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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방문 틈으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 오늘도 역시 그 소리에 눈을 떴다. 끊임없는 엄마의 고성에 내 귀가 떨어져 나갔으면 하는 상상을 매일 하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빨리 이 소리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 뿐. 목욕탕에서 무언가가 부딪쳐 부서질 것 같은 소리에 깜짝 놀라 집밖을 나선다. 그리고 흐느끼며 우는 듯한 울음 소리를 들으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집을 나선 후 도착한 곳은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독서실이었다. 2일 전 임용고시 합격자 발표를 확인한 후바로 등록한 독서실이다. 사범대학을 졸업한 나는 교사가 되기 위해 임용고시 공부를 하고 1달 전쯤 시험을 보았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임용고시를 합격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들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막상 합격자 명단에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쿵 내려앉는 마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럴 겨를도 없이 가족들 눈치에 다시 독서실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독서실 계단을 오르면 2층에 독서실을 관리하는 사무실의 쪽문이 열린다. “85번이요.”라고 말하고 3층으로 올라가면 어두운 밤바다 한 가운데 고기잡이배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불빛처럼 스탠드 불이 그곳이 내 자리임을 알려주고 있다. 머리에 닿을 듯 닿지 않는 사물함에서 한 달 동안 펼쳐 보지 않아 서글픔마저 느껴지는 중학교 교과서와 교사용 지도서가 보인다. 책상 위에 올려지는 순간 둔탁한 소리를 낸다.

결국 한 페이지도 보지 못하고 엎드린 순간 잠이 들고 말았다.

중학교 2학년 때 갑자기 아버지께서 엄마와 동생, 그리고 내가 함께 있는 방에 들어오려고 미닫이 문을 열려고 했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무작정 아버지로부터 엄마와 동생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방문을 힘껏 잡고 놓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엄마의 고성은 끊이지 않았고, 밤을 꼴딱 새고 말았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그렇게 한 달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런데도 엄마를 찾지 않았다. 무의미한 의식을 치르듯 아침에 일어나 씻고 학교를 갔고 학교에 가서 아무 일 없었던 듯 수업에 집중해서 듣고 주말이면 동생의 실내화를 빨고 교복을 빨아서 널었다. 집에 가면 아버지는 여기 저기 전화를 걸고계셨다. 비는 듯한 말투일 때도 있었고, 가끔 신경질적인 말투로 말하곤 하였다. 그리고 전화를 끊고 나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는 그 전화기 너머의 누군가가 엄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엄마, 엄마였을 것이다.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은 잘 먹고 잘 놀다가도 엄마 생각에 눈물을 흘리곤 했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매일 들어야만 했던 그 고성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만이 들 뿐이었다. 이제 그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그 소리는 이른 새벽까지도 끊임없이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들어야 하는 소리였기 때문에 귀를 틀어막아도 소용없는 고문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엄마에게 항거도 해 보았지만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그런 항거 뒤엔 내 의도와는 달리 나는 아버지의 편이 되어 버렸다.

아버지의 편이 되어 버린 나는 또 다른 아버지가 되어 엄마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내가 가는 곳이면 엄마는 계속 따라다니며 방문 옆에서 알 수 없는 소리를 고성과 함께 했다.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집을 나가 있는 일뿐이었다.

엄마가 말하는 것을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말하고 있는데 내 귀에만 들리지 않고 고성만 들릴 뿐이었다.

엄마를 다시 만난 것은 학교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큰 길목에서였다. 다시 만난 엄마에게서 반가움이 느껴졌다. 나를 껴안고 미안해하는 엄마의 모습에 내 엄마가 맞나 생각이 들 정도로 평범한 엄마가 되어 있었다. 집을 나간 후 엄마는 엄마의 엄마의 집에 있다는 것을 나에게 말했다.

엄마는 그리고 한 달 후 다시 우리 집에 돌아 오셨다. 외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오셔서 아버지와 엄마에게 벼락같은 소리를 하고 가신 것은 며칠 후였다. 외할머니는 이제 더 이상 엄마를 보지 않겠다고 엄포를 내리고 가셨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힘들게 결혼 생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평화로웠던 우리 집은 다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이 되어 버렸다. 엄마가 집을 떠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우리 집에 울려 퍼지는 소리는 딱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하루 종일 켜 있는 텔레비전 소리였고, 또 하나는 엄마의 고성이었다. 엄마의 고성이 멈출 때는 오직 엄마가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이었다. 옆으로 다리를 포개어 아랫배까지 끌어 모아 놓고 ‘1박X일’을 볼 때에는 오로지 텔레비전 소리만 집 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저녁 식사 시간에 우리 집이 어떤 풍경인지 알지 못한다. 대학생이 된 이후에는 바쁜 대학생활로 인해, 하루에 3개씩이나 되는 아르바이트로 인해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밤 11시 이후에나 되어 집에 돌아오면 씻고 잠을 자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가끔 집에 저녁 식사 시간에 들어가 보면 동생 혼자 라면을 끓여 먹든지, 아버지 혼자 저녁 식사를 드시고 있든지 그랬다. 우리 집은 가족 모두가 함께 식사라는 것을 하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가 맞을 것이다. 가족이 다 모여 식사라는 것을 해 본 것이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된 이유는 가족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익숙해져 버린 일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아버지도 이런 엄마의 고성이 싫으셨을까? 엄마는 내가 2살 때쯤 아버지가 자신에게 던질 재떨이가 내 이마에 맞아 갓난아기인 나를 병원에 데려가 20바늘 이상을 꿰매고 왔다는 이야기를 어느 코미디언이 토크쇼에서 하는 에피소드처럼 하곤 하셨다. 엄마의 고성에 아버지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항거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점점 더 심해지는 엄마의 고성에도 안방 한 쪽에 앉아 눈을 감고 듣고 계시는 건지 주무시는 건지 알 수 없이 바위처럼 계실 뿐이었다.

이런 엄마의 고성에 대항하는 사람은유일하게 나였다. 어떨 때에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는 척, 어떨 때에는 엄마와 똑같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항거를 해 보았다.

“엄마, 정말 소리 좀 그만 지르세요.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단 말이에요.”

아무리 외쳐 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또 다른 엄마의 외침이었다. 가끔은 엄마가 말을 하지 못하는 언어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하였다. 하지만 그런 상상은 이내 내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래도 나의 엄마인데 하는 생각에 다시는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다짐으로 상상 속에서 빠져나왔다.

엄마의 고성을 빼면 우리 집은 밖에서 보기엔 매우 화목한 집으로 사람들이 생각하였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일을 나가야 하는 아버지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아픈 상황에서도 단 한 번도 일을 거르신 적이 없으셨다. 그리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매일 학교로 출근하는 사람이었다. 동생도 어엿한 직장에 다니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쇼윈도 부부가 있듯이 우리 가족은 쇼윈도 가족이었던 것이다. 특히, 아버지는 산악회 모임에도 자주 참석하시고 동네 사람들과도 친하게 지내시면서 마당발 같이 아는 사람들이 많아 어느 누구도 우리 가족의 상황을 짐작하지 못했다. 나 또한 내 주변의 어떤 사람에게도 우리 가족의 이런 모습을 전하지 않았다. 가족에 관한 질문을 받게 되면 그냥 얼버무리고, 더 이상 이야기를 이어나가지 않았다. 나에게 가족은 그런 것이었기 때문에.

엄마에게는 도통 친구라고 보이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늘 혼자였다. 속 시원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상대가 없었다. 어느 날부터 엄마는 전화기를 붙들고 1시간이고, 2시간이고 놓지 않으셨다. 언뜻 들려오는 목소리와 말투로 보아 무엇인가를 상담해주는 사람인 것 같았다.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기 보다는 엄마는 그냥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었다. 한 순간이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 물거품처럼 없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말을 해야만 하는 그런 기계와 같았다. 내가 그 전화기 너머의 누군가의 대신이 되어주면 좋았겠지만 나는 여력이 없었다. 그냥 도망치고만 싶었다. 엄마로부터. 아니 그 소리로부터. 엄마가 말하는 말들은 엄마가 믿고 싶어 하는 일들이었다. 누군가의 위로를 받기 위해 철저히 자신은 불쌍한 사람이 되어야 했고, 피해자여야 했다. 그리고 나머지 가족들은 가해자여만 했다. 가해자인 우리들은 엄마를 힘들게 하는 존재였다. 엄마는 전화기 너머의 누군가에게 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말이 점점 진실이 되어가는 것 같이 느꼈던 것 같다. 그 이야기를 다 들으면서도 나는 엄마의 말들을 고쳐주고 싶지도 않았고, 들으면 들을수록 관심이 가지 않았다. 엄마에게 이유를 묻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나는 그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소리 자체가 나를 괴롭게 하고 있었으므로.

몇 년 뒤 나는 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독서실을 출근한 결과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선생님이 되었다. 아침부터 시작되는 엄마의 고성을 피하기 위해서는 집을 나가있는 일밖에는 없었는데 직업이 없는 나는 기를 쓰고 선생님이 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덕분에 독서실이 여는 아침 8시에 맞춰 올 수 있어서 공부를 규칙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독서실은 나의 피난처였던 것이다. 임용고시 합격자 발표 때 누구보다 엄마가 기뻐해주시고 같이 부둥켜안아 울 정도로 좋아해주셨기에 이제 엄마의 고성은 끝이 났다고 확신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잘못된 생각이었다. 엄마는 그칠 줄 모르는 소나기처럼 계속 계속 퍼부어댔다. 그리고 새벽까지 그 소리를 듣고 2시간 걸리는 학교에 출근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나는 쓰다버린 건전지처럼 학교에서 늘 힘이 없었다. 집에서 있었던 일을 감추기 위해 나는 학교에서 지금까지보다 더 철저히 나를 포장해야 했다. 나는 점점 더 집에서 멀어지려 했다. 집은 그냥 하숙집처럼 잠만 자고 일어나는 곳으로 여겼다. 학교에서일어나는 모든 일이 처음 하는 일이라 너무 힘들었지만 그 힘듦마저도 잊게 하는 곳이 집이었다. 나는 집에서 있는 시간이 더 힘겨웠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있어 학교란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었고, 집이란 내가 죽어가고 있음을 느끼는 공간이었다. 이런 이분법적인 공간의 분할작업은 내 삶의 과정에 전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이런 삶을 수정하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성마저도 인식하지 못했다. 아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나는 나의 무기력함을 인정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나는 정말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TV 드라마에 나오는 평범한 가족처럼 사는 것이 나의 꿈이었을지 모른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는데 나는 왜 그것이 가장 어렵고 힘든 것일까? 라는 물음을 늘 하고 하였다. 아무리 질문을 던져 봐도 정답이 없는 문제처럼 아무런 소득 없는 물음을 내 마음 속에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법한 절대자에게 던지고 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강해지는 마음 속 열망, 평범한 가족이 되고 싶었다. 정말 되고 싶었다.

그러다 한 줄기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지금 우리 가족을 통해 이룰 수 없는 가정이라면 내가 그런 평범한 가정을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바라던 엄마의 모습으로 그 가정에서 살아가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내 마음이 급해졌다. 생각이 어느 정도 확고해지자 빨리 그런 가정을 만들고 싶어 졌다.

내가 생각하는 평범한 가정은 단지 한 가지만 충족되면 되는 가정이었다. 엄마의 고성이 없는 것. 어느 누구보다도 나는 자신이 있었다. 내 자신만 통제하면 이룰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내가 사랑하는 사람도 내 곁에 있었다. 남자친구는 나보다 2살 많은 정말 평범한 남자였다. 나의 꿈을 이뤄줄 수 있는 평범한 남자였다. 그를 만난 건 내 나이 25살. 힘든 임용고시를 합격하고 1년 동안의 학교생활을 겪으면서 적응이 어느 정도 되었을 때에 학교 선생님의 소개로 만나게 된 남자친구는 나와 잘 맞았다. 남자친구는 군대에 갔다 와서 복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교에 적응하느라 바쁘게 지내던 중 나를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나는 집에서 더 멀어져만 갔다. 학교에서 퇴근하면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일이 더 많았다. 남자친구도 나를 자주 만나기를 원했기 때문에 우리는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결혼하는 것뿐인데 남자친구는 아직 결혼하기에는 나이도 많지 않았고,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집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꼭 결혼만은 아니었지만 내가 혼자 집을 구해서 나와 지낸다는 건 나로서는 대단한 도전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결국 나는 또 기다려야만 했다. 남자친구가 졸업을 하고 직장을 가져 안정되기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런데 이 기회는 도통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남자친구의 취업이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계속 시간은 흐르고 내 나이는 어느덧 30살이 넘어 있었다. 남자친구를 만나는 동안 나는 평범하지 않은 우리 집을 평범한 집인 것처럼 내가 꿈꿔 온 가정의 모습을 말하곤 했다. 어떤 가정보다도 화목하고 단란한 가족으로 우리 가족은 묘사하였다.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내 마음 한 언저리에 양심에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다. 남자친구와 내가 결혼을 결심하게 된 날부터 나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 말해 온 우리 가족의 모습이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남자친구가 알게 될까봐 걱정되었다. 그러나 그 걱정도 잠시 결혼. 누구나 평범하게 하는 결혼. 그것도 나에게는 어려운 통과의례처럼 거대한 파도에 맞서 싸우는 ‘노인과 바다’의 노인처럼 힘든 여정에 불과했다. 엄마는 무슨 일인지 내가 결혼하는 것 자체를 원하시지 않으셨다. 다른 집들의 경우, 여자 나이 30살이 넘어간 딸이 있으면 결혼을 재촉하기 마련인데 우리 엄마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엄마는 내가 나이 사십이 되어도 결혼하지 않았으면 했다. 뭐가 두려웠는지 내가 집에 계속 있어줬으면 하셨다. 엄마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하겠다는 생각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에 담아 꺼내면 안 되는 것 중의 하나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살아오면서 엄마의 고성이 싫긴 했지만 큰 반항을 하지 않았던 나는 생애 가장 큰 반항을 하고 난 후 ‘결혼’이라는 것을 쟁취할 수 있었다. 결혼을 하고 나면 나는 모든 것을 원위치 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내가 꿈꿔 온 평범한 가정을 꾸리면 살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엄마의 고성의 흔적은 내 다리에 남겨진 흉터처럼 나의 몸 어딘가에 새겨져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남편은 내가 결혼하기 전 연애 때부터 말해 온 평범한 가정의 구성원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 평범한 가족의 모습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남편의 가정은 내가 가장 바라고 바랐던 TV드라마에 나오는 평범한 가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의 가족은 아버지,어머니,누나,여동생 총 5명이었다. 연애는 누나나 여동생보다 남편과 내가 더 빨리 시작했지만 결혼은 가장 늦게 하게 되어 남편의 가족은 이미 대가족이었다. 가끔은 의견 충돌이 있지만 금세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지극히 평범한 가족이었다. 남편과 남편의 가족들은 나 또한 자신들의 가족 구성원으로서 적응하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만남을 자주 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연락 또한 자주 하길 바랐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요구는 당연히 할 수 있는 요구였고, 나 또한 그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머리와 몸이 따로 놀듯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고 있었다. 남편은 나에게 시부모님이 다니고 계시는 교회에 매주 가길 원했지만 나는 지하철로 2시간 이상을 가야 한다는 핑계로 3번을 가고 더 이상 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시부모의 생신과 명절을 제외하고는 만나려 하지 않았다. 시댁의 어떤 사람과도 어울리는 것을 꺼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이런 나의 모습에 매우 낯설어 하였다. 그리고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여겼다. 어쩔 수 없이 남편과 나는 신혼 초기 내내 다툼과 갈등 때문에 서로 힘들어 할 수밖에 없었다. 다툴 때마다 난 나의 생각들이 옳지 않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남편에게 늘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이해해 주길 주장했다. 내가 가장 바라던 것이었는데 왜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는 것일까? 생각을 깊게 하면 할수록 점점 늪 한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 결혼 생활을 계속 이어나가지 못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나의 이런 생각과 행동에 대한 답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밤마다 가까운 교회 기도실을 찾아가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인간인 내가 그 해답을 찾을 수 없다면 인간보다 더 월등한 절대자는 그 해답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기도실에 가서 기도할 때마다 내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낼 정도로 그 해답을 찾으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나는 끝내 그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평범한 가정을 만들려 했던 나의 꿈은 그렇게 산산조각이 나기 시작했다. 시댁에 잘 하지 않는 나를 싫어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시댁에서도 자신들과 융화하려고 하지 않는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어쩌다 전화를 드리면 시부모님께서는 연락의 횟수를 언급하시곤 하였다. 시댁에서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고치려고 해 보아도 나는 도통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지 못하고 시댁의 불만을 해소시켜주지 못했다. 그리고 점점 그들이 두려워지기 시작했고 그들과의 만남이 무섭기만 했다. 남편은 이제 대놓고 이런 나의 행동을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전하기 시작하였다. 남편은 ‘나’란 사람에 대해 사교성이 부족하여 ‘독고다이’라는 식으로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선생님과 관련된 일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으려고 하고 어떤 사람과도 교류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못마땅해 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남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남편에게 미안해하고 생각을 바꿔 보려고 노력한 나도 점점 심해지는 남편의 태도에 지쳐갔다. 그리고 더욱 문제가 되었던 것은 남편에 대한 우리 가족의 태도였다. 남편은 나의 이런 문제 행동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의 평범하지 않음을 문제로 삼고 있었다. 명절에는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자신의 안부를 전하고 돈독한 가족애를 확인하는 기간이다. 이런 사실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 특히, 우리 엄마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엄마는 만남 자체를 거부할 뿐 아니라 남편의 연락 또한 받지 않고 있었다. 남편이 전화를 하면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소리는 신호음뿐이었다. 몇 번을 해도 결과는 같았다. 처음에는 전화가 안 되는 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던 남편도 전화 연결 자체도 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상하게 여겼고 혹시 자신의 전화만 받지 않고 피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물음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이 사실은 나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고, 남편은 내 전화기를 통해 엄마와 전화통화를 하길 원했다. 하지만 나는 어떤 결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이미 알고 있었다. 엄마는 내 전화기를 통해 건 전화마저 받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 사실이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매우 놀랍게 여겼고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을 나를 통해 듣기를 원했다. 나는 이런 남편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나도 그건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내가 할 도리는 하지 않은 채 하기도 어려운 일을 남편이 하기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평등’이라는 개념을 빌려 시부모의 생신마다 갖는 가족모임을 친정부모인 우리 엄마, 아버지 생신에도 가져야 한다고 우겼다. 그리고 생신이나 명절 때마다 드리는 용돈 20만원씩을 우리 가족에게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일들은 우리 가족에겐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런 일들은 우선, 만남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들인데 우리 엄마는 만남조차 꺼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가족 중에서는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엄마와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핏줄로 맺어진 가족들에게도 무관심하고 대화가 단절된 모습으로 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 생긴 가족인 남편에게는 더 하면 더 했지 좋은 모습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지만 도대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남편의 가족은 내가 알고 있는 평범한 가족보다도 더 화목한 가족이었기 때문에 나 또한 이해되지 않는 문제도 계속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남편의 가족과 우리 가족은 너무도 다른 가족이었다. 그 간격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남편은 나와 남편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시부모나 시누이에게 시시콜콜 이야기 하였다. 물론 그것은 이상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에 한 번 이상 시부모나 시누이와 연락을 하는 남편을 나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우리 부모님과 동생에게 한 달에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고, 결혼하고 나서 연락한 횟수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기 때문에 점점 잦아지는 남편의 시댁과의 연락 횟수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나는 점점 더 나쁜 며느리가 되어 버렸다. 남편은 아예 나를 ‘나쁜 며느리’라고 불렀다. 친해지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만남과 연락을 거부하는 나의 모습에 당혹스러움 보다는 가치를 부여해 버린 것이다. ‘나쁜 며느리’가 되어 버린 나를 도와주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내가 그렇게 만든 까닭이었다. 나는 점점 지쳐갔다. 학교생활마저 없었다면 더 이상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나의 사고는 건전지가 빠져 버린 리모컨처럼 멈춰 버렸을 것이다. 멈출 수가 없다면 강제로 멈춰 버리고 싶을 만큼 나는 지쳐 있었다. 남편과 나 사이에 남편의 가족만 제외한다면 사실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남편 또한 나를 무척 사랑하기 때문에 다른 부분들이 흔히 겪을 수 있는 ‘남편의 외도’ 같은 것은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말로만 듣던 시댁과의 갈등이 평범하지 않은 나로 인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나만 고치면 되는데…….’ 수만 번 마음속으로 외치고 또 외쳐 보아도 도무지 내 생각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결국 큰일은 일어나고 말았다. 1월 1일 새해 첫날. 내가 먼저 남편에게 시부모님께 연락을 드리겠다고 말을 하고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한 순간 전화기 너머 시어머니께 처음 들은 말이 늘 듣던 말이었는데도 무엇이 그렇게 내 가슴을 찔러댔는지 내 눈에 눈물이 대롱대롱 맺히더니 뚝뚝 떨어졌다.

“너는 전화에 인색하구나.” 시어머니와의 통화를 조심스럽게 듣고 있던 남편은 정상적인 통화를 하고 전화를 끊는 줄 알았다가 별안간 내린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침대에 엎드려 ‘꺼억’하며 울고 있는 나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우는 이유를 묻는 남편에게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한 시간 이상을 울고 말았다. 울지 말라는 남편의 짜증스런 말에도 나는 끊임없이 울어댔다. 남편은 이런 상황의 원인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자신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였다. 그리고 통화내용은 알 수 없지만 언성이 오가는 소리를 듣고 나는 작은방으로 달려갔다. 남편은 전화 통화 후 울고만 있는 나에게 무슨 말을 했냐고 다짜고짜 자신의 어머니에게 따지고 있었나 보다. 시어머니는 영문도 모르신 채 아들의 갑작스러운 말과 행동에 놀라 전화기 저편에서 흐느껴 울고 계셨다. 남편과 시어머니의 몇 마디의 통화가 오가고 난 뒤 남편은 갑자기 전화기를 나에게 넘겨주었다. 얼떨결에 받은 전화기를 귀에 대고 시어머니의 어떤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 시어머니와 나는 진지하게 서로의 살아 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어머니는 단지 며느리인 나를 자신의 딸과 마찬가지로 함께 여러 가지 추억을 만들며 살고 싶었다는 말과 나는 솔직하게 모든 걸 다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살아 온 일들의 일부를 말씀드리고 이해를 부탁드렸다. 한참 이어진 전화 통화 끝에 시어머니와 나는 이 한 통화로 우리의 일들이 전부 다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것이 서로를 알기 위한,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기 위한 첫 걸음마를 뗀 것이라는 것만은 알았다.

그 전화 통화 이후로부터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은 시부모님께 전화를 드리면 더 이상 연락의 횟수를 따지시는 말씀은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아주 조금이지만 연락하는 횟수를 늘리려고 노력하였다. 서로에 대한 불만이 줄었다고 보기에도 어려운 아직은 어색하기 짝이 없는 관계이지만 아직 첫 걸음마를 뗀 것뿐이니까.

설날이 되어 온 가족이 모두 모였다. 물론 남편의 가족이 모두 모였다. 우리 가족은 아직도 다 모이지 못하고 있다. 결혼한 그 해에 집들이를 한다고 했을 때에도 남편의 가족은 대전에 살고 있는 여동생까지 올 정도로 잘 모였다. 아무튼 설날이 되어 온 가족이 다 모이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나쁜 며느리’라는 이미지를 아주 조금이라도 벗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설날에 음식을 해 가지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원래는 하루 전 날 시댁에 가서 시어머니께 명절음식 중 어떤 것을 해야 하는지 여쭤본 후에 시어머니와 함께 하는 것이라고 주변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해줘서 그렇게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시댁에는 남편의 누나가 함께 살고 있어서 잘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였다. 뭐, 잘 생각만 있었으면 그 좁은 공간에서도 잘 수 있었겠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명절음식을 만들어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주변에서는 의견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나에게 충고하기 시작했다. 한 가지는 시어머니께서 음식하기 힘든 상황에서 내가 잘 하진 못하더라도 음식을 해 가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다른 한 가지는 처음 맞는 명절부터 음식을 해 가면 기대치가 높아지기 때문에 다음 명절 때 내가 부담을 많이 느낄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나는 이런 저런 의견을 다 듣고도 결국 명절음식을 해 가기로 결정하였다. 1주일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음식을 만들기 위해 재료들도 전통시장에 가서 사기도 하였다. ‘전’을 부치기 위해 동태도 사고, 밀가루도 사고, 생전 처음 가 본 정육점에서 불고기 만들 고기도 샀다. 그리고 명절 전날 ‘전’, ‘잡채’, ‘불고기’ 이 세 가지 음식을 하려고 전쟁 아닌 전쟁을 치렀다. 모든 것이 다 처음 해 본 것들이라 시간도 많이 들고, 허리랑 등 같은 곳이 욱신거렸다. 그리고 막상 음식을 해 놓고 보니 걱정이 들었다. 오히려 맛없는 명절음식 때문에 긁어 부스럼이 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온갖 걱정들로 뒤척이며 잠이 들었고, 결전의 그날이 밝아왔다. 오랜만에 만난 남편의 가족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있던 참에 남편의 누나가 먼저 내가 해 온 명절음식을 꺼냈다. 생각하지도 못한 칭찬이 이어졌다. 그리고 시어머니의 말이 이어졌다.

“아이고, 뭘 이런 걸 다 해 와. 많이도 해 왔네. 지수랑 지혜, 저 두 것들은 이런 거 하려고 생각도 안 하는 것들인데…….” 내가 해 온 음식들을 꺼내서 상을 차리고 온 가족이 모두 모여 먹는데 생전 느껴 보지 못한 뭉클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지나가는 말로 시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이 이제는 웃으며 넘길 수 있을 정도가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야야. 잡채에 들어간 시금 치가 많이 익혔는지 약간 죽이 됐다. 야야.” 이제 절반은 이 집 가족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가족이라는 느낌을 조금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우리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도 결혼해서 처음 시댁에 갔을 때 이런 기분이 들으셨겠지?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엄마도 다 느끼셨겠지? 그러면서 내 뺨에 눈물이 뺨을 타고 또르륵 흘렀다. 왜 나는 엄마의 그 눈물을 몰랐을까? 내가 시댁에 가서 느낀 외로움을 우리 엄마도 느끼셨을 텐데 나는 왜 그 외로움을 몰랐을까? 그냥 그것만 알아주면 되는 것이었는데. 엄마의 고성은 엄마의 외로움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시댁에서 나온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엄마에게 나는 울부짖듯이

“엄마, 미안해. 많이 외로웠지? 엄마 미안해. 정말 미안해.” 영문을 모르는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나의 울부짖음을 또 다른 고성을 듣고 있었다. 그 침묵에는 ‘그래, 엄마도 미안하다. 널 외롭게 해서 미안하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 집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엄마가 기다리고 있는 우리 집으로.



  • profile
    korean 2016.02.29 01:58
    첫 작품 치고 수작이네요.
    열심히 습작하시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늘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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