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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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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다. 소방차로 급수해주는 마을이 뉴스에 등장할 정도이니 지난 겨울 가뭄이 굉장하긴 굉장했나보다. 이 보슬비가 가뭄으로 고생한 분들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참 다행이다. 안타까움과 고마움을 적시적소에 주어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네 삶도 자연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반짝반짝 빛나는 삶이었다가도 한순간 시들시들 풀죽은 삶이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이 3월 19일, 결혼한 지 26주년이 되는 결혼기념일이다. 난 아직도 남편을 엊그제 만난 것만 같고 아직 연인 같기만 한데 세월은 정말 빨리도 지나가는구나 싶다. 1989년, 사랑 하나만 가지고 결혼을 하고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그 당시엔 거의 대부분 신혼부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도 단칸방에서 시작을 했다. 성냥갑만한 작은방들이 옹기종기 둘러싸인 마당이 아주 넓은 집이었다. 마당을 가로질러 가면 공동 수도가 있다. 수돗가는 늘 만원이다. 예닐곱 집 사람들이 밥하고 씻고 빨래를 해야 했으니 콸콸콸 수돗물 소리는 그칠 줄 모른다. 추운 겨울 깜박하고 연탄불이라도 꺼질라치면 이집 저집 할 것 없이 매캐한 번개탄 연기로 온 마당을 채운다. 결혼 이듬해 2월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아들을 낳았다. 그 해 겨울엔 눈이 왜 그리도 많이 내리던지 수십년만의 폭설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길고 추운 겨울에 산후조리를 하고 따스한 봄을 맞이할 때쯤이었다. 주인집 할머니께서 방을 빼라고 하신다. 아기 우는 소리 시끄럽다는 이유였다. 10달에 45만원 주고 사는 사글세, 그 돈도 부족해서 남편 친구한테 빌려서 구했던 방인데 방을 빼라니~ 정말 속상했다. 3개월도 채 안된 아들을 들쳐 업고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 어렵사리 방을 구했다. 축구를 해도 좋을만큼 운동장처럼 넓은 방에다가 부엌에 수도까지 있는 그야말로 때깔나는 방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45만원하는 방보다 더 비쌀 수밖에 없었겠지. 10달에 70만원이라 부담이 컸다. 비싸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빨리 방을 빼야 하니 울며 겨자먹기로 우리는 이사를 했다. 방을 빼라는 주인집 할머니가 야속하긴 했지만 훗날 좋은 일들을 만들어 주신 일등공신이다. 당시 남편 월급이 23만원 하던 때라 생활은 궁핍했지만 마음만은 늘 행복했다. 그깟 돈 좀 없어도 괜찮았다. 우리는 젊기 때문에 어떤 고난도 헤쳐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뭔가 반찬값이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아들을 등에 업고 시장통을 기웃기웃 돌아다녀 보았다. 때마침 시장에서 옷가게를 하고 있는 친구가 좋은 제안을 해 주었다. 친구 보기에도 내 처지가 딱해보였나 보다. 친구 언니에겐 초등학교 1학년 딸과 유치원 다니는 두 딸이 있었다. 두 딸들의 학교 숙제와 공부를 좀 봐달라는 거였다. 결혼 전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경험이 있다고 친구가 말을 잘 해준 듯하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얼씨구나 좋다하고 제안을 단박에 받아 들였다. 그 때가 우리 아들 7개월 무렵이었다. 매일 아들을 등에 업고 그 언니네 집으로 가서 하루 두세 시간씩 딸아이들을 보살펴줬다. 숙제뿐 아니라 아이들 점심도 챙겨주었다. 심지어 가끔씩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1학년 딸에게는 엄마처럼 이모처럼 보살펴주기도 했다. 일종의 보모 역할이었다. 그 집은 계단이 가파른 2층이어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다. 지금도 우리 가족이 가끔 모여 소주를 한 잔 하는 날이면 자주 등장하는 이야깃거리 중 하나이다. 아이들과 수업에 집중하노라면 어디선가 동네 떠나갈 듯 우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두리번두리번 소리를 따라 가보면 그 녀석은 계단 아래서 통곡을 해 댄다. 눈물콧물이 범벅되어 엉엉 울어댄다. 눈물 한가득 담긴 새까만 눈에는 엄마에 대한 원망이 담겨있는 듯했다. 어디 그 뿐이랴. 그 때만 해도 지금처럼 에어컨이 보편화되지 않을 때다. 집집마다 원통 모양의 시퍼런 물통을 준비해 낮에 물을 길어놓는다. 저녁이면 미지근해져서 잠자리 들기 전 샤워하기에 적당한 온도가 되어 다들 그렇게 했다. 더워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녀석은 제 키보다 더 깊게 물이 담긴 시퍼런 양동이에 거꾸로 매달려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어떻게 물통 속에 거꾸로 들어갔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조금만 늦었어도 익사할 뻔한 아찔한 순간들이었다. 아들을 잘 돌보지 못해 미안하기도 하고 마음도 아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당시 아이들 돌보미 월급이 7만원이라는 거금이었으니 다 참아냈어야만 했고 견뎌내야만 했다.

  그게 내가 결혼 후 시작한 나의 일이었다. 과외선생님으로 입소문이 좋게 나면서 아이들이 하나씩 둘씩 늘어났다. 급기야 시간을 나눠서 오후 1시부터 저녁 7시까지 세 타임을 하는 해피한 일이 생기기 생각했다. 아이들이 많아질수록 책임감과 사명감이 들었다. 아이들 수업에 필요한 독서지도사, 논술지도사를 비롯하여 동화구연, 시낭송 등 자격증을 취득했다. 색동어머니회에 가입하여 어린이들을 위한 연극도 했다. 이런 노력의 결실로 아이들은 점점 더 많이 늘어났다. 드디어 70만원 사글세에서 3천만원 전세로 옮겨가는 꿈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그 무렵 나에겐 작은 꿈이 하나 있었다. 제대로 갖춰진 아이들 공부방을 꾸미는 일이었는데 그게 이루어진 것이다. ‘간절히 소망하면 언젠가는 다 이루어진다.’ 시크릿의 한 대목이 현실로 내게 다가온 것이다. 공부방으로 옮겨간 때가 우리 아들 유치원 졸업할 무렵이니 결혼 6년 만에 전셋집을 장만한 내 인생 최초의 목표달성인 셈이다. 이사한 첫날밤 너무도 설레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들에겐 아기자기한 방을 꾸며주고, 난 안방마님으로 등극을 하게 되었다. 거실은 첫 신혼방보다도 훨씬 더 컸다. 거실 한 쪽 벽면은 온통 책으로 꾸미고 중간에 커다란 탁자를 하나 놓으니 아주 근사했다. 아이들은 나보다 더 좋아라했다. 아이들과 공부방 오픈 기념으로 순대국밥 파티를 했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아이들이 벌써 출가하여 딸아들 낳은 엄마, 아빠가 되고, 장난꾸러기였던 아들이 벌써 26살이니 세월이 참 많이도 흘렀다. 그 때의 설레임과 흥분은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다시금 꺼내어보는 생활의 활력소이자 충전소다. 그렇게 공부방을 재정비해서 옮기니 소문은 더 좋게 났고, 아이들은 대기를 해야 할 정도였다. 그 때부터 밤 10시까지 수업이 이어졌다. 정말 커피 한 잔 마실 시간, 저녁 한 술 뜰 시간도 없이 바빴다. 그 즈음 IMF로 온 나라가 술렁이기 시작했고, 여기저기 도산하는 업체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났다. 나라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국민들은 스스럼없이 ‘금모으기 운동’에 적극 동참했다. 난 가진 금이 없어 동참하진 못했지만 온 국민들의 애국심을 한번 실감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IMF가 터진 게 1997년 11월인데 운 좋게도 난 그 매서운 칼바람을 느낄 시간조차 없이 바쁘기만 했다. 배우는 것도 많아졌고 가르치는 일도 많아졌다. 시간이 부족해서 항상 뛰어다녀야만 했던 그 시절이 지금 생각해보면 참 행복하고도 고마운 일이다.

  하는 일마다 다 잘 되었다. 그러다보니 집과 일터가 분리된 작은 사무실을 가지고 싶은 더 큰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간절한 희망은 현실로 다가왔다. 좁은 평수지만 내 집 마련과 동시에 자그마한 학원을 열 수 있게 되었다. IMF가 일어난 지 딱 1년이 되던 1998년 11월, 난 꿈에도 그리던 나의 학원을 갖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일이지만 부모님 도움 없이 자수성가하였노라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시댁, 친정 식구들 모시고 고사도 지내고 떡도 돌렸다. 대구에서 같이 공부하던 선생님들은 학원 홍보를 도맡아해 주셨다. 바삐 사느라 그랬는지, 아쉬운 게 없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어느 날부터 연락이 닿지 않는다. 좋은 사람을 잃은 것은 내 불찰이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돈이든 있을 때 잘 지켜야함을 막대한 수업료를 지불하고 난 지금에서야 절실히 깨닫는다.

  모든 게 순조롭게 잘 이루어졌다. 정식으로 학원을 오픈하니 학생 수가 더 많아졌다. 먹여 살릴 식구도 생겼다. 우리 식구는 나를 포함해 선생님 세 분과 기사님 한 분이었다. 승승장구로 기세등등해진 난 겁 없이 또 다른 꿈을 꾸었다. 만약 그때 굴곡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과욕이 부른 참사를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학생 수가 많아지는 만큼 내 배짱도 정비례해서 두둑해졌다. 당시 오빠들 세 명이 큰 도시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큼 대형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도 오빠들처럼 큰 학원을 운영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겁도 없이 무턱대고 저질러버렸다. 그게 내 인생 최대의 실수가 될 줄이야 그 때의 나는 알 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잘 되어왔으니 이번에도 신은 내 편이 되어줄 거라 착각의 늪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살던 집이랑 운영하던 학원을 정리하고 원대한 꿈을 안고 오빠들 옆으로, 큰 도시로 진출한다. 처음엔 그다지 나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도시에서의 생활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당시 대형학원들이 잇달아 폐업을 하던 시기였다. 나는 그 분야에서 막차를 타고 만 것이다.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되돌릴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 학원도 그 풍파를 비켜가진 못했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괴고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시간들이 자꾸만 더 길어져갔다. 한 달 월세만도 500만원에 강사 급여에다가 기사 급여까지 한 달 3천만원씩 고정 지출인데 몇 달만 적자에 허덕여도 아파트 한 채가 날아갈 판이었다. 결국 대구 진출 8년만인 2012년 2월,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결정하게 된다. 김난도 교수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 중 ‘추락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말라’, ‘바닥은 생각보다 깊지 않다’는 문구는 마음을 정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아파트를 팔고 학원을 정리해도 여기저기 당겨서 쓴 대출금들을 어찌 해결할 도리가 없었다. 다행히 오빠와 시동생의 도움으로 급한 불은 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특히 둘째 오빠와 막내 시동생, 막내 동서에겐 너무 고맙고도 미안하다.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게 힘을 준 것도 다 그들 덕분이다.

  그로부터 3년하고도 1개월이 지난 2015년 3월이 지나가고 있다. 첫 신혼방 10달 사글세가 45만원이었는데 지금은 한 달 45만원 월세에 살고 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난 26년 전 그 단칸방에서도, 현재의 월세에서도 행복하다. 과거 없이 현재를 살아갈 수 없고, 현재 없는 미래 역시 없다. 난 항상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살아왔다. 설령 어제가, 아주 먼 과거가 현재보다 좋았다 한들 되돌아갈 수 없는 일이다. 과거는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였다가 가끔씩 꺼내보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데 원동력이 될 것이다. 그렇게 23년간 웃고 울었던 학원을 정리하고 처음처럼 맨주먹으로 다시 섰다. 콜센타를 거쳐 지금은 다들 힘들다는 미래에셋 생명 보험회사에 다니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매월 대출금과 개인회생 변제금 갚느라 한 달 번 돈이 오히려 모자랄 때도 있다. 그러나 과거 남들 어려울 때 난 잘 살아봤으니 지금 좀 힘들어도 나쁘지 않다. 이제 3년만 더 고생하면 큰 덩어리의 빚은 다 갚는다. 그 후엔 자잘하게 남은 빚만 청산하면서 적게나마 적금도 들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앞으로 10년 후엔 내 나이 만 60세가 된다. 보험은 정년이 없다. 지금처럼 보험을 돈의 도구로만 생각하지 않고 봉사하는 마음가짐으로 한다면 큰 돈은 아니지만 가늘고 길게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하는 일이 어떤 일이 되든 남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작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다. 젊은 2~30대 시절 내가 바라는 대로 다 이루어지는 쾌거도 누려봤고, 40대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는 고통도 당해봤다. 그러나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절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있었기에 고통이라 생각지 않는다. 남편은 나락으로 떨어진 후부터 무너진 가정 경제를 살리기 위해 365일 근무하는 직장을 얻었다. 주말은 아예 쉴 수조차 없고 어쩌다가 겨우 한번 쉬는 남편은 여행을 좋아한다. 옛날에는 주말만 되면 어디든 떠나곤 했는데 같이 여행 떠나지 못한지도 3년이 넘었다. 지금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을 사는 게 10년 후의 행복한 삶도 예약하는 것이다. 아마도 10년 후엔 남은 빚도 다 청산하고 공기좋은 외곽지에 작은 집이라도 하나 장만해 텃밭을 일구며 살고 있지 않을까?  

 사실 학원 폐업 후 꿈이나 계획을 세워본 적이 없다. 무언가를 계획하고 꿈을 꾸어보기가 겁이 난다. 이것이 그 일의 후유증으로 남아 있다. 꿈이 망상이 될까 두려웠던 거겠지. 그래서 되도록 아주 작은 거에도 감사하며 만족만 할 뿐 꿈을 꾸지 않았다. 이젠 다시 꿈을 꾸더라도 결코 망상이 아니기를 바란다. 좋을 때나 힘들 때 언제나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 사랑하는 남편과 조금이라도 여유가 주어진다면 손을 꼭 붙들고 여기저기 여행을 다닐 것이다. 그 옛날처럼 정동진 해변에서 늦은 밤 한 잔의 쓴 소주에 조개구이를 먹으며 웃게 될 그 날을 기다리며 나는, 우리 부부는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 할 것이다. 깊고 푸른 밤바다의 파도소리를 벗삼아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날아다닌다.

 

 

황윤옥

010 8595 2175

tmtjd71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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