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방울
비가 온다. 빗방울에는 단순히 물이라던가 수소라던가, 그런 인자 외에 밝혀지지 않은 성분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렇게 우울해지고 감성적이지 않을 테니까. 비오는 날엔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싶다. 그냥 잔잔한 음악을 들어도 좋다. 우울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빗소리가 내 기분을 중화시켜주는 안정제 같다.
나이가 들어간다. 시간이 흐른다.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간다. 그 누구도 나 자신을 위로해주지 못한다. 친한 친구도 함께 살고 있는 가족도 내 외로움을 채워주지 못한다. 외롭다. 정말로 외롭다. 외로운데 나만의 시간과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외로운데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기분이 든다. 두렵다. 혼자 있을 시간과 공간이 필요한데 누군가 옆에 있지 않으면 무섭다. 혼자 남겨질까봐 두렵다. 무섭다. 누군가가 나를 해칠까봐. 누군가가 내 곁을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은 불안감이 때때로 엄습한다. 불안정하다. 지금도 충분히 안정적이란 걸 알면서도 마음은 불안하다. 모든 욕구가 충족되고 자아실현의 욕구가 문을 두드리는데, 내 마음은 아직도 원시적인 욕구도 채워지지 않았다고 두려워한다. 나약하다. 가끔은 내 작고 얇은 입술이 나를 이리도 소심하게 만드는 걸까 의심하게 된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는 정말 여장부 같았다. 입술도 두툼하고 입이 굉장히 컸으니까. 그 아이의 대범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 한없이 소심하고 나약한 나의 모습은 늘 오버랩 된다. 누구와도 자신 있게 대화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그 아이가 부럽다.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내 머릿속을 돌아다닌다. 내 조그만 입술은 여전히 남 앞에서 오물쪼물 거리다 열리지 못한다. 당장 앞으로 튀어나가서 무엇이든 해낼 거 같은데 몸과 입은 쇠사슬로 꽁꽁 묶어 놓은 듯 움직이지 않는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나도 쇠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난.. 시간이 가는 게 싫다. 이러다 허리는 굽어버리고 주름은 자글자글한 노인이 되어버릴 것만 같다. 그래서 자꾸만 시계바늘을 돌려버리고 싶다. 한참을 뒤로. 시간이 갈수록 세월의 무게는 커지는데, 그 무게는 나를 버겁게 하고 부담만 줄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다. 몸은 축 처진다. 나약하고 게으르다. 내 자존감은 원래 낮았던 걸까? 과거를 돌이켜 봤자 우울증만 생긴다는 건 경험상으로 알고 있는데도, 자꾸만 과거를 되짚는다.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내 재능은 뭘까? 아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게 있긴 한걸까. 예전의 생기 있고 젊었던 얼굴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똑같은 친구와의 만남. 재미가 없다. 지겹다. 친한 친구에게 지겨움을 느끼다니. 그 친구도 나를 지겨워하진 않을까. 내가 남을 안 좋게 생각하는 것보다 남이 나를 안 좋게 생각하는 건 상상만으로도 싫다. 특히나 내편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더. 무언가가 나를 채워주길.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목표가 생기면 내 에너지는 채워질 수 있을까? 나는 비로소 외로움과 나약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비가 그친다. 왠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아쉽다. 늘 메마른 감정으로 살다가 어쩔땐 우울한 감정에 빠지는게 재밌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