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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물음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마도 중학교 수업 시간 때였을 거다. 글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상관이 없는 건 아니지 않을까?라고, 그 말에 위안을 얻는 한편으로 생각했다.


 독도가 한국 땅이야, 일본 땅이야?


 이 물음의 의도를 나는 알고 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다. 내 생각이 정말로 궁금한 것도 아니다. 동반되는 엷은 미소가 무얼 말하는지, 왜 유독 내게만 이런 질문을 던지는지 오래전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비정상적인’ 출생으로부터 기인한다.


 1910년부터 1945년 광복절까지 약 35년에 걸친 일제의 식민통치는 비정하고 잔혹했다,라는 것을 나는 배움을 통해 알고 있다. 그러니까 초등학생 때 친구들이 나를 미워했던 것은 아마도 그 시절의 아픈 기억을 가졌거나 아주 가까이에서 전해 들은 분들이 그 아이들 집에 있었기 때문일 거다. 이따금 “일본 놈아, 한국한테 사과해.” 따위의 소리를 들을 때면 “나 일본 놈 아니거든!”하며 맞섰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같은 대답을 두 번 세 번 반복할수록 마음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불안이 점점 커져갔다. 무의식의 영역에 존재하던 그것은 이윽고 의식의 영역으로 침범하여, 어떤 물음의 형태로 고개를 들었다.


 내가 정말 천하의 나쁜 일본 놈일까?


 집에 돌아가면 나는 일본인 아버지와 일본어로 대화를 했다. 한국인 어머니와는 한국어를 썼다. 방에 들어가면 책상 위에 놓인 액자 속에서 일본인 할머니가 웃고 있었다. 할머니는 정말로 좋은 분이었다.

 나는 종종 하늘나라에 계신 할머니에게 일본어로 말을 걸었고 무언가 생각할 때에도 일본어를 사용하곤 했다. 그렇다고 한국어가 늦진 않았다. 학교에 가면 친구들과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한국어로 수업을 듣고, 한국어로 시험을 봤다. 성적은 늘 좋은 편이었다.

 아버지는 지극히 평범했다. 약간 나이가 많고, 조금 자존심이 세고, 다소 가부장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 아버지는 가족에게 헌신적이며 지나칠 정도로 성실했다.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썰렁한 농담을 하나씩 덧붙이고는 반응이 없으면 섭섭해하는 점은 조금 귀찮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정말로 웃긴 이야기를 해주었다. 키가 조금 작다는 것과 일본어로 말하는 것 외에는 특별할 것 없는, 좋지도 싫지도 않은 아버지였다.


 집 밖에서는 어딜 가나 일본 사람에 대해 나쁘게 말했다. 일본에 큰 지진이 났을 적에는 이번 기회에 일본인들이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길 가다가도 들었다. 중학교 때 사회 시간에는 누군가 일본이 쓰나미로 떠내려가거나 해수면 상승으로 물에 잠겨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아이들은 모두 깔깔거렸고 선생님도 별말 없이 웃어넘겼다. 나는 일본에 있는 큰아버지와 고모, 고모부의 얼굴이 떠올라 웃음보다는 울음이 나왔지만 숨을 죽였다. 무서웠다. 모두가 퍼붓는 저주가, 손가락질이 나를 향할까 봐. 물 위에 떨어진 기름 한 방울처럼 그 속에서 나는 철저히 외톨이였다. 누군가 던진 돌멩이에 간지럼 타듯 동심원을 그리며 출렁이는 물결에도, 그저 동동 떠다니는 기름 한 방울.


 고등학교 때 역사 공부를 열심히 했다. 특히 한국사가 재밌었다. 마치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의 일대기를 체험하는 것처럼 그 삶에 들어가 가슴을 뛰는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근현대사 수업에 접어들면서, 일제강점기에 대해 자세히 배웠다. 어떤 방식으로 일제의 국정 간섭이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외교권을 빼앗기고 국권을 찬탈당하기에 이르렀는지, 그리고 계속되는 비인간적인 수탈과 통치… 지독했다. 매시간마다 “나쁜 놈들.”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러다 문득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하나의 국적을 선택하기 전까지 나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니다. 누군가 비웃을 것만 같다. 네가 왜? 넌 한국인도 아니잖아-하고.


 혼혈. 하프 블러드 (half-blood). 말 그대로 반쪽짜리인 것이다.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반쪽짜리 한국인, 반쪽짜리 일본인, 반쪽짜리 인간…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수록 직접적으로 나를 공격하는 사람은 줄어들었지만 두 나라의 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사는 게 죄스럽게 느껴졌다. 모임 자리에서도 한일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를 숙였다. 스쳐가는 말 한마디가 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다. 스물두 살 먹은 지금도 그렇다.

 정체성의 혼란에서 오는 불안감을 숨기려고 오히려 악을 쓰며 누가 뭐래도 나는 한국인이라고 오기를 부린 적도 있다. 어엿한 한 사람 몫을 하는, 그보다 더 뛰어난 한국인으로 인정받고 싶어서 이를 악물고 독하게 공부했던 적도 있었다. ‘토종’과의 경쟁은 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싸움과도 같았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내가 태어난 땅은 이웃한 섬나라이며 그곳에 나와 피가 섞인 사람들이 있고, 그곳에서 나고 자란 남자가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또, 내가 그들을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러나 나는 내가 발 디디고 서 있는 땅 위의 많은 것들 역시 사랑하고야 말았다. 새카만 머리칼에 나보다도 키가 작은 나의 어머니, 오랜 시간 나를 품어준 집, 집을 품은 작고 낡은 동네, 새벽녘의 분주함과 늦은 밤의 왁자지껄함, 한강을 따라 난 산책로, 그곳을 걸으며 맡는 봄바람의 포근함, 여름의 비릿함, 가을의 헛헛함, 겨울의 무정함. 그리고 이십 년 조금 못 되는 시간 동안 쌓은 소중한 인연들, 그들과 나눈 사랑의 말, 나눈 진심, 삶의 한 조각.

 두 나라의 관계 속에서 마음이 편해지는 날은 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는 오지 않으리라. 매번 고민하고 아파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다 스스로에게 의문이 드는 날이 오면, 이제는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묻는 대신에 다른 물음을 던져 보려 한다.


너는 한국을 사랑해?

라고.



하아얀 배꽃같이 아름다운 그대에게


 “벌써 사십몇 년 전,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 다닐 적에 말야, 면목동에는 복숭아밭, 포도밭, 배 밭이 쫙 펼쳐져 있었단다. 봄이 되면 새하얀 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는데, 그 하얀 꽃이 퍽 예쁘게도 보이고, 나도 저렇게 하아얀 꽃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뭐, 그랬었지.”

 그래서 엄마는 최 리라는 이름으로 음반을 냈더랬다. 배나무 리(梨) 자를 써서 “최 리”. 고작 스물 한두 살 먹은 최 리의 첫 음반 제목은 “산새”였다. 참으로 지고지순한 사람이다.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딱 한 번 본 일이 있었다. 막내 이모 집에 갔을 때였다. 앨범 속 엄마는 나팔 바지에 청자켓을 걸치고 연한 색 벙거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새하얀 피부와 새까만 머리는 지금과도 다르지 않지만, 청춘의 싱그러움과 불안을 양 볼에 한 모금씩 머금은 듯 묘한 미소를 짓는 젊은 날의 엄마는 정말이지 예뻤다.

 내가 나 이외의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을 무렵 엄마는 이미 많이 아픈 상태였다. 엄마가 세상의 전부였던 시절 엄마의 세상이 기울어 있다는 것을 몰랐기에 나 또한 기울어만 갔고,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엄마의 세상 속 나는 존재 자체로 당신에게 해가 되는 나쁜 아이였다. 나를 선두로 한 나쁜 사람들이 공격한다며 종일 허공에 대고 욕지거리를 해댔다. 병은 점점 깊어져 갔고 밤마다 들려오는 부모님의 대화는 말소리로 시작해 물건 부서지는 소리로 끝이 났다. 나와 언니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죽인 채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엄마가 병원에서 약을 타왔다. 약을 먹은 엄마는 하루 종일 잠을 깨지 못하고 힘없이 늘어졌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시장에서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싸우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꿀 먹은 벙어리마냥 조용했다. 목소리는 작아지고 말을 더듬었으며 가만히 서있지 못하고 발을 굴렀다. 아마도 그것은 약물 부작용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원망의 대상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후로 엄마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본 일은 거의 없었다. 나는 약해진 엄마를 보호해야 할 대상 정도로 인식하거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취급했다. 엄마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장만 보고 집안일만 했다. 병원에 가는 횟수와 먹는 약의 개수는 점차 줄었지만 말려들어간 엄마의 어깨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엄마와 말을 튼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집을 나간 뒤였다. 사랑에 대한 결핍과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마음의 병이 곯아, 통보하다시피 자취 선언을 하고 집을 나왔다. 일이 주에 한 번쯤 집에 드나들었는데, 하루는 엄마와 단둘이 있게 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같이 사는 친구들이 어떤지, 집안일하고 밥 차려 먹기가 얼마나 힘든지 따위의 이야기를 했다. 엄마는 가족들과 고양이 두 마리의 안부를 전해주었다. 집을 나간 이유에 대해 많은 것을 묻지는 않았다.

 “엄마가 그렇게 되지만 않았어도 너희가 이렇게 살진 않았을 텐데...”

 엄마는 멋쩍게 웃었다. 사과에 서툰 분이지만 분명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아니야, 나는 지금이 좋아. 지금의 내가 좋아. 그런 말 하지 마요.”


 그날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평생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과를 받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엄마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하지 못한 내가 못나서일까.

 그 뒤로 집에 갈 때마다 종종 엄마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듣곤 했다. 노래를 좋아해서 음반을 냈던 일, 이모들과 함께 버거 가게를 차렸다가 말아먹은 일, 글 쓰는 모임에 가서 소설을 썼던 일, 대학에 가고 싶어 하루에 케이에프씨 비스켓을 하나씩 먹으며 돈을 모았던 일, 그러다가 폐결핵에 걸린 일, 심지어는 모은 돈마저 친오빠에게 사기를 당해 잃었던 일 등등...

 누군가의 엄마로서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최종란의 삶은 한 편의 영화처럼 흥미롭고 무모했으며 잔혹하고 아팠다. 엄마에게는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아주 지독한 병을 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파란만장한 삶을 지내던 엄마는 돌연 서른 중반에 결혼을 결심하고 생판 모르는 일본인 아버지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아버지는 엄마와 정 반대의 사람이다. 한 가지 일만 우직하게 파고들어 나름대로의 성공을 거두었으나, 어떤 부분에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고집과 자존심이 있다. 자유로운 삶을 살아온 엄마와는 달리 고지식하며 보수적인 분이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이기에 모진 풍파 속에도 묵묵히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붙들고 견뎌낸 것이리라. 엄마 또한 그걸 알기에 매일같이 아버지의 밥상을 차리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두 사람은 부부인 것이리라.

 아무것도 모르고 하얗게 피어난 꽃 같은 시절이 엄마의 삶에 얼마나 존재했을까. 지독하게 앓았던 억겁의 세월 끝에 남은 친구라곤 고양이 두 마리와 바보상자뿐이다.

 그러나 오뉴월의 싱그러운 꽃잎이 아니더라도 당신은 여전히 배꽃처럼 하얗게 아름답다고 말해주고 싶다. 떨어진 꽃잎이 스러지더라도 꽃이 진 자리에 탐스러운 열매를 맺을 거라고. 그 열매는 이내 크고 아름다운 나무로 자라 당신의 자취를 마음껏 세상에 뽐낼 거라고.

 그러니까 당신은, '최 리'의 삶을 충분히 잘 살아 낸 거라고.




최유미

010-4869-4820

choi_ri_0814@naver.com

  • profile
    뻘건눈의토끼 2020.03.10 15:54
    자메이카를 사랑하는 토끼... 자메이카를 사랑하나요? 당신...
  • profile
    korean 2020.05.03 16:57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욱 분발하시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늘 건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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