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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0 22:30

완전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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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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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습----딱 습----딱 습----딱

소리는 작고 나지막했다. 그러나 그것의 끝에는 확실히 신경을 자극하는 것들이 잔뜩 묻어 있어 날카롭고 끈덕지게 신경을 자극했다. 힘겹게 눈을 떠서 닫쳐진 방문을 확인해 본다. 그것은 하나의 틈 없이 이 집안에서 나를 완벽히 분리 시켜주고 있었다. 누군가 저 손잡이를 돌리고 방문을 열기까지 지금 몸을 누이고 있는 이 공간이 오롯이 나만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아무렇지 않게 나의 세계를 침범하는 소리로 인해 나는 몸을 떨어야 했다.

습----딱 습----딱 습----딱

평소보다 소리가 머무는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손을 들어 눈 주위를 만져본다. 잠자리의 날개 짓 같은 떨림이 손 끝에 전해진다. 천천히 눈을 떠본다. 익숙한 풍경이 깜박 켜진다. 다시 꺼진다. 소리의 숨이 점점 타오른다. 뜨거워진 숨결이 귓가에 닿는다. 그리고 몸 구석구석에 베어있는 무기력함을 깨웠다. 무기력함은 서늘하다. 그래서 소리가 이 방으로 들어오는 순간 나는 그것에 취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소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는 것 뿐. 그래. 그저 그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다른 날처럼 지나갈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습----딱 습----딱 습----딱

일정한 박자를 가지고 소리는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이제 때가 되었다는 듯이 나의 몸에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왔다. 그리고는 하수구가 제 속으로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빠르게 내 안에 새겨진 기억들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차마 걸러지지 못한 얼마 남지 않은 기억의 부스러기들이 내 몸속에서 서걱서걱 굴러다녔다.

습----딱 습----딱 습----딱

여전히 소리는 계속 되었다. 뱀처럼 몸을 움직이던 소리가 이제 때가 되었다는 듯이 씹던 껌처럼 툭 타다 남은 조각들을 뱉어낸다. 내 앞으로 비디오의 느린 화면처럼 지나간 시간들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빛이 반짝한다 싶더니 그 크기가 커져 나를 쏙 하고 흡수해 버렸다. 정신이 아찔해 진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의 경계가 흐려진다. 이 시간이 오면 지금 침대에 누워 있는 내가 나인지 아니면 화면 속에 재생되고 있는 기억이 나인지 전혀 구분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곤 했다.

 

굳게 닫힌 철문의 901호라는 숫자가 보인다. 굳게 닫힌 문 앞에는 삐쩍 마른 계집애 하나가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만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초겨울 찬바람이 살갗에 닿아 몸에 닿았는지 아이가 오들오들 떨기 시작한다. 추위가 점점 아이의 몸을 파고든다. 몸을 잔뜩 움츠린 모습이 꼭 달팽이 같다고 느껴질 무렵 천천히 아이의 모습이 내 눈 앞에서 사라져 간다. 나는 다음 순서를 위해 몸을 뒤집어 본다. 다음 순서에 무엇이 나올지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엄마가 나와 아버지를 두고 집을 나간지 딱 일주일이 되는 날, 잠에 취해 비몽사몽한 나를 깨우는 손이 있었다. 내 몸을 흔드는 그 손은 거칠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지금 꼭 일어나야 한다는. 잠투정 같은 것은 부릴 생각도 말고 얼른 일어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 절도 있는 동작에 나는 애써 떠지지 않는 눈을 떠서 나를 깨우는 손의 주인공이 누구인가 확인했다. 그것은 아버지였다.

“일어나서 나를 따라와라. 같이 갈 때가 있다.”

 

지금 아버지와 내가 향하는 곳이 어디인지, 어디인지 모르는 그 곳에 도착하면 이젠 정말 부모한테 완전히 버려지는 것이 아닌지 하고 싶은 질문이 많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도착지인 부산역에 닿을 때까지 시선을 앞 유리에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 또한 애써 내게 말을 걸지 않았기에 부산으로 향하는 여덟 시간 동안 차에서 들리는 유일한 소리는 간간히 터지는 기침 소리뿐이었다.

“내려라.”

아버지를 따라 차에서 내리고서야 그 곳이 부산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새벽 어스름 사이로 혼자 몸을 빛내고 있는 부산역이라는 글씨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차에서 내린 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어울리는지 몰라 선택한 행동이었다. 한참을 주변을 둘러보던 아버지는 어색하게 내 팔목을 잡고 애써 부산으로 달려온 보람도 없이 유일하게 문이 열려 있는 김밥천국으로 발검을 옮겼다. .내가 기억하는 한 부산은 그때까지 내가 가 본 곳 중 멀리 떨어진 도시였다. 그런데 김밥천국이라니. 부산이란 모름지기 바다가 보이고 갈매기 날라 다니고, 횟집이 쭉 늘어서 있고 뭐 그래야 되는거 아닌가. 어쩐지 익숙한 느낌의 김밥천국은 어쩐지 친근하면서도 이물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든 말든 아버지는 무심히 몇 가지 음식을 시켰다. 그리고 내게 먹어보란 말도 없이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먹었다. 김밥을 우물거리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 새삼 엄마가 이제 정말 나를 떠났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만약 지금 이 곳 테이블에 엄마가 함께 앉아 있었다면 모르긴 해도 내 손에 숟가락 젓가락을 손에 쥐어주고 마침내 내 입에 음식물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그녀도 먹기 시작했을 테니 말이다. 숟가락 통에서 젓가락을 꺼내며 이제 이런 사소한 것이 하나하나 모여 내 인생을 송두리 째 바꿔 버리고 말 것이라고 나는 직감했다.

시켜 놓은 음식들을 채 반도 먹기 전에 아버지는 식사가 끝났는지 숟가락을 탁하고 내려 놓았다. 분명히 나를 배려한다고 시켜 놓은 돈까스를 어설프게 썰으며 아버지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가 돈까스 써는 모양새를 열심히 보고 있었기에 나는 왠지 기대에 부흥해야 된다는 생각에 열심히 돈까스를 썰었다. 어쩌면 아버지는 한 조각 먹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것은 모락모락 김이 날정도로 따뜻했고 엄마에게 버림 받은 우리는 부산의 새벽 공기에 몸을 떨 정도로 추웠으니 말이다. 한참을 공을 들여 돈까스 조각을 한입 크기로 만드는데 성공한 내가 조금은 우쭐한 마음에 아버지를 보았다. 그리고 어떤 말로 돈까스를 권하는 것이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 중에 적당한 말을 찾아 고르며 쥐고 있는 포크로 제일 먹음집한 돈까스 한 조각을 찍는데 마치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아버지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잠시 지갑을 뒤적거리다 만원짜리 몇장을 내 앞에 떨어뜨려 놓고는 잠시 볼일을 보고 오겠다며 김밥집을 나섰다. 아버지에게 건네주기로 했던 돈까스 조각을 입에 넣으며 나는 그의 말에 대해 꽤 오래동안 생각해야 했다. 잠시 볼 일을 볼 동안 여기서 음식을 먹으며 기다리라는 말을 하는 것 일까. 아니면 한참이 걸릴 예정이니 앞에 던져준 돈으로 시간을 보내며 기다리라는 말일까. 어쩌면 아버지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간간히 끼어드는 것도 멈출 수 없었다. 그 날 나는 아버지가 던져 준 돈으로 음식을 계산한 후 어디로 갈 생각도 차마 못 하고 김밥천국 주변을 뱅뱅 맴돌았다. 낮이 밝고 다시 어둠이 찾아 올 때까지 나는 아버지를 기다렸다. 다행히 김밥천국의 메뉴는 다양해서 점심과 저녁은 각자 다른 음식으로 먹을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저녁을 배부르게 먹고 다시 배가 고파지자 그때서야 나는 근처 공중전화로 가 집 번호를 눌렀다. 만일 아버지가 나를 버린 것이라면 이 신호음의 끝에서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고 만일 아직도 볼일을 보는 중이라면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꽤 긴 신호음이 울린 끝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다. 댕그랑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마침내 부산에 버려졌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준 돈으로 집까지 돌아오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했지만 문 밖에서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았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저 어린 소녀는 아버지가 있는 집에 들어 갈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해 그리고 이 집에 들어가면 이 곳에 온전히 머물 수 있는지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 견뎌내야 되는 시간들에 대해 오래 오래 생각해야 했다. 어쩌면 그는 어린 나에게 선택의 기회를 준 것일지도 몰랐다. 그 때 당시 내 나이는 열 세 살이었다. 어리다면 어린 나이었지만 그녀가 집에 오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올 수 있는 나이라는 것을 아버지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몇 시간 째 문 앞에 서 있던 어린 소녀는 정신을 잃고서야 누군가의 손에 의해 집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소리가 멈추었다. 소리가 멈추는 순간 그녀 앞에 있던 901호 앞 소녀가 서서히 제 몸을 지워 내더니 마침내 사라졌다. 파르르 떨리던 몸과 거친 숨소리가 서서히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소리가 빨리 멈춰서 다행이야. 만일 소리가 계속 되었다면 그것이 쏟아내는 파편들이 몸 구석구석을 찔러 대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떠본다. 애써 잠을 청하려 이리저리 몸을 뒤척여 보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지금 자지 않으면 오늘 하루 버티는 것이 힘들거야. 그러니 자도록 하자. 하면서 오른쪽 손을 들어 왼쪽 가슴가로 가져갔다. 언젠가 TV에서 갓난아기가 잠에서 깨어나 칭얼거리려 할 때 그렇게 해주면 다시 잠든다는 것을 보고 난 후에 내 자신을 타이를 때 쓰는 방법이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두었을 때도 그리고 끓어오르는 화를 눌러야 하는 때에도 또 그 날 이후 그녀의 아버지를 마주쳐야 하는 순간이 오면 어김없이 나의 오른손은 왼쪽 가슴가에 머물고 있었다.

이렇게 더 누워 있어봤자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본다. 꽤 묵직한 통증이 관자놀이를 쿡쿡 찔러온다. 등뼈를 타고 올라오는 피로감에 한 동안 뭉친 어깨를 풀다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침대 옆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어본다. 나뭇잎을 떨어뜨린 겨울나무처럼 앙상하게 마른 몸이 거울에 비쳐 보인다. 싸늘한 공기가 몸에 닿는다.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설핏 입가에 웃음이 머문다.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벗고 활보 할 수 있는 이 집이 오롯이 나만의 공간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느끼는 이 감정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쨌거나 되도록 서로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그날 이후 나와 아버지가 살아가는 방식이었으니 말이다.

뜨거운 물이 몸에 닿자 조금씩 정신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소리가 막무가내로 내 인생에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두 배쯤 지루해 졌다. 시간이 쭉 늘어진 슬로우 비디오처럼 천천히 지나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은 병원에서는 나의 이런 증상을 간단하게 불면증으로 진단했다. 주절주절 ‘소리’에 대해서 떠드는 일을 하지 않았으니 충분히 예상 할 수 있는 결과였다. 내 증상에 대해서 의사에게 그대로 말했다면 정확한 해결책을 제시 해주었을까. 처방해준 수면제를 삼킬 때마다 매번 떠오르는 의문이었지만 항상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맞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소리의 존재에 대해 느껴보지 못한 사람에게 그것에 대해 이해시키는 것이 벽에 대고 이야기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내 이런 생각 때문인지 의사가 처방해준 수면제는 효과가 없었다. 몸에 묻은 비누거품을 씻어내며 오늘 하루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떠올려 본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르바이트를 가기 전에 해야 할 일들이라는 말이 맞겠다. 무엇을 할까 한참을 궁리를 하다가 핸드폰을 들어 H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 그를 찾곤 했다. 한 때 나는 h를 이 집 끝에서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나를 구해줄 구원자로 여겼던 적이 있었다. 서울의 중위권 대학에 나와 제법 튼실한 중소기업을 다니고 있는 H와의 결혼을 통해 이 집을 나가는 생각을, 그리고 그가 가져다 줄 새로운 세계를 그와의 연애 기간 삼년 간 꿈꿨었다. 하지만 그가 선본지 두 달 만에 다른 여자와의 청첩장을 담담한 표정으로 건네는 것으로 그 동안 꾸었던 시간은 무참히 부서져 버렸다. 신호음이 울린 지 얼마 되지 않아 H가 건조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꽤 오랜만에 하는 통화였지만 그는 안부를 묻는 대신 그의 회사 근처 모텔로 나오라는 간단한 용건으로 통화를 마쳤다. 내가 그의 회사로 가기 위해서는 꽤 먼 거리를 가야 했지만 그와의 연애에 있어 항상 불리한 쪽은 항상 내 몫이었기에 그런 것쯤은 이미 익숙해 졌다.

 

익숙한 복도를 따라 h가 말한 모텔 방 호수 앞에서 벨을 울린다. 벌컥 방문이 열리더니 h가 내 손목을 세게 잡아당긴다. 그리고 성급하게 옷을 벗겨 낸다. 그와의 만남은 보통 이런 식으로 진행 되곤 했다. 연애 초반에야 다른 연인들처럼 영화관도 가고 밥도 먹으며 데이트 비슷한 것들도 하곤 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H와의 만남은 주로 모텔에서 이루어졌다.배가 고프면 밖에서 떡볶이 같은 간식저리를 사오거나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고 그러다 몸을 섞고 헤어지는 것이 그들 데이트의 전부였다. 어쩌면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는 그와의 이런 반복되는 만남에도 나는 불평하지 않았다. 그가 내게 펼쳐 보여 주는 세계가 주는 편안함과 안정감이 나는 좋았다. 어쩌면 연애를 하는 동안 그가 보여 준 이런 느낌 때문에 h가 결혼한 후에도 종종 이런 식으로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동안 가슴 쪽을 더듬거리던 그가 내 속으로 들어오기 위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H의 동작에 맞추어 몸을 움직여 본다. 적어도 그와 몸을 섞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에 집중 할 수 있었다. 그것 하나만으로 그렇게 나는 연애 시절과 다른 것을 그와의 만남에서 얻어 내고 있었다. H의 몸이 잠시 부르르 떨린다 싶더니 이 내 내게서 떨어졌다. 한 동안 그와 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언제나 섹스가 끝난 후에는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오늘의 잠자리에 대한 느낌을 듣고야 마는 평소의 그 답지 않은 행동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급히 무슨 말을 꺼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가만히 H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그의 등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세월의 무게가 더해 졌다는 생각을 할 무렵 숨을 고르던 H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제 우리 다시는 보지 말도록 하자.”

그의 말이 물방울처럼 톡톡 튀어 귓가로 떨어졌다. h의 입에서 이별이라 단어가 처음 나온 말은 아니었지만 오늘처럼 목소리가 떨린 것은 처음이었다. 이제 정말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눈을 본다. 그 동안 우리가 보냈던 시간에 대한 미련인지 아쉬움인지 그의 눈에 잠시 반짝 눈물이 비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차피 예정된 이별이었다.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라면 최대한 침착하고 담담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동요 없이 평소 때처럼 샤워를 마치고 머리를 말리고 특별한 작별 인사 없이 문을 나선다. 내 등 뒤로 주절주절 아내가 임신을 했고 이제는 아이에게 충실한 아빠가 되고 싶다는 변명들을 쏟아냈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기로 한다. 내게 죄책감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면 애써 그것들을 면제해 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것은 그의 몫이다.

“넌 마지막도 참 재수 없다.”

그것은 H가 내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그의 마지막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직감했다. H가 한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한동안 혼란스러워 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02

습----딱 습----딱 습----딱

소리와 함께 복면의 남자가 내게로 다가왔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기에 잠시 멈칫했다. 저기 서 있는 남자가 소리가 만들어낸 허상인가. 아니면 실제로 복면을 쓴 남자가 내 방에 들어 온 것인가. 한동안 그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려 본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그와 나 사이에 흘렸다. 나도 모르게 주먹이 꼭 쥐어진다. 언제 남자가 공격해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습----딱 습----딱 습----딱

소리는 계속 되었다. 복면의 남자와 소리가 계속 되자 마침내 나는 남자가 소리가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소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다시 몸을 눕혔다, 그러자 남자는 내가 눕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 왔다. 온 힘을 다해 몸에서 그를 떼어내기 위해 밀쳐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흡사 물가를 떠나 땅에 떨어진 파닥 거리는 물고기의 모습 같았다. 나는 이 내 남자를 떼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소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로 한다. 내 움직임을 멈추자 남자는 서서히 손목에 힘을 뺐다.

“재수없어. 정말 재수없어.”

내 얼굴에 대고 복면의 남자는 H가 했던 말을 뱉어내며 클클클 웃기 시작했다. 갑자기 남자의 옷자락에 매달려 H가 그녀에게 그런 말을 했던 이유를 묻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 졌다. 며칠 간 h의 마지막 말이 지구 주변을 맴도는 위성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던 것이다. 클클클 남자의 웃음소리가 커지자 감았던 눈을 뜨고 남자를 노려본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보란 듯 내 머릿속에 손을 쑥 넣어 작은 덩어리 몇 개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치 빨래를 널기 전에 옷가지들을 털어 내 듯 그것들을 탈탈 털어내기 시작한다. 그녀의 머리에서 떨어진 기억들이 바닥에 흩어진다. 어떤 것들은 이미 내게 잊쳐진 채 검게 그을려 있었고 또 어떤 것들을 숨이 끊어지기 전 짐승의 모습처럼 거침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습----딱 습----딱 습----딱

소리가 점점 방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소리가 방 문 바로 앞까지 왔다고 느꼈을 때 거짓말처럼 벌컥 문이 열렸다. 누군가 방문을 여는 일은 매우 드믄 일이었다. 이 내 내 앞에 있는 남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어졌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방문 쪽으로 옮겨 방 문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한다. 소리는 멈춰 있었고 방문 앞에는 양말을 차마 방에 들어오지 못 하고 맨발로 서 있는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의 이런 방문이 매우 드믄 일이었기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른 채 몸을 반쯤 일으킨 후 아버지의 발만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리를 만들어 내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는 매일 아침 방바닥에 발을 습하고 붙였다가 딱하며 떼어 내며 거실을 걸어 다녔다. 물론 아버지는 그 소리 때문에 내가 얼마나 괴로운 시간을 보내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 또한 굳이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말 하는 수고를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아버지가 알게 되더라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노력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 아버지는 엄마가 떠난 직 후 그리고 나를 부산에 놓고 온 그날 이후로 자신의 인생에서 나의 존재를 지우려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쓰러진 나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 온 후도 마찬가지였다.학비를 내준다거나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비용정도는 매 달 통장으로 돈을 보내 주는 정도의 성의는 보였지만 말이다. 나 또한 내존재를 부각시키는 일 보다는 이 집에서 나의 정체를 지워가는 가는 방법으로 살아갔기 때문에 아버지가 딸을 잊고 지내는 것을 충분 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오늘처럼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오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기 시작한다. 먼저 말을 하면 지는 내기를 하는 사람들처럼 아버지와 나는 한 동안 꾹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없었기에 애써 입을 열어서 궁금하지도 않는 안부를 묻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저 아버지가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온 이유를 듣기 위해 참을성 있게 기다릴 뿐이었다.

 

“엄마가............죽었다...........하는 구나..........”

그리고 어머니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병원의 이름이 들리는가 싶더니 빠르게 아버지는 나가버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아버지의 빠른 리듬의 습-딱 소리가 더 낯설게 느껴졌으니 말이다. 밀려오는 피로감에 오랜만에 자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다시 잠을 청하는 대신 문을 빼꼼 열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내게 말을 걸 때 당황했던 모습은 어느 새 사라지고 태연하게 출근 준비를 하는 그의 모습이 다른 차원의 사람처럼 이물스럽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습----딱 소리와 함께 화장실에 갔고 습----딱 소리를 내며 주방을 갔고 습-----딱 소리를 내며 현관으로 가 꽤 큰 문 소리를 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버지가 나간 모습을 확인하고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아버지가 남기고간 흔적들을 지워 나간다. 식탁 위에는 아버지가 먹었을 것이 분명한 빈 밥그릇과 국그릇, 뚜껑이 닫쳐지지 않은 반찬통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몸을 빠르게 움직여 그것들을 깨끗이 치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여기저기 널려 있는 아버지의 옷들도 빨래 통에 넣고 마지막으로 집에 있는 창문들을 모두 여는 것으로 아버지의 체취를 날려 보낸다. 그제서야 그녀는 이 집안에 오롯이 혼자 남은 느낌을 받았다.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에서 몸을 움직여서 그런지 갑자기 밀려오는 현기증에 어지러움을 느낀다.옆에 있는 아버지의 침대에 팔을 대자로 벌리고 누워본다. 아버지의 체취를 날려 보내기 위해 집안의 모든 창문을 열었지만 그의 침대에 눕는 순간 그 모든 것이 다 소용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 봤자 아버지의 흔적을 이 집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사실 말이다. 몇 해 전 잠시 아버지 의 체취 위에 나의 흔적들을 남기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 둘이 한 식탁에 앉아 밥도 먹고 반찬 투정도 하고, 잔소리도 하면서, 남들처럼 살아가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매일 아침 그녀의 귀에 꽂히는 소리를 마주 하면서 그 생각은 점점 옅어졌다. 그러기엔 아버지와 나는 너무 멀리왔어. 그 중얼거림의 끝으로 아버지에 대한 생각을 엄마의 장례식에 대한 생각으로 바꿔본다.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엄마가 나를 매몰차게 버렸던 것처럼 나도 그녀의 마지막 가는 순간을 외면하는 것이 공평한 것 아닌가.

희미하게 떠오르던 엄마의 모습이 기억에서 선명해진다.

 

나의 엄마는 준비가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도망치 듯 집을 나가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럽게 자신이 떠나는 바람에 내가 혼란스럽지 않도록 충분한 시간을 가지며 배려했다.

“엄마는 네가 초등학교를 졸업을 하면 집을 나갈 거야. 그러니까 그 동안 너는 엄마가 없이도 혼자 사는 연습을 해야 해.”

아직 어렸던 나는 엄마의 말을 한 번에 이해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 날은 초등학교 입학식이었다. 이제부터 살아가야 할 새로운 세계에 대해 설레고 불안한 마음을 겨우 감당하고 있었던 딸에게 건네는 엄마의 말로서는 확실히 적절치 않은 말이었다. 이런 모든 마음을 담아 나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엄마는 나의 이런 표정이 무겁게 느껴졌을까. 저런 딸의 표정을 두고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을 아주 잠시만이라도 들었을까.

매몰차게 엄마는 내게서 돌아서 앞으로 걸어갔다. 엄마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왠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돌아와라, 돌아와라. 돌아와라’

다만 엄마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마음속으로 돌아오라고 외칠 뿐이었다. 내 마음이 엄마에게 닿은 것이었을까. 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벗어났던 엄마가 다시 돌아왔다. 손에는 닭꼬치 하나를 들고 말이다. 엄마는 말 없이 내 손에 닭꼬치를 쥐어주었다. 그리고 내 왼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예전 같았으면 수다스럽게 엄마에게 이런저런 입학식에 대해 재잘거렸을 테지만 집에 가는 내내 나는 아무 말 없이 닭꼬치를 뜯어 먹었다. 입 안에는 닭꼬치 특유의 달콤한 소스가 퍼졌지만 나는 그 것을 뱉어내고 싶었다. 만일 그날 입에 있던 그것을 뱉어내고 손에 있던 닭꼬치를 집어 던지고 떼를 썼다면 엄마는 나를 떠나지 않았을까.혹시 엄마는 닭꼬치를 먹는 나를 보고 내가 그녀의 생각에 동의 했다고 느낀 것은 아니었을까. 그 기억 때문이었을까. 십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엄마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소스가 잔뜩 묻은 그날의 닭꼬치가 생각이 났다.

그렇게 엄마의 손을 잡고 들어온 뒤부터 나의 하루는 두 배쯤 바빠졌다. 더 이상 그 동안 특권처럼 누리곤 했던 떼를 쓴다거나 어리광을 부리는 것은 내게 허락된 일이 아니었다. 대신 엄마가 없이도 불편함 없이 살 수 있는 것들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게 되었다. 누가 깨워 주지 않아도 알람시계에 맞추고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척척할 수 있게 되었고 밥을 고슬고슬 하게 짓는 방법과 몇 가지 찌개난 국은 거뜬히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밑반찬이 맛있는 반찬가게에 대한 정보라던지 각종 공과금을 내는 날짜와 은행 이용하는 방법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런 것들이 제법 익숙해 졌을 때, 어느 새 초등학교 졸업식이 다가왔다. 엄마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졸업식 날이었다. 아버지는 이 모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인지 졸업식에 오지 않았고 엄마는 큰 캐리어 가방과 꽃다발 하나를 들고 왔을 뿐이었다. 엄마 뒤에 커다란 캐리어를 보자 매일 상상만만 했던 그녀가 떠나는 모습이 현실로 재연되는 순간이 왔다는 것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엄마가 내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나는 받지 않았다. 엄마가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쯤에서 우리 헤어지기로 약속하지 않았냐며. 이젠 나와의 이별을 받아들일 시간이라고, 그 모든 말들을 담고 있는 표정이었다. 엄마가 다시 꽃다발을 내밀었다. 나는 어색한 포즈로 꽃다발을 받았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긴 졸업 축하한다는 말이 이젠 해방이다 라는 말로 들려서. 복도 끝에 부딪히는 엄마의 하이힐 소리가 아프게 귓가를 때렸기 때문에 나는 한번 잡아 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엄마의 뒷모습을 무작정 바라 보았다.

 

잠깐 잠이 들였다 싶었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 시간을 확인하는데 벌써 12시간이 지나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이렇게 푹 잠들었던 적이 있었던가. 무언가를 먹어야겠다는 냉장고 문을 열어 본다. 어두웠던 부엌에 냉장고 불빛이 펴지자 내가 아직 불도 켜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허기였다. 하지만 내 허기와는 전혀 상관없이 냉장고에는 먹을 만한 것이 없었다. 나는 그것에 대한 화풀이라도 하 듯 생수병을 꺼내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지금 당장 먹을 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허기는 더욱더 나를 거칠게 몰아 세웠다. 무엇을 먹을까 잠깐 고민하다 뜻밖에 엄마의 장례식이이 떠올랐다. 그냥 밥이나 먹을 겸 엄마의 장례식을 참석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장례식에 나오는 육개장에 하얀 쌀밥을 생각하자 어느새 입에는 군침이 돈다. 장례식이나 가볼까. 그런 생각을 하자 비죽 웃음이 나왔다. 지금 엄마에게 복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싫든 좋든 자신의 유전자를 담아 세상에 내놓은 딸이 아닌가? 다른 이유도 아니고 밥이나 떼우자는 생각으로 장례식에 가기로 결심을 한 이 꼴을 만일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 알게 된다면 꽤 약 오르는 일일 것이라.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 졌다.

장례식으로 가기로 결정 한 후 나는 잠시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을 했다. 엄마가 집을 나가 새로 만든 가족들에게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옷이어야 하고 혹시나 그들 중 나의 존재를 눈치 챘을 때 초라해 보이지 않을만한 옷이어야 했다. 그러자 지난 달 면접을 보기 위해 새로 산 검은 정장이 떠올랐다. 단정하게 머리를 하나로 묶는다. 평소 볼 살 때문에 다른 헤어스타일을 선택하지 않은 나였지만 오늘만은 머리를 묶기로 한다. 마지막 내 기억 속 어머니의 머리는 긴 생머리 였던 것이다. 비록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엄마였지만 조금이라도 본인의 닮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늦은 시간 찾은 장례식은 비교적 한산했다. 미리 준비했던 부의금 봉투를 함에 넣고 방명록에 무심코 내 이름을 쓰려다 요즘 한참 빠져서 보던 드라마의 여자 연예인의 이름을 써넣는다. 국화꽃 한 송이를 들고 엄마의 영정 앞에 선다. 사진 속 엄마의 모습이 초라해 보였다. 초라한 그녀의 모습을 보자 왠지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엄마의 불행의 원인이 내가 아니었다는 것이니 말이다.

상주처럼 보이는 오십대의 남자와 어색한 인사를 나눈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상주가 나와 엄마의 관계를 물으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을 했었는데 그는 그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는다는 듯 했다. 상주는 퍽 지루해 보였다. 이런 장례식쯤이야 얼른 끝나 버리면 좋겠다는 듯 그의 태도는 기계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육개장과 몇 가지 반찬들이 내 앞에 차려졌다. 조심스럽게 숟가락을 들어 육개장 한 수저를 입에 가져다 본다. 다른 장례식에서도 쉽게 맛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육개장 맛이었다. 그러나 하루 동안 비어 있던 위가 격렬하게 반응을 하면서 숟가락질에 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조용한 장례식장에서 게걸스럽게 앞에 차려진 음식들을 뱃속으로 우겨 넣는 내 모습은 이상해 보일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숟가락질을 멈출 수 없었다. 그때였다. 쑥 하고 내 앞에 물을 건네는 손이 있었다. 잠시 밥을 먹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 손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상복의 여자는 내게 자신이 누구라 굳이 설명 하지 않았지만 단번에 그 여자가 엄마의 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여자가 주는 물을 받아 마시자 빙그레 그녀가 웃어 보인다. 차가울 정도로 시원한 물이 위에 닿자 몸 전체가 서늘해졌다. 나는 그 물을 한 모금 더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가 내게 보여 주었던 그 마지막 뒷모습과 퍽 잘 어울리는 맛이었다.

 

03

 

습----딱 습----딱 습----딱

소리가 들리자 복면의 남자가 천천히 내게로 다시 걸어왔다. 평소의 나였다면 막연히 소리가 내게 가해오는 공격이 그저 지나가기를 기다렸겠지만 오늘만은 그 복면의 남자의 얼굴을 반드시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다가오는 속도에 맞추어 몸을 일으켜 본다. 그런 내 생각을 읽었던 것일까. 네 손으로 직접 복면을 벗기라는 듯 내 눈높이에 맞추어 그가 허리를 구부려 주었다. 머뭇거리다 천천히 복면을 벗겨낸다.그것이 벗겨지자마자 제일 먼저 복면 속에 고정 되어 있는 긴 머리가 쏟아져 나왔다. 복면의 정체를 내 눈으로 확인하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왜 나는 복면을 쓰고 나타나는 저 사람을 남자라 생각한 것인가. 복면 속 그 사람은 내 모습과 꼭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습----딱 습----딱 습----딱

소리는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복면을 하고 있는 그 사람을 꼭 껴안는다. 차가운 온기가 전해져 오는 것이 느껴진다. 눈앞에 여자의 지나온 세월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나는 이제 정말 나만의 완전한 공간을 갖고 싶었다. 밖의 기척에 온 신경을 쏟으며 그 존재가 커질수록 점점 자신을 작게 만들어야 하는 삶이 아니라, 자는 동안 온 몸을 헤집고 다니는 소리의 침범이 없는 그런 공간이 나는 필요했다. 저 소리를 없애 버리겠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그 말을 내 뱉으며 무언가에 이끌려 부엌 쪽으로 걸어간다. 아버지는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잠시 동작을 멈춘다. 이 시간에 그것도 저렇게 큰 보폭으로 움직이는 나를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한참 부엌 서랍을 부산스럽게 뒤적거리던 내 손에

칼 한 자루가 잡힌다. 내 손에 잡힌 물건을 확인하려 앞으로 걸오오던 아버지가 걸음을 멈춘다. 내 손에는 식칼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그 식칼은 그를 향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오직 소리를 없애야겠다는 생각 뿐 이었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나를 말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듯 싶었다. 저 식칼이 그의 살을 뚫고 내장을 날카롭게 관통하는. 그래서 이 집안에 그의 피가 사정없이 튀고 자신의 유전자를 받고 태어난 딸아이를 원망하며 죽어 가는 일은 그러니까 그런 엄청난 일은 확실히 아버지의 단조로운 삶과 어울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다급하게 내 이름을 부른다. 그것을 신호로 내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냥 소리가 없어지길 바랐을 뿐인데. 그래서 편히 자고 머물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말하려는 순간 눈을 질끈 감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천천히 아버지의 눈이 다시 뜨는 모습이 보인다. 그의 눈에는 아마 귀에 칼을 꽂고 쓰러져 있는 내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아버지가 허겁지겁 나를 업고 밖으로 뛰기 시작한다. 그의 등에 매달려 그녀가 힘겹게 눈을 떠 본다. 연신 무언가를 이야기 하며 입을 벙긋벙긋 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지만 아무것도 들을 수 없다. 멀리 언뜻 하히힐을 신고 앞으로 걸어가는 엄마의 뒷모습이 보인다. 빨라진 걸음 탓에 어쩐진 얼굴이 시려진 그녀가 아빠의 등에 얼굴을 묻는다. 이 것이 내가 찾던 완전한 공간이 아니었을까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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