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소녀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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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가 어깨에 스며들고 있다
아, 스며드는 동시에 흙 비린내가 풍기기 시작한다
지난 날 활개치던 아지랑이를 잠재우듯
시나브로 온 세상을 적시고 있다
이에 스며든 우리는
잠시 잊었던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는 시를 한편 쓰겠지
스며든 가을비여
나의 집배원이 되어 미련이 군데군데 묻어있는 이 시 한편을
그때 그 열일곱 소녀에게로 보내다오
나의 가객.
살아가는 동안 쓴맛에서 달콤함을 느껴내고 비정상을 정상으로 여기게 될 때쯤이면
점차 창백한 뼈들만이 나의 육체에 자리하고 모습을 이루겠지
마치 막 발굴된 지난시대 유물처럼
그렇게 살갗이 벗겨지고 앙상한 뼈들의 자태가 드러날 때쯤이면
어깨에 짊어지던 가장이란 육중함은 이내 경해지고
사랑하는 이까지 날 떠나게 되겠지만 너만은 내게 찾아올거야
희끄무레한 뼈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을 감춰주고
공허해진 뼈 마디마디를 채워주겠지
그러니 너의 가치를 모르는 이들의 불청객이 되지 말고
나의 가객이 되어 두터운 옷 한 벌이 되어주렴, 먼지야
오래될 것으로부터.
어느 새벽과 다를 것 없이 나는 당신의 신음에 잠에서 깹니다
노환과 당뇨가 한꺼번에 닥친 당신은 자주 갈증을 느낍니다
좀처럼 펴지지 않는 당신의 무릎을 주물러 나는 겨우 당신을 일으킵니다
녹내장으로 눈 먼 당신은 나무 빼곡한 숲에서 길을 잃은 듯 보입니다
물을 마시러 가는 길
당신은 몇 번이나 벽에 머리를 부딪히더군요
기저귀는 매일 두 장씩 필요하고
그마저도 어설프게 채워진 날엔 오줌 줄기가 다리 틈으로 샜습니다
고백컨대 탈의한 당신의 뒷모습을 보는게 나는 가장 두렵습니다
훤히 드러난 살가죽은 당신의 온전한 모습을 찾기에 어려웠고
하얗게 센 털은 미처 쓸지 못한 먼지처럼 당신 등에 듬성듬성 누웠습니다
당신은 더 이상 나를 반기지도
내 이야기에 반응하지도
그토록 좋아하던 산책을 나가지도 않고 식사와 용변을 제외하고는 매일을 고개만 이불 밖으로 빼내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당신의 상태가 악화된 일 년간 준비한다고 했건만
모든 존재가 죽음으로 향해 간다는 사실을 나는 아직 믿기 힘듭니다
그래서 나는 이 새벽에 당신의 곁에 누워 귀에 대고 속삽입니다
당신은 내가 닮고 싶었던 멋진 어른입니다
당신 덕에 내가 얼마나 괜찮은 이인지 알게 되었지요
늦게 오는 나를 반기는
귀를 열고 내 말을 경청하는
앞서 가다가도 나를 기다리는
당신이라는 존재가 내게도 있었다는 것
그로 인해 내 청춘이 빛났다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또 고맙습니다
오래된 것들에게 경배를
오래될 것으로부터
내가 그대를 놓는건.
그대는 왜 곁에서 빙빙 멤돌기만 하나요
혹여 나를 잊지 않고 반기시는지요
궁금해서 이팝나무에게 물어봤어요
그리고는 연리목이 대답했어요, 미쳐서 저러는거라고
그대는 넓은 곳에서 자유롭게 헤엄쳐야 하는데
저렇게 가둬 놓으니까 미쳐버린거래요
그러기에 나는 이제 그대를 놓으려 해요
비록 이별 뒤에는 큰 상실의 아픔이 뒤따르겠지만
나의 상실감은 그대가 갈망하는 드넓은 곳에서는 잠깐 내리고 마는 가느다란 소나기 정도겠죠
그럼에도 내가 그대를 놓는건
그대를 미치게 하는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기에
이제는 자유롭게 그대가 헤엄치길 바라요
나는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너를 위한 바다거북.
수족관의 해설사가 너를 가리키며 말했다
모든 생물은 바다에서 육지로 옮겨갔고 너 또한 폐, 팔 다리, 자궁을 만들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바다로 귀화한 유일한 동물이었음을
고통스런 시간들을 견뎌놓고 왜 귀환했을까
무언가 바다에 그리운 감정이 남아있던 걸까
압도적인 너의 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니 괜스레 눈시울이 붉어졌다
만약 네가 사람이었다면, 아마 나는 한눈에 반해버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네가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아
네가 육지로 올라올 수 없다면, 나는 거북이가 될게
바다와 육지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바다거북이
나만이 너를 이해할 수 있을거야 나만이 너를 지킬 수 있을거야
그러니까 조급해하지 않을게
천천히 나에게 오렴
김민제
010-9437-8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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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