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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 던지는 다이어터>

 

키가 작다는 건 마치 유색인종으로 한반도를 살아간다는 것과 같다. 외모는 물론이고 각종 운동에서도 평균보다 뒤쳐지게 된다. 그에 대해 하소연을 하려고하면 주위에선 너보다 작은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면서 철없는 불평으로 일축해버리기 일쑤다. 어쩌면 단신에 대한 열등감은 이 사회가 만들어낸 선입견일지도 모른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자가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보다 위압감을 줄 수 없다는 개념이 문명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길 일이 아니라 부끄러워 마지않아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난 이 부당한 세뇌학습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수 없는 절대적인 수치가 있다. BmI,  소위 체지방율. 얼마나 비만이 진행되었는지 알려주는 지표로서 신장이 cm단위로 제곱되기 때문에 키가 작은 사람은 큰 사람에 비해 더 많은 체중을 줄여야만 정상 범위로 들어설 수 있다. 올해 초, 나의 체지방률은 30에 육박했다. 그 정도면 화성에서도 클리닉에 등록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권유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이어트는 나름 수월하게 진행중이다. 텔레비전 광고에서 호언장담하는 것처럼 한달만에 두자리수가 쭉쭉 빠지는 건 아니다. 솔직히 반년동안 5kg도 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거울로 과거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훨씬 건강해 보인다. 체중이 그대로인 건 근육이 늘었기 때문이 분명하다. 당장 한번에 들어 옮기는 아령의 무게와 팔굽혀펴기 횟수가 변했다. 그럼에도 체중이 변하지 않았으니 수효가 없었다고 한다면 귀기울 필요 없는 질투가 분명하겠지. 그러니 난 자부심을 가질 것이다. 비록 줄어든 체지방이 신장의 확장으로 가주진 않지만 출렁이는 배보다 단단한 삼각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면 어찌 수영장을 두려워하고 노출을 피하겠는가. 그저 지금처럼만 가면 된다. 아마 올해 말 쯤엔 물구나무서서 한 손으로 팔굽혀펴기를 하며 다음 여름을 기다리는 마초남이 되었을 테지. 그렇다면 나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될 것이다.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될 것이다.

 

정말 그래도 좋은 걸까?

 

밸트로 간신히 단추를 당기던 바지가 헐렁해지기 시작했을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만족한다. 육체엔 불만이 있을지언정 내 영혼과 신념을 버리고 개종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바뀐 육체를 가진 나 역시 그에 동의할까? 얼마 전에 육체가 뒤바뀐 남자가 인격까지 돌변하는 내용의 영화를 봤다. 불교나 힌두교에선 윤회에 따라 육체가 뒤바뀌어도 영혼은 그대로라고 했지만 기억이 다르고 인격이 다르다면 그 영혼이 과연 과거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복부지방이 쌓여갈 무렵 내 자만을 감시해주던 열등감이 근육에 떠밀려 추억속 어딘가로 사라진다면 그 안에 든 영혼은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

 

중학교 2학년때부터 일기를 써왔다. 일기라고는 해도 구구절절히 길게 쓴게 아니라 그날 그날의 생각을 단편적으로 적은 거라 그 기록만으로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기엔 무리가 있다. 심지어 종이 노트에 샤프로 적은 기록도 많아서 일부는 뭐라 쓴 건지 구분하기조차 어렵다. 그러나 잘 읽어보면 당시엔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사상을 굴리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찢어진 파피루스로 고대를 추론하는 고고학자와 같은 마음으로 과거의 나라는 미지의 개인을 파해치는 것은 평범한 일기장을 복습하는 것에 못지않은 즐거움이 있으리라. 어떤 구절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도 있고 어떤 주장은 도저히 용납하기 힘들 정도로 변해버린 것도 있다. 이게 나라구? 그런 구절을 읽을때마다 몇번씩이고 되묻는다. 이게 나라고? 이걸 쓴 녀석은 이런 조악한 신념을 누구더러 기억해달라고 일기장에 끄적여놓은 거지? 가끔은 일기를 좀 더 자세하게 적지 않은 게 후회스럽기도 하다. 도대체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사고방식으로 학창시절을 보냈던건지 부모님께 묻고싶을 따름이다. 하지만 결국 그들도 시원한 대답을 주진 못할 것이다. 그 자를 가장 잘 아는 건 나 밖에 없기때문이다. 그것은 내 영혼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선조들과 그들이 숭배한 종교가 영원 불멸의 물질이라고 주장했던 '영혼'이 한 두가지 행동이기 때문이다. 글쎄. 불멸일지는 모르지만 불변은 아닌 것 같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영혼이 머물지만, 같은 육체에 같은 영혼이 머문다는 말은 없었다.

 

정식으로 회사원이 된 지도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출퇴근을 향한 굳은 맹세는 깨어진지 오래고 곳곳에서 다이어트를 방해하는 요소들이 줄기차게 공격해온다. 과거에 없었던 상사의 꾸중과 사회 초년생을 향한 압박감이 어제의 나를 요단강 너머로 보내버리려고 시커먼 쇠사슬을 들고 슬금슬금 다가온다. 오늘의 나를 낳아준 어머니와 같은 그대를 지키기 위해 낡은 방패와 날 없는 검을 들고 그들과 싸우노라면 어느 새 그들의 의도대로 내가 아닌 무언가가 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담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니코틴 패치를 붙이다보면 어느 새 담배와 패치 양쪽에 매달리게 되는 중독자의 숙명이 떠오른다. 사회인으로서의 자격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이 승산 없는 싸움 속에서 영혼을 피드백 하기 위해 거울을 보고 일기를 읽는다. 단단해진 근육과 부드러워진 문체는 꾸준한 승리에 갈채를 보낸다. 하지만 이것이 처음에 원했던 것일까? 출발점에서 목표로 했던 곳은 나 자신인가 아니면 더 나은 나 자신인가? 둘은 같을 수 없다. 동전이 세로로 설 수 없는 고약한 게임이다. 과연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물론 아무런 의미 없는 걱정이다. 나는, 우리는 조금도 고민할 필요가 없다. 거울도 일기도 우주의 섭리를 향한 위대한 명상도 필요 없다. 그저 운전면허증 한 조각이면 충분하다. , 그래. 나는 늙는다. 더 이상 온 세상을 집어 삼킬 17세의 그는 어디에도 없다. 던진 동전이 손바닥으로 돌아오기 전에 모든 것은 끝나있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지금은 체중이 줄고 운동횟수가 늘어나고 있지만 결국 모든 것은 0으로 돌아갈 것이다. 노력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다이어트는 건강한 영혼을 담기 위한 건강한 육체를 빗는 고귀한 옹기장이와 같지만 사실  곧 무너져내릴 화덕 앞에서 넘쳐나는 시간을 떼우기 위해 화산과 바다의 흉내를 내며 춤추는 광대와 같은 것이다. 그냥 이 순간이 따분한 것 뿐이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것 뿐이다. 이 비참한 진실을 잊을 수 있게만 해준다면 다이어트가 아닌 무엇이라도 상관 없었다. 그래, 이제야 사실대로 실토하는 것 같아 속이 후련하다. 키도 수영복도 신념도 다 핑계였다. 전부 변명이고 허위였던 것이다.

오늘의 일기엔 사실대로 적어야겠다. 내일의 나를 위해 진실을 기록해줘야 한다.








<시험감독관>


 


고등학교 수험시절의 트라우마가 아직 극복되지 못했는데 바로 어제 중간고사를 보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시험감독관을 맡았다. 혼자 한 건 아니었지만 방이 두 개라 사실상 단독으로 50명에 가까운 학생들을 감시해야했다. 언뜻 보기엔 설렁설렁 돌아다니며 눈알 굴리는 불온분자가 없나 구경만 하면 되는 한직 같지만 뜨듯한 늦봄에 2시간동안 서서 정신을 집중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스마트폰이나 만지다가 고양이잠이나 자고 싶지만 나름 월급받고 하는 일이니 그럴 수야 있나. 물론 난 수험생들을 믿지만 내 믿음만으로 세상이 굴러간다면 지금쯤 소말리아엔 거대한 푸드코트가 있고 아이들이 그 앞에서 폴카를 추고 있을테지. 그러니 나는 수험생들을 신뢰하기 이전에 그들과의 신뢰를 지켜야 한다. , 수험생을 의심하는 나의 임무에 충실해야하는 것이다.


 


의심하는 것이 직업이다라고 하면 먼저 스파이나 경찰이 떠오르고, 그 다음엔 뭐라고 형언하기 어려운 위법의 영역이 그려진다. 하지만 사실 이 사회가 세워진 반석의 이름이 의심이다. 누가 언제 범죄자가 될 지 모르기 때문에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을 땐 열 손가락의 지문을 찍는다. CCTV가 거리를 점령하기 이전부터 시스템은 개개인의 동선을 갖가지 방법으로 기록해왔고 자유를 위해 피켓을 들던 젊은이들은 이제 그들이 낳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피켓을 든 히피들을 국경 밖으로 쫓아내달라고 아우성친다. 인간은 정글의 위험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도시라는 거대한 울타리를 만들었다. 울타리는 맹수와 산적을 막아냈고 활성화된 정보 네트워크로 인간의 수명을 세자리 수 까지 끌어올렸다. 허나 정작 울타리 안의 적에 대해선 대처할 수단이 전무하다. 날마다 자극적인 문구로 우리의 의식을 괴롭히는 뉴스는 공동묘지의 으시시한 고목처럼 거리의 모든 것들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눈속임한다. 저 공포로부터 달아날 순 없다. 달아나면 그곳엔 진짜 야생이 우리의 연약한 목을 물어뜯는다. 그래서 우리는 의심한다. 만에하나라도 이 일상을 파괴하지 못하도록 모든 감시해야할 대상을 의심한다. 일일이 모든 것을 의심하기엔 체력과 시간이 부족하다고 판단되자, 이젠 대신 의심해줄 자를 돈 주고 고용하며 기어이 그들조차 믿을 수 없어 의심할 능력이 있는 기계를 만들고 있다. 덕분에 그들은 가까스로 행복해진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믿을 수만 있다면 쓰레기장의 유리 구슬이라도 진주 목걸이로 만들 수 있다.


 


그래, 그런 삶이라해도 평화를 누릴 수만 있다면 그리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가 의심하는 동안 나도 의심 받겠지만 이 사회의 악을 몰아내고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라면 충분히 희생할만한 가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만화가 아니다. 배트맨과 조커처럼 명백한 악이 있다면 의심은 독이 되지 않겠지만 우리가 의심하는 대상의 9할은 이 아닌 이다. 수능 시즌만 되면 회자되는 논쟁거리가 몇 가지 있다. 수능을 보러가다가 곤경에 처한 할머니를 돕다가 지각했다면 시험 기회를 주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수능 시험 도중에 잠든 학생이 있다면 깨워서 시험을 보게 해줘야 하는가 아니면 그것도 그의 능력이라고 보고 방치해야 하는가? 이 모든 질문들은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 나는 저 자가 나보다 더 나은, 혹은 부당하게 나와 동일한 조건을 얻는 것을 좌시할 수 있는가? 지금의 공평이 나에게 이득이 되는가? 도시라는 이름의 거대한 경기장에서 저 자가 나의 밥그릇을 빼앗아가는 걸 도덕과 화합의 이름으로 방치했을 때 얻게 될 대가를 감당할 수 있는가? 솔직해지자. 우리가 기계와 피고용자에게 의심하라고 시키는 대상은 한니발 렉터나 다스 베이더가 아니라 이웃집의 회사원이며 옆자리의 동기들이다. 우리가 의심으로 얻고자 하는 건 정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조건을 얻고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시험 감독을 하면서 줄곧 했던 생각 중 하나는, 과연 정말로 컨닝하는 자가 나타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였다. 눈치를 주면서 컨닝을 포기하도록 유도해야할까? 멱살을 잡고 끌고나와 시험장 밖으로 엉덩이를 걷어차야 할까? 눈이 마주치지 않은 척 하면서 남은 한 시간이 흘러가기를 손꼽아 기다려야할까? 이렇게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다른 수험생의 분노를 사면 어쩌지? 무능한 시험 감독관이라는 건의서가 날아가 내 인생 청사진에 거대한 흠집을 남겨놓으면 어쩌지? 누군가가 이 이야기를 인터넷에 올리고 내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퍼트려 평생 잊지 못할 마녀사냥의 주인공으로 만들지도 모른다. 그런 끔찍한 결말을 맞이하느니 차라리 약간이라도 고개를 수상하게 움직이는 자가 있다면 당장에라도 블랙리스트에 올려 두 번 다시 내 신경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무너뜨려 놓는 게 좋지 않을까? 조금 매정하고, 조금은 과민스럽고, 조금은 지나칠지도 모르지만 세상 천지에 내 보신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잘못 발을 디뎌 사다리 아래로 미끄러지면 날 밟고 올라가려 할 하이에나들이 지평선 끝까지 가득 차있다. 이 사회는 한 번의 실패를 용납하지 않으며 따분함에 지친 인간들은 SNS에 들어가 타인의 허물을 오독오독 까먹으며 희열을 느낀다. 보신은 더 이상 비열함의 상징이 아니라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위한 의무이다. 시스템의 일원으로서 지켜야할 의무를 위해서라면 의심 정도야 얼마든지 쓸 수 있는 도구다. 그러니 이것은 정당하다. 의심은 정의가 되었고 법이 되었고 정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최전선에 내가 있었다. 만인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만인을 의심하는 시험감독관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이런 망상으로 시간을 까먹다보니 어느 새 시험이 끝났다. 수험생들이 모두 나가고 아무도 없는 빈 방을 정리하다가 문득 창 밖을 바라보게 되었다. 빈틈 없이 다닥다닥 붙은 벽돌 건물들 사이로 주차된 자가용에 눈이 시리도록 밝은 햇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밖은 방보다 덥고 밝았다. 그래서 깨달았다. 진짜 태양이 비추는 진짜 세상은 저기에 있음을. 그리고 나는 나를 고용한 수험생들과 마찬가지로 이 시험장을 만들어낸 정체불명의 괴인들이 만든 광기 어린 게임의 규칙 속에서 미쳐갔음을.


그래서 나는 미치지 않기로 했다. 이미 감독관 일은 끝났지만, 기왕이면 미치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쪽이 되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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