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나의 결혼생활은 대개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이란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평범한 하루하루의 연속이었다. 그런 생활을 재미없다고, 넌더리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나의 관점에서는 완벽에 가까운 통제된 삶이라고나 할까.. 나와 내 남편의 삶이 그러했다.
너무나 사랑해서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날을 잡아 결혼을 하고, 모아둔 돈이 적었지만 그 돈으로 14평 낡고 오래된 빌라를 매매해서 처음부터 월세, 전세살이의 서러움을 몰랐고, 아기가 갖고 싶다고 생각하자마자 너무나 수월하게 아기가 우리에게 찾아와 주었다. 아기는 큰 병치레 없이 무럭무럭 잘 자라주어 예쁜 짓만 골라서 하고, 육아로 인해 외벌이 가정이 되었지만 남편의 월급은 조금씩 조금씩 올라서 어느 정도 저축도 하고 서로를 위해 가끔은 사치스러운 선물을 해 줄 수도 있을 만큼 모든 일이 그럭저럭 순탄하게 흘러갔다.
이 날도 역시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아침 일찍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책을 읽고 있을 때 남편이 잠을 깼다. 오후에 출근하는 사람이라 낮 12시까지는 코골며 늘어져라 자던 사람인데 이제 겨우 아침 9시 즈음인데 일어나선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등을 어루만져준다. ‘새삼스럽게 이 사람이..’ 아직 이른 아침이니 다시 눈 좀 붙이라고 억지로 몸을 뉘여 주었건만 쓸데없이 고집을 피우며 그저 내 옆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겠단다. 남편이 평소 안하던 짓을 하면 여자는 촉이 바로 온다. 내가 그랬다. “커피 한 잔 타다줄까?”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나 하는 일 없이 나만 바라보고 있질 않나, 자진해서 커피 한 잔 타다주겠노라 부지런을 떨지 않나, 이 사람 행동이 자못 수상하게 느껴졌다. 표정에는 ‘나 할 말이 밤새도 모자랄 지경이오.’ 라는 메시지가 선명한데 끝까지 자기는 할 말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며 잡아뗀다. ‘차라리 귀신을 속여라 귀신을 속여.’ 내가 집요하게 나오니 남편이 결국 입을 열었다.
평온하고 잔잔하던 나의 생활이 찬장 속 모든 유리그릇이 와르르 쏟아져 깨지는 것처럼 깨지고 있었다. 남편의 말인즉슨 이랬다. 월급의 일부는 나에게 생활비로 주고 일부는 본인의 자동차 유지비와 용돈으로 써왔는데, ( 이 부분은 내가 신혼 때 제안한 이야기였고,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부분이다) 나와 아이에게 선물해 주고 싶은 것, 외식시켜 주고 싶은 것, 구경시켜주고 싶은 것을 절제하지 않고 해주다 보니 본인 수중의 돈보다 더 많은 돈을 써왔다는 것이다. 늘어난 소비는 카드로 돌려막고 그 달은 어찌어찌 겨우 해결하고 또 다음 달에 카드로 돌려 막는 식으로 자꾸 빚이 늘어났지만 나와 아이의 웃고 기뻐하는 얼굴이 너무 자신을 힘나게 해줘서 그 늘어나는 빚이 삼천만원이 될 때까지 버티고 버티었단다. 그런 와중에 농협 본사에서 전화가 와서 새로운 대출상환 방식을 통해 빚도 갚고 신용도도 높여 주겠다하기에, 그 직원이 시키는 대로 고리 대부업체를 통해 4천을 대출받아 그 쪽 계좌에 넣었는데 연락두절이라는..그러니까 요즘 유행한다던 보이스 피싱을 당했다는 이야기였다. 4천 대출을 받기 위해 친한 친구한테서도 돈을 빌리고 했던지라 총 빚 규모는 7천만 원을 훨씬 넘는 금액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고 목구멍에 누가 주먹을 넣은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고 가슴이 찌릿찌릿 아파왔다. 하지만 거인처럼 큰 덩치를 가누지 못할 정도로 흐느끼는 남편 앞에서 나까지 대성통곡을 할 수는 없었다. 이 시간, 이 순간에도 고액의 이자가 계속 할증되고 있을 텐데 주저앉아 울고 있어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무릎을 꿇고 목 놓아 울고 있는 남편을 껴안아주었다. “내가 곰이었네. 곰이었어. 당신이 여태껏 아이와 나한테 해주는 걸 받으면서 그 돈이 다 어디서 나왔을까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 생각해보니..그래. 오빠 용돈만으로 우리한테 그렇게 맛난 거 사주고 나들이 시켜주고 선물도 사주고 할 수 없을 텐데.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미안해...”
나 스스로 놀라운 건 보이스피싱을 당했다는 사실에는 사실 그리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너무 가슴 아프고 절망스러웠던 것은 아내와 아이의 웃는 낯을 보기위해 아슬아슬한 빚의 외줄타기에서 중심을 잡고 서있느라 힘들었을 우리 집 가장의 힘겨움이었다. 그 힘겨움을 딸과 아내의 애교로 버텨왔는데 보이스피싱이란 놈이 큰 한방을 먹여 우리 집 가장을 간신히 버텨내고 있던 빚의 외줄타기에서 떨어뜨린 것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동안 얼마나 애가 타고 속이 끓었을까. 바보같이 외식시켜준다고, 봄맞이 옷 사준다고, 아이 장난감 사준다고 좋아서 팔짝팔짝 뛰던 내가 너무너무 미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울고 있는 남편을 달래 출근시키고 나는 곧장 은행으로 달려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불어나고 있을 이자를 막지 않으면 우리 가정을 지켜낼 수 없다. 생활비 아껴서 저축해 둔 예적금을 해지해서 급한 불부터 껐다. 그래도 모자란 빚은 주택담보대출로 막았다. 빚을 해결하기 위해 또 빚을 낸 셈이지만, 폭리를 취하는 대부업체도 아니고 매달 내가 갚아나갈 수 있는 규모의 이자와 원금이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일단 이렇게 급한 불을 끄고 숨통을 죄어오는 듯한 보이지 않는 압박에서 조금은 벗어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이후 몇주 간은 남편과 나 둘 다 악몽에 시달리며 밤잠을 설쳤던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완전히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우리의 삶을 이전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만은 오히려 공고해진 느낌이었다. 아내와 아이에게 조금 더 맛난 것을 먹이고 싶고 좋은 곳을 구경 시켜 주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 빚. 사기로 인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으로 불어나 사태가 이 지경까지 되었지만 누가 우리 집 가장을 비난할 수 있을까.
결혼 생활 5년차에 우리는 다시 무일푼에서 시작하게 되었지만 별로 두렵지 않다. 사랑하기 때문에 견딜 수 있고, 사랑하기 때문에 이겨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남편과 술 한 잔 주거니 받거니 하는 날이 오면 이 이야기가 모두 맛난 안주거리가 되어 웃을 날이 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그런 날이 생각보다 일찍 오리라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작성자 : 이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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