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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7 17:12

하얀 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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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이불

 

 

 

  에메랄드. 쪽빛 내는 소주병이 냉기가득한 방구석에서 나뒹군다. 아이는 말이 없다. 아이의 아버지의 뺨이 붉어질수록 아이는 세상과 서서히 멀게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버지의 붉은 뺨과 붉은 눈알을 피하려 아버지의 발끝을 바라보나 그 발끝마저 오한을 뿜어 지레 제 발끝으로 시야를 떨군다. 아버지는 모질고 풍진 세월 머금은 두꺼운 손으로 매섭게 아이의 뺨을 갈긴다. 아이의 아버지는 뺨을 때리며, 빌어먹을 자식. 자식 버린 년을, 하고 한 대, 뭣 하러, 하고 한 대, 그리는 거여, 하고 한 대. 아이는 군소리 없이 걸싸게 날아오는 손을 참아낸다. 아이는 그것들을 참아내며 빈 종이에 어머니를 그려 넣은 것이 잘못인지 골몰했다. 그리고는 어머니는 어디 갔어요. 하며 거쿨지게 말하고는 눈물을 터뜨리며 어린 아이처럼 으앙 울었다. 아이의 아버지도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주저앉아 조용히 눈시울을 붉힌다.

 

  아이는 본디 아이의 어머니와 둘이 살았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의 어머니의 뱃속에 아이의 뿌리만 둔 채 홀연히 떠나셨다. 아이는 그렇게 아이의 어머니와 둘이 수 년 거쳐 십 수 년을 살았다. 오손이 그리고 도손이 그렇게 살았다. 헌데 어머니는 한 해 전, 장을 보러 가신다며 길을 나섰다 그날 밤 아이는 집이 원래 높고 험한 곳에 있는지라 그리고 당해에 첫 눈이 오는지라, 어머니가 늦으시는구나, 하며 잠에 들었다. 다음날 달이 지나간 자리의 꼬리 끝머리를 해가 야금야금 삼켜가기 시작할 때 즈음 아이는 잠결에 일어나 어머니 방을 가보았다. 어머니가 아직 안 오셨네.

 

  아이는 대수롭지 않은 듯 학교 갈 채비를 마치고 정갈히 걸쳐 입은 교복 위에 긴 갈색 코트를 둘러 입고 집을 나섰다. 겨울이라 밤이 길어진 탓에 하늘은 온통 눈알 멍든 놈 마냥 검푸른 것이 아파 보였다. 그리고 별빛 달빛 그것들의 쪽빛들이 땅을 내리 비추니, 첫눈이 오긴 왔구나, 했다. 그해 첫눈은 느즈막이 내렸는데 그 덕인가 소복이도 길을 덮고 있었고 그 하얀 것들은 오래도록 기다렸다는 것을 생색내듯 찬 숨 내쉬며 아이를 겁주었다. 아이는 저벅 저벅 오르막의 아랫자락에 자리 잡은 땅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반쯤 걸었을까. 첫눈의 냉기 덕인지 어둠의 냉소 때문인지 머리카락 자락 끝에서부터 작은 공포가 밀려와 자리를 멈추어 채 지지 않은 달빛이 내려앉은 눈 위에 쪼그리고 앉아 저 멀리서 하나 둘씩 가로등이 밝아오는 것을 지켜보며 아이가 걷는 길이 밝아 오기만을 기다렸다. 아랫동네 가로등이 하나 둘 밝기 시작하며 오르막 저 아래 어둠 속 가로등이 정월의 보름마냥 빛났다. 그 가로등이 밝았을 때 가로등 아래 한 사람이 서있었고 모자를 눌러써서 인가 얼굴은 뵈지 않았다. 허나 아이는 발을 기둥삼아 나아갈 수 없었다. 동물적으로. 저 아래 사람이 한 걸음 한 걸음 아이 쪽으로 걸어온다. 아이는 반에 반걸음 씩 굳은 채 뒷걸음질 했다. 서서히 들려오는 저 아래 사람의 가쁜 숨이 점점 커진다. 그 아래 있던 사람은 아이에게 다가와, 동수니?, 했다. 아이는 모가지를 끄덕였고 사람은 아이를 부둥켜안고 흐느꼈다. 어둠 속의 사람은, 나 모르겠니. 아버지다. 아버지, 했다. 그해 첫 눈 오는 날 첫 눈과 함께 아이의 아버지도 왔다. 허나 그 사람이 아이의 아버지인들 무엇 하랴. 아이는 아버지를 몰랐으며 낯선 사람이 어색할 뿐이었다. . 아버지. 아이는 정중히 고개 숙여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 안녕하세요, 했다. 아버지는 아들이란 녀석이 지껄인 안녕하세요에 당황하며 굼슬겁게 웃었다.

 

  아이는 학교 책상머리에 기대어 아버지라는 사람을 조심스레 상기했다. 어머니 말로는 아버지라는 사람이 뒷동산에 백 여 년 자리 잡고 눌러앉은 소나무보다 억척스럽다고 했다. 그러고는, 가끔씩은 그 소나무 옆에 자라는 풀잎 같이 보드랍기도 하고 소나무를 지나 더 올라가면 무덤들의 옹기종기 있는데 그 사이 사이에 난 코스모스 같기도 해. 쑥스러우면 벌게져가지고, 하며, 하얀 얼굴이 아름다웠으니까, 했다. 뒤이어 형용한 마지막 말로는 그 어떤 비유 없이 위험한 남자라는 말이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그 외의 아이의 아버지에 대한 말은 꺼려했고 피했다. 하루는 아이의 어머니가 술에 취해 귀가한 적이 있다. 아이의 어머니는 조용히 안방에 들어가 어머니가 늘어놓은 시들이 즐비한 방벽을 바라보며 운적이 있다. 아이는 어머니의 울음을 먹는 소리에 놀라 안방 문을 빼꼼 열어보며 울고 있는 어머니의 등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어머니는 소리를 삼켜가며 낮지만 간드러지는 투로, 당신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살고 있어. 나도. 나도 멋있게 살아보려 했는데. 당신이. 당신이 다 망쳤어, 했다. 아이의 어머니의 꿈은 시인이었다고 했다. 아이는 어머니의 흐느낌을 뒤로 한 채 나볏한 투로, 하루 이틀 저러나, 하고 제 방으로 뒤돌아 들어갔다. 아이는 속으로, 어머니가 부르는 당신이라는 사람이 어림 어림으로 아버지이겠거니, 했다.

 

  아이는 책상에 무심히 올라와 관심 하나 받지 못한 채 교과서의 공백에 새벽녘에 본 아버지라는 사람을 찬찬히 그려보았다. 기골은 컸고 자세는 구부정한 것이 우였는지 좌였는지 또렷하지는 않지만 기울어진 것이 불편한 구석이 있어 보이는 그런 자세. 초침이 둥글게 열 번 돌았을 때 아이는 작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교과서의 우편 공백에 그려진 기울어진 그림자. 기억이 나는 것이라고는 가로등 불에 듬성듬성 보이는 아버지라는 사람의 테, 곡선뿐이었다. 아이는 이내 신경질이 났는지 마구잡이로 테 뿐인 빈 그림자 그림 위를 흑심으로 할퀴고 책상에 엎드렸다.

 

  언덕 빼기서부터 그림자 사람이 저 멀리서 달려온다. 절뚝절뚝. 아이가, 아버지 입니까? 아버지 맞습니까, 한다. 그림자 사람은 그림자라 주둥이가 없어서일까 아이의 말에 대꾸 없이 달려온다. 절뚝절뚝. 아버지. 아버지. 아이는 대꾸 없는 야속한 그림자 사람의 주둥이에 아랑곳 않고 그를 아버지라 부른다. 목 놓아. 한참을 고래고래 소리쳤을까. 누군가 아이의 등을 툭 떠 민다.

 

  등을 떠 민 손이 따사롭다.

 

  어머니.

 

  어머니는 아이의 등을 떠 밀며, 어서 가라. 아버지다, 했다.

 

  그리고 아이는 책상머리에서 교과서를 배게 삼아 젖어들었던 단잠에서 어머니. 어머니. 하면서 깨어났다. 반 아이들은 그런 아이를 보며 얄밉게 웃는다. 아이는 창피했는지 다시 엎드려 자는 체한다. 자는 체하는데 짝꿍 민수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동수 너 볼따구가 도화지구나, 했다. 수업종이 울리고 화장실로 간 아이는 거울을 보곤 민망함이 밀려왔다. 교과서에 흑심으로 그려놓은 아버지가. 아니 그림자 사람이 뻔뻔스레 아이의 뺨에서 비스듬히 서있었다.

 

  어머니의 방. 에 걸 맞는 그림들을 그려놓은 것들로 가득하다. 아이로서는, 매일 보는 방구석 어디가 다르겠는가, 라는 심정으로 용기를 내어 마주 앉은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이의 아버지. 혹은 그림자 사람의 용모는 갈강갈강하며 나볏하다. 아이의 아버지. 혹은 그림자 사람은, 어머니는 어디 갔니?, 하고 물었고 아이는, 어제 밤에 장보러 가시고 아직 안 오셨어요, 했다. 커피 없니, 남자가 물었다. 남자의 말에 아이는 자깝스럽게, 제가 타드릴게요, 하고 일어나려 무릎을 짚자 남자가, 아니다, 하고는 자신이 일어나 주방으로 향한다. 주방으로 향하는 남자의 걸음이 엉거주춤한 것을 보고 아이는 알심을 느꼈다. 절름발이. 아이의 아버지 혹은 그림자 사람인 절름발이 사내는 커피를 타고는 다시 아이 앞에 앉아 방의 벽부터 이 구석 저 구석을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아이의 어머니가 뉘시는 자리 옆에 놓인 탁상달력을 바라보고는, 알았구나. 내가 오는 날을 알았어. 미안하다. 동수야. 어머니는 오늘도 안 들어올 것이다. 미안하다, 하며 말끝을 흐렸다.

 

  아이의 어머니 탁상달력에 그 날 날짜 위로 빨간색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뭇 사람들은 달력의 빨간 날을 여유로운 자신을 기념하거나 사랑하는 이들을 숭고히 여기는 날이지만 아이의 어머니에게는 다른 의미였나 싶다.

 

  첫눈이 내려앉은 뒷동산 꼭대기에 야밤의 달이 쉬려는 듯 그 위에 걸터앉았다. 아이는 집 슬레이트 지붕 위에 올라앉아 달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디로 갔을까. 왜 갔을까. 달을 노려보며 골몰히 여겨보다 아이는 슬픔에 잠겼다. 이유를 알 수 없어서 혹은 안다한들 이해할 수 없어서. 달이 뒷동산 꼭대기를 박차 올라갈 때 즈음 아이의 아버지가 문을 열고 나와 아이를 바라보며, 늦었다. 자야지, 했다. 아이는, , 하며 들어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참척하다 잠이 들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그날 밤도 오지 않았다. 하루해가 지나고 또 그 다음 날의 해가 지나도 아 이의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아이의 아버지는 수레를 끌었다. 아버지는 저는 발을 끌며 고철들을 주웠다. 아버지는 아이보다 일찍 집을 나가 아이보다 늦게 집에 들어왔다. 아이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애처로움을 느끼며 아버지가 없는 그리고 어머니가 없는 집에서 홀로 이따금씩 아버지가 주워오는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는 쉬는 날이면 집에서 아이와 지냈다.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의 현실에서 점점 멀어져 갈수록 아이의 아버지는 무서운 속도로 아이의 현실을 잠식해 나아갔다. 아이는 어머니의 부재가 주는 물질적 불편들에 대하여 아버지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점차 물질적 불편들이 수그러들자 외로움이나 불안 같은 정신적 불편들도 덩달아 아버지에게 의존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홀연히 떠난 것에 대한 아이 마음의 깊은 은결을, 그 슬픔을 이해하며 감쌌다. 아버지는 아이에게, 아이는 아버지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부자간의 의초로움을 쌓아갔고 아이는 아버지에게 붙인 그림자 사람이라는 말을 지워나갔다.

 

  하루는 아버지가 쉬는 날. 아이가 아버지를 지켜본 적이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방 벽에 어지러이 적힌 시들을 작은 수첩에 적어 내리기를 반복했고 어머니의 작은 책장에 담긴 시집이나 산문집 따위를 쉼 없이 읽어 내렸다. 그런 아버지의 행동이 지루한 나머지 아이는 집 밖을 벗어나 동네를 휘이 돌아 다녔다.

  어느 날 아이는 아버지에게, 왜 이제 왔어요, 라며 늦은 감이 있는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아이는 아버지의 대답이 불만스러운 듯, 어머니는 어디 간 거 에요? 아버지는 알죠?, 하고 물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미안하다, 했다. 아버지, 아버지는 누구에요. 어머니는 아버지를 뒷동산 소나무처럼 억척스럽다했고, 풀잎마냥 보드랍기도 하다했고, 코스모스처럼 아름답다 했지만 결국은 위험하다 했어요. 아이의 산드러지는 말에 적지 않게 아이의 아버지의 얼굴 위로 흠흠한 표정이 빠르게 도드라졌다 사라졌다. 아버지는 조용히 일어나 어머니의 서랍으로 향했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의 어머니의 서랍에 있는 앨범을 꺼내들었다. 아이는 처음 보는 앨범이었다. 앨범 속 어머니는 아름다웠고 고왔고 지난날 세상을 덮었던 첫 눈처럼 하얗기 그지없었다. 몇 장을 더 넘기자 아버지가 나왔다. 아버지는 흑발에 장발을 하고 있었지만 개자했고 어딘지 모르게 숫접은 얼굴이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슬며시 입을 열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젊은 날에 그림쟁이 노릇이나 하며 살 요량으로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지만 선배들이 읽는 책을 유행처럼 돌려 읽다 그들의 이념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옳은 것을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 단호히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옳은 것이 좋은 것이었을 수도 있고, 자신에게 그 좋은 것이 옳은 것이라 맹신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옳든 그르든 좋든 싫든 그것들의 시작은 자유에 대한 갈망이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젊은 날은 억압의 나날이었으니. 아버지는 미술학도 임에도 어려운 사상에 대하여 노래했고 어둑한 하늘 아래 담벼락에 민주주의를 색색의 유성물감을 이용하여 적고 다녔으며 아버지가 어느덧 소속 공동체의 선배가 되었을 때에는 많은 젊음들이 아버지의 정신에 하나같이 청춘을 불살랐다고 했다. 아버지는 자유를 사랑했다. 아버지는 동지들과 만날 때면 늘 안정을 위해 자유를 포기한 자는 둘 중 어느 것도 얻지 못한다며 열을 내곤 했다고 한다. 이 말은 지금도 얼큰히 취할 때면 지껄이는 말이다. 단지 그때와 다른 점은 그 시절에 이 말을 할 때면 거쿨지게 했던 반면에 지금은 낡은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 수치스럽다는 듯 씹혀 들어가는 소리로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유를 사랑한 청년.

 

  아이의 아버지는 낡은 옛 앨범을 덮으며 말을 그쳤다. 그치는 폼이 마지못해 그치는 듯해 아이는 미심쩍어, 그래서 어머니는요, 했다. 어머니는 국어과에서 아니 학교에서 제일 예뻤지. 예쁘고 똑똑하고 적바림 하는 것이 습관이었는데 볕 받은 네 어머니 얼굴이 백합꽃처럼 희고 부드러워 보이더라고, 하며, 어머니는 드레진 구석도 있었고 땀직한 면이 더 컸지. 평소에는 조용했는데 내 앞에서는 수덕스러웠어, 아버지는 말을 마치고 잠시 무채색 표정을 짓더니, 밥 먹자, 했다.

 

  아이의 아버지가 수레를 끌고 집을 나갔다. 아이는 아버지가 없을 적 어머니의 안방에 들어가 찬찬히 방 벽에 적힌 어머니의 시들을 읽었다. 아이의 어머니의 글은 간결하며 수줍기도 하고 때로는 비장하며 찬란했다. 아이는 곧잘 어머니의 시들을 받아들였다. 아이의 어머니는 타고난 글쟁이였다. 안방의 방벽은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에게 내색치 못한 감수성이나 작은 감정 하나하나가 깊숙이 그리고 광활히 펼쳐진 어머니의 세계이며 해방구였다. 아이는 어머니의 시들을 모두 읽고는 어머니의 서랍을 열어보았다. 집에 아무도 없다지만 조심히 소리 없이 열었다.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의 아버지를 연민하며 동경했다. 아버지는 투사며 영웅이었고 적어도 아이의 어머니에게는 희망인 존재였다. 아버지는 본디 자유만을 사랑했지만 어머니를 알고 자유보다 어머니를 더 사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랑을 부정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라는 존재는 사랑 그 이상의 동경과 존경의 대상일 뿐이었으며 사랑을 포함한 그 이하의 감정은 사치라 여겼기에. 그런들 어쩌랴. 아이의 어머니와 아이의 아버지도 동물적 존재라는 것에 근본을 둔 것을. 어머니가 아버지를 동아리방 구석에 숨겨주었을 때 공교롭게 두 사람 모두 동물이라는 근본적인 본능에 충실해졌다. 그리고 그날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를 뱄다. 아이의 어머니는 보름을 네 번 맞이하는 동안 달을 두른 별들을 헤며 고민을 했고 비로소 결심을 하여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의 아버지에게 아이를 밴 사실을 고백했다. 결심까지 너무나 길었던 탓일까. 아이의 아버지는 우는 것인지 웃는 것인지 오묘한 얼굴을 하며, 미안하다,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미안하다는 말에 멱을 굳혔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아이의 아버지의 소식은 끊겼다. 소식이 끊어진지 한 달 즈음 됐을 무렵 어머니는 아버지의 얼굴을 신문에서 보았다. 기골은 장대치 않아도 기백은 강원의 설산 못지않았던 아버지의 얼굴이 언제 그랬던 적이 있었느냐는 듯 살들이 검게 늘어져 기백은커녕 초겨울 갈대마냥 맥없이 굽어있었고 당시 신문의 기사들은 마치 담합이라도 했다는 듯 일제히 아버지를 빨갱이라 삿대질했다. 어머니는 그때 의 신문을 여즉 낡은 서랍 속 구석에 고이 두고 있었다.

 

  아버지는 빨갱이요. 어머니는 빨갱이 마누라요. 아이는 빨갱이 자식이구나.

 

  아이의 어머니는 자신과 아이의 이름표에 붉은 칠을 한 남자가 사라지자 덩그러니 남겨진 자신과 가엽도록 작은 아이가 슬피 보였을 것이다. 아이의 어머니는 그로 아무도 알지 못 할 변두리 달동네의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낮은 포복으로 기는 병사처럼 사지 부서져라 올랐다. 시인이 되지 못한 채.

 

  아이의 어머니는 TV를 보지 않았다. 아이는 의아해 언제고 어머니께, 어머니 TV 재미없어요?, 했다. 이에 어머니는, TV를 보면 너의 아버지 동지들이 나와. 그러면 너의 아버지가 다시 눈앞에서 흐놀아, 했다. 아이의 아버지의 동지들은 멋진 정장을 입고 사람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하곤 박수를 받으며 살고 있거나 혹은 오르막 없는 대지의 저택에서 살며 국가 성장의 주체라는 호칭을 단 채 살고 있었다.

 

  반면 아이의 아버지는 다리를 저는 빨갱이일 뿐이었다.

 

  어머니를 앗아가고 아버지를 던져준 겨울이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듯 꽁무니를 빼며 달아나고 그 빈 곳을 봄이라는 녀석이 채워나갔다.

 

  아이는 제법 그림을 잘 그렸다. 어리친 손이 어른의 맵시를 뽐낼 나이가 되자 어머니가 방 벽에 시를 써 내렸던 것처럼 자기 방 벽에 작은 그림들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의 짓을 보고 짬짬이 모아 둔 돈을 메어 붓과 도화지를 사주었다. 아이는 아버지께 고맙다며 아버지 얼굴, 제 얼굴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얼굴들을 그려 넣었다. 그런들 무엇 하랴. 아이는 어머니가 떠나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완연해지자 조숙해지기 시작했고 봄의 트는 새싹마냥 몸 여기저기 검은 실들이 흩날린 민들레 씨앗위로 새끼 민들레 자라듯 올라오면서 그리고 아이의 어머니 서랍 속에 갇혀있었던 세계가 드러남으로 인해 아이와 아이의 아버지는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하긴 그 시기 아이라면 누군들 부모와 더 의초로워지겠는가.

 

  사춘기思春期는 어쩌면 아이에게서 내비치는 따숩고 밝은 봄기운을 앗아가는 사춘기死春期가 맞을 성 싶다.

 

  변해가는 아들을 보며 아이의 아버지는 절룩이는 다리가 더욱 아려오고 있음을 느꼈다. 아이의 아버지는 그런 속을 아이에게 내비치지 않고 꾸준히 수레를 끌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집에 돌아올 적이면 얼마나 이를 세게 물고 일을 했는지 어금니가 아렸다. 아버지의 고통은 나날이 더욱 심해갔고 아이는 아버지의 고통을 거름삼아 자라기라도 하듯 무럭무럭 커가기만 했다. 봄은 이런 아이의 아버지 속을 모르는지 대뜸 여름을 끌고 왔고 태양은 미친 사람의 노랫소리처럼 두서없이 볕을 내리비쳤다. 그즈음 아이의 아버지는 불볕아래에서 서서히 낡아가기 시작했고 부서져가기 시작했다. 아이는 그런 아버지를 모른 체 했다. 아이는 아버지를 어머니의 꿈을 앗아간 사람이라 생각했고 자신을 마주하기조차 싫은 오르막 위에 얹어 놓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미천한 빨갱이라 생각했다. 아버지는 아이의 그런 생각들을 이따금 눈이 마주칠 때마다 느꼈다. 제 아버지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담긴 아이의 눈빛은 아버지의 고통이란 풀에 물을 주는 꼴이 될 뿐이었다.

 

  아이의 아버지의 고통은 봄부터 뿌리내리기 시작해 여름에 떡잎을 틔웠고 가을이 되어서야 꽃을 피웠다.

 

  아이의 아버지는 더 이상 수레를 끌지 않았다. 아이는 그런 아버지가 한심스러워 보이기 시작했고, 이제 아버지도 마지막이겠거니. 이제 떠나겠거니, 했다. 아버지는 안방에서 어머니의 시들을 멀건 눈으로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웃었다가 울었다가. 아이는 그런 아버지가 의아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머니도 그랬으니. 몇 주가 지나니 아이의 아버지는 소주를 사 나르기 시작했다. 반나절이 멀다하고 소주를 안주 없이 죽어라 벌컥거렸으며 가만히 TV를 보다가 어머니가 아버지의 동지들이라 일컫던 이들이 나올 때면, 개새끼들. 미친 새끼들. 의리 없는 새끼들, 하며 별 안간 별 새끼들, 별에 별 새끼들을 찾아대며 욕을 했다. 아이의 아버지의 변화는 아이와의 관계 그 사이의 장벽이 더욱 높아지는 것에 대한 구름판이 되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술에 취하고 검은 잇몸을 무섭게 드러내어 이를 갈며, 자유는 니미, 했다. 그리고는 날이 파랗게 선 칼을 쥐어 어머니의 시가 휘갈겨진 방벽을 광기어린 눈으로 그어댔고 벽지를 찢어대기 시작했다. 아이는 그런 아버지에게서 낯선 공포를 느꼈다. 아버지의 증오는 날이 갈수록 과거의 동지들보다 떠나간 아이의 어머니를 향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의 아버지가 이런 사람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그 참한 여자가. 아이는 속으로, 어머니에게 달력의 빨간 원이 그려진 날이 희망이었겠지. 어머니도 여자니 여자에게 서른다섯은 늦지 않았지, 했다. 아이는 다리병신 아버지를 볼 때면 어머니가 보고파 붓도 쥐지 않은 빈 검지로 어머니 얼굴을 방바닥에 그려보곤 했다. 어머니가 떠난 지 일 년. 아이는 어머니의 이목구비가 떠오르지 않았다. 붓을 들지 않아서 인가.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아이는 어머니의 낡은 서랍을 열었을 적처럼 아무도 없지만 조심스레 도화지 위에 붓으로 어머니 얼굴을 그렸다. 푸른 바다, 그 검푸른 속을 머금은 것 같은 머릿결과 달걀 같은 턱선. 어머니의 목은 가느다란 것이 꼭 옥수수 줄기마냥 하안 옥빛이 감돌았다. 어머니의 얼굴은. 아이는 어머니의 얼굴을 생각하며 참척해졌다. 문득 생각 난 것이 어머니 코가 매부리코였다는 것. 아이는 어머니의 코를 그려 넣었다. 그때 아버지가 들어왔다. 아버지는 아이의 방으로 향했고 방바닥에 널브러진 도화지와 그 하얀 것 안에 그려진 어머니의 테를 보았다.

 

  아버지가 열고 들어온 문이 덜 닫혔는지 방으로 냉기가 스며든다. 냉기가 얼마쯤 스며들었을까. 방바닥은 차고도 차지기 시작했고 띄엄띄엄 들어오는 바람으로 아이의 아버지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에메랄드. 쪽빛 내는 소주병이 냉기가득한 방구석에서 나뒹군다. 아이는 말이 없다. 아이의 아버지가 붉어질수록 아이의 세상은 서서히 멀게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아버지의 붉은 뺨과 붉은 눈알을 피하려 아버지의 발끝을 바라보나 그 발끝마저 오한을 뿜어 제 발끝으로 시야를 떨군다. 아버지는 모질고 풍진 세월 머금은 두꺼운 손으로 매섭게 아이의 뺨을 갈긴다. 아이의 아버지는 뺨을 때리며, 빌어먹을 자식. 자식 버린 년을, 하고 한 대, 뭣 하러, 하고 한 대, 그리는 거여, 하고 한 대. 아이는 군소리 없이 걸싸게 날아오는 손을 참아낸다. 아이는, 그것들을 참아내며 빈 종이에 어머니를 그려 넣은 것이 잘못인지, 했다. 그리고는, 어머니는 어디 갔어요, 하며 거쿨지게 말하고는 눈물을 터뜨리며 어린 아이처럼 으앙 울었다. 아이의 아버지도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주저앉아 조용히 눈시울을 붉혔다.

 

  아이의 아버지는 우는 아이의 눈에서 아이의 어머니를 그리고 자신을 보았다.

 

  아이의 아버지는 자유를 사랑했지만 아이의 어머니를 안 후 자유보다 어머니를, 동지보다 어머니를 더욱 많이 아꼈다. 어머니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 아버지는 그 사실을 아버지의 어머니에게 알리려 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어머니에게 향하는 기차 안에서 흔들리는 차창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이제 아이의 아버지구나. 하지만 아버지는 아이의 어머니와 태어날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어머니의 고장의 기차역에서 형사에게 검거되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낯선 공간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 낯선 공간에서 형사는 모질게 아버지를 괴롭혔지만 아버지는 입을 앙 다문 채 침묵으로 그에게 저항했다. 형사는 아버지에게 다른 동지들에 대해 불으라며 불지 않으면 다리를 잃을 수도 있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아이의 아버지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자신이 불면 동지가, 동지인 아이의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이의 어머니가.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과 그 여인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이곳에 올 것이라는 불안감에 아이의 아버지는 침묵했다. 침묵이 그들을 위한 최선이기에. 그 덕에 아버지는 다리병신이 되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감옥에서 오래간 자신이 사랑한 이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기도했고, 아이의 어머니를 그리워했으며, 태어나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아이를 위해 기도했다. 아이의 아버지가 감옥에 있는 동안 갑작스럽게 그가 원했던 자유를 지향하는 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감동치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정부의 갑작스러운 출범을 바라보며 자신의 젊음과 투쟁이 헛수고였다는 생각을 했고 자신이 갈망했던 빛이 아무도 없는 공간을 밝히는 백열전구만큼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로인해 아이의 아버지의 자유에 대한 갈망은 미적지근히 마무리되었고 자신의 이상을 체념한 채 감옥에서 누릴 수 있는 안정들을 탐구했으며, 진정한 안정은 아이의 어머니와 아이에게 있노라, 하며 하염없이 쇠창살 넘어 하늘을 응시했다. 그는 감옥 안에서 자신을 거쳐 간 수많은 수용자들을 통해 아이의 어머니와 아이의 거취를 좇았다. 출소하는 날 헐레벌떡이랄까, 그런 품으로 아이의 어머니와 아이를 찾아갔지만.

 

  웬걸. 이미 늦었는걸.

 

  아이의 아버지의 울음은 점점 커져갔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버지가 미안하다. 아이는 아버지의 울음에 놀라 울음을 그쳤다. 아버지의 품에서 풍겨오는 술 냄새와 땀 냄새. 하지만 아이는 표정을 찡그리지 앉았다. 아이는 묵묵히 제 아버지를 안았다. 나볏하게.

 

  아이는 아버지의 울음에서 의아히도 아버지가 누구인지 오감으로 느꼈다.

 

  눈. 아버지와 맞는 두 번째 첫눈. 아이는, 아이는 어둠속에서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아버지 첫 눈 따라 떠나가지 마세요. 어머니 따라가지 마세요. 아버지. 아버지, 했다.

 

  아이와 아이의 아버지가 눈물에 잠겨 껴안은 채 잠이 든 새벽. 그 해의 첫눈은 지난 해 첫눈 저리 가라는 듯 달동네 오르막을 따라 뻗어있는 길 위로 하얀 솜이불이, 그보다 두텁고 따뜻한 순백純白이라는 이름의 솜의 솜이불이 길을 덮고 있었다. 때문인가. 두 번째 첫눈은 두 사람을 품은 아랫목마냥, 늦봄의 볕 마냥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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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명  :  이정수

 이메일 : kmgegg@naver.com

 H.P : 010-7733-9316

  • profile
    뻘건눈의토끼 2018.01.10 16:49
    감동적이네요... 추운날씨에도 소주병이 에머랄드같이 보이고 하얀이불속에 봄을 기다릴 꿈을 꾸고있겠지요... ^_^
  • profile
    korean 2018.02.28 19:11
    열심히 쓴 좋은 작품입니다.
    보다 더 열심히 정진하다보면
    틀림없이 좋은 결실을 맺으리라 믿어집니다.
    늘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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