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정갈함 위에 묵직한 먹
매끄럽게 날선 이빨 휘날리는 숨소리에 등골은 섬뜩하고
턱을 흐느끼며 쩍벌린 아가리의
구김 없는, 서슬 퍼런 날갯짓이 절벽을 몰고 온다.
해수구제의 총구 앞에 한(恨)을 뒤집어 쓴 채
반만년의 시간을 가죽 몇 줌에 묻어두고
백두대간 혈흔 되어 사라졌던 반도 호랑이
그 호랑이가 이제는 한 마리가 아니라 한 권이 됐다는 것을
모르는 사이 더 가까이, 깊이 성큼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그것도 긴 은둔의 삶 속에서 인내를 거듭하며 영험한 백호로 존재 했다는 것을
호랑이를 입에 달고 산 이들은 알고나 있을까.
깊은 산골은 뒷산이 되어 노인들도 오르락내리락
어디에 가도 사람의 발길은 끝이 없고 지은 죄도 없건만
수배 당해 방랑해온 그들이 택한 등잔 밑은
누구나 아무 때고 펼쳐보는 종이 몇 장
아무리 말하고 들어도 꼼짝 않던 오금이
눈앞의 백호에 전율하니 뒷걸음도 칠 수가 없다.
먹히느냐 마느냐는 두 눈에 달렸으니
오랜 속담 확인이라도 하듯이
바짝 차린 정신으로 핏대 세워 노려본다.
끝날 줄 모르는 그와 나의 보리쌀 속
다물어 사라지는 어금니의 용모
가라앉는 마음과 함께 천천히 굴복시킨다.
나에겐 총이 없음과 쓸데없는 토템도 없음을 각인시키며
언젠가 백호가 독기 없는 그때의 황호가 될 때까지.
건너지 못한 신호등
신호등 파란불에 그는 주저앉아 울었다
모두가 건너가는 그 길을
그는 한 발자국 내딛지 못하고
쪼그려 앉아 흐느끼기만 했다.
전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걸었던 그 길에서
늘 당연히 기다려온 그 신호등 맞은편에서
빛나는 파란불은 그에게 일상이었다.
아무 색 없이 그렇게 무감각한
신호등 아래 뜬 눈으로 노숙 하던 그에게
빛나는 파란불은 친구이자 집이요 가족이었다.
빨간불을 보며 그 같이 충혈 된 눈으로
한여름에도 냉기 가득한 도로복판 향해
아슬아슬 달려갔던 그에게
산발된 머리처럼 모난 꿈자리를 견뎌내고
다 뜯어진 쪼리에 발가락 마디사이로 힘이 빠져가도
조금이라도 더 손을 뻗으려던 그에게
건너지 못하고 울기만 했던 파란불은
빨간불 속을 찾아 헤매면서 맞잡고 싶었던 것은
병실에 누워 계신 어머니였다.
꽃
흔히들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꽃이라 하지요
당신은 꽃이었죠
나의 사랑 듬뿍담긴
내 눈의, 나만의
한 올 마다 반짝이며 흐르는
꽃잎은 고동(古銅)의 은은한 폭포수
새하얀 줄기 끝에 매달린
섬섬옥수 가녀린 잎사귀는
어루만지고픈 아가 손 같아
옹골찬 원색 홍이 퍼진 뿌리와
눈부시게 단순호치 함에
밝디 밝아 진해져
물들대로 물든
초롱한 두 빛
쉼없이 알록달록 퍼져 나가는
못의 울림, 감성의 보고(寶庫)
그 따라 넘실넘실
길을잃고 표류하는
힘없는 빙충이는
까닭모를 꽃
그 어딘가 살포시 앉아
다가올 쌀쌀한 가을
그대를 시들게할
근심 갉아 먹어
당신의 따스한
아린(芽鱗) 되고 팠지만
고개 돌린 꽃 한송이
가을보다 독한
그 날카로운 쌀쌀함에
울림 속
연꽃 마냥 피어나
연못을 이룬
그 꽃은
시들고 말았지요
흔히들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꽃이라 하지만
당신은 아니었죠
나의 사랑 듬뿍 담긴
내 눈의 나만의
꽃.
나방의 거울
어찌나 억세게 짰는지
번데기마냥 굴곡 져 굳어버린 걸레를 들고
방안에 들어서 나방이 날개 짓 하듯 활짝 펼쳐낸다.
날개를 펼쳐 날기도, 바닥을 기기도 하던 나방은
거울에 내려 앉아 한참을 가만히 붙어만 있는 것이
제 자신 모습이 흉측해서 인지
문득 지난날이 떠올랐는지
알 길은 없지만
계속 해서 내뱉는 거침 숨소리로
거울을 뿌옇게 물들이는 건
확실히 부끄러운 무언가였다.
나비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존재가
단 한 글자 차이로 아름답기보다는 해충에 가까운
나방이란 사실을
애써 부정하는 듯,
괜찮다고 합리화 하는 듯 했다.
다 닦았니 소리치며 물으시는 어머니에
나방은 화들짝 거울을 떠났다.
그가 남긴 거울은 깨끗했고
혼자서 빨래와 설거지를 하시며 거실과 안방 부엌까지 온 집안을 청소하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우리 아들 다 컸네, 이제 자기방 청소도 다하고.
밤하늘 모임
불 꺼진 밤, 어느 별 하나가 뻐끔뻐끔 운을 떼
하나 둘씩 너도나도 이 별 저 별 모여드니
눈 시끄러운 엄청난 '수다.'
태양 등쌀에 대머리 된 달은
모여든 별들이 쑥스러워 어둠 뒤집어썼건만
하필 머리만 빼꼼
본의 아니게 어두운 골방 은은히 분위기를 더하고
구름은 두 팔 벌려, 어색함을 깔아 뭉게뭉게 피어올라
이불 속 달을 빼내, 별들 모아 어깨동무 얼싸 앉히는 구나
주위에 모여든 관심이 부담스러
더더 발그레 둥그레 밝아지는 달빛에
구름은 귀여워 더 꼬옥
별들은 우스워 더 눈이 부신다.
그 와중에도 등 돌려 자고있던 하늘은
시끄러운지 근엄히 헛기침 한번 날려주는데
마른하늘 날벼락에 별과 달 그리고 구름모두 후다닥
금방이라도 침 퉤퉤 튀기며 꾸짖을 것만 같아
아쉬운 맘 뒤로 하고 잠을 청하려는 그때
흐르는 한 줄기 눈물은
하늘이 웃음을 참다 흘린 것이었으니
다들 어둠 박차고 다시 나와
한마디 한마디 빛나기 시작해
어느새 환해지는 밤하늘
술 한잔도 없이 웃고 떠는 것이 보기가 좋다.
지금 이 순간, 별이 되어 구름의 품에 안기고만 싶다.
그 품에서 밤새 수다 떨며 빛나고 싶다.
성명 : 박용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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