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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마침표

 

 그분을 처음 본 건 가을의 정취가 요양원을 물들이고 있던 10월의 어느 날 이었다. 그 때만 해도 B동 건물은 아직 외벽과 옥상에 벽돌작업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어르신 한 분 한분이 새로운 가족으로 요양원 A동에 입성하고 있어서 하루가 다르게 생기가 피어오르는 요양원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무렵이었다.


  그 날도 사무실에서 한창 바쁜 업무에 몰두하고 있던 나는 복도에서 조금 소란해 지는 것이 느껴졌다. 파란만장했던 86년간의 생을 보낸 그분이 자의에 의해서인지 타의에 의해서인지 몰라도 하여간 어떤 힘에 떠밀려 2년 후에 본인의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고향집에 도착하신 것이었다. 사무실에서 그분을 처음 보았을 때 그 분은 범상치 않은 인생경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요양원에 오게 된 경로부터가 독특했다.  연세가 지긋한 조카분의 손에 이끌려오게 된 그 분은 처자식이 없는 혈혈단신이었는데 젊은 시절 일본에 사시면서 제법 큰돈을 벌어서 한국으로 귀국하시게 되었는데 그 돈을 불과 얼마 만에 다 탕진하시고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되었던 것이었다. 조카분의 설명에 따르면 일본에서 사귀게 되었는지 하여간 어떤 친한 할머니 한분이 그 분의 곁에 계셨는데 그 할머니 때문에 결국 돈을 다 탕진하고 지금은 기초생활수급비가 입금되면 그돈 마저도 그 할머니가 가져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다 못한 동네사람들이 하여간 이대로 두었다간 어르신이 밥도 못 잡수시고 돌아가실 것 같아서 어르신을 좀 안전한 곳으로 보내달라고 지자체 행정기관에 부탁을 했다는 것이었다. 어렵게 조카 분을 수소문해서 결국 조카분이 지자체 담당자와 함께 절차를 밟아 결국 요양원에 입소하시게 된 것이었다. 요양원에 입소할 무렵 어르신은 3등급 시설  급여 치매 판정을 받았다. 담당 사회복지사와 입소 상담과 계약을 마치고 생활관으로 올라가시려고 할 무렵 어르신 손에 무엇인가 들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보자기 같은 것에 둘둘 말려 있는 지갑이었다. 만 원권 백장정도가 그 속에 들어 있다고 조카분이 말했다. 아무리 설득해도 손에서 그 지갑을 놓지 않고 주무실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식사를 드실 때도 항상 그 지갑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고 하셨다. 설령 강제로 빼앗으려 했다가는 공격성 치매인 그분의 원 펀치에 안면을 가격당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일러주셨다. 이미 86세인 고령이셨지만 그 힘은 소위 젊은 청년 못지않다고 거듭 강조하셨다. 그리고 어떤 젊은 할머니가 이 분을 찾거든 절대로 만나지 못하도록 신신당부 하셨다.

  박○○ 어르신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A3층 생활관에 올라가서 당신의 거처를 잡으신 그 분은 그 때부터 거침없이 하이킥 이셨다. 일단 목소리부터 우렁차셨다. 특히 일주일에 한 두 번씩 A1층 사무실 맞은편 목욕실로 모시고 내려 올때는 요양원이 떠나 갈 듯 호통을 치셨다. 치매로 인한 사회적 작용 감소로 공격적인 성향이 높은 터라 당신을 주변 사람들에 의한 피해 당사자로 생각하여 적대감과 폭력성이 매우 심한 편이어서 무엇보다 어르신과의 신뢰관계 형성과 친밀도 유지가 필요했으나 그것이 그리 말처럼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특히 목욕 하시기를 무엇보다 싫어하셨으니 어르신을 설득시켜 목욕한번 시켜 드리기가 이만 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날 생활관에 곤욕을 치르던 간호사님과 요양보호사 선생님들로부터 도와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일명 어르신 수송 및 목욕 작전 이었다. 최근 어르신의 공격 성향이 너무 강해져서 상당기간 목욕을 못한 터라 오늘 만큼은 반드시 목욕을 시켜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전화 수화기를 끊고 나는 즉시 공익요원과 함께 3층에 투입되었다. 엘리베이터를 내려 302호실로 가는 순간 어르신의 독특한 향기(?)가 코에 와 닿았고 심상치 않은 어르신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어르신은 방 한구석에 움크리고 있으면서 타의 접근을 금지시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간호사님의 조언을 받고 일단 식사로 어르신을 회유하고 유인하기 시작했다. 쉽진 않았지만 어쨌든 밥 작전은 성공이었다. 방문 입구까지 어르신을 조심스럽게 모시고 나왔고 급기야 공익요원과 함께 어르신의 팔을 양쪽에서 감쌌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신 어르신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이미 어르신은 1층 목욕실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 때부터는 기다리고 계시던 요양보호사님들이 숙달된 실력으로 어르신을 목욕시키기 시작했다. 공익요원과 나는 어르신이 다치시지 않도록 양쪽에서 어르신을 지탱시켰다.


  어르신은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호통을 치셨다. “놔라! 이것들아! 놔라! 세상에 이런 법은 없다!!! 놔라! 이것들아!!!” 머리와 얼굴, , 다리에 따뜻한 물이 흘렀고 향긋한 샴푸 냄새가 이내 어르신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그 순간 내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어르신의 오른쪽 손에 지갑이 들려 있었던 것이다. 지갑에 물이 튀어 만원짜리가 조금씩 물에 젖고 있었다. 오른쪽 손을 씻기 위해 오른 팔에 비누를 칠하니 어르신은 자연스럽게 지갑을 왼쪽 손으로 옮겨 잡았다. 그런데 그 손에 힘줄을 보니 어르신은 가히 가공할 만한 압력으로 그 지갑을 붙들고 계셨던 것이다. 금새 목욕은 끝났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요양원이 떠나갈 정도로 호통을 치시던 어르신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그려지면서 아이고~시원하다!! 아이고 좋다!!” 는 말씀을 연발하시며 편안하신 듯 머리를 만지작거리셨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는 만 원권 100장을 복사하여 어르신 지갑에 있는 실제 돈과 바꿔치기 하는데 성공하였고 그 돈을 통장에 잘 보관해 두었다.

2년 가까이 계시는 동안 어르신은 조금씩 마음 문을 여셨고 가끔씩 예쁜 선생님들에게는 특히 식사를 제공하는 영양사 선생님에게는 용돈이라 하시면서 그렇게 목숨같이 붙들고 계시던 돈을 뿌리시기 시작했다. 86년 동안 험한 세상살이에 지치고 사람에 속아서 결국 상처뿐인 당신을 지켜줄 수 있는 생의 마지막이자 유일한 수단이 그 지갑 안에 있는 돈이라고 믿게 만들었던 우상 같은 신념이 떠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신이 여기가 고향같이 참 편안하다고 생각하신 터일 것이다. 그 돈이 없어도 요양원이 나를 지켜준다는 믿음이 들어온 것이리라!!!


  2년 동안 잘 계시던 어르신은 평소에 식사도 잘 하시고 건강을 유지하셨는데 201093일 갑자기 상태가 악화되어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약 한달 정도 병원 신세를 지다가 급기야 201010888세의 일기로 운명하시게 되었다. 어르신이 임종하시고 조카분이 장례절차를 상의하시기 위해 요양원에 오시게 되었다. 조카분의 결정에 따라 장례비용 일부를 제하고 입소당시 가지고 오셨던 현금과 2년 가까이 모아둔 기초노령연금 등 상당한 금액을 요양원에 후원하셨다.

  혈혈단신이었던 어르신의 장례는 매우 조촐하게 치러졌고 유골은 화장되어 어르신은 완전히 세상과 작별을 고하셨다. 그러나 파란만장했던 생의 마지막 2년간 어르신은 외롭지 않았다. 조물주는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생을 정리할 수 있도록...거친 숨을 고를 수 있도록...조국을 위해 젊은 날 온몸으로 항전하신 그 곤고한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도록...그리고 마지막 남은 전 재산을 당신에게 상처를 남겼다고 생각하는 이 세상을 위해 오히려 기부하도록 하심으로 생의 마침표를 사랑으로 찍게 만드셨다.

  시대의 광풍과 인생 세파에 온 몸과 마음이 찢겨지고 무참하게 짓밝히신 어르신. 결국 소외되고 상처받고 질병으로 고통당하신 어르신. 하지만 그의 마지막 가는 길만은 그리 쓸쓸하지도 우울하지도 비참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름답게 단장된 동산 길을 걷듯이 가볍고 활기찼고 반전이었고 역전이었다. 어르신의 마지막 삶의 뒤안길에서 위로와 평강과 소망을 나는 보았기 때문이다.


 

 

외톨이

 

 

  나는 어느덧 마흔 넷의 중년 남자가 되어 버렸다. 어느새, 갑자기 늙어버린 느낌이다. 요즘엔 강의를 가서 수강생들한테 강사 나이가 얼마로 보이느냐고 하면 대부분 40대 중후반으로 보인다고 한다. 때로는 50대로 보기도 한다. 5년 전까지만 해도 내 얼굴이 제법 동안이라 항상 원래 나이보다 10살 정도 아래로 보았었는데 이제는 내 나이를 알아본다. 흰머리가 많이 생겨서 일까? 오히려 더 많이 높여서 부른다. 몇 년 동안 술과 담배를 매일 달고 살았다. 왜 그랬을까? 알 것도 같은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저 아내와 두 딸의 삶을 더 이상 행복하게 해 줄 능력이 바닥난 것을 보여주기가 두려웠는지도 모르겠다.


  아내와는 17년 전에 결혼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쁜 두 딸을 선물로 받았다. 16년째까지는 어떻게든 버틴 것 같고 평범한 가정이 누리는 행복과 불행을 맛보았다. 그러나 작년 3월 아내는 두 딸을 데리고 내 곁을 떠났다. 아내는 이혼소송을 걸어왔고 나는 변호사를 고용해 선방했다. 지겹고 답답한 오랜 법정 공방이 있었다. 결국 조정명령이 나왔고 아내와 1년 별거하기로 합의했다. 그 일이 있고 나는 힘겹도록 사수한 직장을 그만 두었다. 더 이상 살 의욕도 없을 만큼 우울증이 심하게 왔다. 약을 한 주먹 가득 먹어야 겨우 잠을 들 수 있었다.

 결국 어머니 댁에 찾아 갔다. 혼자서 겨울을 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정신이 미쳐 버릴 것 같아 알바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야간 택배 일을 했다. 영하 17도 까지 내려가는 현장에서 12시간이상 미친 듯이 밤일을 했다. 일당을 받으면 모아 두었다가 아내에게 양육비를 송금해 주었다. 지난겨울을 그렇게 보냈다. 그리고 올해 초 시내버스가 내 차 운전석을 박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나는 응급실에 실려 갔고 어렵게 산 차는 폐차장으로 직행했다. 한 번 더 정신적인 공황이 찾아왔다. 3개월 동안 매일 물리치료를 받았다. 진통제를 매일 2대씩 맞았다. 그런데 어느 정도 회복이 되어 갈 무렵 6월초에 또 다시 교통사고가 찾아왔다. 사고를 수습하고 난 후 며칠 동안 시체처럼 누워만 있었다.


  아직도 온 몸에 통증이 나를 괴롭게 한다. 매일 물리치료를 받고 진통제를 맞고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복용했다. 하루에 담배를 2~3갑씩 피워댔다. 그러다 결국 건강에 적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결국 작년에 끊은 술에 이어 담배마저 끊었다. 교통사고 후유증과 금단현상이 내 온 몸을 휘감고 있어서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치고 피곤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밤마다 꿈을 심하게 꾼다. 아내와 두 딸이 자주 등장한다. 어젯밤에는 아내가 두 딸을 데리고 집에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아내를 몹시 괴롭혀서 함께 잠자리도 같이 하지 못했다. 그러다 잠을 깼다.

오전에 어머니와 돈 문제를 상의하다 결국 서로 마음이 상해 버렸다. 심란하다. 작년 3월 아내가 집을 나가기 전 결국 어머니와 아내가 대판 싸웠고 나는 중간에서 이편도 저편도 들지 못하고 중재도 못했다. 참 무능하다. 아들로서도 무능하고 남편으로서도 무능하고 아버지로서도 무능하다. 어머니에게 아내에게도 두 딸에게도 말 못할 나만의 고민과 고뇌와 고통과 고독이 내 어깨를 짓누른다. 아마 이 시대를 살아가는 40대 가장의 공통분모가 아닐까 싶다. 예전에 행복했던 것들이 이렇게 불편하고 아프게 될 줄 이야. 도대체 무엇이 오늘 이런 관계를 만들었을까? 그저 서글프다. 어머니도 나에게 최선을 다했고 아내도 나름 최선을 다했고 나도 죽을힘을 다해 살아왔는데...잠들기 전마다 오래전 찍은 두 딸의 동영상과 사진을 보면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는다. 소리 죽여 울고 또 운다. 어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두 딸이 무슨 죄가 있어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지.


  아직도 내 마음속에는 까까머리 중학생 한명이 있다. 공부도 꽤 잘하고 호기심 많고 친구들과 어울려 장난도 치고 운동을 좋아하는 15살의 중학생이 있다. 음악교생 선생님을 짝사랑하고 문학을 좋아하던 밝고 활달한 아이가 있다. 도전의식과 용기로 세상에 겁날 것이 없는 자신감 넘치는 아이가 있다. 그게 바로 나였을까?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을까? 엊그제만 같은데. 아직도 생생한데. 현실에 적응이 잘 안 된다. 나는 40대 중반의 남자인데. 어른인데. 그 나이에 맞게 일도 하고 돈도 잘 벌고 사회적 지위도 그 나이에 맞게 누리며 어머니에게 매달 용돈도 듬뿍 드리고 아내와 두 딸에게도 돈 걱정 없이 풍족한 생활을 만들어 주고 싶은데. 내 마음 하나, 내 몸 하나, 내 일상 하나 건사하기도 벅차니 나란 사람은 도대체 어찌된 사람인가!

  그나마 할 줄 아는 게 강의를 하고 글을 쓰는 일이다. 강의가 없는 날이 많다. 지난달에는 강의가 하루도 없었다. 휴가철이라 그렇겠지. 지난 주 부터는 그래도 강의의뢰가 제법 들어와 마음이 한 결 놓인다. 아내에게 얼마라도 양육비를 더 부쳐 줄 수 있을 것 같다. 1010일이면 5년 동안 진행되었던 개인회생 60회 차를 모두 갚고 면책신청에 들어간다. 모든 빚을 다 청산하는 날이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만큼은 아직도 갚아야 할 빚이 있다. 언제쯤에야 어머니의 짊을 덜어드릴 수 있을까?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진다. 나이 마흔을 넘겨도 아직도 어머니에게 손을 벌려야 하니. 참 괴롭고 한심하고 내 자신이 너무 너무 싫다. 이제는 중학교를 졸업해야 할 텐데. 그것이 쉽지가 않다. 나는 어른 아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나의 존재의 근원이다. 나는 어머니 뱃속에서 열 달을 있었고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 나와 44년을 살 수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생명의 빚을 졌다. 어머니의 마음을 더 이상 슬프게 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천하의 불효자식이지만 형편이 좀 풀리면 어머니 생전에 오래 오래 효도라는 것을 한 번 해 봤으면 좋겠다. 17년 동안 가정을 꾸리며 어려운 위기 때 마다 도와주신 어머니에게 제발 하고 싶다.

나와 살면서 알게 모르게 상처 받았을 아내에게는 무엇보다 선물을 많이 주고 싶다. 아내가 그토록 노래 불렀던 임대아파트라도. 작은 소형차라도 새 걸로 사주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돈 걱정하지 않고 조금은 넉넉하게 생활비를 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두 딸에게는 아빠 엄마의 행복한 일상을 잘 정돈된 사랑의 침실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안심시켜 주고 싶다. 너희들 뒤엔 항상 엄마와 아빠가 있다는 걸. 예능에 소질이 있는 큰 딸에게는 미술과 음악을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싶다. 빼앗겼던 피아노도 바이올린도 다시 되찾아 주고 싶다. 고기를 좋아하니 고급레스토랑에 둘이 가서 안심스테이크를 사주고 싶다. 예전처럼 다시 회전초밥도 먹고 막창도 먹고. 어느새 아홉 살이 된 어린 둘째딸에게는 무엇보다 아빠 엄마의 사랑을 듬뿍 듬뿍 주고 싶다. 놀이동산에도 같이 가고 영화도 같이 보고 동물원에도 다시 가서 사진도 찍고 맛있는 것도 사먹고.


 지난날의 모든 상처가 가을 밤하늘의 별처럼 빛날 수만 있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가정의 아픔들을 위로해 주고 싶다. 안식을 함께 누리고 싶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서로의 머리를 맞대고 생각하다 보면 분명히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어머니, 아내, 딸을 생각하며 오늘의 통증을 반성의 약으로 삼고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내 나이를 찾아가야 한다. 밀물과 썰물이 오고 가듯이 이런 우울과 슬픔과 고통의 시절도 머지않아 지나갈 것이다. 절대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제 거의 다 왔다. 나는 버틸 수 있고 다시 일어날 것이다.

오전에 잠시 소원했던 어머니께서 방문을 여시고 점심은 중국집에서 시켜 먹자고 하신다. 그냥 우동을 먹고 싶다고 했는데 어머니는 비싼 해물우동 2개를 시키셨다. 어머니와 아내와 딸과의 공존. 그 중심에 무엇이 있을까를 글을 마무리하며 깊이 생각해 본다. 나에게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지켜야 할 나의 무엇. 무엇보다 소중한. 그 무엇은 내 삶의 원동력이자 의미. 소유 그 이상의 무엇. 웃음과 행복너머의 나라. 서로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사랑과 용서가 공존하는 세상. 그것이 아닐까?


 모든 원망과 불평, 탐욕과 이기심을 이길 수 있는. 우리의 가치가 외모, 인기, , 명예, 권력만으로 평가되지 않고 단지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존중받을 수 있는. 모든 이에게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세상. 힘이 있다고 가진 게 많다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의 소중한 것을 무참히 빼앗아 가지 않는. 그래서 이 땅의 모든 남녀노소가 함께 공존하며 행복을 나누어 가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도 나는 열다섯 까까머리 중학생이 된 채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어머니, 아직은 나의 아내, 그리고 두 딸을 향해 고개 숙여 조용히 입을 열어 말한다미안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성 명 : 정동엽

주 소 : 대구 수성구 황금동 747-4 오르빌 205

연락처 : 010-4508-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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