 입으며 여자에게 말했다.


“야, 너도 빨리 옷 입어!”


“나 너무 졸려, 조금만 이따가 가면 안 돼?”


“네 마음대로 해!”


대현은 잠과 술이 덜 깨었는지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여자는 전혀 정중하지 않은 태도로 내게 옷을 갈아 입을 테니 나가달라고 말했다. 남의 집에서 신세를 져놓고 이런 되먹지 못한 태도는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방을 나왔다. 방안에서 두 사람의 투덜거리는지, 싸우는 것인지, 애매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진아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성수야, 나 갈께. 어제는 고마웠어!”


“같이 가.”


“네가 느리니까 그렇지, 빨리 와!”


나는 방안에서 그에게 닿을 만큼만 큰 소리로 조심히 가라고 말했다. 잠시 뒤, 두 사람의 소리가 멀어져가면서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이 집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나와 진아 뿐이었다. 내 시선은 현관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방문에서 진아의 눈으로 바뀌었다.


“출근해야겠어.”


진아가 내 뺨을 어루만지면서 가지 말라고 말했다. 내가 왜 그런 말을 하냐고 묻자 그녀는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왜? 대현이 여자를 데려와서?”


“그것도 그렇고...”


“그리고?”


“몰라, 혼자 있기 싫어.”


“그런 이유라면 다녀올게.”


“오빠는 나와 함께 있고 싶어서 날 여기에 두고 있는 것 아니야?”


“맞아.”


“그런데 왜 내가 원할 때는 같이 있어주지 않아?”


“내가 모자란 놈이라서 그래.”


“그게 무슨 말이야? 진짜 날 두고 가겠다고?”


진아가 슬픈 눈으로 말했다. 눈꼬리는 쳐지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난 그녀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니까.”


“난 오빠 생각을 도무지 모르겠어. 모든 게 오빠가 원하는 대로 된 것 아니야?”


진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그걸 보는 나 역시 왈칵 눈물을 쏟을 것처럼 가슴이 미어졌다.


“아니라니까, 지금은 그저 네가 대현에게 실망했을 뿐이야.”


“난 여기 혼자 남는 게 무서워.”


“난 너를 잃을까봐 무서워.”


나는 물론 진아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조차 두려웠다. 그녀의 말대로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었고 언젠가 이런 일이 있으리란 확신에 충분히 준비해둔 것이었다. 그런데 혼란스러워하며 슬퍼하는 진아를 보면 죄책감만 들 뿐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에게 해준 것이라고는 가둬놓고 슬픔을 만들어 준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진아의 미소를 사랑했는데 나는 그녀를 슬프게만 할 뿐이라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무조건 도망치고 싶었다. 이 순간만 벗어나면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진아도 대현에게 악감정만 갖고 그에 대한 미련을 버릴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에 대한 감정은 의지를 넘어 사랑으로 변모할 수도 있다. 불안감과 죄의식 사이로 그런 희망이 피어올랐다.


나는 출근을 서둘렀다. 옷을 갈아입고 밥상에 생수병과 컵을 올려놓았다. 먹을 것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식빵과 딸기잼을 부엌에서 가져와 생수병 옆에 가져다 놓았다.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진아는 식사를 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다. 진아는 나를 잡는 것을 포기하고 침대에 누워버렸다. 내가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했지만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잠시만 잊는 거야, 오늘 일이 끝나고 돌아오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저녁이 되어 퇴근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은 왠지 상쾌했다. 환절기어서 밤공기는 제법 찼지만 그것 역시 기분이 좋았다. 오래 전에 들었던 유쾌한 노래가 떠올라 콧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마트를 들러 한가득 장을 봤다. 오전에 불쾌했던 감정은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고 양손에 든 비닐봉투를 내려놓은 후 앉아서 운동화를 벗으려고 하는데 잘 벗겨지지 않았다. 힘껏 잡아당겨서 겨우 벗고는 한 숨을 쉬었다. 그리고 진아가 있는 방을 향해 바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열쇠로 방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 이불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고 상 위에 물이 반쯤 담긴 컵이 있었다. 커튼은 모두 제껴져 있었다. 꺼져 있는 TV, 행거에 걸린 옷가지들은 모두 그대로였다. 서랍장 위에 대충 올려놓았던 도청기와 헤드폰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 것 같은데 단 한 가지, 진아가 없었다. 내가 침대를 향해 걸어가자 바닥에서 떨어지는 내 발소리의 잔향이 퍼졌다. 이곳은 오직 진아를 위한 공간이다. 그녀가 없다면 이 공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기에 있는 나의 존재 역시 의미가 없다.


갑자기 눈에 들어온 것은 행거에 걸려져 있는 그녀가 입던 곰이 그려진 팬티였다.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는데 오직 그것만 유별나게 대충 걸려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어 냄새를 맡았다. 한 손에 그것을 들고 침대에 다가가 풀썩 주저앉았다.


이불을 세 차례 주먹으로 내리치고 그것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불로 내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면 내가 크게 우는 소리가 세어 나갔을 것이다. 이 걷잖을 수 없는 슬픔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것일까. 함께 있어달라는 진아의 부탁을 외면하고 출근을 해버린 탓일까, 아니면 그녀를 기만하고 슬프게 만들었던 탓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애초에 그녀를 가두겠다는 생각부터 잘못된 탓일까. 어쩌면 겉으로는 친구인 척 하면서 대현을 질투하고 원망했던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내 머리를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래도 나는 울음을 도저히 멈출 수 없었다. 내 머리 위에 손은 내 뺨으로 옮겨졌다. 온화하며 따뜻한 손길, 그것은 어머니에게서도 느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 손은 다시 내 눈물을 닦는 데에 이용되었다. 이 손을 잡아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온몸이 힘이 풀리고 눈에 눈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기다렸잖아.”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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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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