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콘테스트

오늘:
9
어제:
48
전체:
305,874

접속자현황

  • 1위. 후리지어
    65662점
  • 2위. 뻘건눈의토끼
    23333점
  • 3위. 靑雲
    18945점
  • 4위. 백암현상엽
    17074점
  • 5위. 농촌시인
    12042점
  • 6위. 결바람78
    11485점
  • 7위. 마사루
    11385점
  • 8위. 엑셀
    10614점
  • 9위. 키다리
    9494점
  • 10위. 오드리
    8414점
  • 11위. 송옥
    7661점
  • 12위. 은유시인
    7601점
  • 13위. 산들
    7490점
  • 14위. 예각
    3459점
  • 15위. 김류하
    3149점
  • 16위. 돌고래
    2741점
  • 17위. 이쁜이
    2237점
  • 18위. 풋사과
    1908점
  • 19위. 유성
    1740점
  • 20위. 상록수
    1289점
조회 수 18 추천 수 1 댓글 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손톱에 물들이다.


어느 날 집 근처 담장에 쑥 올라온 봉숭아 꽃대를 보곤, 올 해엔 봉숭아물을 들여 보자, 생각했다.  고급스럽고 세련된 네일아트가 넘쳐나는데, 심지어 생활용품 전문점에는 봉숭아 물들이기라는 간단한 키트도 판매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그건 내키지 않았다.  불편하고 번거롭게 왜 하는 생각 한 편으로 어린 시절 매년 여름이면 으레 해왔던 이벤트가, 언제부턴가 시시하고 유치해서 그만뒀던 그 일이 불쑥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손톱에 물들이는 느리고 귀찮은 과정이 어쩐지 애틋한 내 유년시절을 소환해 감상에 빠질 것 같은 상상만으로 설렜다. 

늘 그렇듯 현실은 기대를 벗어나는 법이어서 실제 봉숭아물을 들이는 과정은 머릿속으로 그려왔던 아련하고 감상적인 풍경은 아니었다. 생각보다 훨씬 귀찮고 번거롭고 지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 느리고 긴 과정은 어린 시절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많은 감정이 들게 했다.

가장 먼저 봉숭아를 따는 일. 어렴풋이 어린 시절 봉숭아가 심어져 있는 남의 집 담벼락에 엄마와 동생과 내가 나란히 붙어 꽃잎을 따던 기억이 난다. 수북이 꽃잎을 담아 오는 길, 손톱을 빨갛게 물들일 생각에 발걸음이 무척 가벼웠던 것 같다.

이십 년이 훌쩍 넘어 꽃잎을 따며 들었던 생각은 개미가 엄청나게 많았다는 것, 봉숭아 꽃잎 색깔이 생각보다 훨씬 다양하다는 것. 그리고 봉숭아 잎을 꺾을 때 나던 그 특유의 향.

인간의 다섯 가지 감각 중 가장 깊게 각인되는 건 후각이다. 평소 잘 모르고 살다가 불현듯 익숙한 냄새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 봉숭아 잎을 손에 담고 그 향을 맡는 순간, 잃어버렸던 냄새와 함께 어린 시절이 훅 들어왔다. 싱그러운 풀냄새 같으면서도 특유의 꽃냄새가 아- 분명 내가 알고 있는 냄새인데 진짜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가운 느낌.

집으로 돌아와서 꽃과 이파리를 펼쳐놓고 말렸다. 하루 이틀 뒤에 드디어 봉숭아 물 들이기. 봉숭아물을 들이려면 백반이 필요하다. 이것도 요새는 좀처럼 들어보기 힘든 정겨운 단어다. 백반을 넣고 봉숭아꽃과 잎을 빻아야 물이 선명하게 잘 든다고 한다. 이른 저녁을 먹고, 봉숭아꽃과 잎을 절구에 넣고 빻는다. 절구 가장자리로 금세 선명한 분홍색이 퍼진다. 신선하고 향긋한 냄새가 좋다. 문득 생각한다. 왜 하필 봉숭아 잎인가. 장미도 코스모스도 세상에 아름다운 빛깔의 꽃이 넘쳐나는데 왜 옛날부터 봉숭아물을 들였으며 손톱에 봉숭아물이 잘 든다는 건 언제 누가 어떻게 발견하게 된 건지. 생각을 거듭할수록 신기한 일투성이다.

봉숭아물을 들인다는 건, 조그만 반죽이 자꾸 손톱 밖으로 밀려 나오고 벌건 국물이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흐르고 비닐은 자꾸 밀리고 꽁꽁 동여맨 손가락은 조금씩 저려오고 백반이 섞인 반죽이 닿은 손이 따끔하고 이 모든 일들을 견딘다는 건 보통 지루하고 번거로운 게 아니다. 어린 시절 엄마에게 손가락만 내밀고 앉아 시술(?)이 끝나고 하룻밤 잠들고 나면 다음날 마법처럼 손톱에 예쁜 물이 드는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엄마는 어린 시절 해마다 여름이면, 두 딸을 앉혀놓고 이 보잘 것 없으면서 귀찮았던 일을 하나도 귀찮지 않은 마음으로 기쁘게 해줬던 거라는 생각이 들자 왠지 마음이 뭉클해졌다. 비닐로 싸매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손톱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이게 뭐라고 얼마나 물이 잘 들고 있나 조바심이 나서 잠이 오질 않았다.

다음날 아침, 꽁꽁 싸맨 비닐 안에서 밤새 소금기에 쪼그라든 내 손가락. 그리고 꼭 김장을 한 것처럼 벌겋게 물든 내 손가락. 정말 오랜만에 보는 붉게 물든 반가운 손톱. 마치 김칫국물에 손을 담근 것처럼 함께 물들어버린 내 손가락에서 빨간 물이 빠지면 더 예쁜 손톱이 되겠지. 손가락 물이 빠지기까지 또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그걸 지켜보고 기다리는 느리고 긴 과정 또한 남다른 의미다. 모든 게 빠르고 편리하고 쉽게 소비되는 요즘 같은 세상에 옛것, 오래된 것, 천천히 해도 좋은 것, 잊고 살았던 의미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게 되는 시간.

그래서 어느덧 한 달이 훌쩍 지나버린 내 손엔 손가락 김칫국물은 깨끗하게 빠졌고 벌써 손톱의 새 부분이 많이 자라 예쁘게 자리를 잡았다. 이제, 들 뜬 마음으로 첫 눈을 기다릴 일만 남았다.


도토리 잔혹사


가을은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 문득문득 센티멘탈 해지는 계절. 독서가 어울리는 계절. 지금까지는 그랬다. 도토리, 너를 알기 전까지. 도토리를 알게 되고 난 후 나에게 가을은, 10월은 기승전 도토리. 그야말로 오직, 도토리의 계절이었다. 그렇게 가을과 함께 내 도토리 잔혹사가 열렸다.

시작은 이랬다. 어머니가 심심풀이로 다니시던 뒷산 걸음에 어느 날부턴가 가방에 도토리를 주워 오시기 시작했다. 다들 그렇게 한다고 심심풀이로 시작했던 일이었는데 집안에 도토리가 쌓이기 시작하고 점차 재미가 붙자 욕심이 생기셨나보다. 다니시는 분들과 경쟁하듯 매일같이 가방이 터질 만큼 담아 나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국내산 100% 집에서 만든 도토리 가루를 지인에게 팔아보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로 일이 커져버렸다.

나는 삼십 평생 도토리묵을 사서만 먹어보았지 도토리 나무는커녕 도토리 열매조차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놈의 도토리가 집에 쌓이기 시작하면서부터 퇴근하자마자 밥 먹고 자기 전까지 하는 일이 도토리 까기 작업. 한 줌의 도토리가 도토리묵이 되기까지 그 험난하고 지루한 여정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

일단 도토리를 줍는다. 밤톨보다도 작은 도토리를 반으로 쪼갠다. 반으로 갈라진 도토리 겉껍질과 속 알맹이를 분리한다. 분리된 도토리 알맹이를 말린다. 도토리 분리작업이 끝나면 물에 담가 불린다. 이 과정을 통해 도토리 알맹이에 붙어있는 껍질이 떨어지고(이게 도토리의 씁쓸한 맛을 낸다고 한다.) 분쇄가 잘 되는 상태를 만든다. 불린 도토리는 여러 번 물을 갈아주고 믹서에 간다. 믹서에 간 도토리를 큰 통에 담는다. (이 과정에서 도토리 앙금이 가라앉고 물을 따라 버리면 도토리 앙금을 얻을 수 있다.) 앙금을 돗자리 같은 넓은 공간에 얇게 펴서 서늘한 바람에 말린다. 말리는 중간 중간 덩어리진 앙금을 잘게 부숴 가루형태로 만든다. 다 말려서 가루가 된 도토리는 냉동실에 넣고 신선한 도토리를 먹고 싶을 때마다 참기름을 약간 섞어 물과 6:1의 비율로 쑨다. 콩알만 한 도토리를 주워 와서 반으로 쪼개고 다시 알맹이를 꺼내고 하는 작업만 해도 얼마나 큰 일 인지 모른다. 작은 과도로 껍질과 알맹이 사이를 쑤시다가 내 손바닥 검지와 엄지사이를 잘못 쑤신 적도 수십 번이다. 몇 시간이고 앉아 도토리를 까고 있으면 손발이 저릿저릿하다. 온 집안에 도토리를 널어놓고 말리는데 예민한 나는 도토리 냄새도 왜 그리 거슬리던지.

그렇게 가을이 무르익는 동안 도토리껍질을 까느라 내 손톱은 새까매졌고, 이제 내게 더 이상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가을이란 없다. 그래서 직접 만든 국내산 100%수제 도토리묵은 맛있었냐고? 원래부터 도토리를 매우 좋아하거나 특별히 싫어하거나 하지 않았다. 솔직히 도토리가 짜고 달고 맵고 뭐 그렇게 미각을 자극하거나 한동안 안 먹으면 생각날 만큼 중독성 있는 음식은 아니지 않는가. 도토리묵 무침으로 양념과 야채와 더불어 먹을 때 맛있는 거고, 또 그렇게 별미로 가끔 먹어야 색다른 거고. 시중에서 파는 것과 미묘하게 다른 느낌이 있기는 하다. 맛이 진하고, 탱글탱글한 것이 쫄깃한 식감이다. 집에서 만들어 먹다가 밖에서 먹으니 조금 밋밋하긴 했다. 솔직히 그저 그랬지만 도토리가 묵이 되는 그 기나긴 과정을 복기하고 나니 왠지 집에서 직접 만드는 도토리묵이 훨씬 맛있어야 할 것 같고 자꾸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 밖에서는 도토리묵을 못 사먹을 것 같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굉장히 억울할 것만 같은 그런 복잡하고 오묘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어쨌거나 그 이름도 찬란한 도토리 수난 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하지만 끝났다고 끝이 아니랬다고. 엊그제는 고구마 수확하고 남은 고구마 줄기라고 이웃 아주머니께서 한 포대를 가져다주셨고, 이제 밤과 도토리의 계절이 끝나면, 냄새로 이미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은행이 남았고, 봄에도 질리게 뜯어서 아직도 냉동실에 냉이가 넘쳐나는데 누군가가 가을 냉이가 몸에 좋다고 그랬다고 이제 냉이를 캐시겠단다. 가을이 풍요로운 수확, 결실의 계절이어서 며느리는 슬프고 우울하다.



1. 이름 : 나경진

2. 이메일주소 : evekyungjin@naver.com

3. 010-5294-2729

 

  • profile
    korean 2017.02.27 21:06
    잘읽었습니다.
    열심히 정진하다 보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건필하세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월간문학 한국인] 창작콘테스트-수필 공모게시판 이용안내 6 file korean 2014.07.16 2769
753 제 22차 창작콘테스트 수필 부문 '회고의 늪' 외 1편 1 연어 2018.04.10 16
752 좋은생각 1 정수엄마 2019.06.08 16
751 수영장 1 진자 2018.03.03 17
750 수필공모 2. <분홍 스웨터> 1 정태정 2016.12.08 17
749 제 14차 창작 콘테스트 공모전 1 상큼이 2016.11.19 17
748 <제24차 창작 콘테스트-수필><늦깎이 대학생>외 1편 1 작가지망생 2018.08.10 17
747 방관자 1 부용 2018.04.03 17
746 [월간문학 한국인 제 21차 창작콘테스트] 빛바랜 마징가 외 1편 1 신두열 2018.02.09 17
745 시시한 인간 외 1편 1 채송화 2018.02.10 17
744 바뀌지 않는 것 1 부용 2018.04.03 17
743 <제 22차 창작콘테스트-수필> [독서의 무한함-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과 함께] 1 22088 2018.04.10 17
742 제 24차 창작콘테스트 수필 - <날마다 비타민을 건네는 남자 외 1편> 1 순달이 2018.08.08 17
741 우리는 그날 컨베이어벨트 위에 올려졌다 1 적극적방관자 2020.04.01 17
740 제 35차<창작 콘테스트> 수필 공모- 인연은 육체가 아닌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1 G.Fauré 2020.05.27 17
739 [제 32차 창작콘테스트] 네가 만족했다면 그걸로 충분해 1 손정훈 2019.12.08 17
738 수필 공모(2) - 글쟁이가 되고 싶은 벙어리 1 기묭찌 2016.11.15 18
737 #3. 글쓰기 1 주열매 2016.11.30 18
736 <수필공모> 집을 짓는 사람 1 봄봄 2017.02.06 18
» [제15차 창착콘테스트]수필공모 1 유니맘 2017.02.07 18
734 미리내의 여름 1 박미기 2018.02.06 18
Board Pagination Prev 1 ... 2 3 4 5 6 7 8 9 10 ... 40 Next
/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